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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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4-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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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맞이해야 할 종말이 있습니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내 생명이 끝날 날이 올 것임을 압니다. 생명은 살려는 욕구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 생명이 끝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궁금해 합니다.
현대 의학과 과학이 죽음의 세계를 해명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 너머의 세상을 분명하게 알려 준 적은 없습니다. 이따금 임사 체험을 해서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였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죽음 이전에 일어난 주관적 체험의 현상일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서 인간 존재의 마침, 곧 죽음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밝혀졌음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단순한 한 인간이 얻은 특은이 아니라 온 인류의 창조주이며 섭리자이신 하느님의 뜻이 인류에게 공적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 한 번에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셨기에 인류의 마지막 악인 죄와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믿음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 종말의 ‘그 날과 그 시간’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우리는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를 미혹에 빠뜨리는 거짓 예언자들도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참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고, 스스로 가난한 교회여야 합니다. 가난은 예수님의 삶이었고, 교회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 너머 하느님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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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주님을 향한 소망 가운데 온전히 잘 나아가고 있는지 함께 묵상해 봅시다. 만약 시안부 인생으로 나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남은 시간 동안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지 나눠보고, 앞으로 5-10년 동안 이루고 싶은 인생/신앙적 목표나 계획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3.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표징들을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함께 묵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표징을 어떻게 알아보고 받아들이는지 이야기해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별한 표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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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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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모두 마지막 날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오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답은 본기도의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더해 주시니”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곧 오늘 전례 말씀들은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을 갖도록 이끌어 준다는 점입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흥행하던 유다 묵시 문학은 역사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가족이나 국가, 사회와 자연계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 기존 질서가 파괴되고 혼란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박해로 수많은 이가 순교를 하던 시대, 다니엘서는 끝까지 신앙에 충실한 이들이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별처럼 빛나리라는 희망을 전해 줍니다.
한편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기에, 우리의 죄를 속죄하려고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를 완전하게 해 주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에 이변이 생겨 하늘의 권세들이 제 기능을 잃어버릴 때,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 당시 유행하던 묵시 문학적인 표현이 사용되어 분위기가 어둡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마지막 날도, 우리가 무서워하는 다른 어떤 이가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를 불러 모으시는 날입니다.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갈라 2,20 참조)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불러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1테살 4,17-18).
또한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하고 노래한 입당송을 참조할 때, 그 날과 그 시간은 평화의 주님을 만나 뵙는 행복한 날입니다. 따라서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 닥칠까 걱정하는 것은 그분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는 소치임이 분명합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4044
11월17일[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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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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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C2jrpEbgbs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ACN/고통받는 교회 돕기 한국지부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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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양승국_스테파노_신부님
2024년 11월 17일 일요일
[녹]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는 유달리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이 많습니다.
바로 작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 난민들, 이주민들, 재소자들, 환자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
이런 분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고 동반하려는 교황님의 의지가 대단합니다. 교황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총애하시는 당신의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내셨는데, 그것을 바로 오늘,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2015년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국 의회 연설에서 강대국의 횡포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야만적인 자본주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횡포로 인한 부의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강하게 촉구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미국 상하원들은 마음 속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연설이 끝나고 교황님과 함께 하는 만찬이 준비되지 않을까?
식사 후에는 교황님과 찍은 인생샷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교황님은 연설이 끝난 후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과 점심 약속이 되었을까? 대통령? 아니면 미국 주교단? 모두 아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성 패트릭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300여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간소한 점심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작은 이들의 사목자요 동반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 노숙자들을 만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저도 이민자 가족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셨는데, 그곳은 교도소였습니다.
거기서 재소자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더러워진 발을 깨끗하게 잘 씻기 바랍니다.”
이혼 후 재혼한 가정과 그 자녀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적 배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단호하게 직진하십니다.
“실수와 죄악은 단죄돼야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해받고 사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현대 가정의 실제 삶과 현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단죄하기보다는, 이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교회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합시다.”
“우리 교회는 야전병원입니다. 그 안에서 성체는 완전해진 자들에 대한 포상이 아니라 병자들을 위한 치료약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우선적 선택과 극진한 사랑을 얼마나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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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Qqe1KVQQ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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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법칙: 죽음의 법칙을 알면 생존 법칙도 보인다>
오늘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적어도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음은 생각하기 싫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묵상 할수록 더 오래 살 수 있는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멸망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우선 세상의 한때 잘 나갔다가 망하게 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들에게서도 분명 태양과 달, 별이 빛을 잃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먼저 한때 휴대전화 분야의 글로벌 리더였던 노키아 제국의 멸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키아는 자신의 명성과 기술에 안주하여 새롭게 개발되는 애플과 구글의 터치스크린 시스템을 거부하였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더는 그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코닥의 멸망을 살펴볼까요? 코닥은 세계 카메라 필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는 결국 자기 이익을 갉아 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으로 그 기술을 묻어버렸습니다. 다른 회사들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고 실용화하였을 때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반면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사 제품을 사주는 고객들에게 불량품을 내놓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고 호통을 치며,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5년 삼성 휴대폰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건희 회장은 공장에서 휴대폰, 텔레비전, 팩스기 등 불량품을 모두 폐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추정 가치 약 500억 원(당시 약 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신들이 만든 상품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을 본 삼성 직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기 이익만이 아닌 고객을 감동하게 하려는 마음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경영 합리화로 잉여를 많이 올려 궁극적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인의 본분이며 사회적 의무다.”(1976년 언론기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면 그 상품을 사용하는 사람의 이익은 잊히게 됩니다. 그러면 구매자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그러면 망하게 됩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처음의 관심은 고객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으로 차차 자기 이익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홍익인간, 곧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이념으로 생겼습니다. 이것이 잊힐 때는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기억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조금은 희생하면서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계명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살려면 규칙적인 화형식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셋째 날에 땅에서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 나무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존재임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해는 하루, 달은 한 달, 별은 1년 주기로 돌아옵니다. 이 규칙적인 예배와 기도가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는 하루, 한 달, 1년 주기로 규칙적인 예배 규정을 수없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무시되는 날 종말입니다. 이것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입니다.
