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5장 1-3.11ㄴ-32절; 돌아온 탕자.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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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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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 드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대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들려준 비유입니다. 이렇게 보면 비유 속 첫째 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상징하고, 아버지 가산을 탕진하고 후회하며 돌아오는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이시어 그들과 음식을 드시며 잔치를 벌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못마땅해 합니다.

비유 속 큰아들의 대사는 그들의 생각을 대변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이 말을 듣고 큰아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복음서는 큰아들의 반응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일종의 열린 결론입니다. 바로, 독자인 우리가 큰아들이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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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아버지 입장에서

     – 큰아들 입장에서

     – 작은아들 입장에서

2.  신앙생활을 하며 큰아들 처럼 주님에게 실망한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보고 내가 생각했을때 공평하지 않는 일이 앞으로 생길때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해쳐 나아가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주님 안에서 자유과 세속에서의 자유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주님을 떠나면 자유로울 줄 알았던 작은아들처럼 주님과 멀어졌던 경험이 있었는지, 어떤 계기로 주님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5.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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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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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작은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줄 모르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에서 자신의 환상이 깨어지고,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비굴의 순간, 배고픔의 순간에서야 자신의 품위가 사라지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손상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겠다고 결정하지만, 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계산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태도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비록 방탕하더라도 자기 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는 훈련을 받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어떤 다른 조건에서 파괴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질책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가 질책을 한다면, 율법의 외적인 준수만을 중요시하고, 이로써 죄 중에 있는 형제들을 경멸할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가족이 함께하는 화합의 잔치로 막을 내립니다. 화해의 정점은 성체성사에서 드러나고, 그 자리에서 방탕한 아들의 무분별함이나, 오만한 큰아들의 고집이 모두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극복되고, 새로운 형제애로 화해를 이룰 것입니다.(출저: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