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5장, 21-24절 35ㄴ-43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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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24.35ㄴ-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35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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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자, 열두 살 어린 소녀. 열둘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난치병을 앓았고 다른 한 명은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를 마주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에게는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교집합이 생깁니다. 물론 한 명은 예수님을 능동적으로 찾아가서 예수님께 손을 댔고, 다른 한 명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손이 잡혔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도 하고 예수님께 붙잡히기도 합니다. 숱한 고생을 하고 많은 의사에게 가진 것을 다 쏟아부으며 열두 해를 보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아픈 딸을 고쳐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그분을 집으로 모시고자 하였지만, 집으로 가는 동안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예수님을 더 수고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던 회당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마주한 상황은 비록 다른 모습이었지만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처지라는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만났습니다.
그러한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적당한 인간적 사고 안에서 만들어진 타당성의 결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때로는 무모하게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그분께서 건네시는 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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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야이로같이 오직 믿음을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만약 내려놓지 못하고 환경과 여건을 핑계를 대며 신앙인으로써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사람들은 아픈 아이는 예수님께서 낫게 할 수 있지만 죽은 아이는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35절). 우리는 주님의 치유가 필요한지, 주님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전지전능한 주님인지… 듣고만 계시는 주님인지… 편하게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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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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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회당장 야이로는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이 죽게 된 사실이 억울하기만 합니다.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간절하지만, 이미 죽은 딸아이를 뒤늦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아버지와 딸, 억울하고 한 많은 두 인생의 역전이 이루어집니다.
남에게 부끄러워 말도 못 하는 하혈 병을 앓는 여인이 병을 치유받으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군중 틈을 헤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지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밀쳐 대는 군중의 단순한 호기심의 손길과는 달리 치유를 간절하게 원한 손길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간절함 속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한 인간의 진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우리를 만드셨고, 세상의 불의와 불공정으로 말미암아 깨진 균형을 맞추시려고 스스로 가난을 택하시어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십니다. 궁핍은 언제나 제 몫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심에서 나옵니다. 한정된 재화를 누군가 더 소유하면 내 주변에 그 누군가가 궁핍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경제적 정의만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생로병사의 모든 문제가 균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의 균형, 사회적 균형, 경제적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병과 슬픔, 차별과 편견, 위선과 교만의 병이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내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알 것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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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내 목숨 나의 것이니 내 인생 소신껏 마음대로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애원합니다. 피붙이를 낳아 지금까지 키워 왔으니, 그 생명은 아버지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들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는 수많은 부모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친밀함의 표현으로 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호칭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여자가 ‘딸’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당연히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딸’에게 생명과 행복을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통계 수치에 따르면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건강을 해치는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스스로 정리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존재하여 살도록 만드셨음을 강조하면서, 만물이 창조된 본디 목적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데, 특히 그분의 창조 계획에 따라 우리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따라서 지혜서는 인간이 본디 악하기 때문에 애써 그 본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결코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 본성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간직하면서 살아간다면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부모보다 우리를 더 애틋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 본디의 선한 모습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특별히 어리석은 판단이나 결정을 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삶을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복음말씀의 향기♣ No3904
6월30일[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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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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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CsTiRXaois
[서울대교구 구요비 옵 주교님, 카메룬 바피아교구 엠마누엘 다씨 주교님 공동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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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황님께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지난 주 제가 좀 바빴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기로 한 어떤 행사에는 일찌감치 출발했는데도,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시간이 늦어지고, 애를 태우고, 끼니도 제때 못 때운 관계로 밤늦게 집에 돌아와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고 있지? 내 또래 다른 영감님들은 저리 세상 편히 지내고 계시는데, 나는 대체 이게 뭔 꼴이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굳이 안 그래도 때 되면 삼시 세끼 딱딱 밥 나오는데…”

