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나눔은 길지 않게 한다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는 유다교 입장에서 완전히 대조되는 사람들입니다.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그것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들이면서 또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으로는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반면에 세리들은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 제국을 위하여 백성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반역자요 수탈자의 앞잡이였으며 종교적으로도 죄인 중의 죄인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이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먼저 바리사이는 양팔을 벌리고 자신만만하게 서서 자신은 죄인이 아닐뿐더러 단식 규정과 십일조 규정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임을 하느님 앞에 내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다고 말씀하십니다.바리사이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거나 무엇을 청하는 내용은 없고 오직 자신을 내세우는 내용뿐입니다. 반면 세리의 기도는 간단하면서도 절실하고 진지합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고 하느님 앞에 그것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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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기도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바리사이처럼 경건함을 드러내거나 남과 비교한 적은 없는지, 세리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하며 자비를 구한 경험은 없는지 함께 나눠봅시다.
3)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위로나 자비를 깊이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또한 일상에서 타인을 평가하거나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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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389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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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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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p0_jWAKZfA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수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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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수시로, 사사건건 강한 대립각을 세우시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말은 ‘~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이 죄인들이나 이방인들, 불결한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존재, 하느님으로부터 선별된 거룩한 존재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러한 바리사이들의 선민의식과 우월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신앙을 절대 그냥 못 넘기셨습니다. 눈에 띄는 즉시 그들의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은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 11-12)
교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쳐진, 기가 차지도 않은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그가 바친 기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겸손의 결핍입니다. 성찰과 자기 인식의 부족입니다. 바리사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보다 ‘유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티끌 같은 자신을 축복하셨음을 까마득히 잊고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오늘 여기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 은총을 통한 의화(義化)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필요 없으며 결핍과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인간인 자신에게만 의존하므로 그 길의 끝은 결국 멸망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때 마음이 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화가 진솔하거나 순수하지 않고 권모술수나 잔머리 굴리는 냄새가 풀풀 풍길 때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화, 겉도는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꽤뚫어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장황하게 늘어놓을때, 하느님께서도 결코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감없는 진솔한 대화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반항적인 예언자 예레미야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예언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 건넨 욥의 대화는 더 솔직합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해서 주님께서 저를 만든 날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 세리의 기도를 소개하십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자비하신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가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틈만 나면 쏘아 올려야 할 화살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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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LVBjqiiF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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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 그에 따른 참된 감사와 거짓된 감사>
오늘 우리는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 당대 최고의 신앙
엘리트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리, 민족의 반역자이자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주일 미사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결론은 충격적입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다 똑같은 미사에 참례했는데, 어째서 한 사람은 ‘의롭게 되어’ 돌아가고, 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갔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예배, 이 두 사람의 행복을 갈라놓은 것입니까?
오늘 복음은 단순히 기도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의 ‘예배 방식’이 달랐음을 지적합니다.
예배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의 행복해지는 방법은 ‘비교’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어느 시대보다 풍요롭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비교’ 때문입니다. SNS를 열면,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입니다. 나보다 더 좋은 곳에 가고,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절망합니다. 이러한 현대의 불행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행복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의 행복은 ‘비교 우위’에서 나옵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적이 없기에, 오직 남보다 낫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교 행복’에 중독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천사가 서로 질투하는 두 상인 앞에 나타나, 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구하든, 옆의 상인에게는 그것의 두 배를 줄 것이다.”
만약 집 한 채를 구하면, 옆 상인은 두 채를 갖게 됩니다. 금 100냥을 구하면, 옆 상인은 200냥을 갖게
됩니다. 천사의 제안을 받은 상인은 밤새도록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저 인간이 나보다 두 배 더 부자가 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긴 고민 끝에 상인이 마침내 천사에게 소원을 말했습니다. “제 눈 한 쪽이 보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옆 상인의 두 눈이 멀게 될 테니까요. 이것이 바로 바리사이의 예배, ‘비교 감사’의 실체입니다. “저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라는 기도는, “저 세리의 두 눈을 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저주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그리고 이 ‘비교 감사’의 예배는 우화 속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고 반드시 공동체를 파괴하는 비극을 낳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 ‘거짓된 감사’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낳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세일럼(Salem) 마을’에서 일어난 ‘마녀 재판’의 광풍입니다.
