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1장 1-13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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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13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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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무 답도 없으신 하느님 때문에 절망하곤 합니다. 그런 체험을 가지신 분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얼마나 기도해야 들어주실까요?” 그러면 저는 농담 삼아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든지, 아니면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어 주시든지 할 겁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분의 나라가 오시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도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악에서의 구원을 청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것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이렇게 보니 주님의 기도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무엇을 청하든지 기도의 마지막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 손에 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보니 기도 때 많은 말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저는 아버지를 귀찮게 하는 어린아이처럼 바라는 바를 아버지께 청합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무엇을 청하든 언제나 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식으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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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나누어 봅시다.

2) 주님께 간절히 청하였는데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기도가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응답이 없었던 기도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지는 않았었는지 이야기 해보고 우리가 추구해야 될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무엇이든 청하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면 다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 주님에게 받게 되던, 받지 못하게 되던 관계없이 마음속에 불안감이 사라지기게 된다고 합니다(전삼용 신부). 이러한 경험이 있으시면 나누어 보고 어떻게 하면 이런 불안감을 없애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개인이 아닌 단체로서 주님께 청할 수 있는 기도는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같이 기도를 주님께 바쳐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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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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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을 너무 오래 청하지 말라> -전삼용신부-

과월절을 앞두고 한 유태인이 랍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랍비님, 저는 너무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없는 것이 많아 골머리가 아픕니다. 못 살겠습니다.”
랍비는 무슨 근심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과월절이 다가오는데 무교절 빵을 살 돈도 없고 포도주, 자기 옷, 아내 옷, 자녀 옷은 물론 고기도 살 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물었습니다. “무교절 빵은 얼마요?” “5000원입니다.” “포도주는 얼마요?” “1만원이요.” “자네 옷은?” “5만원이요.” “아내 옷은?” “10만원이요.” “자녀 옷은?” “3만원이요.” “과월절 고기값은?” “2만원이요.”
이 말을 들고 랍비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 자네는 돌아가서 너무 많은 걱정을 하지 말고 한 가지 걱정만 하게. 21만5000원 걱정 하나만 하게. 그리고 하느님께 한 가지만 기도하게. 21만5000원을 달라고 말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청하면 반드시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얻나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 끝에 나오는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말씀에 주의를 덜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왜 청하면 반드시 받을 수 있다는 말씀 끝에 다시 내어주라는 말씀을 덧붙이신 것일까요? 청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줄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주님께 무언가를 청할 때도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청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게 됩니다. 받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은 이미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믿고 청해야 다 받게 됩니다. 믿는데 왜 걱정이 있어야할까요? 그러니 받은 것을 다 내어줄 줄 아는 마음으로 청하라는 뜻입니다.

내어주려는 마음이 믿는 마음입니다. 또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봉헌하는 마음이 믿는 마음인 것과 같습니다. 봉헌하면 다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봉헌한 밀떡과 포도주는 주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로 되돌려주십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청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청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말은 아예 신경을 끄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게 되던 받게 되지 않던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청하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면 다 좋은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 잘 되게 해 주십니다. 그런 믿음 안에서 불안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불안하지 않아야 주님께서 나를 통해 좋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에서도 ‘위이불시’ 즉 ‘행하되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걱정 많은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항상 걱정하는 일만 생깁니다. 그 걱정하는 것을 받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런 분임을 믿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청할 때 그것을 진정으로 얻고 싶다면 “짧게” 청하십시오. 원하는 것을 너무 오래 청하면 그 청하는 것이 근심거리가 됩니다. 받는다는 것보다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짧게 청하고 그 다음부터는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맡기고 하루를 평안히 사십시오. 잔잔한 호수라야 하늘을 비출 수 있듯 평안한 마음이라야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복음서에서 항상 ‘주님의 기도’ 다음에 무언가를 청하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기도만 열심히 바치면 됩니다. 그리고 짧게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만 가지면 다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유일한 것은 내 마음을 넘어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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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소통하며, 자신의 청원을 올리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올바른 대화가 되려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은 오로지 우리에게 필요한 선익을 주시는 분으로,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이나 게으름을 보충할 수 있는 정도로 생각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 안에서 자신의 온전한 존재로, 살아 계시며 진실하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며, 자유로운 인간과 참자유이신 분의 만남입니다. 아브라함의 표현처럼 그분은 절대자이시며, 우리는 그분 앞에서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먼저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 삶의 굴곡의 순간들에 함께하시어, 오늘 시편이 노래하듯이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도 청원보다는 응답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자신을 드러내신 분에 대한 응답이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바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의식을 성찰하여 하느님과 일치해야 하며, 삶으로 바치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될 수 있도록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출저: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