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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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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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남은 자들 중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이 있어서 하느님의 도움이 더 절실합니다. 예언자는 역경을 견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받고 기쁨 중에 환호성을 울리는 날’을 기다리도록 이끕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거지의 부르짖음은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을 대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 가문에서 나올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거지는 주변의 꾸중과 창피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구세주의 자비를 외쳐 댑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는 것은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는 표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이사 35,5) 하고 예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신지 확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걷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7,22 참조).
눈먼 거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신앙인을 표상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어둠의 나라에서 헤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 우리의 삶은 빛과 은총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눈먼 거지의 치유는 우리가 받을 자비로운 구원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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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예수님을 만나 다시 볼 수 있게된 사람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우리가 예상치 못한 큰 어려움이나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만났을 때, 각자 어떤 도움이나 해결책을 먼저 찾게 되는지 생각해 보고, 그때의 경험을 나눠봅시다. 그런 문제가 무엇이었고,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이야기해 봅시다.
3. 오늘날 우리를 ‘앞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던 분들은 그때의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세요.
4. ‘치유’와 ‘구원’을 위해서는 와서(come) – 보고(see) – 따르는(Follow)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 어디쯤 와있을까요?
5. 살아오면서 내가 지니고 있던 ‘단점’과 ‘장애’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6.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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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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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절규는 단순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그의 신앙 고백이요 기도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소리치며 부르짖는 그를 주위 사람들은 시끄러우니 잠자코 있으라고 합니다. 거지 주제에 운명이려니 하고, 자신의 처지를 그가 온순하게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고통을 통해 가르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그가 믿고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지혜로운 처사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소리를 질러 댄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서 경건하게 정성껏 올리는 자기들의 제사만 아름답고 고고한 기도라고 생각하면서, 길거리에서 소리치는 그의 부르짖음은 소음 공해에 불과할 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꾸짖으면서 소리치지 말라고 저지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이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면서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요. 마음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부르짖음이 있지만 무엇인가가 내리누르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히 기도만 하고, 눈길을 저 높은 곳에 고정시켜, 눈먼 거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번거롭게 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스스로 타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부르짖는 눈먼 거지에게서 당신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확인하십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간청은 이 비참한 내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구원을 받은 것은 그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꾸짖던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막고 그분께 소리를 지르던 눈먼 거지였습니다.
용기와 소신을 갖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린 바르티매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나약함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이 어떻게 들리시는지요? 그리고 그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4023
10월27일[연중 제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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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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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7kcx0v_NAM
[서울대교구 김진철 루카(성소국 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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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은 하늘까지 움직였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우리가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장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무지 탈출구가 없을 때, 울부짖고 몸부림쳐도 헤어날 방법이 없어 보이는 그런 절박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기분,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듯한 외로운 처지, 차라리 이쯤에서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절박한 순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 그 역시 딱 그랬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호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했던 여행길, 길고도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느라 그의 영혼과 정신은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어디가나 천덕꾸러기요 애물단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대놓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삶은 모욕과 멸시, 천대와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르티매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구걸을 위해 하루 온종일 길가에 앉아있어도 관심 가져주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기껏해야 동전 한 닢 깡통 속에 던져주는 것이 다였는데,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상하게 이것 저것 물어봐주십니다. 측은지심 가득한 음성으로 이름은 몇 가지를 물어보겠죠? 이름이 뭐냐?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사는 곳은 어디냐?
