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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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33ㄴ-37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33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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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인류 역사는 권력과 힘을 가지려던 수많은 왕과 권력가들이 이룬 흥망성쇠의 역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몫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수단과 방법이 불의해도 역사를 주도한 인물들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해석되고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권력의 희생양이 된 민초들의 삶과 억울하게 당한 소수의 역사는 왜곡되고 억압되며 멸시당해 왔습니다. 교회 역사의 어두운 시기에도 교회의 권력에 희생된 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구촌에는 여전히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이들이 많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를 꽃피운 나라들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권 의식이 성장하고 있고,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제재와 감독은 물론 공직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시민 의식도 커 가고 있습니다.
정경 유착과 적폐 청산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목마른 시민들이 이룬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도 세계사적으로 주목을 받지만, 여전히 권력의 시녀로 살아오며 잘못된 이념 논쟁의 희생양이 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역사에서는 실패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2천 년이 지난 오늘 그분의 진리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깨달은 신자들의 순교와 영웅적 신앙 고백을 통하여 승리하신 왕이 되셨습니다. 권능의 상징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며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시는 선언은, 세상이 완성되는 날까지 교회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복음입니다.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며 살아갑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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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말로는 주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어떤 가치관이 나를 주님과 더 가까이 이끌어 줄 수 있을지, 어떤 가치관이 나를 주님과 더 멀게 만드는지 함께 이야기 나눠 봅시다.
(희생, 사랑, 신앙에 대한 좌절…)
3. 신앙생활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처음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성공으로 이어진 경험이 있었는지, 반대로 성공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로 느껴진 적이 있었는지 함께 나눠봅시다.
4.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섬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5.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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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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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1,2) 하고 묻자 헤로데는 다른 임금이 태어난 줄 알고 두려워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하고 말하면서, 황제에 맞서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를 풀어 주면 그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서 빌라도를 윽박지릅니다(요한 19,12 참조).
그 결과 주님께서는 ‘예수 나자렛 사람 유다인의 왕’이라는 조소 섞인 죄명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왕’은 세상이 두려워하는 위엄과 권력을 쥐신 권세의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연약한 평화의 임금, 자비와 사랑과 봉사의 임금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여 종말, 곧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묵시록의 말씀대로 “처음과 마지막”이신 그분의 왕권을 전례 안에서 고백합니다. 1980년대 초반 보좌 신부 시절, 어느 자매님이 저에게 편지와 함께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산문시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느 분의 글인지 밝힐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만, 그대로 인용하면서 오늘의 묵상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예수는 가난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에게는 자기 소유의 집도, 보험 증서도, 사회 보장 제도 카드도, 은퇴 계획도 없었다. 그의 재산은 무엇인가? 그는 간단한 옷만 남겼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군인들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그러므로 그는 새로운 상처들을 제외하고는 빈손으로 죽었다. 재산과 후계자는 남기지 않았다.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일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래서 그는 아내 또는 자녀의 격려도 없이 짧으면서도 긴 세월을 보냈다. 우리는 자녀를 보물처럼 소중히 다루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아들 또는 딸의 아빠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쓸쓸히 죽었다. 자녀 없이…….
그러나 예수는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죽도록 사랑했다.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죽도록 신뢰했다.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죽도록 봉사했다. 예수에게는 하느님이 모든 것, 전부였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4051
11월24일[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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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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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u3HzbQyUIg
[서울대교구 이경록 스테파노(반포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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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 예수님!>
왕이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어찌 보면 세상 불쌍한 존재가 왕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것은 빛깔 좋은 개살구나 비슷합니다. 나라 전체를 책임지고 있으니, 그의 머릿속은 수백 가지 근심 걱정거리들로 가득합니다.
나라가 태평성대면 괜찮은데, 세상의 나라가 어디 늘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오랜 가뭄에 시달리고, 어떤 때는 예기치 않았던 대참사도 벌어지고, 이웃 나라들 지속적으로 찝쩍대고, 차라리 왕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리고 멀리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이 겪는 고초입니다. 세상의 왕권이라는 것, 그렇게 부질없는 것이고, 보잘것없는 것이고,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그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의 자질이나 품성이 지극히 결핍될 때 더 그렇습니다. 왕으로서 권세를 휘두르는 사람이 백성을 위한 봉사라는 가장 근본적인 책무를 망각할 때, 그 왕권은 정말이지 비참하고 초라해질 따름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성대하게 경축하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새삼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 그냥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왕 중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들이 손에 쥔 권력은 잠시라는 것을 망각하고, 남용하거나 오용할 때, 언젠가 치러야 할 대가는 참혹하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니 나와는 무관한 축일이네, 하고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해주신 탈렌트와 역량과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만간 우리 각자가 직면하게 될 신앙 여정의 종착점인 죽음, 곧 새로운 시작,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입니다.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자리에서 확연한 진리, 곧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큰 결핍에도 불구하고 나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는 진실로 믿고 있는가?
