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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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일 독서에서는 이웃을 용서하는 일이 주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전제로 선언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다음과 같이 청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처럼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여야 할 당위성을 주님께 우리 죄를 용서받으려는 데에서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자칫하면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선행으로 얻게 되는 보상이나 대가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오늘 복음의 비유는 오히려 우리가 용서받은 사실이 먼저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만 탈렌트를 임금에게 빚진 사람이 있습니다. 한 탈렌트도 노동자 하루 품삯(데나리온)의 육천 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인데, 무려 그 만 배에 해당하는 빚을 졌다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임금이 그 큰돈을 왜 빌려주었는지, 종은 그 돈으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지, 비유는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도 전하여 주지 않습니다. 다만 놀라운 사실 하나를 간결하게 말할 뿐입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전에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또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일일이 캐묻지 않으시고 그냥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용서는 어떠한 전제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분의 자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용서를 받은 뒤에 보이는 태도입니다.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하여 줄지, 아니면 그 빚을 갚으라고 성을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둘지 말입니다.
이웃을 용서하여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용서받은 체험과 그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입은 사람의 행동에 따라, 베푸신 자비를 다시 거두어들이실 수도 있는 분이심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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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신앙생활을 하며 누구에게 용서를 구한 경험이 있나요 아니면 용서를 해달라고 요청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없다면 신앙안에서 우리는 왜 남들을 용서해야 되는지 하나씩 이야기 해봅시다)
3. 주님을 진정으로 믿으며 신앙생활하는 사람과,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아직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자유롭게 나누어 봅시다.
4. 결심하기: 복음말씀을 토대로 어떤 신앙생활을 할지 서로 다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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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711
9월13일 [연중 제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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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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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b9_yIPkGtg
[서울대교구 정재우 세바스티아노(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생명대학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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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초대교회를 이끈 대 신학자이자 영성가, 탁월한 문학가로 손꼽을 수 있는 바오로 사도의 주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그가 남긴 서간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는데, 읽을 때마다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로마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신앙과 사랑이 얼마나 돈독하고 깊은 것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고!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 고백인지요? 교회 역사 안에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신앙 고백을 한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난 이후 바오로 사도는 즉각적이고 전격적인 회개를 하게 되는데, 회개 이후 그에게 있어 주님은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 외에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 빛나던 것들, 좋은 가문, 탁월한 율법 지식, 불 타오르는 젊음, 지칠 줄 모르는 학구열, 앞날이 창창하던 청년 지도자…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빛을 바랬고, 시들시들해졌고, 의미가 살라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이 땅에 남아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든든한 영적 지도자로 살아가는 것도 큰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 빠르게 그분 곁으로 건너가는 것은 더 큰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한쪽 발은 지상에 딛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 발은 이미 천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한쪽 눈은 방황하는 양들을 측은지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 눈은 어서 빨리 불멸의 영광을 누릴 희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조금 나이를 드신 형제자매님들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은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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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용서? 아침에 고행하라!>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1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빚 독촉을 해대는 못된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용서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왠지 용서한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자기 아들 유괴범이 마음이 편한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용서하였지만, 마음으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였다면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마음이 동요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동요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용서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지에 상관없이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그분이 좋아지지 않는 용서는 아직 진정한 용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 앞에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알바니아 예수회의 ‘안톤 룰릭’ 신부는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에 의해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상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간수들은 그를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룰릭 신부는 엄청난 절망감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달려와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구 구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고통 속에서 룰릭 신부는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위로가 느껴졌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고문자들에게 그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7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룰릭 신부는 우연히 만난 간수에게로 달려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안톤 룰릭 신부의 용서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분을 들어 높이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에게만 당신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100데나리온은 1만 탈렌트의 6십만 분의 1입니다. 6조 원의 로또가 당첨된 사람이 천만 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에서는 내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죄 용서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6조 원을 거저 받아도 기분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못하니 작은 일에도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돈의 가치를 알려면 그것을 조금은 써봐야 합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아기에게 그 많은 돈을 주어봐야 사탕 하나 때문에 짜증 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받은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받는 1만 탈렌트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만 탈렌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 대신 죗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가치를 올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1만 탈렌트를 다 써봐야 그 값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한 데나리온만 써봐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내가 고행을 할 때 깨닫게 됩니다. 주님 피의 값을 알기 위해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입니다.
