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빈 무덤이 부활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직접 본 증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이 비었으며, 예수님의 수의인 아마포와 수건이 개켜져 있는 사실 앞에서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운 때에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바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보고 믿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탐욕으로 죄를 짓고, 그 결과 세상에 죽음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파괴되고 죽음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십니다”(요한 3,16). 이 세상에 오신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끝까지 이르는 사랑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되살리시고 죽음의 사슬을 끊어 버리십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다시 사랑의 관계로 회복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새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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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화답송). “나는 죽지 않으리라.”는 이 한마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그 가족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죽음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죽지 않는 신들에 관한 신화를 만들어 냈는데,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는 천부적으로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 있음에도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 때문에 자신에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놓은 채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 차라리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안락사, 존엄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결코 “나는 죽지 않으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삶을 사랑하지만, 늘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 안에서도 부활 축제를 기쁘게 지낼 수 있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고 절망 상태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와 같은 증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압니다. 세상이 자기들의 스승이신 주님을 죽였고, 자기 자신들마저도 죽일 수 있고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도 그들은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고 외칩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난 이들은 결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됩니다. 그들 또한 이미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제2독서 참조). 부활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도 사도들의 마음처럼 빛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청해야겠습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인격적으로 사랑하던 요한만이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에서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감상에 젖어 모성애의 시각에서 빈 무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 사도처럼 가부장적인 위치에서 이 빈 무덤을 관찰합니까? 아니면 요한 사도처럼 인격적인 사랑의 시각에서 이 무덤을 바라보고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이는 빈 무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오늘의 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입니다. 복음은 “주간 첫날” 새벽에 일어난 사건을 들려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갑니다. 엄격한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유다인들은 다닐 수 없습니다. 그녀가 무덤에 도착했을 때 놀란 것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보다, 누군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생각하고 이를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라고 여깁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부활은 이상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이 일을 말하자, 두 제자는 그 이야기를 확인하러 곧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본 것들, 곧 수건과 아마포는 참으로 이상한 사건을 증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기에 부활에 대한 그분의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예고도 매우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남’, ‘다시 깨어남’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여 그분의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야 제자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예수님의 예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밝혀 준 사건입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