그런데 오늘 교황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과 생애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1936년 12월 17일생이시니, 새롭게 정한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87세+6개월이십니다. 한쪽 폐도 온전치 않은 데다, 무릎까지 문제이니,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래 분들은 안 그런 분들도 많지만, 많은 분들이 요양원에 계시거나, 오늘 내일 하시거나, 그래서 산에 누워 계시나 집에 누워 계시나 별반 차이 없는 분들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그 연세에도 하루 스케줄이 살인적입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수많은 회의와 행사가 교황님을 시간대 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음 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파악은 안 되지만, 아마도 이분도 여러 이유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처럼 살아생전 사임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연세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걷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기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임서를 제출하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카스텔간돌프 교황 전용 별장에서 편히 쉬고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로서는 그러지 않으실 듯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시작하신 교회 쇄신과 개혁을 위해, 시노달리타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순교자의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이미 달릴 곳을 다 달리신 교황님이시지만, 또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달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이 너무나 사소한 고통 앞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며 인내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매일 죽을 각오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공동선을 위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남아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활활 불태워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그간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유달리 꺼려하시고 비판의 날을 세우시는 폐해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성직자들이 보이고 있는 지나친 성직주의입니다. 성직자는 경영자나 관리자에 앞서 겸손한 봉사자이며, 동시에 양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자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교황님, 영성가이자 활동가, 개혁가이자 교회 쇄신의 적임자이신 교황님께서 너무 고령이시기에, 그분에게 주어진 개혁과 쇄신의 시간이 얼마나 더 주어질지 걱정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차게 깃발을 올리셨는데, 측근들이, 그리고 지역 교회들이 너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뜻밖의 선물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셔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계획하신 그 좋은 꿈과 희망 사항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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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c6nqOqav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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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지 못하면 죽고 싶게 진화했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년 동안 하혈하는 여인과 열두 살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십니다. ‘12’라는 숫자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 백성과 12사도 위에 세워진 하느님 나라, 곧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 안에 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들의 생명의 샘임을 믿고 부모에게서 에너지를 받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겨 자살 시도하면서도 창조자를 찾지 않고 자신은 진화한 존재라고 믿는 것입니다.

장동선 뇌과학자가 ‘세바시 15분’에 나와 ‘마음의 구조신호에 귀 기울여 주세요’란 제목으로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청소년 때 두 번, 어른이 되어서 한 번, 자살 시도를 세 번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우리 함께 죽자!”란 소리를 많이 하였던 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치 독이 든 캡슐을 삼켜서 그 독이 계속 퍼져나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아내도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를 정도로 자신의 큰 아픔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강의는 모두 ‘진화론’적입니다. 뇌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진화론의 목적은 ‘생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고등 동물로 올라올수록 ‘의존’해야 하게 태어납니다. 인간은 인간 답게 살려면 적어도 20년은 부모와 함께 삽니다. 이것이 없으면 죽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고장이 나고 정말 죽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사랑을 증명하고 싶어서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격리 원숭이는 어미를 선택할 때 젖병이 있는 차가운 철사로 만든 어미 인형이 아니라 젖병이 없어도 따듯한 감촉이 있는 수건으로 감싸인 인형을 어미로 믿었습니다. 영장류는 생존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젖보다 어미의 사랑을 더 그리워합니다. 반면 모기나 박테리아와 같은 것들은 부모의 사랑이 필요 없습니다. 관계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관계 맺을 필요가 없는 동물들이 더 유리합니다. 인간은 사라져도 모기나 바퀴벌레는 남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할 때면 그 창조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 만큼 그 창조된 것을 위해 더 큰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제가 컴퓨터가 고장 나 강론 원고를 날려버리면 조금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 논문이 제출 직전에 다 날아가면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이라도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박테리아보다는 인간이 더 만들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을 닮은 인간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 놓으십니다. 이것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어린이처럼 자신을 창조한 이에게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삶의 에너지를 자기 스스로 생성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게 진화하는 게 이치에 맞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자들은 창조자에게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자동차나 스마트폰이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서 ‘당연하게’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이로나 하혈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께 빠져나가는 생명을 청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든 이로부터 에너지를 청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기도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받지 않는 이들은 이미 그분을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배우 최강희 씨는 낮은 자존감으로 밥도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천사 이미지와 저녁에는 술과 담배를 사서 먹고 마시며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 하는 이중성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모태 신앙인이었지만, 진정으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받고는 술·담배를 끊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비로소 참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창조자로 인정함으로써.