요즘 고행을 말하면 중세시대 낡은 골동품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과 어느 한 젊은 사제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한 젊은 신부가 비안네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비안네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통해 하신 것이며 나는 그저 도구였을 뿐입니다.”
젊은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영혼들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왜 다른 신부들은 신부님이 고해성사 중에 하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걸까요? 그들도 하느님 은총의 도구인데요. 그들도 영혼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데요.”
비안네 신부는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친구이며 스승인 밸리 신부가 자신에게 종종 말하던 것을 그 젊은 신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죄인들의 변화는 기도로 시작하여 참회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사제이든 친구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군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물론이요 단식하고, 잠을 포기하고라도 힘든 고행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또 자신의 양 떼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겪지 않는 목자는 완전히 실패할 위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 받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과 일치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은총에 감사하고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내가 그들에게 흘려주는 은총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 자체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갖은 고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침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그 시간을 짧게라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 받은 1만 탈렌트에 감사하게 되고 하루 동안 나에게 잘못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고행하기 어려우면 운동을 조금 힘들게 해도 됩니다. 건강도 좋아지니 일거양득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받은 용서의 가치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고 고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죄의 용서는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일만 탈렌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많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됩니다. 이 기쁨 없인 어떠한 용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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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21-35: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1.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용서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용서다. 집회서는 이렇게 권고한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구약에서조차 이미 용서와 자비의 상호성이 드러나 있다. 용서란 단순히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적 행위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용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위대하게 드러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받은 자비를 이웃에게 나눔으로써 하느님 자비의 도구가 된다.”(2842항 요약)
2. 베드로의 질문: 인간적 한계와 신적 사랑의 초대
복음에서 베드로는 묻는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21절) 베드로는 ‘일곱 번’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사용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배 이상의, “일흔일곱 번까지라도”(22절) 용서하라고 하신다. 즉, 용서는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 ‘계산되는 의로움’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의 문제라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말한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닮으라는 초대이다.”(Sermo 83,3 요약) 용서는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3. 무자비한 종의 비유: 자비를 거부한 자의 파멸
예수님은 이 말씀을 구체화하기 위해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신다. 이 비유는 세 단계로 전개된다. 1) 왕의 자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일만 탈렌트)을 탕감받은 종; 2) 종의 냉혹함: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둠; 3) 왕의 심판: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33절) 여기서 핵심은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불균형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크기는 인간 사이의 잘못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받은 은총을 거부하는 행위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종이 동료를 붙잡았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받은 자비를 잊은 것이다. 용서받은 이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시 빚의 사슬에 묶인다.”(Homilia in Matthaeum, 61,4 의역) 하느님께 받은 은총은 ‘나만의 소유’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흘러가야 할 자비의 강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자비는 정의를 넘어선 사랑의 법
비유에서 왕은 정의의 기준을 넘어서는 사랑의 법을 보여 준다. 그런데 종은 여전히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율법적 사고에 머물고 있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비는 정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완성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를 초월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210, 2840항 참조)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의 절정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정의에 닫힌 마음이며, 결국 그 자신이 사랑의 질서에서 제외되는 결과를 낳는다.
5. 용서의 영성: 십자가에서 드러난 자비의 절정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것이 바로 용서의 절정,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1980)에서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는 자비의 절정이며, 용서는 정의보다 더 강한 사랑의 힘이다.”(DM, 7항 요약) 따라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라는 초대이다.