오늘 예리코의 눈먼 이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결국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목이 빠지게,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구급차를 기다리는 응급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강렬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또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 믿음은 또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안테나는 오로지 한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말겠다는 강한 열의, 그분께 도움을 청해보겠다는 열의, 그분은 반드시 나를 더 나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능동성, 적극성이 그의 외침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런 외침, 돌발 상황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용히 좀 하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절박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이 드디어 하늘에 닿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와 만나십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의 지난 삶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먼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예리코에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멈추셔서 우리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며 똑같이 질문 하나를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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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vgZ_RQ5v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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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커질수록 청하는 것도 커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주위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죄인이 어디 자기의 목소리만 들어달라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소리 지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멈추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이고 믿음이 구원하는데, 그 믿음은 내가 무엇까지 청할 수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때 그만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 컴퓨터 설립자이고 2009년 포춘지 선정 최고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췌장암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에서 “늘 갈망하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제목으로 졸업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었고 친구와 둘이 자동차 장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10년 만에 직원 1,000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또다시 돌아와 애플을 미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늘 갈망하십시오.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종교는 불교에 가깝고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가깝습니다. 무언가를 우직하게 갈망한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어처구니없게 망가진 눈을 회복시켜달라는 바르티매오에게 믿음이 강하다 칭찬하셨습니다. 더 불가능한 것을 청할수록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주님께 무언가 청했던 것은 주일학교 교사 때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야단을 쳤더니 그 아이가 집에 간다고 가버렸고 저는 성당에 앉아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기도가 끝나자 잘못했다며 그 아이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다음은 술 내기였습니다. 이미 2병을 마시고 기도하고 내기하여 각 6병을 마셨습니다. 물론 제가 이겼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음 날도 숙취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은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면 한 번 나타나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성모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은 박사 논문 발표가 잘 끝나기를 청했는데, 망친 줄 알았더니 교수님들이 다 만점을 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당에 와서는 어르신들이 많고 교적에 허수가 많지만, 이른 시일 내에 미사 참례율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3년째 되어가고 있는 지금 거의 이 기도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 개인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되는 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청하는 것도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안나라고 부산교구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불쌍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녀였음에도 아이들을 자녀로 삼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도망친 엄마 대신 모르는 한 여자에게 엄마가 되어 달라고 청하는 아이의 꿈을 모르는 체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쇼크로 사흘 만에 돌아가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믿음과 함께 나의 청하는 것도 커져야 합니다.
그분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황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람이 그 자매를 찍어누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안나 자매는 자신 앞을 이미 지나쳐가는 교황님께 온 힘을 다해 “파파, 파파”라고 불렀습니다. 교황님은 되돌아오셔서 그 자매의 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그것을 청할 수 있고 또 상대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청합시다. 이것이 그분을 인정하고 내가 믿음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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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지역에 어쩌다 ‘우박’이 내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우박을 보지는 못했지만, 우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박이 내리면 차량과 지붕에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우박이 내린 후에는 지붕 공사 업자들이 무상으로 검사를 해 준다고 합니다. 검사 후에 문제가 있으면 유상으로 고쳐 준다고 합니다. 보험이 적용되면 큰 어려움은 없겠지만 생활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는 걸 막거나, 피할 수 없다면 그것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원망한다고 우박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게도 우박과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0년간 별 탈 없이 쓰던 노트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통은 전원을 껐다 켜면 되는데 이번에는 그런 정도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지붕 공사 업자와 같은 본당 청년이 있어서 노트북의 검사를 맡겼습니다. 고마운 청년은 노트북을 검사한 후에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배터리가 팽창해서 위험하기에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고 합니다. 10년 된 노트북이기에 프로그램을 바꾸고, 용량을 키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프로그램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있던 자료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자료는 다른 노트북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최근에 준비했던 강론과 강의 자료들이 없어져서 아쉬웠습니다. 내년 2월에 있는 ‘신앙강좌’ 강의와 10일 정도의 강론이 없어졌습니다. 이것도 제게 내린 우박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고, 강론도 다시 준비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더 좋은 강의와 강론을 준비하도록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는 없어졌지만, 그것을 준비했던 저의 노력과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노트북도 새로 마련했고, 자료는 가끔 외장 하드에 저장하면 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고치면 좋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임께서는 당신 찬미를 즐기라 재촉하시고,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니,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불안합니다.” 우리의 건강에, 우리의 사업에, 우리의 가족에게 우박이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받아들일 것과 피할 수 있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큰 우박을 맞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거지의 이야기입니다. 눈이 멀었던 바르티메오는 일을 할 수 없기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르티메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었도 은총입니다.” 열심히 얻어먹던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걷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눈도 뜨게 해 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바르티메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메오의 앞을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큰 소리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말렸지만 바르티메오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이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메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바르티메오는 평생의 소원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운명처럼 우박을 맞아서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르티메오가 죄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르티메오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드디어 바르티메오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보고 싶은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티메오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세상을 보는 육체의 눈을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청하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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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46-52: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예리고의 맹인 바르티매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지”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즉 바르티매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복음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맹인의 치유사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치유사화는 마태오 복음(20,29-34)과 루카 복음(18,35-43)에도 나타나는데 모두가 수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수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찾는 장면을 시작으로(마르 8,22-26),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8,27-30)과 예수께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는 장면을(8,31-33) 생각할 수 있다. 