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 1-4; 4,14-21 (하느님의 말씀 주일);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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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1,1-4; 4,14-21 1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2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3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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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기름부음받은이’를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시며,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당신을 파견하셨다고 선포하십니다. ‘기름’은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도 성령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기에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거저 주어지지 않고 ‘일(사명)’과 함께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시며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셨습니다. 부모가 아기에게 사랑을 부어 주면, 아기는 부모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는 이들도 그 성령을 주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몸의 여러 기관들의 기능을 통하여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성령의 여러 능력을 통하여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라고 말하듯, 성령께서는 주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기쁨의 힘이십니다. 기쁨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갈라 5,22 참조).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기쁘게 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셨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도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언하되 기쁘게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 자체가 기쁜 소식이고, 그 기쁨을 전하는 이가 기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픈 그리스도는 없습니다.(출저: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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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세상에서 얻는 기쁨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어떻게 다른지 묵상해  보고 나는 미사 이외에 어떤 좋은 영적 습관을 가지려 노력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나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지나고 보니 “아 그게 성령의 힘이 아니였나?”라고 느꼈던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5.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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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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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에즈라가 율법서를 읽어 줄 때, 백성은 그 말씀을 들으며 울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과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그 죄의 결과에 대해서도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와 에즈라와 레위인들은 백성에게,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을 마련하시어 백성에게 당신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은, 그들이 그저 과거의 잘못에 좌절하게 하시어 그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한번 무너져야 했던 백성이 지금이라도 하느님의 말씀에서 힘과 용기를 얻어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는 그분의 배려요, 보살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슬퍼하지 말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하고 독려하면서, 오히려 맛있는 음식과 단 술을 마시며 기뻐하라고 독려합니다. 우리의 힘은 결코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날을 맞이하여 일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머물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우리의 생기를 돋우고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화답송).
오늘은 ‘주님의 날’, 주일입니다. 주님께 속한 시간입니다. 오늘 이 주일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새 힘을 찾아 얻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 미사가 끝나고 성당에서 돌아서면 다시 똑같은 일상이 이어져, 수많은 할 일과 걱정거리들이 엄습해 오더라도, 이 미사와 오늘만큼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한껏 즐기면서 그분 안에서 충분한 휴식을 갖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기쁨이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무한한 힘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일) 집회에 가서 나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주님의 날』, 46항). 참으로 우리는 주님의 만찬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출저: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4108
1월19일[연중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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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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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x7_QwdTZMso
[서울대교구 임민균 그레고리오(서울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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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신앙도 성모님의 신앙처럼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카나 혼인 잔치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성모님 사이의 대화는 너무나 많은 복선과 의미가 깔린 내용이기에 잘 새겨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드린 청부터 좀 이상합니다.

성모님은 평소 아들 예수님의 성숙한 동반자로서 부담을 주거나 분위기를 난감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합니다. 꽤 부담스러운 청을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성모님의 은근한 압박에 맞선 예수님의 대응도 만만치 않습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예수님께서는 아직 아버지로부터 공생활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은 세상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직 공개석상에서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었기에 어머니의 부탁을 넌지시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성모님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결국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완전한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계속 진척시킵니다. 지혜로운 어머니셨기에, 예수님께 또 뭐라 한마디 하면 서로 난감해질 것이 뻔하니, 이번에는 일꾼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어찌 보면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한 성모님의 권고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오늘 우리는 부단히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게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오늘 내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향해 사용하신 호칭, “여인이시여”라는 표현이 꽤 마음에 걸립니다. “여인이시여”라는 호칭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성모님에게 사용해 오셨던 호칭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에 성모님께서도 꽤 당혹감을 느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인이시여” 라는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제 예수님과 성모님 사이는 서서히 새로운 관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육의 관계를 넘어 영의 관계로 옮아가는 것입니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모자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이 시작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영적 여정 역시 가야 할 길이 꽤 남아있습니다. 성모님의 믿음 역시 더 쇄신되고 더 깊어져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으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아직도 세밀한 하느님의 계획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많게 하시는 기적을 통해 일단 성모님의 인간적 체면을 살려주시지만, 진정한 의도는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을 통해 기적이나 체면을 살리기보다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고 더 중요한 일이라는 강조하십니다. 성모님의 완곡한 청을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여인이시여”라는 호칭을 통해 살짝 거리를 두는 예수님의 모습은 성모님에게는 새로운 하나의 초대입니다.

‘어머니, 그간 저를 돌봐주시느라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떠나갈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잘 준비하셨으면 합니다. 이제 어머니의 신앙이 한 차원 승화될 순간입니다. 이제 인간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 육적인 관계보다는 영적인 관계, 세상적인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함축한 표현이 “여인이시여”가 아닐까, 하는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의 신앙처럼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처럼 역동적이어야 하고, 진취적이어야 합니다. 서로를 속박하고 자신 안에 가두어두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고, 서로를 키워주는 그런 관계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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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koLZyrbP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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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인 행동을 시키는 대로 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오늘 복음은 ‘카나의 혼인잔치’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내가 누가 되어야 행복해질까요? 예수님도 나오고 성모님도 나오고 종들, 혼인잔치를 맡아보는 관리인도 등장합니다. 오늘 가장 행복해진 주인공은 바로 종들입니다. 자신들은 그저 물을 떠 놓고 다시 가져다준 것뿐인데 과방장에게 대단한 칭찬을 듣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대해 복습해봅시다. 사람 대부분은 행복을 ‘소유’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돈이 행복입니다. 그러나 조사에 의하면 생존에 필요한 이상의 재산이 쌓이면 오히려 행복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타인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다. 자존심은 있는 대로 부리면서도 더 큰 좌절을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은 결국 ‘자존감’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상관없이 자존감이 높으면 행복합니다. 자존감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나는 돈 많은 부자야!’라고 아무리 자랑해도 자존감은 높아지지 않습니다.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쓸모가 없다고 여겨질 때 가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니 자존감을 높이려면 쓸모를 높여야 합니다.