6.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회의 일치
용서는 단지 개인적 덕목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조건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용서받는 공동체이자, 용서하는 공동체이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교회는 언제나 죄인들의 화해를 통하여 자신을 새롭게 한다. 용서 없이는 교회의 친교도 존재할 수 없다.”(1425항 요약) 교회 헌장은 성사적 삶을 통해 “신자들이 서로 화해하며 공동체를 새롭게 한다.”(11항)라고 말한다. 용서가 멈추는 곳에서 교회는 깨어지고, 용서가 이어지는 곳에서 교회는 살아난다.
7. 바오로의 가르침: 용서의 근원은 그리스도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 용서의 역사다. 우리는 그분의 용서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고, 그 용서의 사명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느님 자비의 언어다. 그 피로 씻김을 받은 이들은 서로 용서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Adversus Haereses, V, Pref. 의역)
8. 결론: 자비의 교회, 용서의 제자
오늘 복음은 경고처럼 들린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자비에 닫힌 마음이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 수 없다. 그러나 용서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구원의 생명에 동참하는 길이다. “용서는 상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큰 힘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믿음의 행위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일반알현, 1983.9.14. 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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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처럼 나 또한>
마태오 18,21-35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하느님처럼 나 또한>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하느님께서
나와 벗을
있게 하시니
하느님처럼
나 또한
있게 하렵니다
하느님을
그럼으로써 벗을
벗을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나와 벗을
믿으시니
하느님처럼
나 또한
믿으렵니다
하느님을
그럼으로써 벗을
벗을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나와 벗을
바라시니
하느님처럼
나 또한
바라렵니다
하느님을
그럼으로써 벗을
벗을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나와 벗을
사랑하시니
하느님처럼
나 또한
사랑하렵니다
하느님을
그럼으로써 벗을
벗을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나와 벗을
기뻐하시니
하느님처럼
나 또한
기뻐하렵니다
하느님을
그럼으로써 벗을
벗을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나와 벗을
품으시니
하느님처럼
나 또한
품으렵니다
하느님을
그럼으로써 벗을
벗을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나와 벗을
살리시니
하느님처럼
나 또한
살리렵니다
하느님을
그럼으로써 벗을
벗을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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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길 빕니다.
사람은 자기는 어리석을지라도 남의 허물을 보고 꾸짖는 일은 잘한다. 그러나 비록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는 어둡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얼마나 좋을까? 용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의연한 행위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한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나는 하느님께 많은 빚을 지고 살았고,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용서를 받아왔고 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타인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횟수를 말한 것은 그냥 억지로 눈감아주고 참아주는 한계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횟수가 문제가 아니다. 주님은 ‘분노 자체도 남기지 않는 용서’를 말씀하신다. 당신 친히 배반자 유다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죄책감에서 해방해 주셨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까지 하셨다.
우리도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적개심, 원한이 남아 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 데 관한 칭찬을 돌려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분의 용서는 무조건적이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지만 이런 용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도록 청하고 무던히 주님께 의탁해야 한다.
용서란 믿음의 행위다. 용서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며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로마12,19). “용서한다는 것은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다.”(스미즈) 용서한다는 것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된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친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서로가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용서하라!
우리나라 사람 중 4.2%가 화병에 걸려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화병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이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가슴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다.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을 내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겠는가? 우리 몸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스스로 파괴할 뿐이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라. 이런 말이 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주님의 기도를 마음으로 해 보자.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먼저 용서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용서할 수 있다.
이 세상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실패한다.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목매 죽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 삶을 시작하였다. 성경의 에사오(창세33,4)나 요셉(창세45,14-15), 스테파노(사도7,60), 예수님(루카23,34)의 모습을 통해 용서한 삶의 모범을 배워야 하겠다.
상처의 한가운데 주님의 십자가를 놓아라. 먼저 하느님 앞에 허물이 많은 인간임을 인정하고 또 많이 용서 받아왔음을 고백하며 앞으로도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은총과 더불어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함을 주실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1요한1,9).
