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소작인, 마태오 21장 33-43절

나의 것, 주님의 것

(강론15:50-41:40)

마진우 겸손신부님

강의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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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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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에 등장하는 소작인들이 바로 이런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이 소출을 받으려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는데, 소작인들에게는 그들이 눈엣가시였습니다. 자신들이 차지할 소출을 빼앗아 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종들 가운데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여 버리고 맙니다. 불편한 존재들을 없앤 것입니다.

이제 주인은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에게는 이 아들이야말로 가장 불편한 존재입니다. 아들만 없으면 포도밭을 아주 차지할 수 있는데, 아들은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 또한 죽여 버립니다. 이렇듯 소작인들은 자기들에게 불편한 존재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없애 버리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여러분의 삶에서 제외하지 마십시오. 그 사건들을 치워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들과 그 사건들을 보내시면서 여러분을 바르게 이끄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불편한 것들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조개는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불편한 사람들, 불편한 사건들은 나를 고쳐 나가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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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소작인들의 입장

         – 아들의 입장

         – 주인의 입장

2. 내가 생각하는 “내 것”에는 무엇이 있나요? “내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을 주님이 다시 가지고 가셨을때 나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의 신앙적인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면…남을 단죄하지 않으면서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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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성전에서 논쟁을 벌이시는 상황을(21,23-27 참조) 고려하였을 때,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의미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비난하였으며, 예수님을 정치적 이유로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이 보여 준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둘째,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자들에게 하느님의 신적 능력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정치적 누명을 쓰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118(117)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는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예고된 바 있습니다. 제1독서의 포도밭 노래는 정의와 공정, 곧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기대와는 달리, 나쁜 열매로 은유된 불의와 폭력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좋은 열매를 많이 거두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약속된 선물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637
10월8일[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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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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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jELlsb2das?si=XIOzp0GZ8we9zPIw
[서울대교구 홍성학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한국가톨릭군종후원회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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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선수 교체당한 이스라엘 백성>

축구 시합을 관전하다 보면 팀의 승리를 위해 탁월한 기량의 선수들도 중요하지만, 감독의 용병술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냉철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이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전반전을 뛰고 나서 그 결과에 따라 라커룸을 향하는 감독의 머릿속에는 벌써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 그래서 최대한 빨리 교체해줘야 하는 선수는 누구인지? 그 포지션에 누구를 투입하면 좋겠는지, 등등.

그리고는 계획한 대로 가차 없이 교체를 실시해야 합니다. 교체 대상인 선수의 성격이 아주 과격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물병을 발로 걷어차거나 욕을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때로 팀워크 상승을 위한 선수 길들이기 차원에서 일부로 빼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낡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옛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교체되는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에 출전했던 과거의 옛 백성들의 처신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참다 참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하느님께서 즉시 선수 교체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포도밭을 선물로 받았으나, 흥청망청 놀고먹고 마셨으며, 엉뚱한 곳에 신경 쓰느라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밭은 정직합니다. 주인이 조금도 관심도 가지지 않는데, 풍성한 소출은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린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중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이 임대한 포도밭은 다른 소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아들을 죽인 결과로 주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그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은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너희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5-26)

하느님의 말씀도 무시했던 그들은 메시아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 역시 무시했습니다. 사악한 소작인들이 한 것처럼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선물은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백성들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심판의 말씀인 동시에 희망 가득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옛 백성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새로운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옛 백성의 실패와 멸망은 새로운 아들이신 예수님을 처형함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계약의 피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출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실패로 인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 것이고, 그 백성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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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실과 암담하고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겪게 되는 근심과 걱정,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6~7절)

탈출구도 없을 뿐더러, 사방이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랍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현실 앞에, 입만 열만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터져나오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랍니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현실 앞에, 마냥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랍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지극히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고, 대책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께서 걸어가신 전도 여행길을 생각해보니, 권고 말씀이 절대로 헛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미의 송가를 불렀습니다. 혼절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마음에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토록 공들였던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수시로 흔들리고 분열되었으며 삐그덕거렸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희망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몸소 겪은 바를 가르쳤고, 당신이 직접 사신 바를 권고했습니다. 그러니 2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분의 말씀은 생생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끝맺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또한 감동적입니다.“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8절)

풀잎끝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사라지는 대상들, 헛되고 무의미한 대상들, 속되고 천박한 대상들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 함몰되어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참되고 고귀한 대상들, 의롭고 정결한 대상들, 사랑스럽고 영예로운 대상들을 선택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천박한 삶에서 품위 있는 삶으로, 지극히 본능적인 삶에서 지성적 삶으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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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d8qGBMJqOI?si=JHe_Qm2jN7FsK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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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사하는 이만 파견한다>

이탈리아 카시아에서 성체 기적이 있었습니다. 성체가 종이에 피로 변해서 스며든 것입니다. 그 종이는 감실에 모셔져 있습니다. 감실은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체가 그 사람 안에 살아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이가 아니기에 성체를 모셔도 그분을 우리 안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렇습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죽였습니다. 만약 우리도 못된 소작인들처럼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으면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죽이게 됩니다. 소출의 일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두 주인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실 수 없습니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 자기 원수 같은 후배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아내에게 주인공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랬니? 너 지석이 엄마잖아. 애 엄마잖아. 너 그 새끼랑 바람피운 순간 너 나한테 사망 선고 내린 거야. 박동훈 넌 그런 대접 받아도 싼 인간이라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그냥 죽어버리라고!”

아내는 남편에게 파견받습니다. 자녀를 잘 키우라고. 물론 파견할 때 그 능력도 함께 받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 아내에게 다 가져다줍니다. 파견 받음은 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파견을 거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를 생각해 봅시다. 그물은 어부에게 파견 받습니다. 그래서 그물이 조금이라도 뜯어지면 어부는 고이 손질합니다. 물고기가 거기로 빠져나갈 수도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물이 자신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파견 받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그 파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흐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 사랑해도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다 주며 파견하는 남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구약과 신약에서 다 하느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먼저 에덴 동산에서 감사의 마음으로 땅 소출의 일부, 곧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 받을 수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파라오의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소출의 일부를 받아오라고 보낸 주인의 외아드님도 죽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주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결국 서로를 사랑할 능력도 잃고 주님의 것이 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사육』에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한 일본 산골 마을에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흑인 병사 한 명을 끌고 와 지하 창고에 가두고는 짐승처럼 묶어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은 흑인 병사의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생긴 것을 보고는 덫을 풀어주었습니다. 소년의 도움으로 흑인 병사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청에서 흑인 병사를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흑인 병사는 지레 겁을 먹어 소년을 인질로 잡아서 난동을 벌입니다. 결국, 흑인 병사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년의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감사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며 그렇게 주님을 내 안에 인질로 잡아 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성체를 영해도 구원 받지 못하는 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아기 돼지가 엄마를 잃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돼지의 엄마가 되기 위해 코끼리 아줌마가 엄마로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 돼지는 코가 긴 코끼리 아줌마를 엄마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코끼리 아줌마는 자기 코를 잘라 돼지코로 만들었습니다. 아기 돼지는 피가 뚝뚝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모습과 같은 아줌마를 엄마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기 돼지가 엄마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하며 파견하신 분께 감사의 봉헌을 조금이라도 드릴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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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소작인이 주인이 맡겨주신 포도원을 잘 돌보지 않으면 주인은 다른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소작인의 비유를 들으면서 저의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1986년에 저는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인사담당 장교가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신학생인 것을 알았습니다. 인사담당 장교는 자신의 아들도 신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는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덕함과 잘못으로 저는 3개월 만에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에서 쫓겨났던 적이 있습니다. 군종신부님은 1년 뒤에 다른 병사에게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제가 부족했기에, 제가 잘못했기에 저는 군종신부님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를 따끔하게 혼내 주었기에 제가 남은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군종신부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선량한 소작인들이 불의한 힘에 의해서, 독재자들에 의해서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나봇’의 이야기입니다. 나봇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이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돈을 주고 사려고 했지만 나봇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을 팔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사벨은 거짓과 선동으로 나봇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 왕에게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억울함을 아셨고, 아합 왕과 이사벨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장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고 채 상병의 사망사고를 조사했고,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항명’이라는 죄목으로 보직 해임되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한 수사단장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수사단장은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외압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수사단장의 해임을 주도하였던 국방부 장관은 해임되었습니다. 아직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없도록 철저하고도, 명확한 조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교구에서는 제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포도원을 맡겨주었습니다. 어느덧 4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매주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주된 업무입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성당을 다니면서 신문홍보를 하는 것은 저의 업무입니다. 무탈하게 신문 발행을 하고 있지만 구독자의 감소는 큰 고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 동안 신문홍보를 다니지 못한 것도 원인입니다. 종이 신문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도 원입니다. 구독자의 감소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게 됩니다. 직원들의 근무일수 조정과 저의 급여 삭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좀 더 많은 곳으로 신문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후임 신부님에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포도원을 잘 넘겨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브루클린한인성당’이라는 포도원도 맡겨 주셨습니다. 2020년 8월부터 미사를 하였으니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려고 다녔지만 오히려 저는 공동체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포도원에는 때로 원하지 않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분열의 씨가, 두려움의 씨가, 갈등과 걱정의 씨가 들어오곤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고난도, 아픔도 우리를 하느님과 맺어주신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포도원 소작인의 자세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맡겨 주신 포도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 가족, 이웃이 포도원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포도원을 잘 가꾸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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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오늘의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로 보살펴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호세 10,1; 예레 2,21; 5,10; 6,9; 12,10; 에제 15,1-8; 17,3-10). 포도밭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혼인의 상징적 개념도 있다. 이사야서(5,1-7)는 상처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이 표현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여 그 포도밭이 좋은 포도를 내지 못하고 들 포도를 즉 불의를 내고 말았음을 개탄하는 것이다.

