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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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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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 나라는 ‘지금’ 우리가 겪는 수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장소이며, ‘여기’에서 마주하는 현실보다는 더 좋은 새로운 차원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하느님 나라와 우리가 생각하는 그곳은 다른 본질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하느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로 비유됩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전제할 것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행위와 잠을 자는 기다림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홀로 완성하시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돕고 노력하고, 동시에 기다리며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다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성장하고 나면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게 됩니다. 작아서 그 시작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씨앗이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냥 버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고, 그래서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작은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됩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임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무수히 기도해 왔지요.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나요?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뿌리는 노력과 잠을 자는 동안 기다릴 줄 아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지닌 모습이 겨자씨보다 작은 모습일지라도,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희망을 이루어 드릴 차례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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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정말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가 믿음을 가지고 행할 때 그를 통하여 위대한 믿음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삶을 살때 변화를 체험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우리는 주님에게 어떤 기도를 하며 지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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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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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에제키엘 예언자는 바빌론의 유배 생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이스라엘에 심어 큰 나무가 된다고 전합니다. 예언자는 온갖 새들과 날짐승이 깃드는 훌륭한 나무가 된다고 말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재건을 선포합니다. 시든 나무를 무성하게 하시는 하느님, 낮춘 마음을 드높이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에제키엘의 향백나무 새싹처럼, 겨자씨도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쉴 수 있는 나무가 됩니다. 사도들의 공동체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미약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공동체는 많은 민족을 구원하는 교회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온 세상에 퍼져 커다란 나무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확장되는 것을 이 세상의 권력이나 박해로 막을 수 없습니다. 연약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 안에서 보호받고 성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거저 주십니다. 그 씨앗은 기도와 성체의 영양분으로 싹이 트고 자라납니다.
우리의 믿음은 작은 것에서 출발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점점 커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성장하며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대전에서 우리의 행위에 대해 심판받습니다. 곡식이 익으면 낫을 대어 수확하듯이, 우리는 죽은 뒤 이 세상에서 맺은 열매를 하느님께 셈 바쳐야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890
6월16일[연중 제1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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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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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f6oOg7q6dU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태안 내리공동체 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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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없는 풍요로움과 가능성, 확장성을 지닌 하느님 나라!>
그 누구도 다녀와 본 적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댑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떠들어 대다가도 가끔씩 걱정이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며 코끼리의 생김새는 큰 기둥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전혀 아닌 이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는 가끔 전례나 그레고리안 성가에 충실한 큰 수녀원 본원 미사, 그것도 부활 성야 미사 같은 큰 미사를 봉헌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아 그래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보곤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 성녀들, 천사들이 모두 좌정해 계시는 곳, 그리고 한쪽 일반석에는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
그럼 거기서는 뭘하는가? 마치 부활 성야 미사때처럼 제1독서, 화답성가, 제 2독서, 화답성가…알렐루야, 복음 낭독, 명강론, 성찬의 전례…등등 거룩한 예식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곳.
그래서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돈이나 세상 좋은 것들에만 오르지 함몰되어 살아왔지 미사나 전례에는 완전 뒷전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곳, 그 자체로 생지옥이요 연옥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슬쩍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은 한없는 풍요로움과 확장성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이 어떤 씨앗보다더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더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일 것입니다. 쥐꼬리보다 작은 우리의 선행, 너무나 미흡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 우리가 베풀었던 손톱만한 이웃사랑이 깜짝 놀랄 만큼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곳, 넉넉함과 풍요로움, 기쁨과 감사, 대견함과 환희로 가득 찬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세파에 닳고,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고, 갖가지 상처와 죄로 얼룩진 우리가 그 오랜 짐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영혼으로 거듭나는 곳이 ‘하늘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이상 슬픔도, 눈물도, 상처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곳, 오로지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은총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그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 과오와 실수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언젠가, 먼 훗날에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서도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된 충만함 속에 사는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서로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북돋와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성장을 위해 꾸준히 땀 흘리는 우리 각자의 현실이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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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nmJi6t6a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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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전에 ‘광야’가 존재하는 이유>