신앙의 절정 상태에 있던 베드로조차 하느님의 계획에는 눈이 멀려고 한다. 하느님의 계획들은 결코 어떤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빛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치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회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복음을 보자.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절규에 가까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눈이 멂”으로 당하는 비극적 현실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자기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전 생애를 거쳐 그 순간을 기다리기나 한 듯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난다.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믿음에 대해 강조하시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소경은 어떻게 하는가? 그 소경은 눈을 뜨자마자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52절) 이것은 믿음이 그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의 사명을 깨닫게 하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하였다. 여기서 예수를 보는 데만 호기심이 있고 그 수난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는 군중들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세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47절) 예수께서는 메시아라는 명칭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도 받아들이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어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시아의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의미의 메시아는 아니셨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치유된 소경 바르티매오가 한 것처럼 바로 그 길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바르티매오의 치유는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징표일 뿐이다. 믿음은 그 소경의 경우, 예수의 중재 역할로 그를 낫게 하여 구원하였듯이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하여 그분이 가신 희생의 길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된 치유를 베풀어주고 또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해준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p. 125-126).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구약의 사제직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구약의 대사제는 여러 번 그리고 백성들과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을 봉헌했지만(히브 5,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에 단 한 번 희생제물을 바치셨지만 완전한 제물을 봉헌하셨다. 당신 자신을 형제들을 위해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의지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여기에 나오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 5,6)는 것도 그가 창세기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왕이며 사제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척도는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절대적인 새로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희생에 이르는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리코의 맹인 바르티매오와 같은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하다. 우리가 언제나 당신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보고, 베드로와 같이 하느님의 뜻에 눈이 멀지 않도록 하며, 또 그 신비를 우리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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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다 보니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 …… 구원하소서!”(예레 31,7)라고 외치라고 되어 있는데, 복음에서는 바르티매오가 과연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고 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그를 꾸짖었던 이들은 그가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고, 또 어쩌면 너무 많은 이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며 외쳐댔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 상대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31,7)라고 말합니다.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자신을 도와주시기를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기에, 그분께 구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을 향하여 외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그러한 신앙을 바라셨습니다.
복음에서도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며 외쳤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꾸짖는데도 그가 외쳤던 것이 그의 찬양이고 신앙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오라고 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자신의 입으로 치유를 청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드러내십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 주실 수 있음을 의심 없이 믿고, 이로써 그를 꾸짖던 사람들 앞에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다시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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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6ㄴ-52)
1)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있는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라는 말은, 바르티매오가 단순히 ‘시력 회복’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새 인생’을 원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 인생’은 ‘새 직업’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신앙인)의 삶’, 또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이었음도 나타냅니다.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시력회복만을 원했다면? 그리고 시력이 회복된 뒤에 새 직업을 갖게 되는 것만을 원했다면? 그러면 이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면? 살던 대로 살기만을 바라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그토록 간절하게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즉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났을 것이고, 복음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 선포에 관심 갖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이었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기득권층 사람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일반 서민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층 사람이든지 소외계층 사람이든지 간에, 부유한 상류층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변화를 싫어하고 거부한 사람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 선포를 무시했고, 복음 선포를 외면했습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만족하는 것은 아닌데도 변화 자체를 두려워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회개하라는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쇄신’이나 ‘개혁’ 같은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으려고 하면 저항하고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갑니다.>
2)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하신 말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5,34)
두 이야기는 겉으로는 차이점이 많지만, 현재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는 점과 완전히 변화된 ‘새 인생’을 갈망했다는 점은 같습니다. 두 사람의 희망과 간절함에 초점을 맞추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단순한 ‘치유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원했던 ‘새 인생’으로 인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더욱 굳은 믿음을 갖고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네가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의 뒷이야기는 모릅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에, 충실한 신앙인이 되어서 ‘새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수건으로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라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도 예수님 덕분에 완전히 영적으로 변화되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신앙생활은 당장 눈앞의 일에 대한 소원이나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만족하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생활입니다. <세례식 때 흰옷을 입는 것은 새로 태어났음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신앙인의 신앙 여정에서, ‘새로워지는 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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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박동규 마르코 신부님]
<우리의 기도>
어머니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분입니다. 누군가는 똑같은 울음이라 여길지 몰라도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지? 젖을 먹어야 하는지? 잠을 못자고 있는지? 아기의 울음에 어머니의 응답은 즉각적입니다. 심지어 아기가 소리 내지 않아도 어머니는 알아듣습니다. 어머니가 아기의 울음에 이렇게 반응한다면 세상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울부짖음 에 어떻게 응답하실까?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다. 우리의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곤경 속에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의 외침 역시 마찬 가지였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그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십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곁에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고 박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막 예리코를 떠나실 찰나, 모든 것이 닫힌 절망 속에서 그는 외칩니다. 그의 울부짖음에 예수님은 응답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그렇다 면 우리의 울부짖음에 하느님은 언제 응답해 주실까?
