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오 18장 15절_20절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죄지은 형제를 올바른 길로 이끌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 말씀은 교정을 시도하는 절차를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의 죄가 불필요하게 알려지지 않도록 먼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설득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개인적인 노력이 그다지 효력을 가지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로,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를 다시 타일러 보는 것입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그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마저도 효과가 없다면, 마지막 단계로, 교회가 나서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 단계에 걸쳐 충분히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그 사람의 완고함이 계속될 경우, 마침내 교회는 판단하게 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부분은 교회가 그런 완고한 자에게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기보다는, 그가 회개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 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꾸짖거나 면박을 주는 것은 올바른 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발심만 불러일으킵니다. 교정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미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때문에 타이르고 설득합니다. 레위기는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일이 이웃 사랑의 계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17-18).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이 뉘우치는 데 충분한 기회를 주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답이 없다며 너무 빨리 포기하여 버리는 것은 아닌지, 또는 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수치심을 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야고 5,20).
(정천 사도 요한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한사람이 가서 권면–>두세 사람과 함께 가서 권면 –> 교회의 이름으로 권면… 과연 우리 공동체에서 가능한 이야기인가요? 우리는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에서 어떻게 신앙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지, 권면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만약 권면을 하고 있지 못하면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주님과 멀어지게 한다고 합니다. “나름데로 착하게 잘 살고 있다”라는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지, 남들이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들려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복음말씀의 향기♣ No4703
9월6일 [연중 제23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춘천교구 안효철 디오니시오(성산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도 이러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수도공동체에 몸담은 지가 40여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수련기 때 계획으로는 지금쯤 공동체 생활의 달인이자 친교의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순간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직도 공동체 생활이 부담스럽고 어렵습니다. 아직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공동체가 내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요즘도 이런저런 수도회 회의에 참석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가 있습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입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 말은 쉬운데, 정말이지 요원한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저희는 또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추구한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따뜻한 형제애가 필요합니다. 특히 공동체 책임자들의 부성애, 그리고 흘러넘치는 일상적 친절과 배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책임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공동체 안에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예의주시하고 고무하는 역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춤추게 하고 살맛 나게 하는 칭찬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끝없는 용서, 한없는 인내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가치 있고, 꼭 필요하고, 차원이 다른 사랑의 실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형제적 교정’입니다. 그러나 형제적 교정은 말은 쉬운데,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고도의 조심성과 극도의 예민함, 숙련된 기술과 강도 높은 기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 형제가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한 형제의 눈이 뭔가에 잔뜩 씌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형제가 본래의 정체성과 사명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래서 증거의 삶은 사라지고 반대 표양이나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를 가장 사랑하는 형제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프겠지만, 정확하고 예리한 형제적 교정 작업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작업이기에 적당히 해서는 낭패를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문제의 핵심과 정확한 현실을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교정 작업을 위한 로드맵을 세워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실효성 있는 교정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 15-1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당사자 ‘단둘’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 그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다음 단계를 밟으라는 것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한 가족, 한 형제로 여기면 절대로 한번 시도해보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 너그러운 상담자, 깊이 있는 영적 지도자와 함께 또 다시 그의 회개를 위해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얼마나 보석 같은 관계인데, 단칼에 끝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의 의미>

오늘 복음은 ‘교회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도 작은 교회라 하고, 소공동체도 작은 교회라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주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이기 때문에 굳이 가톨릭교회에 속해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는 실존 인물 ‘제리 콘론’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70년 당시 잉글랜드는 400년이 넘게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심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민간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무직자인 제리 콘론은 지붕을 뜯어내 파는 좀도둑이었습니다. 그런데 총으로 영국군을 저격했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또 도망가는 중에 독립 시위를 하는 틈에 끼여 폭동 주동자 혐의까지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계속 일어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잉글랜드에 있는 작은어머니 집에 보냅니다. 아버지에게 제리는 나이 먹고도 철없는 어린애 같고, 제리 입장에서 아버지는 잔소리와 억압을 하는 존재입니다.

제리는 배에서 폴이라는 친구와 마주칩니다. 제리는 작은어머니 집에 가지 않고 폴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히피족들과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히피들조차 아일랜드인에 대해 차별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다시 런던 시내를 방황하던 제리는 길에서 우연히 화류계 여자의 집 열쇠를 줍고, 그 집에 몰래 들어가 돈을 훔칩니다.

