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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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 (5-7장)
1) 행복선언: 5, 1-16
2) 율범의 완성: 5, 17-37
3) 새로운 삶의 태도: 5, 38-7,29
복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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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은 세속적인 기준에 따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이른바 착한 사람들, 의롭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행복을 채워 주시면, 그 많은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도 참된 행복이 마음속에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산상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산상 설교의 참된 행복은 현실의 역동성 안에 드러나는 것이지, 미래에 막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의 조건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복을 말합니다. 지상에서 가난한 마음, 겸손의 영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를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유함과 의로움과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안에서 주어지는 예수님의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의 삶 속에 불멸의 평화가 가득 찹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다가 어려움이나 박해를 당할 때, 우리는 불사불멸의 즐거움, 영원한 상급의 전조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이 내 안에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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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나는 영의 부요함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세상의 기쁨을 끊을 때 참 신앙의 기쁨을 느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주위에 좋지 않은 조건에서도 행복한 형제/자매를 본적이 있는지, 아주 좋은 조건에서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나는 현재 조건이 좋던 그렇지 않던 행복한 느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어떤 요소가 나의 행복과 불행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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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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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입니다. 종교에 대한 이런 오해는, 종교가 죽음 후에나 누리는 천당이라는 환상 속의 행복을 설정해 놓고, 사람들을 달래고 마취시켜서 착취 계급에 순종하도록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옵니다.
그러나 산상 설교의 참행복은 오히려 현실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것이지, 미래에 주어질 이런 몽환적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난하고 슬프게 살면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현실에서 가난한 마음, 빈 마음이 되었을 때 누리는 하늘 나라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슬픔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가 있고, 우리의 온유함 안에, 의로움과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안에 그리고 평화를 일구어 가는 우리의 삶 안에, 이미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다른, ‘참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이런 참된 행복을 맛보고 살지 못한다면, 죽음 이후의 하느님 나라에서 주어질 기쁨은, 내가 누릴 수 없는 ‘낯선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한 번도 하느님 나라를 맛보지 못한다면, 미구에 주어질 하느님 나라도 결코 ‘나의 나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적어도 단 한 가지라도 참행복을 맛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여덟 가지 행복 가운데 우리 자신은 어떤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는지요?(출저: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4396
11월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역하는 위령의 날/연중 제3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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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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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elrPMnZeK4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 담당 반유성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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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 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눈길 교통사고로 생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임사 체험을 했던 헨리 나웬 신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요르단강을 살짝 건너갔었을 때 받았던 가장 강렬한 느낌은 극진한 환대였습니다. 환한 웃음, 활짝 두 팔 벌린 세상 자상하신 분으로부터 세상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때, 평생토록 나를 억압해왔던 두려움, 상처, 분노, 굴욕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특별한 임사체험 이후 헨리 나웬 신부는 우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각자 죽음의 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위대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하십시오.”
오늘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한바탕 불꽃놀이 하듯이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다 알차게, 보다 계획적으로, 보다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이 아닐까요? 바로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기간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 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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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은 언제, 왜 죽고 싶어질까? 죽은 자를 기억할 줄 모를 때>
영화 ‘P.S. 아이 러브 유’(2007)에서, 주인공 홀리는 가장 사랑하는 남편 제리가 뇌종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삶의 모든 의욕을 잃고 집안에 틀어박혀 절망에 빠집니다. 그녀는 남편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30번째 생일날, ‘죽은 남편’ 제리로부터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합니다. 제리는 자신이 죽은 뒤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그녀가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편지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새 옷을 사러 가”, “무대에 올라 노래해 봐”, “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나”… 남편이 ‘죽음 너머에서’ 보내오는 사랑의 편지들은, 절망에 빠져 있던 홀리를 한 걸음씩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마침내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애니메이션 ‘코코’를 보면,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 전통이 나옵니다. 그 세계관에서 영혼의 ‘최종적인 죽음’은, 이승에서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찾아옵니다. 기억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위령의 날 죽은 자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는 저승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죽고 싶을까요? 사람은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사랑’입니다. 기름 없는 차는 움직일 수 없듯이, 사랑받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은 ‘사랑받지 못함’과의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화가가 되어서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광인’이라 조롱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랑은 동생 테오의 재정적, 정서적 지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이 동생에게 짐이 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자신의 귀를 자른 충격적인 사건 역시, 유일하게 곁에 있던 친구 고갱마저 자신을 떠나려 하자 벌인 극단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슬픔은 영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아무도 없는 밀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죽음은 세상의 몰이해와 냉대 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던 한 영혼의 마지막 절규였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했던 부모를 기억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자신은 사랑받았고, 자신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미녀가 진짜 괴로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세상의 사랑을 위해 아버지의 사랑을 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여길 때 살고 싶은 마음을 잃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이유도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 분들은 죽어서도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위 영화 ‘P.S. 아이 러브 유’에서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어, 그 홀로 남은 사람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믿음을 줍니다.
가수 비, 곧 정지훈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삶을 막살아버리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침대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의 편지와 통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엄마는 이 통장의 돈을 남기기 위해 짐이 되지 않으려고 어쩌면 먼저 하늘나라로 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에 자극받는 비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이것이 ‘기억’의 힘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기억하려 할 때 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느낌을 되살립니다. 그래서 자존감을 주고 살아갈 힘이 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나를 ‘기억’ 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파스카의 기적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 기둥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미사'(전례)와 ‘기도’는 바로 이 ‘기억’을 위한 거룩한 장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섯은 슬기로웠고 다섯은 미련했습니다. 그 차이는 단 하나, ‘기름’을 준비했느냐의 여부였습니다.
이 ‘기름’은 무엇일까요? 이 기름은 바로 ‘기억’입니다. 더 정확히는,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억’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에너지를 잃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귀한 자녀인데, 어떻게 저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라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편지’로 자신을 기억하게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방식으로
그 기억이 되살아나게 하십니다. 추운 겨울밤, 방안에 온기를 지펴주던 연탄불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연탄불을 보면, 한겨울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일어나, 그 차가운 연탄을 갈아내시던 어머니와 어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기억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제 가슴을 데우는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온기가 바로 제가 오늘을 살아갈 ‘사랑의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를 가장 사랑한 표징은 ‘밥’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밥은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박철민 씨가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음식들을 셰프들이 한 것을 먹고는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합니다.
잊혀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기억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미련한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여 기름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미련한 처녀는 구체적으로, 아침기도는 하면서
‘저녁 기도’는 생략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만약 아침기도 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녁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은, 등불은 가졌으되 기름을 채우지 않는 ‘미련한 처녀’의 모습입니다.
왜 저녁이 중요합니까? 창세기는 하루의 완성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창세 1,5) 고 말합니다.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요 기준입니다. 우리의 죄는 대부분 ‘저녁’에, 즉 하루의 에너지가 다 떨어졌을 때,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저녁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면, 그 기름을 밤을 밝은 대낮처럼 잘 지내게 할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시간도 바로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 오후 세 시였습니다. 그분은 하루가 저무는 가장 어두운 시간에 당신의 피로 ‘기억’의 기름을 우리에게 쏟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복음은 우리 자신을 향한 경고입니다. “너는 너의 등불에 아침저녁으로 기름을 채우고 있느냐?”
우리는 모두 인생의 ‘저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죽음’이라는 문 앞에서 신랑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기도는 물론이요, ‘저녁 기도’로,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기름을 채워 넣을 때, 우리는 미련한 처녀처럼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슬기로운 처녀처럼, 우리의 따뜻한 ‘기억'(기름)이 담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며 당당히 그분께 나아갈 것입니다.