당시 세일럼 마을 사람들은 신대륙에 거룩한 ‘언덕 위의 도시’를 세웠다고 자부하던 독실한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성전에 모여, 자신들이 타락한 유럽의 구교도나 방탕한 자들과 같지 않음을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바로 ‘선택받은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런데 1692년 겨울, 마을 목사의 딸과 조카딸이 알 수 없는 발작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은 원인을 밝히지 못했고, 마을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은 악마의 짓이다! 우리 거룩한 공동체 안에 마녀가 숨어있다!”였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하기에 자신들의 고통은 다른 누군가의 탓이었던 것입니다.
재판관 존 해손과 같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마녀’나 ‘악마의 하수인’들과 같지 않음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이웃들을 심판대에 세웠습니다. 불과 몇 달 만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발당하고, 20명의 무고한 생명이 교수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적 예배자들의 모습입니다.
반면, 세리는 어떠합니까? 그는 ‘비교’하러 성전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외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리는 남보다 더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자신의 존재를 구원해 줄 ‘자비’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가수 ‘비’, 정지훈 씨는 수백 억, 어쩌면 수천 억 원의 재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평생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백 억을 버는 것보다, 돌아가신 어머니 품에 한 번 안겨보는 게 소원입니다.”
그에게 ‘어머니의 품’은 100억, 1000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세리가 성전에서 찾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과 명예와도 바꿀 수 없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안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품’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핵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미사는 ‘비교 우위’를 확인하러 오는 자리가 아니라, ‘비교 불가능한 지위’를 선물 받으러 오는 자리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천민 아이’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 기둥은 아들에게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어머니의 자비’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으신 어머니의 희생을 만난 것입니다. 이 소년이 미사에 온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서는 이 제대는 우리를 위한 ‘사람 기둥’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분의 ‘자비’가 영원히 서 있는 기둥입니다.
지금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굿뉴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지우'(설경구 분)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국적을 잃고 10년 넘게 ‘주민등록증’ 하나 없이 유령처럼
살아갑니다. 그는 냉동 창고에서 일하며 온갖 고초를 겪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소원은 ‘주민등록증’을 되찾아 평범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 예컨대 젊은 조직원(홍경 분)이나 그를 이용하려는 국정원장 등은 더 많은 돈과 명예, 더 높은 지위를 원합니다. 그들은 ‘바리사이’처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더 높은 곳을 탐합니다. 하지만 주인공 지우는 다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이 무엇을 가졌든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사를 통해 얻게 되는 지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은 돈과 명예를 비교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이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천국의 시민’이라는 주민등록증을 받습니다. 이 지위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 없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남과 비교하며 나의 의로움을 확인하러 왔습니까? 아니면 세리처럼, ‘하느님의 자녀’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를 선물 받으러 왔습니까?
미사가 끝나고 성당 문을 나설 때, 우리는 더 이상 밖에서 만나는 그 누구와도 나를 비교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돈이 없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건강하지 못한데…”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늘 미사에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증을 받았다. 나는 하느님의 상속자다.”라는 절대적인 감사와 자부심을 안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에 무조건 찬미하며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 하느님을 참으로 만나고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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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부터 46년 전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때는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려고 보급소엘 갔습니다. 신문 150부를 들고 배달 하고 나면 배도 고프고 그래서 신당동에 떡볶이 먹으러 자주 갔습니다. 요즘은 신문도 다들 오토바이로 배달하지만, 그때만 해도 오토바이 배달은 없었습니다. 신당동에는 음악이 있었고, 맛있는 떡볶이가 있었고 우리들만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은 레이프 가렛의 “다함께 춤을 춰여”라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진, 나훈아와는 전혀 다른 음악을 보여준 산울림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이 산울림의 음악을 좋아했고, 저도 물론 좋아했습니다. 산울림의 첫 번째 노래의 제목은 ‘아니 벌써’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신문을 배달하려는데 ‘호외’가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유고라고 했다가, 서거라고 했다가 결국은 대통령이 죽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였습니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분은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셨고, 민족의 근대화를 위해서 산업현장을 뛰어다니셨고, 수출 100억 불, 국민소득 1,000불을 위해서 밤낮으로 땀을 흘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그분의 앞모습만 보았습니다. 신문과 방송도 그분의 앞모습만 저에게 보여주었으니까요. 그 뒤 저는 그분의 뒷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무리하게 삼선개헌을 하였습니다. 긴급조치를 남용했습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무리하게 유지하려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측근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분이 죽은 지 46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세운 업적이나 그의 앞모습만으로는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평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은 드러날 뒷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살아있는 사람은 결코 성인 품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했어도, 그가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았어도 그렇습니다. 그가 아무리 높은 직책에 있었어도 그렇습니다. 