그런데 이때 런던 길포트 테러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리는 훔친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 폴이 경찰에 잡혀갔고, 영국 경찰이 제리의 집에도 들이닥쳤습니다.

영국 경찰은 아버지를 쏴버리겠다는 협박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공범으로 몰려 온 가족이 감옥에 갇힙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기에 종신형을 받고 제리는 아버지와 함께 수감생활을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종교의 힘으로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렇게 14년이 흐릅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데, 그가 15년 전 런던 길포드 식당 폭탄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 일로 제리는 지금까지 포기했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제리는 변호사 가레스에게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일을 녹음해서 보내고, 변호사도 애초에 사건 수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혀냅니다.  가레스는 끈질기게 진실을 파헤쳤고, 결국 1976년에 항소심에서 제리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제리 콘론은 한 마디로 동네 양아치였습니다. 물론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밖에서 사나 감옥에서 사나 그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은 괜찮으나 죽은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아버지의 이름으로’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이 무죄를 받아내야 아버지도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명예가 곧 아버지의 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교회를 그냥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분의 명예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명예란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이 권한으로 살라는 것은 곧 당신으로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명예가 교회를 통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당신 권한을 행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제리 콘론의 노력을 통해 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되었듯,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위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본성이고 권한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정하였고, 교회를 통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한 것까지 부정하였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그런 권한을 부여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교회의 사제였을 때부터 죄를 자신의 고행으로 용서받으려고 했지 교회에 부여한 그리스도의 권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빠진 교회라는 것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교회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죄를 사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 권한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는 가족이나 소공동체 등을 작은 교회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죄 사함의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톨릭교회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분의 명예와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되어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명예이고 권한이고 본성입니다.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20: 용서하고 화해하라

1. 형제를 얻는 복음적 길: 공동체 안의 책임
오늘 복음은 교회의 내적 생활의 본질적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다시 얻기 위해 노력하라.”(15절) 사랑의 길을 제시하신다. 에제키엘서(33,7-9)는 예언자의 사명을 통해 공동체적 책임을 밝힌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언자는 백성을 심판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생명으로 돌아오도록 이끄는 파수꾼이다.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하여도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익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교회 안의 형제적 권고는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봉사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가르친다. “형제의 죄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냉담이다. 사랑은 진리를 말할 용기를 낸다.”(Homiliae in Matthaeum, 60,1 의역) 교리서는 “형제의 죄를 바로잡는 것은 자비의 영적 행위”(1829)라고 말한다. 즉,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2. 화해의 3단계: 사랑의 질서 안에서
예수님은 형제의 잘못을 대하는 세 단계의 방법을 제시하신다.
1) “단둘이 만나 타일러라.”(15절): 이 첫 단계는 인격과 존엄을 존중하는 만남이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회개의 첫걸음은 비밀스럽고 진심 어린 대화로 시작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그의 잘못을 남에게 알리기 전에, 먼저 그와 사랑으로 만나라. 사랑이 없는 진리는 폭력이 되고, 진리가 없는 사랑은 위선이 된다.”(Sermo 82,2 의역)
2)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라.”(16절): 이는 단순히 법적 절차가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 참여를 의미한다. 공동체는 죄를 단죄하는 집단이 아니라, 회개로 인도하는 치유의 공간이어야 한다.
3) “교회에 알려라.”(17절): 마지막 단계는 교회의 공적 개입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제명’이 아니라, 형제의 회복이다. 교회의 징계는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되돌아올 문을 열어두는 징계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1980)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진정한 정의는 사랑 안에서만 완성된다. 교회는 죄인을 벌하는 곳이 아니라, 자비로 그를 치유하는 어머니이다.”(DM, 12항 의역)

3.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 교회의 권위와 사명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18절)라고 하신 말씀은, 이미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마태 16,19)을 공동체 전체에 확장한 것이다. 이는 교회의 권위가 단일 인물에게서만이 아니라, 사랑과 일치 안에 있는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졌음을 뜻한다. 교회 헌장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모으시어, 성령 안에서 일치하게 하시며, 진리와 사랑 안에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9항 의역)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머무는 신비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는 지배나 통제가 아니라, 화해시키는 사랑의 봉사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맡기신 ‘화해의 임무’(2코린 5,18)를 수행한다.”(981항 의역) 이 직무의 목적은 언제나 화해이며, 공동체 안에서 죄가 은총으로 바뀌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4.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교회의 신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20절) 교회는 외적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일치하는 신앙 공동체, 곧 하느님 현존의 자리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Adversus Haereses, III,24,1 의역)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일치와 형제애의 사랑 안에 있다. 기도와 말씀, 화해와 용서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 친히 머무시어 그 공동체를 당신 몸으로 변화시키신다.