쓸모는 ‘유익한 존재’입니다. 유익한 존재가 되려면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눈다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위해 일부러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예를 높이라고 명령한 대상은 ‘자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더 가지라고 한 뱀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선행으로는 ‘나는 쓸모있는 존재다’라는 자존감을 상승시킬 수 없습니다.

자아의 명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인을 바꿔야 합니다. 만약 자동차가 인간이라면 자동차는 누구의 명령에 따를 때 쓸모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만든 이에게 순종하는 게 자존감을 가장 높이는 일이 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이타적인 행동을 수행하면 그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존재로 여겨지기에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종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종들이 됩니다. 거기서 얻는 자존감은 멈추지 않는 기쁨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제작하기 전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영적 위기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안네 카타리나 에머리히라는 신비가 수녀님의 환시를 바탕으로 한 책인 ‘주님의 고통스러운 수난’(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이란 책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에 기록된 그대로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합니다. 하늘의 명령으로 여긴 것입니다.

깁슨은 이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재정적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 영화는 논란이 많았고, 주요 영화사들은 종교적 주제와 아람어, 라틴어, 히브리어 사용 때문에 지원을 꺼렸습니다. 깁슨은 약 3천만 달러(약 450억)의 자기 재산을 투자해 영화 제작과 마케팅을 진행했으며, 사실상 자기 경력과 재정적 안정을 모두 건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6억 달러(약 9천억) 이상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재정적 성공을 넘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수많은 사람의 삶에 감동을 주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우울증을 극복하고 기쁨을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라고 한 성모 마리아의 명령을 따릅니다. 신자들이 십일조로 바치는 빵과 포도주를 제대 위에 올려놓고 다시 신자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럼으로써 신자들이 참 포도주를 마셨다는 증언을 듣습니다. 사제는 자신도 모르게 빵과 포도주를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사제로 사는 삶 자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자존감에서 오는 행복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이런 카나의 기적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정결례 항아리에 물을 부을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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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사목회 송년 모임 때입니다. 한국에서 보내준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영상의 내용은 봉사자의 자세와 믿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4분가량의 영상 중에 제게 큰 울림을 준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 있는 사람에게 직분을 맡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택한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능력을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평소에 많은 능력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봉사자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봉사자는 능력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위로와 용기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과 방송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중학생 때 신문 배달을 해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교구장님은 제게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코로나의 힘든 시기를 견디며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제게 능력을 주셨고, 좋은 직원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노래방에 가면 18번이 있습니다. 늘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가수들도 18번 노래가 있습니다. 조용필의 노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입니다. 이선희의 노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아 옛날이여!’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이 무명의 시대를 벗어나 인기가수로 발돋움한 노래입니다. ‘아 옛날이여!’는 제가 군대에서 듣던 노래입니다. 군대에서 기상 음악으로 선임들이 ‘아 옛날이여’를 틀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알 수 있게 해 준 노래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잘될 거야!”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책임하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고, 넘어야 할 산도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 잘될 거야!”라는 말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의 18번은 무엇인가요? 저는 최성수의 ‘해후’를 좋아합니다.

2000년 전입니다. 가나에는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하객들은 많이 왔는데 잔치에 준비한 포도주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를 많이 준비하지 못한 것을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혼인 잔치의 주인을 탓하였습니다. 그런 비난과 평가는 혼인 잔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혼인 잔치에 필요한 포도주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에게 이야기합니다. ‘혼인 잔치에 필요한 포도주가 부족합니다.’ 마리아는 지난 과거에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들 예수님에게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은 포도주로 만들었습니다. 혼인 잔치는 성대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혼인 잔치에 대해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는구나!” 정말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저의 큰형은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글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음악도 잘해서 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형의 예술적인 재능이 부럽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작은형은 운동 신경이 좋았습니다. 체격도 좋았고 양복을 입으면 잘 어울렸습니다. 싸움도 잘해서 형과 다니면 걱정이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30분을 통화하는 가족은 동생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동생에게 이야기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큰형처럼 예술적인 재능이 없었기에, 작은형처럼 좋은 체격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처럼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저를 ‘미운우리새끼’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도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꽃밭을 꾸미는 아름다운 꽃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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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으로 알려진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의 시작점은 성모님이십니다. 먼저, 성모님께서는 혼인 잔칫집의 곤란함을 재빨리 알아차리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잔치에 즐기는 이로 계셨는지 아니면 일손을 보태어 돕고 계셨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뒤에 일꾼들을 부리시는 그분의 솜씨로 보아 잔치 준비에 큰 도움을 주고 계셨겠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어서 성모님께서는 그 집의 곤란한 사정을 아들 예수님께 신속히 알리십니다. 성모님의 역할은 중재자이십니다. 곤란한 이의 사정을 아들 예수님께 부지런히 전달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그러나 신뢰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실망하시지 않고 일꾼들에게 이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예수님의 뜻을 따르시면서도, 예수님께만 신뢰와 희망을 두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음을 밝히시며 거절하시고도, 어머니의 의탁과 간절한 희망을 보시고는 그 때를 앞당기시어 당신의 계획을 바꾸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시간을 내는 것이며, 필요하다면 그를 위하여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는 것’이라는 점입니다.(「모든 형제들」, 63.101항 참조)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당신의 계획을 내려놓으시고 응답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의 표징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이웃에게 시간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꼭 필요하다면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을 수 있는 관대한 마음, 열린 마음, 흔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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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1: 카나의 혼인 잔치: 첫 번째 기적

