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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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7-35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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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곧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에 반박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그저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날마다 은총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믿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의 뜻보다는 이기심이 바탕이 된 사람의 뜻만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도 베드로 사도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도할 때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우리 마음대로 할 때도 많이 있으니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믿음이 ‘실천’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이들을 돕고 믿음과 기도가 실천으로 이어지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에 초대되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깨닫고 고백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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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만의 십자가에 대해 묵상해 보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외면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3.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뜻을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보고, 그런 방식으로 생활했을때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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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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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 응답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베드로는 과연 알았을까요? 그 믿음 때문에 목숨까지 잃게 되리라고 생각했을까요?
베드로가 스승으로 고백하고 모신 분은 머지않아 군중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셔야 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베드로에게도,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제자의 역할이 끝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이 수난과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처음부터 깨달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고 돌아가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다음에도 십자가를 보고서는 도망갔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하신 그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는데, 오늘 이 말씀이 저에게 깊이 다가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베드로 사도처럼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이 아주 부드러운 음성이나 감언이설로 설득할 때, 그것을 유혹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따듯한 격려나 충고로 착각하여 이것을 물리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인생을 올바로 살고 성덕으로 나아가려면 가까운 사람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유혹할 때,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용기가 정말로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처럼 …….
(출저: maria.catholic.or.kr)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반박합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기에, 이를 거스르는 것은 사탄의 유혹이 아닙니까?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깨우쳐 주시려고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는 먼 앞날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불필요한 것을 잘라 내며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합니다. 희생 없이 축복만 받으려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바랍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며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지혜도 필요하지요.
베드로는 현세에서 힘이 있어야 잘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을 끝맺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가 버려야 할 악습과 욕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꾸준히 자신을 성찰해 나가며,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981
9월15일[연중 제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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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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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T5rrb8Q5Os
[의정부교구 노경득 블라시오(한마음청소년수련원 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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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쪽 발은 주님께로, 다른 한쪽 발은 세상에!>
남아있는 삶을 예수님과 함께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영광스럽게도 베드로는 사도단의 대표이자 수제자로 발탁됩니다. 스승님과 밀착 동행하다 보니, 메시아로서 그분의 신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장엄하게 신앙 고백을 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극찬도 받고 지지도 받고, 마침내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손에 쥐게 됩니다. 한 마디로 승승장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두 발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한쪽 발은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영적인 세계로 건너갔지만, 다른 한쪽 발은 아직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세상 한가운데 남아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베드로의 성소 여정은 흔들리는 작은 배 한 척 같았습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장엄하게 스승임을 따라 나섰지만 아직도 베드로 안에는 인간적 야심들과 미성숙, 다양한 결핍과 긴가민가 하는 망설임이 남아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핍은 스승님께서 조만간 겪으실 수난 여정과 십자가 죽음을 거부함으로 인한 결핍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르 8,32)
그 결과 베드로는 스승님으로부터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정말이지 충격적이고 모욕적인 지탄을 받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 숱한 인간적 약점과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그 많은 결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덕행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지속적인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웠지만, 마지막 순간, 베드로에게는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자비를 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분께서 운명으로 주신 십자가를 기쁘게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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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hFQRGI1s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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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정체: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믿느냐고 제자들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묻고 계신 것일까요?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왕, 예언자, 사제의 역할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당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가 사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물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탄은 잘못된 대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부터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째 동물 사료를 먹으며 산속에서 숨어 사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무서운 부모 때문에 도망쳐서 산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누구에겐가는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산에서 내려와도 되는데 여전히 자기 욕구에 봉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겐가 속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관계도 없습니다. 혼인을 하려고 해도 상대를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게 있고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고 친구를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는 것입니다. 