이 포도밭 노래의 내용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거듭 강조하신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포도밭이라는 문학 형식으로 구원의 역사의 어떤 단계를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인의 가장 사랑이 충만한 극적인 구세사의 마지막 여정은 상속권을 가진 당신 외아들의 파견이다.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구원을 위해 애쓰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리렷다.”(39절) 그래서 모든 것이 헛되이 되고 만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예고로, 그 죽음이 도시의 성 밖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되었을 때 그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이 극적인 사건과 연루되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건으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대답한다.

이제 이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자신은 통해, 그리고 불충실한 이스라엘 대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은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42절) 라는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시어 하느님의 구원계획 중심에 당신이 계심을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계획을 무시하시며, 집 짓는 데에 쓸모없는 돌로서 버려진 그리스도를 당신의 새로운 구원의 건축에 쓰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다.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며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를 통해 여정을 계속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교회라는 새로운 구원의 공동체를 통하여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3절).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마태 3,8) 능력을 상실한 옛 계약의 백성 대신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하느님의 새 백성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중단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교회를 통하여 계속 전진한다. 악한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포도원을 되찾으셔서 새 소작인들에게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이 하느님의 위대한 승리로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은 행동하는 데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통교리는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올바른 실천적 행위 속에 현존한다. 주님 교회의 본체에 대한 믿음은 행동적 증거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된 구원의 은총은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풍성한 믿음의 결실을 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기를 요구한다.”(G. Barbaglio, I Vangeli, Assisi 1975, p. 472)

바오로 사도도 이 믿음의 행동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신자들은 본성적으로 진실한 것, 올바른 것, 고상한 것들을 실행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을 평가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갖춰야 하며, 이는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다.(필리 4,6-7 참조) 그리스도인의 행동적 신앙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동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의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이 구원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평가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갖춰야 하며, 이는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다.(필리 4,6-7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적 신앙은 금욕주의 사상이나 순전히 인간주의적 사상이나 순전한 실천주의적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동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수많은 형제와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의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이 구원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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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마태 21,33-35)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앞부분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이고,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도 내용이 많이 비슷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2-6)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도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이스라엘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이스라엘 민족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혼인 잔치의 비유’는 개인의 응답과 구원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그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강조되어 있고(43절),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초대에 응답하는 일과 응답하려면 예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이(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살아야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작인들’로 표현하신 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밭주인과 소작인들의 관계라는 뜻이 아니고, 소작인들처럼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또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가 결코 아니고,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자녀의 관계’입니다.

소작인들은 남의 밭에서 ‘남의 일’을 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주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소작인 같은 태도로 하느님을 대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의, 즉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신 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과 생명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또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아버지의 잔치이니까 자녀의 잔치이고, 그 잔치의 주인이 아버지이시니까 우리도 잔치의 주인입니다.

혼인을 하는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이고(마태 22,2), 예수님의 ‘신부’는 바로 신앙인들, 즉 ‘우리’입니다.(요한 3,29) 신랑의 잔치는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의 잔치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7-4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7-18)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인간들에게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과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거나,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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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성전에서 논쟁을 벌이시는 상황을(21,23-27 참조) 고려하였을 때,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의미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비난하였으며, 예수님을 정치적 이유로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이 보여 준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둘째,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자들에게 하느님의 신적 능력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정치적 누명을 쓰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118(117)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는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예고된 바 있습니다. 제1독서의 포도밭 노래는 정의와 공정, 곧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기대와는 달리, 나쁜 열매로 은유된 불의와 폭력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좋은 열매를 많이 거두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약속된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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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성용 바오로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예루살렘 입성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예수님을 향한 그 당시 지배계층의 견제, 오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그들을 향한 직접적인 비판이자 동시에 당신이 겪으셔야 할 구원의 길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수많은 예언자들을 몰라보고 그들에게 돌을 던진 조상들의 악행, 그것을 보시고도 아들만은 존중해 주리라는 희망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께, 소작인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은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합니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라는 소작인들의 말은 예언자들을,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의 이기심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생각해 봅니다. 이미 다 가르쳐주었는데, 이미 다 보여주었는데 … 자꾸만 무엇인가 더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보고 들은 것을 애써 뒤로한 채, 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당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가실 때의 그 걸음걸음이란 …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답답하게 해 드렸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도 그저 우리들의 이기심과 욕심에 하느님의 뜻을 애써 외면하는 것들 말입니다. ‘내 마음은 하느님을 믿고 있으니 매주 미사에 참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아.’, ‘굳이 내가 봉사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하겠지.’ 등등 …

군대에서 예비자 교리할 때,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강조하는 부분이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세례를 통해 신앙인이 되어 누리게 되는 권리로 인해 주어지는 의무가, 그동안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마지막 이마에 물을 붓는 순간까지 고민해 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던 친구들도, 얼마가지 않아 미사참석에 소홀해지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도 다시 도전하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도전으로 주님의 포도밭에서 다른 것을 바라지 않고 제대로 된 소출을 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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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박진호 사도요한 신부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 하느님만이 채워주시는 행복>

병 복무 시절, 성당은 지친 영혼에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열정적인 군종신부님과 따뜻했던 군 가족 신자들은 장병들을 한 명, 한 명 세심하게 챙겨주었고, 덕분에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당은 모든 이의 안식처가 되었고, 저희의 신앙과 열정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자 한 분이 제 손을 잡으시며 군종 사제로 꼭 다시 와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군종 사제를 희망해서 오시는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공동체에 큰 아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군종 신부님처럼 장병들과 신자들을 세심하게 보살펴주는 군종 신부님이 되어달라는 부탁이 ‘목자 없는 양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날부터 하느님께 ‘부족한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군종 사제의 삶을 살아가며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군종 사제의 삶은 특별합니다. 성당에서 신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에서의 신자들을 위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종 사제는 사제의 역할뿐만 아니라 장교로서 요청되는 각종 업무와 교육 그리고 부대행사에 기쁘게 참여하며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활동합니다. 그래야만 장병들과 신자들을 위해 어떤 무언가를 부대에 요청했을 때 기꺼이 허락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무장님도, 봉사자분도 계시지 않아 그 모든 것을 혼자 관리하고 준비하고 나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로서 하느님을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이,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행복이 군종 사제에게 힘을 매어줍니다.

오늘 제1독서 포도밭의 노래와 복음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성실히 살아가며 지속적인 선행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을, 그리고 제2독서는 그 여정에서 맛볼 평화를 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며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과 평화와 행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시다.

특별히 군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나라를 지키는 장병들과 그 장병들과 함께하는 군종 사제를 위해 많은 기도와 후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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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소출을 내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

“너희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들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추석 명절은 잘 지내셨나요. 넉넉한 추석이 되었을까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칫 탐욕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소작인이 의당 내야 할 몫, 소출은 현대판 우리의 나눔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 비유입니다. 언뜻 지주에 대한 농민 봉기가 연상됩니다. 그러나 비유의 핵심은 더 본질적입니다. 포도원은 하느님이 만든 세상이고,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소출을 내야 할 소작인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탐욕을 부린다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마음을 바꾸어 먹지 않으면 망한다는 하느님 나라 비유입니다.

1.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주인
오늘 복음은 무섭습니다. 폭력적인 상황에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소작인들의 탐욕이 부른 참극이지만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주인도 참 딱할 노릇입니다. 밭 주인은 누구 도움 없이 홀로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웁니다. 그리고 감독관도 세우지 않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납니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소출은커녕 종들을 매질하고 죽여버립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면 사태 파악이 되어야 할 터인데, 주인은 더 많은 종을 보내 죽게 만들고 맙니다. 급기야는 자기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바보 같은 주인입니다.