5. 사랑, 율법의 완성: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로마 13,8-10)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즉,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법은 사랑의 법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여라.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In Epistolam Ioannis ad Parthos Tractatus, 7,8 의역)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비난이 아닌 이해가, 배척이 아닌 화해가 이루어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워진 공동체이기에, 그 사랑 안에서만 진정한 권위와 일치가 유지된다.

6. 화해의 영성: 우리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공동체의 이상은 결코 추상적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 본당,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 용서와 화해의 영성이 살아나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화해하지 못하는데, 하느님과 화해할 수는 없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은, 우리가 먼저 형제와 화해하려는 마음 안에서만 생겨난다.”(2840항 요약) 따라서 진정한 신앙은 언제나 관계 안에서 증명된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살아 있는 공동체로 드러난다.

7. 맺음말: 사랑의 일치 안에 머무는 교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공동체의 본질을 묻는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는가, 아니면 얻기 위해 노력하는가? 우리는 상처를 남기는가, 아니면 화해를 일으키는가? 주님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20절)라고 하신다. 이 약속은 교회의 심장이다. 우리의 가정, 본당, 사회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할 때, 그분의 현존이 우리 안에 살아난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만 드러난다. 그 사랑의 법을 실천할 때,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내가 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마태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벗이 불신이어도
벗에게 믿음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절망이어도
벗에게 희망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미움이어도
벗에게 사랑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슬픔이어도
벗에게 기쁨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내침이어도
벗에게 품음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홀로이어도
벗에게 함께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거짓이어도
벗에게 진실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굴레이어도
벗에게 자유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저주이어도
벗에게 축복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죽임이어도
벗에게 살림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왕태언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먼저 단둘이 만나 그 잘못에 대하여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시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사람의 말도 듣지 않았을 때는 교회에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그 사람을 위하여 내가 해야 할 노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사람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공동체 밖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서로 회개하고 용서하고자 함께 기도하며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 약점을 내버려두시지 않고, 함께 노력하고 기도할 이웃을 마련해 주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노력에도 당신께서 흔쾌히 함께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말씀은 어려운 세상살이 가운데서도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되던 남편의 사업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은 코로나를 지내면서 갑자기 아파서 1년에 10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퇴원을 못 하면서 병원에서 1년을 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공부를 곧잘 하던 아들이 힘든 시기를 지내면서 대학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성경 공부도 하였고, 봉사도 많이 하였던 분이었습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구약성경의 욥 성인을 떠올렸습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며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욥에게 닥친 불행은 한둘이 아녔습니다. 마치 파도가 연이어 밀려오듯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욥의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욥과 함께 앉아 울어 주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때까지는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말없이 함께 있어 주는 것, 아픈 사람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친구들은 욥이 고통받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이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거나, 하느님께 잘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친구들의 말에는 당시의 종교적인 지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가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욥의 아픔을 들어 주기보다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했습니다. 욥을 위로하기보다 가르치려고 했고, 함께 울기보다 잘못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욥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곁에 있어 줄 사람이었습니다. 자매님에게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기에는 시련의 파도가 너무 높았고, 신앙의 깊이는 낮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에 휴가를 갔던 저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2시간 넘게 이야기하면서 마음의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잠시 하느님을 떠났었지만, 자매님을 사랑하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긴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휴게소가 나옵니다. 휴게소에서는 잠시 쉬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하며, 자동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지친 몸을 풀고 다시 길을 갈 힘을 얻습니다. 종교도 우리 인생길의 휴게소와 같습니다. 지친 영혼이 쉬어 가는 곳입니다. 상처 입은 마음이 위로받는 곳입니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다시 길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사랑의 연료가 떨어졌을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채우는 곳입니다. 그런데 휴게소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힘을 얻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때로는 운전하다가 휴게소를 그냥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급해서, 너무 지쳐서, 또는 출구를 놓쳐서 휴게소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휴게소가 그 운전자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다음 휴게소가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매님은 한동안 성당이라는 휴게소를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매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성당 건물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매님이 성당에 나오지 못했던 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자매님 곁에 계셨습니다. 눈물 흘리던 밤에도 함께 계셨고, 혼자라고 느꼈던 순간에도 지켜 주셨습니다. 자매님은 하느님을 잠시 놓쳤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자매님의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도 하느님의 신실하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할 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보내 주시고, 만남을 마련해 주시며, 작은 위로를 통해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15년 만에 만남도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자매님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저를 만나게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파수꾼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감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외치는 사람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도록 알려 주는 사람입니다. 파수꾼에게 중요한 것은 높은 곳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파수꾼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감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명예를 지켜 주라는 뜻입니다. 그의 사정을 듣고, 그의 상처를 살피며, 사랑으로 대화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오늘 복음의 목적은 잘못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되찾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죄와 잘못을 무조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공동체에서 밀어내는 것은 복음적인 충고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잠시 성당을 떠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신앙 공동체에서 멀어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느껴 하느님에게 마음을 닫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미사에 나올 힘조차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이 아닙니다. 비난도 아닙니다. 정답과 훈계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처음에 했던 것처럼, 말없이 곁에 앉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도 멀어진 사람 한 명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전화하고, 따뜻한 안부를 전하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판단과 비난의 말을 내려놓고, 용서와 사랑으로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을 다시 얻는 일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의 사명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5-20)