지금 이 미사 중에,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차가운 심장을 성령의 ‘온기’로 채워주시도록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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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남부 사제 모임에서 이제 곧 은퇴를 앞둔 신부님이 강론하였습니다. 한 본당에서 27년 동안 사목하였습니다. 중남부 사제 모임의 ‘산 증인’입니다. 신부님은 강론 중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것이 4가지 있습니다. 목소리, 얼굴, 성격, 운명입니다. 목소리는 바꿀 수 없지만 목소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상냥한 목소리, 따뜻한 목소리는 이웃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얼굴은 바꿀 수 없지만 표정은 바꿀 수 있습니다. 웃는 얼굴, 밝은 얼굴, 온화한 얼굴은 이웃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격은 바꿀 수 없지만 성품은 바꿀 수 있습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는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양지심의 마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겸손함으로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는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오지심의 마음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비지심의 마음으로 선과 악을 식별하는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운명을 대하는 마음은 바꿀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거친 파도에서도 배를 항구로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우 속에서도 춤출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은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죽음의 강을 건넌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허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죽음이기에 살아 있을 때 먹고 즐기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죽음이기에 타인의 죽음까지도 함부로 여기기도 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지우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끊어 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죽음의 인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듯이,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데려가시리라.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거룩한 삶을 살았던 욥은, 충실한 삶을 살았던 욥은 사탄의 시험을 받아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재산과 명예 그리고 소중한 가족을 잃어야 했습니다. 몸은 종기와 부스럼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욥이 희망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언제가 하느님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와 죽음을 견디며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을 다시 보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5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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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로부터 우리 교회는 신자들에게 ‘사말’ 교리를 가르쳐 왔습니다. 사말이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때의 네 가지, 곧 죽음, 심판, 천국, 지옥을 말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결국 죽어서 심판을 받고, 그러고 나서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야 하는데, 이를 옛 천주교 교리에서 ‘사말’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여러분은 죽으면 어디로 갈 것 같으세요?” 교우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많은 분이 ‘연옥’이라 답합니다. ‘지옥’이라고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잘 살지는 못하였어도, 신자답게 살아 보려고 애써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 있게 ‘천국’이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옥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충실하고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한 영혼이 겪게 되는 ‘정화’ 과정이 연옥입니다. 우리는 연옥을 거쳐 하느님 곁으로 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희망입니다.
오늘 첫째 미사의 복음은 어제 복음과 같은 ‘참행복’에 관한 산상 설교입니다. 놀랍도록 큰 희망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며, 의로움을 간절히 바라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아야 얻고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에라도 속하면, 그래서 하느님께 가닿으면 됩니다. 참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길목에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넘어 그것을 온전히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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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30: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1.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날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날이다. 또한 아직 완전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정화의 여정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날은 단순히 죽은 이를 위한 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맞이하게 될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며 지금의 삶을 되돌아보는 영적 성찰의 날이기도 하다.
2. 연옥: 하느님 자비의 불
오늘 우리는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온 “연옥(煉獄)”에 대해 묵상한다. 연옥은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마침내 완성되는 정화의 과정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누구도 완전히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그분 앞에 나아가려면 모든 결점이 사랑으로 정화되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정의로 심판하시지만, 그 정의는 자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Enchiridion, 68) 이러한 정화의 상태를 교회는 ‘연옥’이라 부르며,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가 동시에 드러나는 자리로 이해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단죄하기보다는, 그분의 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마지막 정화의 은총을 주시는 것이다.
3. 교회의 교리와 전통 속의 연옥
연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의 긴 역사 안에서 정립되었다. 리용 공의회(1274)와 피렌체 공의회(1439)는 연옥의 존재와 그 영혼을 위해 산 이들의 기도와 미사, 선행이 유익하다고 가르쳤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연옥의 영혼들을 위한 기도와 대속(代贖)의 행위가 참으로 도움이 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은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이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가르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이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한 몸 안에서 그들이나 우리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Homilia in Philippenses, 3)
4. 연옥의 정화와 희망
연옥의 영혼들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정화의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그 고통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 안에서의 고통이다. 그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며, 하느님께 도달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는 ‘연옥 논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연옥의 영혼들은 고통받지만, 그 고통 안에 가장 큰 기쁨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께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옥의 고통은 하느님의 사랑이 불처럼 작용하는 정화의 과정이다. 이 불은 미움의 불이 아니라, 불순물을 태우는 사랑의 불, 곧 하느님 자신이다(히브 12,29 참조).
5. 산 이들의 사랑: 통공의 신비
연옥의 영혼들은 더 이상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지상에 있는 우리들의 기도와 희생, 미사를 통해 그들의 고통은 줄어들고 정화는 빨라진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돌아가셨을 때,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녀가 대신 그 빚을 갚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는 것과 같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아가 8,6 참조). 성녀 모니카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 아우구스티노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내가 어디에 묻히든 상관없다. 다만,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Confessiones, IX,11) 오늘 우리가 드리는 위령의 미사는 바로 그 기억과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가 바치는 이 미사와 기도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받아들이시어, 연옥의 영혼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것이다.
6. 모든 성인의 통공: 하늘과 땅의 연결
우리는 신앙의 고백 속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지상의 교회, 연옥의 교회, 천상의 교회가 서로 떨어져 있는 세 공동체가 아니라, 한 몸, 한 교회임을 의미한다. 천상의 교회는 완전한 일치 속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한다. 연옥의 교회는 정화 속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며,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 지상의 교회는 기도와 선행으로 그들과 통공한다. 이 세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이며, 우리의 사랑은 죽음으로 끊어지지 않는다(로마 8,38-39).
7. 복음의 위로: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은 단지 살아 있는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피로한 영혼들, 특히 정화 중인 영혼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다. 그분의 멍에는 부드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품 안에서 모든 영혼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다.
8. 결론: 사랑의 기념과 희망의 기도
오늘 우리는 돌아가신 부모님, 형제자매, 친지들, 그리고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을 기억한다. 그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르도록 기도하자.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며 어떠한 고통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다.”(지혜 3,1) 우리가 오늘 드리는 이 미사 안에서 그들의 평화를 빌며, 동시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새롭게 다짐하자. 우리의 삶 또한 언젠가 주님의 품 안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 안에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주님, 죽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이 그들에게 비추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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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로>
마태오 11,25-30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대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믿으시니
믿고
믿으니
믿으십니다
희망하시니
희망하고
희망하니
희망하십니다
사랑하시니
사랑하고
사랑하니
사랑하십니다
섬기시는
섬기고
섬기니
섬기십니다
살리시니
살리고
살리니
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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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령의 날에 실천하는 보속과 기도는 사랑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1)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늘나라에들어가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위령의 날’은 그 영혼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기도하고 보속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위령의 날’의 기도와 보속은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 실천’이니까 ‘나 자신’을 위한 일도 됩니다.> 우리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는 곳이고, 하느님과 함께 완전하고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인 성녀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그분들에게 부탁합니다.>
연옥은, 희망 속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 부족한 보속을 채우는 곳이기 때문에 ‘임시 거처’입니다. 그래서 연옥은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지는 하늘나라뿐입니다. 우리가 연옥의 존재를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즉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지옥은 최후의 심판이 끝나면 영원히 소멸됩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묵시 20,13-14) 그래서 지옥도 심판 때까지만 존재하는 ‘임시 감옥’입니다.>
2) 지금의 삶이 너무 힘들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면, 그렇게 희망을 버리고 절망에 빠져버린다면, 삶이 곧 지옥이 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인내하면, 연옥에서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3) 산상설교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하늘나라에 5 자격에 관한 가르침, 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채워야 하는 조건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옛날에는 ‘진복팔단’이라고 표현했는데, 하늘나라의 행복이 여덟 가지인 것은 아니고, 또 자격이 여덟 가지인 것도 아닙니다. ‘참 행복 선언 말씀’은, 사실은 하나의 행복과 하나의 조건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즉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하나의 행복’과 그 행복을 얻어 누리려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의 조건입니다. ‘마음의 가난함, 슬퍼함, 온유함,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 함, 자비, 마음의 깨끗함, 평화 실현을 위해서 노력함, 박해를 견디어냄’은 모두 ‘신앙인답게 사는 것’ 하나입니다. 표현만 조금씩 다를 뿐이고,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여덟 가지나 된다고 부담스러워할 것도 아니고, 여덟 가지 중에 하나만 해도 된다고 말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의 가난함과 깨끗함을 실천하고, 온유함과 자비도 실천하고,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고, 박해를 받아도 인내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한 번에 그것을 다 실천할 수 있나?”라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면 당연히 다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 위로를 받는 것, 흡족해지는 것, 자비를 입는 것, 하느님을 뵙는 것,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은 모두 하늘나라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일 뿐이고, 사실은 하나의 행복입니다.
4)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어떤 업적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어떤 결과를 요구하신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예로 들면, 예수님께서는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을 뿐이지 정의와 평화를 실현시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 하는 모든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우리 위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뿐입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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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왕년에’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이런 말을 듣다 보면, ‘노인은 반성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내가 왕년에’라는 식의 말을 자주 하면서라고 자기를 반성하기보다 내세운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도 ‘그렇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반성합니다.
