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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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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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랑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함께 머무시고 그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런 일치를 도와주시는 분께서 성령이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성령께서는 그 말마디의 본디 의미에 따라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불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아 낙담하고 슬퍼하는 1세기 말엽의 신앙 공동체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하여 일깨웁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우리 신앙인의 삶 안에는 홀로 버려지는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 사이를 ‘알맞은 협력자’로 규정하셨고(창세 2,20 참조), 성령께서는 서로서로 도울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함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사도 2장 참조).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는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정의와 불의의 대립으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선을 지향하되 악을 만나 회개로 이끌고, 정의를 외치되 불의함을 함께 아파하며 고쳐 나가고, 진보의 개혁을 보수의 가치로 함께 고민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 아닙니다. 모든 이가 회개 안에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 하시고 함께 살아가게 하시려고 오늘도 성령께서는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가로막는 것은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를 가로막는 것이고,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단죄는 그 일치에 가장 큰 걸림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물리쳐야 할 악마가 아니라 회개와 용서로 보듬어야 할 작은 이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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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든든한 보호자를 만난 경험을 이야기 해봅시다. 어떻게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었는지 앞으로 이런 보호자를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나의 삶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공동체(나)와 성령과 함께 하지 못하는 공동체(나)의 차이는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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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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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과거에는 ‘성령’을 ‘성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초월적 신의 의미보다는 ‘바람, 숨결, 기운’과 같은 영의 활동이 성경에서 증언하는 보호자, 협력자로서 우리 곁에 숨결처럼 머무시는 예수님의 영을 적절하게 표현하기에 지금은 ‘성령’으로 부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예수님께서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살아 계신 영이십니다.
초기 제자들의 복음 선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병자들의 치유와 같은 표징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징을 본 것만으로는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씀은, 표징을 보고 그저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내적인 회심과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용기를 성령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할 수 있는 증언의 힘은, 지혜의 성령께 의탁하고, 기도의 응답에 따라 세상의 거짓과 위선을 식별해 내고, 예수님 말씀에 담긴 진리와 선을 담대히 따른 체험에서 나옵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쉽게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을 개인적인 은사의 원리로 여깁니다. 그러나 교회는 개별 신자가 받은 성령의 은사가 언제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 누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 사람의 은사는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거짓 은사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참조). 그 밖의 것들은 악에서 나온 것임을 명심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585
5월10일 [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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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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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UDaliNhbak
[대전교구 이정욱 다니엘(천안 구룡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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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엄청난 사랑의 기적을 연출하시는 성령님!>
젊은 사제 시절, 저희가 운영하던 아동 보육 시설에는 초등학생 꼬마들도 간간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하늘 같은 중고생 형들과 함께 사느라 고생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꼬마들에게 보호 본능이랄까 측은지심이 느껴져 더 각별하게 챙기곤 했습니다.
가끔 연피정이나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형들로부터 시달릴 꼬마들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은 꼬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거 있을 때는 그나마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곤 했는데, 이래저래 불안함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안그래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분리된 친구들인데, 이제 겨우 정붙이고 마음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데,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장시간 자리를 비운다니, 아이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종의 분리불안증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며 다독이고 그렇게 떠나곤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과의 분리로 인해 걱정이 태산인 제자들과 오늘 우리를 향해 손수 우리의 등을 다독다독 두드리시면서 안심시키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내 일시적인 부재로 인해 너희는 근심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걱정을 하지 말거라. 그 근심은 잠시뿐이란다.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란다. 내가 즉시 다시 돌아올 것이란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주님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곧 돌아온다 해 놓고, 안 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주님께서는 100퍼센트 확실히 돌아오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승천하시자마자 약속하신 대로 즉시 당신의 대리자요, 우리를 악으로부터 영원히 지켜줄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가운데 머무시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 삶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참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겠지요.
