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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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 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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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병에서 낫게 된 기적은 이렇게 짧게 표현됩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유일하게 병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람대로 병에서 치유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감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은 치유와 구원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을 수 없는 병에서 치유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이 곧장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가 구원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는 ‘감사’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많은 것을 청하지만, 그 기도와 청원이 모두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와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자주 체험하고는 합니다. 우리는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청하는 것에는 익숙하고 감사하는 것에는 더딘 우리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비와 감사는 하나입니다.
-허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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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사마리아 사람 입장에서
– 돌아오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
– 예수님 입장에서
2. 주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믿는지 묵상해 봅시다. 주님의 응답과 그 이후 나의 신앙생활에 대해 나눠 봅시다.
3. “거기에만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깊이 체험한 적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지금 나는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고 있으며, 그 사랑 안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나눠 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떻게 생활해야 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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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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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는 것 자체가 은총이란 말이 있습니다. 숨 쉬는 순간부터 내 삶의 한순간도 거저 얻어진 것은 없습니다. 돌아보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기적 같은 일들이 많았고, ‘살아 있음’ 그 자체가 감사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이 기적 같은 인생에 감사하는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과 분노로 탄식하는 순간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족보다는 불만에 더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었던 그들의 치유에 대한 간절한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시니 그분의 치유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한 사람, 그것도 ‘외국인’으로 표현된 이방인만이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젠가 다시 병들고 쓰러질 육체적 병의 치유가 아니라, 성실하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마음의 회개와 치유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은, 당장 나병이 나은 것에 만족하고 돌아간 다른 아홉에게 주어지지 않은 진정한 치유와 자유였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요르단 강에서 물로 씻기만 했을 뿐, 나병이 나을 것이라 믿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기뻐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약속된 땅에서 흙을 실어 가져가며 오직 주님께만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칠 것을 약속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마음의 회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오로지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374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군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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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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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8VNsY7CfR4
[군종교구 서상범 티토 주교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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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번만 생각을 뒤집어보십시오!>
예수님 시대 가장 고달프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단절된 나병 환자들의 고통과 외로움은 그야말로 사무쳤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일종의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일반인들의 구역에서 살지 못하고 성 밖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토굴을 파거나 움막을 짓고 산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나마 동료 나병 환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로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았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제나 레위인들은 본체만체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외침을 흘려버리지 않으시고 귀담아들으셨습니다. 그들의 절박한 처지, 오랜 고통의 세월을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그들을 지긋지긋한 고질병을 말끔히 치유해주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의 몸을 보여라.” 예수님의 그 말씀 한마디로 이미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되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을 한번 보십시오. 율법의 규정에 따라 그들은 민간인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그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예수님 귀에 닿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17,13)
주님의 자비를 부르짖는 나병 환자들의 마음가짐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지긋지긋한 나병만 치유해주신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봉헌하겠습니다. 주님의 둘도 없는 제자가 되어, 세상 끝날 때 까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은총을 입자마자,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의 결심과 다짐들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룰루랄라하며,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오직 단 한 명의 치유받은 사람만이 돌아와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배은망덕한 아홉 명의 행실 앞에 살짝 빈정이 상하셨던지 예수님께서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7-18)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주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신 무수하고 무한한 은혜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는 한 명 쪽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매일 선물로 주시는 폭포수 같은 사랑과 은총은 까마득히 잊어먹고,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아홉 명 쪽입니까?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실 봉헌은 바로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생토록 베푸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은 너무나도 당연히 감사여야 하지 않을까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일 아침 입을 열었을 때, 즉시 튀어나와야 하는 말이 감사의 말이어야 합니다. 찬미의 노래여야 합니다. 축복의 인사여야 합니다.
대체로 불평불만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말입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인생 저렇게 사나? 저 사람은 왜 나와 이토록 철저하게도 다른가? 내가 과연 언제까지 저 사람을 참아줘야 하나?