비유 말씀의 밭 주인은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이 창조한 세상 모든 것을 기꺼이 인간 손에 맡기십니다. 인간이 사악하게 놀아나도 믿고, 믿고 또 믿어줍니다. 믿는 것 외에 당신 사랑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셨을까요. 어쩌면 그리도 인간들을 믿을 수 있는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래서 아들까지 죽이고 맙니다.

2. 하느님은 무골호인이 아니다.
포도밭 유혈 참극을 벌인 소작인들을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대답합니다.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그러자 주님은 그들의 말 그대로 확증해주며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3절)

이런 가정을 해봅니다. 소작인들이 일으킨 반란이 성공을 거두어 주인까지 내몰고 포도밭을 차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출을 내지 않는 그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을 터, 더한 폭력성으로 소작인 서로를 향한 칼날은 여지없이 피를 불렀을 것입니다. 어느 면에선 하느님의 뜻을 도외시하고 하느님 없는 양 살아가는 그 자체가 징벌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지구촌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과 기후 위기도 그렇고 전쟁 상황과 거꾸로 가는 역사의식도 그렇습니다. 생태환경과 사회환경 모두가 두려운 징후를 보입니다. 그런데도 별문제 없는 듯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내야 할 소출은 결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금전으로 본다면 보통 십일조가 기본입니다. 유다인은 회당 운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으로 10분의 2 정도 한다고 합니다. 내 것으로 여겨지는 금전은 물론 시간이든 재능이든 일정 부분 내놓아야 합니다. 소출도 좋고 나눔이라 해도 좋습니다.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나누는 겁니다. 작은 일이지만 소명이 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더 가지려는 허기진 마음의 동료에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소출을 내야 하는 인간 실존! 자존심 상해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다만 주인 된 마음으로 주인의 뜻대로 포도밭을 가꾸고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 있다 내일 사라질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 피조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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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은망덕하지 마라>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요한 15,9) 그래서 하느님은 미리미리 사랑의 질타를 하십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포도밭을 가꾸는 주인의 노고와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산등성이에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탑을 만들고 즙을 짜는 포도 확까지 만들어 놓고 포도가 송이송이 맺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이사 5,1-2)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들포도가 열렸습니다.(이사 5,4) 온갖 정성을 다했건만 결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허물어 망그러진 채 내버려 두게 됩니다. 순을 치지도 않고 김도 매지 않고 황폐하게 두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인 채로 두게 됩니다.(이사 5,5-6)

이사야 예언자는 이 비유 말씀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사5,4)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는 만큼 사랑을 열매 맺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황폐한 밭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훌륭하게 잘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고는 추수철이 되어 그 도조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작인들이 간이 부었는지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침내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고 그 포도밭을 통째로 먹어버리려고 했습니다.(마태 21,33-38)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그러니 그 주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소작인들은 욕심으로 화를 자초하여 죽고, 새로운 소작인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예언자요,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을 잘 가꾸어 소출을 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으니,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은총을 주어도 관리하지 않으면 그 권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이지만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고 (예레31,3)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그리고 마침내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2,4)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대한 감사에 인색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다 주셨음에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결국은 걸맞은 삶으로 감사할 줄 모르면 죽음에 이르고, 소출을 내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는 돌판에 새기고, 베푼 것은 모래에 새겨라’ 했습니다. 우리는 거꾸로 사는 것이 아닌지요? 늘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갚기는 고사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잘난 체하며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7)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시편 50,14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20)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깁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감사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행실로써 감사드려야 합니다.”(성 필립보네리)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실루스)

성경에서 감사를 드린 인물을 몇 명 보면, 아브람은 자기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자리에 제단을 쌓아 바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 마음은 주 하느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공동번역. 1사무2,1)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모시고 번제와 친교제를 바친다음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고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시켜 감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역대기 상16,7)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루카 24,51-53)

예수님도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후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1)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일을 찾으십시오.

내가 숨 쉬고 있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공짜로 숨을 쉬고 있으니 많은 빚을 진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도 은총입니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로움인지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이 순간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을 찬미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잔소리 많은 아내를 보고 남편이 말했답니다.
‘여보, 나 부탁이 있는데 당신 벙어리가 될 수 없겠소?’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어요.‘나도 부탁이 있어요. 당신 귀머거리가 돼 줘요’ 벙어리가 되어달라는 남편이 있어서 감사하고, 귀머거리가 되어 달라는 아내가 있어서 감사하고요. 아내나 남편이 계시지 않는 분은 그런저런 부탁 받을 일 없어서 감사하고요. 자식이 말썽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어 감사하고, 말썽 피우는 자식이라도 있어서 감사하고요. 무자식이 상팔자라 감사하고… 아픔을 느끼게 만든 자식이 있어서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나를 철들게 하니 감사하고… 부모님이 계셔서 감사하고…… 감사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고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은 되지 맙시다. 무엇보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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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마크 배터슨(Mark Batterson)이 쓴 ‘올 인(All In)’이라는 책에는 선교사 밀른(A.W.Milne)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사실 이곳은 원주민들이 앞서 파견했던 선교사 모두를 살해했던 곳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죽었다면서 자기 관을 싸 들고 갔다고 합니다. 결과는 35년 동안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35년의 삶을 마치고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후, 원주민들은 그를 마을 한가운데에 묻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습니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고 있느냐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또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면 빛이 아닌 어둠을 더 넓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 밀른(A.W.Milne)의 35년 삶을 평가한 원주민들의 평가를 보며, 나의 삶을 모두 마치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평가를 하실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삶이 후회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겼지만, 소출을 주인에게 주지 않습니다. 소출을 받으러 온 종을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내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없으면 상속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면서 죽여버립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아들을 보내는 부모가 있을까요? 그리고 부모의 명령이라고 위험한 곳이라도 기꺼이 가는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도밭 주인도 또 그의 아들 역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맡기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예언자들을 잡아 죽였지요. 심지어 외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듭니다. 결국 소작인인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을 내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맞게 이 포도밭을 가꾸고 있나요? 혹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생각에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못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던 외아들 예수님처럼,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이신 주님께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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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마태오 21,33-43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오직>

나를 향한
하느님의 믿음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믿음으로

나를 향한
하느님의 희망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희망으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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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소작인들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종을 보냈다.”

우리는 3주 계속해서 포도밭 비유를 듣습니다. 연중 25주일에는 포도밭에 일찍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늦게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같은 일당을 주신다는 비유를 들었고, 지난주 26주일에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가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가지 않은 아들과 안 가겠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한 아들의 비유를 들었는데 오늘은 포도밭의 또 다른 비유, 곧 소작인의 비유를 듣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 그러니까 앞의 두 주는 포도밭에 개인으로 가서 일하는 데 비해 이번 주는 개인이 아니라 소작인으로서 일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 포도밭의 단순 노동자/일꾼인가, 소작인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포도밭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없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소작인이란 그야말로 소작인이고 일꾼이나 마찬가지로 소유권자가 아닌데 가끔 소작인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소유권자로 착각하거나 아예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도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소유권 없는 우리의 가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 편 내거로 착각하고 소유하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기업과 하느님의 사업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고, 하느님 기업과 사업을 내 거로 여기는데서 오는 근심걱정도 버려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가 자기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상대로 가지 않는 것을 보고 생애 후반에 무척 고뇌하였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냐? 너나, 나냐? 이 수도회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단순 일꾼과 소작인의 차이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단순 노동자/일꾼은 하느님의 기업이나 사업에 아무 책임이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는 비해 소작인은 소출의 책임이 있는 존재지요.

그러면 소출의 책임이란 무엇입니까? 책임은 하느님께 지지만 책임의 내용은 하느님 백성에 대한 겁니다. 구약에서 포도밭이란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러기에 포도밭의 소출을 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백성답게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명을 누리며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살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책임을 다하면 백성이 생명을 누리며 잘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책임지는 것, 이것이 버겁고 그래서 이 책임이 싫습니다. 내 것도 아닌 하느님의 포도밭을 버거운데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니.

그래서 이것이 짐인지, 아니면 영광인지 모르겠는 때가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짐일 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그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에 감사하면 소작인인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파트너가 되고 하느님 사랑의 공동경작자가 되는 것이니 그것이 무한 영광일 것입니다. 나를 당신의 파트너 삼고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큰 책임을 맡기시다니!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 덕분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보살핌 덕분에 바자회가 잘 끝났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어제 바자회가 끝나기도 전에 피정 동반하러 이곳 제주에 와 있습니다.

오늘 너무  늦게 일어나기도 했고 피정 강의 준비를 해야 하기에 새로운 강론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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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소작인이다>
-착한 소작인의 삶-

참 어렵고 힘든 것이 사람이,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 공부가 참 사람이 되는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평생 공부해도 될까말까한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새벽 인터넷 동영상 하나를 잠시 봤습니다. 장자 명언 8가지 이런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 뒷통수친다는 것입니다. 이간질하는 사람, 음흉한 사람, 단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무례하고 불손한 사람, 자기 말만 하는 사람,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 아첨과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정말 공감이 가는 말마디 였습니다.