관계는 무엇을 지향할까요? 결국 행복과 안녕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천황이 내린 사케 한 잔씩을 마시고 비행기를 몰고 자살하던 카미카제는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요? 천황이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존재에게 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질 때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십자가를 지면 자녀가 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부모의 유산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97년 허난성, 당시 나이 50의 노총각 장 솽치 씨는 폐지를 주워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짚 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4개월 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자신은 굶어가며 아이를 키웠지만, 사춘기가 된 백기는 아빠를 원망했고 아빠는 그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백기가 상처받을까 봐 여전히 버려졌던 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커가면서 아빠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한 백기는 결국 아빠가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백기는 도시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 된 백기는 놀랍게도 연 매출 190억에 달하는 한 회사의 CEO가 됩니다. 이제 백기는 74세가 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캠핑카를 사서 아빠와 함께 세계 일주를 하고 있습니다. 또 연애 한 번 못하고 평생 혼자 산 아빠를 위해 결혼도 시켜드렸습니다.[출처: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보은… 노총각 아빠에게 일어난 기적’,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장백기는 아버지를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딸이 되었고 고아였지만,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창조자이신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 안에 속해있어야 사랑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동차는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속해있어야 고쳐지고 새로 만들어집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인간을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합니다. 사람에게 속하지 말고 하느님께 속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사탄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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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역 모임에서 ‘복음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그날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피와 내 몸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과 성공을 원했습니다. 현실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가치와 다른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데, 저희가 어디로 떠나겠습니까?” 구역 모임에 참석한 교우들은 성경 말씀 중에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서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저는 그날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게 천주교는 손에 있는 ‘지문’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유한 지문이 있듯이, 천주교는 제게 운명처럼 주어졌습니다. 친척들은 세례명을 불렀고, 주일은 당연히 성당 가는 날이었고, 기일에는 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편안하듯이, 사람은 공기를 마셔야 숨을 쉬듯이 천주교는 제게 물과 같고 공기와 같았습니다. 천주교라는 신앙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천주교라는 신앙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인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저는 천주교라는 신앙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회의를 느낀 적이 없습니다. 형제 중의 한 명은 사제가 되기를 바라셨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저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무엘이 형제 중에 다윗을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형제 중에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가브리엘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1982년에 104명이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신학교의 규칙과 기숙사 생활 따르지 못해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떤 친구는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의 길을 따르지 못해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떤 친구는 신학과 철학이 어려워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40여 명은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주는 음식이 좋았습니다. 신학교의 도서관도 좋았고, 나의 책상이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이 어려웠지만, 사고의 깊이와 폭이 넓어져서 좋았습니다. 방학 때는 본당에서 지냈습니다. 주일학교의 일을 도와주고, 성당의 일도 도와주며 지냈습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그만큼 피곤했습니다. 개학이 되어 신학교로 복귀하면 몸도, 마음도 편했습니다.
33년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브리엘아!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처음 10년은 ‘질풍노도’와 같이 지냈습니다. 예비자 교리, 성경공부를 하였고, 청년 단체를 맡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청년 레지오, 청년연합회와 함께하였습니다. 아쉬운 점은 영적인 동반자가 되어야 했는데, 친교와 나눔의 동반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다음 10년은 ‘영신수련’과 함께하였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영신수련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신학교에서 영신수련 지도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왕복 200킬로가 넘는 거리를 매주 다녔습니다. 영신수련은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신학생이 서품 받기 위해서는 30일 동안 영신수련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피정해야 합니다. 영적인 부족함을 느꼈던 저는 영신수련 지도 사제 모임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걸 택할 수 있다.” 영신수련은 제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가브리엘아!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도 베드로 사도처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데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행동으로 고백합시다. 자기 목숨을 버릴 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하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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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27-35: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 내가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되는 때에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보면 그렇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힘없고 지친 자들을 위해 영과 예언을 받으신 야훼의 종으로 나타난다.(이사 50,4) 그에게 온순과 겸손과 순명을 주시고(이사 50,5; 참조: 필립 2,8),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따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침 뱉음과 수치를 당한다(이사 50,6).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단 하나의 도움이 있음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나름대로 느낀 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일 수 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답한다. 하느님께 축성된 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분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치적인 결정적 실현을 기대하고 있다(사도 1,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뜻으로 메시아를 알아듣지 않도록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어떤 착각도 하지 않게 하려고 첫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31-32절)
여기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반응이 나타난다. 베드로의 모습이 그렇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힘없는 무기력한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메시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의 모습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것인데 그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원수의 일이고 고소하는 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 호통을 치신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사막에서 사탄이 놀라운 메시아적 기적들을 행하도록 했던 것이나, 십자가 아래에서도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내려오라고 했던 것처럼 베드로의 발언을 사탄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계시다(33절).