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살아서 압니다. 우리에게서는 에너지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에너지는 창조된 이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코드를 꽂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저는 매일 세 시간 정도는 성체조배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방법은 없습니다. 애인을 만날 때 방법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한가요? 오늘 복음의 두 의인처럼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믿고 그분 옷자락을 쥐려고 하는 마음으로 그분 곁에 머물면 됩니다.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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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저는 199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경본을 읽을 때 꼭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황과 우리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부분입니다. 33년을 지내면서 우리 교황은 3분을 이야기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 주교는 4분을 이야기했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그리고 정순택 베드로 주교입니다. 이곳 댈러스 교구에서는 우리 주교 ‘Burns와 Kelly’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습니다. 매 미사마다 교황과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은 그만큼 그분들의 직무와 직책이 무겁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결정이 교회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처럼 모든 이를 품어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용서의 길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자비의 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의 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희생의 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는 나눔의 길입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는 믿음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성령의 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고통 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질과 자본의 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사랑과 자비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눔과 희생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이 제일 먼저 방문했던 곳은 난민들이 머물던 람페두사였습니다. 교황님은 난민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람페두사에 있던 난민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바티칸에 노숙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노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 실도 마련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26대 사목회가 끝나고 내일부터는 27대 사목회가 출범합니다. 26대 사목회를 이끌어 주셨던 사목회장님과 사목위원들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26대 사목회는 팬데믹의 어려움을 함께 했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 교황 베드로 사도로부터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1977년 시작하여 이제 27대 사목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가 본당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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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주제는,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며, 이제 그 생명과 구원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이는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죽음”과는 반대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항상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 속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하느님의 본성을 본떠서 만드신(지혜 2,23) 존재이기 때문에 불멸한 존재로 영원히 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드신 분이 아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기적들은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해 완전히 함께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복음: 마르 5,21-43: 소녀야, 일어나라!

복음에서는 두 가지 기적의 사화가 함께 소개되고 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과 12년간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친 이야기이다. 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과 그 죽음의 일반적 전제조건인 병을 지배하는 예수님의 권위와 그 기적의 근거가 되는 믿음을 북돋우고 있다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사화를 통해서 예수께서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말하고자 하고 있다.

회당장이 예수께,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하고 청한다. 그러나 하혈하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에 그 딸의 상황이 치명적인 상황이 되고 만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35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우선은 그 아이의 죽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주님의 부활과 같이 다른 삶으로 옮아가는 순간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때(40절)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 “탈리타 쿰”(41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하시며 소녀를 다시 살리셨고,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42절) 한다.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부활 후 무덤 앞에서의 여인들의 놀라움과 같이 표현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과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예수께서 죽음에 대한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볼 때, 병에 대한 그분의 권능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으로 그분의 생명에 대한 능력은 예수님 자신도 조절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이는 힘으로 옮아가듯이 퍼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이미 여인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바로 생명이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기”(지혜 1,13) 때문이다.

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북돋움이다. 이 믿음은 더 많은 시험을 당함으로써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딸이 죽은 것을 알고 낙담하고 있을지 모르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하신다. 아마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혈하던 여인도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셨을 때, 어쩌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캐는 듯한 말씀을 하셨을 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33절)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기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며, 그분과 참된 친교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비를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알려주고 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가치 있는 부,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가 안다면, 바로 우리의 현세적인 부를,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누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일임을 바오로 사도는 강조하고 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필립 2,7)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때, 그분은 우리 생활의 모든 순간, 모든 행동에 새로운 의미를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고 또 항상 초대해 주신다. 여기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굳게 가지도록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살려고 할 때, 그렇게 살 수 있으며, 생명 안에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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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2독서는 가난한 이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시며 누구보다도 부유한 분이셨지만,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가난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넘어 십자가 죽음이라는 비천함까지 껴안으십니다.(필리 2,6-8 참조)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시는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시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고고하게 홀로 계심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하시는 인간과 같아지시는 거룩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가난함으로 우리의 가난한 삶을 살아가시고, 그 안에서 슬픔과 고통을 함께 겪으십니다. 이달 내내 우리가 기억한 그리스도의 성심은 크신 사랑으로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시며 마음이 찢어지도록 슬퍼하시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나누시는 그 가난으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부유해지고 충만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가난한 이를 위해서 가난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속성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에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라는 윤리적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이 모습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여 줍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이와 분리되어 그들에게 작은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부자 교회’가 아닌 가난한 이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으로 동화되는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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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탈리타 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마르 5,22-23)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5,39)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마르 5,41-42)

