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루카1장 26-38절

복음밥

강론

(9분 강론: 12:13 ~ 21:13)

강론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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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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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를 들려줍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로 시작되는 가브리엘의 인사에 마리아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응답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응답한 마리아의 순종은 세상 구원의 새벽을 알렸습니다.

지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미사의 제1독서로 우리는 창세기의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교부들은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하느님께서 뱀에게 내리신 이 판결을 오히려 세상 구원의 첫 복음으로 식별합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막혔던 세상 구원이 마리아의 순명으로 다시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순종은 구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온 세상의 구원은 마리아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에서 시작하여,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신 기도로 완성됩니다. 곧 이어질 주님 성탄을 준비하면서 우리도 세상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마리아와 같은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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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가브리엘 천사의 입장에서

     – 요셉 입장에서

     – 마리아 입장에서

2. 한순간의 결정이 나의 미래(사회에서나 신앙에서)를 180도 바꾸어 놓은 사건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과거에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그 요청이 “주님의 부름”이었나? 라고 생각나는 순간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나는 어떻게 응답하였나요?  긍정적인 응답을 하였다면 무엇이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긍정적인 응답을 하지 못하였다면 무엇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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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대 앞에 켜져 있는 네 개의 대림초는 구세주를 기다려 온 인류의 오랜 기다림을 상징합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구원의 통로가 막혔던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 계획을 예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마를 저주하시면서도 죄가 가져온 악을 없애 줄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제1독서에서 다윗 임금은 하느님께 영원한 왕좌를 약속받습니다. 다윗은 하느님께 화려한 성전을 지어 바치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왕좌를 차지할 다윗 가문의 메시아를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 왕국의 분열과 멸망을 보며, 약속된 메시아는 모든 민족을 구원할 인물임을 점차로 깨닫게 됩니다.

오랜 세월 감추어 있던 구원의 신비가 주님 성탄으로 온 세상에 환히 드러납니다. 하늘 위에서 내리는 이슬처럼, 의로움의 구름처럼 하느님의 구원은 강생의 신비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는 아무 준비 없이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구세주의 탄생은 온 우주와 피조물이 기다려 온 대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순종으로 구세주의 탄생이 이 세상 안에 실현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 가정과 이웃에 이루어지도록 성모님처럼 응답합시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 안에 탄생하시고 살아 계시도록 욕심을 비우고 죄악을 깨끗이 치웁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강론: 16:40 ~ 25:36)

♣복음말씀의 향기♣ No3714
12월24일[대림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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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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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s_2fsUmwNc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수도회(강화분원) 가경웅 제르마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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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두 팔 활짝 벌려 내려오시는 주님을 맞이합시다!>

올해도 성탄 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작년 성탄 피정 때 엄청난 혹한이 몰아쳐, 피정객들의 고초가 만만치 않았기에 올해는 정말이지 단단히 준비를 했습니다.

창문마다 뽁뽁이를 붙이고, 몇 차례나 난방 보일러를 시험 가동시켜 보고, 난방이 유난히 안 되는 침실에는 폼블럭도 붙여보고, 라디에터나 전기장판, 난방 텐트까지 설치했습니다.

이방 저방, 이 숙소 저 숙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손님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오르락내리락하던 중 갑자기 든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을 위해서도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는데, 우리의 창조주, 만물의 주님,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내려오시는데, 나는 과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성탄의 의미에 대해서 계속 묵상해봅니다.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간단한 것 같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우리가 너무 보고 싶어 우리를 만나러 이 세상으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이라는 것, 뭐 대단한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영성 생활이란? 우리를 향해 내려오시는 주님을 향한 인간 측의 호응, 위를 향한 발돋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다시 맞이하는 성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를 향해 내려오시는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무엇인가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감사의 선물도 준비해야겠습니다.

진지한 자기 성찰이나 솔직한 고백성사를 통한 마음의 정결도 준비해야겠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과의 연대와 나눔이라는 예물도 준비해야겠습니다. 두 팔 활짝 벌려 내려오시는 기쁘게 맞이해야겠습니다.