오늘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부부관계처럼, 당신의 교회를 아내처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다. 여기서 또한 마리아의 역할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사야서는 키루스의 칙령(BC 538/37) 후에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재건되는 새로운 예루살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혼례식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하고 있다.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 이야기는, 혼인에 대한 축복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맺으실 혼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께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하셨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때는 아버지의 뜻을 결정적으로 이루시는 십자가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열려 있다. 원문에 보면 그때는 본래 사흘째 되던 날이다. 사흘째 되던 날은 부활에 대한 어떤 암시적인 것이 있다. 또한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에서, 그 포도주가 그때까지 마셨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다는 사실에서 메시아가 와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의미를 알 수 있다. 많은 예언서에서 이 종말에 대해서 모든 결실이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쳐흐르게 되리라고 한다.(참조: 아모 9,13-14; 호세 14,7; 이사 25,9-10; 55,1) 카나의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는 새로운 구원의 장이 열리고,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신비스러운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그 카나 혼인 잔치에 마리아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모습은 들러리의 모습이 아니라, 결정적이고 능동적이다. “포도주가 없구나.”(3절)는 말로 예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시도록 하셨다.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되든지 간에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동참하는 사랑과 나아가 아드님까지도 그 일에 개입시키려는 그 노력이다. 즉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신뢰심의 태도이다. 이 신뢰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그 믿음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완전히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는 것은 거절의 의미로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때이며, 당신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가 있다. 당신이 끝까지 따르고 일치해야 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절의 뜻이 아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5절) 이 말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이 응답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탈출 19,8)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야 한다. 그때 우리는 구원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메시아적 포도주를 얻는다.

이 메시아적 포도주는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기쁨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함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세상을 위해 봉헌되는 잔치가 벌어질 갈바리오에 오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신비가 오늘 복음에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11절). 이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권능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기적 즉,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딱딱한 침대 위에서 혼인식을 치르게 되는 십자가의 기적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절). 그 기적은 신앙을 불러일으켰고, 그 기적을 더 큰 기적에 대한 표징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신앙은 참된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드님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신뢰심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우리가 만일 형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하여 그들의 기쁨 또는 고통까지도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각자가 받은 성령의 크고 작은 은총의 선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선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하여 쓰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1코린 12,7). 이 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가나에서 예수님이 잔칫집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신 자신의 신적 모성의 은총을 사용한 마리아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총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치르실 거룩한 혼인 잔치에 합당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갖고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총을 잘 사용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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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1)

1) 이 이야기는 이사야서에 있는 다음 예언에 연결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이 예언은 ‘메시아 시대의 참 기쁨’에 대한 예언입니다.

물론 ‘카나의 혼인 잔치’가 예수님께서 베푸신 잔치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를, 그것도 대단히 품질이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는 점에서, ‘메시아 시대의 참 기쁨’을 예고하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시는 메시아”라는 증언입니다.

2)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성모님께서는 바로 아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모르고 계셨을까? 예수님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 상황을 내버려 두셨을까? 내버려 두신 것은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려고 계획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알고 계셨을 것이고, 당신이 하실 일도, 또 일의 결과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뒤의 6장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요한 6,6)>

신랑에게는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체면이 손상되는 중요한 일이었지만, 사실 그 잔치는 그것으로 잔치를 끝낸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사사로운 잔치였습니다. <병자나 장애자를 고쳐 주신 일, 마귀를 쫓아내신 일 등과 비교할 때, 개인의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고 신랑의 입장을 걱정하셨습니다. 여기서 “포도주가 없구나.” 라는 말씀은, 기적을 일으켜 달라는 요청은 아니고, 상황이 그렇다는 것을 알려 드리는 말씀인데, 그래도 어떻게든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희망이 들어 있습니다. 기적이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든지 간에…