이렇게 ‘왕년에’를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을 불행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계속 과거의 시간에만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럴까요? 아마 미래의 시간에도 분명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지금을 떠올리며 ‘왕년에’,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지금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습관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을 탐내는 것입니다.
습관은 계속 반복함으로 인해 생기게 됩니다.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것도 오랫동안 반복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처음부터 새벽형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과거를 말하는 것도 계속해서 그 시간만을 바라보려 하기에 습관이 된 것입니다.
습관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이고, 나에게 딱 맞는 시간임을 계속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지금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며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지금껏 살아온 생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그럴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뇌를 측정해 보니, 심장이 멈추기 전 30초 동안 과거를 회상할 때 나타나는 뇌파 활동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과연 그 30초 동안 어떤 과거를 떠올릴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제서품을 받을 때, 제대 앞에 엎드립니다. 하느님과 교회 앞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주마등처럼 저의 삶이 떠올려졌습니다. 어떤 삶일까요? 감사한 일들, 사랑받았던 일들이 마구 떠올려졌습니다. 눈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나인데….’, ‘이렇게 죄 많은 나인데….’ 그런데도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 직전에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금을 잘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기억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후회하는 삶, 과거에 연연하는 삶, 걱정하는 삶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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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인간의 노력과 공덕만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더 열심히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위해 그분들의 기도를 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인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운명인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의미와 지향을 새겨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임을 알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바쁜 탓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희로애락들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가끔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세상에 대한 미련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남아를 선호하고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허점이 많지만, 주된 요지는 자신이 잊히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면 또한 그런 미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욥은 자신의 희망을 바꿉니다. 구원자 하느님을 뵙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살갗이 벗겨져 죽음이 가까운 상황에서도 그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겠다는 희망과 믿음에 의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희망입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도, 학교생활도, 일도, 인간관계도 끝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난다고 해서 그것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성공도 실패도, 기쁨도 후회도 모두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완성되어 새로운 시작의 밑바탕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에 대해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고 나이 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고 노년과 죽음은 결실과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역시 허무와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에만 희망을 걸고 집착하지 않지만, 세상의 가치는 오히려 믿는 이에게 훨씬 큽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새롭고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을 만날 희망을 선택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부와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든든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위령의 날인 오늘, 우리는 세상 삶 속에서 잊기 쉬운 이 희망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운 저주가 아니라 승리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두가 이 희망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3.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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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영진 베드로 신부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11월은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 특별히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연옥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위령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들 역시 죽을 인생임을 기억하며 복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교회 묘지에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위령 성월에 돌아가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1독서 지혜서가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 큰 도움이 됩니다. 돌아가신 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내일이라는 시간’이면 우리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기에 ‘오늘, 그리고 지금이라는 시간’에 충실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성화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먼저 돌아가신 선배들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에게 건네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당신들도 언젠가는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내일’ 후회할 일을 ‘오늘’ 하지 마십시오. 분에 넘치는 욕심 삼가고 겸손하고 성실하십시오.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부모나 형제, 자녀에게 잘하십시오.”
희노애락 하면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이곳’의 삶이 분명히 끝나면, 죽음을 넘어 우리의 본향인 ‘저곳’의 삶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하면서 이곳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저곳’에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게 ‘이곳’에서의 매일매일을, 아니 매 순간을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곳’에서의 어려움들을 떨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28-30).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오늘, 이곳에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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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모든 성인의 대축일과 같은 참 행복 선언입니다. 예전 베트남에서 돌아온 해 2014 관구 총회 중, 죽은 도밍고 수사가 자기 나눔의 시간 동안 두서 번에 걸쳐 반복해서 죽고 싶다, 는 표현을 들을 때 참으로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고 싶은 심정을 들게 했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는 오랫동안 투병 생활하더니만 일찍 외롭게 세상을 떠나 하느님 곁으로 귀천했습니다. 사실 생사 生死는, 곧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삶을 싫어하여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버리려고 한다면 곧 하느님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 또한 하느님의 생명을 온전히 깨닫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현세의 삶은 그저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임시 거처가 아니며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인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다.”라고 성 이레네오는 말합니다. 결국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이라면, 살아가고 있는 곳이 이승이든 저승이든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그곳에서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제 엄마 돌아가신 다음, 꿈속에서 엄마를 만났고 그래서 엄마에게 물었죠. “엄마 거긴 어때?”라고, 그러자 제 엄마 대답이, “신부, 피양 마찬가지여!” 이는 곧 이승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저승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제 엄마가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만이 하늘에서도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즉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이기에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행복이란 만족 滿足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지금 힘들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이기에, 온갖 불행을 다 겪었음에도 행복했던 욥의 신앙을 본받아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존재와 행복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해인 수녀님의 「1% 의 행복」이란 시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 행복하냐고 낯선 모습으로 낯선 곳에서 사는 제가 자꾸 걱정이 되나봅니다.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한 겁니다. 어느 상품명처럼 2%가 부족하면 그건 엄청난 기울기입니다. 아마. (…)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2%라는 수치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모양입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불행하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치가 기울기 전에 약간의 좋은 것으로 얼른 채워 넣어 다시 행복의 무게를 무겁게 해 놓곤 합니다. 약간의 좋은 것 1% 우리 삶에서 아무것도 아닌 아주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평화로움, 따뜻한 아랫목 친구의 편지 감미로운 음악 숲과 하늘과 안개와 별,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팽팽한 무게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무게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행복하다고.』
오늘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19,25~27) 저는 아직 천국에 가보지 못해서 제 엄마가 이곳에 사실 때보다 그곳에서 더 행복하게 사시고 계시는지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욥의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전 마음의 위로를 느끼고 행복해집니다. 제가 사랑했던 엄마가 이젠 눈물도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뵈옵고, 생명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행복 안에서 잘 살고 계시다, 라고 느끼고 알게 되어서 마음이 참으로 편안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전 천국에서 제 엄마가 많이 아주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엄마가 행복하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엄마가 행복하시다고 느끼기에 저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이곳에 엄마가 아니 계시기에 많이 슬프기도 하지만, 언제가 때가 되어 제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엄마를 다시 만나고 뵈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해집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엄마가 저의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고, 엄마 또한 저의 간절한 소망처럼 엄마가 저를 기다리시면서 행복했으면 참 좋겠네요. 그래서 오늘 엄마와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사실 엄마와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기보단, 살아 있는 제가 엄마와 아버지처럼 신앙 안에서 죽음의 순간을 잘 받아들이고 거룩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봅니다. 저는 아버지와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엄마와 아버지가 당신들을 만날 때까지 제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만나도록 기도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 특히 이모와 이숙 조 아네스& 배 요한, 사제 생활하면서 만났던 양부모님 장시몬과 한데레사와 모든 분이 하느님의 영원한 자비 안에서 영원히 참된 안식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저를 이 수도회로 초대해 주고 인도해 주었던 마레이몬드 신부님과 박도세 유스티노 신부님도, 비오 수사와 도밍고 수사도,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영혼들 또한 기도하고 기억합니다. “주님, 이미 세상을 떠난 돌아가신 저희 각자의 부모님들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은 불쌍한 연옥 영혼들과 이 땅에서 살면서 재난과 질병 그리고 전쟁으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베풀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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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11월은 정녕 신비의 달입니다. 절로 죽음과 비움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우리를 존재의 심연으로 이끌고 갑니다.
마른 풀 한 줄기를 침대로 삼아 내려앉은 서리에서도, 뒹구는 낙엽을 깨우며 소스라치게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그 만남과 죽음의 신비를 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치 잎이 새싹일 때 ‘이미’ 단풍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보는 것이요, 꽃이 몽우리일 때 ‘이미’ 씨앗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로요,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사가 갈라질 수 없게 펼쳐져 있는 삶의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요, 현재를 충실히 죽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완성을 향한 삶이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이처럼 죽음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짓고, 삶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파우스티나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우리의 죽을 몸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드러난다는 것’은 인생에 죽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애초에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사불멸의 하느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에서 우리는 참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사되고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라 합니다. 곧 참된 ‘안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참된 안식’, 그것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그것은 공로로 얻어지기보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탐구로 얻어지기보다 순명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앎으로 얻어지기보다 사랑으로 얻어집니다. 참으로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리며, 주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 식구들뿐만 아니라, 특히 소외된 영혼들, 곧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과 잊혀진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또 평화를 위해 일하다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살육 속에서 희생된 이들,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들, 고문과 억압으로 희생된 이들,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없는 타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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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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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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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행복 도정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어제 모든 성인의 날에 이어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고 있는데
이는 우리를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떠나 천국에 든 성인들과 아직 그렇지 않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이 두 축일의 차이점이라는 것쯤은 우리가 익히 다 아는 바이고,
그분들을 기도하는 날이 바로 오늘 위령의 날이라는 것도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왜 축일의 순서가 모든 성인의 날이 먼저이고 위령의 날이 다음인지
그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오늘 알아야 하고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성인처럼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인데 아직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도정에 있는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걸 인정하고 하늘나라로 가는 행복 도정에 오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부정하기에 아예 그 도정에 오르지 않고 이탈한 인간도 있다는 겁니다.
