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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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예수님의 죽음으로 낙담하고 불안해하는 엠마오의 두 제자는 성경에 예언된 구세주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제자는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부활의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넘치게 됨을 깨닫습니다. 성경을 읽는 시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필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고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치를 확인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하느님의 사랑을 뼛속 깊이 느꼈듯이,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 사랑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여기’ 살아 계시며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부활의 은총은 ‘흠 없고 티 없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처럼 수난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죽음의 나라를 벗어난 것처럼 우리의 육신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신앙인의 커다란 특징은 죽음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성덕에 올라간 성인일수록 죽기를 더 바란다고 합니다. 죽음이 곧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요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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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
-고인현 신부-
오늘 복음은 엠마로오 가는 예수님과 두 제자와 예수님과 나눈 부활 사건을 전해줍니다. 두 제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슬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길에 그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어 함께 걸으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실 때 빛나던 별이 그분께서 돌아가시자 빛을 감추었듯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본모습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클레오파스는 요셉의 아우 클로따스로서, 예수님의 삼촌으로 전해집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한 제자는 클레오파스의 아들 시메온으로 뒤에 예루살렘의 제2대 주교가 되어 서기 70년 이후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시메온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의 마음이 죽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의 눈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분명히 보였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알려 주듯이, 그들의 눈이 가리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보는 눈이 가리어 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알아보는 눈이 가리어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는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시는데도 마음안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되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었고 희망도 잃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채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죽은 채로, 생명 자체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생명께서 그들과 함께 걷고 계셨지만 그들의 마음 안에서는 아직 생명이 회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른 어떤 곳이 아닌 빵을 떼는 행위 안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 행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눈을 가지도록 촉구합니다. 참된 믿음을 지닌 신앙이라면 아무 이유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고 아무 생각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희망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가난한 이들과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런 부재가 아니고 믿음의 눈이 없을 때 오는 부재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고 우리 마음속에 기쁨과 사랑의 불이 타오를 수 있도록 주님께 믿음의 눈이 열리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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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처럼 수난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수난의 과정을 겪었던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수난의 과정이 없었다면 수난과정이 없이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는 믿음을 가지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믿는다고 하면서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건 아닌지 이야기 해봅시다. 무엇이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보너스 나눔.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느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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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복음말씀의 향기♣ No4564
4월19일 [부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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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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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CSBAoeF-Fw
[수원교구 박현민 베드로(중견사제연수원 영성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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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꼐서는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엠마오 소풍 길에 만난 형형색색의 꽃들, 어찌 그리 눈부시고 화사하던지요. 나이 탓인지,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것들을 보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끔찍하게 먹어버린 제 나이를 생각하며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꽃길을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길고 혹독한 겨울을 잘 견뎌낸 우리에게 또 다시 찬란한 눈요기를 선물로 주시는구나. 이런저런 매일의 고통을 잘 이겨낸 우리에게 위로의 선물로 화사한 봄날을 보너스로 주시는구나.
엠마오 길에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꽤 긴 여정을 그분과 함께 걸었지만, 시종일관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야 마침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시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이 기쁨으로, 슬픔이 은총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초라하고 누추한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뵌 제자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존재 방식은 이제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입니다. 엠마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고, 식사를 같이 하셨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짠하고 눈앞에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기도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도 계십니다.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끄러운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통해 이것 저것 자상히 가르쳐 주시고, 빵을 떼어주시고, 그러나 또 다시 사라지시고…참으로 묘하신 하느님, 신비의 절정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 한 가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우리 앞에 확연히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가 거행하고 참여하는 성체 성사 안에서 꾸준히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좀 더 잘 준비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경건하고 깨어있는 태도로 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오신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느 다른 하늘에 존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로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들의 인간관계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번 주말도 많은 피정객들이 저희 집을 찾아주셨습니다. 한팀이 나가고 나니, 바로 또 한팀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부활 예수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신 형제자매들 안에 떡하니 현존해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발견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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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ukjHjBoS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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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의 효과를 못 느끼는 이유: 가슴이 타올라야 눈이 열린다>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루카 24,3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제3주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복음을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눈이 열립니다.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길 위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제자들의 가슴이 먼저 뜨겁게 타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매주 성체를 모시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할까요? 왜 성당 문만 나서면 다시 두려움과 걱정의 노예가 될까요? 오늘은 그 이유가 ‘말씀에 대한 무관심’과 ‘스승의 부재’에 있음을 명확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 첫 번째 부류는 말씀을 무시한 채 형식적인 영성체에만 매달리는 이들입니다. 말씀이 가슴을 데워놓지 않으면, 성체는 단지 밀떡일 뿐입니다.
