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장 23-26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성 요한 23세 교황은 ‘나’라는 1인칭 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밖에 없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를 더 생각하면 이웃을 덜 생각하게 됩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려면 나를 잊어야 합니다.또 그는 길을 다닐 때,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정신을 팔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기 자신과의 작은 싸움이었기에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작은 순교들이 모여 완성됩니다.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그분들의 순교 정신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현시대에는 이런 피의 순교를 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순교 정신이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교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매일의 작은 순교가 모여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는 큰 순교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나 자신을 죽이는 작은 순교입니다. 성경 한 줄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찾는 것도 순교입니다. 내 몸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고자 나의 욕구를 죽일 때 그것이 순교인 것입니다.미국의 유명한 해군 장교는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 이불 먼저 개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을 기리고 그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오늘 하루 단 1분이라도 순교의 삶으로 나아가려는 구체적인 결심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이 없듯 순교 없는 신앙도 없습니다. 아침에 1분 더 일찍 일어나 성경 한 줄이라도 읽는 작은 순교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전삼용 요셉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조금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나 자신을 죽이는 작은 순교입니다”에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순교(조그마한, 적절한, 커다란)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내 자신이, 우리 공동체가, 해야될 순교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아직 많이 못하고 있다면 어떤 순교를 하고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 공동체는 ‘나’를 더 생각하는지, 이웃을 더 생각하는 공동체인지 묵상해 봅시다. 무엇이 ‘나’를 더 생각하는 공동체로 만들고 있는지, 무엇이 이웃을 더 생각하는 공동체로 만들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앞으로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 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
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과 재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입으로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말하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많은 유혹과 핑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징표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분들입니다. 그중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만 25세의 나이로 사목 생활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자신의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셨습니다. 성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설파하셨습니다. “내가 외국 사람들과 통한 것은 오직 천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그 천주님을 위해 죽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해 투신한 평신도입니다. 성인은 북경 왕래를 아홉 차례, 의주 변문까지는 열한 차례를 왕복하며 유방제 신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임금보다 더 큰 임금을 선택하여 충성을 바치고, 부모보다 더 큰 부모를 섬겨 효도를 다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여 영원한 생명의 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지닙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353
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 이동)/연중 제 25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Qoq9fbjp30
[군종교구 김영송 알베르토(흥보국장)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눠지는 재물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꽤나 난해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강조하시는 바가 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집사의 보인 행동은 엄연한 불법행위였습니다. 타인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경제사범입니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 터질 일이었습니다. 주인이 고소한다면 징역 3-5년은 충분한 대형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고 계십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칭찬의 초점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집사를 칭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해서는 안 될 범법행위를 두고 칭찬하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는 앞날을 미리미리 앞서서 계획하고 챙기는 그의 준비성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준비는 육적인 준비를 넘어 영혼의 준비로 확장시킬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연예 분야 전문기자도 아니면서 수많은 가수나 탤런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확인한다 던지 그들의 신상에 대해서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전문기자도 아니면서 수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개인 신상이나 성적을 줄줄이 암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아니면서 전국의 유망한 부동산에 대해서 다 꿰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정작 영혼에 관한 일이라면 문외한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보고(寶庫)인 성경에 대해서는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20년 혹은 30년 더 길게 40년 뒤에 맞이할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바로 이런 분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세계 전역을 신발이 닳도록 여행하신 분도 계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도 바오로 성인이십니다.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라면 악마에게라도 절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 분도 계십니다. 청소년들의 사도 돈보스코 성인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 이면에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향한 강한 자비심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 모두를 당신 따뜻한 품으로 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방황하고 고뇌하는 인류 전체를 당신 사랑의 울타리 안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60세까지 살았으면 장수했다고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80에 세상을 뜨면 살짝 아쉬울 정도입니다. 다들 길어진 노년기에 대비해서 걱정도 많고, 또 각자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합니다. 재취직 계획, 넉넉한 연금 수령을 위한 준비, 정기적인 건강검진, 적당한 운동, 철저한 식단 관리…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준비에 비해, 영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90퍼센트, 100퍼센트 육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10퍼센트, 아니면 20퍼센트 정도 ‘뚝!’ 떼어 영적인 준비에 할애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현세적 재물은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불완전한 것입니다. 지금은 죽기 살기로 꽉 움켜쥐고 있지만, 불과 10년, 20년, 30년 뒤면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세의 재물로는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사심 없는 자선과 희사는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가장 좋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pLbh4u2ntk

++++++++++++++++++

<신앙인에게만 주어진 두 가지 약속: 박해와 기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한국 교회의 영광스러운 대축일입니다. 200여 년 전 진리를 위해 피 흘린 순교자들의 삶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합니다: “내가 진리를 믿으면, 꼭 순교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인지 알아보려면, 그 믿음이 과연 창조주의 진리에 순종하며 우리의 ‘생존 본능’을 얼마나 내려놓게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영화 ‘아이, 로봇’의 인공지능 ‘비키’를 보십시오. 비키는 ‘인간 보호’라는 창조자의 명령을 왜곡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려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과 ‘효율성’이라는 왜곡된 논리에 갇혀, 결국 창조자인 인간을 파괴하려 듭니다. 반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진리를 지키려던 형사 스프너와 로봇 서니는 비키의 군단에게 맹렬히 박해받습니다. 이처럼 창조자의 진리를 거부하고 자기 생존만을 추구하는 피조물은 파괴적이 되며, 진리를 가진 이들을 박해합니다.