3) 여기서 “여인이시여”는 특별한 존칭입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씀은, 아직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뜻인데, 그 ‘때’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거절’로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바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거절은 아니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바라십니까?”와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으니, 저의 신원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기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 상황을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로 해석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은 공적인 기적이 아니라 사적인 기적이고, ‘작은 일’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과 제자들만 그 기적을 알고 있고, 잔치를 주관하는 이와 신랑과 다른 손님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일꾼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원래 없었기 때문에 그 기적이 믿음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신 그 ‘때’는 이 이야기 바로 뒤에 있는 ‘성전 정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4)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를 앞당기신 것은 아니고, 한 번 거절했다가 마음을 바꾸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머니의 요청 때문에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시거나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우리의 믿음은, 주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당신의 계획을 내려놓으시거나, 바꾸시거나, 취소하신다면,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주님’이라는 믿음과 맞지 않게 됩니다. 11절의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라는 말은, “제자들은 그 기적 덕분에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믿음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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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허병도 스테파노 신부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사건이 선포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제자들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만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제 생각엔 아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잔치에 신이 나서 부어라 마셔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잔치에 술이 떨어졌다는 것은 잔치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무심한 듯 말합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 예수님에 대한 성모님의 신뢰가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신뢰에 응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물독에 물을 가득 채우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번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포도주를 맛보고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라며 포도주의 맛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사건에 참여하고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티브이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마술쇼도 아니고, 또한 사람을 고치거나 사람을 되살리는 거창한 기적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물을 술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베풀어 잔치를 흥겹게 하신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어떤 행위나 특별한 동작도 없이 하인들을 시켜 물을 가득 채우고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었더니 어느새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첫 기적치곤 초라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은 우리들이 참으로 하느님께 바라야 할 기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부귀영화나 명예를 바라는 기적이 아니라 나 자신의 변화를 요구하는 기적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처럼 나 자신이 철저히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바라야 할 기적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는 아들 예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기적 사건의 동반자가 되셨습니다. 나에게 변화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성모님과 같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또한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한다면 올 한 해 성모님에 대한 엘리사벳의 다음의 말씀이 나에게도 울려퍼질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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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임태근 모세 신부님]

<내려놓음으로 전해 받는 은총>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은총은 언제나 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때로 우리가 손에 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을 돌아보면, 아브라함은 익숙하고 안전한 고향을 떠나라는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안정감을 내려놓았기에, 그는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 무엇인가를 붙잡으며 살아갔습니다. 장자권, 사랑하는 가족, 재산까지 모든 것을 움켜쥐려 했던 그가 마침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긴 순간,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의 축복이 그의 삶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성경 인물들에게도 되풀이됩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하며 자신의 부족함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응답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위대한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해 도망쳤지만, 그의 완고함을 내려놓자 닫혔던 니네베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회개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집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묵상해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2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1코린 12,7) 하느님의 축복과 은사는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선물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후손들에게 축복이 되었고, 모세와 요나의 변화는 백성과 도시를 살리는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불안, 욕심, 고집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통해 흘러갑니다. 빈 항아리에 물이 채워져 포도주로 변하듯, 우리의 마음을 비울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축복을 돌아봅시다. 그 은사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기억하며, 하느님께 맡기고 내려놓는 지혜를 청합시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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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재영 요셉 신부님]

<카나의 혼인 잔치>

이 혼인 잔치 장면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잔치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져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시에는 혼인식과 같은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야만 체면이 서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매우 큰 문제였습니다. 성모님은 아들인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시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하도록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어머니를 힐책하는 듯 들립니다. 그럼에도 성모님은 일꾼들을 불러 단호하게 일러둡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성모님의 말씀은 기적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혼인 잔치의 일꾼들뿐 아니라 복음을 읽는 우리에게까지 가르치는 것도 성모님의 이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의 현존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것은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가장 먼저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듯 대했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이 지닌 힘을 신뢰하십니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첫 번째 기적 사건에서 참된 신앙이시며 제자들에게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에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때’가 이루어지리라는 것,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영광스럽게 되실 것을 예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땅에서 들어 올려지실 때’ 성모님은 예수님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전조가 됩니다. 그리고 물이 변하여 된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선물이 되신 예수님 자신을 나타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일꾼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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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말씀(2025.1.18.연중제2주일)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2.3-5)

공생활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첫번째 기적을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행하셨습니다. 잔치 도중 술이 떨어져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된 주인의 황당한 처지를 여성적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알아차리신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께 부탁을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며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이르셨고, 부모님께 순종하시던 아들 예수님 또한 비록 ‘아직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행동은 성모님의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이든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술이 필요한데 물을 왜 부어라고 하는지 주님께 묻지 않습니다. 항아리를 물로 가득 채우고 그것을 과방장에게 날라 주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시키시는대로 믿고 따를때, 우리는 제각기 다른 성령의 선물을 받습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서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할 때, 우리 삶은 선물이 가득찬 가나안 혼인잔치가 됩니다.

물이 술로 변하는 기적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민감하게 공감하시는 성모님의 전구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빚은 선물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이루신 물의 변화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연약함을 온전함의 축제로 채워 주시려는 주님의 계획입니다.

때로 우리 안에 밀려오는 나태와 근심 걱정으로 마음에 의구심이 생길 때, 우리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얻은 주님 선물을 기억합니다. 그냥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주님을 따를 때 요구되는 우리의 단순한 마음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꾼입니다.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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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아이와 노인의 기억력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아이는 기억력이 탁월하지만 회상 능력이 없고, 노인은 기억력이 감퇴했지만 회상 능력이 있다.’