예수님은 나에게 언제 오시는가? “내가 바르게 기도하지 않아서 하느님의 응답이 없는 것인가? 내 믿음이 부 족해서, 내 기도에는 절박함이 없어서 예수님은 오시지 않는가?”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겸손에 있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외침은 예수님을 소환하여 그의 청을 들어주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의 외침에 앞서 끊임없이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그의 비참함으로 다가가 그를 구원하시고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말씀하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앞에 불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무력함 속에서 끊임없이 그에게 묻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신 것에 대 해 감사해야 합니다. 주변의 소음에도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무력함은 우리의 기도생활을 조용히 꼭 붙들어주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낮아지고 통회하는 영혼은 마치 갓난아기가 자신 을 철저하게 어머니의 돌봄에 맡기듯이,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도록 내어맡깁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기도는 날마다 우리가 느끼는 무력함에 대해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아뢰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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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용환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헬렌켈러가 어느 날 숲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별반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헬렌켈러는 두 귀를 열고 두 눈을 뜨고도 별로 특별한 것을 보질 못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만일 나에게 사흘만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첫째 날은 자신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신 선생님을 보고 싶고, 둘째 날은 아침엔 먼동이 트는 태양을 보고 싶고, 저녁엔 노을과 별을 보고 싶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대자연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 일상의 삶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매일 누리면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무엇을 그토록 보고 싶었길래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고함을 질렀을까? 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고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가 외쳤던 소리에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간절함과 절박감이 있었습니다.
죽을 만큼 원하는 것이었기에 창피나 굴욕이나 체면 따위 등 남의 이목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그의 외침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으면 예수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어 서서 그를 불러오라고 했을까 싶습니다.
겉옷을 벗어 던져 버리고 예수님께 다가서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자 그는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싶었길래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토록 간절히 청했을까?
먼저, 보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만 보면서 눈먼 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상(日常)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정말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께 청하면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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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병흥 세알렉시오 신부님]
<진정한 기도의 자세>
오늘 복음에 바르티매오라고 하는 눈먼 거지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라고 한 것을 볼 때, 태생 소경이 아니라 후천적 장애로 보입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면 적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천적인 경우는 그전까지 익혀왔던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신체의 상실감은 물론, 심리적 상실감까지 가지게 됩니다. 이전의 자유로움을 알기에 예전의 온전함을 바라는 마음은 엄청나게 컸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차별과 자신의 한계에 부딪힌 나머지 길거리에 앉아 구걸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분이 아니시면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간절함은 그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것들이 막아서도 오로지 예수님 한 분께만 집중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저 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의 간절함이 결국 예수님께 닿았습니다. 수많은 병자들과 거지들이 있었을 그곳에서 오로지 바르티매오만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응답을 받는 이는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간절함에 있다고 봅니다. 후천적 소경에 거지, 더 이상의 떨어질 바닥이 없는 바르티매오에게 있어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포기하는 사람, 욕심 가득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 의심 속에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던 기도는 간절한 이들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을 살리려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하혈 병을 앓던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온전히 맡기는 마음으로 매달리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한 간절함 가운데 진심어린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바치면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망에 앞서서 우리의 기도가 바르티매오처럼 정말로 간절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간절했다면, 그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친 믿음이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과 믿음에서 시작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간절한 믿음으로 매달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느님의 청력을 의심하기 전에, 그분의 무관심을 의심하기 전에, 과연 우리의 기도에 진정한 믿음과 간절함이 담겨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다윗의 자손(휘오스 다위드 υἱός Δαυίδ)
유다 사회는 다윗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 것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참으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외침입니다. 눈을 뜨고 병이 낫는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메시아요, 주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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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예수회 이근상 시몬 신부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자니, 살면서 피하고픈 참 아쉬운 말입니다. 우리는 애달픈 자비보다는 당당한 거래, 다른 이의 처분에 매달리는 비루한 삶 대신,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떳떳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남의 처분이 아니라. 내 요청이 힘을 얻는 삶을 사는 와중에 들이닥치는 가난은 곤란합니다. 오늘 복음 속 바르티매오처럼 내놓을 게 없는 가난은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자비에 기대어 외칠 뿐입니다. 천덕꾸러기, 사람들은 눈치를 줍니다. 세상이 이런 이들에게 기대하는 미덕이란 잠자코 사는 것. 소리 지르는 그에게 ‘많은 이가 잠자코 있으라 꾸짖습니다.'(마르 10,48 참조)