대전 ‘성심당’을 모델로 삼읍시다. 창업자 임길순 씨는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라는 정신으로 ‘성심’(예수님 마음)으로 가게명을 지었습니다. 여기서도 화형식이 있었습니다.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빚을 냈다가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고 후손들은 창업자의 홍익인간의 마음으로 시작하여 5개의 매장으로 순이익이 3,400개 대기업 파리바게뜨를 넘어섰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은 성당에 나와 기도하며 하느님과 창업자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만든 물품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괜히 그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 그것을 파기합니다. 제 역할 수행을 위해 우리의 태양과 달과 별빛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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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성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착한 목자의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품아(세상을 품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8년 명성진 목사님은 학교를 나와, 세상에 버려진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학생들은 소년원엘 들락거렸고, 본드를 흡입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고독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명성진 목사님은 우연히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경찰서, 법원을 다녀야 했습니다. ‘중독은 중독으로 치료할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고, 음악 공연을 했습니다. 자전거로 몽골 여행을 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습니다. 목사님의 진심을 본 학생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튕겨 나온 학생들이 이제는 세상을 품은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전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는 바퀴가 있고, 페달을 밟아야 움직입니다. 페달을 멈추는 순간 자전거는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은 학생들이 ‘믿음과 희망’의 페달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과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목적을 잃으면 멈추게 되고 멈추면 자전거처럼 넘어진다고 합니다.
저는 1988년, 지금부터 36년 전에 ‘돈 보스코 센터’에서 1년 동안 일하였습니다. 돈 보스코 센터는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만든 청소년 자립 직업 학교였습니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청소년들이 찾아왔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청소년들이 왔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은 청소년들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청소년들을 모아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것이 살레시오 수도회가 되었습니다. 1988년 군대에서 제대한 저는 복학 할 동안 돈 보스코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성소국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돈 보스코 센터에서 ‘선반, 조립’과 같은 기술을 배웠습니다. 주일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미사도 드리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주일에는 학생들과 함께 방송통신고등학교에도 갔습니다. 저는 돈 보스코 센터에서 학생들을 위해서 헌신하던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때 했던 영어 공부는 복학해서 대학원 시험 볼 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놀라운 일을 체험했습니다. 20년 후인 2008년 제가 본당 신부로 갔던 본당에서 그때 돈 보스코 센터에서 함께 했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결혼해서 세 아이의 아빠가 돼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청소년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0년 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도,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진리의 길은, 깨달음의 길은 구원의 길은 아주 평범한 곳에 밝혀 놓으셨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 구름, 들의 꽃,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변하는 만큼 세상은 그만큼은 변한다고 생각하면 구원의 문제도 그리 큰 숙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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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3,24-3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오늘의 전례는 만물이 어떻게 마지막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밝혀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역사를 외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성을 완전하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역사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을 말한다. 다니엘서의 내용은 육신의 부활을 긍정하는 구약의 문헌 중의 하나이다(2마카 7,9 참조). 이제 인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자기 전 존재로서, 육체를 가진 자로써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마르코 13장 전체에 걸쳐서 하신 종말론적 담화이다. 오늘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아들”(32절)이신 예수님께도 알려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앙의 차원으로 확대해 실현하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이 당할 재난을 말씀하시고, 당신이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다시 오시리라고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26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시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며(마르 16,19) 마지막 날에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뽑힌 이들을 모으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분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27절)라는 말은 히브리 사상에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오직 이스라엘 12지파의 재결합만을 생각했지만(신명 30,4; 에제 34,12~; 이사 27,12-13; 43,5-6; 즈카 2,10; 8,7-8 참조), 여기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참조: 요한 11,52)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시며 알려주시고자 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복음사가가 의도하는 것은 오셔야 할 그분은 어느 때나 어느 순간이나 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풀지 말고 깨어있어야 하는 ‘기다림’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절)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28절), 주님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29절) 알 수 있는 표징들이 있다. 예루살렘의 종말은 그 동시대인들에게 표징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이 종말의 예표일 수 있었고, 예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마르 13,35-36 참조) 그러므로 종말론적 삶이란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일상 활동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온갖 사물과 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더 합당한 요소가 되게 하고, 언제나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의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언제나 오실 수 있는 그분을 맞이하는데 떳떳하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해 계속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사제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면서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고 계시다. 즉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는 사제직이다. 둘째는 종말론적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히브 10,12-13)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에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지만, 또한 우리에게 대사제이신 분이시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 오른편에서 수행하고 계신 사제직 때문에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도, 그때가 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때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잃지 말아야 할 희망을 간직하고 이겨내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깨어있는 삶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 완성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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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교회는 오늘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기념하며, 가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난한 이들과 깊은 형제애를 나누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와 가난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시어(2코린 8,9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습니다.(루카 4,18; 19,10 참조) 교회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바로 전 주일에 기념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가난의 깊은 관련성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가난의 의미를 잘 새기면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참되게 거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헐벗고 모든 것을 빼앗긴 십자가의 가난에서 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시면서 가장 낮은 자로서 세상을 섬기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라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가 되셨듯이 교회도 비우고 버려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 활동에 참여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듯이 교회도 고통받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함을 강조합니다.(교회 헌장, 8항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난을 자기 것으로 할 때,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기며 보호와 도움을 구하는 이웃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책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간직할 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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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