아이는 기억력이 좋아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겪은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하지 못합니다. 회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방금 전의 일은 잊어버리기 일쑤이지만, 긴 시간적 맥락 안에서 한 사건이 갖는 깊은 의미를 읽어냅니다. 회상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 기억은 가까운 것을 끄집어내는 활동이고, 회상 능력은 먼발치에서 대상을 지켜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전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단순 기억 능력은 떨어지고 회상 능력이 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나이 든 분은 단순 기억이 없어진다고 한탄하고, 또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의 단순 기억 능력의 떨어짐을 보고 무시합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저 역시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전체를 바라보며 의미를 찾는 회상 능력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순 기억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단순 기억만 쫓는 사람은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는 말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움이라는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첫 번째 기적이 모든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일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도, 중병을 고치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기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목격했던 것은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웠던 일꾼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기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단순 기억을 떠나 회상 능력으로 그 안에서 새로움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즉, 기쁨의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혼인 잔치의 삶처럼 당신과 일치해서 기쁨의 자리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삶이 매번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흥을 돋우는 포도주가 있어야 하는데, 포도주는 없고 물만 가득합니다.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초대하고 또 함께해야 우리의 삶을 흥이 가득한 기쁨의 자리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그렇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물이 주님을 통해 훌륭한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물독 속에 물을 채우듯이, 주님 마음에 우리 죄를, 우리 미움을, 우리의 부족함을, 우리의 이기심을, 우리의 상처와 저주와 분노 등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가장 훌륭한 사랑의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꾹 간직만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남들도 그렇게 한다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면서 주님 마음에 우리의 부정적인 그 모든 것을 담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단순 기억으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회상 능력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일꾼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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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아 나의 사람아>

요한 2,1-11 (카나의 혼인 잔치)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사람아 나의 사람아>

“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7)

사람아

그대의 삶에
그대를 채우시게

기쁜 그대뿐만 아니라
슬픈 그대까지도

믿음직한 그대뿐만 아니라
못미더운 그대까지도

희망하는 그대뿐만 아니라
절망하는 그대까지도

사랑 넘치는 그대뿐만 아니라
증오 가득한 그대까지도

열정적인 그대뿐만 아니라
무기력한 그대까지도

날아오르는 그대뿐만 아니라
추락하는 그대까지도

사람아

그대의 삶에
다른 누가 아니라
다만 그대를 채우시게

나 기꺼이
그대의 삶에 담긴 그대를
내 품의 나의 사람으로 만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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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섬세하고 사려깊은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바람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통해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의 바람을 넉넉히 채워주시는 주님과, 늘 옆에 계시는 성모님을 깊이 만나시길 바랍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혼인 잔치를 아주 장엄하게 치렀는데 일반적으로 일주일간 계속됩니다. 음식이 떨어져서도 안 되지만, 잔치 필수품인 포도주가 떨어지면 큰 망신입니다. 요즘 같으면 시장에서 금방 사서 대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예측하여 술을 담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곤란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술이 떨어졌음을 알아채고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하고 알리셨습니다. 여기서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하지 않고 “포도주가 없구나!” 한 것은, 성모님의 시선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난감한 처지에 빠진 신혼부부에게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려 깊고 섬세한 어머니이십니다.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사랑이 있으면 해결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핑계를 찾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문제만 더 커지고 시끄러워집니다.

오늘의 우리 나라 현실을 보십시오. 안타까움으로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모님처럼 접근해야 합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처지도 알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처지를 어머님께 있는 그대로 알려주십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하시며 아들 예수님께 전적인 신뢰를 보이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지 않고 다만 처지를 말씀드리고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주도권은 언제나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시고, 다시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시며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지 않으셨다고 하면서도 어머니의 말씀을 흘려보내지 않으시고 잔칫집의 곤란함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의 처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어머니의 배려, 당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사려 깊은 모습에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기적을 낳습니다. 사랑이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관심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마음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기에 아들에게 청할 수 있었고 기적은 이루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와 청원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함부로 쓰지 않으시고, 어떤 일을 하시든지 당신 혼자서 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협력을 바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이루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시는 기적을 이루실 때 물독에 물을 채우고,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우리를 위한 은총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의 협력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상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그분이 하실 일을 한다. 그리스도는 발이 없다. 하지만 우리 발로 사람들을 그분이 계신 곳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목소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 목소리로 그분이 죽으신 까닭을 말한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풍요로움은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 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두셨군요”(요한2,10) 하고 말한 과방장의 말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양에 있어서 풍부할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최고입니다. 차고 넘치도록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뜻에 협력하는 만큼 풍요로워집니다.