중재자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짓 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나약함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큰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당신께 합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꿰매주십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올무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잔잔하고 깊은 영적 샘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가끔 만나는 교우들 가운데, 놀라운 신앙의 소유자들을 뵙습니다. 어찌 그리도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닐 수 있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사랑의 기적을 연출하십니다, 그 배경에 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성령의 굳건한 현존과 활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지만, 보호자 성령께서 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두려움을 기꺼이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협박한다 할지라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아무리 요동치고 뒤집힌다 할지라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풍파를 견뎌낼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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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상은 왜 성령을 알아보지 못할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요한 14,15-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홀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진리의 영이신 ‘다른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약속의 끝에 아주 뼈아픈 진단 하나를 덧붙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성령을 보지도, 알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영이 우리 곁에 오셨는데, 왜 똑같은 눈을 달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그 위대한 현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뇌가 수신하고 있는 ‘주파수’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7년 1월의 어느 추운 아침, 미국 워싱턴 D.C.의 랑팡 플라자 지하철역 입구에 평범한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은 그를 흔한 거리의 악사쯤으로 여기고 무심코 지나쳤습니다. 45분 동안 그가 연주를 하는 사이, 무려 1,097명의 사람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악사는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습니다. 그가 들고 연주한 악기는 1713년에 제작된 350만 달러(약 45억 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명기였고, 그가 연주한 곡은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답고 난해한 곡으로 평가받는 바흐의 ‘샤콘느’였습니다. 불과 이틀 전, 보스턴 극장에서 열린 그의 똑같은 연주회는 한 좌석에 10만 원이 넘는 표가 매진될 정도로 대성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하철역에서 45분 동안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발걸음을 멈춘 사람은 단 7명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세계 최고의 거장이 뿜어내는 수십억 원짜리 천상의 선율을 곁에 두고도, 시계를 쳐다보며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을 타러 가버렸습니다. (출처: 워싱턴 포스트, 「진주 실험」 2007)
왜 사람들은 그 엄청난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영혼과 뇌의 주파수가 ‘돈을 벌러 직장에 지각하지 않고 가야 한다’는 치열한 생존과 욕망의 채널에 완벽하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존 본능이라는 주파수에 고정된 귀에는 바흐의 명곡도 그저 성가신 지하철 소음으로 들릴 뿐입니다. 이것보다 더 치명적인 잘못은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려는 이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들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모든 맛이 그렇습니다. 맛을 보아야 맛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은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라고 선언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상실한 채, 자기 힘으로 돈과 권력을 쥐고 살아남아야만 하는 ‘고아의 주파수’로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의 유일한 주파수는 ‘사랑’인데, 그들은 애초에 남을 사랑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니, 내 힘의 한계에 부딪힐 일도 없고, 한계에 부딪히지 않으니 성령의 도우심을 청할 이유도 없습니다. 성령의 힘을 체험해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성령이 무엇인지, 어디에 계신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갇혀 있는 자에게
성령의 위대한 사랑과 진리의 숨결은 그저 무의미한 소음이나 환상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는 이 사랑의 플러그를 꽂지 않고 꼼수로 전기를 훔쳐 쓰려는 자의 비참한 최후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를 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내려옵니다. 이것을 본 마술사 시몬은 그 놀라운 권능을 탐내며 사도들에게 돈을 내밉니다. “나에게도 그런 권한을 주어, 내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게 해 주십시오.” (사도 8,19)
시몬은 세상의 주파수(돈과 권력)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이 성령의 능력만 외장 배터리처럼 사려고 했습니다.