그리고 이어서 충실한 제자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즉, 자기의 존재를 그분과 복음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34-35절 참조).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게 되며, 단지 인간적인 의지는 은총이 함께 하지 않으면 확실한 죽음만이 있을 뿐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 신앙이 요구하는 행위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강하게 말하고 있다. 믿음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야고보 2,14).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야고보 2,15-16). 진정 이 믿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살아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17) “만일 믿음이 자비를 통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아무것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갈라 5,6; 참조: 에페 6,25; 1테살 1,3)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이다. 이 은총이 나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항상 현실과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믿음은 외적인 환경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적인 행위와 태도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우리 신앙인들도 복음에 충실하다면, 형제애를 통하여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 찬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믿음의 행동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이기주의 바람막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편하지 못한 생활환경에서도 믿음을 실천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 믿음이 십자가 위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베드로가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것이나, 또는 궁핍한 형제들에게 위로의 말만 해주는 것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의 구체적인 실현을 살아가는 용기와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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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16장까지 있는 마르코 복음서의 8장, 곧 한가운데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고 시작한 이 책에서, 진도를 절반쯤 나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분께서 어떤 그리스도이신지를 알지 못하였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의 모습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겠지요. 베드로 스스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고백하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부터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시겠지만 그때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툽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로서 합당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상상하는 무엇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전하는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가서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따르려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가만히 계시면서 우리에게 구원되라고 하신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수고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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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매를 생각하면, 십자가는 숙제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29-35)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내 제자가 되었느냐?”, 또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찾고 있었고, 또는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기들의 희망이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느닷없이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했고, 기다렸고, 믿었기 때문에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을 그리스도(메시아) 라고 믿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고, 스승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에 따르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모든 신앙인에게 다 해당됩니다. 그래서 세례성사 예식에 이 질문과 대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2)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는, “당신이 그리스도(메시아)라는 것을, 아직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하셨다.”인데, 당신의 부활 때까지는 당신이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뒤의 9장에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이야기”에 똑같은 명령이 나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9-10).”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을 갖게 된 때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이 모두 이루어진 다음입니다. 그 전까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긴 했지만, 그 믿음은 참된 신앙의 시작 단계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깨닫고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자격도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그때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없으니 당신에 관하여 아무것도 선포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 부활 전에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복음 선포의 주 내용이었는데(마태 10,7),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가 복음 선포의 주 내용이 됩니다.(사도 2,32)>
3)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실 때 사용하신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을,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 ‘사람의 일’이라는 말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을, “나는 수난 예고만 한 것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 다음의 부활도 예고했다. 그런데 너는 왜, 부활 예고는 흘려듣고,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느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세의 안락한 생활만 중시하는 것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로 읽을 수도 있고,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십자가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가 될 것이고, 힘들고 어려운 ‘숙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맞추면, 그 ‘큰 은총’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열매를 생각하면, 십자가는 숙제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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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효식 이냐시오 신부님]
<현재 진행형>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첫 고백은 최고조였는데, 뒤에 펼쳐지는 그분의 이야기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자들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면 무얼 하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또다시 무거운 짐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나름 열심히 해왔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그렇게 긴장은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쉼의 시간이 있다고 믿었는데, 다시금 일은 진행됩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이 시대를 보아도 과거와 지금의 모습은 너무도 다릅니다.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임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노력의 빛은 멈추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적 삶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과거의 자태에서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변화되지 않지만, 현실의 시대적 상황에서 변화될 것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도태된 모습에서 늘 변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지요. 그러하기에 정말 열심히 했다고 하여 그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적 삶도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 안에서 얻은 참 가르침에 머물러 감추고 안주하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이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감추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내야지요! 정말 기도를 열심히 했다면 그 기도 안에서 얻어진 은총을 삭힐 수는 없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실천은 반드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와 행동이 다르다. 이는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한 충고 한마디와 너무 잘 어울린다 생각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내 주관적 시야의 범위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결과물에만 눈독을 들인 채 살아가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는 안쓰럽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적 보상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바쳐야 하는 처지가 되어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괜한 것에 마음 팔려 주님의 참사랑이 담긴 신앙적 삶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내 것만 생각하고 모두 챙기면 짐이 너무나 무겁겠지요. 괜한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더 시야를 넓혀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내어놓을 수 있는 베풂의 마음도 챙겨갑시다. 그래야 더 가볍게 주님을 따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가진 바를 내어놓을 수 있는 바보가 되어 보시면 어떠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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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시영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코 8,29)
복음의 배경인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가나안 시대에는 자연을 상징화해 숭배했던 곳이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판(Pan)신을 숭배했던 곳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제우스 신전과 함께 황제의 신전까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길에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대답을 내어놓습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솔직하게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했다고 복음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베드로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수난당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을 거부합니다. 반면 그리스도 덕분에 더 부유해지기를 바라며, 그리스도 덕분에 인정받고, 그리스도 덕분에 권력과 명예의 높은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나 스스로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그리스도께 청할 때가 종종 있지요. 성찰해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으로 가난하기를 원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멸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이름으로 낮아지기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느 길에 서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분께 청하는 바람들이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청하는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부끄러운 마음도 들게 됩니다.
