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 마르 9,14-27 >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을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하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떼를 지어 달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그러자 그 영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마구 뒤흔들어 놓고 나가니, 아이는 죽은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2)
(막다른 골목에서 –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

이현주 생활성서사 2001년

삶이 이미 죽음과도 같았던 이들, 날마다 고통과 절망의 한숨을 토해 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이 예수를 만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은 예수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예수가 살아가던 당대의 사람들 중 억압받고 핍박받던 이들의 삶이 예수와 만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예수를 만나고 송두리째 인생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절박하게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우리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준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분이 큰 목소리로 한마디 외치셨을때 모든 것은 끝났다. 보이지도 않는 악령에 사로잡혀, 살았으나 죽은 목숨이던 나의 아들은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최후의 발작에 들어갔고, 그로써 우리 부자의 길고 긴 악몽은 사라졌다.

그토록 영민하던 나의 아들을 삼켜 버린 보이지도 않는 힘은 나의 안타까운 마음을 조롱하듯 아들의 입술을 완강하게 굳어지게하여 인간 세상의 모든 말을 잊어 버린 듯 만들었다. 막혀 버린 아들의 귀는 안타까운 아비의 울음소리조차 듣지를 못했다. 아들의 몸둥이는 그렇게 내 앞에 남아있지만 난 아들을 빼앗긴 슬픈 아비였고 나의 마음은 더욱 아픈 상처를 남길 뿐 이었다. 어찌하여 이 세상에는 불볕이 타오르기만 하는 사막이 존재하는가? 그것이 인간에게 무슨 쓸모가 있어서 펼쳐져 있는가? 어찌하여 세상에는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는 질병이 있고 생명을 틀어막는 어두운 세력이 있는 것인가? 알수 없는 일이었다.

악령은 나의 어린 아들을 사로잡고 그에게서 말을 빼앗아 갔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타오르는 불속에 뛰어들게도 하고 물속에 빠지게도 하였다.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지 모른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타나 남은 부지깽이 같은 목숨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따름이었다. 참으로 그것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삶이었다. 아들은 마치 괴롭힘을 받고자 태어난 목숨 같았다. 그 아픔은 또한 나의 것이기도 하였다.

절망은 더 큰 절망을 낳고 마침내 나는 절망의 무서운 끝가지에 이르렀다. 숨 쉬는 막대기처럼, 나는 어느덧 절망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로 거기 그 절망의 끝가지에서 나는 날아오는 한 마리 작은 새를 보았다. 그 작은 새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한 사나이에 관한 소문이었다. 그는 이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손으로 문등병자를 만지고 “깨끗하게 되어라”하면 병이 사라지고, 티로지방에서는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인 한 여인의 마귀 들린 딸을 보지도 않고 한 마디 말로 고쳐주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그의 옷자락만 만져서 병이 나은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온갖 병자가 모여들었고 자기에게 오는 병자를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한없는 연민으로 감싸 안아주었다고 한다. 불꺼진 숯덩이 같던 나의 가슴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이 메마른 땅 위에 과연 그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내 아들의 말과 생명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어둠의 세력에게 빼앗겼던 내 아들을 되찾아, 비어 있는 내 가슴에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나기만 한다면 말이다.

나로서는 더 이상 망설이고 집안에 머물러 있을 아무 까닭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나는 그의 일행이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머물고 있다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의 일행들만이 거기에 머물러 있었고 그는 몇 사람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중 한 사내에게 “그분은 언제 내려 오십니까? 내 아들이 악령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아주 어렸을때예요. 그 이후로 말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이러고 있다가도 발작이 일어나면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 답니다. 오 하느님! 어찌하여 어린아이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나는 더이상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시련의 의미란 무엇인가? 아니 이것은 무슨 의미라도 있는 시련인가? 언제 끝날는지 알 수 없는 이 끈질긴 고통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나와 나의 어린 아들이 겪어야 하는 것인가? 게다가 멀고 먼길을 찾아 온 끝에 만난 것은 예수 그 사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노라는 이름조차 모를 몇몇 사내들이었다. 땅바닥에 주저 앉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달래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들의 스승이 어느 산으로 올라가셨는지 모릅니까?” “모르오, 우리는 다만 이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있을 뿐이오”

유난히도 눈이 이글거리는 사내가 아까부터 아들을 노려보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 아들을 보게 해주시오. 우리가 악령을 몰아내 봅시다.” 그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신선한 기운을 되찾아 주었다. 그들은 나의 아들을 한 복판에 두고 빙 둘러섰고 나의 아들을 노려보았다. 열혈당원 시몬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더러운 악령아! 썩 나오너라.” 그러나 나의 아들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성난 들고양이처럼 으르렁 거렸다. 둘러서있던 자들이 저마다 입을 벌려 “물러나라, 이 못된 악령아!”하고 소리쳤다.

“어서 물러나라! 이 더러운 놈아! 우리 스승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허공을 울리는 북소리처럼 공허했다. 그것은 힘찬 말이 아니라 속이 비어있는 소리일 따름이었다. 작은 들짐승처럼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던 나의 아들이 역습을 시도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고 몸집은 컸지만 그들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고 길거리에서 수라장이 벌어졌다.