1)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영적인 병자’입니다. 누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고, 누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는 것이 형제애입니다. 형제애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고 해서 다 공동체인 것은 아니고, 아픔과 슬픔을 함께 겪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6-27)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39) 이 가르침은, “이웃이 너 자신인 것은 아니지만 너 자신인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이웃은 곧 너 자신이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니 생색낼 것도 없고 잘난 체 할 것도 없습니다. 형제애는 한쪽 손을 다치면 다른 쪽 손으로 치료하는 일과 같습니다. 누구나 당연히 하게 되는 일,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내가 아프기 때문에, 또 내가 슬프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13)

이 말씀은, “잃은 양 하나 때문에 목자가 크게 슬퍼한다.”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노력하고, 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슬픔과 기쁨이 곧 우리의 슬픔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2) 15절에 있는 ‘너에게’ 라는 말은 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서 파문할 수도 있는 공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파문 단계까지 가는 것일까? 금방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단 교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또 성사 모독죄나 신성 모독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심각한 죄를 지었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죄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죄인이라도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ㄴ)

3)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시켜라.”만은 아니고,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이 선포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일입니다. 만일에 형제를 회개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나는 첫째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1티모 1,15), 그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형제애는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을 타이르는 일이 아니라, 죄인이 다른 죄인에게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1-3)

그런데 “나부터 회개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면서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사실 내가 회개하는 일과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은, 순서를 따질 것 없이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을 타이르고 회개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라도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

[대구대교구 마석진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 안에서 같이>

어릴 때 부모님은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인사를 잘해야 한다. 어른들 보면 항상 인사 잘해라.”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인사 하나는 나름 잘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에게 함부로 어른들께 인사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회가 점점 삭막해지고 무서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사건들은 우리들을 어둡고 슬프게 만들고 사람들을 더욱더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회는 점점 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물들고 함께 인사하고 나누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다른 이의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모른척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요즘 말하는 꼰대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자기가 알아서 하지 내가 굳이 뭐, 라는 생각들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나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게 만든다는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행동이 나에게 영향을 주고, 그와 내가 잘못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바로 한 사람의 잘못이 그의 잘못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비효과처럼 번져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 즉 공동체에 알려 바로 잡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그것을 말할 때 자기 말이 맞다는 식이 아니라 정말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입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어떤 옳다는 생각도 사랑을 앞서갈 수 없고,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회의 아픔과 병폐는 결국 이런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모른척 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분 사랑으로 가득하길 함께 기도합시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

[부산교구 임석수 바오로 신부님]