그러나 한 번만 생각을 뒤집어보십시오. 크게 뒤로 한번 물러나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선물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선물입니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보내주신 천사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필요한 태도는 존재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이웃에 대한 불평불만은 이제 그만 접읍시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로 우리 삶을 가득 채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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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82q6QCoG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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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원을 하나만 쓸 수 있다면?>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삶의 진정한 행복이 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깊이 성찰하고자 합니다. 재산이나 명예 같은 외적인 변화가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주는 행복은 3개월을 넘지 못하고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 부모가 행복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과 그분이 주시는 은총으로만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존감’이라고 하고, 이것이 우리 모두의 ‘기본 행복 수준’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의 가치를 깨닫는 ‘자존감’이 높아지는 동시에, 그것을 주시는 분에 대한 감사, 곧 ‘겸손’이 함께 커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치 은총을 담는 그릇과 같아서 그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은총은 청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마치 김치가 우리 삶의 은총이라면 김치냉장고가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으면 김치가 상해서 오히려 우리 건강에 좋지 않게 됩니다.
일본의 유명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은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그녀는 13세에 연예계에 데뷔하여 빠르게 톱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모델로서, 그다음엔 TV 배우로서, 그다음엔 가수로서도 노래를 부르자마자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이른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성공은 그녀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업계에서는 그녀의 안 좋은 인성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고, 급기야 2007년 한 영화 무대인사에서 기분이 “별로!”라는 발언(일명 ‘베쯔니 사건’)을 하여 대중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이후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나이 많은 영화감독과 결혼했지만, 당연히 그 관계가 오래갈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은총만 바라고 그릇은 준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시지만 감사하러 온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치유라는 기적 자체에 목적을 두었고, 당연히 자신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은총을 받기 전과 받은 후가 같아야 합니다. 똑같이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되고, 받기 전이나 후나 다 ‘감사와 찬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독이 되어 주님께서 계속 주실 수가 없습니다. 병이 치유되고도 감사하지 않은 나머지 아홉은 영혼의 나병으로 더 교만하여 하늘나라에서 더 멀어졌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누구나 겪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유학을 다시 나가라고 했을 때 마음 안에서는 큰 불만이 일었습니다.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데 또다시 외국인 학생으로 짓눌리며 살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결국 몸으로는 순종한다고 로마로 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 터키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바이러스가 들어가 한쪽 귀의 청력이 손상되었습니다. 결국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제야 잘 들을 수 있음에 단 한 번도 감사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데 교회에서 다 시켜주는데도 신세 한탄만 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은총을 충분히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감사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아내를 바꾸어달라고 청했다가 아내가 죽자, 사람들의 칭송을 듣고는 다시 살려달라고 청했습니다. 마지막 소원이 남자,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여라.”
우리에게 마지막 소원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바로 ‘겸손’입니다. 이런 마음이 은총을 받게 합니다. 겸손은 집을 짓는 바탕과 같아서 겸손이 없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는 세상의 성공한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가수 비는 박진영이 자신에게 “네가 아무리 잘 돼도 저 끝에 있는 막내한테, 세트를 만드는 망치질하시는 분한테 제일 잘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박진영은 비에게 성공이라는 은총을 주기 전에, 먼저 겸손이라는 그릇부터 준비시킨 것입니다.
메이저리거 오타니 쇼헤이가 경기장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 삼성 이재용 회장이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그리고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나는 미래를 알 수 없다.”라는 겸손한 자세로 장기 투자를 고집하여 노년에 더 큰 부를 이룬 것 모두, 더 큰 은총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겸손의 그릇을 키워나가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동네에 가끔 뻥튀기 장수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오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얼마나 큰 은총을 주실 수 있는지 몰랐던 거지요.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동네 아이들에게 공짜로 뻥튀기를 나눠준다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공짜라니!’ 하며 그냥 맨손으로 터덜터덜 나갔지만, 다른 친구들은 저마다 커다란 바가지나 대야를 들고 달려 나왔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저렇게 욕심을 부리다니!’