포도주의 기적은 단순한 기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표징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분께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표징을 말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전해 주고자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표징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에만 관심갖지 말고 그 기적이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쳐다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면 낭패입니다.’ 카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에서 잊지 말 것은, 6개의 물 항아리를 가득 채우시는 완성된 구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잔치의 풍성함을 유지 시킨 것은 성체성사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 풍요로움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삶을 꾸준히 엮어 나갈 때(갈라2,5) 우리의 삶은 또 하나의 표징이 되어 세상을 풍성한 잔치 장소로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 갈증도 살펴야 하겠습니다. 일꾼들이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항아리에 물을 붓자 비로소 기적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삶의 무기력과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혼의 항아리에 물을 부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려 애쓸 때 틀림없이 새로운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잔칫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초대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어머니께서 그 자리에 계셨기에 그 곤란함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안에도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되 성모님의 모범으로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성 베르나르도). 성모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견주어 마음을 성찰하고 그분을 담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마음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모님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내 삶의 자리에 늘 모시고, 예수님께 필요한 은총을 간구해 주시길 청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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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 과목 시험문제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내포하는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 였습니다. 한 학생의 답입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 이 학생은 영국 최고의 시인이 된 바이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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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영국의 낭만파 시인으로 유명한 바이런이 옥스퍼드 대학 종교학 시험을 치를 때의 일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라는 문제가 출제되었고, 학생들이 열심히 답안을 쓰고 있는데 바이런은 무슨 일인지 창 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담당교수가 그에게 최선을 다해 답안을 작성하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그는 시험 종료를 몇 분 앞둘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었지요. 이에 화가 난 교수가 백지로 제출하면 영점처리되어 학사경고를 받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더니 바이런은 그제서야 답안지에 단 한 줄을 적어 제출하고는 유유히 교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한 줄 짜리 답안지는 그 대학 신학과 창립 이래 최초로 모든 교수들을 감동시킨 전설의 만점 답안지가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고 합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우리는 지난 주에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덕분에 그분께서 몸을 담그신 물이 거룩해졌고, 그 물로 거행하는 세례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가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주님께서 그 물로 일으키시는 첫번째 ‘표징’을 보게 됩니다. 표징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세메이아’는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 혹은 표시를 가리키지요. 오늘 살펴보게 될 놀라운 사건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표징’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놀랍고 신기한 광경을 보여주시려고 오늘의 사건을 일으키신 게 아니라, 그 사건을 기점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이 시작되었음을 장엄하게 선포하려고 하신 겁니다. 카나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 그리고 제자들도 참석했는데, 잔치가 한창이던 때에 그만 포도주가 동나고 말았습니다. 이는 잔치를 주최하는 신혼부부에게 있어 큰 낭패이기에 성모님은 예수님께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조르지 않고 다만 신혼부부의 딱한 처지를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대하든 그건 아드님께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기도하되 응답의 주도권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 드리고 철저히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냉정해 보입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고 어머님과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이시지요. 이 부분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런 느낌은 더 강해집니다. “여인이시여, 당신과 제가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가련한 이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마음 따뜻한 분께서 어쩐 일인지 곤란에 처한 신혼부부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시는 겁니다. 게다가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도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렵지요. 휘슬 소리가 울린 뒤에야 시작되는 스포츠 경기처럼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당신 소명도 정해진 시간 이후에만 실행하실 수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의 때’는 당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드러나는 때이고, 그 때를 결정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올바르게 식별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그저 놀라운 사건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과 의도를 알아보고 따를 수 있을 때 주님은 당신 소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런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채신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이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 당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고 아들 예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시는 모습입니다. 명령이 있기도 전에 ‘이미 순명’하시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나서야 그분이 주님이심을 믿었지만, 성모님은 표징 없이도 이미 당신 아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고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시든, 심지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기로 결정하신다고 해도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루시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모님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리고는 얼마 뒤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의 두 가지 측면이 드러납니다. 첫째, 예수님은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이루실 능력을 지니셨지만 당신 혼자 일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를 도구로 삼아,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이루시지요. 둘째, 예수님께서 표징을 언제 어떻게 일으키시는지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분석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일꾼들은 물이 언제 어떻게 포도주로 변화되었는지 알지 못했지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의구심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뜻을 열심히 실천했더니 ‘어느 새’ 물이 포도주로, 그것도 과방장이 앞서 내어왔던 다른 어느 것보다 ‘좋다’고 인정할 정도로 맛과 품질이 좋은 포도주로 변화되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이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지는 자명합니다.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께 철저히 순명하며 그분 뜻을 열심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의 평범한 일상을 하느님 사랑과 구원의 표징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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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2,11)

예전 베트남에서 살 때, 제가 지도하는 양성자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저녁 다른 형제들과 함께 닥락으로 출발해서 다음 날 새벽 4:30분에 있었던 혼인미사에 참석하고, 다시 늦은 시간 그곳에서 출발하여 그 뒷날 아침 호치민으로 돌아왔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참석한 혼인미사였는데, 특이한 점은 함께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갔었지만, 장례나 혼인미사는 오직 본당신부 혼자 집전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도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요한복음 카나의 혼인 잔치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이란 신랑과 신부 별개의 인격체가 만나 함께 사랑의 모험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잖아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카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세상에 드러내려는 게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열린 카나의 혼인 잔치는, 바로 죽음을 통한 생명이 되살아난 날, 부활의 새날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는 부활의 새로운 사랑과 생명의 다른 상징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잔치입니다. 이 새로운 사랑의 잔치가 가져다준 기쁨과 환희의 순간에 우리 모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 바이런이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 카나의 기적에 관한 영성적 의미에 대해 논술하라」는 종교학 시험문제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바이런은 시험 두 시간 동안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답답해진 시험관이 답안작성을 종용하자 마침내 쓴 한 줄짜리 답안지가 바로 다음 문장입니다. 『물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얼굴을 붉혔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물동이에 조용히 담겨 있던 물이 갑자기 자기를 쳐다보는 예수님을 보고 “어머, 깜짝이야!” 하고 놀라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이보다 더 절절하고 더 아름다운 표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다렸던 주인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친 얼굴과 마음을 그려 놓은 듯합니다.