사람은 보통 살아온 대로 삽니다. 사람은 고쳐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란 말도 있읍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나? 어떻게 참사람으로 살 수 있나?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을 약육강식, 생존경쟁,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시대라합니다. 인간관계도 답이 없어 참 어렵습니다.

8월 중순부터 해온 제 영적습관도 도움이 될 듯하여 다시 소개합니다. 저는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성호경과 주모경을 소리내어 바친 후 양손을 활짝 펴고 소리내어 만세육창 및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우니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릅니다. 이 또한 참사람이 되기 위한 분투의 노력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이렇게 하루를 만세육창으로 시작하면 심신이 상쾌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하루중 삶이 무기력해질때 역시 만세육창을 하고 다시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여섯 번째 “우리 가정 만세!”로 바꿔부르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다.” 라고 고백합니다. 좌우 이념이 너무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념보다는 민생에, 상식과 양식에 기초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신간 소개에 나온 책 제목과 일부 소개된 내용에도 공감했습니다.

“거룩하라, 세상적이지는 마라(Holy, not Worldly)”

책 제목입니다. 이래서 가톨릭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평생성사가 되는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참 좋으니 책 제목대로 살 수 있는 은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속에서 살지만 세상적으로 살지 않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성사은총입니다. 참사람이 되는데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기도-회개-말씀-성체가 포함되어 있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면서 늘 새로워지면서 주님을 닮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교황님의 책 서문내용입니다.

“신자들의 삶은 전쟁입니다. 우리 자신을 닫아버리려는 유혹을 극복하려는 내적전쟁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사시도록 노력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전쟁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승리하도록 할 때, 우리는 완전히 고양되고 우리 존재는 무한한 분의 광채에 의해 빛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로서 우리가 수행해야할 전쟁은 무엇보다 영적 세속성에 대한 전쟁입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거룩한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오늘 복음의 악한 소작인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비유라기 보다는 우화라 함이 맞습니다. 포도밭이 상징하는바 세상이요 포도밭 소작인들이 상징하는 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대로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오늘날 역시 복음의 악한 소작인들 같은 이런 배은망덕한, 무지막지한 제 분수를 모르는 무지한 탐욕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대로 지옥도와 같은 복음장면이요 오늘의 세상같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무자비하게, 심지어는 주인의 아들까지 살해하지 않습니까! 이런 예언자들에 대한 박해는 예나 이제나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해된 아들은 우리 구원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악의 승리인 듯 하지만 궁극에는 하느님의 승리, 파스카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답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줄 것이다.”

아, 바로 우리의 신원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임받은 착한 소작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기반基盤으로 하는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소작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신원입니까!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적전쟁은 백전백승이요 언제나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소작인답게 살게 해줍니다.

이런 영적승리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임받은 우리 소작인의 우선적 책무責務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참사람의 참내가 되고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다음은 회개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훈련하고 습관해야 할 회개입니다. 이런 참된 회개 없이는 살아온대로 삽니다. 사람을 고쳐쓸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포도밭의 노래에 나오는 주님의 탄식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

그대로 오늘의 불평등과 불의가 만연된 포도밭 세상에 대한 주님의 탄식같습니다. 바로 이런 지옥같은 세상속에서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천국을 살아가야 할 우리 믿는 이들에게 회개 여정의 삶은 절대적입니다. 바로 회개의 은총이 우리를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속적이 아닌 거룩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없이는 광야인생중 괴물이나 악마,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회개의 은총만이 용서받고 치유받아 건강한 정신, 건강한 마음, 건강한 영혼으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게 합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삶입니다. 회개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찬미입니다. 오늘 주일 아침, 무려 한시간 동안 하느님 찬미기도를 목청껏 노래하며 새삼 찬미하라 연장되는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 찬미없는 삶 참 무의미합니다. 회개의 기쁨 없이, 찬미의 기쁨 없이 무슨 기쁨으로 광야인생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구체적으로 바오로가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하늘나라 소작인들인 우리에게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바오로를 대신 하여 말씀드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자나깨나 우선적 할 일은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의 삶이 영적건강,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덕들을 간절히 추구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바로 다음의 덕들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다음 권고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용기와 힘을 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선택하여 마음에 품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래야 품격있는 거룩하고 고결한 인품의, 맑고 향기로은 참사람의 주님의 소작인들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거룩하고 덕스런, 착하고 성실한 주님의 소작인들로 살아가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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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성실한 일꾼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21,33-43)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악한 마음을 지적하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그들에게 들려주십니다.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울타리’는 ‘율법’이고, ‘탑’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보낸 종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위해 파견되어진 수많은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소작인들’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인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가 이 복음을 듣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하나는, 선택되어짐(세례성사)이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의 선택과 그에 따른 합당한 열매(사랑실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의 거부(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박해)로 인해, 구원의 대상이 유다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바뀌었듯이, 구원의 문은 올바른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이들에게로 끊임없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밭 주인의 소작인들인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사명에 충실한 소작인들의 모습인지? 아니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모습, 불충실한 소작인들의 모습은 아닌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성찰해 보는 하루,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구원자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필리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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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TwD-y8tg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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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 39)

누가 포도밭의
주인인지를
묻습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묻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들까지
붙잡아 던져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뿐입니다.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온 정성을
다 바치는
하느님까지
죽이려 합니다.

누가 하느님이지
알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까지 밟고
우리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생명의
주인이 불명한
삶은 언제나
위험하고
위협적입니다.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알게됩니다.

믿음이란
우리에게 오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필요한 존중의
여정이
하느님 백성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애매모호한
믿음을 반성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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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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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733
10월4일 [연중 제2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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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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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vIarxlOxzQ
[작은형제회 김종화 알로이시오(양성학문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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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달래고 감싸며 어루만져주시는 주님!>

부모들이 자녀들로부터 들었을 때 가장 큰 상처가 되는 말은 아마도 이런 말이 아닐까요. “부모가 돼서 그동안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이런 말 들었을 때 참으로 기가 차지도 않겠지요.

갓난아기 때, 인간도 아닌 그 핏덩이, 하루 온 종일 옆에 붙어서 금이야 옥이야 감싸주던 시절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서너 살 때 기억나실 것입니다. 불안해서 어디 내놓을 수 없었던 천덕꾸러기, 늘 노심초사하면서 따라다니던 일이 주마등같이 기억 속에 지나갈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던 때, 한 밤중이건 새벽녘이건 들쳐 엎고 병원으로 뛰어가던 일… 그런 일들 안다면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못할 텐데…정말 배은망덕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배은망덕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자비 충만하신 하느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여러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뽑으실 때 뭐가 ‘있어서’, 특출해서, 대단해서, 뽑은 것일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불쌍해서, 가련해서, 안쓰러워서, 안타까워서 뽑으셨습니다.

그 측은한 존재 이스라엘, 너무나 보잘것없어 ‘벌레 같던’ 이스라엘이었지만 과분하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얼르고 달래면서, 감싸고 어루만져주면서 그렇게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귀염둥이 딸이 슬슬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빗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가서는 안 될 길, 죽음의 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하느님께서는 심부름꾼을 보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애타는 마음이 담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제발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다시금 너와 내가 맺은 첫 계약을 기억하라고, 첫 사랑으로 돌아가자고…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보내신 심부름꾼을 그때 마다 족족 매질하고, 폭행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이루어졌었던 배신의 역사, 반역의 역사는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역사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과분하게도 하느님께서 나를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미물 같던 나를 애지중지 돌봐주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아무 상관없는 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처음의 나를 생각하면,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정답이 바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불만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소작인들처럼 잔머리 굴릴 일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남의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과분하게 생각하면서, 그저 기뻐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비유 말씀은 심판의 말씀인 동시에 희망 가득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옛백성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새로운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옛백성의 실패와 멸망은 새로운 아들이신 예수님을 처형함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계약의 피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출범합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실패로 인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런 부활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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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감사도 연습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맡기고 간 포도밭을 자신들의 것인 양, 합당한 소출 일부도 주인에게 내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외가 없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다 가진 자는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기에 더 감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초등학교 때 저능아 취급을 받았고 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칠 수준이 아니라며 그를 쫓아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른 나이에 청력을 잃고 청각 장애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가지 않게 된 덕에 연구할 시간이 많았고, 청력을 잃어 실험에만 집중할 수 있어 감사한다고 회고록에 남겼습니다.

감사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오게 만드는 문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은총이 세상에 전달되게 하십니다.