나는 울면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매달렸다. 그러나 무서운 힘으로 나를 밀쳐버리고 하늘에라도 오를 듯이 날뛰며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을때, 나의 아들은 마지막 발작 끝에 바닥에 쓰려져 죽은 듯이 누워있었고 말을 빼앗겨 버린 입에서는 흰 거품만이 흘러나와 흙에 버범이 되었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무엇인가? 무엇이 이 어린 아이한테서 말과 생각을 빼앗아 버리고 낯선 땅 한구석에 쓰러져 게거품을 물고 버둥거리게 한단 말인가? 나는 까마득하게 높고 철옹성처럼 단단한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의 힘으로는 그 벽을 무너뜨릴 수 가 없었다. 그 누구의 힘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방을 둘러 살폈으나 어디에서도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기는 했으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이 문득 숨을 끊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가냘프게 헐떡거리고 있는 나의 숨소리가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웠다. 세상이 죽었는데 어찌하여 나는 살아있는가? 도둑맞은 세상에 어찌하여 나는 아무것도 도둑맞은 것이 없는가? 말과 생각과 느낌까지 빼앗겨 버린 아들의 주검앞에서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숨을 헐떡이며 서 있어야 하는가? 살아있다는 것이 괴로웠다. 죄스러웠다. 나는 울고 있었다.

아들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녀석에게 빼앗긴 말과 생각과 자유를 되찾아 줄 수 만 있다면, 나는 몇 번이라도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죽는다면 그 죽음이 곧 삶이라고 간절하게 느껴졌다. 둘레를 살펴보니 병든아이와 그의 불쌍한 아비를 두고 그들은 논쟁을 하고 있었다. 율법학자들이 “저 아이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거요! 하느님 말고는 그 누구도 저 아이를 살려 낼 수 없소.”

“그렇지 않아요. 우리 스승께서 더러운 악령을 내쫒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소. 우리 스승께서는 얼마든지 악령을 굴복시킬 수 있소! 당신들은 저 게라사 지방에서 우리 스승이 하신 일에 대하여 소문을 듣지 못했소? 무덤 사이에 살던 미친 사람을 살리신 일 말이오.”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도 소문을 들었소. 당신네 스승이라는 자가 돼지떼를 익사시켰다는 애기 아니오? 그것이야말로 당신네 스승이 바로 악령의 두목한테 힘을 빌려서 한게 아니오?” “뭐라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제법 뭔가 아는 척하지만 당신들이 도대체 무얼 알고 있단 말이오?” 열혈당원 시몬이 율법학자의 말을 가로채며 소리를 질렀다. 논쟁은 끝났다.

살기어린 눈초리가 불꽃처럼 타오르면서 부딪혔다. 그때 사방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바로 그 순간,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에게는 어디 멀고 먼 산골짜기에서 부는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무슨 일로 저 사람들과 다투고 있는 거요?”

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그를 바라보았다. 넘어가는 해의 붉은 빛이 그이 긴 머리에 반사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다! 내가 만나야 할 바로 그 사람이야!” 나는 쓰려져 있는 아들을 부등켜안고 그에게 달려갔다. “선생님, 제 아들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악령에 사로잡혀 말을 못합니다. 이대로 두면 죽고 말겁니다. 선생님, 당신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 아이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소?” “어렸을 적부터 입니다. 발작이 일어나면 불속에도 뛰어듭니다, 선생님, 하실 수만 있다면 제발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그가 나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다면 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은 그토록 먼길을 왔으면서 아직도 더 찾아갈 데가 있단 말이오? 아직도 당신 마음에는 다음 기회에 대한 여백이 남아있오?” 그렇다. 다음 기회라니? 더 찾아갈 데라니? 나는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움짝달싹도 하지 않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내가 어디로 한 발짝인들 더 나아간단 말인가? 이 절망조차 할 수 없는 끝없는 심연에 묻혀 내가 어디에 다시 희망의 줄을 던진단 말인가?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모아 피를 토하듯이 말했다. “여기가 끝입니다. 당신이 끝입니다, 더 갈 데가 없습니다.” 그가 힘껏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주 억센 손아귀였다. “막다른 골목에서 부르짖는 음성은 하늘에 닿을 수밖에 없는 법이외다! 힘을 내시오. 믿는 사람한테는 안 될 일이 없소. 나는 하느님, 나의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맹세코 말하건대,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믿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하거든 도와주십시오.”

누군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속에 숨어 있다가 내 입을 통하여 부르짖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른는 것과 동시에 그가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못된 악령아! 말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더러운 자야! 그 아이에게서 썩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마라.” 순간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나의 아들은 벌떡 일어나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축 늘어졌다.

“아이가 죽었어!”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나의 아들은 죽은 듯이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허리를 굽혀 아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나의 아들은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보고 와락 달려들며 부르짖었다. “아버지!” 나는 품에 안긴 아들의 더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내 절망의 끝가지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죽음의 끝에서 피어난 나의 생명이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나와 나의 아들과 나의 모든 세계를 질식시키고 있던, 그토록 완강하던 어둠의 세력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소리도 없이 무너지고 말았는가? 서쪽 하늘은 저녁놀로 붉게 물들고 있었고 지나간 우리의 힘든 세월 또한 말이 없었다.

<묵상나누기>

가장 마음에 와닿은 구절은 어디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악령들렸던 아들과 그의 아버지의 생은 치유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봅시다.

하느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에 왜 이런 고통과 악들이 존재할까요? 하느님을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희망을 현실로 이루기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할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믿음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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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반대말을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합니다.  행동이 같이 이뤄져야 진정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3대째 나이아가라 폭포를 외줄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은 이사람이 외줄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넌 후에 사람들에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외줄타기를 떨어지지 않고 건너는것을 믿습니까?” 라고요 사람들은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눈가리게를 하고 다시한번 지나간 후  사람들에게 다시 물어봤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외줄타기를 떨어지지 않고 건너는것을 믿습니까?” 라고요 사람들은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믿는 사람들중에 제가 한 사람을 등에 업고 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겠습니다.  혹시 지원자 있나요?”  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이게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아닌지 다시금 고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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