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5장,9-17절;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신앙과 말씀

(강론: 13:00 ~ 19:09)

강론

사랑할 수 없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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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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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랑은 말이나 혀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1요한 3,18 참조)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랑은 수동적이지 않고, 매우 역동적이며 능동적입니다. 어떤 이가 사랑을 얻기 위한 기도만을 부지런히 하며 정작 실천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탁상공론일 따름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충분하다 해도 남을 돕는 데 인색하고 더 가지려고만 하는 탐욕스러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참생명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당신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고,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참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려면 우리는 ‘혀’와 ‘배’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곧 혀로 교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유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탐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를 잘못 사용하여 애덕을 거스르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며, 또한 애덕의 실천을 부풀려 자랑함으로써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채우려는 탐욕은 마치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음식을 먹어 치우며, 남의 것마저 가로채서 배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은 우리에게 교만과 탐욕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치르는 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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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머물러 있는지 묵상해봅니다. 주님의 기쁨이/사랑이 내게 머무르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머무리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주님의 자녀로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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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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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려 해도 그가 한 일이 떠올라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행실을 고치고, 더불어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을 풀어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용서하고 싶어도, 기회를 놓치고 그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나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나에게 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 위함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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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정성을 다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지 않은 선물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왠지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값진 선물을 하게 되면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하게 되면, 그 선물에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리도록 고맙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 펄쩍 뛰던 베드로를 왜 사탄이라고까지 꾸짖으셨는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을 뜻하는 그리스 말 ‘둘로스’는, 사실 성경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주님의 종으로 불린 것처럼 오히려 종은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칭호이기도 합니다. 동방이나 로마 제국에서도 종은 사적 공간인 임금의 침전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로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보다도 더 가까운 당신의 벗,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친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에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간이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가 자기 장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다고 할 때, 부모님이 자녀의 애틋한 사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듯이, 예수님의 친구, 벗인 우리는 친구인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848
5월5일[부할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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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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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66hWiBGHio
[서울대교구 오석준 레오(생명위원회 사무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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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각자와 친구 맺기를 신청하시는 예수님!>

저희 집 근처에 저희 공동체와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들의 집이 있습니다. 피정 센터 큰 행사 때도 초대하고, 여름 겨울 캠프 때는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마음껏 뛰고 즐기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희 할아버지들은 그저 마음이 흐뭇할 뿐입니다.

한번은 거룩한 부활 성야 미사 때였습니다. 막내가 꽤 만만치 않았는데, 그 긴 전례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주례하는 저는 하나도 괴롭거나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 존재 자체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저희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똑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리저리 좌충우돌하고,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고, 그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로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아무리 큰 허물과 상처투성이어도, 하느님께서는 그저 넉넉한 미소와 너그러운 가슴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 맺기를 신청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는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 중의 친구, 진정한 친구, 절친을 의미합니다. 절친의 의미에 대해서 과거 인디언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절대로 그냥 맺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함을 통해 진정한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함을 통해 우정은 깊어갑니다.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이의 모든 벽이 허물어집니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됩니다.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 강점, 경쟁력, 건강 등등 긍정적인 측면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 고통과 결핍, 실패와 좌절까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물의 창조주, 자비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부당한 죄인, 결핍투성이인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십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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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RkXgV1rW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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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 하나는?>

사람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관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계는 왜 안 될까요? 나의 교만을 누군가가 꺾어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관계에 있어서는 무능력자가 되고 그 때문에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57세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초4 아들’ 편에서 아이는 “난 왜 이렇게 나쁘게 태어났을까? 난 왜 태어나서 고통받을까?”라는 생각을 글로 썼습니다. 자기의 교만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찌검하는데도 엄마는 아이를 믿어주고 공감해주려고만 합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를 훈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방송국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호전됩니다.

