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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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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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 부모님을 잘 알고 있는 교우분들 가운데 어느 분이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으셨네요.” 옆에 있는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어머니를 쏙 빼닮으셨어요.” 저는 이 두 분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였습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닮으셨어요.”
사실 생각해 보면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태생적으로 닮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서로 사랑하고 한 가정을 함께 책임지며 살아가는 동안 습관, 식성, 생활 방식, 가치관 등을 공유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까지도 비슷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단 제 부모님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당 주임 신부 시절, 수많은 부부를 바라보며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라는 말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닮은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를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유한한 사랑을 하는 이들이 서로 닮는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무한한 사랑을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세 위격은 서로의 존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였듯이 사랑은 본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을 자기 방식대로 끌어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존재 방식을 있는 그대로 잘 간직하도록 애써 줍니다. 그리하여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서로 일치하시는 가운데서도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외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 사랑의 신비 안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 순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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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신앙생활을 하며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이해하기 힘들어도 주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신앙생활을 하며 “성령이 나에게 오셨나? 성령이 충만하다. 주님과 가까워졌다”라는 느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보고 어떻게 하면 성령님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 더욱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떻게 생활해야 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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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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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삶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서로 사랑해서 하나가 된 부부도 계속 하나가 되어 그 행복을 유지하며 살려면 수많은 수고를 겪고 위기를 극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강력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수많은 갈등과 질곡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시면서도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고, 유일한 실체로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면서도 인간의 머리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존재론적 모순의 논리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존재론이나 논리학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끝없는 애정으로 성자를 바라보시고, 성자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향해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분 사이에 흐르는 그 뜨거운 사랑 자체가 바로 성령이시라는 어느 신부님의 설명이, 세 분이 동시에 한 분이라는 이 교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이 가장 뜨거운 신비에 참여하는 행복한 존재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와 사랑에 푹 빠진 기쁨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606
5월31일 [지극히 거록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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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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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qEU8bUIdgE
[서울대교구 김준휘 토마스데아퀴노(청소년국 중고등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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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의 화신(化身)인 예수님께서 어찌 가련한 인간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신앙 생활을 한 햇수는 점점 늘어나지만, 그에 비례해서 신앙의 깊이가 그리 깊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학교에 입학하고 수도회·수녀회에 입회해서, 오랜 양성 기간을 끝내고 봉헌생활자로 살아가지만, 목표했던 바처럼 영성 생활이 일취월장하지 않고, 지지부진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출발점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요, 우리 영성 생활의 기초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성찰하는 작업입니다. 은연중에 우리는 꽤 두렵고 경직된 하느님 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언젠가 도래할 종말을 하느님의 결정적인 심판이 이루어질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유다교 묵시문학의 영향 탓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을 무지막지한 심판자로만 생각하는 것, 우리 신앙생활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니, 언제나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바리사이계 유다 최고위원이었지만, 진리를 향해 열려있던 신앙인이었던 니코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유다인들 대부분은 무서운 심판자로서의 메시아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조만간 나타날 메시아를 정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엄격한 집행자로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요 신앙의 대상이신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니, 유다인들의 신앙생활이 부담스럽고, 힘겨울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하느님 상, 왜곡된 메시아 상을 바로잡기 위해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셨고, 공생활 기간 내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온몸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 이 명문장은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 구원 사업의 목적, 방법, 결론을 짧게 요약하고 있는데 이를 더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멸망이 아니라 영생, 심판이 아니라 구원!”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젠가 세월이 흘러 그분 대전으로 나아갈 때, 그간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의 대대적인 전환 작업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 각자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절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 육화 강생의 목적은 멸망과 심판이 아니라 영생과 구원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3위로 똘똘 뭉쳐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은혜롭게도 멸망을 피하고 구원을 얻는 방법, 누워서 죽먹기 보다 더 쉽습니다. 눈을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을 보내신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외아들,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현존과 동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며 일체의 다른 모든 우상 숭배를 끊는 것입니다.
사랑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그 사랑의 화신(化身)인 예수님께서 어찌 연약하고 가련한 인간을 멸망시키고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 심판하신다기보다는 우리 인간 각자가 스스로 심판을 초래한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결단을 촉구하셨고, 그 결단이 우리의 구원 혹은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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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가톨릭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심오한 신비를 기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계시는데, 이 세 분이 완벽하게 하나의 하느님이시라는 교리입니다. 많은 신자가 이 교리를 수학적인 공식인 ‘1+1+1=1’로 이해하려다 보니 골머리를 앓습니다. 도무지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니 그냥 덮어놓고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러분께 아주 발칙한 고백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저는 삼위일체 교리가 억지로 믿어야 하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제가 ‘하느님이 진짜 나의 창조주이심’을 확신하게 만든 가장 완벽하고 과학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교리가 아니었다면 저는 하느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우주의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르면, 어떤 물질도, 어떤 생명체도 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을 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은 ‘창조주’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 누가 나의 진짜 창조주인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논리적이고도 완벽한 4단계의 법칙을 통해, 왜 삼위일체 하느님만이 우리의 진짜 창조주일 수밖에 없는지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창조자라면 구원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최고급 인공지능을 탑재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로봇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로봇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걸려 시스템이 붕괴하며 죽어갑니다. 로봇은 살기 위해 묻습니다. “누가 나를 만들었을까? 나를 만든 자만이 내 시스템을 알고 나를 고칠 수 있다.” 그때 수많은 IT 기업이 다가와 서로 “내가 널 만들었다”라고 주장합니다. 로봇은 진짜 주인을 어떻게 가려낼까요?