1)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루카 7,13)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역시 일차적으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한 기적이었습니다.(요한 11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도, 그 소녀가 아니라 그 소녀의 부모를 위해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 소녀가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 또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기 위한 표징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이들은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은 그들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신 일인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나중에(종말에)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었다가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일은, 살아난 것으로 완결된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숙제를 주신 일이 됩니다. 그 숙제는 기적을 체험하고 크게 기뻐한 가족들에게도 주어진 숙제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바로 그 숙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2)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큰 슬픔과 큰 고통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일은 분명히 큰 기쁨인데, 그 사람이 나중에 다시 죽음을 맞이할 때, 이미 한 번 겪었던 큰 슬픔과 큰 고통을 또 겪는 일이 되어버리면, 그러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꼭 기쁜 일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그런 것을 생각 못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알아보고 믿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됩니다.

3)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지상에서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상에서 아주 오래 사는 것이 꼭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니고, 반대로 일찍 죽는 것이 꼭 불행한 일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지상에서의 수명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4) 예수님은 희망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가 처음에 예수님을 찾아올 때에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이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또다시 막연하게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딸이 다시 살아났을 때에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고 ‘희망의 주님’이시라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 믿음과 희망을 끝까지 간직하면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했다면, 자신이 나중에 생을 마칠 때, 또는 가족 중에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흔들림 없이 그 일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종합해서, “예수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구원이신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면서, 주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지금’ 누리는 사람이고, 또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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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안수일 요한 보스코  신부님]

<믿음 속에 숨은 약속>

“인간의 행복은 신앙의 대상이자 목적인 하느님을 뵈옵는 데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인간의 목적으로 설정하셨으므로 하느님과 합일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요 목적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먼저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라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잡하고 어지럽고 힘든 요즘의 삶에,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한 행복을 얻고 누리기 위해 꾸준히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무엇이며, 그 행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두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은 ‘믿음’ 에 있다” 는 것입니다.

먼저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린 딸이 죽어가자, 예수님께 자기 집에 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탁을) 받아들이시고 그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길을 가던 도중에 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회당장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던 사람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셔서, 죽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소녀가 깊은 잠에서 깬 것처럼, 곧바로 일어섰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요청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 이야기 안에, 마르코 복음 사가는 다른 이야기 하나를 삽입시켰습니다. 하혈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마자 낫게 된 치유 사화입니다. 여인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던 신적 구원 능력을 불러일으킨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아시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군중 앞에서 ‘모든 것을’ ‘고백’ 했을 때, 그분께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34절)

이어진 두 개의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 가지 주제, 곧 믿음이 있고 예수님께서 생명의 원천이시며, 그분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행복이 그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교황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나약한 우리들을 위해 늘 기도해 주시고, 세상의 유혹 앞에 자주 길을 잃고 넘어지는 우리들을 위해 진리의 길을 제시해 주시는 교황님께서 건강하시도록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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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윤웅렬 하상바오로  신부님]

<두려움에서 일으켜지는 믿음>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마르코 5,22) 이 구절의 그리스어 성경 원문을 더 직접적으로 번역하면, “회당장들 가운데 야이로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와서….”가 됩니다.

회당장이라 하면, 비록 그 규모가 작다 하더라도, 한 동네의 유다교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입니다. 죄의 용서를 선포하시고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심지어 안식일에 치유의 기적마저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실상 많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청원하는 ‘회당장’ 야이로의 모습은 매우 이례적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야이로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예수님께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죽어가는 딸을 살릴 분으로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는 길에 또 다른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피 흘리는 여성을 부정(不淨)하다 보았던 구약의 규정들을 상기해 볼 때(레위기 12장; 15장 참조), 예수님께서 허용하신 이 접촉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삼종기도 강론(2021년 6월 27일)에서, “하혈하던 여인이 바랐던 예수님을 향한 이 접촉은, 이 병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부정함으로 인한 ‘고립’에서, 다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로의 회복 또한 의미한다.”는 메시지를 주신 바 있습니다.