희생과 순종, 이웃 사랑이라는 ‘플러그’ 없이 돈으로 전력을 끌어다 쓰려 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사도 8,20)라며 무섭게 저주합니다.(출처: 『주석 성경』 사도행전 8장) 성령은 결코 세상의 얄팍한 거래로 수신할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자아를 부수고 십자가의 계명, 곧 사랑에 나를 끼워 맞출 때만 접속되는 숭고한 신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가짜 주파수를 끊어내고, 어떻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수신하여 내 영혼의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 완벽한 전환 스위치를 오늘 복음 첫머리에 명확하게 제시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바로 ‘사랑의 계명 안에 머무는 실천’입니다. 이 원리를 현대 공학의 ‘무정전 전원 장치(UPS)’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UPS는 병원 수술실이나 대형 서버실에 필수적으로 설치되는 장비입니다. 외부의 메인 전력이 갑자기 끊어지는 정전 사태가 발생해도, UPS는 0.1초의 오차도 없이 자체적인 무한 전력을 공급하여 생명 유지 장치나 컴퓨터가 꺼지지 않게 막아줍니다. 성령은 바로 우리 영혼 내부에 장착된 하느님의 무정전 전원 장치입니다. 내 인간적인 인내심과 사랑의 능력이 바닥나서 절망이라는 끔찍한 정전이 닥쳤을 때, 성령은 내 영혼이 타죽지 않도록 무한한 은총의 전력을 공급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치명적인 물리적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수백억 원짜리 최고급 UPS가 설치되어 있어도, 전자제품의 플러그가 그 장치의 콘센트에 꽂혀 있지 않다면 정전이 일어났을 때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도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계명을 지켜라”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귀찮게 하려는 구속이 아닙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억울함을 십자가로 봉헌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내 것을 나누어주는 그 ‘사랑의 실천’은, 내 영혼의 플러그를 성령이라는 무한한 발전기에 물리적으로 꽂아 넣는 유일한 접속 행위입니다.
저는 성령님의 존재를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이 언제나 ‘성체조배’입니다. 나는 가지이기 때문에 나무에 붙어있으면 그 수액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맺히는 열매를 보면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사제가 아니면 이만큼 성체조배를 할까요? 안 할 것입니다. 저는 성체조배를 통해 강론도 준비해야 하고 그 에너지로 신자들을 대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려 하기 때문에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성령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그 일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 성령님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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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Mother’s Day입니다. 어머니는 6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토록 사랑하신 아버지와 함께 여전히 저와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두 분의 사랑으로 제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연히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아버지는 강인한 성격과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지만, 체질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이 일찍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고, 혈압이 높았습니다. 어머니는 온유한 품성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녔지만, 체질은 좋았습니다. 머리카락도 검었고, 치아도 좋았고, 혈압도 정상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성격과 어머니의 체질을 닮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체질은 아버지를 닮아서 머리카락도 일찍 하얗게 되었고, 치아도 좋지 않았고, 혈압도 높았습니다. 성격은 어머니를 닮아서 온유한 편이고, 쉽게 결정을 못 내리는 편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체질과 성격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그런 부모님을 닮아서 감사합니다. 체질은 노력으로 좋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격은 더 좋은 분들의 도움으로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제자들을 이끌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이 약했던 토마 사도를 나무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그러자 토마는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천천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빵을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분께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을 때, 우리와 빵을 나누셨을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권력의 길이 아닙니다. 명예의 길이 아닙니다. 성공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진리는 남을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죄인일지라도, 아픈 사람일지라도, 외로운 사람일지라도,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생명입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핵심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협조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이제 성령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오늘 제2독서도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그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살 수 있도록 가장 소중한 선물,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요구하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내어주는 삶을 살 것인지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먼저 사랑하고, 먼저 내어주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단순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쩌면 단순합니다. 내게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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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머무르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머무르시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인 팀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진 가문의 남자입니다. 그는 이 능력으로 과거를 바꾸려 하지만 바라지 않는 결과가 함께 생김을 알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행복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낸 뒤에, 시간을 되돌려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 보지 못하였던 삶의 아름다움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팀은 깨닫습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삶을 바꾸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깊게 바라보며 온전히 그 속에 머물 때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병철 교수는 『시간의 향기』라는 책에서 현대를 ‘시간이 사라진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것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에 대한 강박이 삶의 의미를 잃게 하고 시간의 향기를 사라지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안으로 관상의 삶, 곧 머무름의 기술을 제시합니다. 무엇인가를 바꾸거나 행동에 옮겨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서서 삶을 깊게 바라볼 때 시간의 향기와 의미가 드러납니다.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 안에 머무르실 수 있도록 우리에게도 머무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머무름의 시간을 오롯이 가져 보십시오. 머무를 줄 아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오시어 함께하실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머물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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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1. 사랑으로 시작되고 사랑으로 끝나는 복음
오늘 복음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5절)라고 말씀하시며, 참된 사랑은 말이 아니라, 순명과 행위 안에서 증명되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사랑하는 이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며,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 안에는 곧 성부와 성자의 현존이 드러난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는 무익하고, 계명이 없는 사랑은 진실하지 않다. 사랑과 계명은 분리될 수 없는 쌍둥이와 같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65,1)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인식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동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분을 더 깊이 아는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이다.