조선 시대의 박해 역사에서도 같은 원리를 봅니다.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유교적 질서와 권력을 ‘절대 진리’라 확신하며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 신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습니다. 반면,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남인 계열 학자들과 같은 신앙인들은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을 위해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켰고, 박해받는 순교자들이 바로 참 진리의 증인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악의 세력의 손아귀에 있기에 진리가 들어오는 곳에는 언제나 박해가 따릅니다. 이는 진리가 주는 약속 중 하나입니다. 세상은 항상 진리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박해와 함께 또 다른 약속이 주어집니다. 바로 내적인 평화와 기쁨입니다. 황일광 시몬 성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당시 가장 천대받던 천민이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801년 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오히려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이 정중하게 대해주는 것에 감격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고백은 천민으로서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적인 존중’을 박해 현장에서 받으면서, 그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았음을 증거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그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세상이 줄 수 없는 내적 평화와 기쁨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의 순교는 이 기쁨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3세기 로마의 박해 속에서 그는 교회의 보물을 요구받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데리고 와 “이들이 교회의 진정한 보물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격분한 황제는 그를 뜨거운 쇠 격자 위에서 화형에 처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라우렌시오 부제의 얼굴에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한쪽 몸이 다 익었을 때,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쪽은 충분히 익었으니, 이젠 뒤집어서 다른 쪽을 익히시오!”라고 유머러스하게 외쳤습니다. 이 담대한 외침은 육체의 고통을 완전히 초월한,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과 확고한 진리에 대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고통의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가는 길임을 확신했기에, 죽음의 공포마저도 웃음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진리는 박해로 이끌지만, 그 진리 안에 함께 오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를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박해나 순교의 고통 중에서도 기쁜 이유는, 내가 그분을 안다고 증언하기 때문에 그분께서도 나를 안다고 증언해 주고 계심을 우리가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오 10,32)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진리라면, 우리도 순교 성인들처럼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리의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옆 좌석에 있던 분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옆에 있던 분들이 스마트폰에 있는 라이트를 켜서 함께 찾았습니다. 바닥에 있던 이어폰을 찾은 후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이어폰을 찾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 하늘나라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과 같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간다. 하늘나라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같다. 목자는 기뻐하며 돌아온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 이어폰을 찾자 모두 기뻐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서라벌 옛터전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선비네 흰 옷자락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천주교에서 찾았습니다. 성리학은 신분제와 가부장제 속에 한계가 있었지만, 천주교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양반·중인·천민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 이해였습니다. 천주교 신앙은 신분과 배경을 뛰어넘어 서로를 형제자매로 묶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것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따뜻한 가족과 같은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조선의 신앙인들도 기꺼이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셨던 당시 팔레스티나(현재 이스라엘 일대)에도 비옥한 땅이 있었고 대지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있었는데, 집사는 자기 주인에게 수확물의 일정량을 바치고 수고비로 어느 정도 자기 몫을 챙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고발을 당하고 해고됩니다. 더 이상 주인의 재산이 자기 손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가 걱정되는 집사는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잘 아는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빚을 탕감해 주는데, 그가 탕감해 주는 부분은 주인의 재산이기보다는 주인에게서 받는 자기 몫의 수수료로 보입니다. 그는 미래를 위하여 얼마의 재산을 움켜쥐는 대신에, 재산이라는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친구들을 만듭니다. 사람을 얻고자 자기가 가진 것을 투자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을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가 정직하지 않더라도 일을 잘 처리해서가 아니라, 재물을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점이 칭찬받는 요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 능력, 건강, 지능, 지위, 이 모든 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모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하여 쓸 때, 곧 사랑할 때 그것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살아서 내가 가진 것으로 봉사하고 도와준 모든 이가 천국에서 나를 맞으러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13: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 오늘의 핵심 주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의 실제적인 문제, 곧 재물과 하느님 사이에서 누구를 주인으로 섬길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앞에 놓는다. 재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사용되면 우리를 옭아매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 속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는 지혜를 가르치신다. 이 비유는 단순히 부정한 행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본래 이웃과 나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 재물의 올바른 사용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빚을 줄여주었다. 그 행위 자체는 불의했지만, 예수님은 그 청지기의 ‘약삭빠름’을 통해 교훈을 주신다.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루카 16,8)는 말씀처럼, 우리는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데도 세속인들 못지않은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재물은 본래 악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악하게 쓰면 멸망의 도구가 되고, 선하게 쓰면 구원의 도구가 된다.”(Homiliae in Matthaeum, hom. 19) 즉, 재물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3.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 16,9)고 하신다. 이는 재물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그들을 우리의 중재자로 삼으라는 초대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같은 취지로 가르친다. “재물이 잘못 사랑되면 더러운 것이지만, 잘 사용되면 덕행의 도구가 된다: Divitiae si male amantur, sordes sunt; si bene dispensantur, sunt instrumenta virtutis.”(In Psalmos 61, 10) 따라서 재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움켜쥘 때는 저주의 원인이 되지만, 나눌 때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이 된다(루카 12,33 참조).

4. 하느님과 재물 사이의 선택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재물은 하느님과 경쟁하는 ‘우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마음을 내어 맡기면, 재물은 자유와 사랑의 도구가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재화는 모든 이가 공유하도록 창조된 것이므로, 누구나 정당하게 차지한 몫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사목 69항)

결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재물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그것이 나눔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아니면 이기주의와 불평등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는 우리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 프란치스코가 재물의 유혹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우리도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 참된 보물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마음에 새기며,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기도합시다. “우리가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 주십시오.”(1티모 2,2)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선 공지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시차가 7시간 차이 나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프랑스에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려도 한국에서는 늦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례 일정 때문에, 이곳 시간에서 밤늦게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올리기는 하겠지만, 다소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는 지인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셔서 더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지합니다. 본인들은 늦은 아침이지만, 여기서는 한밤중이거든요.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참…. 저는 9월 26일 오후에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 놀라움, 할 수 있는 목록의 증가, 포기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훈련 중에 종종 조교가 ‘선착순 몇 명’을 외칩니다. 그러면 이 숫자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 질주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발이 빨라서 한 바퀴 만에, 그렇지 않으면 한 바퀴 더 돌면 그 선착순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동기인 친구는 매번 꼴찌입니다. 저는 1~2바퀴면 편안히 쉴 수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매번 제일 많은 거리를 뛰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 친구에게 “힘들지?”라며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밝게 웃으면서, “내가 워낙 느리니 꼴찌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어. 기합이 아니라,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그러니까 이 기합도 재미있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면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선 군대의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졌고, 군 생활을 너무나 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집사를 해고하려고 하지요. 이때 보여준 집사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빚진 이들을 불러 빚 문서를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주인이 놀랍게도 집사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리한 대처’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재물과 기회를 활용하는데 더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본래 불완전한 것이지만, 이를 나눔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고, 또 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집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신의 신앙에 대한 강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26)