2018년 6월, 이탈리아 남부 비보 발렌티아(Vibo Valentia) 근처의 산 탄토니오 성당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일 미사 중 거룩하게 성체를 영하고 성당 문을 나선 한 50대 남성이,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자 트렁크에서 흉기를 꺼내 이웃을 찔렀습니다. 그는 본당의 여러 소임을 맡아 하며 평생 미사에 빠지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출처: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 2018.06.18 보도)
이 사건은 전 유럽 가톨릭계에 ‘신앙의 해리(Dissociation)’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는 수만 번 성체를 모셨지만, 성체는 그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오늘 복음이 그 해답입니다. 바로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은 채 성체를 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성체의 뜻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만 보면 그 사람이 이해될까요? 만약 여기 그림자만 보이는 두 아이로 보이는 물체가 있습니다. 둘 다 움직입니다. 한 아이는 걸음마를 하며 두 발로 일어서려 하고 한 아이는 원숭이 흉내를 합니다. 둘 다 진짜 아이일까요? 가림막을 걷어내면 정반대입니다. 사실 아기 때는 인간보다 원숭이가 더 인간 같을 수 있습니다. 행동만 봐서는. 이는 1931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심리학자 윈스럽 켈로그가 자기 아들 도널드와 침팬지 구아를 함께 키움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참 정체성을 알려면 행동보다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먼저 이해시켜 주신 이유가, 그래야 당신의 사랑의 행위인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해야 함을 이해해야 성체성사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성체성사의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성당엔 사람들이 좋아서 다녔습니다. 어쩌면 지옥에 가기 싫어서 다녔는지 모릅니다. 미사의 의미를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성체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미사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적 호기심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10권 전집을 만났습니다. 그 책은 성경 한 절 한 절을 마치 제가 예수님 옆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것처럼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숨소리와 제자들의 갈등, 십자가의 고통이 말씀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제 심장을 직격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그러고 났더니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부활하시어 살아계심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성경을 설명해 줄 가장 뜨거운 선생인 그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까지도 성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일단 알아들어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예화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아들에게 평생 나타나지 않던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편지가 왔습니다. “이 편지를 읽을 때 즈음엔 나는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너희 둘의 미래를 위해 먼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너희들이 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미안하게 되었다. 내가 너희 둘을 위해 땅을 사 두었다. 그 땅에는 내가 평생 일해서 벌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병이 들어 이제 죽는구나. 너희의 행복을 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이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두 아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땅으로 가서 둘은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파도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아들은 화가 나서, “평생 찾아오지도 않더니, 아버지가 우리를 끝까지 놀리시는군!” 하며 삽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러자 편지를 가져온 사람이 아버지의 사정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들 둘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다만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였기에 살아 생전에는 발각되어 아들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편지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편지가 가짜일 수는 없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다른 아들은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돌을 골라낸 한 곳에 씨를 뿌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몇 배는 더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은 말 그대로 영양분 덩어리였습니다. 거기에 농사를 지으니 몇 년 안 지나서 그 아들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났던 다른 아들은 사기를 치다가 감옥에서 평생 썩게 되었습니다.