<구하고 살리는 길>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그래도 안 들으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쉽게 내쳐 버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며, 형제에 대한 깊은 사랑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마치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상대방만 잘못한 것으로 몰아가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고, 그래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고, 또다시 몇몇이 힘을 모아서 그의 잘못을 충고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의 이름으로, 마침내는 그를 내치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수순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내치는 수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오늘 복음 구절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곧바로 풀립니다. 먼저 18장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네 손이나 발이,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고 하셨고, 이어지는 10절부터 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과, 길 잃은 양을 되찾아 오듯이 작은 이들 가운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며, 온 마음을 다해서 다른 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이어서 오늘 복음 말씀 즉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것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구구절절이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내치려는 수순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구하고 살리는 수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으며 누구도 다른 형제의 잘못을 판단하고 규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먼저 돌아보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

[인천교구 조용필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함께 구원의 길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잘못했거나 그로 인해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주 안 볼 사이가 아니라면, 대화를 통해 어떻게든 풀려고 하지 않을까요? 만약 이러한 대화를 하게 된다면 저는 꼭 묵상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와 대화하려는 목적입니다. 즉, ‘상대방에 대한 나의 불만을 표출하기 위한 대화인가?’ 아니면 ‘함께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한 대화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해보아야 합니다. 서로의 구원을 위한 대화가 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상대방을 위한 대화가 되도록 인내하며 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서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성경은 설사 상대방이 악인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그에게 설득의 말이라도 건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뒷담화’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의미하죠. 뒷담화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모여 주로 누군가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든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며 그의 불행을 바란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자리는 아니겠지요. 만약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그를 어떻게 하면 다시 교회로 이끌지에 대한 대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우리에게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주님의 목소리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그를 교회 밖 이방인처럼 취급하라는 걸까요? 아니면 공동체가 힘을 모아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라는 걸까요?

분명 오늘 복음 말씀에는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그를 버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를 위해 개인과 공동체 차원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하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홀로 판단하고 공동체에서 내 편을 만들며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이 혹시 나와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했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언제고 나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두 주님의 자녀임을 기억한다면 형제 자매를 내치는 슬픈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합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40년대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르네 스피츠’는 감옥에서 태어나서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를 모아 돌보았습니다. 위생적인 환경, 충분한 영양 공급이 이루어짐에도 전염병 감염률과 사망률이 높은 것입니다. 멕시코에 여행 갔다가 우연히 고아원 아이들을 봤는데, 매우 건강하고 잘 울지도 않았습니다. 분명히 이곳이 더 비위생적이고 영양 공급이 형편없는데도 말입니다.

비결은 이웃 마을 여성들이 매일 고아원에 와서 아기들을 안아주고 이야기와 노래를 해주는 데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스피츠 박사는 자기 책에 ‘접촉을 가진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지만, 피부 접촉 없이 유모차에서 자란 아이는 점점 약해졌다.’라고 썼습니다.

대부분의 포유류는 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렇다고 털이 없는 갑각류나 파충류처럼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피부에 상처를 입히기가 쉽습니다. 왜 털이 없을까요? 앞선 스피츠 박사의 연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털이 없는 이유는 접촉을 더 많이 느끼기 위함에 있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털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피부 덕택에 우리는 온기를 느낍니다. 이 온기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온기를 나누는, 그래서 함께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형제를 되찾는 구체적인 절차를 보여줍니다. 그들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먼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형제의 명예와 존엄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잘못을 공개하여 망신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퍼뜨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꾸짖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동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가 대화가 실패하면 곧바로 공동체 전체에 알리지 않습니다.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 상대방만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판단도 검증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가장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실패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형제의 죄가 끝내 개인적 대화로 해결되지 않을 때, 공동체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하십니다. 그를 미워하고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세리 중 한 명을 제자로도 뽑으셨습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과도 만나셨고, 또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구원의 대상으로 계속 기도하고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함께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처럼 형제가 죄의 위험에 빠졌을 때 침묵해서는 안 되고,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처럼 모든 말과 행동의 동기가 사랑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말씀을 기억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듣기 좋은 소리보다 사랑이 먼저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고 높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바른 충고를 할 수 있고, 또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청한다.