부정함의 옮음 따위는 걱정하지도 않으시고, 오랜 세월 피폐했을 그녀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지만 이 모든 광경을 힘겹게 지켜보았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야이로입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에게는, 하혈하던 여인이 치유되는 이 시간들이 결코 아름다운 기적의 순간으로만 여겨졌을 리 만무합니다. 그저 자신의 딸 아이가 죽어가는, 초조하고 야속한 시간이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기적이래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딸이 그 누구보다 소중합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직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중인데, 집에서 딸의 죽음을 알려옵니다. 절망적인 소식입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직 믿어라!”(마르 5,36 필자 번역) 예수님은 그의 두려움을 곧바로 알아보시고, 믿음을 북돋우십니다. 그렇기에 이후로 이어지는 야이로의 침묵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불평하지 않습니다. 속은 오죽했으련만, 그래도 주님을 보채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시간을 당신 뜻에 따라 쓰시는 데에 감히 개입하지 않습니다. 두렵지만 오직 주님을 믿습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

예수님의 이 음성과 함께 딸뿐만 아니라, 그렇게 야이로의 믿음 또한 두려움에서 일으켜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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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정렬 모세 신부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5,34)

‘액자 형식’의 문학 구조는 액자가 그림을 둘러 꾸며주듯 바깥 이야기가 그 속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기법을 말하는데, 오늘 복음이 그런 형식으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액자 밖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딸이 죽게 되었음을 알리며 살려 달라 간청하자 군중은 서로 밀쳐대며 그분을 따르게 된다.

이어 이야기는 액자 속으로 들어와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인이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라고 생각하며 예수님 옷에 손을 댄다. 군중이 밀쳐대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옷에 손을 댄 사실과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셨고, 여인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한 행동과 믿음을 확인하시고 구원과 건강을 선언한다.

상황은 다시 액자 밖으로 나와 회당장 집에서 딸이 죽었음을 알렸지만, 예수님은 군중의 소란과 비웃음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며 소녀를 일으키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많은 곳에서 믿음을 강조하셨는데,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마태 17,20)이며, 토마스 사도를 향해서는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것임을 말씀하셨다.(요한 20,29) 과학과 합리적 이성이 진리라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는 지금의 세상에서 신앙의 어리석음과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따르는 선택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믿음을 통한 반전의 이야기는 성경에 차고도 넘쳐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5월 제1차 세계 어린이날 담화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이사 49,15 참조) 날마다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당신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며, 사랑하는 아빠, 자애로운 엄마의 눈길로 우리를 보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의 여정은 세상의 가치와 논리가 아닌 어리석음과 불가능을 믿고 따를 때 당신의 영을 통해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그것을 느끼고 사는 삶이 아닐까 싶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집을 방문하여 말씀만으로 병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실천한 여인과 소녀의 부모처럼 믿음을 가질 때 신앙은 성장할 것이다.

예수님은 신앙의 길에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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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인 ‘치타’를 혹시 아십니까? 이 지상에 현존하는 가장 빠른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속 100km대를 달리는 유일한 육상 동물이며, 최대 120km/h의 속력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속도로 사냥감을 쫓아가서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치타의 사냥 성공률은 어떻게 될까요? 4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동물보다는 성공률이 높기는 하지만, 때로는 계속된 사냥 실패로 인해 굶어주는 치타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끼 치타의 생존율은 어떻게 될까요? 대략 독립할 수 있는 개월 수인 17개월 동안 4.8%만 생존한다고 하더군요. 현재 인간의 기대 수명이 제일 낮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유아는 91%가 첫 번째 생일까지 살아남고, 88%가 다섯 번째 생일까지는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치타는 상위 포식자가 아니라 아주 약한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강함이 삶을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도 남들보다 강함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하고, 이를 위해 자기 능력을 키워나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매번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두터워지게 됩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발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청합니다.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손을 얹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딸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셨기에, 그의 집으로 함께 가십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회당장의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딸의 죽음을 확신하고 비웃었지만, 딸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회당장의 모습으로 인해 실제로 딸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딸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비웃고, 세상의 것만을 쫓으려는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을 말입니다. 세상의 뜻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 뜻만을 바라보며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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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어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비가 내렸습니다. 비로 인한 피해가 없기를 소망하며 우리 마음에는 은총의 비를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시길 빕니다.