성경도 이와 같습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깨달아지지 않고 그러면 왜 살과 피를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 효과를 못 누리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체가 마치 어머니의 젖처럼 우리 정체성을 바꿔주는 것이라는 내용이 많이도 나와있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라고 정체성을 바꾸고, 요한 복음에서도 눈이 생긴 태생소경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엄마 젖을 먹으면 아기가 인간이라 믿을 수 있듯이, 하느님의 살과 피는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카르멜 수도회의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St. Elizabeth of the Trinity)은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에디슨병이라는 희귀병으로 임종을 맞았습니다. 장기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그녀는 놀라운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병상에서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을 닳도록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그녀의 영혼을 불태웠습니다.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하자, 그녀는 매일 모시는 성체 안에서 자신과 주님이 완전히 결합됨을 실재로 느꼈습니다.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내 눈을 열어주었기에, 나는 내 병실 침대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제단임을 봅니다. 나는 이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영하고 있습니다.”(출처: 콘래드 드 메스테르, 『엘리사벳 신부의 생애와 영성』)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싫어지면 그의 모든 말이 소음이 되고 행동은 위선으로 보입니다.
세계적인 심리 학자 존 가트맨(John Gottman) 박사는 3,000쌍 이상의 부부를 연구한 결과, 이혼의 결정적 징후는 ‘말씀의 거부(Stonewalling)’임을 밝혀냈습니다. 한쪽이 상대방을 싫어하기 시작하면, 상대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마음의 벽을 쌓습니다.
상대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위선 떨지 마”라며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상대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의 ‘행동(도시락이나 선물)’조차 자신을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오해합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뜻보다 자신의 죄와 욕망 속에 머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피하는 자에게 성체는 더 이상 생명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숙제가 될 뿐입니다. (출처: 존 가트맨, 『사랑의 심리학』)
엠마오 제자들도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읽어서 가슴이 뜨거워지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슴 뜨겁게 말씀을 설명해 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 스승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는 당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레 위에서 이사야서를 정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라는 질문에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성경 박사였지만, 말씀의 ‘혼’을 깨워줄 스승이 없었기에 가슴이 차가웠습니다. 성경은 본인이 읽고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성령 충만한 분이 설명해 주면 비로소 눈이 열려 성체성사의 의미를 알아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 제4권 11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니, 곧 영혼의 양식인 ‘성체’와 내 발의 등불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위로를 위해 당신의 거룩한 몸을 주셨고, 제 발의 인도를 위해 당신의 말씀을 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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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말에 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둘 다 긍정적인 의미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공감은 폭력과 전쟁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군중도 공감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했던 대사제와 율법 학자도 공감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도 공감했습니다.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공감을 통해서 정권을 잡았고,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과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공감했기에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 했고, 유가의 급등으로 세계 경제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공감의 특징은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는 공감하지만, 멀리 있는 나라에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공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뉴스로 듣지만,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납치되어 미국의 법정에 서는 것을 크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이란에서 폭격으로 무고한 여학생이 170명이나 죽었지만 역시 크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저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사랑과 자비라는 옷을 입으면 연민(sympathy)이 됩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 것은 연민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굶주린 사람을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주시고, 중풍 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연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연민’의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연민’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도 아버지의 ‘연민’을 이야기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연민’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잘 안다고 하는 레위는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사제는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도 잘 모르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도 몰랐지만 ‘연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다녀와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율법 학자가 말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전에 미국의 ‘타임’지는“ 20세기의 끝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 4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입니다. “역사상 위험이 최고조에 이른 시간에 자유 수호의 역할을 부여받은 세대는 몇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책임을 피하지 않고 환영한다. 나의 동료인 미국인들이여, 조국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라.” 두 번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 연설입니다. “우리가 오로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이다.” 세 번째는 처칠 영국 총리의 연설입니다. “나치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프랑스 땅에서건 대양에서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네 번째는 마틴 킹 주니어 목사의 연설입니다. “내게는 예전 노예의 아들과 노예 소유자의 아들이 형제처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꿈이 있다.” 공감을 넘어서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마음이 느껴지는 연설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시류에 편승해서 공감한 적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어 ’연민‘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여러 번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연민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슬픔과 좌절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낯선 한 사람이 함께 걸어옵니다. 그분은 성경을 풀어 주시고 하느님의 계획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는 순간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의 마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희망이 다시 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힘입니다.