세상의 욕망을 청하면서 희망하는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스도의 부활과는 분명 다른 목적지에 있는 부활일 것입니다. 세상 것만을 추구하면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는 우리의 믿음은 언젠가 부질없고 헛된 믿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음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요.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지향에 오늘도 부끄러운 욕망만 가득하다면, 그 욕망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걷고 있는 그 신앙의 길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욕망을 채워주시는 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우상이 되어있을지 모르는 욕망의 자리만 바라보지 말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실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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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대로 레오 신부님]
<십자가를 진다는 것>
예전 가톨릭신문사에서 소임을 맡던 중 쓰게 된 글 때문에 타교구 신자로부터 다소 불편한 말마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만나고 접하는 사람의 수가 적고 자신의 말과 글이 가닿는 범위가 측근을 넘지 않는다면 덕담이 주로 들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위 수가 측근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들려오는 말의 톤이 슬며시 달라진다고 합니다. 비공식적인 통계이지만 호(好)보단 오(惡)가 더욱 적극적이고 참여적이라고 하네요.
문득 오늘 복음을 읽어가며 예수님에 대한 당시 세간의 평가에 주목해 봅니다. 정작 예수님의 중요한 메시지(message)보단 당신 즉, 메신저(messenger)가 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 평가에 관심을 보이십니다.
최근 이어지는 복음을 예수님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이에 대한 당신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더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당신이 널리 알려질수록 호응만큼이나 무시, 오해, 왜곡 등과 같은 세평이 따릅니다. 이에 대해 때론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치시고 때론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쯤 되니 종종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치 당시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처럼 느껴집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메시지 자체가 되는 장면을 밝힙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예고입니다. 특히 이어지는 베드로의 반박에서 예수님의 답답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어쩌면 “스승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그의 반박이라는 맥락에서 마치 “스승님은 그리스도여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는 예수님에 대한 연민,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자신의 사회적 입지 또한 염두에 두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이라며 단호하게 대응합니다.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과거 사형 도구이자 조롱거리였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속의 이목 안에서 결단을 요구합니다. 박해시대 때 이 대목은 신앙고백에 앞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구절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을 드러내기에 세간의 평가가 무척 신경 쓰이는 시대입니다. 낙태 반대를 표현하기에 여론이 의식되고, 정의를 언급하기엔 이념논쟁이 버겁고,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고, 생태환경 운동이 비효율적이라 여겨지지는 않는지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코 8,33)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τὰ τοῦ θεοῦ ἀλλὰ 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
33절의 그리스말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사탄아, 하느님의 것들이 아닌 사람의 것들에 마음을 두는구나.’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들’은 어떤 업적이나 행동이 아닌, 열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제 신념에 매몰되어 낯설고 불편한 소리들에 완고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람의 것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의 처음은 먼저 들을 귀를 가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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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봉성체하던 어느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이 할머니는 제가 방에 들어가면 곧바로 우셨습니다. 자기가 아직 할 일도 많은데 곧 죽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며느리에게 병원에서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조금 불편한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했던 친구, 가족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을 보며 이 할머니는 죽음이 두려우신 것입니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 드시려고 했고, 다리가 불편해서 밖에는 못 나갔지만 집에서 나름으로 열심히 운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몸 상태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걱정이었습니다. 이 걱정이 결코 할머니의 건강을 좋게 만들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과 죽음에 대한 걱정을 단번에 끊어내지 않으면, 평생 아무 일도 못 할 겁니다. 그런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세요. 뭐든 올 테면 오라지요. 몸뚱이가 우리를 조롱하는 일이 이리 빈번한데, 우린들 한두 번쯤 놈들을 조롱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한평생을 잘 싸우고 살려면 이 원수부터 정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멋진 성녀의 말씀입니다. 사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데도 걱정과 두려움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할 일이 그다지 많은데 겨우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신원에 관한 질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을 말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없었지요. 그 답을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 역시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리스도, 메시아의 모습을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인들을 몰아내는 개선장군으로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승리의 개선장군인 예수님은 끝까지 살아 남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제껏 거짓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실현될 말씀입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걱정, 두려움 등은 모두 사람의 일만 생각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희망과 기쁨만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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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하고 물으셨습니다. 바깥 떠도는 소리,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1) 세례자 요한. 2)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3)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여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얘기는 그것으로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소신과 확신에 찬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나의 신앙과 다른 사람의 신앙은 확실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1). 그리스어로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인데 2).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3).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약 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하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주변 강대국의 속박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세주를 보내주시어 선택받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1).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2). 사제와 같은 인물로 3).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임금, 사제, 예언자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장차 하느님이 보내주실 메시아를 1).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하길 원했고, 2). 사제처럼 율법에 충실하며 3). 예언자들처럼 죄인을 단죄하는 인물로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1). 이 메시아가 압제 세력인 로마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2). 원수를 철저히 응징하며 3). 율법을 어기는 죄인을 엄하게 벌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원수의 죽음이 아니라 회개를 원하시며 죄인에게는 처벌보다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17,17)를 줄기차게 선포하였고, 그 진리의 이름으로 그 진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아 칭호는 예수님의 사명을 올바로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고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구세주이시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까지 감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은 이기적인 야망의 논리로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고 더 큰 희생과 사랑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물음은 결국 너희에게 있어서 내가 어떤 존재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를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분 손에 들려 있으니, 연필을 사용하고 안 하고는 그분 뜻에 달려 있습니다. 