그러나 잠시 후, 저는 제 작은 손바닥에 몇 개만 받았을 뿐이지만, 뻥튀기 아저씨는 친구들이 가져온 그릇마다 가득가득 뻥튀기를 채워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 내가 주님을 알려고 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큰 은총을 받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한 소녀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구해줍니다.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말입니다. 나비는 천사로 변해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소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하자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고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임종 직전, 그녀는 행복의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속삭였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면 평생 행복할 거예요.’ 그때부터 나는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던 거야. 사실 천사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만족한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여정은 바로 이 행복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너는 내 피로 값을 치른 존귀한 존재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줍니다. 동시에,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더없이 작아지는 깊은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붙들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은총이 은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겸손’을 붙들고 청하고 끝까지 키워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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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집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8월에 한국에서 오신 가족입니다. 한국에서 어디에 사셨는지 물었더니 평창동에 살았다고 합니다. 제가 세검정 성당에 있었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세검정 성당에 있었고, 집 축성 받은 가족은 제가 떠난 뒤에 세검정 성당으로 왔지만, 같은 성당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웠습니다. 따님은 뉴욕에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뉴욕에서 있었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저는 5년 전에 뉴욕에 있었고, 따님은 제가 뉴욕에 살기 전에 이미 뉴욕을 떠났지만 그래도 반가웠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 축성을 마쳤는데 어머니가 딸의 집도 축성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딸에게 물어보니 좋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딸의 집을 축성해 달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고 합니다. 저는 이왕 왔으니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마트에 가면 원 플러스 원 행사도 하는데 좋다고 했습니다. 좋은 것은 자녀에게 더 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유명한 장군이었지만 나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엘리사를 만난 나아만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아만을 기억하는 건 그가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감사드렸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10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 모두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복음을 기억하는 건 치유된 10명 때문이 아닙니다. 치유된 나병 환자 중에 사마리아 사람이 있었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병이 치유된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영혼이 치유되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몸과 마음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앙인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전의 3단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빨간 불에는 서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만으로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교무금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는 신앙인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는 당연히 잘 지키고, 무리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 중간에 잠시 쉬고, 차량 정비를 자주 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을 하면 인생도 파랑 신호등처럼 늘 맑고 푸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 본당의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하는 분, 각종 피정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 소공동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급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운전, 몸이 아픈 이웃을 병원으로 모셔다드리는 운전,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태워 드리는 운전, 고장 난 차를 보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단순히 이동 수단이 아닙니다. 운전이 곧 선교이고, 운전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의 삶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삶을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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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우리 삶에는 다양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월급을 저축하면서 내 집 장만을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즐거운 데이트를 하려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멀리 여행을 가면서 비행기나 열차를 기다리기도 하고, 회사에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려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기다림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기다림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멀찍이 서서 소리를 지릅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고쳐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에게 가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너희가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 인사를 드리는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사를 베푸시고 기다리셨는데, 응답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결하다고 욕하였던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이 기다림에 응답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입니다. 병에 걸렸을 때, 금전적 어려움이 닥칠 때, 정신적 고통이 다가올 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 우리는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입니다. 하는 일이 잘 풀려서, 자격시험에 붙어서, 고통이 사라져서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의 이유로는 예수님을 자주 찾지만, 뒤의 이유로 예수님을 찾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기다림에 응답합니까? 모든 일에 주님께 응답하는 신앙인이 되겠다고 다짐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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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1. 감사로 드러나는 믿음
오늘 전례 독서의 공통 주제는 하느님의 은혜 앞에서의 감사와 믿음이다. 제1독서에서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병에서 치유되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고백한다.(2열왕 5,14-17). 복음에서 사마리아인은 치유를 받은 뒤 다시 돌아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으로써,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은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이다.”(Sermo 17,2) 따라서 감사는 신앙인의 삶 그 자체이며, 은총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다.
2. 믿음과 감사의 내적 연관성
예수님께서는 아홉 명의 유다인 나병환자와 달리, 외국인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치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감사로 표현되는 신앙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감사하지 않는 영혼은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아도 결코 충만함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감사하는 영혼은 작은 은혜 속에서도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본다.”(Homilia in Matthaeum 25,4) 즉,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은총을 ‘자기 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무상적 선물’로 받아들인다.
3. 감사와 성체성사의 신비
교회의 감사 행위는 성체성사에서 절정에 이른다. 실제로 Eucharistia라는 단어 자체가 “감사”를 의미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구세주의 파스카 신비가 성찬례 안에서 끊임없이 현존하도록 제정되었으며, 이로써 교회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은총을 끊임없이 감사드린다.”(전례 47항) 성체성사는 단순히 의무적인 전례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삶의 정점이며, 사마리아인의 감사 행위가 전례적으로 실현되는 자리이다.