죽은 다음에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성인 품에 올릴 수 있는지 조사를 합니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이 비록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어느덧 나는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을 뒤에 감추고 있을 때가 많지 않았는지 생각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평가받기를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도 절차가 있습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재물이 많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서 될 일도 아닙니다. 머리가 좋아서 될 일 또한 아닙니다. 어떤 절차와 순서가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게 아닙니다. 회개는 세례를 받아 성당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박해받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나병 환자 10명이 치유되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찬양을 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한 사람에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치유를 넘어서 영혼이 치유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행동으로 드러내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죄를 눈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죄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이며,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누추한 마구간에 태어나신 사건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희생과 봉사를 만나면 사랑이 꽃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자리’는 없다고 하십니다. 다만 ‘십자가와 희생의 자리’가 있다고 하십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분열과 갈등은 겸손이 사라지면서 생겼습니다. 겸손의 빈자리에는 교만과 욕망이 넘쳐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교만한 기도보다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셋째는 ‘항구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기름을 준비한 사람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이웃을 위해서 나누는 사람이 더 많은 은총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시계는 언제나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루에 두 번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는 시계가 아닙니다. 고장 난 시계는 쓸모가 없습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이 와도 소나무와 전나무는 여전히 푸르다.’라는 뜻입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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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한 다음 주고받는 것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기 불편할 때,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습니다. 만일 예수님과 우리가 만난다면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적은 명함을 드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이야기를 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명함을 드렸다면,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요?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사이는 당당히 예수님께 이런 명함을 드렸을 것입니다. ‘의인,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명함을 받아 넣고 다시 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찍이 서 있던 세리는 예수님께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인 명함을 드렸을 것입니다. ‘죄인, 세리.’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으시고 그에게 당신의 명함을 주셨을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과 만나기 위하여 세상에 온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리는 예수님의 명함을 들고는 가슴이 설레어 돌아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주님 사랑에 맞갖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많고 약한 모습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명함에 이런 글들을 적고 싶어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이’, ‘날마다 미사에 나가는 이’, ‘무슨 무슨 봉사를 하는 이’, ‘세상의 무슨 직함을 가진 이’라고 말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나는 주님을 만난다면 무엇이 쓰인 명함을 건네드릴지 생각하며, 겸손하게 한 주간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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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1. 기도의 본질: 겸손과 가난한 마음
오늘 전례의 주제는 지난 주일에 이어 기도에 관한 것이지만, 특별히 겸손한 자의 기도, 가난한 자의 기도에 초점을 맞춘다. 집회서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이의 간구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며, 높으신 분께 이르기까지 그는 위로를 얻지 못한다”(집회 35,21). 하느님께서는 외적인 제물이나 형식보다 가난한 자의 진실하고 겸손한 기도를 더 기쁘게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며, 그분 앞에서 교만과 자기 자랑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2.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에서, 자기 의를 자랑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자비를 간청하는 세리의 기도를 대조하신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행한 율법 준수와 선행을 자랑한다. 그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기보다 사실상 자기 자신을 찬미한다. 반면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13)라고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겸손한 신뢰의 기도이다. 예수님의 결론은 분명하다.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이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3. 교부들의 가르침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대목을 해석하며,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웠고 세리는 자신의 죄를 내세웠다고 설명한다. “바리사이는 자기 공로를 나열했고, 세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이에게 은총을 베푸신다.”(Sermo 115,1–2)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가르친다. “헛된 자만만큼 기도와 동떨어진 것은 없다.”(Hom. 3 in Matthaeum) 기도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자기 비움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4. 교회의 가르침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헌장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높이 찬미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33 참조) 또한 교회 헌장은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에 관해 설명하면서, 모든 신자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인류를 위해 겸손히 중개자로 서야 함을 강조한다.(10항 참조) 따라서 오늘 복음은 단순히 개인의 태도 문제를 넘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올바른 전례적 태도와도 연결된다.
5. 그리스도인의 태도: 겸손 안에서 완주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2티모 4,6-8 16-18),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 안에서 역사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하고 있다. “주님께서 내 곁에 서시어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2티모 4,17) 그는 자기 달려온 길이 은총의 열매임을 고백하며, 정의의 월계관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한다.