도입: 하느님 나라는 왜 한 번에 오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지옥과 같은 이집트를 탈출하였을 때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왜 꼭 광야라는 시험의 장소를 거치게 하셨을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이 그 해답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는 두 비유가 하나의 짝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는 땅에 뿌린 씨가 뿌린 자신도 모르게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에 이른다.’라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많은 새들이 깃들여 쉴 수 있는 휴식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구약성경 구절이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서(17,22-24)입니다. 하느님은 손수 향백나무의 가장 연한 가지 하나를 꺾어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됩니다. 그 열매란 이것입니다.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3) 만약 하늘 나라가 우리 노력으로 이뤄진다면 어떨까요? 인간은 교만해질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뤄져야 더 감사할 줄 압니다. 아기가 모든 이치를 깨달아서 자기 노력으로 두 발로 걷고 지식을 습득하여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면 그만큼 부모에게 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행복하게 하시지 않고 광야의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행복해지면 행복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아들과 함께 노숙자로 살다가 백만장자로 자수성가한 크리스 가드너의
실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홀어머니에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버리고 도망가버려서 어머니 혼자 크리스를 키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크리스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화장실에서 자면서도 결국 투자관리자로 큰 회사에 들어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힘들게 살았고 위로 올라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은 행복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16세 때 교통사고로 두 팔을 잃은 슈레아 시나다가우더의 사연은 큰 감동을 줍니다. 그는 다행히도 크고 털이 많은 검은 남자의 두 팔을 기증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자 그 팔이 여성의 팔로 변해갔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저 스스로 매우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만약 그녀가 처음부터 팔을 잃지 않았다면 팔에 대한 감사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화 《베테랑》을 생각해 봅시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재벌 3세 조태호는 자신이 누리는 재산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더 많은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만족합니다.미국의 어떤 재벌들은 돈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노력해서 성공하는 행복의 기회를 빼앗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없었던 적이 없다면 그 고통을 알지 못하기에 연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조태호는 가난한 자의 고통 앞에서 “어이가 없네!”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고통을 알아야 진정으로 상대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고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휴식 같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어떻게 27년을 감옥에서 버틸 수 있었느냐고 할 때, “나는 버틴 게 아닙니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고 포기하지 말라고 연설했던 덴젤 워싱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늘 나라를 믿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성모님은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버티다가 엘리사벳을 통해 참 행복을 맛봅니다.
저는 연옥에 안 가는 기도를 압니다.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12년 동안 바치면 됩니다. 처음 바칠 땐 저도 긴가민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행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12년 동안 바치고 난 뒤에 느끼는 하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면 알려줄 수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면서 천사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먼저 믿고 버티는 광야를 거치지 못하면 행복을 알 수도 없고 행복을 전해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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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의 주식은 ‘쌀’입니다. 쌀로 밥도 하고, 쌀로 떡도 하고, 쌀로 국수도 만들고, 쌀로 막걸리도 만듭니다. 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들의 땀과 눈물이 알알이 익어가는 것이 쌀입니다. 봄이 되면 농부는 논에 물을 받습니다. 모판에 키운 어린 벼를 논에 옮겨 심습니다. 이것이 ‘모내기’입니다. 벼를 너무 얕게 심으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물에 둥둥 뜨게 됩니다. 그런 벼는 열매 맺지 못합니다. 벼를 너무 깊게 심으면 숨이 막혀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벼를 ‘적당한’ 깊이에 심어야 합니다. 쌀을 나타내는 한자는 미(米)입니다. 이는 농부가 88번을 수고해야 비로소 알곡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르신들은 ‘밥은 곧 하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은 ‘쌀가게’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마트에 가서 쌀을 쉽게 살 수 있지만, 그때는 쌀가게에서만 쌀을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과제를 주곤 했습니다. 쌀에 있는 작은 돌이나, 도정이 안 된 벼를 골라내는 겁니다. 그렇게 골라내면 아버지는 십 원을 주셨습니다.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는 울타리가 되어서 신학생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는 신학생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양성하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88번의 수고와 땀을 흘려 알곡을 생산하듯이, 신학교는 10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합니다. 2학년을 마치면 군에 입대합니다. 4학년이 되면 ‘독서직’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소임이 주어집니다. 이때부터 사제의 복장인 ‘수단’을 입습니다. 5학년이 되면 ‘시종직’을 받습니다. 제단에서 봉사할 수 있는 소임이 주어집니다. 시종직을 받으면 성체분배를 할 수 있습니다. 1989년에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여의도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시종직을 받은 저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 7학년이 되면 ‘부제품’을 받습니다. 