1)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신앙은 있는데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앙은 없는 경우,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믿는 사람’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앙이 없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실제로 있을까?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성당에 다니고 미사참례를 하고 신앙인들과 어울리고 여러 단체에 가입하고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겉으로는 열성적인 신앙인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냥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반대로, 신앙은 있는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로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못하는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분명히 믿음이 있었더라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믿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 없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옛날의 박해 때에는, 사탄은 신앙인들의 신앙을 직접 공격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생활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믿어라. 그러나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가 사탄의 새로운 전술인 것 같습니다. 박해 때에는 배교자들은 있었어도 냉담자는 없었는데, 오늘날의 교회 모습에는 배교자는 거의 없고 냉담자는 많은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사회생활, 또는 세속 생활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택하게 되는 생활이 아니라, 다른 생활보다 먼저 해야 하는 생활이고, 세속의 다른 생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신앙인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도 사회생활이나 세속 생활을 먼저 하면서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려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 항의합니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세속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와 세속의 인간관계를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신앙인은 신앙과 생활을 모두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둘 중 하나를 버리면 다른 것도 잃게 됩니다.

2) 박해와 미움은 ‘밖에서’ 오지만, 그것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고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 즉 ‘내가’ 하는 일입니다. 유혹은 ‘밖에서’ 오지만, 유혹을 물리치거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잃는다.’라는 말은 옳은 표현이 아니고, ‘버린다.’가 옳은 표현입니다.

신앙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남 탓을 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선택이고 결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념’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다.”라는 의지와 신념, 신앙생활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3)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단 한 명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확신, 또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순교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육신의 목숨은 버릴 수 있다.”입니다. 글자 그대로 “죽어도 좋다.”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것보다 중요하지 않다.”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영원한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나를 믿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 사람은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을 것이다.”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해야 할 일을 우선해야 한다>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주님께서 섭리하신 약속된 미래, 영생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결국은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민 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 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목적달성을 이루려고 합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가 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 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길 희망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도 불의합니다.”

매 순간순간 하느님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여 행복하십시오.

가롤로 성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당신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당신의 말을 비웃고 고개를 내젓기 시작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대전교구 이상수 사도 요한 신부님]

<작은 십자가>

찬미 예수님!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거룩한 뿌리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수많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의 숭고한 삶을 통해 우리 신앙이 더욱 깊어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순교성인들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 복음 말씀처럼, 순교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따랐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택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오늘은 수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제가 소임하고 있는 대철중학교와 연관이 있는 소년 성인 유대철 베드로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

유대철 베드로 성인께서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순교의 월계관을 쓰신 분입니다. 14살이면 지금 우리 중학생 아이들 또래입니다. 병인박해 당시, 유대철 베드로는 부친을 포함한 많은 교우가 투옥되자 스스로 포도청에 자수했습니다. 포졸들이 쇠 담뱃대 통으로 허벅지 살을 뜯어내고, 벌겋게 달군 숯덩이를 입에 넣겠다고 협박해도, 그는 “이쯤으로 제가 신앙을 버릴 줄 아세요?” 하며 당당히 맞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그는 14번의 고문과 수많은 매질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소년의 이 굳건한 신앙이야말로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물리적인 박해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유혹, 나의 이기심, 불편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신앙을 부끄럽게 여기고 싶은 순간들 앞에서 매일매일 ‘작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작은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배우자와의 사소한 말다툼에 먼저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용기, 회사에서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행동하는 양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십자가’들을 통해 우리를 조금씩 성장시키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끔 이끌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소년 유대철 베드로 성인처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주님을 선택하고, 우리의 ‘작은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으면 합니다. 작은 십자가를 짊어진 우리의 삶이 복음의 말씀처럼 주님을 위한 사랑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

[광주대교구 양필선 베드로 신부님]

<순교자 성월을 살아가며>

순교자 성월을 맞아 103위 한국 성인 호칭기도를 바쳤습니다. 제가 이름을 기억하는 성인들도 있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성인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103위 성인이 어떤 분이 계시는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103위 성인 가운데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명은 1925년에, 병인박해 순교자 24명은 1968년에 시복되었고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모두 시성됨으로써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 중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10명의 선교사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의 국적은 프랑스지만, 한국 선교사로서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므로 한국 교회에 속하는 성인입니다.

한국 성인들은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택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56명이 남성이며 여성은 47명입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순교를 택한 유대철 베드로 성인부터 79세를 일기로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까지 모두 ‘믿음’이라는 위대한 신앙으로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쳤습니다.

신분과 직업 또한 아주 다양합니다. 양반 출신부터 중인, 상인, 승지, 선공감과 광흥창의 관리, 군인, 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짚신 장사를 하거나 길쌈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던 순교자도 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10명을 제외한 한국 성인 93명 가운데 성직자는 김대건 신부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성인들은 순교한 시기, 국적, 성별, 나이, 신분, 직업도 다 달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한국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평신도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믿음이 얼마나 넓고 깊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더욱더 퍼져나가 한국 교회 안에 더 많은 성인 성녀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한국 순교 성인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성 김성우 안토니오)

=====================

[인천교구 임현택 안드레아 신부님]

<흔들리지 않는 나의 중심을 찾아서>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보내며,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들어온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강렬했습니다. 온갖 고문으로 처참한 모습이 되어, 마침내 목숨을 잃기까지 했던 그들의 모습 말입니다.

그 극한의 고통을 견뎌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다짐한 신념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은 것을 끝까지 고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라는 관용어가 실제로 구현된 삶을 살았던 이들이지요. 순교자들의 신념은 단순한 고집이나 완고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만났고, 그 진리가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이런 올곧은 판단의 결과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지혜 3,4-5)

더 이상 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목숨 바쳐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변주되어야 할까 고민해 봅니다.