위대한 우리의 성인성녀들께서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생전, 그 진리,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백 퍼센트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지금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면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죽음과 심판 때, 그런 태도를 바꾸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언제나, 항상, 그리고 영원히, 궁극적으로도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체험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국면에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연결될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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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YDOPPwSq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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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는 법: 진리에 속함으로>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출일입니다. 전례력 상 일 년의 마지막 주간이며 지난주 종말에 이어 심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종말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 계약을 기억하는 예배의 중요성이 사라진다는 데 있습니다. 심판도 이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분에게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그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먼저 진리에 속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고는 그대로 자리를 뜹니다. 진리에 속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길이요, 생명입니다.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인 그리스도께서 참 진리이십니다. 그분께 속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것이기에 마지막 때 그분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먼저 진리에 속해야 합니다.
무언가에 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어딘가에 속할 수는 있습니다. 제가 보좌 신부를 할 때 군대에 들어가 자대에 같이 배치받은 줄 알았던 군인이 귀신이었다고 주장하는 군인과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군인의 이름을 말하니 그 부대에 있었던 인사계만이 화장실에서 자살했던 군인의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 군인이 일부러 그 사람의 이름을 찾아서 그런 척을 할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군인은 왜 귀신이 보였던 것일까요? 그가 그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에 속하려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수준으로 떨어져 속하게 됩니다. 지옥에 속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냥 못 본 척하라고 했더니 며칠 뒤에 “흥, 재미없어!” 그러며 내무반을 나가더란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기처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무언가 해 주지 않아도 사람을 받아들입니다. 모기에겐 사람 자체가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회사에 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기에서 받는 만큼의 무언가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월급을 받으면 그만큼 일해야지 그 회사에 속할 수 있습니다. 백종원 대표가 예산 국밥 거리를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투자하는 것만큼 상인들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골목식당에서 굉장한 빌런이 나왔었는데 ‘홍탁이네’ 사장입니다. 하도 말을 안 들어서 가르침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과천선하였습니다. 이러한 각서를 가게에 걸었습니다.
“본인은 1년 안에 나태해질 경우 백종원 대표님이 저희 가게를 위해 지불해주신 모든 내용의 5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변상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성공하여 수도권 최고의 닭볶음탕 5위에 들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속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 속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참 행복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믿으려면 그분이 내어주시는 만큼 나도 내어놓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분이 요구하신 일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핵심은 어쩔 수 없이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나중에 십일조로 드러나는데, 그만한 감사의 봉헌도 하지 않으면 저절로 뱀에게 속하게 됩니다. 뱀의 말을 듣고 그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춘기 불만 가득한 아이들이 부모의 뜻을 잘 따를까요? 부모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먼저 진리에 속해야 하고 속하는 방법은 내어주는 만큼 나도 내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무금과 봉헌도 하지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뱀에 귀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션’에서 로드리고 맨도자는 노예 상인이었고 동생까지 죽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팔아넘기던 원주민들에게 속죄하기 위해 칼과 갑옷을 끌고 높은 곳에 오릅니다.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만한 희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받아들인 원주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맨도자는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고 죽였기에 용서가 바로 피 흘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생명엔 생명으로 갚아야 그 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목숨을 내어놓아야 그분 목소리가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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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1월 4일입니다. 신부님들과 저녁 식사 하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 이야기, 사제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부님 한 분이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신부님은 트럼프와 해리스 중에 누가 당선될 것 같습니까? 신부님은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습니까?” 어찌 보면 단순한 질문이고, 그저 저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질문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1시간가량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트럼프’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신부님은 표정이 바뀌면서 ‘왜 트럼프입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고,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는지 잘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의 미국과 북한, 북한과 한국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폭이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때는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3번 만났습니다. 싱가포르, 판문점, 하노이에서 만났습니다. 마지막에 결렬되었지만, 한반도의 평화가 시작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트럼프 때는 그런 전쟁이 없었습니다.