물론 맺힌 한을 푸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다. 따라서 그 상처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한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느님이 먼저 용서하셨음을 감사하라. 누구에게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지지 말고 그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그대를 성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라.”(구엔 반 투안 추기경).
“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긴다. 용서는 그 향기와 같다.”
“주님, 저희가 용서받고 살았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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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왕태언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하여 돌아보게 해 줍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도, 해 주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비굴한 것 같고, 자존심도 구겨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어떨 때는 시간이 지나도 분이 풀리지 않고 계속 화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빚은 탕감받았지만 동료의 빚은 탕감해 주지 않는 종의 모습처럼, 만일 용서를 채무처럼 생각하면, 이득과 손해를 따지게 됩니다. 그럴수록 다른 사람의 잘못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게 되
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를 청하거나 베풀 때는,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많이 용서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용서에 대하여 올바르게 고민할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용서와 하느님께 청해야 할 용서를 분명히 알고 있다면, 우리가 받은 용서에 감사하며, 다른 이를 용서하는 기쁨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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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신학생 때의 한 아이가 생각이 납니다. 이 아이는 마치 껌딱지처럼 부모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 나중에 결혼하면 부모 곁을 떠나야 할 텐데 괜찮아?”라고 묻자, 자기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지금 어떨까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배우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자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무엇보다 너무 친절하고 늘 배려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시댁 식구들도 자기를 한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현실을 만납니다. 이미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 가득하신 분입니까? 그분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당연히 행복한 삶의 완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함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충만함과 완전함의 숫자 ‘7’을 쓴 것을 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77번까지 용서하고, 그다음부터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예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18,23)라고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끌려옵니다. 한 탈렌트를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한다면, 만 탈렌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 됩니다. 한 데나리온을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계산하면, 쓰지 않고 자그마치 16만 년 이상 일해야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런데 종은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 18,26)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그래, 꼭 갚아라.” 정도는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유해도 아니고,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탕감해 줍니다.
이렇게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종은 문을 나서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지요. 그의 동료가 똑같이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마태 18,29)라고 말했지만, 그는 매몰차게 감옥에 가둡니다. 같은 종의 입장이지만, 이 사람은 갑자기 임금, 심판관의 모습을 취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로 계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비를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정의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저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수 없어.”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께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계속 계산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자비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미 받은 자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비유의 첫 번째 종은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받았습니다. 그가 망하게 된 것은 용서받은 뒤의 태도입니다. 결국 심각하게 경고하는 사람은 단순히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때마다 “제 탓이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붙잡고 있는 종과 닮게 됩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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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통영을 다녀왔습니다. 통영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설치되었던 ‘삼도 수군 통제영’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초대 삼도 수군통제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그래서 통영은 나라를 지켜 낸 호국의 도시입니다. 또한 박경리, 유치진, 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김춘수와 같은 뛰어난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태어나거나 활동한 예술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바다와 수많은 섬이 있고, 어업과 양식업이 발달한 물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통영의 중앙시장에서 생선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의 어르신이 하모 한 접시를 건네주었습니다. 처음 보는 외지인에게 “이것도 한번 먹어보라.”라며 음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게 통영은 호국의 도시이고, 예술의 도시이며, 물의 도시였지만 무엇보다 ‘정이 넘치는 도시’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낯선 사람에게 한 접시의 음식을 건네던 따뜻한 마음이 오래 남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웅장한 건물이나 화려한 시설만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건네는 작은 친절, 따뜻한 말 한마디, 힘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를 지켜 주는 중요한 힘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1977년에 설립되어 내년이면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처음에는 달라스 시내에서 다른 공동체의 성당을 빌려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벨리뷰의 이른바 ‘창고 성당’을 거쳐 지금 아름다운 성전을 마련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이곳에서 사목했던 두 분의 신부님도 저의 신학교 동창입니다. 