저는 강론 시작에 앞서 항상 ‘사랑합니다’ 하고 말문을 연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가끔은 ‘하늘만큼, 땅만큼’‘사랑합니다’를 한다. 우리 서로가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

사도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다.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다.”(로마13,8) 하고 ‘사랑’을 강조한다. 우리가‘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을 만큼 사랑한다면 부끄럼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18,1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충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한다. 칭찬은 아주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니 섣불리 쓴 약을 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늘이 알만큼 큰 사랑을 갖지 않은 이상 섣불리 충고해서는 안 된다. 물론 땅이 알만큼 큰 사랑이 없는 한 칭찬도 쉽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칭찬은 그로 하여금 칭찬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과 충고를 하기에 앞서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충고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자!”라고 하였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다”(성 안젤라 메리치). 성경은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고할 수 있는 큰 사랑과 온유함을 간직해야 하며 동시에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지녀야 한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12,5) 따라서 하느님의 소리로, 하느님의 뜻으로 다가올 충고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듣기 좋은 소리보다 바른말에 귀 기울이시길 희망한다. 사실, 충고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충고가 필요한 사람일수록 더 경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과 있고, 살아있는 충고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을 기억해 보자.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었다. 이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간 중 노동을 선고받은 장발장은 출소한 후 길을 헤매다가 한 신부님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성당에서 묵게 된다. 신부님은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먹을 것을 주며 위로했다. 장발장은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접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신부가 잠든 사이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은촛대를 집어 들고 도망친다. 잠시 후 경찰에 붙잡힌 장발장은 성당으로 끌려왔다. “신부님, 혹시 은촛대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이 성당에서 훔친 것 같아 잡아 왔습니다.” 말없이 장발장을 바라보던 신부님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 촛대는 제가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날 이후 장발장은 변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훗날 이웃의 존경 받는 사람이 되어 시장까지 되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사랑이다. 자녀, 친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정곡을 찌르는 논리 정연한 설득과 충고가 아니라 진심어린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복음에서 ‘타일러라’는 말씀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배려하여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사실 우리는 남에게 충고는 잘하면서 남의 충고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 그 한계를 잘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무엘 하권 12장을 보면 나탄이 다윗을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나탄은 다윗을 찾아와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워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다.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탄에게 소리쳤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그때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고 주님께서 내리시는 시련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였다. 결국 죄의 씨인 다윗의 아들이 죽고 밧세바가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누구나 잘못을 범하여 하느님 눈 밖에 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죄를 고백하면 그분의 크신 자비가 새 삶을 살도록 안배하신다. 예언자 나탄의 소리를 귀여겨들었던 다윗처럼 우리도 쓴소리를 귀여겨들을 줄 알고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은총이 우리를 감싸주실 것이다.

“주님,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주소서.”아멘.

사랑합니다.

=====================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이 말씀을 그대로 백성에게 전해야 하는 소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에제 33,7)라고 하시며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33,8)라고 있는 대로 말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에 예언자가 악인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하느님께서 예언자가 악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듣지 않는다면 그 죄인은 죽고 예언자는 목숨을 보존하리라고 하십니다.

‘형제적 충고’라는 말이 있지요? 교회 공동체에서 전해 오는 전통적 말인데, 오늘 주님의 복음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충고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한 형제가 잘못을 할 때에 사랑의 충고를 해야 된다는 내용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마태 18,15-16)

그리고 더 받아들이는 않는 사람을 주님께서 보시며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이웃에 대한 충고에서 정의가 바탕이겠지만 공동체에서는 사랑과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법은 차갑고 잘못에 대한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국가의 기강이 서고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세우시는 법은 사랑입니다.

말이 쉽지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 어렵습니다. R. F. 스콧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네 가지 금언을 익혔다고 말합니다.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은 결코 하지 말라.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충고는 하지 말라. 불평하지 말라. 설명하지 말라.”

공자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가지를 잘 쳐주고 받침대로 받쳐 준 나무는 곧게 잘 자라지만, 내버려 둔 나무는 아무렇게나 자란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남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말을 잘 듣고 고치는 사람은 그만큼 발전한다.’

때로는 화가 나서 감정적이거나 신경질적인 충고를 한다면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충고를 해서 받아들이면 ‘형제 하나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이기 때문에 두 세 명의 증인을 세우라고 하는 것은 공정성을 위한 것입니다. 증인을 둘 세워서 잘못된 형제를 타이르는데,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중에 이방인 취급 하라고 하십니다.