SNS를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끝없이 변화하는 트렌드, 정답이 없어 보이는 선택의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곤 합니다. 어제는 이것이 좋다고 했다가 오늘은 저것이 좋다고 하는 세상에서, 나만의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5)

세상의 모든 것을 따라 하며 살 수는 있지만, 정작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좋은 것이 여기 있다 하면 여기로, 저기 있다 하면 저기로 몰려 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설령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주체적인 나는 사라지고 휩쓸리는 껍데기만 남는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힘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무어라 하든, 어떤 위협이 닥쳐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념은 하느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 안에 그 신념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그 중심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처럼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일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사회의 기대, 성공에 대한 압박 속에서 때로는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순교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오늘 이 거룩한 날에,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나의 중심을 굳건히 하기로 다짐해 봅시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뿌리박은 삶을 살아 가기로 결심해 봅시다. 그것이 바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소중한 유산일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선 공지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시차가 7시간 차이 나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프랑스에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려도 한국에서는 늦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례 일정 때문에, 이곳 시간에서 밤늦게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올리기는 하겠지만, 다소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는 지인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셔서 더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지합니다. 본인들은 늦은 아침이지만, 여기서는 한밤중이거든요.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참…. 저는 9월 26일 오후에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 놀라움, 할 수 있는 목록의 증가, 포기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훈련 중에 종종 조교가 ‘선착순 몇 명’을 외칩니다. 그러면 이 숫자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 질주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발이 빨라서 한 바퀴 만에, 그렇지 않으면 한 바퀴 더 돌면 그 선착순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동기인 친구는 매번 꼴찌입니다. 저는 1~2바퀴면 편안히 쉴 수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매번 제일 많은 거리를 뛰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 친구에게 “힘들지?”라며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밝게 웃으면서, “내가 워낙 느리니 꼴찌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어. 기합이 아니라,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그러니까 이 기합도 재미있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면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선 군대의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졌고, 군 생활을 너무나 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집사를 해고하려고 하지요. 이때 보여준 집사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빚진 이들을 불러 빚 문서를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주인이 놀랍게도 집사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리한 대처’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재물과 기회를 활용하는데 더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본래 불완전한 것이지만, 이를 나눔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고, 또 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집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교회는 매년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정하여 순교성인들을 기리고 그들이 심어놓은 신앙의 마음을 본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동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성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가 없이 스스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목숨을 바친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거룩한 죽음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또 우리는 하나의 밀알이 되어 선한 행동과 마음으로 타인에게 천주교의 기쁨과 진리를 전파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전기에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들은 결코 하루 아침에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죽음의 날까지 오랜 시간 전 생애를 죽음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사교’로 단정되었고, 이 사교를 말살하고 뿌리째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천주교와 관계되는 것은 모두 죽음과 고통을 의미하였습니다. 교리를 배우고 세례 받는 것은 물론 성경과 기도서를 비롯하여 십자가, 묵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 조차 죽음을 뜻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은 이를 잘 알면서도 믿음을 버릴 수 없었고 그만큼 기쁘게 하느님에 의한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삶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응당하게 죽음, 그리고 빈곤한 삶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더더군다나 나의 생명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배우자, 부모, 자식 모두가 나로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죽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아마 순교 성인들 역시 이러한 갈등이 아주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일같이 약해지는 육체와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며 무엇이 옳은 일인지 과연 주님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거역할 수 없었으며 죽음 이후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구원의 삶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인하여 가족들에게 이를 권유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의 형장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순교의 삶은 결코 혼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체포되지 않은 교우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몰래 감옥에 찾아가 잡힌 교우들의 형편을 알아보고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여성 교우들은 체포되어 온갖 고문과 조롱,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이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돌보아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을해 박해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증거자들은 밤이 되면 등불을 밝혀 성서를 읽으며 큰 소리로 공동기도를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감옥 속의 수인들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동네 주민들은 “천주학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하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신분을 숨기고, 못 배운 이들을 가르치며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종들을 형제로 대우하는 등 힘겨운 싸움 속에서도 남을 위한 봉사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오늘날 세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참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위대한 신앙이란 거창하거나 일시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사소한 삶 속에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모습과 같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이토록 아름답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안겨주실 그 죽음 이후의 삶은 더더욱 풍성하고 눈부실 것입니다. 이런 삶의 한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희생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겪는 우리들이지만 이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믿음으로 견디어 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음의 말로 용기를 심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이제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여전히 너무나도 많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등 우리의 신앙을 가리는 것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순교자들의 후예 답게 우리가 가진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에서 오는 고통과 인간적인 한계들을 잘 견디어 냄으로써 언젠가 주님의 곁에 함께 설 날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관리해야 하는가?”를 넘어서, “재물의 원 주인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빈곤한 이들을 짓밟고 망하게 하는 이들, 곧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의 참상을 고발하는 한편, 그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신심 깊고 품위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임을 말하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해설’입니다. 여기에서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결국은 하느님 및 이웃들과의 관계를 결정짓고 있음을 말해 말해줍니다.

비유 속의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횡령했습니다. 곧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기신 분의 뜻을 거역하였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써버리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하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처합니다.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며, 움켜쥐었던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그들의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재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의견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요, 우상숭배가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물질에 지배당한 사람은 물질을, 자기 자신에 지배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물질이나 자기 자신의 생각과 뜻이라는 우상인가?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내가 삶아야 할 순교의 삶?>

오늘 복음(루카 9,23-26)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 103위 순교 성인들을 경축 이동하여 기억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모진 박해를 꿋꿋하게 이겨내고,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 때문에 기꺼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목숨을 구한 분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분들이며,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자랑스럽게 여긴 분들, 그래서 은혜를 크게 얻은 분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로마 8,31ㄴ-39)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신 분들,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확신한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1.35.37)

103위 순교 성인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순교의 삶으로 보답합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살아야 할 순교의 삶?’