이 도정에 오르지 않아 완전히 이탈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지옥이요,
이 행복 도정에 오르긴 했지만 아직 하늘나라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있는 곳이 연옥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가톨릭 신앙입니다.
여기서 저는 연옥에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가톨릭 신앙이라고 했는데
이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는 개신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개신교 신자들은 사실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직천당한다고 철석같이 믿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믿음의 내용이고 실천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가난 실천입니다.
영으로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다는
행복 선언의 말씀을 믿고 실제로 모든 것을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것을 팔아 사야 할 밭에 묻힌 보물이라는 주님 말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라가야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주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천해야 갈 수 있는 곳인데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아무것도 버릴 수 없고 나눌 수 없으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행복 도정은 출발조차 할 수 없겠지요.
둘째로 사랑 실천입니다.
나만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은 사랑 않고 하느님만 사랑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사랑 통공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인들처럼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랑이 통해야 합니다.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야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형제들인 가난한 이들을 주님인 듯이 사랑해야 갈 수 있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시는 주님처럼 길잃은 형제와 함께 갈 때 갈 수 있고,
이웃을 겨우 사랑하는 우리가 마침내 원수까지 사랑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행복 도정에 있고,
아직까지 연옥에 있는 영혼이 있습니다.
행복 도정에 있는 우리와 아직 연옥에 있는 연령들이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해서 통공의 기도를 같이 바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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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오늘은 11월 2일, 전 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가 함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들, 특히 연옥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나의 죽음도 생각하면서 잘 준비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때 조건이 충족되면, ‘전대사의 은총’도 받게 됩니다.
전대사의 조건은 ‘고해성사와 영성체와 교황님 기도 지향 기도와 묘지방문’입니다. 11월 교황님 기도 지향은 ‘자살 예방’입니다.
‘전대사’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가 사해진 후 남아있는 벌(잠벌)을 모두 면제해 주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전대사는 내가 받는 것이지만,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양도할 수 있습니다. 단, 살아있는 이웃에게는 양도가 안 됩니다.
위령의 날에는 미사를 ‘세 대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 미사>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입을 것이다.”(지혜3,5)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사말 교리’가 있는데, 이는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종말, 곧 ‘죽음과 심판과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입니다.
‘연옥’은 끝이 아니라, ‘잠시 거쳐가는 곳’입니다.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물며 정화하는 곳, 단련받는 곳’입니다.
연옥 영혼들을 위해, 그것도 가장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죽은 이들을 위한 나의 기도는 ‘영적 보험’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천국을 그리워하며 함께 열심히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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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두 나에게 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단풍이
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돌아감입니다.
나무의 품으로,
땅의 품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완성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기억과 사랑은
그 한계를
넘어섭니다.
소중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를 현재 속에
다시 불러들이는
행위이며,
그리하여 죽음조차
사랑의
기억 앞에서
무력해집니다.
위령의 날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는
은총의 날입니다.
이 시간은
죽음을 통해
생명을 배우는
사랑의 날입니다.
사랑은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생명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묵상할 때,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깊이
사랑해야 함을
배웁니다.
위령의 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희망의 날이며,
소멸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빛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긴
결과로서의
온전한 평화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우리의
슬픔은 기도로,
이별은 사랑으로,
죽음은 안식으로
변합니다.
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그리움과 사랑,
눈물과 기도를
봉헌합니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사랑이 머무는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삶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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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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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87
2월1일 [연중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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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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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CQGDexLIII
[성모승천수도회 김명호 비안네 신부(원장)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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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행복은 결핍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한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이제 슬슬 무대 뒤로 물러설 나이가 되어가니, 사목자나 수도자로서 절정기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밤잠 못 이루고 괴로워하며 너무 힘들다고 투정하는 후배들에게 저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이 호시절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힘겹다 할지라도 살레시안으로서 아이들 가운데 서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세월 지나면 이 순간이 정말 그리워질 것입니다.”
돌아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아이들로 인해 고통도 컸지만,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꿈결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행복 불행이라는 것이 마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사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감사했지만 부담스러운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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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cFV029SPwU?si=8TgDs0OfSXOiRO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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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저주는 고통이 사라질 때 시작된다>
찬미 예수님!
일론 머스크는 다가올 2040년에는 인간의 수보다 많은 100억 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보급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인간이 하기 싫은 모든 노동, 위험한 일, 심지어 귀찮은 가사노동까지 AI 로봇이 완벽하게 대신해 주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땀 흘려 일할 필요도, 육체적인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는 꿈같은 ‘지상 낙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이미 이 완벽한 낙원의 결말을 시뮬레이션해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동물행동학자 존 칼훈(John B. Calhoun) 박사의 그 유명한 ‘유니버스 25(Universe 25)’ 실험입니다.
칼훈 박사는 쥐들이 살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천적도 없고, 질병도 없으며, 먹이와 물은 무제한으로 공급되고, 온도마저 쾌적하게 유지되는 그야말로 ‘쥐들의 천국’이었습니다. 고통과 결핍이 ‘0’인 세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쥐들이 폭발적으로 번식하며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개체 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지자, 쥐들은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 중 ‘아름다운 존재들(The Beautiful Ones)’이라 불리는 집단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짝짓기도 하지 않고, 다투지도 않고, 사회적 교류도 끊은 채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자신의 털을 다듬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털은 윤기가 흐르고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죽어 있었고 영혼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결국 이 완벽한 낙원에서 쥐들은 서로를 공격하거나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단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전멸했습니다. ‘고통’이 사라지자 ‘생명력’도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AI가 우리에게 줄 미래가 바로 이 ‘유니버스 25’가 될 수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기에 간절함도 없고, 슬픔이 없기에 위로도 필요 없는 세상. 그곳에서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들’처럼 겉모습만 매끈한 껍데기가 되어 멸종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선포하신 행복 선언, 곧 진복팔단은 이 멸종을 막을 유일한 해독제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주님께서는 그 결핍과 슬픔이야말로 우리를 영적으로 살아있게 만드는 유일한 숨구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어 죽어가느니, 고뇌하는 소크라테스가 되어 영원을 꿈꾸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낙원의 저주는 자기를 극복하려는 고통이 사라질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진복팔단은 행복해지려면 고통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면담하자고 찾아오셨습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하셨고 평생 교편을 잡으신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자신이 환시를 보고 환청을 들으며 신비스러운 꿈을 꾼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자매님, 그것은 100% 마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분의 표정에는 평화가 없었고, 삶의 열매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렸을 때 유체 이탈을 경험했고 신비한 십자가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대학 이후로는 30년 넘게 냉담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받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사제품을 받을 때 예수님의 음성을 딱 한 번 들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힘으로 살아갑니다. 하늘에서 오는 것은 영원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감정을 남깁니다.
이 자매님이 그런 영적 환상에 빠진 이유는 행복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권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어야 할 자기 부정의 고통은 회피하고, 신비한 체험이라는 ‘영적 마약’만을 찾은 것입니다.