엄마는 아이를 키울 때 아빠 없이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빠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아빠도 또 누군가에게 의존합니다.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가 실천됩니다. 가지가 가지인 줄 알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 이 사람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포도나무 비유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께 붙어있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의 『하늘 아래 첫 동네: 말기 암 환자 호스피스 사목일기』에서 ‘정을 떼려고’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넉 달 전 초등 5학년 아들, 3학년 딸을 둔 아빠가 간암 치료 불가 판정받았습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무료 호스피스 시설인 성모 꽃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끝까지 남편 노릇, 아빠 노릇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자살 시도까지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다시 살아보기로 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술 때문에 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환자의 여동생으로부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가 100만 원을 주며 착한 일 한 번 안 해 봐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맡겼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시누이에게 그 돈을 준 것에 서운해했지만, 아내에게 주었다면 분명 자식을 위해 쓸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그렇게 한 것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편은 자기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며 하느님께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환자는 이것으로 무언가 큰 숙제를 끝냈다고 느끼고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자기 능력만으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자기가 나무가 아니라 ‘가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더 보이’(2019)는 슈퍼맨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자녀가 없었던 한 부부는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웁니다. 아이는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짜 ‘슈퍼맨’은 자기 아버지가 이 지구를 지키라는 사명으로 자기를 지구에 보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준 힘과 지식을 배웁니다. 그렇게 지구인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 명령에서 도망칩니다. 그 결과 큰 물고기 배 속에 갇히고 맙니다. 빛에서 도망치면 어둠뿐입니다. 사랑의 계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저절로 지옥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인 줄 모르고 나무인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께 붙어있게 하시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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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파티마와 루르드에서 매일 ‘묵주기도와 행렬’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오기 때문에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성지에서는 순례자들에게 신청을 받아서 묵주기도를 진행합니다. 이번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도 루르드에서도 ‘한국말’로 묵주기도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파티마에서는 영광의 신비 4단을 하였고, 루르드에서는 환희의 신비 2단을 하였습니다. 시작은 한국어로 하지만 후렴은 모두 자신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체험으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계층과 세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 주신다.” 그렇습니다. 선한 마음이 있으면 진흙탕 속에서도 예쁜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악한 마음이 있으면 예쁜 장미 밭에도 가시가 돋기 마련입니다. 성모님의 전구함으로 가정과 본당에 사랑의 꽃이 활짝 피면 좋겠습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을 지내면서 지난 5주 동안 있었던 복음 말씀의 주제를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부활 제1 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무덤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갈망을 아셨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저의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주권을 신청했고, 2년 전에 나왔습니다. 주교님께 보고를 드렸고, 주교님께서는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미사에 함께 하는 것도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토마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아야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만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검증과 사실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음과 신비의 차원입니다. 제가 지난 2월 14일에 이곳에 왔을 때, 여러분은 제게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스 교구와 서울대교구에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제가 선하게 생겨서 일수도 있습니다.)

부활 제3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안토니오 가우디가 시작한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탄생의 문과 고통의 문이 있습니다. 이제 곧 영광의 문이 완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문 정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 대신 ‘성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성경에 다 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경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려 주셨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시편 126장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목자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는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한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소경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방인 여인과 백인대장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싱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서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세탁기도, 냉장고도, 텔레비전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도 구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심단체들도 본당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사목회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 관계의 중심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미사입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오늘 성서말씀을 미리 읽고 오셨거나 귀담아 들었다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성서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온갖 심오한 진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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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9-17: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오늘의 주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하는 형제적 사랑이다. 그 근거는 요한에 의한 서간에 있다. 하느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데 있어서 어떤 차별을 두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사도행전은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 모상을 닮았으므로 사랑의 모상이다. 이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는 삼위 일체적 삶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다(1요한 4,7).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사랑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다. 이 사랑의 계명은 주님의 “명령”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지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생활을 한다. 그것이 신앙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신(8절)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의 복음은 지난 주일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결속과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을 산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비록 떠나시지만, 사랑으로 가지와 포도나무처럼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란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은 은총이다. 이 기쁨은 우리 신앙인 모두가 언제나 간직해야 할 기쁨이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있다. 그 기쁨을 가지려면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사랑하면서 가질 수 있기에 우리는 계속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이길 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이라 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그분의 친구가 되어 친교를 가질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말씀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자녀로 만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열매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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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사랑은 너무나 막연하고 다양하며 개별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라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한 것처럼’이라는 예를 들어 알려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랑은 ‘아버지께서 하신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제2독서는 그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이고, 이를 위하여 당신의 소중한 존재를 ‘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랑은 ‘무상성’이라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래서 이 사랑의 수혜자인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리게 됩니다.

