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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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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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인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친교에 연결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믿음과 친교, 믿음과 성사, 믿음과 성체성사는 각각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완성합니다. 몸과 피, 곧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이제까지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를 위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이는 마술도 아니고 기계적인 성사 행위도 아닙니다. 믿음 없이 성사도 없고 생명도 없으며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도 없습니다.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뒤 환호할 때 “신앙의 신비여!”라고 표현하고, 성체를 모실 때 “그리스도의 몸. 아멘.”이라고 확신합니다. 믿음은 이를 표현하고 양육해 주는 성사의 전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 하시며, 그리스도와 사람 사이의 친교, 곧 당신 살을 먹고 당신 피를 마신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성체성사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생명을 신자에게 전해 줍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이는 삼위일체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사람과 하느님의 계약에 참여하게 됩니다.
‘살’에 대한 예수님의 끊임없는 언급은 사람들 가운데에 이루어진 육화의 신비로 이끌고 있습니다. 몸과 피의 지속적인 구별은 주님 생애의 양극, 곧 육화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암시입니다. 육화와 죽음 모두 성체성사와 연결되어 있고, 예수님께서는 성사 제정을 당신의 희생 제사적 죽음 전날에 분명하게 연결하십니다. 여기에 희생 제사와 성체성사가 지닌 복음 선포적 가치가 있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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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성체성사의 힘에 대해 묵상해봅시다. 성체성사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에게 감사드리는 기회가 되게 하고, 예수님을 더욱더 나의 스승과 목자로 섬기려면 어떻게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지내는지 묵상해봅시다. 아직 못하였다면 누구에게 어떻게 복을을 전하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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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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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신약에 가까이 오면서 구약 성경에서는 오늘 잠언에서 보듯, 지혜가 점점 의인화되어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구약의 예언서는 자주 세말에 주님께서 친히 잔치를 차려 주신다는 사실을 예고하는데, 이 말씀대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몸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 주시면서 오늘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에 초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는 그분의 약속을 보장받고, 또한 그는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아울러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 동참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2독서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하고 제시합니다. 경외심을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이를 통하여 지혜 자체이시며 말씀(로고스)이시고 생명이신 그분과 일치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에 초대받은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의 선물을 받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행복한지 곰곰이 살펴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953
8월18일[연중 제2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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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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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Io6eLx5WYA
[안동교구 차광철 베다(진보, 점촌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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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시간!>
오늘 우리는 참으로 은혜로운 주님 말씀을 접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찾고 갈구하던 주님께서 멀리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랍니다. 아주 가까이 지척에 현존하신답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신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6)
더 은혜로운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이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 너무나 쉽다는 것입니다.
엄청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미사에 참석하면 됩니다.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인해 나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체성사에 참여하긴 하는데, 도통 주님 현존 체험보다는 부재 체험으로 기우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관건은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요 습관처럼, 후딱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성체성사를 대한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돼지 목에 걸린 진주 목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좋은 제안을 몇 가지 건네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시간을 잘 쓰랍니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금쪽같은 시간을 잘 사용하랍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미사 입당송의 한 말씀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오늘 우리의 매 시간들이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 뜨락에서 지내는 거룩한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권고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하루 하루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놀라운 업적과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찬미가로 표현되어야 마땅합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불평불만을 멈춰야 하겠습니다. 지난 시절 어두웠던 상처는 자비하신 주님께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내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모두 섭리의 손길에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저 오늘 주님 현존 안에 기쁨의 찬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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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zxOlW_qI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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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셔야 하는 분임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말다툼합니다.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 중 ‘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어야 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입니다. 이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거나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나고 또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입니다. 어떻게 에너지가 없었는데 온 우주라고 하는 어마한 에너지 체계가 저절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생명체도 무생물보다는 높은 에너지입니다. 생명체가 죽어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무생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동물도 하등 동물보다 에너지 체계가 높습니다. 그래서 고등동물이 세포가 분해되는 건 있어도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동물이 양성생식을 하는 복잡한 체계를 가진 동물로 저절로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반됩니다. 아무리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이 모든 게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음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육체만 에너지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정신적인 에너지도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사랑도 에너지입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죽고 싶어집니다. 에너지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채 언제나 배고프게 살아갑니다.