장차 AI 시대가 오면, 아무런 고통 없이 살아도 되는 수많은 사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자매님처럼 될 가능성이 큽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에 갇혀, 결국 고통으로 맺어지는 진실한 인간관계에서 멀어진 채 환상의 공간에서 부유하는 존재들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다시 외쳐야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고통을 통과해야만 만날 수 있는 구원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주인공 미자는 간병인으로 일하며 홀로 손자를 키우는 예순여섯의 할머니입니다. 그녀는 시를 배우고 싶어 문화센터에 다니지만, 좀처럼 시 한 줄을 쓰지 못합니다. 어쩌면 시가 나올 수 있는 순수함과 감수성을 너무도 오래 잃어버리고 살아왔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던 중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 찾아옵니다. 마을의 한 소녀가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소녀를 괴롭혀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 속에 미자의 손자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들은 돈으로 이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려 합니다. 그 속에서 미자는 갈등합니다. 손자는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밥만 잘 먹습니다. 그렇더라도 유일한 혈육을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손자가 감옥에 가고 자기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미자는 진실을 감춥니다. 그러자 더 이상 시가 써지지 않습니다. 영혼의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어느 날, 미자는 죽은 소녀가 떠내려왔던 개울가를 지나게 됩니다. 마침 돌풍이 불어 미자가 아끼던 예쁜 흰 모자가 날아가 개울에 빠집니다. 모자를 건지려다 미자는 물에 젖습니다. 자신의 모자도 소중한데, 문득 저 차가운 물 속에서 그렇게 싸늘하게 식어갔을 소녀가 사무치게 불쌍해집니다. 그 아이가 느꼈을 공포와 차가움을 미자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 고통을 마주한 순간, 미자는 결단합니다. 그녀는 경찰에게 손자를 신고합니다. 뼈를 깎는 아픔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손자가 경찰에 잡혀간 뒤, 비로소 개울가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생애 첫 ‘시’를 쓰게 됩니다.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자는 고통을 회피하여 지하로 숨는 대신, 고통을 끌어안음으로써 하늘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고통을 통해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영혼의 훈련소’입니다. 그렇지 않고 고통을 거부하면, 유니버스 25의 쥐들처럼 영혼이 소멸하거나 가리옷 유다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일만 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행복하기 위해 기꺼이 고통당하는 법을 배우라”는 명령입니다.
최근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에서 웹툰 작가이자 방송인인 기안84와 배우 권화운 씨가 보여준 극한의 도전이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기안84는 아프리카와 북극을 달리는 도전에 이어, 이번에는 7시간이 넘는 지옥 같은 마라톤 코스 앞에서 결국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무릎을 꿇고 맙니다. 함께 뛴 배우 권화운 씨 역시 다리에 극심한 경련이 일어나는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20km를 더 달리는 독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편안한 집에서 쉬면 그만일 텐데, 왜 스스로 지옥 같은 고통 속으로 뛰어드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을 이겨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열, 즉 ‘나를 이겨냈다’는 벅찬 자존감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을 이기기 위해 선택한 고통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입니다. AI는 절대로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기꺼이 십자가라는 고통을 짊어지는 사람만이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존엄한 인간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거룩한 고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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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신축하고 10년 가량 되었습니다. 아직은 큰 문제가 없는데, 야외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깔아 놓은 나무 조각들이 비에 쓸려서 없어지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식되었습니다. 사목회에서 두 가지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하나는 예전처럼 나무 조각을 새로 깔아 놓은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잘 다진 후 인조 잔디를 설치하는 방법입니다. 미관상 인조 잔디가 좋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방학 중이라서 먼저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작년에도 창고 공사가 있었는데 형제님들이 함께해서 아름답고 멋진 창고가 탄생했습니다. 이번에도 아이들을 위해 안전한 놀이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매주 토요일 작업을 하기로 했고, 여성 분과에서는 점심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업자에게 맡기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교우들의 힘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시티에 먼저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서 그리 하기로 했습니다. 본당을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점심 준비하는 자매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재작년에 있었던 ‘창고 공사’가 생각났습니다. 2월부터 시작했던 공사가 6월에 끝났습니다. 업자에게 맡겼으면 1달이면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형제님들이 재능 기부를 하였고, 자매님들은 점심 준비를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4달이 지나면서 저는 형제님들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서는 웬만한 작업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형제님들이 지금의 사목회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고이는 주차장에 새롭게 배수로를 설치하였습니다. 죽은 나무를 뽑고 새로 나무를 심었습니다. 80개가 넘는 에어컨 필터를 교체했습니다. 농구장 바닥을 새롭게 설치했습니다. 걷기대회에는 안전요원으로 함께했습니다. 본당의 날에는 뒷정리했습니다. 달라스 지역 연합 교회 축구대회에는 맛있는 국밥을 준비했습니다. 다른 교회는 컵라면을 먹을 때 우리는 국밥을 먹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교우들이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채워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 19장을 보면 예리코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자캐오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리 자캐오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허전하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캐오를 무시하였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자캐오는 자신의 가진 재물의 반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세리 자캐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캐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고 불쌍한 이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며 그들과 하나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그와 같은 삶은 바로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참된 행복을 얻는 것은 지위, 능력, 가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자캐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의 이정표를 보면 안심하고 갈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이정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충실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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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선뜻 다가오지 않는 말씀, ‘행복 선언’이 선포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박해를 받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 속에서 고난과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의미가 고귀할지라도,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이 물음을 함께 묵상하기 위하여 ‘3고’라는 신앙 여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3고’는 바로 ‘고통–고독–고상(고귀함)’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는 기도조차 쉽게 잊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닥치면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시련 앞에서는 무력함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고독을 마주하게 되지요. 이 고독은 우리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근원적 자각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독의 시간을 지나면서 사람은 조금씩 고귀함과 깊이를 배우게 되며, 이 여정을 통하여 참된 기도와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과 고독을 통하여, 진정 당신을 찾는 고귀한 삶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스바 3,13)는 바로 이러한 여정을 충실히 걸어간 성인들의 상징입니다. 우리 또한 이 시대의 ‘남은 자’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행복 선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신앙인의 ‘3고’를 함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는 이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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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12: 산상설교, 참 행복
1. 참 행복의 역설
오늘 전례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곧 참 행복(마카리오이, μακάριοι)에 관한 말씀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라는 선언은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되는 역설적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세상은 힘 있고 부유하며, 성공한 이들을 행복하다 말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을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 체계를 선포하는 혁명적 선언이다.
2. 구약의 예언과 연결된 가난한 이들
제1독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에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스바 3,12)이 주님의 이름에 피신할 것이라 말한다. 이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재산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나윔(עֲנָוִים)’이라는 표현은,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을 뜻한다. 예언자 즈카르야 역시 메시아를 “가난하고 겸손하게 오시는 임금”(즈카 9,9)으로 예고했다. 바로 이 ‘가난’이 구원 역사의 열쇠이다.
3.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군중을 가르치신다. 이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던 사건을 상기시킨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옛 법은 두려움으로 주어졌으나, 새 법은 사랑으로 주어졌다.”(De sermone Domini in monte I,1) 즉, 산상설교는 외적인 규율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참 행복을 “그리스도인 삶의 헌법”이라고 불렀다. 그는 “가난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의탁이며, 교만을 버리는 첫걸음”(참조: In Matthaeum Homiliae XV)이라고 강조했다.
4. 바오로 사도의 역설: 약함 속에 드러나는 힘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들을 택하셨음을 상기시키고 있다.(1코린 1,26-31) 이것은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1코린 1,31)는 말씀은, 참 행복의 첫 번째 선언,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자기 힘과 재산이 아닌 유일한 보물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시각
공의회는 사목 헌장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가난과 박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증거해야 한다.”(38항)고 가르친다. 또한 교회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특히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해야 한다.”(교회 8)고 천명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영적 태도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차원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과 연대하며, 정의와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요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6.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
나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인가? 재물이나 명예, 자기 고집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있는가? 나는 받은 은총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있는가? 가난은 빼앗김이 아니라, 나눔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더 큰 부유함을 얻는 길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이 선언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루어져야 할 현실이다. 우리가 교만과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참 행복이 시작된다.