이번 성탄 육화강생하신 하느님, 키를 낮춰 작아지신 하느님을 따라, 우리도 키를 낮춰 작은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작고 가난한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춰야겠습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내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 미사 중 영성체를 하러 나가실 때, 여느 때 처럼 양 손을 펴서 교차시킬 것입니다. 우리의 그 손바닥은 다름아닌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구유가 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 위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누우실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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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
<(2)성탄은 오늘 우리 한 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은 다가왔습니다.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과 교우들을 위해 저희 살레시오회 앙헬 페르난데스 총장님께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희망이 되게 하는 믿음에 매료되었습니다.”

베트남 공산화 즉시 13년간 감금되셨고, 9년간 독방에서 생활하셨던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928~2002)의 말씀입니다. 추기경님의 간략한 말씀 안에는 힘겨운 한 해를 잘 견뎌낸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2020년을 마무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들어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는 엄청난 고통과 상실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정적,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될지 기약도 없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기 예수님의 성탄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성탄의 의미는 오늘 이 시대에 맞춰 계속 재해석되어야 하고 성찰되어야 합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로 오시는 은혜로운 대 사건입니다. 오늘 이 순간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사람이 되시고, 특별히 오늘 성탄절 날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의 어둠이 아무리 짙다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백성과 동행하시며 아픔과 상실, 고통의 순간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곧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때로 고통은 우리를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더 진지한 신앙 여정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토록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피조물을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의 외침, 6천8백만명의 난민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해야겠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탄절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입니까? 성탄절의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마음에 드는 성탄 선물, 잘 차려진 성탄 파티, 달콤하고 로맨틱한 성탄 구유와 전례 등등… 성탄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그러나 2천년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의 마굿간에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분위기는 비참하고 서글펐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사회적 상황 역시 암울했습니다.

하느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은 태평성대 때가 아니라, 가장 암울하고 어려운 시대, 로마 식민 통치 시대, 가장 불안한 헤로데 왕정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던 최초의 모습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처럼 강력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지혜로 똘똘 뭉친 현자의 모습으로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해결사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힘으로는 머리 조차 옆으로 돌릴 수 없는 갓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 인류 구원의 역사는 바로 오늘 우리 한 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 역시 이 어려운 시대,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각자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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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Zff-f2cx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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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긍정하려면 성당 다녀도 소용없는 이유>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거의 이단이라는 식의 카톡을 보내오는 분이 계십니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애 커플에게 축복해 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황님이 동성애나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집이나 차, 심지어 짐승이 사는 축사도 축복해 주는데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게 축복을 거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해있으면서도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예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축복받지 못합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보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다면 하느님 축복을 온전히 받으실 수 있으셨을까요? 즈카르야처럼 벙어리가 되든지, 부분적으로나 혹은 아예 축복받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축복받으려면 축복해 주는 이부터 긍정해야 합니다. 교회를 긍정하지 않고 교회보다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이가 어떻게 성체와 고해성사의 은혜를 완전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아프다며 돈 요구하는 집 나간 엄마, 도와드리는 게 맞을까요?’라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버리고 계속 돈을 요구하며 심지어 자살을 암시하는 말까지 하는 엄마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장훈 씨는 “평생 아무것도 해준 게 없으면서 고작 스무 살짜리 딸한테 겨우 석 달 생활했다고 천만 원을 내놓으라는 엄마가 사람이냐?”라며 크게 격분합니다. 이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너도 네 삶을 찾아.”라고 충고합니다. 사연자는 잘 받아들이고 기분이 좋아져서 떠났습니다.

위 청년 여자아이와는 다르게 욕만 먹고 간 예도 있습니다. 사연자는 14년 동안 서울 올라와서 한 달에 약 천만 원씩 열심히 일한 청년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속초 고향에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돈을 서울에서 더 벌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이 사람은 보살들이 하는 말을 다 튕겨냅니다. 사실은 어머니가 매우 아프신 것도 아니고 어머니 곁에 형도 있으며 자신이 자주 내려오는 것을 귀찮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요? 자기가 이런 처지라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어머니가 집이 세 채 있고 땅도 있는데 어머니를 설득하여 자기를 좀 도와주게 해 달라고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서장훈과 이수근은 “그렇게 답을 잘 알면서 여길 왜 왔어.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 지릅니다.