2.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리라.”(요한 14,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떠남으로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주신다. “다른 보호자”(Paracletos)란 ‘곁에서 위로하고, 변호하며, 돕는 이’를 뜻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보호자이셨듯이, 이제 성령께서 그 역할을 이어가신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17절) ‘보다’(theorèin)라는 단어는 단순히 시각적 행위를 넘어,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는 통찰을 뜻한다. 세상은 이 눈을 갖지 못한다. 빛이 비추지만, 어둠은 그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요한 1,5)과 같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성령께서는 교회의 숨결이시다. 그분이 없다면 교회는 움직일 수 없다. 그분이 임하실 때, 모든 것은 다시 생명을 얻는다.”(In Ioannem Homilia 77,3)라고 하였다. 성령은 단순한 위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협조자이시며,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3.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요한 14,18)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신다. 그분의 떠남은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현존의 시작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다.”(19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신앙인의 마음 안에 현존하시며, 그 현존은 성령을 통해 지속된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삶 안에서 반복되는 현재의 체험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0절)
성 치릴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신다면, 우리는 부활의 삶을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In Ioannem Commentarius X, 2)라고 말한다.
4. “너희 마음 안에 머무는 희망을 말할 준비를 하라.”(1베드 3,15)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한 사람은 자연스레 희망의 증인이 된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받는 교회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부활의 힘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용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 이 말씀은 파스카의 신비를 압축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의 약함과 죽음 속에서도 부활을 일으키시는 능력이다.(로마 8,11 참조) 성 요한 다마스코는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닻이다. 풍랑이 몰아쳐도 그 닻이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에 배는 결코 전복되지 않는다.”(De Fide Orthodoxa II, 27)라고 하였다.
5. 우리의 부활 체험: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가기
부활의 신비는 역사 속 사건이면서도, 우리의 일상 안에서 계속 실현되는 ‘지속적 창조’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세상의 미움과 폭력, 부정 속에서도 사랑의 힘은 여전히 새 생명을 낳는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봉사와 사랑의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성령의 숨결 안에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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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시오>
요한 14,15-21 (성령을 약속하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벗들이여,
내가 벗들과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입니다.
벗들이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벗들은 올 수 없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벗들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지금 눈물 흘리지 마십시오.
다만 내가 유언으로 남기는 새 계명을 지키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벗들을 사랑한 것처럼
벗들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벗들을 사랑하기에 벗들을 떠나야만 하고,
벗들을 떠나는 것이 벗들을 사랑하는 것이니,
떠나야만 하는 나를 야속하다 마십시오.
떠나야만 하는 나를 붙잡지 마십시오.
나를 기꺼이 보내주십시오.
나를 더욱 사랑해주십시오.
벗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키십시오.
벗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사랑함으로서 나의 벗이라는 것을 드러내십시오.
나의 벗임을 드러냄으로써 나를 드러내십시오.
나는 사랑했습니다.
나는 사랑합니다.
나는 사랑할 것입니다.
나는 사랑입니다.
세상이 나를 죽이려 합니다.
세상은 미움이기에 나를 죽이려 합니다.