일본 ‘내쇼날’ 창업자 마쓰시다는 아흔넷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 명을 거느린 대기업 총수입니다. 그도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점포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도 항상 감사한 것이 있었는데, “1. 가난한 것, 2. 허약한 것, 3. 못 배운 것”이라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가지고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그것이 하늘의 은혜였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아흔이 넘었는데도 30대의 건강을 유지하며 겨울철에도 냉수마찰을 합니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저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남들이 말하는 불행은 하늘이 저를 성장시키기 위해 마련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다 보면 큰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우리가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혹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런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한 수녀님에게 자그마한 건물을 지으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물론 본원에서도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돈 때문에 걱정이 많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전에 알던 후원자분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또 그분을 위해 기도를 해 주니 그분에게도 남는 이익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기부하겠다고 하여 통장 액수를 보니 3억 원이었습니다.

수녀님은 수중에 그렇게 큰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다음부터는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누가 통장을 훔쳐 가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 돈을 써버리지 않으면 불안증에 시달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6개월 뒤, 건물을 짓는 계약금으로 그 돈을 먼저 써 버렸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수녀님들은 청빈서원을 하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수녀님이 아닌 분들도 복권에 당첨되거나 땅값이 올라 갑자기 많은 돈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많은 액수의 돈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안할까요? 평상시에 감사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돈을 다 잃어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돈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수억 원의 돈을 가지고 있다면 여간 불안하지 않습니다. 돈 한 푼도 없이 편안할 때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그렇게 돈이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수녀님들이야 할 수 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감사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들어오는 모든 것들의 십 분의 일을 바치며 그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의 하인들은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이것을 연습시키기 위해 오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십일조를 내지 못해도 갑자기 돈이 들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주신 것,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을 찬미할 마음을 갖고 잃어도 감사할 수 있는 훈련을 한다면 나중에 하느님의 아드님까지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행복한 줄 알면서도 잘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훈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련도 안 하며 김연아 선수처럼 스케이트를 잘 탈 수 있으면 감사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도, 사랑도 훈련해야 합니다.

연료만 주어진다고 아이가 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이 감사일기와 십일조입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에 지방이 저절로 많아지는 것처럼, 감사도 정해놓고 운동처럼 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정해놓고 내고 미사 때 주님을 찬미하면 됩니다.

‘시간 날 때 운동해야지!’라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정해놓고 감사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하느님 나라를 사는 은총표입니다. 은총표는 하나하나 모아야 합니다. 감사도 하려고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을 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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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1. 하느님의 포도밭: 사랑의 계약과 구원의 역사
오늘 복음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단순한 경제적 비유가 아니라, 구원사의 상징적 요약이다.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가꾸신 선택된 백성을 상징한다.(호세 10,1; 예레 2,21) 이사야서의 “포도밭 노래”(5,1-7)는 상처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하느님께서는 울타리를 치고, 망대를 세우고, 술틀까지 마련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를 맺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적 사랑이 인간의 불충으로 배반당한 비극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포도밭을 이렇게 해석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당신의 포도밭을 세우셨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뜻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열매를 맺는다면, 우리는 이미 그 포도밭에 돌을 옮겨 놓은 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동업자’(cooperatores Dei)로 부르시며, 그분의 사랑이 인간의 자유 안에서 결실을 기다리신다. 이 포도밭은 단순히 과거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가리킨다.

2. 아들의 파견: 구원의 절정과 인간의 거부
비유의 절정은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낸 사건이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그러나 그들은 아들을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내던져 죽였다. 이는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한다. 히브리서가 말하듯, “하느님께서는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번에 걸쳐 여러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주인은 끝까지 기다리셨다. 하느님의 인내는 형벌보다 앞서며, 자비는 정의보다 크다.”(Homilia in Matthaeum 68,3 현대 요약) 이처럼 하느님은 죄를 벌하시기보다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다. 그러나 인간이 끝까지 그 아들을 거부할 때, 구원의 질서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

3. 버려진 돌, 머릿돌이 되다.: 십자가의 역설
예수님께서는 시편 118편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신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22절) 이 인용은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요약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버린 그리스도를 새 창조의 머릿돌로 삼으셨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건축에서 머릿돌이 되셨다. 그분 안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이 결합되고, 하늘과 땅이 다시 연결되었다.”(사상 요약) 교리서는 이 구원의 중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결정적 도구이며, 부활은 그 계획의 완성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인간의 죄를 극복하는 사랑의 승리이다.”(599-620 참조) 즉, 버림받음의 자리가 구원의 기초가 되었다는 역설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다.

4. 새로운 백성: 교회, 하느님 나라의 열매 맺는 공동체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3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배척이 아니라, 교회의 탄생을 예고한다. 하느님 나라는 혈통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로 주어진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명확히 표현한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교회는 이제 하느님의 포도밭의 새로운 소작인, 즉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열매 맺는 새로운 계약의 백성이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계약을 세우시어,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이 백성은 사랑으로 살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9항 요약)

5. 열매 맺는 신앙: 행동하는 교회의 본질
하느님의 나라는 단순한 이론이나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은 분명히 말한다.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나라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잔프랑코 바르발리오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은 행동하는 데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통교리는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다.”(I Vangeli, Assisi 1975, p. 472)

바오로 사도도 이 점을 강조하며,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을 간직하십시오.”(필리 4,8)라고 권고한다. 이는 신앙이 사유에 머물지 않고, 행위로 열매 맺는 것을 뜻한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신앙은 행위 안에서 완성된다.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활동할 때에만 살아 있는 것이다.”(1815항; 갈라 5,6 참조)

6. 결론: 포도밭의 열매, 교회의 사명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하느님의 포도밭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맡기신 포도밭은 곧 우리의 공동체,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포도밭에서 신앙과 사랑, 정의와 자비, 용서와 평화의 열매를 맺도록 부름을 받았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대가 포도밭의 일꾼이라면, 그대의 손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가를 보라. 하느님께 열매를 바치지 않는 자는 이미 포도밭 밖에 있는 자다.”(Sermo 179,2 요약)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된 구원의 포도밭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자라난다. 그분께 충실한 이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새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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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죽임 당하는 종과 죽이는 소작인>

마태오 21,33-43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죽임 당하는 종과 죽이는 소작인>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습니다

이 밭 임자는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밭 임자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습니다

포도밭을 맡아 가꿀 소작인들과
주인 몫의 소출을 받아오도록
보내진 종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포도밭 주인으로부터
맛난 포도를 가꾸어 바치라는
단 하나의 사명을 받은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랑곳하지 않고
피땀 아낌없이 쏟으며
탐스런 열매 가득 일구어낸
성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믿음에 감사드리며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돌리려는
충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믿음을 거슬러
주인의 것을 제 것으로 삼으려는
불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것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돌려드리자는
충실한 사람들마저 가차 없이 죽이는
무자비하고 불의한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것을 빼앗자는 유혹을 뿌리치고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돌려드리고자
온 몸과 마음으로 정의롭게 맞서다
처참하게 죽임 당하는 착한 종들이 있습니다

죽임 당하는 종과 죽이는 소작인
단 한 명의 주인으로부터
좋은 포도밭에서 좋은 포도를 일구라는
단 하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단 한 명의 주인으로부터
단 하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인의 것을 빼앗기 위해 죽이고
주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죽임을 당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 죽이는 이들은
내일 비참하게 죽지만
지금 죽임을 당하는
이들은 내일 찬란하게 부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하느님나라를 꽃피우라고
주님이요 벗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벗입니다

모든 이를 보듬으라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연민어린 마음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보듬는
따스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애써 등을 돌리고
주님을 자신의 안락의 도구로 삼는
차가운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고루 나누라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재물로
가난한 이를 돌보는
청빈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끝 모를 소유욕에 휘말려
주님을 돈벌이의 수호신 삼는
탐욕스런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모든 이를 섬기라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능력으로
약한 이를 일으켜주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더 높은 곳에 오르려
주님을 권력의 화신으로 전락시키는
오만불손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죽음 같은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은
따스한 그리스도인이기보다
차가운 그리스도인이 되라 부추깁니다

벗들을 살리기 위해 죽으신 주님께서는
차가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따스한 그리스도인만이
당신의 참 제자요 벗이라 하십니다

재물이 최고의 덕목이 된 세상은
청빈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탐욕스런 그리스도인이 참 사람이라 합니다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신 주님께서는
탐욕스런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청빈한 그리스도인만이
당신의 참 제자요 벗이라 하십니다

권력이라면 못할 게 없는 세상은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오만불손한 그리스도인이 지혜롭다 합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주님께서는
오만불손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당신의 참 제자요 벗이라 하십니다

지금여기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 세상 넘어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지금여기 이 세상입니까
주님이요 벗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선택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선택의 결과는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선택의 책임은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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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은망덕하지 마라>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신다(요한 15,9). 그래서 하느님은 미리 사랑의 질타를 하신다. 오늘 이 시간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간직하길 기원한다.