은총의 중개자 앞에서 자기가 옳음을 증명하려 한다면 상대를 은총을 주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총을 받을 수 없고 그러면 기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마태 16,24; 루카 9,23 참조)

그런데 여기서 “자기를 버리고”라는 번역은 실상 “자기를 부인하고”로 바꾸어야 합니다. ‘부인한다’(to deny)라는 말은 ‘자기가 옳지 않음을 인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옳지 않음을 인정하려면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긍정해야 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당신은 종에 불과하니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고백하는 ‘피앗’, 혹은 ‘아멘’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서 파견하신 천사를 긍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성체 앞에서 하는 “아멘!”은 사제를 통해 은총이 주어짐을 긍정하는 고백입니다.

어차피 은총은 순종과 함께 받아들여야 하기에 자기를 뱀과 같은 존재로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려는 사람은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를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체를 영해도 소용없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긍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그 태중의 아드님 또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나 주교, 사제들을 부정하면서 교회를 통해 주어지는 은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것이란 착각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파우스티나 성녀는 어떤 영혼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받았습니다. 그녀는 기도는 물론이요, 고행까지 하였습니다.  고해성사 때 이것을 사제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사제는 고행 대신 강생의 신비를 잠시 묵상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녀는 사제의 말에 순종하여 고행용 쇠사슬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희생 같지도 않은 것으로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묵상하려고 성당에 앉았을 때 예수님께서 이미 은총을 주었고 이는 고행 때문이 아니라 순종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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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의 허드슨 강을 건너는 것은 대부분 다리이지만 터널로 건너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터널이 ‘링컨터널’입니다. 터널은 어둡고, 터널은 좁고, 터널은 답답합니다. 하지만 터널의 끝이 보이면 점차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내 밝고 환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대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해 나아가는 ‘터널’과 같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지나온 터널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탄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깨어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적인 깨어남입니다. 우리는 이런 깨어남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구도의 길을 갈 때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대림 제2 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행동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만과 욕망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기와 질투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는 위로와 희망으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는 일치와 용서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교만과 욕망의 언덕은 겸손과 나눔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언덕은 인내와 관용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대림 제3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자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편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이들을 위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제4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순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 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았을 때는 낙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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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이미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을 앞두고 기다림의 자세가 더욱 열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번 주간의 독서는 우리에게 마리아의 태중에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도록 인도하고, 하느님의 약속이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사무엘기의 예언(2사무 7,11.13.14.16)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만이 나탄의 예언을 이루어줄 것이다. 예언서와 시편을 통해 이러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이사 11,1; 시편 88,4-5.29 참조)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의 인성 시작을 다윗과 연결하고 있고(루카 1,32-33 참조), 바오로 사도도 이러한 역사적 신앙의 자료를 말하고 있다(로마 1,3-4 참조) 여기서 모든 주도권은 오직 주님께 있으며, 하느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복음: 루카 1,26-38: 너는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으리라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이 말씀은 동정녀의 마음과 태중에서 실현되는 강생의 신비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모든 역사와 구세사는 나자렛의 한 처녀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에 동의하는 그 짧은 순간에 집중되고 있다. 마리아가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바로 그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동정녀시여, 속히 응답하소서. 천사에게 속히 응답하시고 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소서.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소서. 인간의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소서. 일시적인 말을 하시고 영원한 말씀을 받으소서.”(“Missus est”에 대한 설교 IV,8-9)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천사의 응답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5.37절) 또한, 마리아의 동정성은 예수님과 관련에서만 그 의미가 있다. 즉 예수께서 인간이 되시어 완전히 우리의 형제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인성을 갖춘 채 하느님의 참된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리아의 동정성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천사의 응답은 사막의 천막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구름 형상으로 나타나셨던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현존(참조: 탈출 40,34; 1열왕 8,10)을 상기시킨다. 바로 루카가 이러한 상징적 표현을 통해 예수의 존재적 기원이 하느님께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새로운 집, 새로운 성전이시다. 즉 아홉 달 동안 성령의 엄위로운 궁전이 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집이다. 이제 성탄의 신비에 가까이 들어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가르침이 여기에 있다. 즉 우리도 마리아를 지극히 풍요롭게 한 동정의 자세, 다시 말해 하느님의 주도권과 그 사랑에 대해 완전히 개방된 자세를 우리 마음 안에 갖추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내용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무상성이 마리아에게서 완전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창조적 힘을 지닌 무상성에 인간의 응답과 협조가 있을 때, 그 선물이 은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라는 응답이 은총을 세상에 들어오게 하였고 인간성이 새롭게 창조되게 하였으며 마리아 자신이 그 모범이 되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가장 위대한 일은 그리스도의 모친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고 있다.