친구라고 해서 언제나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내주는 사랑이 아니면 사랑은 늘 의심스럽거나 불충분하고, 타인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사랑은 언제나 외롭고 두렵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묻지 마 범죄’가 일어나고, 사회적 고립과 소외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요즘의 현실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오늘 복음이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거저 내주고 상대를 살리려는 진심에 충실할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의 사랑이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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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9-13)

1) 이 말씀을 뜻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면(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법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가 나의 계명이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말씀과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고, ‘기쁨의 충만’은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해서, “사랑하신 것처럼”은 “사랑하시는 것처럼”으로, “사랑하였다.”는 “사랑하고 있다.”로, 또 “사랑한 것처럼”은 “사랑하는 것처럼”으로 조금 바꾸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항상 ‘현재 진행 중인 사랑’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하시는 일’입니다. 번역문의 표현만 보면 ‘과거의 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현재의 일’입니다.>

2) 요한 사도는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요한 사도는 “궁핍한 형제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일의 구체적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을 수가 있나?”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은, 받는 쪽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나누어 받는 것과 같습니다.

3) 사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형제들(친구들, 이웃들)을 위해서 죽으라는 뜻은 아니고, 목숨을 나누어 주듯이 ‘모든 것’을 나누어 주라는 뜻입니다. 그 ‘나눔’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분명히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큰 사랑’인데, 예수님 혼자서 죽고 끝나버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력을 나누어 준 일이고, 예수님과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살기 위한 일이었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은, 함께 살기 위해서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그 사람 혼자만의 희생으로 끝나버리는 일이 아니라……

4) 요한 사도의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는 말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진실하게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하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야고보서 2장’에 있는 다음 말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아프면 병원에 가지 왜 그렇게 누워만 있는가?”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아파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업고 병원에 갈 것입니다.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고, 진짜 사랑입니다. 실제로 아파서 누워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기쁨’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되는 생명, 구원, 행복, 평화 등을 총체적으로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하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구원받고 싶으면 사랑을 실천하여라.”인데, 가르치는 예수님 입장에서는 ‘서로’ 라고 표현하셨지만, 실천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 실천’은 ‘나부터’ 해야 하는 일이고, 남이 안 하더라도, ‘나 혼자서라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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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한병학 마태오 신부님]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어느 식당에 4대가 모여서 식사를 했습니다. 90대 증조할아버지, 60대 할아버지, 30대 아빠, 3살 난 아들 이렇게 4대가 모인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3살 난 아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식당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그 아들을 보고 30대 아빠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 아들을 냉큼 데리고 와서 앉히며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어디서 못된 버릇을! 가만히 앉아 있어!”

이것을 보고 60대 할아버지는 30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 너무 기죽이지 마라. 다 그러면서 크는 거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90대 증조할아버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씨~익 웃었습니다. 자기 자식들이 뭘 해도 예뻐 보였기 때문입니다.

뛰어다니는 3살 난 증손자도, 그 증손자를 다그치는 30대 손자도, 그 손자에게 잔소리하는 60대 아들도 그냥 예뻐 보이고 그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축복하는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지금 목포가톨릭대학교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제가 가르치는 과목은 학생들에게 어렵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해서, 가끔 몇몇 학생들은 힘들다고 토로하고 또 몇몇은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해대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피식 웃음이 납니다. 그 이야기들 안에는 ‘저희 좀 봐주세요’라는 투정과 ‘이렇게 하면 인기짱 교수님이 되실 거에요’라는 훈수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몇몇 잔소리들은 당돌하고 마음에도 거슬리지만, 그 밑바탕에 흐르는 메시지는 예외 없이 긍정적입니다. 결국 ‘나 좀 봐 달라’거나 또는 ‘너 잘 돼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들의 말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들린다면 당연히 그들이 예뻐 보일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저도 발작 버튼이 눌러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말마디는 제 자존심을 긁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의 표정은 꼭 어린 시절 “이게 다 네 잘못이야” 하고 다그치는 부모님의 표정처럼 저를 위축되게 합니다. 이때 제게 필요한 것은 제 잘잘못을 떠나 저를 단지 예쁘게 바라봐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운 좋게 누군가 혹은 예수님이 저를 예쁘게 보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때면, 저는 아픔을 털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깨닫습니다. 저는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더 나은 사람’으로 되어가는 데에 저는 다른 이들의 사랑과 또 예수님의 사랑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 그것은 그분의 따뜻하고 애정 어린 마음 안에 머무른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애정 어린 마음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뭘 해도 예뻐 보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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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형천 미카엘 신부님]

최후의 만찬에서 남겨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일상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교무실 자리 건너편에는 안전생활부장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생들의 갈등이나 일탈을 담당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학생주임이라고 불리던 그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편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갈등과 일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선생님의 한숨은 실패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상합니다.