톨스토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랐습니다.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의 배고픔을 쾌락으로 채우려 했으나 채워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50세가 넘어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이때 그는 만들어진 것은 창조자에게서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따르는 신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존재가 존재를 낳고 생명이 생명을 낳으며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을 뒷받침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군가 생명의 희생으로 받은 생명입니다. 보리스 콘펠드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사로서 죄수들이 병을 핑계하지 않고 죽도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게 하는 일과, 난치의 환자는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한 장암 환자를 치료해줍니다. 암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합니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의사 보리스에게 던집니다. 보리스는 “괜찮아요. 염려 마셔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으신 분이 계시거든요.”라고 대답합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져 밤에 습격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며 솔제니친은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에너지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생명도 받아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악하며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가 지은 모든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고 영혼을 깨끗이 함으로써 신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는 저절로 생성되거나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죽음 앞에서 생명력이 풍부한 사람이 됩시다. 톨스토이는 마지막에 신상에 귀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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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깨와 소금이 만나면 ‘깨소금’이라고 합니다. 깨와 설탕이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깨달음’이라고 하네요. 설탕이 달기 때문에 ‘달음’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운명처럼 만나서 세상을 변화 시킨 인연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후에 ‘일체유심조’라는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이순신과 유성룡이 만나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을 구하였습니다.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만유인력’이이라는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만나서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을 만들었습니다. 2024년 저는 댈러스로 와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남길곳이라고 이름 지은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그 창고에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7기 사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27기 사목회는 신명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27기 사목회는 말씀과 친교가 넘쳐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27기 사목회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합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삶과 죽음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이 먼저고, 죽음이 나중이니 삶과 죽음은 순서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삶과 죽음은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사고락, 생사를 함께한 전우, 생사여탈, 생사확인’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과 삶을 이야기한 말도 있습니다. ‘사생관, 사생결단’과 같은 말입니다. 삶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우리의 삶은 자칫 허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슬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기게 됩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흙이 되는 과정입니다. 사회학적으로 죽음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한줌의 흙이 되는 것도 아니고, 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삶은 그 이정표를 향해서 떠나는 순례입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려는 자영업자들에게 해 주는 ‘조언’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의 말은 믿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이곳에 투자하면 많은 수익이 나고, 성공할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수익이 나고, 성공할 거라면 본인이 하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업은 경쟁자가 많아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영업자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기술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와 헌신이 없는 성공과 재물은 마치 사막에서 보이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신기루는 허상일 뿐입니다. 회개와 십자가 없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뿌리지 않고 열매 맺는다는 신앙도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과정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수고와 헌신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빵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그래서 또 다시 배고프게 하는 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선과 악을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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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셨다.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 살이라고 하셨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뿐만 아니라, 당신의 피까지도 주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구체적으로 그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빵”(6,48.50)이라고 하셨을 때는 모호했지만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51절)이라고 하신다. 이 때문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라고 한다. 이 말씀 때문에 많은 제자가 떠나간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3.58절)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 즉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우리의 삶에서 이 두 가지 행위는 “생명”을 강하게 해주고 새롭게 만듦으로써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이제 성체성사와 연결하면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먹음으로써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며, 거기에서 그분의 구원이, 그분의 생명 자체가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다. 그 생명은 시간과 우리의 죽음 자체를 넘어 계속되게 된다. 바로 죽음은 성체성사의 생명에 의해 극복될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54절)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해 당신 자신이 충만한 생명이 되셨다. 즉, 부활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육체까지 완전히 가지셨다. 이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와 일치되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몸 자체를 마지막 부활 때 변화시킬 생명력을 그분으로부터 얻게 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를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전하고 나누어주기 위해 받아 모신다. 그래서 활동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신자들은 성체성사에 보다 열심히 참여한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의 최고의 표현인 성체성사를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또한 피는 십자가 위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그분은 참으로 당신의 모든 피를 우리를 위해 흘리셨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최고의 희생의 순간을 신비스럽게 재생시켜 우리 신앙에 제시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를 기억하게 할 뿐 아니라, 실제로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온전히 내어주는 행위를 최고로 표현해 주는 사건이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활력소를 공급하는 심장과도 같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교회의 심장이라고 한다.
“형제 여러분,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에페 5,15-16절) 성체성사 거행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기주의, 폭력으로 가득 찬 이 ‘악한 때’의 어두움을 없애기 위해 사랑과 봉사로 자신의 신앙인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말씀은 성체성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는 성체성사가 중심이 되는 전례적 모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18-20절)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성체성사가 감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체성사 안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에게 감사하시는 하느님께서 현존해 계신다. 모든 일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살로 오신 그분을 찬미하며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받아 모셔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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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두 독서와 복음 모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사람들을 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없는 이에게”(잠언 9,4) 자신이 주는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어려운 점은, 지각없는 사람이 과연 그 초대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금보다 귀하다고 거듭 말하지만, 그 지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에게 지혜의 초대는 수고스럽게만 보입니다.
한편 에페소서는 술에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살도록 초대합니다. 이 초대도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지금이 악한 때라고 하면서 어떻게 모든 일에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고 말할까요? 어리석은 자라면 아마도 악한 때의 흐름에 휩쓸려 살거나, 아니면 악한 이 세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악한 세상 안에서도 지금 주어진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복음 또한 초대입니다. 잠언의 초대에서와 비슷하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양식과 음료를 받아먹으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초대 때문에 “말다툼”(요한 6,52)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사람들에게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하여 주실 때는 말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많은 이가 모여들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과 음료를 받으라고 하실 때는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다만 육신의 양식을 구하려 하는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서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를 구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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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