마리아는 먼저 신비스러운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모친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즉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낳아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마리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제자가 됨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예수께서 태어나시는 삶이 되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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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주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 임금에게 내리신 말씀입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2사무 3,18; 7,5 참조) 다윗에게서 강한 후손을 일으키시어 다윗 집안의 왕권을 영원토록 굳건히 하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유다인들이 지닌 ‘메시아사상’의 토대가 됩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들 가운데 메시아가 나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리라는 믿음 속에서 그들은 다가올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제1독서의 말씀을 환기하며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드디어 실현될 때가 다가왔음을 선포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이 소식은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주어집니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게 될 아들이야말로 유다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곧 다윗의 왕좌를 이어받아 야곱 집안(이스라엘)을 다스릴 인물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불릴 것입니다.

나자렛이라는 시골의 한 처녀에게 예고된 메시지는 이처럼 놀라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오래전 주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 곧 다윗 집안의 영원한 왕권을 행사할 메시아의 시대가 마침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십니다.(2,31-32 참조) 그분의 이름은 ‘예수’, 곧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만민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가까이 다가온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그분께서 이루실 구원과 영원한 나라를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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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탄생 예고>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26-33)

천사가 찾아와서 메시아 강생을 예고한 일은, 성모님 혼자만의 체험입니다. 다른 목격자도 없고, 증인도 없습니다. 그 일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성모님께서 사도들에게 그 일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떠나간 뒤에 성모님께서는 천사가 찾아와서 전해 준 말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먼저 요셉 성인에게 알리셨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엘리사벳에게, 그리고 나중에 사도들에게도 증언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증언을 복음서 저자들과 신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들은 ‘첫 증언’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요한 1,36) 사도들 입장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먼저 들었고,ㅍ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성모님으로부터 그 증언이 옳은 것이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증언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시간적인 순서를 생각하면, 또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성모님의 증언이 먼저이고,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나중의 일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메시아 강생 소식’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신 ‘첫 선포자’이며 ‘첫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데, 요셉 성인과 엘리사벳과 사도들과 당시의 신자들은 성모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평소의 성모님의 삶과 신앙생활과 인품 때문일 것입니다.

‘빈말’은 전혀 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신앙과 생활이 완전히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에, 평소의 삶이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지만, 사람들은 성모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분이니까 믿을 수 있었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점도 중요하고,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하셨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첫 선포자’이며 ‘첫 증인’이신 성모님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는 점이 무척 중요합니다. 요즘에도 가끔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경우에, 그 주장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면 우선 먼저 그 사람의 평소의 신앙생활부터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언제나 항상 ‘증언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 덕분에 내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증언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증언과 삶이 일치되어 있어야 하고, ‘말’로 증언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증언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음 말씀의 본문에서 ‘여섯째 달에’라는 말은,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를 찾아간 뒤에 다섯 달이 지나고 여섯째 달의 어느 날에”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 사이에는 여섯 달의 간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시간표대로 일을 진행하셨을 텐데, 우리 입장에서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약혼할 때까지 하느님께서 기다려 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과 성모님을 함께 선택하셨고, 함께 부르셨음을 나타냅니다.

왜 요셉과 마리아인가?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긴 한데, 우리 입장에서는, “요셉 성인과 성모님이 신앙과 성덕에서 ‘가장 뛰어난 분들’이었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라는 말은, “그분은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되시고’ 라는 말과 ‘불리실 것이다.’라는 말 때문에, 태어날 아기가 나중에 메시아가 되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원래 메시아이신 분이고 원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잉태되시고 태어나셨습니다. <교리대로 표현하면,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속으로(‘나’에게로) 오신 날”입니다.>