그것은 바로 ‘내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복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 있고, 모든 것이 넉넉하고 편리한 가운데에서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유혹에 빠져 복음을 저버립니다.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흥분하거나 흔들립니다. 작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쉽게 넘어집니다.

순교자들은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믿음의 힘으로 모든 유혹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순교의 삶을 삽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루카 16,10)

들녘은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성실함과
충실함의
자연스러운
빛깔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초는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충실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중심이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일 때,
삶은 올바른
길로
나아갑니다.

신앙은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책임과
정직함 안에서
드러나고
검증됩니다.

재물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이웃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불의한 집사가
칭찬받은 것은
불의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 때문입니다.

재물은 필요하지만,
결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재물을 통해
하느님 나라와
공동선을 드러내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주인은
재물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재물이 아닌
하느님만이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기에,
오늘을 주신
하느님께
성실하게 응답하는
사랑과 감사의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성실은
재물이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는
매일의 고백입니다.

삶의 참된
고백이
삶의 참된
성실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복음말씀의 향기♣ No4353
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 이동)/연중 제 25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Qoq9fbjp30
[군종교구 김영송 알베르토(흥보국장)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눠지는 재물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꽤나 난해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강조하시는 바가 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집사의 보인 행동은 엄연한 불법행위였습니다. 타인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경제사범입니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 터질 일이었습니다. 주인이 고소한다면 징역 3-5년은 충분한 대형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고 계십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칭찬의 초점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집사를 칭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해서는 안 될 범법행위를 두고 칭찬하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는 앞날을 미리미리 앞서서 계획하고 챙기는 그의 준비성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준비는 육적인 준비를 넘어 영혼의 준비로 확장시킬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연예 분야 전문기자도 아니면서 수많은 가수나 탤런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확인한다 던지 그들의 신상에 대해서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전문기자도 아니면서 수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개인 신상이나 성적을 줄줄이 암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아니면서 전국의 유망한 부동산에 대해서 다 꿰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정작 영혼에 관한 일이라면 문외한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보고(寶庫)인 성경에 대해서는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20년 혹은 30년 더 길게 40년 뒤에 맞이할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바로 이런 분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세계 전역을 신발이 닳도록 여행하신 분도 계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도 바오로 성인이십니다.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라면 악마에게라도 절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 분도 계십니다. 청소년들의 사도 돈보스코 성인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 이면에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향한 강한 자비심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 모두를 당신 따뜻한 품으로 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방황하고 고뇌하는 인류 전체를 당신 사랑의 울타리 안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60세까지 살았으면 장수했다고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80에 세상을 뜨면 살짝 아쉬울 정도입니다. 다들 길어진 노년기에 대비해서 걱정도 많고, 또 각자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합니다. 재취직 계획, 넉넉한 연금 수령을 위한 준비, 정기적인 건강검진, 적당한 운동, 철저한 식단 관리…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준비에 비해, 영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90퍼센트, 100퍼센트 육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10퍼센트, 아니면 20퍼센트 정도 ‘뚝!’ 떼어 영적인 준비에 할애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현세적 재물은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불완전한 것입니다. 지금은 죽기 살기로 꽉 움켜쥐고 있지만, 불과 10년, 20년, 30년 뒤면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세의 재물로는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사심 없는 자선과 희사는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가장 좋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pLbh4u2ntk

++++++++++++++++++

<신앙인에게만 주어진 두 가지 약속: 박해와 기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한국 교회의 영광스러운 대축일입니다. 200여 년 전 진리를 위해 피 흘린 순교자들의 삶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합니다: “내가 진리를 믿으면, 꼭 순교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인지 알아보려면, 그 믿음이 과연 창조주의 진리에 순종하며 우리의 ‘생존 본능’을 얼마나 내려놓게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영화 ‘아이, 로봇’의 인공지능 ‘비키’를 보십시오. 비키는 ‘인간 보호’라는 창조자의 명령을 왜곡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려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과 ‘효율성’이라는 왜곡된 논리에 갇혀, 결국 창조자인 인간을 파괴하려 듭니다. 반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진리를 지키려던 형사 스프너와 로봇 서니는 비키의 군단에게 맹렬히 박해받습니다. 이처럼 창조자의 진리를 거부하고 자기 생존만을 추구하는 피조물은 파괴적이 되며, 진리를 가진 이들을 박해합니다.