본당 사목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공정과 정의이겠으나, 반대편에서는 배제이고 편애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신자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계명에다 묵상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싶습니다. 도리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질문은 예수님이나 요한 복음사가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요한은 노년을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순교했고, 그는 홀로 세상에 남아 주님에 대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시간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질문을 하던 청년 요한은, 이제 유일한 사도로서 답해야 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대답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렇게 매 순간 사랑을 고민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님과 제자들, 사랑의 사도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시도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실패할 일이라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계명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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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양해룡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저는 지구장이 되고 난 후, 본당 사제일 때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신앙인들을 바라보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명령을 신앙인들이 어떻게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관계의 대상은 배우자일 것이고, 다음은 자녀이며, 마지막으로는 부모님일 것입니다. 과연 배우자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 것처럼 지금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다소 회의적으로 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거침없는 말투로 대하고, 때론 화해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 상처가 마음속 깊이 남아 결혼을 후회하는 마음이 몰려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커가면서 부모와는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고, 세대와 문화 차이가 점점 더 벌어져 아예 대화가 불가능한 한계점까지 도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 대한 존경과 공감이 점점 사라지고, ‘효’라는 도리가 우리와는 멀어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도 요원하게 됩니다. 관계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가 과연 어떻게 이 관계를 잘 맺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는 관계를 위해 가장 우선시해야 할 점이 주님의 사랑을 언제나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은 “머물러라”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입술로 바치는 기도 외에도 감성적이고 공감하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성체조배일 수도, 시간 전례(성무일도), 혹은 묵주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으로든 시간을 내서 그분의 사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관계가 좋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모든 관계를 정리한다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많은 관계에서 오는 미움이 기쁨으로, 나아가 사랑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어떤 적대적 마음도, 미움도 사라지게 되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요한 15,13)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부활 제6주일에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 때문에 아파하지 말고,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러면 이웃 간의 관계를 넘어 부활의 감동이 우리 삶 속에 더욱 넘쳐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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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에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재미있는 것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놀지 않습니다. 사실 미사 때에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어떤 청소년의 경우 미사 내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더군요. 본당 로비에 앉아 열심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청소년에게 “만약 스마트폰이 없으면 어떨겠니?”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절대 안 돼요.”

캠프에 가서 스마트폰을 반납해야 한다면 캠프 자체를 가지 않겠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스마트폰이 그리 대단한 것같지 않은데 여기에 목숨 걸듯이 하는 모습에서 걱정도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모습에 대해 내면을 향하기보다는 다른 방향이나 외부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은 전혀 보지 않고 외부에만 관심을 두는모습에서 참 행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 평화, 믿음, 희망.. 모두 내면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면이 튼튼해질 때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내면보다는 보이는 외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워야 행복한 것처럼 말합니다. 커다란 착각입니다. 외적인 것에 대한 만족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그 충분한 액수에 도달하면 더 깊고 싶어 합니다. 스마트폰도 한 시간만 하면 충분할것 같지만, 한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이 너무 짧다고 말합니다.

내면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천하기 힘들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받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

우리의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사랑. 그 사랑은 받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사랑해야만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행동하는 사랑을 통해 진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내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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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다>

오래전 일입니다. 노인 요양원에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앞을 못 보시니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가 없으셔서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께서 그 방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 방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외부 출입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반신이 없는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통해 혼자서 휠체어를 굴리기 힘들어하는 불편을 이겨내게 되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위한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일생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말 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에게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얻어야 합니다. 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은“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주시며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셨고, 당신의 친구로 사랑하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은 주님을 닮은 사랑으로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끼고 혹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아직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곤란에 처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작은 배려와 희생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말로나 혀로 사랑하지 않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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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벗입니다>

요한 15,9-17 (나는 참포도나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는 벗입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당신께서 나를 바라보시듯
나 당신을 바라보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부르시듯
나 당신을 부르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아시듯
나 당신을 아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내게 주시듯
나 당신께 드리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믿으시듯
나 당신을 믿으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내게 바라시듯
나 당신께 바라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나 당신을 사랑하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위해 사시듯
나 당신을 위해 사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듯
나 당신을 위해 죽으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 내가 기쁨이듯
내게 당신이 기쁨이시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내 안에 계시듯
나 당신 안에 있으니
우리는 벗입니다

당신께서 나와 하나이시듯
나 당신과 하나이니
우리는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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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영어로 하면 “God is Love”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사람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사랑인 것입니다. 무지도 탐욕도 허무도 아닌 사랑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사랑의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살아있을 때 사랑이요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사랑하라 주어진 인생이요, 세상 마칠 때의 마지막 아쉬움도 단 하나 더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일 것입니다. 늦게서야 후회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사랑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자매가 들려준 남편의 임종어도 잊지 못합니다.