‘다윗의 왕좌’는 메시아 왕국의 통치권을 뜻하고, ‘야곱 집안’은 ‘하느님의 새 백성’을 뜻하고, ‘그분의 나라’는 ‘메시아 왕국, 하느님 나라’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또는 기다렸던 이스라엘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입니다.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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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강동금 베드로 신부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즈카르야에게 보내어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셨습니다. 즈카르야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기를 밴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당시 갈릴레아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대받는 지방이었고 그 가운데 나자렛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복음 1장 28절)라고 말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사제 즈카르야에게 나타 났을 때는 인사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브리엘 천사는 나이 어린 처녀 마리아에게 인사를 합니다. 천사는 성령으로 인한 동정녀의 잉태를 말하고 엘리사벳의 잉태를 예로 들어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심을 깨우쳐 줍니다. 드디어 마리아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한 여인입니다. 복이 넘치는 여인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여 아기 예수님을 태중에 모셨습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모든 일에서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분께 순종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구유를 마련하고 아기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오랜 세월 감추어졌던 신비가 이제 때가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로마서 16장 25절-27절)

성모님께서 오롯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셨듯이 여러분도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여 살아가십시오.[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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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종섭 갈리스도 신부님]

<임하소서. 구세주여!>

구세주를 기다려온 인류의 오랜 기다림을 상징하는 대림 촛불을 모두 밝혔습니다. 구세주 오심으로 이 세상이 죄의 어둠에서 구원되는 성탄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을 향해 달려가는 기다림의 여정에서 우리는 성서 안에서 많은 인물을 만났습니다. 오늘은 메시아 탄생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 한 인물을 만납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인간적인 이해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입니다.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처럼 보이기도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입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했을까요?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불확실한 미래에 나의 삶을 내맡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아는 군말이 없었습니다. 불평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최고이며 그분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굳센 믿음이 있었기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밤길에도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자신을 내어 맡기며 발길을 내딛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삶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또 미래를 예상하지만 전염병 유행으로 우리 앞날의 불확실성은 높아만 가고 불안과 걱정, 좌절감이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힘든 인생길을 성모님과 함께 굳은 믿음 안에서 걸어갑시다. 가다 보면 어느새 불안과 두려움, 걱정들은 희망과 기쁨, 축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제 대림절의 남은 시간이 주님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데 보다 충만한 시간이 되도록 힘을 쏟아봅시다. 내 말을 줄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침묵 속으로 들어가 고요함 속에서 떠오르는 소리를 들어봅시다. 창가에 부치는 바람 소리, 바깥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해 맑은 소리, 나를 찾는 형제들의 소리, 속삭이듯 다가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 봅시다.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임마누엘 주님께서 어서 우리 마음의 텅 빈 구유에 찾아오시도록 기도합시다. 내일의 성탄절에 기쁨의 탄성이 모든 가난한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길 고대합니다. 임하소서. 구세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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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창훈 바오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우리 삶의 자리에 오신 정겹고 사랑스러운 하느님 불경과 속된 욕망으로 황폐화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간들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지혜를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임마누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깨달아갈수록 하느님의 배려가 얼마나 신비스럽고 구체적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 표현을 거창하고 요란하게 드러내시지 않고, 아주 정겹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심으로써 인간들이 하느님을 가까이하기에 쉬운 분으로 받아들이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유에 탄생하시어 초라하지만 가장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있으신 주님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구유를 관상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생동감과 사랑스러우신 모습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는 체험을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러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가는 힘든 길을 걸어갔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중에 베들레헴에 도착했지만 인간들의 욕심 즉,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마리아와 요셉은 거처할 장소가 없어서 마구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그동안 여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모두 사라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든든한 힘이 솟아오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거창한 모습은 아니지만 생활 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목동들에게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이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정겨운 주님을 만나서 용기를 얻은 목동들의 거친 생활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용기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광경을 관상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과 용기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도 정치 지도자들이 저지른 혼란 때문에 어지러운 상황이지만 우리를 삶의 근원에서 구원해주시고 힘을 주시는 주님께서 정겹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오시기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정겹고 사랑스러운 주님과 함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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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밤, 천사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달받은 이들은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벗어나 들에서 야영하며 양들과 지냈기에 몸에서 늘 가축 냄새가 배어 나던 이들입니다. 게다가 흙먼지로 불결하고, 초라한 차림으로 다니니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주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이들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여 사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하던 목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목자들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된 삶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비추어진 큰 빛이야말로 그들이 오랫동안 짊어진 멍에를 부술 평화의 한 아기의 태어남을 뜻한다고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의 천사도 태어난 아기로 말미암은 평화를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알려 준 아기는 “구원자, 주 그리스도”로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평화의 군왕”이십니다.