김영관 신부님은 본당 신축이라는 큰일을 잘 마무리하셨고, 김남길 신부님은 코로나19의 어려운 시간을 교우들과 함께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제와 수도자, 교우들의 땀과 기도 위에 오늘의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우리 성당에는 아름다운 성전이 있고,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례를 준비하는 분들, 성가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분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분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소하고 시설을 관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젊은이들과 오랫동안 공동체를 지켜 온 어르신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시설이 좋아지고 행사가 성공한다고 해서 공동체가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넓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때 비로소 진정 아름다운 공동체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집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우리는 하느님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는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 마음을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일곱 번이면 충분히 많이 용서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에는 한계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용서가 잘못을 잘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가장하는 것도 아니고, 불의한 행동을 계속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 때문에 내 마음까지 미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마음의 감옥에서 풀어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도 미움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내 자존심과 감정만을 앞세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의 가장 완전한 표지입니다. 내년이면 우리 본당은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50년의 역사 속에 기쁨과 감사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공동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차이도 있었고, 오해와 갈등도 있었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은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50주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지난 역사를 자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 남아 있는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를 용서하며 새로운 50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통영의 바다는 수많은 섬을 품고 있었습니다. 섬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바다는 그 모든 섬을 하나로 이어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서로 다른 생각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때로는 서로가 멀리 떨어진 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라는 바다 안에서 우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용서는 서로 다른 우리를 이어 주는 다리이고, 사랑은 서로 다른 사람을 품어 주는 넓은 바다입니다. 통영 시장에서 만난 어르신이 자기의 음식을 낯선 사람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며, 내가 먼저 화해의 문을 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전하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전하며,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지난 50년의 역사는 감사가 되고, 앞으로의 50년은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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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매정한 종의 비유』
1) ‘매정한 종의 비유’를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의 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지금의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심판 때의 일로 생각한다면,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서,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동료를 감옥에 가두는 일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임금에게 가서 참아 달라고 애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임금의 말은, “너는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면서 어찌 나에게 와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느냐?”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정산하는 일이 될 텐데,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감추거나 숨길 수 없고, 생각으로 지은 죄와 해야 하는 일인데도 하지 않은 죄까지 전부 다 드러날 것입니다. <물론 아주 작은 선행도 다 드러나게 됩니다.(마태 10,42)>
어떻든 지금 주제는 ‘용서’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으면 이웃을 용서하여라.”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형제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를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기를 인간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구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즉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를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은데, 분명히 ‘나를 위한 일’입니다.
2) ‘심판 때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지금의 일’로 생각한다면, 이야기의 순서 그대로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일이 먼저 있었고, 이제 그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 주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취소’란 없습니다. 그런데도 비유를 보면, 화가 난 임금이 빚을 탕감해 준 일을 취소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취소’가 아니라 ‘보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판 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일’인 경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라는 말은, ‘취소’가 아니라 ‘보류’ 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종은 만 탈렌트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25절). ‘심판 때의 일’이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입니다. ‘지금의 일’이라면 빚을 갚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3) 사람들 가운데에는, 실제로 하느님께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적은 없고, 인간들에게서 큰 상처를 받은 일을 너무 많이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을 때가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용서의 실천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스테파노 순교자는 용서의 모범입니다(사도 7,60). 그는 자신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박해자들’의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해 준 순교자입니다. 그 용서는 ‘하느님의 선’을 실현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용서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박해자 사울’의 영혼에 하나의 씨로 심어졌고, 그 씨가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용서를 하려고 해도 도저히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상처가 너무 크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예 용서를 안 하려고 작정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라면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어떻게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질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상처가 아물고, 원한도 희미해지고,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고 생각될 때가 올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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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영수 헨리코 신부님]
복수극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올드보이」에 이어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금자씨가 아이를 유괴해서 살인한 누명으로 13년간 옥살이를 하며 계획한 복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착하게 살던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용서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복수하는 길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선택합니다. 그녀의 삶의 목표는 이제 원수를 갚는 일이 되어버리고 금자씨는 은밀하고 잔인하게 계획한 복수를 해나갑니다.