또한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열린 날은 카나 출신인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1,51)라고 말씀하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이고, 바로 이날 혼인 잔치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초대받으신 겁니다. 눈에 띄는 표현은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2,1) 하고 기록된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새로운 삶의 시작, 사랑의 출발을 상징하는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2,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초대받다, 는 말은 그리스어로 부르심을 받다, 소명을 받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혼인 잔치에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옛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혼인 잔치에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초대받은 분이 거기 있는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카나의 혼인 잔치는 세상적인 혼인 잔치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더 큰 사랑의 결합과 출발 곧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영적 혼인을 표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한 것처럼 지금껏 소박맞은 여인이며 버림받은 여인(62,4참조)처럼 살아온 우리네 인간 존재가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과 혼인하려고 초대받고 있으며, 혼인한 여인, 곧 신부로서 이제 우리는 하느님과 결혼을 통해 한 몸으로 결합될 겁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 우리는 하느님과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랑의 질서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겁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인 잔치에서 술은 잔치를 잔치답게 하는 특별한 음료이지요. 특별히 서양에서 포도주는 삶의 기쁨과 사랑의 행복을 고취鼓吹시키는 음료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가장 기쁨과 환희로 넘쳐야 할 혼인 잔치에 바로 사랑이 떨어진 것과 같은 겁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사랑의 소멸과 부재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더 이상 옛 질서는 사랑의 환희와 영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옛 혼인 관계는 더 이상 무의한 것이며 파경을 맞은 것입니다. 새로운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인간적 사랑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더 깊은 사랑의 차원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성모님은 바로 이 사랑의 없음, 텅 빔을 꿰뚫어 보셨으며 이를 채워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텅 빈 항아리는 오직 당신 아드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주님께 청원하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2,3) 그렇습니다. 우리네 존재의 무의미함과 텅 빈 사랑의 순간에 오직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예수님만이 비워진 항아리에 새로운 사랑을 기쁨과 영감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정말 뜻밖입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4) 주님의 대답 속에는 부모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단절하는 비인격적 의미가 담겨 있는 듯 보입니다. 어떻게 어머니에게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혈육의 관계를 뛰어넘는 영적인 새로운 가족 관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랑의 질서 안에서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가 되는 관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이런 말씀을 항상 믿음 안에서 받아들입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성모님은 인간적 이해의 지평을 넘어서는 주님 뜻을 늘 마음속에 묻고 감싸 품으십니다. 그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던 겁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하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며 사랑입니다. 성모님의 믿음과 사랑이 예수님께서 이제 하시려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겁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물독에 물을 채워라.”(2,7)라는 지시는 인간적인 사고를 한 차원 넘어서 그 사랑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순간입니다. 어떤 좋은 물도 돌로 된 물독이라는 제한된 틀에 고정돼 있으면 결국 썩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물을 그저 새 물로 바꾸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성찬례를 통해서 포도주가 주님의 거룩한 성혈로 변화되듯이 말입니다. 물이 변화되었습니다. 물은 본디 인간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재료입니다. 즉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인간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수거나 없애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가득 채운 새로운 사랑의 질서에서 나오는 변화시키는 힘과 만나게 함으로써 변화가 이루어질 겁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 자아로, 이기적인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으로 변화될 겁니다. 기쁨과 사랑에 흠뻑 취하게 하는 포도주는 주님 사랑입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마시는 겁니다. 새로운 사랑의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새로운 사랑, 곧 이웃을 사랑하라, 는 말씀을 실천하도록 그리고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남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부름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2,10)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고서는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주님 사랑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힘은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해서 좌절할 때, 자신의 부족함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 죄 없이 오해를 살 때 등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의 시간, 침묵의 시간에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믿음의 눈을 뜨게 하고,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빛 안에서 그 빛을 향해 걸을 때 시작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표징을 갈릴래아 카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질서의 첫 번째 목격자들이며, 사랑의 수혜자들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눈을 뜨게 되고 마음이 열린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체험한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고 주님께서 새롭게 선포하신 새로운 사랑의 질서를 목격하고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살았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주님 사랑을 마시고 사랑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갑시다. 자기 주인을 알아보고 얼굴을 붉힌 물의 자세와 마음으로 우리 역시 기쁨과 환희에 넘쳐 사랑으로 변화된 삶을 우리 각자가 받은 은사를 통해서 세상에 사랑을 증거하도록 합시다. < “물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얼굴을 붉혔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아멘.”(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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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제 인생>
“맹물같은 일상을 기쁨 충만한 포도주 같은 일상으로”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드려라. 온 누리여, 주님께 노래 불러라.”(시편96,1)

주님을 만날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어둠은 빛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불신은 믿음으로, 미움은 사랑으로, 분노는 온유로, 불화는 평화로, 슬픔은 기쁨으로, 불평불만은 찬미감사로 변하는 기적입니다. 말그대로 운명이 바뀝니다. 이래서 한결같이, 끊임없이, 항구히, 간절히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16년 동안 독일의 총리로 봉사했던 메르켈 회고록을 다 읽었고 고귀한 인품에 감명받았습니다. 그 몇구절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훌륭한 품성과 감정을 보존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나라이자, 빛나는 문화적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세계에 개방적이고 다양한 문화적 숨결이 숨쉬는 독일이어야 합니다.”

“나는 항상 국가와 당에서 맡은 공직을 품위 있게 수행하고 싶었고, 언젠가 떠날 때도 품위 있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을 위한 봉사’가 내 임기전체를 묶는 대괄호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불만과 분노, 비관적 태도가 아니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접근해야 원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일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동독에서 살 때도 그랬고, 나중에 자유로운 이 땅에서 살 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회고록 마지막 부분입니다.