다행일까요. 우리도 가난하지만, 그보다는 좀 나아 보입니다. 청이 있을 때 그저 자비에 기대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대학 입학, 취직, 결혼, 삶의 갈피마다 주님 앞에 가져갈 청이 있고, 우리의 청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봉헌의 크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뭘 좀 내놓은 뒤, 고개를 들고 우리의 바람을 아룁니다. ‘주님, 부족하지만 이렇게 봉헌하오니 이번 일은 좀 들어주셔야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분의 침묵, 자비로운 주님, 우릴 사랑한다는 그분의 응답이 너무 자주, 너무 느리고, 너무 부족 하기에, 우리의 기도는 기쁨보다는 억울함을, 감사보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 십상입니다. ‘주님, 언제까지 잠자코 계시렵니까? 제가 뭘 얼마나 더 드려야 합니까?’
오늘 복음이 이 오래된 물음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받으시고픈 것은 오직 하나, 바르티매오의 가난한 외침이라는 응답. 봉헌할 게 없는 그에게 세상이 한목소리로 윽박지르고, 그 역시 이제 잠자코 무너져버리고 싶지만 거슬러 일어난 외침, 무너졌지만 무너지지 않은 그의 외침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내놓을 게 없어 거래할 것도 없던 그에게 주님의 자비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향한 비루한 외침이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눈을 뜨게 되었다는 기적은 그저 한 부분, 복음은 길을 모르던 그가 길을 찾았다는 깊고 긴 삶의 기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겉옷을 벗어 던지고”(마르 10,50) 다가가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는(마르 10.52 참조) 구원의 기적이 외침에 이어진 은총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드려야 할 모든 것은 세상을 거슬러 일어서는 마음뿐. ‘당신이 남아있습니다. 제게 당신이 있으니 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거래를 멈추어야 하는 막다른 가난이 복된 은총이라고, 주님만 남은 우리의 가난이 맑고 투명한 눈이 되어 길을 보게 해주리라고 바르티매오가 격려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모든 이에게 주님은 언제나 응답하시는 자비라고 온 마음으로 그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래된 배고픔, 당신의 응답이 오히려 완고하게 버티고 있는 우리 곁에서 참 오래오래 우리의 가난을, 우리의 외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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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새 영세자가 하느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영세자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면서 말입니다. 단순히 새 영세자에 대한 축하한다는 의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새 영세자는 하느님을 소유할 줄 모릅니다. 6개월간 교리를 받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기 때문에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 곁에 있을 뿐입니다. 아직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하느님 품 안에 있는 것으로도 기뻐합니다. 순수하게 하느님 품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영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더 커다란 은총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새 영세자와 달리 오랫동안 성당을 다니셨던 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저것을 요구합니다. 이제까지 했던 기도와 묵상, 봉사, 희생 등의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품에 머물려고 하기보다, 하느님을 소유하려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만든 가짜 하느님을 만날 뿐입니다. 이런 가짜 하느님께는 아무리 요구해도 당연히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크신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존재하시면서, 우리가 그 안에 머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종종 자기가 만든 가짜 하느님을 남에게 강요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야.”라면서, 자기만의 가짜 하느님을 상대에게 강요합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그는 볼 수 없으니 예수님 곁에 머물 수가 없어서 용기 내어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가 예수님 곁에 머물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를 부르셨고,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갑니다.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그는 족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의지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보게 되자마자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하느님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르티매오처럼 우리 마음속 의지가 새로운 삶을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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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길>
마르코 10,46ㄴ-52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외길>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보지 못하던 것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보지 않았던 것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듣지 못하던 것을
다시 듣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듣지 않았던 것을
다시 듣게 되었으니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느끼지 못하던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느끼지 않았던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으니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부르지 못하던 것을
다시 부르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부르지 않았던 것을
다시 부르게 되었으니
그대의 길을
가시게나
그대의 뜻대로
사랑하지 못하던 것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으니
당신만을 따라
걸으렵니다
당신의 뜻대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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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의 눈을 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비를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던 바르티매오의 청을 들어주셨듯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시리라 믿으며 주님의 사랑으로 영의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근무할 때 졸업생의 결혼 주례를 몇 차례 하였는데 고 가밀라라는 학생은 시각 장애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장애인 선생님을 만났는데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고,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하였습니다. 자녀 셋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제는 아들이 양업고에 합격하였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의 결혼 주례를 하면서‘육신의 눈보다 영적인 눈을 뜬 배우자를 맞이한 신랑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뜨도록 만들어 준 신랑의 사랑을 받아들인 신부도 또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의 눈을 뜨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생각하는 그릇된 편견이 장애일 뿐입니다.