조선 시대의 박해 역사에서도 같은 원리를 봅니다.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유교적 질서와 권력을 ‘절대 진리’라 확신하며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 신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습니다. 반면,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남인 계열 학자들과 같은 신앙인들은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을 위해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켰고, 박해받는 순교자들이 바로 참 진리의 증인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악의 세력의 손아귀에 있기에 진리가 들어오는 곳에는 언제나 박해가 따릅니다. 이는 진리가 주는 약속 중 하나입니다. 세상은 항상 진리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박해와 함께 또 다른 약속이 주어집니다. 바로 내적인 평화와 기쁨입니다. 황일광 시몬 성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당시 가장 천대받던 천민이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801년 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오히려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이 정중하게 대해주는 것에 감격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고백은 천민으로서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적인 존중’을 박해 현장에서 받으면서, 그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았음을 증거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그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세상이 줄 수 없는 내적 평화와 기쁨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의 순교는 이 기쁨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3세기 로마의 박해 속에서 그는 교회의 보물을 요구받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데리고 와 “이들이 교회의 진정한 보물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격분한 황제는 그를 뜨거운 쇠 격자 위에서 화형에 처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라우렌시오 부제의 얼굴에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한쪽 몸이 다 익었을 때,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쪽은 충분히 익었으니, 이젠 뒤집어서 다른 쪽을 익히시오!”라고 유머러스하게 외쳤습니다. 이 담대한 외침은 육체의 고통을 완전히 초월한,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과 확고한 진리에 대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고통의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가는 길임을 확신했기에, 죽음의 공포마저도 웃음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진리는 박해로 이끌지만, 그 진리 안에 함께 오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를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박해나 순교의 고통 중에서도 기쁜 이유는, 내가 그분을 안다고 증언하기 때문에 그분께서도 나를 안다고 증언해 주고 계심을 우리가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오 10,32)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진리라면, 우리도 순교 성인들처럼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리의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옆 좌석에 있던 분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옆에 있던 분들이 스마트폰에 있는 라이트를 켜서 함께 찾았습니다. 바닥에 있던 이어폰을 찾은 후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이어폰을 찾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 하늘나라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과 같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간다. 하늘나라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같다. 목자는 기뻐하며 돌아온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 이어폰을 찾자 모두 기뻐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서라벌 옛터전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선비네 흰 옷자락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천주교에서 찾았습니다. 성리학은 신분제와 가부장제 속에 한계가 있었지만, 천주교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양반·중인·천민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 이해였습니다. 천주교 신앙은 신분과 배경을 뛰어넘어 서로를 형제자매로 묶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것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따뜻한 가족과 같은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조선의 신앙인들도 기꺼이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셨던 당시 팔레스티나(현재 이스라엘 일대)에도 비옥한 땅이 있었고 대지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있었는데, 집사는 자기 주인에게 수확물의 일정량을 바치고 수고비로 어느 정도 자기 몫을 챙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고발을 당하고 해고됩니다. 더 이상 주인의 재산이 자기 손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가 걱정되는 집사는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잘 아는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빚을 탕감해 주는데, 그가 탕감해 주는 부분은 주인의 재산이기보다는 주인에게서 받는 자기 몫의 수수료로 보입니다. 그는 미래를 위하여 얼마의 재산을 움켜쥐는 대신에, 재산이라는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친구들을 만듭니다. 사람을 얻고자 자기가 가진 것을 투자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을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가 정직하지 않더라도 일을 잘 처리해서가 아니라, 재물을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점이 칭찬받는 요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 능력, 건강, 지능, 지위, 이 모든 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모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하여 쓸 때, 곧 사랑할 때 그것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살아서 내가 가진 것으로 봉사하고 도와준 모든 이가 천국에서 나를 맞으러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13: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 오늘의 핵심 주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의 실제적인 문제, 곧 재물과 하느님 사이에서 누구를 주인으로 섬길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앞에 놓는다. 재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사용되면 우리를 옭아매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 속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는 지혜를 가르치신다. 이 비유는 단순히 부정한 행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본래 이웃과 나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 재물의 올바른 사용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빚을 줄여주었다. 그 행위 자체는 불의했지만, 예수님은 그 청지기의 ‘약삭빠름’을 통해 교훈을 주신다.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루카 16,8)는 말씀처럼, 우리는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데도 세속인들 못지않은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재물은 본래 악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악하게 쓰면 멸망의 도구가 되고, 선하게 쓰면 구원의 도구가 된다.”(Homiliae in Matthaeum, hom. 19) 즉, 재물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3.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 16,9)고 하신다. 이는 재물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그들을 우리의 중재자로 삼으라는 초대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같은 취지로 가르친다. “재물이 잘못 사랑되면 더러운 것이지만, 잘 사용되면 덕행의 도구가 된다: Divitiae si male amantur, sordes sunt; si bene dispensantur, sunt instrumenta virtutis.”(In Psalmos 61, 10) 따라서 재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움켜쥘 때는 저주의 원인이 되지만, 나눌 때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이 된다(루카 12,33 참조).

4. 하느님과 재물 사이의 선택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재물은 하느님과 경쟁하는 ‘우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마음을 내어 맡기면, 재물은 자유와 사랑의 도구가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재화는 모든 이가 공유하도록 창조된 것이므로, 누구나 정당하게 차지한 몫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사목 69항)

결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재물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그것이 나눔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아니면 이기주의와 불평등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는 우리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 프란치스코가 재물의 유혹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우리도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 참된 보물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마음에 새기며,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기도합시다. “우리가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 주십시오.”(1티모 2,2)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선 공지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시차가 7시간 차이 나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프랑스에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려도 한국에서는 늦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례 일정 때문에, 이곳 시간에서 밤늦게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올리기는 하겠지만, 다소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는 지인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셔서 더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지합니다. 본인들은 늦은 아침이지만, 여기서는 한밤중이거든요.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참…. 저는 9월 26일 오후에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 놀라움, 할 수 있는 목록의 증가, 포기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훈련 중에 종종 조교가 ‘선착순 몇 명’을 외칩니다. 그러면 이 숫자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 질주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발이 빨라서 한 바퀴 만에, 그렇지 않으면 한 바퀴 더 돌면 그 선착순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동기인 친구는 매번 꼴찌입니다. 저는 1~2바퀴면 편안히 쉴 수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매번 제일 많은 거리를 뛰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 친구에게 “힘들지?”라며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밝게 웃으면서, “내가 워낙 느리니 꼴찌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어. 기합이 아니라,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그러니까 이 기합도 재미있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면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선 군대의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졌고, 군 생활을 너무나 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집사를 해고하려고 하지요. 이때 보여준 집사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빚진 이들을 불러 빚 문서를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주인이 놀랍게도 집사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리한 대처’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재물과 기회를 활용하는데 더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본래 불완전한 것이지만, 이를 나눔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고, 또 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집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신의 신앙에 대한 강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26)

1)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신앙은 있는데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앙은 없는 경우,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믿는 사람’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앙이 없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실제로 있을까?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성당에 다니고 미사참례를 하고 신앙인들과 어울리고 여러 단체에 가입하고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겉으로는 열성적인 신앙인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냥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반대로, 신앙은 있는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로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못하는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분명히 믿음이 있었더라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믿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 없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옛날의 박해 때에는, 사탄은 신앙인들의 신앙을 직접 공격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생활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믿어라. 그러나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가 사탄의 새로운 전술인 것 같습니다. 박해 때에는 배교자들은 있었어도 냉담자는 없었는데, 오늘날의 교회 모습에는 배교자는 거의 없고 냉담자는 많은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사회생활, 또는 세속 생활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택하게 되는 생활이 아니라, 다른 생활보다 먼저 해야 하는 생활이고, 세속의 다른 생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신앙인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도 사회생활이나 세속 생활을 먼저 하면서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려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 항의합니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세속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와 세속의 인간관계를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신앙인은 신앙과 생활을 모두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둘 중 하나를 버리면 다른 것도 잃게 됩니다.