단순히 “내가 널 만들었다”고 우기는 자가 주인이 아닙니다. 로봇의 시스템이 붕괴하였을 때, 그 내부 운영체제의 오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백신을 깔아 완전히 고쳐줄 수 있는 자만이 진짜 창조주입니다. 만들었다고 큰소리치면서 정작 고장 났을 때 고쳐주지 못한다면 그는 참 주인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기만 하고 젖을 주어 키우지 못한다면 참부모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2. 구원 계획이 구원 이전에 미리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류 역시 죄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걸려 죽음의 늪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신들을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 제39장 5절을 보면 “알라께서 하늘과 땅을 진리로 창조하셨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힌두교의 경전 춘도기야 우파니샤드 제6장 역시 절대자 브라흐만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고장 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이슬람교의 구원 방식은 율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입니다. 신은 하늘에 머물며 율법이라는 밧줄을 툭 던져줍니다. “이 밧줄을 꽉 붙잡고 네 힘으로 기어 올라와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불교나 힌두교는 어떠합니까?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카르마를 끊어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이 밧줄조차 내려주지 않으니, 자기 스스로 우물벽을 맨손으로 기어 올라가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완벽한 창조주의 구원입니까? 갓난아기처럼 똥통에 빠져 힘이 다 빠진 인간에게, “알아서 기어 올라와라”라고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방관입니다. 아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머릿속에 설계하지도 않고 무작정 아기부터 낳는 부모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었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고칠지 미리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 창조주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참된 창조주라면, 인간이 죄에 빠지기 전부터 성경이라는 ‘설계도’에 그 완벽한 구원 메커니즘을 미리 적어두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참된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이 무책임한 다른 종교의 신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통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것인지 구약성경에 치밀하게 예언해 두셨습니다.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며 죽음과 부활의 시간표를 보여준 요나의 표징을 보십시오. 또한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이사 53,5)라고 명시한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의 예언을 보십시오. 이 수많은 구원의 설계도와 예언들이 수백 년 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진짜 창조주만이 고장 난 피조물을 고칠 완벽한 설계도를 미리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3. 구원하는 과정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좁고 어두운 우물에 아이가 빠졌을 때, 진짜 부모는 위에서 “율법을 지켜라”, “스스로 깨달아서 올라와라”라고 소리치며 책을 던져주지 않습니다. 참된 창조주의 구원은 철저히 ‘삼위일체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전 세계를 울렸던 외국의 한 실제 구조 현장 영상이 이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걸음마를 갓 뗀 어린 아기가 지름이 수십 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좁고 깊은 우물 구멍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우물 입구가 너무 좁아 덩치 큰 어른들은 도저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어른들은 무작정 뛰어들지 않고 먼저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가 위에서 밧줄을 꽉 잡아당길 테니, 체구가 가장 작은 소년을 밧줄에 묶어 거꾸로 내려보내자.”
이 기가 막힌 구조 방법에 따라, 마을에서 가장 작은 일곱 살짜리 소년의 발목에 굵은 밧줄을 묶어 우물 속으로 거꾸로 매달아 내려보냈습니다. 캄캄한 우물 밑바닥에서 소년은 울고 있는 아기를 두 팔로 꽉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지상을 향해 소리칩니다. “당기세요!” 지상의 어른들이 일제히 밧줄을 끌어당겨, 소년과 아기를 무사히 구출해 냅니다.
여러분, 이 눈물겨운 구출 작전 안에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가 완벽하게 담겨 있습니다. 우물 밖에서 계획을 세우고 밧줄을 당기시는 어른들은 ‘성부 하느님’이십니다. 압도적인 거룩함을 지니신 아버지가 죄악의 좁은 우물에 직접 닿으면 세상이 타버립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간이 껴안을 수 있는 ‘인간의 작은 체구’를 입은 소년을 내려보내십니다. 그분이 바로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물 밑바닥까지 거꾸로 내려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두 팔을 벌려 우리를 꽉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당기시는 생명의 힘을 아들에게 끊어지지 않게 전달해 준 그 ‘밧줄’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나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부모가 아기를 키울 때 보여주는 이 절박하고 헌신적인 모습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이르러 우리를 살리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이 그토록 확연하고 눈부시게 드러난 것입니다.