독서를 통해 포도밭을 가꾸는 주인의 노고와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주인은 산등성이에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탑을 만들고 즙을 짜는 틀을 만들어 놓고 포도가 송이송이 맺기를 소망했다(이사5,1-2).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들 포도가 열렸다(이사5,4). 온갖 정성을 다했건만 결과는 영 딴판이었다. 이 비유 말씀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 수고와 땀이 함께하는 만큼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는 만큼 사랑을 열매 맺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황폐한 밭이다.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훌륭하게 잘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고 멀리 떠났다. 추수철이 되어 그 도조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다. 그랬더니 이 소작인들이 간이 부었는지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마침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고 그 포도밭을 통째로 먹어버리려고 했다(마태21,33-38).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그러니 그 주인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 소작인들은 욕심으로 화를 자초하여 죽고 새로운 소작인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되었다. 결국 “좋고 나쁨은 그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 물건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신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예레 31,3).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다(로마5,8). 그리고 마침내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다.”(에페2,4).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음에도 은혜에 대한 감사에 인색하고,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21,43). 결국 감사할 줄 모르면 죽음에 이르고, 소출을 내는 사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 ‘받은 은혜는 돌판에 새기고, 베푼 것은 모래에 새겨라’ 했는데 우리는 거꾸로 사는 것이 현실이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필립비 4,6-7)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감사하라.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선물로 주어진다. ‘손 놓고 그냥 살아갈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웃의 삶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이웃에게 가장 쓸모있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시편 50,14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려야 한다.’(에페5,20).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행실로써 감사드려야 한다.”(성 필립보네리)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교부 실루스).“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필리4,9).

감사를 드린 인물을 보면, 아브람은 자기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자리에 제단을 쌓아 바쳐 감사를 드렸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치며 기도를 올렸다. “내 마음은 주 하느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1사무2,1).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모시고 번제와 친교제를 바친다음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고 아삽과 그의 일족을 시켜 감사를 드리게 하였다(역대상16,7).

사도들도 예수께서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그들은 엎드려 예수님께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24,51-53).

예수님도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후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요한11,41).

이제는 우리차례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감사할 일을 찾아라. 내가 숨 쉬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공짜로 숨을 쉬고 있으니 많은 빚을 진 것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도 은총이다.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로움인지 알고 감사해야 한다. 날마다 복음을 따라 살고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 순간을 감사합시다.

잔소리 많은 아내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여보, 나 부탁이 있는데 당신 벙어리가 될 수 없겠소?’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나도 부탁이 있어요. 당신 귀머거리가 돼 줘요! 벙어리가 되어달라는, 배우자가 있어서 감사하고, 귀머거리가 되어달라는 아내가 있어서 감사하다. 배우자가 계시지 않는 분은 그런저런 부탁받을 일 없어서 감사하지요. 자식이 말썽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어 감사하고, 말썽 피우는 자식이라도 있어서 감사하지요. 아픔을 느끼게 만든 자식이 있어서 가슴이 아프지만 감시하고, 부모님이 계셔서 감사하고… 감사합시다.

“주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고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은 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지켜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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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군종교구 김영송 알베르토 신부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이루는 관계를 포도밭과 그 주인에 비유하고는 합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의 두 비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포도밭 주인은 애지중지하며 포도를 키웠지만 들포도가 맺히고 맙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그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않아 실망한 경험,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였던가 하며 허탈함을 느끼거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분노한 경험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엉뚱한 열매를 맺은 포도를 보며 앞으로는 포도밭을 황폐하게 내버려두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포도밭이 배경으로 나오지만,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제1독서의 포도밭 주인이 한 행동은 그나마 이해가 되지만, 복음 속 소작인들의 행동은 그저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정해진 대로 소출을 보냈다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그들은 왜 주인이 보낸 종과 아들을 매질하거나 죽이는 끔찍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그 까닭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포도밭을 자신이 차지할 수 있다는 탐욕에 사로잡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제2독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
나무처럼, 좋은 포도를 맺는 포도밭의 일꾼처럼, 하느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지 꼼꼼히 살피고, 그것을 오롯이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있는지 돌아보며 지낸다면, 오늘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풍성한 소출과 함께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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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어느 본당의 보좌 신부로 있었는데, 몇몇 신자들이 저의 강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강론은 깊이가 있어요.”

부족한 제 강론을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주석서나 신학 서적 등을 읽으면서, 그 깊이를 더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사 강론을 마치고 “잠시 묵상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에 맨 앞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이제까지 깊이 있다는 신자들의 말씀을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내용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사실 할아버지의 말씀에 순간적으로 화가 많이 났습니다. 열심히 준비한 것을 알아주지 않음이 서운했고, 할아버지의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관에 돌아와서 천천히 제 강론을 살펴보며 깨달았습니다. 깊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 결과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게 강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점점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맞다면서 원래의 스타일로 계속 강론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지금의 제 모습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더 나은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포도밭 임자는 직접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든 조건을 갖추어 줍니다. 이 좋은 조건에서 소작인은 많은 소출을 내면 됩니다. 즉, 소작인은 주인이 아니라, 단지 위탁받아 돌보는 청지기이자 관리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내자, 소작인들은 매질하고, 죽이고, 돌을 던져 죽입니다. 더 많은 종을 보냅니다.

끝없이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를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들까지도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포도밭을 완전히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작인의 착각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혈통과 종교적 기득권을 내세워서 구원이 보장된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소출인 회개, 사랑, 정의, 자비의 열매를 맺는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21,43)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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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역사를 보면 영원한 강자는 없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제국도 일어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중국은 진나라의 통일 이후 여러 왕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렀습니다. 세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와 로마가 있었고, 이슬람 제국과 대영 제국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미국이 세계의 강대국이지만 앞으로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자전거는 계속 페달을 밟아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개인도, 국가도, 공동체도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21세기를 이끄는 반도체 산업도 그렇습니다. 반도체의 시작은 미국이었고, 한때는 일본이 뛰어난 기술력과 제조 능력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이 과감한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면서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와 HBM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 역시 영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고 새로운 기업과 나라가 도전할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끊임없이 배우고 변화하며 새로워질 수 있는지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어느 순간 멈추고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내면을 이끌어주는 종교의 세계도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영혼을 이끌어 온 각 종교에는 저마다 아름다운 장점이 있습니다. 이슬람교에는 기도와 순명의 전통이 있습니다. 하루의 삶 속에서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 하느님을 기억하려는 자세는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불교에는 수행과 자비의 정신이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돌아보고 마음을 다스리며 다른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가장 아름다운 장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사랑과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상처 입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소중한 장점인 사랑과 희생을 얼마나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오래된 말이 있습니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곧 “교회는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쇄신한다는 것은 세상의 유행을 따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대에 맞추어 복음의 내용을 바꾼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고,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성당이 크고 신자가 많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공동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미사에는 참여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무관심하며, 교리를 잘 알면서도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내가 한 사람을 더 이해하고, 한 번 더 용서하며, 조금 더 나누고, 조금 더 사랑할 때 교회는 새로워집니다.

오늘 제1 독서와 복음은 모두 포도밭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좋은 땅을 마련하시고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지만 기대했던 좋은 열매 대신, 들 포도가 열렸다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긴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인은 때가 되어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였으며 마침내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소작인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가정도, 본당도, 교회도 하느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 주신 포도밭입니다.

역사에는 영원한 강자가 없습니다. 기업도, 국가도, 제도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믿는 교회는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 쇄신은 거창한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조금 더 기도하는 것,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것,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것,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받기보다 나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포도밭을 맡겨 주십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맡겨 받은 포도밭에서 사랑의 열매, 자비의 열매, 정의의 열매, 평화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어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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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증해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은 정해져 있지만, 어느 쪽 길로 갈 것인지는 각자 스스로 선택합니다.

어떤 길이 ‘구원의 길’인지 몰라서 못 갔다고 변명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고 예수님을 알 기회도 없었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한 번이라도 복음을 들었다면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 하나뿐입니다.(요한 14,6) 그 길 외에는, 아무리 길이 많아도 모두 ‘멸망의 길’입니다.>

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앞부분은(33절-36절),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인내’입니다. <비유의 진짜 주인공은 소작인들이 아니라, 즉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인내’에서 에제키엘서에 있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3)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아들을 보낸 일은(37절), 하느님께서 메시아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을 가리키고,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인 이야기는(38절-39절),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그러나 종말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관’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38-40) 그래서 종말과 재림은, ‘하느님의 인내가 끝나는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경우로 좁혀서 생각하면, 각 개인의 임종은 사실상 종말과 같습니다. 회개는 임종이 닥치기 전에, 즉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4) 41절과 43절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영예로운 은총이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갈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그 은총은 ‘특권’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으로서 더 이로운 점은 무엇입니까? 할례의 이점은 무엇입니까? 어느 모로 보나 많이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그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로마 3,1-2)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맡기셨다는 말은, 메시아의 ‘구원의 복음’을 주셨고, 그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로마 3,29) 신앙생활에 특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영예로운 은총이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왔다는 것은, 복음대로 살면서, 즉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사명’이 우리에게 맡겨졌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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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강성구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께서 준비하시는 포도밭>

‘창조 시기’ 를 마치면서 생태적 회개를 통하여 다짐한 것들을 실천하여,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파수꾼이 되어야겠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포도밭 주인과 포도밭 소작인의 관계로 우리에게 전하여 줍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고, 포도밭은 하느님 나라를 상징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제각기 주님께서 맡겨 주신 ‘자신의 포도밭’ 이 있으며, 저마다 각자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소작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포도밭의 포도나무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1독서 묵상> 예언자 이사야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공정과 정의를 바라시는데 피 흘림과 울부짖음으로 응답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잘못된 생활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었다고 전합니다.