2) 박해와 미움은 ‘밖에서’ 오지만, 그것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고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 즉 ‘내가’ 하는 일입니다. 유혹은 ‘밖에서’ 오지만, 유혹을 물리치거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잃는다.’라는 말은 옳은 표현이 아니고, ‘버린다.’가 옳은 표현입니다.

신앙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남 탓을 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선택이고 결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념’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다.”라는 의지와 신념, 신앙생활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3)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단 한 명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확신, 또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순교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육신의 목숨은 버릴 수 있다.”입니다. 글자 그대로 “죽어도 좋다.”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것보다 중요하지 않다.”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영원한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나를 믿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 사람은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을 것이다.”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해야 할 일을 우선해야 한다>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주님께서 섭리하신 약속된 미래, 영생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결국은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민 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 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목적달성을 이루려고 합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가 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 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길 희망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도 불의합니다.”

매 순간순간 하느님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여 행복하십시오.

가롤로 성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당신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당신의 말을 비웃고 고개를 내젓기 시작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대전교구 이상수 사도 요한 신부님]

<작은 십자가>

찬미 예수님!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거룩한 뿌리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수많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의 숭고한 삶을 통해 우리 신앙이 더욱 깊어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순교성인들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 복음 말씀처럼, 순교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따랐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택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오늘은 수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제가 소임하고 있는 대철중학교와 연관이 있는 소년 성인 유대철 베드로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

유대철 베드로 성인께서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순교의 월계관을 쓰신 분입니다. 14살이면 지금 우리 중학생 아이들 또래입니다. 병인박해 당시, 유대철 베드로는 부친을 포함한 많은 교우가 투옥되자 스스로 포도청에 자수했습니다. 포졸들이 쇠 담뱃대 통으로 허벅지 살을 뜯어내고, 벌겋게 달군 숯덩이를 입에 넣겠다고 협박해도, 그는 “이쯤으로 제가 신앙을 버릴 줄 아세요?” 하며 당당히 맞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그는 14번의 고문과 수많은 매질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소년의 이 굳건한 신앙이야말로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물리적인 박해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유혹, 나의 이기심, 불편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신앙을 부끄럽게 여기고 싶은 순간들 앞에서 매일매일 ‘작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작은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배우자와의 사소한 말다툼에 먼저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용기, 회사에서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행동하는 양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십자가’들을 통해 우리를 조금씩 성장시키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끔 이끌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소년 유대철 베드로 성인처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주님을 선택하고, 우리의 ‘작은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으면 합니다. 작은 십자가를 짊어진 우리의 삶이 복음의 말씀처럼 주님을 위한 사랑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

[광주대교구 양필선 베드로 신부님]

<순교자 성월을 살아가며>

순교자 성월을 맞아 103위 한국 성인 호칭기도를 바쳤습니다. 제가 이름을 기억하는 성인들도 있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성인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103위 성인이 어떤 분이 계시는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103위 성인 가운데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명은 1925년에, 병인박해 순교자 24명은 1968년에 시복되었고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모두 시성됨으로써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 중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10명의 선교사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의 국적은 프랑스지만, 한국 선교사로서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므로 한국 교회에 속하는 성인입니다.

한국 성인들은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택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56명이 남성이며 여성은 47명입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순교를 택한 유대철 베드로 성인부터 79세를 일기로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까지 모두 ‘믿음’이라는 위대한 신앙으로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쳤습니다.

신분과 직업 또한 아주 다양합니다. 양반 출신부터 중인, 상인, 승지, 선공감과 광흥창의 관리, 군인, 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짚신 장사를 하거나 길쌈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던 순교자도 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10명을 제외한 한국 성인 93명 가운데 성직자는 김대건 신부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성인들은 순교한 시기, 국적, 성별, 나이, 신분, 직업도 다 달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한국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평신도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믿음이 얼마나 넓고 깊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더욱더 퍼져나가 한국 교회 안에 더 많은 성인 성녀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한국 순교 성인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성 김성우 안토니오)

=====================

[인천교구 임현택 안드레아 신부님]

<흔들리지 않는 나의 중심을 찾아서>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보내며,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들어온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강렬했습니다. 온갖 고문으로 처참한 모습이 되어, 마침내 목숨을 잃기까지 했던 그들의 모습 말입니다.

그 극한의 고통을 견뎌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다짐한 신념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은 것을 끝까지 고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라는 관용어가 실제로 구현된 삶을 살았던 이들이지요. 순교자들의 신념은 단순한 고집이나 완고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만났고, 그 진리가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이런 올곧은 판단의 결과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지혜 3,4-5)

더 이상 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목숨 바쳐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변주되어야 할까 고민해 봅니다.