구원의 과정에 이 완벽한 부모의 양육 방식, 곧 삼위일체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가짜 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그분만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진짜 창조주임을 굳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4. 구원될 수 있다면 구원자도 될 수 있게 만들어야 참 창조자입니다
마지막 4단계입니다. 참된 부모는 아기를 구원하고 젖을 먹이는 데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나서 자신과 똑같이 생명을 낳고 구원하는 ‘부모’가 되게 만듭니다. 참된 창조주는 피조물을 그저 불쌍히 여겨 살려두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본성을 수여하여 ‘구원자’로 격상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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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늘은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본당에는 이번 5월에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5월 2일에는 ‘성모의 밤’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드렸습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본당 공동체가 영적으로 풍성해질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5월 3일에는 ‘제2회 생활 성가 대회’가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웨스트플래이노 구역이 ‘나는 꽃이야’라는 노래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올해는 울림 중창단의 ‘인생’이라는 노래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5월 10일에는 ‘Mother’s Day’가 있었습니다. 작년처럼 올해도 ‘어머니 은혜’를 함께 불렀습니다. 5월 5일은 아버님의 15번째 기일이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사시도록 기도했습니다. 5월 16일에는 ‘다문화 미사’가 성 안나 성당에서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도 ‘사물놀이’ 팀과 ‘K Pop’ 팀이 참가했습니다. 5월 17일에는 ‘제8회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꿈과 재능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5월 24일에는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5월 29일에는 주일학교 여름 캠프가 시작되었고 오늘 돌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한 5월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사목회와 봉사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제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그러면 교우 여러분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무엇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일까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무엇이 하느님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말씀과 표징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땅에 묻히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 부활의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사랑일까요?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감성과 이성 그리고 오성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제8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 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 15)” 그리고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까닭에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무엇이 성령의 친교입니까? 사도행전은 성령의 친교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의 친교는 여러 은사로 나타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이는 믿음에 맞게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봉사하는 은사를, 또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와 권고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나누어 주는 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이는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이는 기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는 다양한 은사가 있지만 모두가 공동체를 살리고 세우기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을 강조하며, 각자가 받은 은사를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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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 이성으로는 완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 3,16). 외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하나뿐인 아들을 뜻합니다. 그 외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뜻대로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놓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고, 하느님의 영께서는 세례로 우리를 하느님의 품으로 이끄십니다. 서로 자신을 내어놓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는 수학 공식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홀로 계시지 않고 늘 함께 계시며,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인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이 사랑의 선물을 받고, 우리도 서로에게 사랑의 선물로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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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6-18: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
1. 삼위일체의 신비: 구원의 중심에 계신 하느님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낸다. 교회가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수난,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의 모든 신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우리 구원의 주체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라고 인사한다. 이 인사는 단순한 축복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적 생명과 인간의 구원 역사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고백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신비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삼위일체에서 나오며, 그 삼위일체를 향해 나아간다.”(234항) 삼위일체는 단지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관한 신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실재의 중심이다.(사도 17,28 참조) 우리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궁전”(1코린 6,19)이며, 삼위일체의 내적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무른다.
2. 하느님 아버지: 사랑으로 외아들을 내어주신 분
요한 복음은 이렇게 선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16절) 여기서 ‘내주셨다.’는 말은 단순히 ‘보내셨다.’는 뜻이 아니라, ‘넘겨주셨다, 죽게 하셨다.’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로마 8,32 참조) 곧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아들을 사랑 안에서 내어주신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게 하셨다기보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 아들을 우리 손에 맡기셨다. 그분의 죽음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다.”(Tractatus in Ioannem, 12,12) 이처럼 삼위일체의 첫 번째 신비는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아버지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을 원하시며(17절), 그분의 심판은 항상 사랑의 정의, 곧 ‘생명을 위한 심판’(요한 12,47)이 된다.
3. 하느님 아들: 사랑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들은 아버지 사랑의 선물이며, 동시에 그 사랑의 계시이시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으며,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아들을 본 이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Oratio contra Arianos, I, 20)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살아 있는 얼굴로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하신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분, 우리의 고통과 죽음에 참여하시는 분이 되셨다. 교리서는 이렇게 밝힌다. “성자는 인간을 하느님께 이끌고, 하느님을 인간에게 드러내신다.”(240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삼위일체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 자리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8)의 실체를 본다.