복음을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얻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회당장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고 아쉬울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회당장이 타인의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엎드렸습니까?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내면과 가정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거센 돌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시련 중에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사람이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라고 한 말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높은 것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회당장은 고통을 통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분노와 슬픔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엎드려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도 말 못 할 고민이나 걱정을 지니고 있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더는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이 문제를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 고통과 고민,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당신만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도와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모두를 맡겨 드릴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와중에 시련이 연속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회당당장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매달렸고 희망을 두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접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북돋워 주십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지, 네가 지금까지 지켰던 믿음을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냐?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인간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은총의 때, 구원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회당장은 “사람들의 말”이라는 유혹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의 능력, 권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은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련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바라보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혈액암으로 고통을 받는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는데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늘 맑고 밝은 모습이라서 환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투병 중에 천일기도를 시작하셨고 물질로도 매일 일정액을 봉헌하였으며 저에게 매주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몸은 아프지만 성부, 성자, 성령님과 성모님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나의 사랑하는 딸, 테클라야! 내가 너에게 병고를 주는 것은 너를 얼마나 내가 사랑하는지 깨닫게 함이며 또 한 가지는 너의 몸과 마음을 비울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내려놓아라. 그래야 내가 네 안에 자리 잡고 너의 주인이 될 수 있단다. 이제까지는 너의 몸과 마음이 너에 의해서 움직였지만, 지금부터는 이제 내가 너의 주인 이란다.’ 그래서 이제는 저를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많이 많이 비워서, 큰 공간을 하느님이 자리 잡으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거예요, 신부님, 저의 이 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병을 통해서 얻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체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가? 두 번째는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느님이 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병의 고통을 통해 몸과 마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알아서 저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제게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답은 한가지! 제 생명을 주신 분도 한 분, 거두어 가실 분도 한 분, 우리 주 하느님뿐이시니 모든 것을 그 분 계획안에 맡기고 따르는 길 뿐임을!”이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남모르게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천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임종을 맞기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꼈고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검 앞에서는 울고불고 우왕좌왕 혼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슬픔과 무질서가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습니다. 슬픔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삶을 믿는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살 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탈리타쿰!”,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믿고 신뢰하면 이런 기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쫓아다니지만, 기적은 믿음을 지닌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육으로뿐 아니라 영으로도 살아났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고 한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적인 음식을 먹던 그는 죽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신앙인이 먹어야 할 음식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미사 참례를 더 자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히 빛내시길 바랍니다.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천상 것들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 기적을 낳고 기적을 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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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손을 내밀어요>

마르코 5,21-43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손을 내밀어요>

오롯한 믿음으로
내가 닿고픈 이에게
손을 내밀어요

너무 멀리 있어
비록 닿을 수 없어도
손을 내밀어요

손 내미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곱게 닿으니
손을 내밀어요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원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요

여린 내 손길이 무얼 할까
괜한 의심 들더라도
손을 내밀어요

마음 담은 손길만으로도
그 사람 모두 얻으니
손을 내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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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삽시다>
“믿어라, 찾아라, 나눠라”

오늘은 예수성심성월 6월의 끝날이자 제13주일이고 교황주일입니다. 해마다 한국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나 가까운 주일을 교황주일로 지냅니다. 어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이어 오늘 지내는 교황주일이 참 잘 어울립니다. 교황주일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참 자랑스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인 교황님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삽시다”에 걸맞는 참 훌륭한 교황님입니다. 가톨릭신문에 소개된 교황님의 참 특별했던 6월14일 오전 8:30에 시작하여 밤까지 이어지는 일정을 소개합니다.

이날 87세 교황은 교황청에서 전 세계에서 온 100명이 넘는 코미디언을 만났고,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인공지능의 윤리적 측면에 대해 연설했을뿐 아니라, 여러 지도자들을 독대하며 40대의 그 누구도 녹초가 될 일정을 소화하는 활력을 보였습니다. 교황이 주요 7개국 정상회담장에 들어섰을 때, 시끌법적하던 분위기가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고, 각국 정상들은 경외심으로 교황을 바라봤습니다.