결론적으로, 참 행복은 소유가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가난한 정신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며, 받은 것을 나누는 삶에 있다. 그러할 때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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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한 사람>
마태오 5,1-12ㄴ (참행복)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행복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재물 권력 온갖 우상의 덫에서 해방되어
가난한 마음을 풍요롭게 채워주시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하늘 나라에서 살 수 있기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만이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며
위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위로받는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기에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온유한 사람만이
모든 이 모든 것 품을 수 있으며
모든 이 모든 것 보듬는 땅을 닮아
마침내 땅이 될 수 있기에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만이
이내 온 몸과 마음 타들어가게 하는
게걸들린 탐욕스런 불의를 멀리하고
영육의 생명 북돋우는 정의를 호흡할 수 있기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비로운 사람만이
너를 또 하나의 나로 받아들이며
나를 또 하나의 너로 받아들이는 이의
자비를 입을 수 있기에
자비로운 사람은 행복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추악 분노 저주 거짓 음모
삶의 온갖 쓰레기로부터 자유로워져
선 사랑 축복 진실 진리의 하느님과 마주할 수 있기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만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크고 작은 위협과 폭력의 유혹을 이기고
평화의 하느님을 온 누리에 드러낼 수 있기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의로우신 하느님 때문에
모욕을 받고 박해당하는 사람만이
진실하신 하느님 때문에
거짓과 사악한 음모에 희생당하는 사람만이
생명 사랑 정의 평화의 하느님을
거룩함으로 치장한 골방에 처넣은
추악하고 불경스러운 세상 한 가운데서
하느님만이 모든 것이신 하늘 나라를
이미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살 수 있기에
하느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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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1) 이 말씀에서 ‘박해’에 관한 말씀은, 사도들의 이야기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여기서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함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입니다. 사도들은 박해와 모욕을 당한 일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도로 인정받은 것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음을 기뻐했습니다. 매를 맞고, 모욕당하는 것이 기쁜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인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으면, 그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2) ‘가난’에 관한 말씀은, 초대교외 공동체의 모습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4-47)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글자 그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재물에 대한 탐욕도 없었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는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사도 4,34) 이 말은, 그 공동체에서는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사랑만 가득한 공동체의 모습 자체가 복음 선포였고, 신앙의 증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하늘나라를 지상에서 실현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중에, 즉 죽은 다음에 얻게 되는 행복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서, 하늘나라를 지상에서 미리 실현할 수 있습니다. 모두 마음을 모아서 함께 할 수만 있다면…>
3) ‘슬픔’과 ‘온유’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것’과 ‘평화’에 관한 말씀은, 스테파노 순교 후의 상황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1ㄴ-4)
여기서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라는 말에 대해서, “스테파노가 하늘나라에 들어갔다고 믿었다면 기뻐하는 것이 옳은데, 왜 통곡했을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스테파노의 죽음을 슬퍼했겠지만, 그것보다는 교회를 박해하는 이 세상의 죄가 안타까워서, 또 박해자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울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루카 23,28) 스테파노가 살해당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사도들과 신자들은 그 박해에 세속적인 방식으로 맞서지 않았고, 또 사울에게 앙갚음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를 실천한 것입니다.
흩어진 신자들이 숨어 있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모습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모습이고, 또 ‘주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일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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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을 모심으로 행복하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여당, 야당 어느 편에 속할까? 저는 ‘천주당’이다. 국민을 위한 봉사를 빌미 삼아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문제고, 뜻을 달리한다고 매장되는 현실도 안타깝다.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 높이 오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명예는 물론 모두를 잃어버리는 일이 더 이상 없길 희망한다.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소유와 지배를 통해서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거기서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온다. 많은 성인은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고백하였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다.”(아빌라의 성 데레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하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이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베푸는 마음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또 주고 싶은데 더 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의 상태다. 가족을 위해 또 이웃을 위해 무엇을 줄 수 있나? 경제적인 능력, 건강도 없어서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이 없다고 하더라도 줄 것이 있다.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문제다. 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그 이면에 있는 사랑을 생각하며 나도 그러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모든 것을 다 잃으면 주님만을 잡게 된다. 그러니 행복하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온유는 흔들림이 없는 상태다. 어떤 처지나 상황 여건에도 꿋꿋하게 하느님 편에 서있는 것이다. 주변을 보면 그룹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파’가 있다. 대파, 실파, 양파, 쪽파….있듯이 성직자 파, 수도자 파, 회장 파 사람을 따라가며 사는 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는다.
의로움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정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은 정의를 포용한다. 따라서 사랑 안에서 나오지 않은 정의는 진리가 아니다. 의로움은 성경의 요셉의 삶에서 드러난다. 약혼자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의 법대로 하면 마리아는 돌팔매질로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했다. 그리고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의로움은 사랑 안에서 나온 상대를 위한 배려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하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 행위가 자비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행위야말로 자비로움의 절정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평화는 단순히 평온한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순교성인 성녀들은 박해와 죽음 앞에서 마음이 시끄러웠을까? 혼란스러웠을까? 그들은 평화로웠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증언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차지했기 때문에 육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렸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진리를 증언하다 보면 기득권의 반대에 부딪히고 미움을 사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진리 안에 머물게 되는 사람은 행복하다. 지금의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면 더 큰 것을 놓치게 됩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
삶의 여정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예기치 않은 시련이 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주님께 매달리고 의탁하여 행복을 지켜야 한다.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차지하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주님을 마음에 모심으로써 행복하길 바란다. “주 하느님,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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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공현성 요셉 신부님]
“행복하여라,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말씀은 산상설교의 시작인 진복팔단입니다. 사실 너무도 자주 읽고 들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곰곰이 되씹어 생각할수록 어려운 내용인데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또 갈망하며 추구하는 속적인 행복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겠지요.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하시는 오늘의 말씀을 그 앞선 내용부터 다시 찬찬이 살펴봅니다.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예수님, 광야에서 보낸 40일,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유해 주셨기에 사방에서 몰려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게 된 일…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홀연히 산으로 오르십니다.
그리고 행복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노라고!
솟아오른 산은 하늘과 가까운 물리적인 이유 때문인지 성경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아담도 산에서, 노아도 방주가 내려앉은 아라랏 산 위에서, 브라함도 아들 이사악을 봉헌하려던 모리야 땅의 위에서 주님을 뵈었고, 오랜 세월 뒤에 그 산에 다윗이 거룩한 도성을 세우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지요. 또한 호렙의 산 위에서 모세가 주님을 뵙고,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이 그 산에서 주님과 계약을 맺었으며, 뒷날 예언자 엘리야도 그곳에서 주님을 었습니다.
이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산을 오르십니다. 때로 기도하기 위해, 즉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뵙기 위해 산에 오르기도 하시지만, 오늘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더 정확히는 ‘제자’들을 만나고 가르치시기 위해 오르십니다. 예수님은 허공에 대고 행복을 말씀하신 것도, 무작위의 군중 전체에게 행복을 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신 당신을 뵈려고 함께 산에 오른 많은 이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당신께 다가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배우고 따르라는 ‘가르침’으로서 말입니다.
여기서 이 제자들이 앞서 불렀던 네 어부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마도 당신과 함께 산에 오른 이, 당신께 다가와 당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진복팔단으로 시작되는 산상설교의 모든 가르침을 듣고 실행하는 이, 그래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들 같은(마태 7,24) ‘제자’ 되려는 모든 이에게 저 행복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모든 행복은 당신이 몸소 누리시려는 행복이며, 우리도 누리기를 바라시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의 결실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상으로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지만,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더 바라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약속해 주신 천상행복을 믿고 희망하며 서로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 나가도록 힘쓰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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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지훈 시몬 신부님]
<참된 행복이란>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첫 부분으로,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을 향해 제시하시는 행복 중 어떤 부분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나 피하고자 하는, 또는 인생에서 겪고 싶지 않은 부정적으로 보이는 가치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단순히 깨끗하고 도덕적으로 살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행복선언의 첫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는 모두가 물질적으로 가난해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나 혼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음을 깊이 인정하는 영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부유함의 추구나 다른 이들보다 윗자리에 서고자 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존재의 완성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며,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영적 가난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가 이미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씀 또한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슬픔이란 우리 인간들이 짓게 되는 죄와 고통받는 이웃들에 대한 무관심,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길로 나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무감각한 마음에 대한 슬픔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슬픔이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할 때에야 우리는 현실을 바꿀 힘을 가질 수 있고, 회개와 진리의 추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슬픔을 간직한 이들을 하느님께서 위로하시고 마침내 그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뒤이어 온유하고 의로움을 추구하며, 자비롭고 평화를 이루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역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사람들의 특징을 온전히 보여줍니다. 이런 가치들을 추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이 이 세상 안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희망과 열정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참된 행복이란 그분께서 걸어가셨던 고통과 희망의 길에 대한 묵상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재설정되는 과정 속에 얻게 되는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지, 또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본질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 우리의 참 행복을 찾기 위해 일상 속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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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진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소유하려 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것>
해가 바뀌고 산에 자주 오른다. 주일을 제외하곤 본당 지척에있는 오봉산에 거의 매일 오르고 있다. 오르고 내리고 한 시간 남짓 가벼운 산행 코스지만 현재의 나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는 순간이다. 거의 성사나 의식 행위에 버금간다. 원래부터 언제 어디서나 산행을 즐긴 편이다.