4. 신앙인의 삶: 모든 것을 은총으로
오늘 복음은 또한 우리에게 경고한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처럼 은총을 당연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이를 분명히 한다. “우리는 믿음이 없어도 그분은 한결같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2티모 2,13)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결코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무상적이며 자유로운 사랑의 선물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대로, “은총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이다. 오직 감사만이 은총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응답이다.”(De gratia Christi, 8)
결론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라, 믿음의 구체적 표현이자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며, 성체성사의 감사 안에서 삶 전체를 감사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천 포인트
1. 작은 은혜도 당연시하지 않고 감사로 응답하자. 2. 성체성사 안에서 감사의 삶을 새롭게 하자. 3. 신앙의 본질은 ‘공로’가 아니라 ‘은총과 감사’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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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으로>
루카 17,11-19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믿음으로
부르짖습니다
당신 가까이
차마 갈 수 없어
멀찍이 서서라도
나를 향한
당신의 오롯한 눈길에
온 몸 깊숙이 스민
쓰라린 외로움을
벗어버리고
당신과 함께할 수 있으니
믿음으로
떠나갑니다
무엇 하나
바뀐 것 없이
나 그대로일지언정
나를 향한
당신의 따뜻한 말씀에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가슴 벅찬 희망으로
당신과 함께할 수 있으니
믿음으로
돌아옵니다
마침내 깨달은
처음부터 영원히
나를 위하여 마련하신
나를 향한
당신의 너른 품에
오롯이 스밈으로
나 참으로
있을 수 있도록
당신과 함께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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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몸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1-19)
1) 여기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입니다. 여기에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겠다고 약속하는 말씀도 하셨을 것입니다. 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간 것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은총을 받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갔다는 점에서, 그 병자들의 믿음은 요한복음 4장에 있는 ‘어떤 왕실 관리’의 믿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50-53)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는 점은 두 이야기의 ‘같은 점’인데, 왕실 관리의 이야기에는 치유의 은총을 받은 다음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있고, 열 명의 병자들 이야기에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없는 것은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아홉 명은 치유의 은총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로 그냥 가버렸지만, 그래도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까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씀만 하셨고,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겉으로만 보면 그 아홉 명이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도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고,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했고, 치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치유된 그 순간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렸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병의 치유를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가족에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 아홉 명이 잘못한 일은 무엇일까?
2)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라는 말씀은, 그 아홉 명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서운해서, 즉 당신에게 감사드리러 오지 않은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예수님께서 기다리신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상징과 같은 이야기이고, 복음서의 전체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해석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고 꾸짖으시는 것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진짜로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 아홉 명이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병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4-16)
이 말씀에서 ‘더 나쁜 일’은,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또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7) “몸만 생각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여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몸만 생각하고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왔다가 치유의 은총을 받은 뒤에는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그냥 미련 없이 예수님을 떠나버리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병자들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3) 누구에게나, 신앙인이라도, ‘몸의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니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몸의 병이나 고치자고 하는 생활이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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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감사함은 구원을 가져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희망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남에게 돌리고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운함이 앞섭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또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을 참지 못하고 불평불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아홉을 가지고도 열을 못 채운 것에 서운함을 지닙니다.
감사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거나 더 많이 갖게 되면,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갖지 못한 것을 불평하는 수준입니다.
2차원적인 감사입니다.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비교하되 더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3차원적 감사는 불행을 당해도,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악조건 안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조건부의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의 감사입니다.