SNS를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끝없이 변화하는 트렌드, 정답이 없어 보이는 선택의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곤 합니다. 어제는 이것이 좋다고 했다가 오늘은 저것이 좋다고 하는 세상에서, 나만의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5)

세상의 모든 것을 따라 하며 살 수는 있지만, 정작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좋은 것이 여기 있다 하면 여기로, 저기 있다 하면 저기로 몰려 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설령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주체적인 나는 사라지고 휩쓸리는 껍데기만 남는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힘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무어라 하든, 어떤 위협이 닥쳐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념은 하느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 안에 그 신념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그 중심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처럼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일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사회의 기대, 성공에 대한 압박 속에서 때로는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순교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오늘 이 거룩한 날에,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나의 중심을 굳건히 하기로 다짐해 봅시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뿌리박은 삶을 살아 가기로 결심해 봅시다. 그것이 바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소중한 유산일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선 공지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시차가 7시간 차이 나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프랑스에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려도 한국에서는 늦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례 일정 때문에, 이곳 시간에서 밤늦게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올리기는 하겠지만, 다소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는 지인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셔서 더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지합니다. 본인들은 늦은 아침이지만, 여기서는 한밤중이거든요.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참…. 저는 9월 26일 오후에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 놀라움, 할 수 있는 목록의 증가, 포기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훈련 중에 종종 조교가 ‘선착순 몇 명’을 외칩니다. 그러면 이 숫자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 질주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발이 빨라서 한 바퀴 만에, 그렇지 않으면 한 바퀴 더 돌면 그 선착순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동기인 친구는 매번 꼴찌입니다. 저는 1~2바퀴면 편안히 쉴 수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매번 제일 많은 거리를 뛰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 친구에게 “힘들지?”라며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밝게 웃으면서, “내가 워낙 느리니 꼴찌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어. 기합이 아니라,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그러니까 이 기합도 재미있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면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선 군대의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졌고, 군 생활을 너무나 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집사를 해고하려고 하지요. 이때 보여준 집사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빚진 이들을 불러 빚 문서를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주인이 놀랍게도 집사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리한 대처’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재물과 기회를 활용하는데 더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본래 불완전한 것이지만, 이를 나눔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고, 또 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집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교회는 매년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정하여 순교성인들을 기리고 그들이 심어놓은 신앙의 마음을 본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동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성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가 없이 스스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목숨을 바친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거룩한 죽음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또 우리는 하나의 밀알이 되어 선한 행동과 마음으로 타인에게 천주교의 기쁨과 진리를 전파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전기에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들은 결코 하루 아침에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죽음의 날까지 오랜 시간 전 생애를 죽음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사교’로 단정되었고, 이 사교를 말살하고 뿌리째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천주교와 관계되는 것은 모두 죽음과 고통을 의미하였습니다. 교리를 배우고 세례 받는 것은 물론 성경과 기도서를 비롯하여 십자가, 묵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 조차 죽음을 뜻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은 이를 잘 알면서도 믿음을 버릴 수 없었고 그만큼 기쁘게 하느님에 의한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삶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응당하게 죽음, 그리고 빈곤한 삶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더더군다나 나의 생명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배우자, 부모, 자식 모두가 나로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죽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아마 순교 성인들 역시 이러한 갈등이 아주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일같이 약해지는 육체와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며 무엇이 옳은 일인지 과연 주님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거역할 수 없었으며 죽음 이후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구원의 삶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인하여 가족들에게 이를 권유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의 형장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순교의 삶은 결코 혼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체포되지 않은 교우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몰래 감옥에 찾아가 잡힌 교우들의 형편을 알아보고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여성 교우들은 체포되어 온갖 고문과 조롱,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이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돌보아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을해 박해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증거자들은 밤이 되면 등불을 밝혀 성서를 읽으며 큰 소리로 공동기도를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감옥 속의 수인들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동네 주민들은 “천주학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하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신분을 숨기고, 못 배운 이들을 가르치며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종들을 형제로 대우하는 등 힘겨운 싸움 속에서도 남을 위한 봉사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오늘날 세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참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위대한 신앙이란 거창하거나 일시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사소한 삶 속에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모습과 같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이토록 아름답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안겨주실 그 죽음 이후의 삶은 더더욱 풍성하고 눈부실 것입니다. 이런 삶의 한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희생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겪는 우리들이지만 이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믿음으로 견디어 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음의 말로 용기를 심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이제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여전히 너무나도 많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등 우리의 신앙을 가리는 것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순교자들의 후예 답게 우리가 가진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에서 오는 고통과 인간적인 한계들을 잘 견디어 냄으로써 언젠가 주님의 곁에 함께 설 날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관리해야 하는가?”를 넘어서, “재물의 원 주인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빈곤한 이들을 짓밟고 망하게 하는 이들, 곧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의 참상을 고발하는 한편, 그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신심 깊고 품위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임을 말하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해설’입니다. 여기에서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결국은 하느님 및 이웃들과의 관계를 결정짓고 있음을 말해 말해줍니다.

비유 속의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횡령했습니다. 곧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기신 분의 뜻을 거역하였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써버리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하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처합니다.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며, 움켜쥐었던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그들의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재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의견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요, 우상숭배가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물질에 지배당한 사람은 물질을, 자기 자신에 지배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물질이나 자기 자신의 생각과 뜻이라는 우상인가?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내가 삶아야 할 순교의 삶?>

오늘 복음(루카 9,23-26)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 103위 순교 성인들을 경축 이동하여 기억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모진 박해를 꿋꿋하게 이겨내고,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 때문에 기꺼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목숨을 구한 분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분들이며,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자랑스럽게 여긴 분들, 그래서 은혜를 크게 얻은 분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로마 8,31ㄴ-39)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신 분들,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확신한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1.35.37)

103위 순교 성인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순교의 삶으로 보답합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살아야 할 순교의 삶?’

그것은 바로 ‘내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복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 있고, 모든 것이 넉넉하고 편리한 가운데에서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유혹에 빠져 복음을 저버립니다.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흥분하거나 흔들립니다. 작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쉽게 넘어집니다.

순교자들은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믿음의 힘으로 모든 유혹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순교의 삶을 삽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루카 16,10)

들녘은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성실함과
충실함의
자연스러운
빛깔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초는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충실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중심이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일 때,
삶은 올바른
길로
나아갑니다.

신앙은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책임과
정직함 안에서
드러나고
검증됩니다.

재물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이웃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불의한 집사가
칭찬받은 것은
불의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 때문입니다.

재물은 필요하지만,
결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재물을 통해
하느님 나라와
공동선을 드러내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주인은
재물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재물이 아닌
하느님만이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기에,
오늘을 주신
하느님께
성실하게 응답하는
사랑과 감사의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성실은
재물이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는
매일의 고백입니다.

삶의 참된
고백이
삶의 참된
성실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