공자(孔子)님의 말씀, 육본편(六本篇)중에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 충언의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 이롭다.’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지요. ‘양약고어구이이어병 충언역어이이리어행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중국의 은나라 탕왕(湯王)은 귀에 거슬리지만 올바른 말을 하는 충신이 곁에 있었기에 그의 나라를 보존하고 번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듣기 좋은 말만하는 신하들이 가까이 있은 결과 그들의 나라는 멸망의 길에 접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사도 바오로께서 말했듯이 사랑의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로마 13,9)

그래서 어떤 때는 참 하기가 어려운 말을 할 때 그것이 비록 형식적인 것 같아도 함께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 없이 하는 대화는 어떤 결론이 있지 않는데 짧은 기도라도 하면 거기에는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을 많이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딸을 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학교 공부도 성실하게 하고 대학도 들어가고 군에 들어갔다가 직장도 좋은 회사에서 근무하며 신앙생활도 성실하게 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는 잘 하더니 대학 진학을 앞두고 성적도 떨어지고 불안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남자 친구를 사귀더니 더 정신없고 공부에도 취미가 없는 것 같아 부부가 걱정을 했습니다. 드디어 참다못한 아빠가 딸 아이에게 큰 소리를 치며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딸 아이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집은 서먹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딸 엄마는 너무 속상해서 무작정 성당에 가서 성체 앞에서 실컷 울었습니다. 딸 아이가 중학교 때까지 착실하게 복사를 하던 그 제대에서 딸 아이를 위해서 뭐라고 했는지 그냥 나오는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속으로는 왠지 시원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집에 와 보니 딸 아이가 밥을 먹으러 나왔길래 밥을 차려주고 물도 갖다 주며 딸 아이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원망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많이 원망한다고 대답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엄마도 웬인일지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딸 아이에게 성당 가서 네가 복사 하던 제대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리고 너를 위해서 기도했어! 엄청 했어!

복사라는 말에 딸 아이는 울다가 자기 방에 가서 앨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앨범에는 첫 영성체 때 찍은 사진, 다른 복사들과 찍은 사진, 보좌신부님과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 등등이 엄청도 많았습니다. 어느새 딸 아이와 그 사진을 보고 서로 쳐다 보다가 웃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시간이 많이 흐르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는 딸 아이에게 ‘너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당에서 얼마나 힘들어 하는 아이들 챙겨주었니?.’ ‘성당에서 소풍 갔을 때 생각 나?

한 아이가 넘어져서 다쳤는데 네가 그 아이 업고 걸었잖아. 나중에 네 오빠가 도와주었지만… 하여튼 너는 성실해서 엄마 속 한 번도 썩힌 적이 없는데…’ 하며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다 딸 아이의 표정이 밝아진 것을 보고 ‘남자 친구가 그렇게도 좋니?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대학 들어 간 후에 남자 친구 만나면 안 되겠니?’ 하는 말까지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딸 아이보고 함께 기도하자고 했는데, 웬 일인지 순순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릴 때부터 딸 아이는 엄마 무릎에서 기도도 잘 했지요. 어떻게 기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딸아이가 더 진지하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녁에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회사에서 아빠가 돌아오니까 먼저 가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엌에서 파를 다듬는 엄마 곁에 오더니 함께 파 다듬는 것을 거들어주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딸 아이가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 알고 있어. 대학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께. 그리고 남자 친구에게 대학 들어 간 연후에 만나자고 했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딸아이는 약속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기가 꿈꾸던 대학을 들어 갔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충고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지요. 서로 아픔과 문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지요. 참다운 충고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당장 받아들이지 않는 충고라도 기도를 하면 그 사람에게서 자라나서 큰 결실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충고는 하느님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셨기에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의 구성원은 사도들을 포함해서 부족하고 또한 죄인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살아 있는 지체들은 사도 바오로도 설명했듯이 다 다른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생명체로 이끌어 가는 것은 오늘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도 나타나듯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법을 세우고 교회를 이끌어 갈 권리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교회도 하나의 제도이다 보니 질서가 있어야 함께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충고’를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을 완성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마음과 마음 사이에
길을 내는 것은
참된 사랑입니다.

형제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참된 관계에는 말하는 것만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잃지 않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 다시 관계가
가능하도록 공간을 여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형제를
다시 바라보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충고는 심판이 되지만,
사랑에서 나온 충고는 형제를 다시 일으키는
손길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입니다.

형제를 만나기 전에 우리 마음을 만나고,
잘못을 보기 전에 그 형제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품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겸손에 있습니다.

형제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진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형제를
얻는 길입니다.

사랑은 먼저 다가갑니다.
사랑으로 사람을 얻는 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다시 길을 내는 사랑이며
다시 하느님을 향하는
진실된 기도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