사람들은 영화 속에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하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치밀하게 복수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서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복수를 꿈꾸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까요?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것이 복수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결국은 자기 자신도 복수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두 남자가 사막을 걷다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친구는 말없이 모래 땅위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
두 사람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 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오아시스에 도착하자 뺨을 맞은 친구가 서둘러서 물에 뛰어들었다가 그만 늪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뺨을 때린 친구가 손을 내밀어 그 친구를 구해주었습니다. 물에서 나온 친구는 이번에는 돌을 하나 구해서 그 위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해 주었다』
다른 친구가 왜 뺨을 맞았을 때에는 모래 위에 그 사실을 쓰고, 물에서 구해 주었을 때에는 돌에다 새기느냐고 물었습니다.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일을 새겨야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망각의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우리 속담에도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여서 은혜를 새기든 원수를 새기든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데 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받은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합니다.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기 때문에 삶을 기쁘게 꾸며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원수를 새기고 나면 그것은 마음의 상처가 되고 피해의식이 커져서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이 상처 받고 쓰라림을 안고 원망하는 사람으로 머물 때, 자신뿐 아니라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공동체도 상처로 얼룩지고 우리의 삶은 천박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얼마만큼 용서해야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야한다』고 대답하십니다. 한 번의 용서도 어려운데 한없이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의 길로 이끄시는 것은 용서만이 우리를 치유하는 참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잘못을 눈감아 준다거나 내가 받은 상처를 망각 속에 던져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용서는 우리 자신이 과거의 상처 속에 머물며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원망하며 망가져 가는 삶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받은 상처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더 이상 내 스스로 그 상처의 피해자로 머물지 않겠다는 용감한 결단이며 해방선언입니다.
결국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복수심과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치유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만이 참된 용서의 길을 갑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남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며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은혜를 새기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은총의 삶이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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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진철 요셉 신부님]
<‘용서’는 어렵습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려운 행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하게 되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하게 될까요? 남의 고민을 들어줄 때는 용서라는 말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정작 내 자신은 쉽게 주변인들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용서에 있어 흔히 겪게 되는 오류가 있습니다. 나 자신은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진정한 용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저 참고 인내한 결과를, 때로는 대상이나 상황을 잊어버리려 했던 노력을, 때로는 용서라는 개념을 스스로에게 강압적으로 인지시키는 행위 등을 ‘용서’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용서를 했다고 생각해도 그 대상이나 상황을 다시 마주할 때 내면에서 문득문득 화가 올라오는 나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직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인간에게 있어 ‘용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용서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를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저는 2가지의 상황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첫째, ‘내가 누군가로부터 용서(이해)받았던 상황들’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저 역시 부족하기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의도치 않은 오해를 낳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더불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용서(이해)를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받았음을 인지한다면, 이제 주는 것은 더 수월해집니다. 용서의 시작은, 단지 내가 받은 것에 대한 ‘보답’에서 출발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예수님은 분명 여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행하려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스승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보상과 자유로움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더 깊고 충만합니다. 인간의 행위 중에 단번에 습득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어느 정도 숙련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용서란 매우 어려운 행위입니다. 만일 이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용서를 두고 주저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방법이 있으리라 봅니다. 단번에 이룰 수는 없겠지만 용기를 낸다면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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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마태 18,27)
엄청난 빚을 갚지 못하는 종이 주인에게 엎드려 간청하자 주인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주인은 다른 조건을 제시하거나 기한을 연장하지 않고, 흔쾌히 부채를 탕감해 줍니다. 동기는 오직 하나,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돈이 중요하고 재산 증식이 제일의 목표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 비유가 어이없는 만큼, 그만큼 파격적이고 헤프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마태 18,35)
주인에게서 큰 은혜를 받은 종이 자기 채무자를 혹독히 벌하다 결국은 기껏 얻은 은혜를 다 잃게 됩니다. 이유는 자기가 받은 용서를 타인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서와 자비, 사랑을 베푸실 때는 어떤 목적을 품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 목적은 오직 우리뿐이지요.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 죄의 상처를 치유받고 온전한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지향입니다.
