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6장, 12-15절;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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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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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일단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는 하느님 생명과 사랑의 움직임이기에 단순히 하느님 안에서의 신비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당신을 계시하시며 우리를 그 신비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성경에서 거듭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참사랑이란 자신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하여 열려 있는 것이고, 그에게 가서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계시된 사건,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 안에서 발견합니다. 성부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실 때 성자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람이 되신 성자께서는 십자가상 죽음으로 당신이 성부께 받은 것을 온전히 성부께 돌려 드리십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 간의 완벽한 상호 증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었고, 거기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파견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한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겨난 공통의 사랑이 성령이시며, 그 성령께서는 이제 하느님 안에 머물던 사랑의 신비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도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성부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나’와 ‘너’가 만나서 관계를 이루고 사랑으로 일치하면서도 결코 한 쪽에 치우치거나 개성을 포기하는 일 없이, 서로의 존중 속에 하나가 되어 결국 ‘우리’가 되는 공동체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겸손과 흠숭으로 이 신비를 경축하며, 그 신비를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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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성령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신앙생활을 하며 “성령이 나에게 오셨나? 성령이 충만하다. 주님과 가까워졌다.”라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보고 우리 공동체가 성령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신앙생활을 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주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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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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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2요한 1,9).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 삶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안에 머물며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시며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이전에 누리고 계신 사랑의 일치를 알려 주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1요한 4,16)은 삼위일체의 내적 친교 안에서 아낌없이 서로를 내어 주고 계십니다.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한 친교와 상호 증여’를 이룹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한다면(요한 15,12 참조),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 ‘삶의 자리’에 현존하시게 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신비 안에 살고 숨 쉬는 진리입니다. 십자 성호를 그으며 하루에도 수없이 삼위일체를 고백하면, 삼위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수련을 하면, 우리 영혼 안에 체득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출저: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