우리 눈을 세상의 현상을 드러난 대로 보는 육의 눈, 속을 헤아리는 마음의 눈, 이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녀야 할 눈은 혜안으로 영적인 눈입니다. 다른 눈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눈을 지니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지니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만족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느님 눈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 눈에 꼭 들기를 희망합니다.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얼굴이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유다인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이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자신의 바람을 밝혔을 뿐 아니라 바람을 이뤄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큰 소리로 고백한 것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겉으로 보면 눈먼 사람은 바르티매오였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눈먼 사람은 주변 사람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잠자코 있으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마르8,18)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위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눈먼 거지의 절박한 사정에 공감하며 그를 도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영의 눈이 뜨지 못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자기를 낫게 해 줄 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애절함과 믿음의 은총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옛말에 “마음의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생각이 어두우면 환한 햇빛 속에서도 악마를 만나게 된다”(채근담).고 했습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고 또 사랑을 하면 우리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에 무관심하면 그 자체가 어둠이요, 그 삶은 악마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의 기준을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6)라고 하시며 이웃 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도록 명하시자 사람들은 태도를 바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겉옷은 그의 모든 재산입니다. 낮에는 햇빛 가리개요, 던져주는 돈을 받는 돈주머니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를 감싸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겉옷은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늘 없게 마련입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맞은 휴일 쉬고 싶지요. 당연합니다.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 그래서 돈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촉하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사랑이 나를 부르면 바르티매오처럼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언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오늘 착한 목자 수녀회 수녀님들이 오셨는데 기회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간청은 “영적으로 눈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영으로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눈을 떠 주님께서 계시는 집과 주님의 영광이 깃드는 곳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꼭 마주하시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먼저 내가 눈먼 이라는 것을 깨닫고, 간절함으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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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연중 30 주일,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제1독서>는 <예레미아 예언서> ‘위로의 책’(30-31장)의 핵심부분입니다. 바빌론 유배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어, 그들을 모아들이어 곧은길을 걷게 할 것인데, 그들 중에는 눈 먼이, 다리 저는 이 등도 있으리라고 말하면서(예레 31,7-8), 이렇게 위로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여 이끌어 주리라.”(예레 31,9)
<제 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의 혈통을 넘어선 초월적 직분을 지닌 멜키시댁과 같은 영원한 사제로 선포됩니다(히브 5,1-6).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는데,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 시 146,8; 마태 11,5). 그렇다면, 누가 ‘눈 먼 이’인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4,13; 7,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8,18),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6,52; 8,17), ‘따로 설명해 주어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9,32)이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혹 지금 우리도 ‘가야 할 길 가’에 그냥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 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는 외침은 용기 있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당대의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이 배척했던 예수님을 감히 ‘큰 소리로’(마르 10,48) ‘메시아’로 고백하는 목숨을 건 장엄한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 뜬 이들’이 보지 못한 ‘눈을 감은 장님’이 더 잘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님인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동전그릇도 버려두고 볼 수도 없으면서도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그렇습니다. 이제 움츠리고 둘러쓰고 있는 위선과 기만의 옷을 “겉옷”을 벗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움츠리고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저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나 자신의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제 생각과 이기심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당신을 옷 입게 하소서! 당신의 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린애가 잃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듯이, ‘하느님을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여 백인대장처럼, 우리가 “참으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새롭게 본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곧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다름 아닌 믿음의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이제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티메오처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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