또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며 구세주 탄생의 신비를 더욱 확실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끝없는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뵌 목자들처럼, 세상 눈에는 변변하지 못한 인생일지라도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감이 이 밤에 절로 생깁니다. 평화가 끝없이 이어지기를 이 거룩한 밤에 오신 구세주께 은총을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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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에서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이 거룩하게 선포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는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1장 56절에서 중단된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와 관련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인구 조사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려는 복음서 저자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2장 7절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사용된 ‘첫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의 동정 사실을 입증하면서(1,34 참조), 태어난 아들이 천사의 예고를 완성하였다는 사실(1,31 참조)을 보증합니다. 더불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가 율법의 규정에 따라 하느님의 것으로, 첫째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권과 지위를 가짐을 의미합니다.(탈출 13,2; 민수 3,12-13; 18,15-16; 신명 21,15-17 참조)

예수님의 탄생 장소는 화려한 궁전도 부자의 저택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첫아들’이 태어난 곳은 마굿간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비천하고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비천한 신분을 대표하는 목동들에게 가장 먼저 선포되었습니다. 하느님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도 가난하고 겸손한 이가 되어 스스로 낮출 때, 구유에 누워 계시는 구원자 주 그리스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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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당구를 처음 배울 때, 얼마나 당구가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흠뻑 빠지다 보니 계속 당구만 생각나더군요.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천장이 당구대로 보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보지 못했던 천장의 무늬가 보이면서, 그 무늬에 따라 당구공이 배열되고 이를 어떻게 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교수님께서 강의하실 때도 칠판이 당구대로 보이고 교수님께서 움직이는 동선에 따라 흰 공, 빨간 공이 연상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통 당구 생각뿐이었습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특히 초보자일 때 그렇게 됩니다. 축구할 때, 공만 쫓으며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보자입니다. 그러나 실력자는 어떨까요? 주변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공을 처리할지 판단하면서 공을 찹니다.

이 세상 것만 집중하며 사는 모습은 초보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주님께서 도움을 주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 것만을 바라보며 앞으로만 달려갈 뿐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세상 것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실력자의 삶은 세상 것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면서 자신의 삶을 방향 짓습니다. 세상과 주님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이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실력자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탄생 예고가 성모님께 이루어집니다. 성모님께서 어떤 가문에 속해있는지,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아주 평범한 여인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은 평범한 사람이 사는 평범한 세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봐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봐야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일을 보신 분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남자를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처럼, 하느님의 일은 이 세상 안에서 언제나 가능한 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이 다가온다고 해도,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는 사람은 흔들림 없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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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응답>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응답>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시듯이


주님께
다가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듯이


주님을
바라보리라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듯이


주님께
말씀드리리라

주님께서
나를
느끼시듯이


주님을
느끼리라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듯이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나를
믿으시듯이


주님을
믿으리라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듯이


주님께
바라리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이


주님을
사랑하리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듯이


주님 안에서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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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정한 성탄 준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성탄 준비를 잘하고 계시죠? 성당 마당에는 이미 구유를 만들었고, 주변의 나무에는 반짝이 등을 달았으며 성탄 트리도 마련되었습니다. 합동판공 성사도 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성탄 준비가 끝난듯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준비를 통하여 내면의 거룩함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남은 시간 마음을 다잡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과 원한을 품은 채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기적이고 자만심이 가득 찬 마음이라면 아기 예수님께서 편안히 머물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서는‘성탄 준비 끝!’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식을 달고 집을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성탄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은총 잔치를 하고, 선물을 주며 성탄트리를 장식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깨끗이 정돈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께 대한 온전한 의탁의 모범이 되신 성모님처럼 성령께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성모님이시라면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거듭 태어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눈뜨는 성탄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ㅠ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1729년에 지어진 미국 샌디에이고 미션성당에 가시면 제단 정면에 양팔이 없는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은 항상 함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은총은 우리의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은총을 주시고,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천사를 만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인사말을 듣게 되었는데 몹시 놀라면서도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천사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는 메시지를 받고 마리아는“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묻습니다. 이 말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마음입니다. 결국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응답 없이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당시의 풍습대로 하면 돌팔매로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기를 죽이고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아니 우리를 위한 구세주를 세상에 낳아드렸습니다.