6.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오늘 복음은 우리 안의 작은 바리사이를 성찰하게 한다. 혹시 우리는 신앙생활을 자랑거리로 삼거나, 다른 이들을 평가하고 깎아내리는 데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은총에 의존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세리의 기도처럼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겸손히 고백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올바른 이로 세워주실 것이다.
7. 결론
오늘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아야 한다.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자기 자랑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신뢰로, 다른 이를 판단함이 아니라 자비를 청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구름을 뚫고 하느님께 이르고,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의 월계관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질 것이다.
✠ 주님, 우리를 높이지 말고 낮추게 하시어, 오직 당신의 자비로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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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 하느님! 저에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 하느님! 제게>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이렇게 말씀드리니
저에게 그저 들으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으니
저에게 기꺼이 말씀해 주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잘 하고 있으니
저에게 굳지 오지 마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저에게 어서 오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있을 수 있도록
저에게 당신을 거두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있을 수 없으니
저에게 당신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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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1) 회개는 누가(어떤 사람이) 합니까? 죄인이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서도 그 일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과 죄를 짓긴 했지만 부득이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 무지와 부정과 변명은 ‘위선’으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죄라는 것을 몰랐던 경우에도 죄를 지은 것이 되나?”라고 물을 수 있는데,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자체도 잘못입니다. 예비신자 교리 교육기간을 충분히 거쳐야만 세례를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꾸짖으셨다.”입니다.
2)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산상설교의 말씀들을 알기 쉽게 풀이해 준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비유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라는 말씀에서 ‘꼿꼿이 서서’는, ‘자기가 의인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입니다. ‘혼잣말로’라는 말은, 그 바리사이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는,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곳에서’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한다는 말은, 위선자들의 기도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 바리사이는 자신이 강도짓과 불의와 간음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그가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사실일 것입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너는 마음과 생각으로도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는가?”라고 물으시면, 과연 떳떳하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3) 그 바리사이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말은,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말, 즉 위선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의 감사는 ‘거짓 감사’이고, 그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마태 6,16)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라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
<십일조는 원래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된 헌금이었습니다.> 이처럼 위선자 바리사이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거짓말이고, ‘자기 자랑’이고, 교만과 위선입니다.
4) 13절에 묘사되어 있는 세리의 모습은,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진실한 회개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라는 말씀은,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들만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의롭게 되다.’는 ‘구원받을 자격을 얻다.’입니다. <그의 구원이 확정된 것은 아니고, 시작된 것입니다. 구원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위선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사람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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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 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트로트 가수의 이름뿐 아니라 사생활 일거수 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가요?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말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은 말로 선포된 복음을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전파되게 됩니다.”
“교회는 매력과 증거로 성장합니다.” 세례받은 이가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에 나서고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가족 구성원에게, 이웃에게 어떤 매력을 주고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을 알고 있어요. 당신도 예수님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던 사람이‘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그의 친절, 헌신, 사랑, 희생이 감동이야!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달라’ 한다면, 이 순간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어느 모임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합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교회는 세상 안에서 개종강요가 아닌 매력을 통해 성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이끌려 그분을 기쁘게 따른다면 다른 이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입니다.”(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만함 없이 오직 겸손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이 침체 되었는데 어렵다고 머뭇거리지 말고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소명의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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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병권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분심 좀 들면 어떤가요.>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신학교에서 여러 가지 기도를 가르쳐주셨던 신부님께서는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단순해야 한다. 긴 말, 타령하듯이 늘어놓지 말고, 호흡에 집중하고, 반복하여 이 짧은 기도문을 되풀이해 보아라. 주님께서는 너희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많은 교우님들께서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분심이 많이 들어 기도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심 좀 들면 어떤가요? 기도하는데 분심 들지 않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요?
‘완덕의 성녀’라고 불리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스페인, 1515-1582)는 기도하면서 분심이 들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심지어 짧은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조차도 분심 없이 기도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니까 분심도 드는 것입니다. 아예 기도하지 않는다면, 분심이 들일도, 졸릴 일도 없을것입니다.