그러나 봉산동에 부임해 와서 작년까지는 아니었다. 불운이라 할지 재작년 8월에 받게 된 신경종양 제거 수술 중 좌측 상완신경총손상으로 왼팔과 왼손뿐 아니라 마음 근육에도 위축을 일으켜 심적 내상이 엄청났다. 물론 지금도 별반 좋아진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수술 직후 왼손은 쥐는 기능을 잃었다. 약을 먹더라도 감각 이상과 통증이 여전히 심하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변해버린 한쪽 사지를 볼 때면 때때로 우울해지기도 하며 속상하다.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사제지 않는가. 정신이나 의지론 하느님의 자비하신 손길에 맡기고 봉헌하리라 여기지만, 아직도 덕이 부족해선지 심지가 부단히 강하지 못하고 약해선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제는 여타와 다를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오산이다. 보통의 일상을 되찾고 다시 행복하기까지 몸도 몸이지만 구겨진 마음 하나 비우고 말끔히 펴내기가 이토록 어렵다. 스스로 평화를 되찾고 평화를 이루는 산증인이 되려면 앞으로 몇 년은, 아니 어쩌면 평생 수행 작업을 거쳐야 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지닌 믿음의 눈은 이미 세상에서 보고 있지 않는가.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칠수록 정작 행복과는 더욱 멀어지는 것을. 더 지독한 소유의 갈증을 더하고 안 그래도 흔들리기 쉬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손에 쥐려 할수록 빠져나가고 더 멀리 벗어나 버리는 것을! 몸 성하고 건강하다가 이제는 조건이 바뀌어 보니 그제야 비로소 보고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행복은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이 좋지 않아도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와 평화에서 오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 들여다본 주님의 마음은, 우리가 삶에서마주하는 다양한 것들에 진정 눈을 뜨고 자유롭게 거닐기를 바라시는 목자로서의 ‘가엾은 마음(마태 20,34 참고)’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글을 쓰며 신기했다. 내 서품성구는 “행복하여라!”(마태 5,3)이다.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루카 10,40 참고)라 했던가. 나머진 다 잃고 가난하더라도 꼭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의 사랑만은 빼앗기지 않고 살고 싶다고 희망하며 오늘도 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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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나기정 다니엘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참 행복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참 행복이 어떻게 가난에 있는 것인가? 어찌하여 슬픔에 있고 박해 속에 있는 것인가? 알아듣기 힘든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한다. 어떻게 성경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까?
성경의 가난은 무소유가 아니다. 성경의 가난은 자유로움에 있다. 가진 것이 얼마인가에 따라 가난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아니다. 얼마를 가졌든지 간에 가진 것에서 자유로운 이가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물질의 노예로 살아간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물질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세상 기준으로 부자라도 성경의 가난한 사람일 수 있다. 세속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도 성경의 관점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
물론 가난은 적극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으로 사셨다. 그러기에 더욱 힘이 있었다. 자유롭게 살면 주님께서 힘과 행복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돈과 물질은 흐르는 물과 같다. 붙잡는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셔야 진정한 소유가 되고, 나의 것이 될 수 있다. 세상의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의 가난을 갖춘 삶에서 참된 행복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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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을 통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온전히 자유롭게, 충만히 행복하게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주님을 따르면서 저는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서 ‘참행복 선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를 통해 제 바람은 어쩌면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5,12)라는 약속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었음을 새삼 강하게 느낍니다. 참행복의 선포와 초대는 바로 삶의 존재 이유는 행복이며, 행복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행복이란 『하려고 하는 것을 행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있는 것을 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했는데, 이 표현은 결국 행복이 삶의 의미라는 뜻을 강조한 것이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은 「노동 윤리의 침체에 대한 일화」를 통해서 행복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지중해의 어느 항구에서 초라한 행색의 어부가 정오의 햇살을 맞으며 빈둥거리고 누워 있다. 그 옆을 지나가던 관광객이 어부에게 말을 걸면서, 그렇게 누워 있지 말고 차라리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 타일렀다. ‘왜죠?’하고 어부가 그 이유를 물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지요!’ 관광객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얼른 관광객은 자신이 생각하는 셈법을 일러 주었다. ‘고기를 더 많이 잡을수록 돈을 더 벌어 부자가 되고, 그러면 많은 고용인도 거느릴 수 있다오.’ 그러자 그 어부는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한다, 말이오?’ 하고 반문했다. 관광객은 다시 설명했다. ‘조용히 등을 기대고 햇살 아래 누워 있으려면 그만큼 부자가 되어야지요?’ 그러자 어부는 ‘내가 바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오.’하고 대답하고는, 눈을 감고 스르르 잠들었다.』
경험상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거나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삶에서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야 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걱정과 근심이 무가치하거나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고 알아듣습니다. 다만 그렇게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다만 마음의 중심을 바꾸라는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의 삶은 때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루해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분명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많은 수고, 곧 근심과 걱정 때론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행복은 한순간에 얻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일생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마음의 가난, 삶의 슬픔, 온유한 마음을 갖고 자비를 베푸는 삶, 의로움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을 때도 보복과 복수하려는 마음 없이 깨끗한 마음과 평화를 이루는 일은 거저 주어지거나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는 사실을 겪으셨잖아요. 그러기에 이 모든 상황을 직면할 때 현실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려고, 이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려는 노력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필수 조건이며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 긍정적인 사고와 신앙적인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불행한 날에는, 이 또한 행복한 날처럼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을 생각하여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 (코헬 7,14) 고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정말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세요. 그러다 보면 정말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토스토에프스키는 『다 좋은 일이야. 모든 것이,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지. 단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야, 그게 다야! 그걸 아는 사람은 금방 행복해질 거야, 그걸 깨닫는 순간에 즉시!』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부정적인 것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것일까요? 이 권고를 한 번쯤은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부정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알고, 긍정적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때론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웃어넘겨라, 는 권고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만 행복 추구가 너무 과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상하지 않은 불행을 맞이해서도 태연하게 처신하는 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대단한 신앙의 행위입니다. 불행의 순간에도 희망이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곧 행복이 다가오리라는 믿음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고통 후에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기도 합니다. 생명의 위기와 어려움이 있어도 치유 받을 은총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이며 성장과 전환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또한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겪는 어려움도 있지만 극복하고 난 다음에 오는 성취감이나 만족감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프로이트는 행복은 “사랑하고, 일을 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코헬렛의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하느님의 선물이다.” ( 3, 12~13) 는 말씀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관념적이거나 이론적인 행복관이 아니라 지상에서 우리가 해왔던 일상의 모든 일이 바로 행복이었음을, 젊은 날이 아닌 노년이 되어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저는 이나마 여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코헬렛은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참으로 의미론 게 무엇이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혹시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코헬렛의 가르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사를 모두 무시하고 기도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과 사이비 신비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담담하게 ‘먹고 마셔라.’ 하고 말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뒤 예수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 5,43)하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등지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영성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지혜 문헌은 굉장한 치유력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너희는 모든 선택이 너희에게 맡겨진 존재다. 너희는 몸과 마음이 영이 건강하도록 잘 보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고 충분히 자고 운동도 하고 몸기운도 느껴보아라. 그리고 거절해야 할 때는 과감히 거절하여라. 그래야 자신의 소명을 보호할 수 있다. 세상에 유용한 존재가 되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에게 잘해주라고. 코헬렛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인간적인 행복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영위할 줄 아는 성숙한 삶의 기술에 관하여 코헬렛 2장에서 인간적인 행복에 이르는 통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을 싫어하게 되었다. 내 마음은 절망하기에 이르렀다.” (2, 17. 20)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1테살로니카 5, 23엔, 인간의 3가지 차원 곧 신체적 차원, 정신적 차원, 영적 차원이 그것입니다. 행복도 같습니다. 코헬렛의 시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행복은 건강입니다. 그러므로 늘 자기 육체적인 컨디션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정신적 행복은 기쁨이며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심, 내주하고 계심을 알고 있어야 하며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행복은 의미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느낄 때만이 영적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코헬렛을 관통하는 공허함, 무의미함, 헛됨은 존재의 의미를 모르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코헬렛의 지혜는 존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즉 영적 행복이 없다면, 정신적 행복과 신체적 행복이 그 공허함을 채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통해 무엇이 실현되어야 하는지 묻지 않으면, 그 사람은 충만한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삶의 학교에서 참된 행복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의 행복에 관하여 이사야서 48, 17절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이렇게 인도받고 있는 우리는 거듭거듭 주님을 찾아야 한다고 스바니야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 모두에게 외칩니다. “주님을 찾아라!”((2, 3) 그러니 마음이 가난하시고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시고 함께 우시는 주님을 찾으십시오. 온유하시고 자비로운 주님을 찾으십시오. 마음이 깨끗하시고 평화이신 주님을 찾으십시오. 의로움 때문에, 하느님 때문에 모욕당하시고 박해당하셨던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분을 찾으면 이 땅에서는 물론 하늘에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먼 훗날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부터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처럼 살면서 신체적 차원, 정신적 차원, 영적 차원 곧 온 존재로 살 때 행복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행복, 기쁨이며 위안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알렐루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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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3)
가난한 마음을 품어야 하느님을 만납니다. 가난한 마음은 모든 것보다 먼저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입니다. 감각적 행복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알고 모시기 위하여 감각적 현실을 이용할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코린토1서1,27-29)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주님께 우리를 인도하는 문입니다. 우리의 감각 너머에 내재하시는 주님을 갈망할 때,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천년을 살아도 현실의 행복은 순간 사라지지만, 하루를 살아도 가난한 마음이 얻는 참 행복은 천년을 누리게 됩니다.