성경은“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일을 혼자 하시길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음과 순명의 모범 이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없구나’하는 이야기를 예수님께 하신 어머니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유를 달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이 술이 되는 기적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어부인 베드로가 밤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 ‘주님이 시키는 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고’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부라는 자존심을 내세웠더라면 능력의 주님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계산을 하는 한 그만큼 주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마땅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말씀대로 행하면 행할수록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어떤 처지가 되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종은 종입니다.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내 생각, 내 뜻을 접고 주인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흠승하라’ 하시면 흠승하고,‘원수를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핑계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예언자를 통해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자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리고 아버지께 효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손발이 되고, 눈이 되고 그분의 몸이 되어 주님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의 기쁨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어렵고 힘든 일, 곤란하고 궂은일에 기꺼이 나설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당신의 도구와 연장이 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응답하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아드릴 방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의 예수, 구세주가 되어야 이웃이 구원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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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겸손(信), 경청(望), 순종(愛)-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89,2ㄱ)

대림 제4주일 B해 미사중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시편 가사와 곡이 참 좋습니다. 오늘 산책중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목청껏 부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성탄시기 주일이나 축일등 한결같이 신바람나는 화답송 후렴이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 강론에 인용했던 원장 수사와 주고 받았던 메시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새 책, 좋은 책을 보면 참 행복해집니다.

“수사님이 부탁한 책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보기 위해서도 오래 살고 싶네요!”
“그러면 책을 컨테이너로 사드려야겠네요.ㅎㅎㅎ”

사랑이 가득 담긴 윗트에 얼마나 마음 따뜻했는지요! 바로 다음 저절로 떠오른 말마디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다!”

하느님을,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 날마다 주어지는 선물같은 날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이야말로 진정 삶의 의미입니다. 참행복도 바로 여기 주님과의 깊어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날로 깊어지는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얼마전 써놓고 행복해 했던, 겨울나무, 겨울땅을 보며 써놓은 “나 겨울에는”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푸른하늘 배경한
빛나는 배 열매들 가득 달린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들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밤마다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
꼭꼭 품에 안아 두었다가

봄, 여름, 가을
무수한 사랑의 꽃들 피어낼
텅빈 충만의
겨울 땅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겨울에는 동안거의 추위에도
따뜻한 봄이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가, 겨울 땅이 된다

나 겨울에는
이 행복에 산다
내 이름은 ‘이행복’.”-2023.12.3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한 동안거중인 배나무들 강추위 속에서도 흡사 따뜻한 봄, ‘겨울속의 봄’을 살아가는 듯 합니다. 문득 어제 강론을 읽은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훈훈한 덕담도 생각납니다. 얼마전 손수 뜬 털쉐타를 선물한 자매입니다.

“저도 책 한 컨테이너 추가로 사드리겠습니다.ㅎㅎㅎ”
“감사합니다! 마음에 사랑 담아 둡니다!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털쉐터 사랑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텅빈 가슴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르고 싶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화답송 후렴입니다.

도대체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는 맛이, 기쁨이, 재미가 없으면 하루하루 날마다 이 삭막한 광야인생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자주 고백성사 보속시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1-2)

어떻게 이런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겸손, 경청, 순종의 삶입니다. 믿음의 겸손, 희망의 경청, 사랑의 순종이니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은 신망애(信望愛)의 삶으로 직결됩니다.

첫째, 겸손(信)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겸손합니다. 겸손한 믿음(信)입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겸손한 믿음 없으며 서지 못합니다. 자기를 몰라서 교만이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수록 겸손해집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참으로 겸손한 분이요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한 분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함께 갑니다.

보십시오. 하늘 높이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천사를 통해 무명의 촌구석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 나선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문득 삼고초려(三顧草廬) 무려 세 번씩이나 제갈량을 찾아 나선 삼국지의 유비가 생각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나선 하느님의 그 간절함은 유비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을 찾아 그의 무지를 일깨워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 주도로 다윗을 이끌어온 삶임을 환기시킵니다. 1독서에서 다윗을 위해 하신 일들을 읽어 보십시오. 다윗 삶의 문장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줄줄이 이어지는 하느님 주어의 문장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알립니다.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결과입니다. 내가 살아온 것 같지만 하느님 친히 인도해주시고 이끌어 주신 삶이라는 자각이 참으로 겸손하게, 기도하게 합니다. 제가 요셉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우리 삶의 문장에서 주어는 내가 아닌 하느님이심을 깊이 깨달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없이는 참 겸손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둘째, 경청(望)입니다.
남말하기는 쉬워도 잘 듣기는 정말 힙듭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주님 말씀의 경청입니다. 희망의 경청, 겸손의 경청입니다. 겸손은 희망의 경청으로 표현됩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의 시작도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서에 참 많이 나오는 말마디도 “들어라!”입니다.