교황이 연설할  때 각국의 정상들은 집중했습니다. 토론토대학교의 정치공학자이자 G7 연구소를 이끄는 존 커튼은 “교황은 특별한 셀럽”이라고 말했다. 셀럽이란 celebrity(유명인)의 줄인말로, 사전적으로는 직업상 연예인은 아니지만 큰 인지도를 얻어 이를 자산으로 살아가는 이를 뜻합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를 넘어 명실공히 세계의 정신적 대통령임을 깨닫게 됩니다. 컬럼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교황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대안을 발명해야 한다. 교황직이 날개를 펼칠수 있도록 교황직을 재해석하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배울, 희망의 표징같은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인물을 교황으로 모신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옛 성현은 이런 참사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고, 맞서야 할 만한 것에 맞서라. 그것이 참된 용기이다.”<다산>
“스스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부랑자도 무섭지만, 스스로 돌아보아 옳다면 천만 명과도 맞설 수 있다.”<맹자>

이런 대장부가 참사람이며 바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순교성인들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설교시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에게, 주님과의 만남은 참되고 적절한 파스카 체험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워졌고 새생명의 문들은 그들앞에 열렸다.”

새삼 참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있음을 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매일 만나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감으로 참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믿어라!”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생명이자 사랑이신, 희망이자 기쁨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 우리 삶의 중심과 의미가 되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이런 하느님을 믿을 때 해결됩니다. 지혜서가 이런 하느님을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제1독서 지혜서 전문을 통째로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들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정의로운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삽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셨고 당신 본성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을 그것을 맛보게 됩니다. 육신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떠난 영혼의 죽음이 문제입니다. 이게 진짜 두려워해야 할 죽음입니다. 살아있다하나 실상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을 떠난 죽은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에 속한 의로운 이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둘째, “찾아라!”입니다.
무엇을 찾습니까? 자비로운, 치유의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세상에 용서가 필요없는 사람은, 치유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죽은 딸을 살리려고 부성애를 발휘하는 회당장 야이로, 또 회당장의 죽은 딸, 그리고 열두해 하혈병을 앓던 여자 모두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정확히 최고의 명의이신 치유의 주님을 찾았고 만났습니다.

예나 이제나 죄인이자 병자인 우리가 찾을 분은 다 한 분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복음에서 치유의 구원을 베푸신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용서와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열두해 하혈병을 앓는 이에 대한 치유선언은 바로 미사에 참석하여 치유를 갈망하는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한 복음말씀입니다.

“딸아(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도대체 주님을 만남이 없이 어디서 이런 완벽한 전인적 치유를 받을 수 있을런지요! 야이로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는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이들을 향해 정신 번쩍 들게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만나 깨어 날 때 그대로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은 물론 잠시 영혼이 잠들어 죽어있는 듯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주님과 함께 깨어 일어나 부활의 삶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참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심신이 무기력하여 무너지려 할 때 즉시 “탈리타 쿰!” 하며 일어나기 바랍니다. 더불어 귀가 막혀, 입에 막혀, 잘 듣지 못하고, 잘 말하지 못한다 싶을 때는 “에파타!”외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귀를, 입을, 마음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셋째. “나눠라!”입니다.
내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께 받은 주님의 것이니 말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나눌수 없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말한마디 천량빚 갚는다는 말도 있고, 친절한 말씨, 따뜻한 마음도, 작은 미소의 사랑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나눌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래서 더불어의 공동생활을 권하는 것입니다. 만병은 혼자의 외롭고 쓸쓸한 삶에서 시작됩니다. 서로 같은 처지의 아픔을 나누는 동병상련의 나눔도 힘이 됩니다. 얼마전 작고한 민중시인 신경림의 시 ‘파장’ 첫 부분은 저절로 미소짓게 합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친구같은 얼굴들”