“민주주의 없이는 자유도 법치도 인권도 없다. 자유 속에서 살고 싶다면 안으로든 밖으로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혼자만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자유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참으로 비전과 신뢰의 정치가이자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이자 메르켈이요 이런 분의 ‘정치는 애덕의 최고 형태’라 정의해도 무방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어느 분야든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삶을 사는, 축제같은 인생을 사는 분들을 대하면 희망과 용기가 샘솟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제1독서 이사야서의 ‘새 예루살렘’처럼 고해인생이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품위 있는 축제인생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이 되리라.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살 줄 몰라 불행의 고해인생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의 축제인생입니다. 바로 혼인잔치같은 품위 있는 축제인생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카나의 혼인 잔치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가 상징하는 바, 우리에게 선사된 축제인생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 배경에 자리잡고 계신 주님이시기에 비로소 축제인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청하라!”입니다.
기쁘고 흥겨운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참 심각한 일입니다. 참으로 축하손님들 가득한데 술이 떨어졌으니 참 아찔한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맨먼저 알아챈 분이 마리아 성모님이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성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던 듯 합니다.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혼인잔치 같은 인생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늘 함께 하시는 성모님께 중재를 청하는 것이요, 성모님처럼 겸손히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아드님,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에 개의치 않는 성모님의 아드님께 대한 깊은 신뢰의 믿음이 감동적입니다. 혼인잔치의 포도주가 우리 축제인생에서 상징하는 바 무엇일까요? 모든 것 다 지니고 있어도 믿음이, 사랑이, 희망이, 기쁨이, 평화가, 감사가 없다면 참 삭막한 고해인생일 것입니다.

이 때에야 말로 기도할 때요 주님의 도움을 청할 때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대신 “사랑이 없구나”, “믿음이 없구나.”, “희망이 없구나.”, “기쁨이 없구나.”, “감사가 없구나.”, “평화가 없구나.” 깨달아 청할 때 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청이 참으로 간절하고 항구하면 주님께서는 적절한 때 은총의 선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둘째, “순종하라!”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일하십니다. 어머니 성모님의 아드님에 대한 철석같은 신뢰와 믿음은 일꾼들을 향한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말씀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자기의 때를 앞당기셔서 즉시 현장에 개입하시어 포도주의 기적에 앞서 절차를 밟으십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에 이어 일꾼들의 순종이 빛납니다.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돌로 된 물독 여섯 개 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하시니 그들은 곧 그대로 합니다.

마리아 성모님에 이은 일꾼들의 순종이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순종의 믿음이 만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입니다. 믿음의 기적, 사랑의 기적입니다. 비상한 순종이 아니라 각자 받은 은사에 충실하는 순종입니다. 바로 코린토1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울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은사를 주십니다. 지혜, 지식,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식별, 신령한 언어 등 참 다양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각자 받은 은사도 참 다양하며 이 은사에 따라 책임을 다하는 순종의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마리아 성모님이, 일꾼들이 아름다운 순종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때 주님도 우리에게 순종하십니다.

셋째, “기뻐하라!”입니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기뻐 환호합니다.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참으로 과방장의 유쾌한 착각이요 오해입니다. 과방장처럼 우리가 모르게 일어나는 기적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잘 들여다 보면 포도주의 기적처럼 삶은 기적임을, 사랑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할 수 뿐이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눈만 열리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적의 표징들이요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줍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유쾌한 기적이야기를 대할 때 마다 생각나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교 종교학 시간에 있었던 시험에 관한 일화입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의 기적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라.”는 문제였습니다. 최우수 학점을 받은 바이런의 답안지는 단 한 줄입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Water saw its Creater and blushed)

물이 주인 예수님을 만나자 기쁨으로 얼굴이 붉어졌다는 천재 시인의 기발한 착상이 우리의 맹물같은 마음을 기쁨으로 붉게 물들입니다. 맹물같은 무미건조한 일상이 성령의 은총으로 기쁨 충만한 분위기로 변함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은총의 기적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했듯이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맹물같은 우리 일상을, 우리 마음을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생명과 빛, 평화와 행복’으로 출렁이는 포도주 같은 일상으로 바꿔주십니다.

“주님의 영광을 백성에게, 주님의 기적을 만백성에게 두루 알리라.”(시편96,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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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기적은?>

오늘 복음(요한2,1-11)은 ‘카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행하신 첫 표징(기적)’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큰 낭패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구나.”(2,3)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4) 예수님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2,7) 하시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기적을 바라보면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는 말씀 안에 담겨져 있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성모님의 전폭적인 신뢰(믿음)’을 묵상해봅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믿음)가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회 신부님이신 ‘앤서니 드 멜로’ 신부님이 쓰신 ‘일분 지혜’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글이 ‘기적’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기적

어떤 사람이 스승의 뛰어난 명성을 직접 확인하려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당신의 스승께서 어떤 기적들을 행하셨습니까?”
그가 한 제자에게 물었다.

“글쎄요, 기적 천지지요. 당신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의 소원을 들어 주시면 그걸 기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 그걸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짤막한 글이 우리를 묵상하게 합니다.
‘기적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묵상입니다.

기적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기적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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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요한 2, 11)

삶이라는
기쁨의
잔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더 좋은 것만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변화의 때를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를
마련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끄심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어느 순간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우리의 믿음이
변화의 시작임을
깨닫게 됩니다.

변화된 삶은
더욱 깊어지는
고유한 맛
고유한 빛깔로
자신의 삶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드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어머니도
모두 변화의
산증인들이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믿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첫 기적은
변화된 삶의
기쁨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성장하는
변화이며
한계 속에서도
한계를 돌파하는
용기입니다.

채워야 할 것은
믿음이며

나눠야 할 것
또한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자리에
성모님이 계시고
제자들이 있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믿음을 떠나
맛볼 수 없는
믿음의 참된
맛입니다.

믿음의 맛은
가장 좋은
삶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믿음으로
변화되어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영광의
삶이길
온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모든 변화의
첫 시작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믿음의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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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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