‘경청의 달인(達人)’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경청은 개방입니다. 침묵의 개방도 경청을 위함입니다. 주변에 활짝 깨어 열려 있는 침묵이요 경청입니다. 경청또한 훈련입니다. 평상시 경청의 훈련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 희망의 사람, 경청의 달인 마리아인지 깨닫습합니다. 참으로 눈밝은 하느님의 분별력은 정확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당신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경청의 마리아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속내를 다 밝히시니 그대로 전폭적 신뢰를 반영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다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주님 천사를 통한 주님의 은밀한 말씀들이요 한결같이 경청하는 마리아입니다.

셋째, 순종(愛)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을 때, 희망할 때 순종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수록 이 진리도 깊이 깨달아 알 것입니다. 다음 마리아의 기념비적 응답은 늘 읽을 때마다 감동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대림 제4주일, 제대 주변을 환히 밝히는 4개의 대림 촛불이 마리아는 물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망애(信望愛)의 빛’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탄생이 임박함을 알립니다. 마리아의 자발적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주님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이 결정적 순간의 한번만으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마리아 성모님의 생애는 말그대로 순종의 여정이요 “예스맨(Yes-Man)”으로 일관된 삶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아드님을 내려 품에 안을 때의 피에타 성모님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케노시스 비움의 절정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이요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랑의 순교자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그러니 대림 제4주일의 주인공은 우리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믿음의 겸손과 희망의 경청, 그리고 사랑의 순종의 삶을, 시종여일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사셨던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겸손과 경청, 순종의 삶을, 믿음과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충실히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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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씨 집안>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오늘 사무엘기는 다윗이 말년에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하자 그럴 필요가 없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평생 전쟁만 하던 다윗이 말년에 적들을 다 물리치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되고 자기 궁도 잘 짓게 되었는데
하느님은 여전히 천막에 머무시니 그것이 다윗에게는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당신이 다윗 집안을 일으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집안이 하느님 집안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오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서이고, 요셉이 메시아의 양부가 되고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고 오늘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성당은 아니 지어드려도 된다고 하십니다. 대신 우리 집안이 하느님 집안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저의 경우 이제부터 김씨 집안이 아니라 하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요셉처럼 제가 낳은 자식이 없지만 하느님이 제게 맡기신 자식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키우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요즘 하느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젊은이들이 저의 아들딸이자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키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아들딸을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면 여러분도 하씨 집안을 일으키는 분들이 될 수 있는데 자녀 가운데 하나가 사제나 수도자 되게 하는 방법도 있고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자녀를 내 자녀로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봉헌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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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

<믿음의 순종!>

오늘 복음(루카1,26-3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엄청난 소식이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게 전해집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고,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처녀 마리아가 믿음의 순종으로 이 죽음을, 이 엄청난 일을 받아들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5-37)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순종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으로 마리아를 통해서 주님께서 탄생하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된 여인인 ‘주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 예언자와 나탄 예언자 등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된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십니다.

지금 우리 안에도 두려운 일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  조건없이 너를 용서하고 너와 화해하는 일, 치열한 세상 가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 등등.

바로 이러한 일들이 믿음의 순종 없이는 할 수 없는 두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아닐까요?

믿음의 순종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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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DbCqslpE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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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루카 1, 31)

기다림의
최정점에는
말하지 못하는
말씀이 드디어
우리를 위한
탄생이
되십니다.

말씀 뒤에
가장 좋은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얻고 탄생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름 아닌
말씀에서
태어나십니다.

말씀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말씀의 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바쳐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중심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사랑에 순명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길을 찾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탄생으로
친히 길이
되어 주십니다.

생명의
시간으로
들어오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마리아가
걸어온
그 길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구원의 신비가
탄생의 계시로
우리에게
선명히
드러납니다.

말씀의 역사가
탄생의 역사입니다.

받아들여야 할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탄생입니다.

말씀의 선물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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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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