가난한 마음은 피조물과 감각적 세상을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로 받아들입니다. 창조된 만물은 오직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것들임을 알기에, 우리의 감각 세계를 통해서 드러내시는 주님의 얼굴을 발견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품어야 우리는 인간의 감각적 현실 너머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못하면 우리의 감각 세계 너머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감각적 현실에 마음을 빼앗겨 주님을 모르게 되거나 멀리하게 됩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지나가는 현실로 우리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현실에게 마음을 빼앗길수록 우리는 소유욕에 빠지게 됩니다. 소유욕이 강할수록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영원하며 보이지 않는 신적인 영역은 거부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만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소유로 얻는 행복만큼, 가난한 마음으로 얻는 하늘나라의 참 행복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얻게 되는 참 행복은, 눈으로 보이는 것들 너머에 현존하시는 진리이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얻게 되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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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갈망한다 해도 유일한 목표는 행복이다.”
그런데 진정한 ‘참 행복’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값지고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록펠러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1달러라도 더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과 애착을 채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까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스바니아 예언자는 ‘주님의 날’을 예고하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스바 3,13)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주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으니”(1코린 1,30 참조) 우리의 행복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참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한편, 삶에는 결핍과 슬픔이나 고통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반대는 이러한 결핍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생기 없는 무기력함과 무감각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결핍과 슬픔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생기 있는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살아있을 때 일 것입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곳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자리요, 존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으로,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하늘나라의 성취에 대한 예언자적 선언이며 축복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고 적음,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비록 우리가 가난하지만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슬퍼할 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죄를 슬퍼하되 이미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쁘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있어야 할 하느님 품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진정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는 이유는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에 그분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은 까닭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이요, 진정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요,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란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필요한 한 가지는 물론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은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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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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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학생이 “이번에 합격만 되면 소원이 없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합격 된 후에는 그 어떤 소원도 없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자기 소원이 이뤄지면 영원히 행복할까요? 그만큼 지금 간절하다는 의미일 수 있겠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멋진 일에서만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 대니얼 길버트는 “행복은 많은 사소한 일들을 쌓는 과정에서 나온다.”라고 말합니다. 사소하지만 좋은 일을 매일 경험하는 사람이 멋진 일을 한 번만 경험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멋진 일만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소하지만 좋은 일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성당 꼬마들은 저를 보면 달려들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간식 주세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를 껴안기도 합니다. 그만큼 저와의 간격이 좁아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얻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몇십 년 노력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또 아이들과 가까워지게 하는 매개체인 사탕, 초콜릿 등을 통해 쉽게 얻어집니다. 이런 행복으로 주일 오후 3시의 어린이 미사는 항상 신이 납니다.
사소한 일들을 쌓아 나가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크고 대단한 목표만을 생각하면서 사소한 일들을 무시한다면 행복의 길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다릅니다. 세상의 행복은 부유함, 배부름, 웃음, 칭찬, 권력 등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에 주림, 박해받음을 이야기하시지요. 왜 이들이 행복할까요? 분명 이 세상에서 힘들 수밖에 없기에, 이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렇게 하느님을 찾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입니다. 즉, 죽어서가 아닌, 지금 여기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 편에 서야 합니다.
제1독서의 스바니아 예언자는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겸손한 이들아!”(스바 2,3)라고 말합니다. 겸손하게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6)라면서, 복음의 역설적 행복을 신학적으로 풀이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행복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소원, 성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의 약하고 부족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리가 우리 안에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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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걱정하지 말고 다만 믿게 하소서!>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지난주일 복음은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며 허약한 이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지나치지 않고 눈여겨본다면 이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 하는 행복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데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신 것과 거기에 자리 잡고 가르치신 점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평지에서 첫 제자들도 부르시고, 평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신 다음 굳이 산 위로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행복에 관한 비결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행복에 관한 비결을 그냥 평지에서 계속 가르치시지 않고 주님께선 왜 굳이 산에 올라가시어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에게만 가르쳐주실까?
또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이란 누구인가? 주님께서 처음으로 부르신 첫 제자 넷인가? 아니면 그들 말고도 군중 가운데서 주님을 따라 올라온 사람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명백하게 풀어 줄 단서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군중들을 보시고 산 위로 오르셨다는 점이고,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에게 행복 비결을 가르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군중 모두 행복하길 바라고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도 궁금해하겠지만 그 행복 비결을 알려면 산 위로 올라오라고 초대한 사람 가운데서 산 위에 올라 온 사람들 곧 행복 비결을 꼭 알려는 열성이 있는 사람들만 주님께서 제자로 여기시고 가르쳐주신 것일 겁니다.
실로 행복은 누구나 원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끝까지 탐구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예수님께 그 답을 얻으려는 사람은 더 많지 않습니다.
그저 돈 많이 벌면 행복할 줄 알고 돈 열심히 벌며 일생을 살고, 재물과 지위와 명예를 누리며 희희낙락하면 그것이 행복인 줄로 알고 일생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군중과 달리 주님의 진실한 제자들이라면 산에 오를 정도까지 참 행복에 관한 갈증과 갈망이 있어야 하고 다른 이의 행복 비결이 아니라 주님의 행복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이란 배우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란 주님께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신 행복은 역설적입니다. 가난해야 행복하고 특히 영으로 가난해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사실 부유할 때는 누구나 행복할 수 있고 그런 행복은 누구나 찾습니다. 그런데 부유할 때뿐 아니라 가난할 때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해도 하느님 나라 때문에 행복한 영적인 행복은 제자들만 찾습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살 때뿐 아니라 죽고 난 뒤에도 행복하고, 죽고 난 뒤에 더 행복하기에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행복 비결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참 행복 비결이고,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가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완전한 행복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이 행복 비결을 따르겠습니까?
이 비결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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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가난한 마음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 5,1-12ㄴ)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시작인 참행복 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참행복한 사람인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듣고 박해를 받으며 모함을 듣는 사람들!
바로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2ㄴ)
참행복 선언 중에서도 첫 번째 선언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마음’에 대해 더 묵상하게 됩니다.
‘어떤 마음이 가난한 마음일까?’
온전하게 하느님께로 향해 있는 마음,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 있는 마음, 참으로 겸손한 마음, 낮은 곳으로 향해 있는 마음, 감정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마음. 바로 이런 마음들이 가난한 마음이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참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월의 첫날인 연중 4주일입니다. 기쁘게 시작했던 지난 1월의 기쁨과 고통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워진 마음, 비워진 마음으로 2월을 시작합시다! 마음의 창고에 참행복들을 담도록 합시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스바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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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2월의 행복이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축복의
선언을 하십니다.
이 선언은
세상의
기준을 뒤집는
하느님의
참된 행복입니다.
행복은
무언가를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하느님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돌려드립니다.
하느님께 맡길 때
행복은
이미 현재형이 됩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하늘은 멀리 있지 않고
숨과 숨 사이,
기대와 체념 사이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붙잡을 수 없는
우리의 가난입니다.
그래서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수 있는
자리가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힘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삶을 맡깁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깊은 신뢰입니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기준에
맡기지 않습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현존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행복하여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 삶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이미 들어와 있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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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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