살아가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도 막막할 때도 많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답답한 많은 일들, 이미 성당 안 나온 지 오래된, 살아가기 벅차해하는 내 자녀들, 또 주위 사람들… 그들을 위해 내가 어떻게 기도해 주어야 할지 막막할 때, 이렇게 반복하며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주님 저에게, 그리고 제 아들, 시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주님, 지금 힘들어 하고 있는 제 딸, 안나에게, 또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할 수만 있다면 고요히 성전에 머무르면서, 아니면 길을 걸으면서, 운전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주님의 자비를 반복하며 청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이천 년 전, 어떤 사람이 성전 문 멀리서 고개도 못들고 가슴을 치며 죄인인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드린 기도를 자비로이 보아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슬픔의 골짜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는 하와의 자손들이 세파에 시달리며 엎드려 드리는 기도도 인자로이 보아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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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민병섭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30주간을 시작하며 주님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모습(루카 18,9-14)을 통하여 우리에게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고 계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도 덕 중에 가장 중요한 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고명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온 한 방문자는 스승 앞에 자기의 고민거리를 한참 이야기하고는 다시 자신의 장래 계획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방문자의 찻잔에 차만 계속하여 따랐습니다. 차는 찻잔에 흘러넘쳐 앉은 자리까지 흥건히 젖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 되어 떠들어대던 방문자는 놀라 스승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습니다. “잔이 넘쳐서 흐르는데 어찌하여 자꾸만 따르시는지요?” 그제야 스승은 입을 열었습니다. “이 찻잔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마음은 너무 많은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마음의 잔을 비우지 않으면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가르쳐 드린다 해도 다 넘쳐버릴 것입니다.”
겸손한 기도만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처럼 우리 마음에 빈자리가 없다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채워주실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집회서에서도 겸손한 이의 기도만이 구름을 거쳐 하느님에게까지 올라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처럼 자만에 차,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며 자기 자랑만 한다면 그가 지킨 모든 계명, 그가 베푼 모든 자선을 결국 자신을 허영에 빠지게 하며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이웃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내가 선한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이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만이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겸손한 기도를 바칠 수가 있으며 주님의 자비를 입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세리처럼 주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보며 기도함으로 주님의 축복을 받는 아름다운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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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유명한 자기 계발 작가이자 강연가인 데일 카네기의 말 중에서 “비난하지 말고, 진심으로 칭찬하라. 그리고 어떤 부탁도 다정하게 표현하라.”가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말의 겉모습만 신경 써서는 안 되고,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진정한 소통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예의를 차리면서, 정작 가까운 사람에게는 마음을 놓습니다. 부모, 연인, 오래된 친구 등에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마음으로 툭 내뱉는 말과 행동에 큰 상처를 주곤 합니다. 가까울수록 더 단단한 신뢰가 필요하고, 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아 보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말하고 행동합니다. 때로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불만의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도 표현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다정한 관계, 진정으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을 이야기하십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바리사이와 로마 제국을 위해 동족의 세금을 징수하며 부정을 저지르기 쉬워서 ‘공적인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합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혼잣말로 하는 그의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독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식과 십일조를 이야기하면서,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기 의로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기도에는 자비와 용서가 전혀 없습니다.
반면, 세리는 멀찍이 서서 기도합니다. 스스로 성소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하느님 앞의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특히 그의 기도에는 바리사이와 달리 비교나 자기 공로의 나열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실상(죄인)과 하느님의 자비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누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냐는 것이지요.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바리사이가 아니라, 자기 죄를 솔직히 고백한 세리가 하느님께 의롭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을 받는 유일한 조건은 ‘자신의 한계와 죄를 인정하는 겸손(humility)’입니다. 이 겸손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과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다정한 관계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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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주교좌명동본당 주임) 신부님]