<복음 묵상>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 소작인들에게 소출을 받아 오라고 보낸 주인의 종들을 매질하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악한 소작인들을 없애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칠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긴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2독서 묵상> 사도 바오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참된 것, 고귀한 것, 의로운 것, 정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영예로운 것, 덕이 되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실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합니다. 좋은 열매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열릴 것입니다. 기도와 감사의 열매, 자비와 용서의 열매, 사랑과 일치의 열매, 정의와 진실의 열매,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이익보다 사랑을, 경쟁보다 나눔을, 성공보다 충실함을, 편안함보다 진실함을 살아내는 신앙인이 되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신앙인은 말보다 삶으로 복음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영광(현존)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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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박상언 그레고리오 신부님]

<내 것이라는 착각>

사람에게 내 것이라는 착각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분명히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빌렸는데도 자연스럽게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생기더랍니다. 어렸을 때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호의로 준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써야 할 때가 되면 “내껀데 왜?”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수많은 것을 받습니다.

지구 환경을 포함한 물, 공기, 딛고 있는 땅, 각자의 능력, 시간, 생명 무엇하나 하느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지요. 그런데 어느샌가부터 자연스럽게 이것들은 내 것인 겁니다.

하느님께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고, 놀고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중 하루는 원래 주인이 다시 가져가신답니다. 그러자 또 “내껀데 왜?”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 놀고, 뭔가 더 하고 남은 시간에 성당에 가려고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합니다. 심지어 그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리는 경우도 있지요. 참 당연한 건데 이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많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들로 돈도 벌게 해 주십니다.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 시간, 배경 심지어 우리가 모르고 받는 약간의 운이나 숨은 도움 등 이러한 것들을 쏟아부어 주시면서 우리가 좀 더 윤택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게 해 주시며, 그중 10분의 1만 원래 주인이 다시 가져가겠다 하십니다. 그러자 또 “내껀데 왜?” 하는 생각이 들지요. 사고 싶은 것 사고, 하고 싶은 것 하고, 이래저래 필요한 것들 다 하고 남은 것들로 어떻게든 해 보려고 머리를 굴려봅니다. 당연히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건데 참 이상합니다.

포도밭 주인이 소출을 받아 가는 것은 주인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당연한 일 앞에 내 것이라는 착각으로 인해 인색해진다면 참 안타까운 일 아닐까요? 물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지만, 혹시라도 하느님께서 본전 생각이 드신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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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승호 요셉 신부님]

<망부석이신 하느님>

커다란 포도밭의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포도밭 농사를 맡기십니다. 포도밭을 가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닌 듯 합니다. 종들과 함께 지내시려고 소작인들로 하여금 포도밭을 일구어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자신의 본분을 잊은 채 주인에게서 포도밭을 강탈하려 합니다. 욕심에 눈이 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욕심에 눈이 멀게 되면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동생(아벨)을 죽이는 형(카인)의 모습, 형(에사오)을 속이는 동생(야곱)의 모습, 동생(요셉)을 팔아넘기는 형들(요셉의 형들)의 모습, 겁탈한 여인의 남편(우리야)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왕(다윗)의 모습, 심지어 스승(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제자(유대)의 모습은 인간이 욕심을 부리면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는 추악한 죄악이며, 성경에서는 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욕심이 없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역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욕심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동물 세계에서는 생존에 관련된 욕심이 주된 내용이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삶 전반에 걸쳐 일어납니다. 그리고 욕심이 욕심을 계속 낳으면서 종국에는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포도밭 소작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소작인들에게 희망과 기대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포도밭 주인을 바라봅니다. 주인을 배반한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회개할 것을 종용하고, 더 많은 종들을 보내고, 결국에는 아들까지 보내는 어리석어 보이기까지하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하지만 포도밭 주인의 기대와 기다림에도 끝내 돌아오지 않는 소작인들은 결국 그에 상응한 대가를 받으면서 욕심의 끝이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반면,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기다렸던 포도밭 주인은 더욱 속상한 마음으로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 욕심의 끝이 보여준 멸망과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린 포도밭 주인의 참 사랑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듯이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세상의 삶이라는 포도밭에서 자신의 삶이라는 포도를 가꾸도록 불림을 받은 우리 소작인들은 제때에 달고 맛난 포도를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부족함 많은 저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기다려주시니 이제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다가가렵니다. 부족한 모습에 망설이지 않고 부끄러운 모습에 주춤거리지 않으며 저를 위해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의 그 깊고 따뜻한 사랑에 힘입어 회개란 이름으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아버지, 저를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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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예언서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밭에 비유해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사야에언자는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이사 5,7)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아끼며 애지중지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 조상들에게 해 주었던 은혜는 잊어버리고 악의 길로 나가는 못된 짓을 한탄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합니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이사 5,4) 들포도는 다른 말로 산머루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도 포도밭을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기고 멀리 떠납니다. 포도 철이 되자 자신의 도지를 받으려는 뜻에서 종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매질하거나 더러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다시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여전히 소작인들은 못된 짓을 합니다. 결국에 주인은 자신이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들을 맞는 소작인들의 태도는 포도주인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8-39)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며 구약의 시편을 인용하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3)

화가 난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벌을 내리고 그 포도밭을 다른 소작인들에게 준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종들은 예언자를 말하는 것이고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비유 말씀에서 포도밭 밖으로 내 던진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 밖 골고타 언덕에서 돌아가시리라고 예견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비단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두고 하신 것이겠어요? 우리의 삶 전체를 포도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복음을 깨닫고 그렇게 살도록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바쁜지요? 왜 그렇게 욕심이 많은지요? 왜 그렇게 핑계가 많은지요?

직장 동료와 친구들과의 산행이나 식사 시간을 재면서까지 참석하면서도 주님의 초대에는, 또 기도에는 등한시 할 때가 있지요. 일 때문에 우리는 곧잘 주님과의 시간을 미룰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대접받고 사람들 앞에서 우러러 보이기를 원합니다. 누가 찌그러지고 무시당하고 챙피를 당하는 것을 원하겠어요?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대로 영광이 아닌 수난 받는 메시아로서 사람들의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예언을 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포도밭의 비유에서 주인이 포도나무를 심어놓았는데, 열리는 것은 ‘들포도’(이사 5,2)라 주인이 실망하는 모습을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떠나 이방의 신에 마음 빼앗기고 결국 바빌론 유배의 비운을 맞아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포도밭을 극진히 사랑하셨는데, 결국 그들은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을 떠납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포도밭 노래는 예루살렘 멸망과 종말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고 성실하게 이스라엘을 사막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성실과 사랑 앞에 한 것이라고는 이방인의 신들을 섬기는 것과 하나의 백성이 서로 등지고 갈라선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이사 7,7)

예수님께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포도밭 주인과 소작인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포도밭이라는 상징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그 포도밭을 내주고 멀리 떠납니다.

포도 철이 되자 주인은 자신의 몫을 받기 위해 종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다시 보냅니다. 그런데 그 소작인들은 그 아들까지 죽여서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화가 난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벌을 내리고 그 포도밭을 다른 소작인들에게 준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종들은 예언자를 말하는 것이고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비유 말씀에서 포도밭 밖으로 내 던진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 밖 골고타 언덕에서 돌아가시리라고 예견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이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8-39)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며 구약의 시편을 인용하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3)

버림 받아야 할 돌의 신세를 주님께서 당신 자신으로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에게 무시당한다면 화내거나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구약의 창세기 인물 중에 형제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심지어는 몇 푼의 돈에 팔려가는 신세였던 요셉을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가족인 형제들에게 따돌림 받는 것은 지옥이 아닐까요? 어쩌다 만나는 것도 아니고 눈 뜨면 만나야 하는 것이 형제들이고 가족이지요.

이해 받아야하고 사랑 받아야 하는 동생을 팔아 넘기 형들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으러 머나먼 스켐까지 갔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도탄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먼 길을 온 그를 반기기는 커녕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는 이유로 그를 물그덩이 넣었다가 다시 이집트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닢에 팔아 넘기지요.