부제가 되면 성직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아닌 ‘품’을 받습니다.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으며, 세례성사도 줄 수 있습니다. 혼인예식도 거행할 수 있고, 장례 절차의 여러 예식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와 관련해서 축복예식도 할 수 있으며, 봉성체와 성체 강복 등도 할 수 있습니다. 7학년을 마치면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가 되면 못자리인 신학교를 떠나서 사제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기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고 하듯이, 한 명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1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토, 국민, 정부’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길가에, 자갈밭에,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도록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큰 집과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지금 굶주린 사람입니다. 지금 아픈 사람입니다. 지금 갇힌 사람입니다. 지금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물에 건져진 것 중에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양식이 되는 것만 가져온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밀밭에 함께 자라는 가라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밀은 모아 곳간에 넣어놓고, 가라지는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잘못한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우리는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밀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판별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작지만 발효가 되면 커지는 누룩처럼 하느님의 나라도 비록 그 시작은 미소할지라도, 그 끝은 창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겨자씨가 비록 작지만 그것이 땅에 뿌려져서 자라면 많은 새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에는 우리가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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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26-34: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역사 속에 완전히 자유롭게 이루신다. 당신 자신이 역사의 결정적 요소, “처음과 마지막”(묵시 1,17; 이사 44,6; 48,12)이심을 알게 하신다. 에제키엘서에서 말하는 향(백)나무의 햇순과 크게 자라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가 될 향(백)나무의 비유는, 메시아 왕국은 그 “보잘것없음”에서 성장하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으로 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32절) 되는 큰 나무가 된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27절) 이 말씀은 씨앗이 그 자체 내에 품고 있는 내적 생명력과 또 씨앗을 품어 이삭이 패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땅에서 얻는 내적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씨 뿌리는 사람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때부터 수확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야 한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29절) 이렇게 지어진 농사에서 농부의 기쁨은 땀과 보살핌으로 맺어진 결실을 거두어들이려 낫을 댈 때 나타난다. 그때 그는 자기의 기다림과 희망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되며,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자생적 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보상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31절) 그러나 일단 땅에 심어지면 씨앗이 가지고 있는 생장력과 생명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본다. 그리하여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32절) 하느님의 나라도 시작과 성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적 성장뿐 아니라, 지리적 확장까지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체험 자체였으며, 그분의 자화상이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배척하였다. 그분의 말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성금요일에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말라빠진 십자가 나무는 온 땅을 뒤덮는 큰 “나무”가 되어 더위와 피로에 지친 사람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운 원기와 희망을 주었다. 하느님 나라는 시작할 때 보잘것없이 초라하지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모습은 모든 인류의 역사를 충만한 정의와 자유로 인도할 만큼 위대한 것이다. 시작은 항상 보잘것없고, 소박하지만 그 성장은 마지막 상황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겸손하게 하느님의 능력에 신뢰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한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3,6-7) 생명과 성장의 신비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심거나 물을 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도 자라게 하실 수 없다. 항상 올바른 응답을 하느님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선권을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해도 개인적인 책임은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2코린 5,9) 쓰는 것임을 확신하면서 그 자신의 ‘원의’를 새롭게 표현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매일의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우리에게 합당한 상급을 주실 수 있도록(2코린 5,10)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추수 때 구원의 성대한 축제가 영원한 기쁨 속에서 거행될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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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나면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작은 씨가 어떻게 큰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작은 겨자씨가 뿌려진다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행하는 작은 실천을 떠올리게 합니다. 환경 보호를 위한 작은 실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작은 자선, 이웃을 위하여 실천하는 작은 선행,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참여하는 투표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크게 소용이 없어 보이지만,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씨앗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자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고 나무가 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는 작은 실천들도 어떤 방식으로 자라나는지 모르지만, 그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작은 실천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작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일이 소용없다고 여기며, 소비 주의나 이기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무기력하게 살아갈지, 그러지 않으면 그 흐름에 맞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선택하고 살아갈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 흐름을 거스르는 실천 하나가, 작지만 위대한 선택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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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