‘묵주 기도 성월’이요, ‘전교의 달’인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며칠을 지내면 11월 ‘위령 성월’을 맞이합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2티모 4,6)라고 말씀하면서,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라고 고백하십니다. 우리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도 바오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살이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고백 말씀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온 ‘묵주 기도 성월’을 되돌아봅니다.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그리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또한 ‘위령 성월’ 동안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의 그때를 준비하는 시간을 보낼 결심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음은 ‘주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면서 자신을 굳세게 해 주셨기’(2티모 4,17 참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의 삶의 태도, 삶의 모습에 대해 복음은 일깨워줍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질이나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으며, 세금을 포탈하거나 착복하지도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다면 그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 칭찬받을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돌아간 사람은 이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삶을 살아왔던 바리사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그 세금을 포탈하고 착복한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고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삶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바리사이일까요, 아니면 세리일까요? 우리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태도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는 혼잣말로 기도를 합니다. 옆에서 보기에 참으로 겸손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꼿꼿이 서서’(루카 18,11 참조) 기도를 합니다. 더욱이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났습니다’(루카 18,11-12 참조)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열심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자랑을 늘어놓고 싶어 합니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루카 18,13 참조) 하늘을 쳐다볼 엄두도 못 낸 채 자기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라고 아룁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진솔히 자기 성찰을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장 잘 걸려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이고,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 자신을 더 뛰어난 존재로 여겨 잘난 척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경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 나는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라는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데 너는 왜 못하니?’라는 판단과 단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바리사이와 세리 중 누구의 삶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길에 있어서는 바리사이처럼 해야겠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가르침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는 세리처럼 겸손한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었다면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로 보내주신 누군가가 있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협력자를 떠올릴 수 있을 때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높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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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겸손한 죄인>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중에 바리사이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며 율법과 전통에 따라 모범적으로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반면 세리는 죄 많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부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보다 세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사람의 하느님께 대한 태도를 보면,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잘나고 열심하다고 자처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세리를 깔봅니다. 반면 세리는 하늘을 향해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사고 가슴을 치며 잘못을 뉘우치고 자비를 청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는 바리사이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대단할 수 없고,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선 세리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보잘것없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하느님 은총과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세리는 하느님 자비와 사랑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지합니다. 이 점은 커다란 차이입니다. 바리사이도 세리도 하느님 사랑과 자비 없이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참회의 눈물로 구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은총 없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이웃의 도움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교만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해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같은 고백자는 아닌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는 주일 미사 빠진 죄와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 두 가지 죄만 짓는다는 우습지만은 않은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찰되지 않은 고해는 듣기에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죄의 고백이 아닌 자기 자랑과 타인에 대한 험담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조금 각색해보면 “신부님, 저는 매일 미사와 기도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해마다 성당에 봉헌을 많이 했는데, 올해는 사정이 어려워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그동안 참으면서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저 사람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정치인들 때문에 욕을 했습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속상해서 주일 미사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등 자신의 죄를 통회하지 않고, 주위 여건과 남들을 탓하면서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고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종종 푸념에 가까운 참회를 하기도 합니다. “내가 어찌하다 이런 죄를 범하였을까? 정말 부끄럽고 마음이 괴롭다.” 참회는 자신의 나약함과 범한 과오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잘못을 하고서도 어떤 핑계를 대면서 합리화하고 그럴듯하게 덮으려 한다면 참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외면한 것에 대해 깊은 참회 없이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지은 죄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겸손한 통회를 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도 바리사이와 같은 기도와 통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능력만 믿고, 하느님 사랑을 청하고 자비에 의탁하는 데 소홀하지 않나요? 자신을 낮추고 죄를 인정하고 통회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나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이 얼마나 많고 큰가 보다 통회하는 마음을 먼저 보십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많고 크다 해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더 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통회하는 이의 죄를 용서해주시며 그를 의롭다 하십니다. (cpbc
‘생활속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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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18,10)