사도 바오로는 필리핀 서간에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이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초대를 받은 우리는 포도밭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일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폐쇄된 구원의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요. 그들의 종교적 오만과 위선은 하느님의 아들까지 죽이는 것입니다.

포도밭에서 죽음을 맞는 아들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 포도밭 밖에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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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심부름시킬 때마다 돈 백원을 주었습니다. 수고비 덕분에 아들은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아들이 너무 돈을 밝히는 것을 알고서는 한동안 심부름을 시키고도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동안에 심부름한 내력과 수고비를 합산한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서 잠시 후에 역시 쪽지 하나를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열 달 동안 너를 내 뱃속에서 기르고 낳느라고 고생한 수고비, 너를 키우면서 젖먹이고, 기저귀 갈아 준 수고비, 네가 아팠을 때 밤잠 못 자고 마음 졸이고 간호해 준 수고비, 그것이 얼마나 될까? 』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설파하였지요. 자기를 알면 자신이 앉을 자리와 설 자리,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자기를 모르면 자기의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속의 소작인들은 아들이 상속자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가당치도 않은 욕심에서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했으며, 포도원 주인의 아들마저 죽인 까닭도 다름 아닌 탐욕이라는 덫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듣고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우리 생각과는 달리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재물에 눈이 멀면 사람을 죽이고, 심지어 부모나 형제 그리고 자식까지도 죽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이렇게 재물에 눈이 멀면 부모와 형제 심지어 자식까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탐욕의 노예가 되면 이성이나 양심까지 마비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소작인들은 처음에는 주인을 대단히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일자리를 준 주인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세월이 흘러가면서 차츰 주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포도를 수확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가정을 꾸려가야 하고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더더욱 부모를 봉양하기도 해야 한다면, 그들은 주인에게 바쳐야 할 몫까지도 자신들이 다 써버렸거나, 쓰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어려운 처지와 상황이 되면 사람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져 보이겠지요.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주인은 부자이며 자신들은 가난한 사람이고, 주인은 포도가 아니라도 먹고 살기 충분한 재력이 있지만, 자신들은 그렇지 못하고, 수확할 포도는 자신들의 수고와 정성의 산물이며, 주인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됩니다. 급기야 자신들의 수고와 정성의 대가를 주인에게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그랬기에 주인의 종들이 도조를 달라고 왔을 때, 그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고, 죽이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종들에게 어쩔 수 없이 소작료로 바칠 것까지 다 써버렸노라고 사정하면서 주인에게 되돌아가서 자신들의 어렵고 불쌍한 처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 번 달리 먹고, 달리 생각한 그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간악하게 변해갔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작은 죄가 걷잡을 수 없이 큰 죄가 되어버렸습니다.

주인이 매번 종들을 다시 보냈다는 것은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탐욕에 눈이 멀고 눈이 뒤집힌 그들에게는 주인의 깊은 배려와 신뢰까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돌같이 굳어진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은 소작인들이 자기의 아들은 알아봐 주겠거니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습니다. 세상에! 어찌 그렇게 어리석고 우둔할 수가 있으신가! 그렇게 우매한 주인이므로 종들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까지도 못된 소작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빠 하느님의 한없이 자비하심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시는 비유란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그처럼 어리석고 우둔한 까닭은 하느님 역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눈이 멀어 계십니다. 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주인에게 그처럼 고마워하던 소작인들이 그렇게 악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배은망덕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며, 믿을 수 없는 존재 또한 사람입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이 그처럼 배반하고 변절해도 끝까지 믿어주시고, 참아주시고, 견디어 내시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의 믿음과 사랑은 끝이 없으며 영원하시다는 점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비유의 결론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21,40)라는 질문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그래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까지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시면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집 짓는 이(21,42참조)와 소작인은 누구일까요? 집 짓는 이들과 소작인들은 바로,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부하였으며,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도록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안정만을 추구하는 사람,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사람, 자기 아성을 쌓는 사람, 불의와 부정의 집을 짓는 사람,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내버린 돌’은 바로 이들의 손에 붙들려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십니다.”(21,43) 남의 불행이 우리의 행복이긴 하지만, 이 또한 하느님의 공정한 정의 실현이고 하느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필4,7)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에 관해서 “자신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4,9)라고 권고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신 예수님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 또한 소작인들과 같은 인간적 본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미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며”(4,8)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 불의하고 부정한 소작인들에게서 빼앗아 넘겨주신 하느님 나라의 포도밭에서 소출을 많이 내고, 소출을 많이 바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 버린 돌, 그리고 내 버린 돌들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지은 하느님의 집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하며 자랑스러울지 생각하니,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21,42)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4,6) 포도밭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으니 충실한 일꾼답게 포도를 많이 수확해서 소출을 제때 바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복음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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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주일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아는 은총이 우리에게까지 닿게 된 까닭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마태 21,33)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기 시작하십니다. 이 비유의 배경은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대목을 그대로 언급하신 것입니다.

포도밭을 만드는 주인을 관상합니다. 그분이 얼마나 신이 나고 흥겨워하시는지요. 그분에게 포도밭은 단순한 소유지를 넘어, 애인이고 신부이며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해 당신 짝으로 삼으실 때의 기쁨과 환희가 우리 가슴까지 떨리게 하는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9)

그런데 포도밭 소작인들은 처음 밭을 경작할 수 있게 선택되었을 때의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넘보지요. 합당한 소출을 바치지 않으면서 주인의 종들을 해치고 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내 포도밭을 위해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이사 5,4)

포도밭 주인이신 주님의 눈물 어린 탄식이 들립니다. 주인은 좋은 터를 잡아 온갖 시설을 다 짓고 지극 정성으로 포도밭을 마련했습니다. 사랑을 퍼부었으니 사랑 가득한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했지요.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시고 떫고 볼품 없는 야생 들포도가 열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로 무엇을 더 어떻게 해주어야 했을까요…

이 탄식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 21,37) 하며 끝까지 소작인들을 믿은 순진하다 못해 바보스런 복음 속 주인의 탄식입니다.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던 주인이 당신 백성에게서 배척받는 적반하장의 극치일 겁니다.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은 내줄 것입니다.”(마태 21,41)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른 소리를 합니다. 누가 들어도 불의한 상황이기 때문이니까요.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소작인들”

새로운 소작인들은 이 포도밭의 주인이 누구이며, 자기들은 그와 맺은 계약을 통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꾼들입니다. 자기들 노동의 몫을 가져가더라도, 땅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합당한 소출을 바칠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지요.

주님과 백성의 계약은 종이 한 장으로 남기 이전에 먼저 서로의 영혼과 마음에 새겨집니다. 둘 사이에는 부르심과 응답이 있었고, 그에 따른 선택과 책임이 있습니다. 이를 잊은 존재는 결국 포도밭을 빼앗길 것입니다. 사랑으로 시작된 계약은 사랑을 맺어야 하니까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단호하고 냉정한 선언입니다. 이대로라면 비유 속 소작인들처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은 결국 하느님 나라를 빼앗길 터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 전 그들의 마음 속에 떠오른 적도 없었던 지구 반대편의 우리에게까지 하느님의 나라가 전해지게 되지요.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받은 우리 모두는 “제때에 소출을 내는 민족”으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이 은총에 우리의 공로는 없습니다. 다만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작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필리피서의 짧은 대목 안에 거룩한 영적 단어들이 보석처럼 촘촘이 박혀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기도, 간구, 하느님께 아룀”
“참되고 고귀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영예롭고 덕이 되고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에 간직하고, 그대로 실천함”

오늘 필리피서 대목 안에 나오는 말씀들을 모으니, 이야말로 우리가 바쳐야 하는 소출임을 알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그분과 깊은 관계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직접적인 소출이지요. 온갖 덕과 선을 간직해 실천하는 것은 형제자매와 이웃을 이롭게 하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결국은 이조차도 하느님께 돌아갈 소출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복음 환호송)

우리는 제때에 소출을 내는 소작인으로서, 주인의 부르심에 감사하며, 그에 맞갖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열매가 우리 자신들만 배불리고 풍요롭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소출은 주님의 공정과 정의가 이루어지는데 쓰여야 합니다.(이사 5,7 참조) 포도밭을 짓고 꾸밀 때 주인이 가졌던 설렘과 기대, 사랑을 떠올린다면 그분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지요.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시리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우리에게까지 다가온 주님의 부르심과 기대를 경이롭게, 감사히 받아들입시다. 가장 먼저 선택하신 이들에게 모질게 배척받으신 그분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서, 부족하지만 풍성히 열매 맺고 소출을 바치는 신실한 백성이 되도록 애를 씁시다.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과 함께면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6.9)

오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를 사부로 모시고 살아가는 저희 모든 프란치스칸들을 축하해 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작음과 형제애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제때에 맺는 하늘나라의 소작인들이 될 수 있도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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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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