전천후 감사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동굴 속에 지내면서 지은 시편이 있는데, 최악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사드리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드리며 그분 앞으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100)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116,12)
감사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요? 우리는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나병을 치유받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열왕 5,17) 감사함이 주님과의 만남에로 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법을 무시하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즉각 고쳐 주시지 않고“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떼를 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완전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아직 미숙한 신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병이 나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고친 분이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소외당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몸이 치유되었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는 것이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은총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만이 성숙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육적인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나병을 치유 받은 것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 사제를 찾아갔습니다. 병이 나아서 감사드리는 것보다 내가 이제는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 더 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깁니까?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고 있는지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 아홉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은 결코 마땅히 받아야 할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은혜를 당연하다고 생각 말고 받은 은혜를 통해서 감사를 드리고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 28,7)고 노래하였듯이 매일 매 순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5-17) “감사는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모쪼록 간절히 원하던 은총을 받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얼굴을 바꾸지 말고 감사함을 일깨우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남에게 베푼 것은 모래 위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겨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것은 잊고 베푼 것에 대한 위안과 보상을 기대하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 그리고 부모 형제 친척, 자녀를 통하여, 또한 이웃에게 받은 많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육체적 병이 나은 사람도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니 병이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함은 구원을 가져옵니다. 구원받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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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유현식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렸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고 격리된 생활을 하는 죽음과 같은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제에게 몸을 보이려고 가는 도중에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는 나병환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고통과 슬픔, 그리고 죽음의 삶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삶, 곧 생명의 삶으로 전환되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곧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라고 슬픔이 가득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의 기적의 지향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인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감사를 드리는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 곧 감사를 느끼는 사랑에는 구원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여 육체적 치유를 얻고, 그리고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은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또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은총으로 육신과 영혼이 온전히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당신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받고 다시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과 기쁨, 평화를 더 많이 받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이방인 나아만이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사 예언자를 통해 치유를 받은 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은 이제부 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감사를 드리는데, 이 말에도 감사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림은 우리가 다시 선물을 받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은총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때문에 받는 고통도 은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제2독서에서 그는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림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우리의 도리요 구원의 길이고 우리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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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기범 요셉 신부님]
<감사와 찬미의 시간 = 미사 참례>
이 세상은 문둥이라고 나환자에게서 인간의 생활 조건을 모조리 박탈하고 생존권마저 위협을 받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무시당하고 있다. 산(生)사형 선고를 받고, 인세(人世)에서 내쫓기고 있으니, 도대체 나환자는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살길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창피하고 치사스럽다. 이 원한을 피를 토하며 통곡하여도 몇백 번 죽음을 고쳐 죽어도 원통이 가시지 않을 것이며, 아름다운 인생과 인간에 대한 삶을 맛보지 못하고 슬픔과 치욕의 잘못 사는 처참을 더 계속하느니보다, 오히려 얼른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막힌 삶과 이별한 뒤, 저세상에 가서는 파랑새가 되어 보고 싶다.
문둥이 시인으로 알려진 故한하운(1920~1975) 선생의 비통의 글입니다. 그분은 훗날 자신의 비통함을 실은 ‘파랑새’ 라는 시(詩)를 짓습니다. 금수현이라는 분이 이 시에 곡을 붙인 파랑새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의학이 발전된 오늘날에야 나병은 치료가 어렵지 않은 병으로 취급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6.25 전후만 하더라도 나병은 본인에게나 가족에게나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절망을 주었던 (동서고금) 천형(天刑) 중의 천형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 환자 열 사람은 멀찍이 서서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소리 높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부르짖음에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자비를 입고 나서 주님께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자는 사마리아 사람(이방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여측이심(如厠二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측간(화장실)은 같으나 마음은 둘” 이라는 뜻으로,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 라는 말로 옮길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의 마음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또 신앙인답게 한결같이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모습, 그러한 모습 가운데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주일 미사 참례’ 입니다. 많은 신자가 쉽게 또 소홀하게 생각하는 주일 미사 참례는 한 주를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새로운 한 주도 당신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라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주일 미사 참례를 하면서 “하느님과 이웃” 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하느님과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이것이야말로 자비를 입고도 감사 인사드리러 오지 않았던 아홉 명의 나병 환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나(我)병 환자’ 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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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모든 것이 ‘당신 덕분’임을 고백>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당연하게 누리는 건강한 피부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 이들입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적인 고통과 하루하루 흉한 몰골로 변해가는 자기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정신적인 고통. 그 병이 옮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야만 하는 외로움, 사람들로부터 ‘괴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고 무시와 핍박까지 당하는 정서적 고통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가까운 곳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 희망이신 그분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치유해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병에서 낫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했으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아직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치유의 은총을 입으면 그것을 그저 신기한 ‘기적’ 정도로 여길 뿐, 회개를 통한 구원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을 염려하셔서 그들의 믿음이 숙성될 시간을 주신 것이지요. 마을로 돌아가는 그 시간 동안 그들은 하루하루 깨끗하게 변해가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자기 삶에 일으키신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닫고, 그분이 급격한 변화 대신 느린 변화를 택하신 이유와 의도를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 뜻을 천천히 곱씹어보고 음미하며 믿음의 참된 맛을 알아가도록 섭리하신 주님의 자상하고 섬세한 배려를 깨닫는 순간, 자연스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와 찬미가 흘러나오게 되겠지요.