사실 살아오면서 느끼는 점은 살아온 삶의 길이만큼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전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모르는 게 더 많아지면서 숨김없이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합니다. 특히 어떤 신자 분의 집 화단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도대체 꽃 이름을 알고 있는 꽃의 이름은 정말 소수이고, 이름조차 모른 꽃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는 제가 그동안 눈에 보이는 꽃들이며 나무들을 관심이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누구라도 관심 어린 시선으로 보면 볼수록 세부적으로 꽃들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그러더군요. 참나무에도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가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서로 다 다르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관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다보면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도 보이게 될 겁니다. 또 다른 분이 그러시더군요. 꽃이 가장 많이 피는 계절이 어느 때인지 아느냐고요. 당연히 꽃이 많아 보이는 봄이라고 했더니, 그분의 표현에 의하면 잎이 무성해서 잘 보이지 않아 그렇지 실상 여름에 가장 많고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다고 하더군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듯이, 우리의 시선에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여름에 가장 다양한 꽃들이 핀다, 라고 하더군요. 이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꽃들과 나무를 구별하고 그것들의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이렇듯 꽃과 나무를 따뜻하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전혀 관심이 없는 저와 같은 사람의 시선 차이는 바로 보는 대상에 관한 관심과 애정의 강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꽃과 나무의 이름 하나하나를 알고, 그 향기를 기억하고, 화려했던 꽃 피는 시기와 언제 열매를 맺는지를 아는 사람은 분명 그 모든 시간을 통해 묵묵히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소리 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 사람일 겁니다. 꽃과 나무가 감출 수 없는 꽃의 자태와 향기를 잎과 줄기 그리고 열매에 고루 담고 있듯 아마도 사람의 자태와 향기는 더 복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골고루 스며 있어서 아무리 감싸려 해도 은연중에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꽃과 나무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른 시선의 차이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 차이를 느낄 수 있다면 그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늘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땐가 정말 우리를 우리 자신답게 살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시선은 바로 하느님의 시선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름과 압박에서 벗어나 하느님 앞에 자기 있는 그대로 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은 다릅니다. 사무엘 1권 16장 7절에 보면,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라는 표현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외부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속 모습을 바라봅니다. 단지 외형적인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보십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시선을 의식하고 자각한다면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을 좀 더 중시하며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문득 ‘신동협’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 제목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느님은 사무엘 예언자에게 사람의 외모나 신장 등 겉모습만을 보지 말고 마음의 중심을 봐라, 라고 하셨지만, 지난 세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겉모습 곧 외모지상주의, 비싼 외제 차, 명품 핸드백이나 시계, 좋은 집, 좋은 직장, 학벌 지상주의 등이 바로 이런 인간의 겉모습을 통해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해 온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껍데기만 보려고 했지, 마음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단지 기도에 국한할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어떤 면을 더 중요시하고 관심을 두는지 좀 더 깊이 성찰해 보도록 이끌어 주는 비유 말씀이라고 느낍니다. 나는 지금껏 사람의 시선에 맞춰서 아니면 하느님의 시선에 내 삶의 무게를 두고 살아왔는지 한번 깊이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세상에는 의인인 줄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죄인인 사람이 있고, 죄인인 줄로 알지만, 사실은 의인인 사람이 있다.”라고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응답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 자신이 어떤 그 무엇을 청하는 기도는 사실 거의 해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제가 원하는 것보다 하느님은 늘 그 이상으로 안배해 주셨고 채워주셨다고 느낍니다. 아무튼 기도하는 존재요 삶을 살도록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와 인격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혹여 하느님께 헤아릴 수 없이 오래도록 청함에도 응답받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모습에서 본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사실 기도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는 바로 인격적인 사랑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먼저 제 평가 기준을 제시하면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의 자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한 사람은 세리였다.”(18,10) 본보기로 제시한 바리사이와 세리는 거주지도 생활 습관이며 학력이나 직업 그리고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부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만큼 하느님 앞에서 태도와 표현도 극명하게 대조적입니다.
바리사이의 하느님 앞에서 태도와 자세 그리고 기도로 나타난 특징을 보면, 이미 그가 어떤 존재인지 확연하게 명료하게 잘 드러나 있습니다. 결국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곧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긴 하였지만, 그의 시선은 하느님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기보다 자신에게 더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솔직하고 겸손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보다는 “혼자 말로,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8,11.12)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보더라도 기도해 온 영혼들이라면 무엇이 바리사이의 문제인지를 직감하셨으리라 봅니다. 이는 참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기도라기보다 자아도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넋두리이며, 자기과시에 불과합니다. 말인즉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한다고 하지만 이를 빌미로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자화자찬이자 타인과 비교 우월감을 드러내는 비인격적인 판단이자 무시하는 언사일 뿐입니다. 진정 하느님 앞에선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께서 눈길을 돌리시고 손길을 거두시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데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다 자신이 한 것인 양 교만과 자만에 빠져 있으며, 더더욱 이를 토대로 가엾은 형제들을 단죄하고 심판하고 있으니 이 어찌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못나도 한 참 못난 사람입니다. 자기가 세상의 기준이며 모범인 것처럼 자기만이 옳고 깨끗하며 거룩하다는 의식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바리사이의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왔고 살아갈지를 말입니다.