그런데 용서 안에는 특별한 매카니즘이 작동합니다. 용서는 용서를 낳고, 또 그 용서는 또다른 용서를 낳는 자기 증식의 DNA를 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가 나에게 해를 입힌 이들에게까지 흘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때 비로소 하느님과 나의 관계 회복이라는 용서의 진정한 완성 단계에 다다릅니다. 내가 아직 타인을 용서 못하는 상태라면, 아직 나는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받은 이는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마련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집회서 저자는 분노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금 무언가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다면 큰 도움이 될 실질적 조언들입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입니다. 자비를 입은 이에게서 자비가 흘러 나오고, 용서 받은 이에게서 용서가 이어집니다.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자기 허물에 대해서만 용서를 기대하는 것은 염치 없는 태도가 되겠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의 해법이 될 말씀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 말씀에 깊이 머무르면, 인간 사이의 미움과 분쟁, 소유와 허세 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됩니다. 제 한 몸의 영화와 제 이름의 명예에 집착해 형제도 이웃도 다 떨쳐내고 달려온들 그 무엇도 제 것이 아니니까요. 자기 자신조차 주님의 것인데, 손에 움켜쥔 무엇인들 내 것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 안에서 언급된 “분노와 진노, 복수, 화, 적개심”(제1독서) 등의 감정이 어떤 계기로 우리 안에 잠시 들어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받은 용서와 화해의 기억을 통해 정화하고 떠나보내기 마련이지요. “자비, 너그러움, 자애, 은혜, 용서”(화답송) 등의 말씀들이 우리가 받았던 은혜로운 체험들을 소환해 주니까요.
혹시 이 쓰고 독한 감정들을 길고 짙게 붙들고 있다면 아직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일 겁니다.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느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통 속에 잡아 앉힌 안타까운 처지일 수도 있지요. 만일 그러고 있다면 이제는 자기 마음의 문 바깥에서 서성이고 계시는 하느님께 문을 열어드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용서 못하는 아픈 감정에서 헤어나오고 싶다면 말입니다.
주님의 것인 “내”가 주님의 것인 “그대”를 용서합니다. “주님의 것”인 그대가 “주님의 것”인 “나”를 해방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잃은 것도, 당한 것도, 더 얻지 못한 것도 한 걸음 물러서서 “주님의 것”으로 의연히 바라보고 담담히 떠나 보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용서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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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용서>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드넓고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입었으니 너희도 그렇게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현인 벤시라는 말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이는 인간이 죄인을 용서해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그 사람도 용서해 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8)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이 질문은 앞 장면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는 말씀의 반론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창세 4,15절) 이는 카인에게 내리는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곧 그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그를 보호해 주신다는 ‘큰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반면에, 카인의 후손 라멕은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라고 떠벌립니다.(창세 4,23-24)
여기서 보듯이,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되갚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클수록 앙갚음도 더 격렬해서. 눈에는 눈, 손에는 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하여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 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악함보다 항상 더 큰 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할 뿐만 아니라, 혹은 끝까지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를 보호해 주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아주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청하지도 않은 빚을 조건 없이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과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카인의 후손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는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고백하기도 전에,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입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6)
그러니 형식적이거나 의무적으로 마지못해서 혹은 관대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가 아니라, 그를 위하는 진실한 마음, 곧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당신의 호의로 용서한 다음에 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제가 용서하기를 원하지 않아도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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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