1.미안하다.
2.고맙다.
3.사랑한다.

우리가 마지막 임종시 주님께 고백할 말마디 셋도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일 것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고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이요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도대체 우리 일상생활에서 사랑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을 숨쉬며 사랑 안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히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사랑도 보고 배웁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말씀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보고 배우라 하십니다. 참 황송하게도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그러니 서로간의 깊어지는 사랑과 더불어 친구인 주님과의 우정도 깊어짐을 깨닫습니다. 복음 말미에서도 주님은 못을 박듯이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혼자서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사랑의 갈망이 있습니다. 사랑은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는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내적자세가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 다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말도 있듯이 다 아는 사랑같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평생 사랑한다 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참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함께 사랑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1.사랑은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바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사랑의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그 좋으신 분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미사의 힘, 주님의 힘, 사랑의 힘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2.사랑은 생명입니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할수록 예뻐지는 얼굴이요 사랑할수록 활기넘치는 삶이니 사랑은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신록의 푸르른 생명으로,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는 성모성월 5월입니다.

또 오늘은 고맙게도 생명주일이자 5월5일 어린이날입니다. 대체 공휴일로 내일 쉬지만 오늘 어린이날, 나이에 상관없이 마음은 어린이입니다. 또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어린이입니다. 다함께 생명의 사랑으로 여러분 전 존재를 가득 채우는 마음으로 다음 어린이날 노래를 불러봅시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3.사랑은 선택입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사랑뿐 아니라 모두가 선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선택으로 이뤄진 우리의 평생 삶입니다. 행복도 선택이요 기쁨도 선택이요 믿음도 생명도 희망도 선택입니다. 참으로 좋은 선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하고 절망하면 불행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좋은 선택할 기회는 무궁무진 활짝 열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선택하신 예수님 말씀을 들어 보세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은 것이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를 뽑아 선택하신 주님께 사랑의 열매로 응답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 정말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오늘 사랑의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오늘 참 좋은 선택을 하신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미사은총이 우리의 사랑의 열매가 참 자라게 할 것입니다.

4.사랑은 배움입니다.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배우지 않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배움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는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워야 할 스승은 주변에 무궁무진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보고 배워야 할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이런 사랑은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 순수한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집착없는 초연한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 있는 그대로 예뻐하는 사랑, 주는 사랑, 돌보는 사랑, 나누는 사랑, 섬기는 사랑이 바로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주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요즘 파스카의 계절이자 성모성월인 5월은 온통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신록의 아름다움에 꽃도 많고 새도 많습니다. 예전 꽃을 들고 온 자매에게 준 덕담의 시를 생각하면 저절로 유쾌해집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예쁨의 비결은 사랑뿐입니다. 사랑하여 웃는 얼굴은 꽃보다 더 예쁩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부작용 없는 화장품도, 성형수술도 없습니다.

5.사랑은 발견입니다.
사랑은 발견이자 깨달음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사랑의 선물인데 사랑을 옆에 놔두고 눈이 가려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만이 아닙니다. 행복도, 감사도, 기쁨도 옆에 놔두고 몰라서 보지 못해 참 어리석게도 어처구니 없게도 불행하게, 불평하며, 슬프게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마음의 눈이 열려 공평무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깨달은 베드로의 고백이 참 신선합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새삼 우리 삶은 부단히 눈이 열려 “아, 그렇구나!” 깨달아가는 깨달음의 여정, 발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과 더불어 이해지평도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무지에서 벗어나 날로 자유롭고 순수한 사람이 됩니다.

6.사랑은 훈련입니다.
사랑의 선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 역시 부단한 영적훈련을 필요로합니다. 연주가들, 화가들, 운동선수들이 바로 훈련이 모범입니다. 사랑의 선택에 이어 마음을 담아 의식적 훈련에 이은 습관화입니다.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이 덕이 되고 좋은 인생을 이뤄줍니다. 나이 먹으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삽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합니다. 오죽하면 사람을 고쳐쓸 수 없다 말하는지요! 굳어진 습관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거의 대부분 살아온 대로 삽니다.