사람의 태도나 마음가짐은 외적 행동이나 말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마저 꼿꼿이 서 있었다, 는 것은 그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라도 말로, 하느님 앞에서 대갈빡을 숙여도 모자랄 판에 대갈빡을 꼿꼿이 쳐들고 있으니 이미 그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하느님 앞에 기도하러 올라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세리는 차마 성전에 들어와서도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18,13)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곧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인지 알기에,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에서 멀찍이 서서 하느님을 향하여 눈을 들 수조차도 없는 낮은 자세와 겸손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잖아요. 「애모」노래 가사처럼 『그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가.』라는 노랫말처럼, 이 모습이 진정 하느님 앞에 선 겸손한 우리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더더욱 세리는 가슴을 치며, 참회하고 죄를 뉘우치는 심정으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라고 참회의 기도를 바칩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성서적 기도의 첫 번째 기도는 바로 참회, 회개, 용서를 청하는 기도이었으며, 이는 곧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실존이며 삶이라는 명확한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바로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하느님 앞에서 선 참사람의 자세와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며,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바로 하느님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8,14)라고 말씀하심을 통해 아빠 하느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물론 기도는 단지 기도함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 됨을 체험하면서 이를 통해 하느님의 이 사랑을 삶으로 살고 나누는 데 있습니다. 기도는 덕행 곧 신덕을 실행함에 있습니다. 세리처럼 기도하는 영혼의 기도를 오늘 독서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까지 올라가리라.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35, 20~21) “주님, 당신 앞에 깊이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고, 언제나 당신 자비를 청할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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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오늘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들판에는 잘 익은 곡식이 고개를 깊이 떨구고, 거리에는 가로수 잎들은 떨어져 내려와 뒹굽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겸손의 계절입니다. 낙엽처럼 내려가기를, 이삭처럼 고개 숙이기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겸손할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벤시라는 ‘겸손한 이의 기도가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집회 35,20-21 참조)고 말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늘나라에는 자신을 위한 의로움의 화관이 마련되어 있음을 말합니다.’(2티모 4,8 참조) 그런데 나는 ‘의로움의 화관’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그런데 과연 나는‘오늘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오늘 복음인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루카 18,9)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 세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 뭐가 서로 다른 걸까요? 무엇이 이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걸까요? 그것은 그들은 ‘눈’입니다. 그들은 바라보는 ‘마음의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우선,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자신이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다른 한편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보는 눈’이 있습니다. 곧 ‘자신을 높이는 바리사이의 눈’이 있고, ‘자신을 낮추는 세리의 눈’이 있습니다. 또 ‘타인을 보는 눈’도 서로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이 있습니다. 곧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바리사이의 눈’이 있고,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세리의 눈’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향하는 곳’도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을 향하여’ 있었고,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곧 ‘마음의 눈’이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에,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은혜를 구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수도승이 ‘서원’을 할 때에는 먼저 서원 대상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수사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그러면 서원 대상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더욱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승은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동행’이 아니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길은 ‘여러 동료들’과 ‘기도해주시는 분들’과 함께라야 갈 수 있는 길이기에 ‘공동체에서’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도자는 ‘하느님의 자비’와 많은 분들의 ‘기도’를 먹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기도하는 이’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자비를 입었기에 자비를 베풀면서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끊임없이 기도에 사로잡힌 사람’이고자 하는 열망으로 살아갑니다. 저희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2016년에 의정부교구의 승인을 받아, 현재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제 ‘아홉 살’ 된 약하고 어린 수도원입니다. 저희는 ‘기도하고 일하고 읽어라’(기도, 노동, 성경읽기; 렉시오 디비나)라는 세 기둥을 중심으로, 한 곳에 ‘정주’할 것을 서원하고 살아가는 ‘수도승들’입니다.
그러기에, 수도원 밖에서 하는 ‘사도직’은 없습니다. 단지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정신에 따라서, ‘손님 환대’를 통하여 수도원 내에서 사도직을 수행합니다.
그러기에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수도원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9년 전에 네 명의 수도승들로 시작하였고, 그 후 한 명은 미얀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꾸렸습니다. 현재 저희는 회원 수가 세 배로 늘어나 9명이 함께 살게 되었고, 작년부터는 ‘수도승들의 방’이 모자라 세탁실을 숙소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숙소가 부족하여 한 명의 ‘종신서원자’는 아직 ‘손님집’에 기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곧 미얀마에서 3명의 수련자가 합류하게 되는데, 그들을 맞이할 ‘방’이 없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는 성소자가 줄어들고 있는 지금의 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행복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다급한 처지이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삼가 도움을 간청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가련한 처지를 헤아려주시어, 부디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간청 드립니다. 저희 수도승들은 비록 부족하고 보잘 것 없지만,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되고자 애쓰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사람, ‘끊임없이 기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도움을 주실 분들’께서는 ‘기도 내용’과 함께 연락을 주시면, 잊지 않고 ‘미사’와 ‘기도’로 함께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복음>의 반향을 되새겨 봅니다. ‘과연 나는 세리처럼,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서는 코리넬리우스가 베드로 사도에게 천사의 말을 전해줍니다.
“코리넬리우스야, 하느님께서 너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너의 자선을 기억하고 계시다.”(사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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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