그런데 아홉 명의 유다인들은 그런 예수님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립니다. 자기들이 수고와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찾아갔으니, 그분께서 자기들이 청하는 걸 들어주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 모습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남이 베풀어준 호의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그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며 서운해 하는 모습, 이미 누리고 있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당연히 더 받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억울해 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당연’이나 ‘우연’ 같은 건 없음을, 내 삶을 지속시켜주시고 보살피시기 위해 애쓰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내가 그로 인해, 그가 베풀어준 선의와 사랑으로 인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를 말과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또한, 그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고 적극적으로 고백합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런 마음으로 그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드린 것이지요.
그런 그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받은 은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그의 마음에 감사를 불러일으켰고, 그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 안에서 주님을 향한 그의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전적으로 순명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깊은 믿음까지 나아간 겁니다. 그 굳건한 믿음 덕분에 그는 육신의 건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거룩해져 구원에 이르는 문을 열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총 자체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그 은총을 베푸신 분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누릴 생각만 하지 말고, 능력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분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것들에서 감사할 이유를 찾으려는 마음가짐으로부터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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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7,19)
저는 수도회에 입회한 후, 1971년 5월 저희 수도회 신부님들 그리고 <피정의 집> 직원들과 함께 처음으로 소록도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방학 때 소록도 성당에서 머물면서, 과달루페 소속 멕시코 민 신부님을 도와 환우들과 더불어 지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다시 방문하면서 과달루페 신부님들, 그리고 오지리에서 파견된 큰 할매 마리안느와 작은 할매 마카렛을 (=현재 본국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 분의 젊은 나환우 형제들과 오래도록 관계를 이어 왔지만, 세월의 흐름처럼 다들 세상을 떠났고 다른 정착지로 떠난 이후 멀어졌지요. 훗날 제 아버지는 제가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한 소식을 듣고 걱정과 함께 굉장히 대견스럽게 생각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아직 나병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많았고, 감히 가고 싶지 않은 금단의 땅처럼 소록도에 가는 것을 다들 무서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만났던 소록도의 천사들과 나환우 형제들을 통해서 제 성소를 더 굳게 할 수 있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그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에게 이미 시작한 사제 성소의 길을 더 충실히 걷도록 자극하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치유 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이방인 한 사람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인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이니 루카 복음사가의 창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유대인 나환자들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는 당대엔 불가능하였지만, 현재 의학으론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의 나병환자처럼 우리는 삶에서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넘기에는 매우 어려운 여러 장애에 부딪히곤 합니다. 그래서 나병환자 치유는 나병환자만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불가능에 직면할 우리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처지에 있던 나병환자 열 사람이 이런 고통스럽고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극복할 수 있길 바라며,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7,13)라고 간청합니다.
사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호소하는 경우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께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님께 절대적 신뢰를 품고 있음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최고 의회에서 증언할 때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4,12) 주님의 이름 자체가 생명의 원천이며 구원의 능력이고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특히 나병과 같은 악성 피부병은 공동체에 끼칠 수 있는 전염성이나 발병 원인 때문에, 그 병에 걸렸다고 판단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여 일반 주거지역에서 떨어져 살도록 조치하였습니다. (민수5,2참조)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 나병이 지니는 이런 성격 때문에, 주님의 치유는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소외시키는 장벽을 허물어 버리는 행위입니다. 나아가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구별하는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치유 불가능한 병이 나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도 믿음이 있다면, 주님을 통해 그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목이 마를 때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한 잔의 물이지만, 더 근본적 문제는 물이 샘솟는 원천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치유 받았지만, 결국 1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는 복음의 선포 메시지가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10명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는 바로 신앙인 전체를 말합니다. 구원이 이미 우리 삶 안에 가까이 와 있지만,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많은 말 중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는 말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럽고 편안한 표현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는 풍요로움과 기쁨이 담겨 있어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삶, 그것을 입술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만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에게 베풀어진 치유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17, 17~18) 하시면서,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7,19)하고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알았던 그 외국인만이 예수님께 구원을 얻습니다.