그러니 좋은 습관의 형성은,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화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사랑의 훈련과 습관은 날마다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전례공동기도입니다. 날마다 침묵, 경청, 찬미, 감사, 기도, 노동, 겸손, 성독, 회개, 순종등 무수한 사랑의 수행도 참 좋은 영적훈련이 됩니다.

7.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개방도 능력입니다. 다 똑같은 사랑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인의 사랑과 범인의 사랑의 깊이와 능력은 다를 수 뿐이 없습니다. 시냇물 깊이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태평양 깊이의 사랑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 하셨으니 사랑의 정상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듯 하느님이 보면 우리 사랑의 능력도 도토리 키재기 일 수 있다는 자각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사랑의 능력은 천차만별입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능력이 못 미쳐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결코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희망할 수는 있어도 강요하거니 요구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능력 신장을 위해 은총과 더불어 꾸준하고 항구한 자발적 노력과 훈련이 필요함을 봅니다.

일곱 개의 사랑을 말했습니다만 끝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입니다. 사랑할수록 자유로워집니다. 사랑은 행복입니다. 사랑할수록 행복해집니다. 사랑은 기쁨입니다. 사랑할수록 기뻐집니다. 사랑은 고백입니다. 사랑을 고백할수록 사랑은 증대됩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사랑할 수록 밝아지는 삶입니다. 끝없는 사랑입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학교 인생 공동체에서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사랑의 평생 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날마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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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위에서 오는 서로 사랑>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하느님에 대하여 또 사랑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선언이랄까 말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이라고 요한이 얘기하는데 제 생각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존재는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이 매우 작거나 크거나 차이가 있고, 사랑의 수준이 낮거나 높거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가족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나라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민족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종교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 동물이나 사랑하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이것보다는 수준이 높아 휴머니즘적인 인류 사랑을 추구하지만 아직 하느님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서로 사랑’이고, 그래서 저는 오늘 나눔의 주제를 이렇게 잡았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서로 사랑’

풀어서 얘기하면 위에서 오는 사랑을 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이 잘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곧 위로부터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야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권고를 온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어떤 차별도 하지 않고, 어떤 배제도 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벽을 허물 때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을 사랑의 성령이라고 하고, “오소서 성령이여” 라고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차별도 배제도 없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하려면  위에서 오는 성령의 사랑 없이는 할 수가 없는데 위에서 오는 성령을 받기 위해선 우리가 열어야 합니다.

성령의 오심과 우리의 엶이 상호작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냄비의 뚜껑을 열지 않고 국을 받으려고 하거나  창의 커튼을 열지 않고 햇빛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듯,  그리고 물동이도 없이 내리는 비를 받으려 해선 안 되듯, 우리를 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머니를 여는 것보다  나를 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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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예수님의 명령!>

오늘 복음(요한15,9-17)은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끝말씀과 사랑의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한 속죄 제물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사랑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아가페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5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생명 주일’입니다. 생명 주일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를 없애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받는, 더 나아가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까지도 널리 존중 받는 생명의 문화를 더 발전시키고, 부활시키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주일입니다.

낙태와 자살과 저출생의 문제와 노인문제와 전쟁과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생명경시 현상(죽음의 문화)의 근본 문제는 ‘사랑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준엄한 명령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하느님께서 존재하게 하셨습니다.(창세1,1-2,4 참조) 때문에 모든 생명은 결코 인간에 의해 함부로 파괴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생명의 문화로 바뀌려면, 나 자신이 단순하게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회개와 한 나라의 올바른 지도자의 선출로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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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RK78ambj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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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

생명의 계절
오월은
생명에 대한
감사로 우리를
이끕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더 좋은 사랑의
세상이 되길
꿈꾸며
기도드립니다.

생명과 함께
기쁨이 있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에
지배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생명 주일입니다.

생명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생명의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모두가 생명을
내놓는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하나같이
소중한
생명입니다.

모든 사랑은
한결같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철이들고
깨어납니다.

지나친
이기심과
욕심은 언제나
생명을 경시하는
아픔으로 모두
떨어집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을
힘들게하는
뻔뻔함에서
벗어나는 길이
생명을 살리는
기본정신입니다.

모든 생명을
하느님같이
존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생명의
참모습입니다.

생명을 지키려
희생하는
모습에서
참된 사랑을
만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어울려야
더 아름다운
사랑이 됩니다.

더 큰 사랑을
향해 나가는
사랑의
생명 주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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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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