미움인 세상이 사랑인 나를 죽이려 합니다.
나는 사랑이기에 기꺼이 죽습니다.
세상은 죽임으로써 스스로 미움임을 드러내고
나는 죽임 당함으로써 스스로 사랑임을 드러냅니다.
그러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나의 죽음으로 사랑이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단 하나의 일은 오직 사랑하는 것,
그 일을 하는 벗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이듯이
나의 벗들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인 나를 죽인 미움인 세상이
사랑인 벗들 역시 죽이려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계속 사랑하십시오.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더욱 사랑하십시오.
사랑인 내가 떠나도 벗들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떠난 빈자리에 사랑의 성령께서 함께 하시리니.
미움인 세상은 사랑이신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겠지만
사랑인 나를 닮은 사랑인 벗들은
사랑 안에서 그분을 곱게 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나는 떠나고 벗들은 남습니다.
사랑하기에 나는 떠나고
사랑하기에 벗들은 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벗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벗들은 내 안에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벗들과 나는 하나입니다.
벗들과 내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십시오.
그러니 두려움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니 주저함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니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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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이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길 바란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이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이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 시켜주는 큰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실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께서 청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보호자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보호자는 누구인가? 진리의 영이시다.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체험하도록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 때 영을 알아보게 되고, 육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을 만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보호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영적 삶으로, 천상을 갈망하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아니 천상을 이미 여기서부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이다.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보상 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방식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마음속에 묶어두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더해간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이다.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준다. 사실 사랑에 대한 보상은 사랑이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이다. 일상에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지속 시켜주는 힘은 사랑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우리의 밥이 되어주신 사랑이다. 모두를 내놓는 사랑이다. 목숨까지도.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많아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 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라고 하셨다. 인격적인 사랑은 인격의 지성, 정서, 의지에 일치한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 사랑은 그분의 비전과 열정에 동화될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쁨,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가운데 평화를 차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다. 사랑의 내적 진실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요구를 헤아리고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것도 하나 해내지 못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하며 불평 불만하지 말고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다. “우리 인생이 기계라면, 미움은 모래이고, 사랑은 기름이다.” 기계에는 반드시 윤활유가 필요하다. 우리 삶에는 사랑이 필수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
주님의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듯 우리가 서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증언한다. 약속 이행은 사랑의 증거다. 하느님과의 약속, 부모와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그리고 이웃과의 약속에 충실한 만큼 사랑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 주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오늘 복음을 보자. 예수님께서“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하셨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을 약속해 주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
“주님,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부디 저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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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많은 이가 아름다워지려고 합니다. 막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화장하고 성당에 온 것을 보았습니다. 화장하지 않아도 매우 예쁜데도 왜 화장할까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화장하고 또 예쁜 옷을 입고 때로는 성형까지 하는 것 모두가 아름답게 보이려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아름답다’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하지만 15세기 문헌 ‘석보상절’에서는 ‘아름답다’를 ‘아(我)답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는 ‘나’를 의미합니다. 즉, 아름다움이란 나 자신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답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숨기려고만 하기에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그 창조 목적은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시니 좋은’ 것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수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로 시작해서,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로 맺습니다. 처음과 끝에 사랑을 위치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사랑을 단순한 감정적 떨림이나 낭만적인 고백 정도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너는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야.’, ‘부담 주고 싶지 않은데, 내 마음을 솔직히 전하고 싶어. 사랑해.’, ‘너를 사랑하고 난 뒤, 평범한 하루도 조금 특별해졌어.’, ‘내 마음이 자꾸 너에게 가. 이제는 숨기기보다 알리고 싶어. 사랑해.’ 등의 표현으로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사랑은 그분이 주신 계명(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구체적인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성부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더욱 깊이 드러내십니다. 특히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새로운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바로 ‘다른 보호자’, 성령입니다. 이 진리의 영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갇힌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안에서 머무르고 활동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나답게, 즉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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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