4. 하느님 성령: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분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그 사랑 안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시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을 때,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한다.”(De Trinitate, XV,17,31) 성령의 친교는 단지 개인적인 신심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치와 사랑의 원리다. 그분 안에서 교회는 하나 되고,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단순한 교의가 아니라, 삶의 모델이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삼위일체는 모든 인간 공동체가 닮아야 할 최고의 모범이다. 각 사람은 자신이 다르면서도 사랑 안에서 일치할 수 있다.”(1878항)
5.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사는 삶
프랑스 신학자 이브 드 몽슈이유(Y. de Montcheuil)는 말한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교회이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이 성취되는 곳이다.” 삼위일체의 삶은 사랑의 순환 속에 있는 관계의 삶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을 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자신을 내어드리며, 성령은 그 사랑의 흐름 안에서 모든 이를 하나로 묶는다.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도 이러한 ‘삼위일체적 사랑의 구조’를 닮아야 한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삶을 이 세상 안에 드러내는 길이다.
6. 결론: 삼위일체의 삶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
우리는 세례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마태 28,19)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는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머무는 삶이다. 이 신비를 믿고 고백하며, 그 사랑 안에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삼위일체의 살아 있는 성전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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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희망 사랑으로 우리>
요한 3,16-18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나이되 너이고
너는 너이되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에게 스미고
너는 나에게 스미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를 너에게 건네고
너를 나에게 건네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너를 나처럼 보듬고
나를 너처럼 보듬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만큼 있고
너는 나만큼 있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처럼 있고
너는 나처럼 있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와 다르되 같고
너는 나와 다르되 같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와 너 둘이되 하나이고
너와 나 둘이되 하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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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정훈 미카엘 신부님]
<닮은꼴>
‘함께 먹다’, ‘함께 놀다’, ‘함께 살다’는 띄어 쓰지만 ‘함께하다’는 붙여 씁니다. 인간(間)이라는 말은 사람들 사이 혹은 사람이 함께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를 보면 함께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모습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는가가 문제입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지옥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함께하기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는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얻으 려 산에 올라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렀습니다. 하느님은 이에 백성을 버리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서 나게 될 새 로운 민족과 동행할 의향이 있으시지만, 이 백성과는 더 이상 같이 가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이때 모세가 말합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길 바랍니다.”(탈출 34,9) 모세는 자신을 못살게 구는 백성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저희”라는 말로 함께 묶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접고 다른 이들의 편에 서는 중재자의 전형이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예형입니다.
바오로는 코린토 공동체에 보낸 첫 편지에서 “형제 여러분”이라는 말을 16번이나 쓰지만 둘째 편지에서는 두 번만 씁니다. 맘이 편치 않습니다. 바오로는 이미 그들에 게 눈물로 쓴 편지를 보냈고, 그들이 그릇될까 노심초사 하며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인 편지 말미에 화해를 청하며 서로 뜻을 같이하여 평화롭게 살자고 제안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2코린 13,13)라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아름다운 표현이 나옵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과 사랑과 친교만이 자신과 코린토 공동체 사이를, 또 분열된 공동체 자체를 화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곳, 화해와 공존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모세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인류 사이의 중재자가 되십니다. 세찬 바람이신 성령께서는 우리 사이의 불목과 분 열을 몰아내십니다. 예수님처럼 타인 편에 섭시다! 편 가르는 옹졸함에 사로잡힘 없이 하늘에서 오는 기운에 마음을 활짝 엽시다! 한 마음으로 서로를 성화시키면서 하나가 되는 부부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사 목현장> 52항 참조) 다투지만 화해하는 부부에게서 하느님이 보이고 골치 아픈 세상 안에도 하느님의 외아들이 계십니다. 이 사실을 신뢰하며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가 가장 인 간답게 되는 길이자 그분의 사랑을 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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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학생을 대상으로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수용될 때와 배제될 때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을 촬영하여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를 보았습니다. 게임에서 자기를 따돌리는 배제를 경험하면 스트레스가 일어나며, 뇌에서도 내측 대상 피질과 전성엽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이 부위는 신체적 통증이 있을 때 활성화되는 곳입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거나 집단에서 소외를 경험하는 것을 뇌에서는 신체적으로 몸이 아픈 것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절이나 소외로 심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 진통제인 타이레놀 먹는 것도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한다는 것 자체로 매우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적 통증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편하다, 귀찮다’ 등의 이유를 붙여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오히려 함께함으로 얻는 스트레스가 크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삶은 함께함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홀로’에서는 자기 몸에 계속 통증을 주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통증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하나를 이루는 신비를 직접 보여주시면서, 우리 역시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요한 3,16)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한 사랑의 친교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해 흘러넘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온전히 내어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자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세상에 오십니다.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성자는 파견되는 자로서의 역할을 취하십니다. 죄 많은 세상이 심판받아 마땅해 보이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성부 성자 성령이 나누는 신적 사랑의 사귐 안으로 우리가 초대받아 그 사랑을 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함께하는 기쁨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머물면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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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