저는 1977년 맨 처음 심장박동기 수술받고 난 뒤, 내 삶은 이제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한없이 감사하였지만, 잊고 살아오다가 어려운 베트남에서 살면서 모든 것이 다 은총이다, 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다시 감사합니다, 는 말을 되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참으로 감사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뿐이 아님을 깨달아 갑니다. 모든 것이 다 감사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명과 하루하루의 시간, 그리고 가족, 친지, 친구들, 능력과 재능, 이 아름다운 세상의 모든 하늘과 땅과 바다, 강이며 산들, 아름다운 꽃들이며 저 다양한 나무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 이 모든 것을 지금 내가 누리며 즐기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 선물입니다. 일상을 살면서 하느님께서 나병환자처럼 사람들과 의미로운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육적인 치료와 영혼의 치유를 통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화해와 친교의 은총과 은혜를 거저 베풀어 주셨음에 감사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그저 하느님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 말씀드리며, 기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일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며 기쁘게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로 베풀어 주시고, 눈길로 감싸 주셨음에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다 선물로 거저 받았으면서도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무감각해진 것이, 바로 감사하는 마음과 삶입니다.
열아홉 살에 뇌막염을 앓아 앞을 못 보는 중증 장애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배영희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 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분명히 이 시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사보다는 불평을 더 많이 합니다. 적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했던 이 시인 앞에서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번 한 주간을 보내면서, 진정 내가 감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놀라운 일을 합니다. 떠오른 빛나는 태양,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달, 소리 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 꽃들, 새들, 그리고 친구들, 부모님, 그리고 바람처럼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여 더욱 행복해질 겁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감옥에 갇힌 상태였지만 굳건히 복음을 전합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셨기 때문이며,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2,8~9)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1테살 5,18)
감사는 곧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상태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느낌으로 하는 감사와 의지로 하는 감사가 있겠습니다. 즉 쾌청한 날씨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물론 이마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일,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땐 오직 의지로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기도입니다. 이런 감사는 느낌이 아니라 신앙의 힘으로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사람들은 누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도함에도 응답받지 못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경우일지라도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 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 될 수 있습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남편이 미워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어려운 그 순간이든 그 시간이 지난 다음이든 신앙의 힘으로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게 은총이지요.
어원적으로 보아도 은총 charis과 감사 eucharistia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거저 베푸는 선물인 은총과 감사가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갚을 수 없는 사랑을 갚으려고 하기보다 다만 감사하라.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모든 것을 감사하라는 사도 바오로의 체험에서 솟아 나온 권고를 귀담아듣고 실천하는 이 한 주간이 됩시다. 여러분이 여기 있어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이 터무니 없는 이 은총에 흠뻑 젖어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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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믿고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과 ‘순종’, 그리고 ‘감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방 민족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야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사실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씻으라는 엘리야의 전달을 받았을 때 무시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화가 나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군님, 만일 엘리야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틀림없이 장군님은 그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 그러니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시지요’라는 부하의 말을 듣고서, 마음을 바꿔 엘리야가 시키는 대로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치유를 입은 것은 말씀에 ‘순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돌아설 줄을 알고, 한없이 낮아질 줄 알며, 치유해주신 분께 감사할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제2독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고백하던 찬미가(2티모 2,11-13)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선언하면서 그분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실하심을 찬미하면서 복음에 대한 순명과 믿음의 행동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높여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셨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그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사제들에게 가던 중에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1독>에서 나아만이 엘리야의 말을 믿고 순명하여 나병이 나았듯이, 나병환자 열 명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제1독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혹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자비를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니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곧 믿고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 나병환자 아홉은 비록 자비를 입고 치유는 받았을지라도 그들에게 구원이 선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는 구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비를 입고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여전히 아버지의 집 문밖에 서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치유 자체가 아니라 은총을 주시는 분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입니다. 곧 치유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치유를 주시는 분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리는 겸손한 자세로 감사하며 흠숭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감사함이 곧 구원이 됩니다. 이를 우리는 오늘도 <미사경문 감사송>에서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구원의 도리요 길이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이 감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이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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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고,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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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믿음의 삶>
“기도하라, 섬겨라, 찬양하라”
요즘처럼 불암산 계곡물 힘차게 소리내며 흐른 적이 없습니다.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 정주하기 37년만에 처음입니다.