저의 의견을 듣고, 신부님은 트럼프가 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의 대통령이면서 세계의 지도자이기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말을 함부로 하고,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은 성직자가 아니고, 대통령은 윤리 선생님도 아닌데 도덕적인 완벽함이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대의와 명분도 중요하지만, 형세 판단과 실리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대통령이라면 국민을 위해서 자존심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고, 대통령이라면 국민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도 이야기했습니다. 남한산성은 조선의 왕 인조와 그 왕을 보필하는 두 명의 신하 김상헌과 최명길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김상헌은 대의와 명분을 내세워서 조선의 왕은 청의 황제에게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최명길은 형세 판단과 실리를 내세워 지금은 청의 황제와 타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세자를 청의 수도로 보내자고 합니다. 세자는 청에서 새로운 나라의 정치와 새로운 나라의 질서를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왕 인조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리면서 병자호란은 끝이 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권위는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힘은 있으셨지만, 그 힘을 남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셨지만,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면서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세리와 창녀들과도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의 힘은 사랑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은 비록 돈과 조직, 엄청난 배경은 없으셨지만,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세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승리하셨고, 그분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과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배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지내면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도 천상의 향기를 갖게 됩니다.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도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올 한 해를 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난 한이, 병든 이, 굶주린 이와 함께한 발자국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삶이었고,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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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8,33b-37: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즉, 그리스도의 나약성에서 나온다. 이것이 ‘희생된 어린양’이라는 상징을 통해 나온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구원 능력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구원의 은혜는 바로 사랑에서 나왔으며 그 사랑은 절대 패하지 않는다. 그분의 왕권은 사랑과 봉헌과 봉사와 겸손과 화해 그리고 그분을 희생 제물로 만든 모든 불의와 폭력에 대한 항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랑의 왕국을 원한다. 그러나 너무 이상적이고 어려워 보여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니엘서에도 이 사고가 드러난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왕국이 이 세상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신다. 빌라도의 첫 번째 질문은 신원에 관한 것이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요?”(33b)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준 것이냐?”(34). 교활하고 경멸적인 빌라도는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라고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알리바이를 준비하면서, 재판에 넘긴 책임을 “동족과 수석 사제들”(35절)에게 돌렸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왕권을 표명하신다. 그분의 왕국은 천상적이라고 하신다. 만일 세상의 것이라면, 그분의 부하들이 싸워서 그분을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신다(36절). 빌라도는 빈정대는 말투로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37a). 예수께서 답하신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37b). 그러나 빌라도는 왕이 무슨 의미에서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려고”(37절) 태어나셨고 세상에 오셨다(참조: 요한 1,1-18). 로마에 있어서도 진정한 왕이시며, 또한 유다인들에게 그만큼 사랑받은 진리, 즉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에게 먼저 천상적 가르침을 가져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맡기신 진리를 증언하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 어떠한 유혹도 협박도 이해관계도 그분을 물러서게 하지 못한다. 그분은 철저히 당신 자신과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오만불손하지 않으며, 아버지 하느님께 자유롭게 충실하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그분의 왕권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절대 진리이시다(참조: 요한 14,6).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구별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나서 하느님의 진리를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받아들이고 따른다고 하신다(37절). 즉 타협이나 양보를 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진리 편에 서는 것이다. 그 왕국은 진리의 왕국이고 영원히 실현되고 있고, 성령 안에서 십자가 위에서, 진실한 증언에 있는 피와 물(19,30.34.35-37)에서 실현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왕권이다. 그러나 언제나 빌라도들이 진리를 밀어내고 있다.
묵시록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십자가상 희생에서 온다고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당신 자신과 진리에 대해 보여주시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권은 묵시록에서 구원된 모든 이들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묵시 1,6). 그래서 교회는 모든 신자가 공통적 왕권을 재인식하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증거하신 사랑과 진리의 모습으로 사회로 침투할 수 있도록 그 왕직을 실행하도록 초대하고 있다.(교회 36)
이 왕권은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실행하는 것도 더 어렵게 느껴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봉사함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수성이라고 강조하신다. “그리스도의 이 태도로 미루어 본다면 왕이 된다는 것은 종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며, 종이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고 할 정도로 고귀한 영적 성숙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보람 있고 효과적으로 남에게 봉사하려면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제어를 가능케 하는 덕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명 즉, 그분의 왕다운 직분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인간 윤리의 모든 분야와 밀접히 연관된다.”(인간의 구원자 21항)
여기에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 진리를 밀어내는 빌라도의 모습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자의 모습인가?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진리를 끝까지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증거한 것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 왕권을 들어 높이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왕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봉사로 실행하여 세상에 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지만, 그 왕권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진리 안에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체험하며, 그리스도 왕께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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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같은 단어를 써도 사람마다 다른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 살아야겠다.”라고 말할 때, 어떤 이는 이를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어떤 이는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누구는 남녀 간의 사랑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떠올리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보편적 인류애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 부여되는 ‘왕’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왕’이라는 말에서 최고 권력자, 군림하고 억압하는 자를 떠올리며, 이를 그리스도께 붙이거나 그리스도인의 왕직을 말할 때는 거북하고 불편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 스스로 왕이라고 하실 때는 오히려 반대로 사랑과 봉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라고 하셨듯이 하느님 나라의 왕은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왕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큰 사랑을 가진 이인데, 사랑이 가장 큰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 낮은 사람입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늘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며, 더 내준다는 것을 압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이 크신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이로 낮은 곳에 오셔서 당신을 내주신 분이십니다.
왕직을 실행한다는 것은 권력을 가지고 군림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하고 봉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왕직은 그런 사랑의 봉사직입니다. 더 작고 낮은 이가 되어 더 많이 자신을 내주는 사랑의 봉사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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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