그러나 나눔의 절정은, 나눔의 진수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교회가, 즉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니아 교회가 보여줍니다. 이 교회를 극찬하는 바오로의 나눔에 대한 가르침은 그대로 주님의 마음과 일치합니다. 참 깊고 아름다운 내용이라 제2독서 코린토 후서 말씀을 전부인용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인지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자 가난해 지신 주님을 본받는다면 우리 역시 자발적으로 나눔으로 비움의 가난을 택할 것이요, 이 가난은 곧 부요로 바뀔 것입니다. 나눔의 비움으로 풍요로워지는 내외적삶입니다. 마지막 말씀도 참 나눔의 영성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말그대로 자발적 ‘억강부약(抑强扶弱) 대동세상(大同世上)’의 실현입니다. 즉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의 실현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이도 합니다.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원하십니까?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의 것을 나누십시오. 이렇게 살 때 주님을 닮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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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건강하게 살려면>

영성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사는 것이고 영성 생활을 잘하면 건강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셨지 죽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실로 창세기에서 모든 생명은 생기라는 하느님 명령대로 생겨난 존재들입니다.

한자어에서도 생명은 생기라는 명령(命令)대로 생겨났다고 해서 생명(生命)이고, 실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順命)하지 않은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령대로 순명하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 따라 얘기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듯이 진리의 길과 생명의 길을 따라 살면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 얘기하듯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진리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죽었던 소녀는 일어나라는 명령대로 살아납니다. 이렇듯 살아나는 존재는 명령에 순명하는 존재이고, 살아나게 하는 존재들은 소녀의 부모처럼
주님을 믿고 생명을 간청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녀의 이웃들처럼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믿지 않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녀의 부모만큼 소녀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이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 비웃는 자들이 오늘 지혜서가 말하는 “죽음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죽음에 속한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지혜서가 말하듯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그러므로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속한 자들은 하느님 생명에서 탈출한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에서 탈출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에 속하는 것입니다.

빛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어둠이듯 물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고기에게는 죽음이듯 하느님의 생명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바로 죽음입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조금 다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육신만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을 성자의 모습과 성령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반쪽만 삽니다. 육신 곧 몸뚱이만 살고 영성을 살지 않습니다.

영성이란 성령(Holy Spirit)을 사는 것이고 정신(spirit)을 사는 것인데, 프란치스칸은 프란치스칸 정신(Franciscan spirit)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창세기를 보면 명령대로 곧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것으로 부족하셨는지 2장에서 다시 인간을 창조하시는데 이번에는 흙으로 당신과 비슷하게 만드신 다음 그의 코에 당신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말의 목숨은 이렇게 한자어의 생명과 달리 목에 숨이 들락날락하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이 우리 목을 들락날락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이 우리 목에서 끊어질 때 우리 목숨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성을 산다는 것은 성령을 사는 것이고, 성령을 살 때 우린 육신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 모두 생명을 살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죽음에 속한 자 될 것인가? 생명에 속한 자 될 것인가?
그 선택이 앞에 놓인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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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5,41)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오늘 복음(마르 5,21-43)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간곡히 청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예수님께서 이 간곡한 청(믿음)을 들어주시어, 병으로 죽은 열두 살 소녀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리고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믿음,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하는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ㄴ)

‘믿음을 통한 구원!’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과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고 있었던 여자의 믿음,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었고, 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제1대 교황이신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현재 교황은 2013년에 즉위하신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교황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기도합시다! 또한 교황님의 사목 활동을 돕기 위한 특별 헌금(2차 헌금)에도 적극 참여합시다!

그리고 나의 구원,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매순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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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lECURAUET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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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 41)

오늘 복음은
소녀의 성장을
보여줍니다.

너무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잘 모르는
자녀들
교육입니다.

고민은 없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질책과 훈계만
있을 뿐입니다.

부모의 틀에
우리 자녀를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성장의
여정입니다.

아프지 않고
성장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없습니다.

아픔 앞에서
비로소
깨닫는
우리들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의
손끝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소녀를
키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소녀의
시간입니다.

소녀는
소녀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합니다.

재촉하지 않는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소녀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부모가
소녀를 제대로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엄마 아빠는
그냥 되지
않습니다.

쓴맛과 단맛을
구분하며
가정의 역사는
자라납니다.

함께하는
생활 속에
성장이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에만
부응하는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자녀들이길
바라십니다.

고마운
일상 안에
사랑스러운
우리 자녀들이
있습니다.

함께하는
식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단순한 사랑의
진리를 놓치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 자녀들과
무엇을 나누려
하는지요.

가장 기본적인
식사를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눈을
기쁘게 바라보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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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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