그토록 가을비가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강론쓰는 이 시간에도 우렁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입니다.
흡사 물결소리가 엊저녁 열여덟 형제들이, 우리 수도형제 13명, 상주손님4명, 주방봉사 형제1명이 함께 저녁 시편성무일도 바칠 때 찬양 노래 소리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전 언젠가 나눴던 <소원>이란 시가 생각났습니다.
“꼭 하늘비 내려야
맑게 흐르는 시냇물인가
하늘비 없어도
늘 맑에 노래하며 흐르는
시냇물일 수는 없나
살아 있는 그날까지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하늘비 없어도
한결같이
끊임없이
찬미노래 부르며
흰모래 백사장 일상위
늘 맑게 흐느는 시냇물이고
싶다”<2025.8.23.>
더불어 생각나는 오래전 타계한 동시작가 <흰모래>라는 호를 지닌 이희철 친척 형님도 그립게 떠올랐습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제가 수행원칙으로 삼고 있는 참 좋아하는 말마디이고 제 삶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아이는 세상에 나와 말을 익히고, 노인은 세상을 겪으며 침묵을 배운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침묵뿐 아니라 기도도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모두가 배워야 하는 것들이요 배움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사람인 수도승의 필수적 기본자질입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남는 것은 믿음뿐인데 믿음이 없다면 그 삶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할는지요? 오늘 우리는 참으로 멋진 믿음의 모범인, 복음에서 온전히 치유받은 <사마리아 사람>과, 열왕기 하권의 <엘리사>, <나아만>을 셋을 만납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참된 믿음의 삶을 위한 구체적 처방을 나눕니다.
첫째, “기도하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기도해서 사람입니다. 기도하라고 직립인간에 눈들면 하늘입니다. 오늘 복음 나병환자 열 사람들은 절망적 상황중에도 주님을 찾았습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나병환자들의 현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자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니 그대로 우리가 바치는 자비송 기도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평생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바칠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나병환자들의 기도가 참으로 간절하고 절박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제대로 주님을 찾았고 만났습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가 이 예수님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이것은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을 향한 나병환자들의 기도는 참으로 정확했고 간절했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위력을 발휘했고 그들은 가는 동안에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대로 온갖 형태의 영적 나병을 치유받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둘째, “섬겨라!”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듯, 겸손한 섬김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바로 그 섬김의 빛나는 모범이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예언자입니다. 나병 환자를 당신 말씀으로 깨끗이 치유해 주신 예수님처럼, 엘리사도 나병환자 나아만을 말씀으로 깨끗이 치유해 주십니다. 겸손히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깨끗이 치유된 나아만입니다.
치유받은 나아만의 선물을 끝내 물리치는 순수와 겸손의 사람 엘리사, 그가 얼마나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 하느님의 사람인지 감동하게 됩니다. 엘리사의 처신이 참 멋집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참 “쿨(잘난척)”합니다. 참사람 하나 만나는 것처럼 기분이 참 좋습니다.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엘리사의 단호한 거절이 그대로 그가 하느님을 잘 섬긴 결백하고 청렴한, 욕심없는 하느님의 사람임을 입증합니다. 엘리사의 이런 모습을 보고 배웠을 나아만입니다. 엘리사의 거절이 전화위복, 나아만을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하니, 바로 다음 나아만의 멋지고 감동적인 처신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한 섬김의 절정이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rvice)은 어원이 같습니다.
겸손한 섬김의 종이, 하느님의 사람이 된 나아만 장군은 모든 군인들의 모범입니다.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 <나라의 종>에 앞서 하느님을 겸손히 섬기는 <하느님의 종>인 군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국의 토마스 모어의 마지막 죽음의 대한 평가도 잊혀지지 않는 감동입니다.
“그는 왕의 좋은 종에 앞서 하느님의 종으로 죽었다(He died 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셋째, “찬양하라!”
찬양하는 믿음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함께 갑니다.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 온전한 전인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받은 나병환자 열명중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은 이는 단 하나, 나병의 치유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