혹 부러져도 그분께서 필요하다면 깎아 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뜻을 관철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나를 맞추는 삶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고백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길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 중 한 분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고 훌륭한 분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힘들고, 지치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난제에 봉착해 있을 때도 여전히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 ‘구세주’ 이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나를 살리시는 분, 나의 주인으로 확실하게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행하시면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같은 뜻을 되풀이 강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 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숭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집자실지(執者失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움켜잡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움켜잡았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도 그렇고 재물도, 목숨도 그렇습니다. 잡으면 잃습니다. 잃기 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에 소유하지 않은 물건을 도둑맞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주님으로 가득 채워지고 충만해질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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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이에서>
마르코 8,27-35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이에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이에서
사랑
미움
사이에서
받듦
누름
사이에서
나눔
앗음
사이에서
이음
가름
사이에서
품음
밀침
사이에서
함께
홀로
사이에서
살림
죽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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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도 우리는 길을 걷습니다. “나그네 설움”이라는 ‘옛 노래’가 떠오릅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그러나 우리는 정처 없이 걷는 발걸음이 아니죠! 우리는 분명 그분과 함께 동행 하여 걷고 있으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니까요!
오늘 <복음>은 바로 길을 동행하여 걸으면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이 가는 길’과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더구나 이 가르침은 스승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막 시작하면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그 간절함이 베여있는 가르침입니다.
순교성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 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준 ‘주님의 종의 노래’로, 메시아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이들에게 뺨을 내주고, 모욕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이나,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전합니다.
<제2 독서>는 그분을 믿는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녀야 할 ‘믿음의 실천’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권고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장면인데,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군중들의 여론을 물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를 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그러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알려주는 ‘그리스도’는 황당하리만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우리는 “반드시”(Dei)라는 말과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로, ‘명백히’(parresia)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단어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의무와 책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고난과 배척을 겪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이며 책임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겠다는 뜻을 나타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배척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반드시’ 실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 곧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반드시’ 해내고 말리라는 투철한 사명감과 각오를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한 번 쓰인 단어로, ‘자유를 가지고 용기 있게 그리고 분명하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어렴풋이 알아듣거나 대충 알아들어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명백하게 알아들어야 할 내용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길은 우리가 ‘명백히’ 알고 분명하게 따라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은 대체 어떤 길인가?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곧 <첫째>는 한두 가지나 혹은 몇 가지의 고난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단지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이요, <셋째>는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 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걸어야 하는 길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곧 스스로 만들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수행해 가는 길인 것입니다. 의탁과 신뢰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당하면서도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이러한 내용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개선하는 ‘왕’ 메시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부당만부당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에 당혹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바로 전에 “복 받은 이”(마태 16,17; “너는 행복하다.”)로 칭찬받던 베드로는 이제 “사탄”이라고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에 맞섰던 것입니다. 사막에서의 유혹자처럼, 그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계획과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구원자가 되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사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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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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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코 8,29-31,33)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선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곧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다.’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만 해도 기도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만 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고 선포하는 찬양기도가 됩니다. 그 선포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고백입니다.
온 마음을 담아 정성껏 ‘예수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선포에는 힘이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우리의 선포는 예수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게 합니다. 정성껏 그분의 이름을 선포 할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더욱 힘있게 이끌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간절하게 부르는 찬미 소리는 우리 열망의 크기만큼 하늘에 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우리의 찬미 소리는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주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만큼 예수님은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서 응답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만큼 당신은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로 응답하시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로 현존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예수님은 구약에서 이미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아이십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