지금 들과 산에는 꽃이 피고 있습니다. 나무에는 새순이 돋고 있습니다. 자연은 봄이 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신앙의 봄은 자연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시류에 따라 공감하는 삶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 부활이 시작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외면하지 않을 때, 누군가의 눈물을 보고 손을 내밀 때, 누군가의 상처를 보고 함께 걸어 줄 때, 그때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류에 따라 공감하는 사람으로 머무르지 말고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의 길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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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춘천교구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보고 들은 목격자요 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사건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예수님께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루카 24,21)으로 바라보며, 그분께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졌고, 실망과 좌절에 사로잡힌 그들의 발걸음은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놓입니다.
바로 그 길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어 ‘부활’이라는 현재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신 ‘파스카’에 계시는데,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 길을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들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함께 걸으시며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자,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그 초대에 응답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시는 순간, 두 제자는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금도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파스카의 눈을 열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재 나를 짓누르는 바쁜 일과 걱정,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 또한 ‘눈이 가리어’ 지금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 부활하시어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향한 이 초대가, 이 시간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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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과 부활 신앙
1. 엠마오로 가는 길: 믿음의 여정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 사건은 인간의 믿음의 여정을 상징한다. 제자들은 “모든 일이 일어난 그날”(13절), 절망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희망을 걸었지만,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모든 기대가 무너졌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이 고백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인간의 이해를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묵상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었으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에 계셨으나, 그들의 눈은 가려져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전까지는 눈도 열릴 수 없었다.”(Sermo 235, 2) 부활의 신비는 눈으로 보는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열려야만 인식되는 신앙의 신비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교리적 수용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믿음의 체험이다.
2. 말씀의 전례: 타오르는 마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말씀을 설명해 주셨다.”(27절) 이 장면은 성경의 완전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Christocentric hermeneutics)을 보여 준다. 성 예로니모가 말했듯이,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Comment. in Isaiam. Prol.)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그 안에 현존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덧붙인다. “성경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말씀으로 대화하시는 성전이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그리스도의 입술이 열린다.”(Homiliae in Matthaeum, 2,6)
제자들은 이 말씀의 전례 안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그들의 마음을 불태운 것은 논리나 증거가 아니라, 성경 안에 현존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복된다. 매 미사에서 봉독되는 성경 말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Verbum vivum)으로서 우리를 부활의 신앙 안으로 이끈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구약은 그분을 예고하고, 신약은 그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성경의 모든 구절은 새 생명을 얻는다.”(134항)
3. 빵의 전례: 성체 안의 현존
엠마오의 제자들은 나그네로 보이던 이를 그들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이 장면은 명백히 성체성사(Eucharistia)를 암시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들었고, 성체로 그리스도를 보았다.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고, 빵을 떼심으로써 그들의 눈을 여셨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0,121) 이때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았다.”(31절) 그러나 곧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31절)
이는 성체 안에서 현존의 방식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성체 안에서 참으로 현존하신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중심적 신앙 고백이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질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1374항) 그러므로 엠마오의 제자들은 말씀과 성체의 두 식탁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두 식탁은 오늘날 성찬례의 전례 구조, 즉,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의 원형이 되었다.
4. 되돌아감: 파견된 증인
그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33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 만남은 선교적 열정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떠났던 예루살렘은 더 이상 공포의 장소가 아니라, 복음 선포의 시작점이 된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은 주님을 빵을 떼며 알아본 후, 곧장 일어나 돌아갔다. 사랑은 게으르지 않다. 사랑은 즉시 움직이고, 사랑은 파견한다.”(Homiliae in Evangelia, 23,3)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니라, 나아가는 신앙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 사명의 기초이며, 부활의 증거이다.
5. 우리의 엠마오: 오늘의 부활 체험
오늘 우리도 엠마오의 제자들과 같은 여정을 걷고 있다. 때로는 절망과 혼돈 속에서 부활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말씀과 성체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성체성사로 사는 교회: Ecclesia de Eucharistia”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함께 매일 성찬례의 식탁에 앉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현존 안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6항)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단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살아 있는 만남’이다.
6. 결론: 말씀과 성체, 그리고 증언의 삶
엠마오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씀 안에서 마음이 타오르고, 성체 안에서 눈이 열리며, 선교의 길 위에서 부활의 증인이 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약속은 새롭게 실현된다. 그분이 지금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믿는 이가 바로 부활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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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0-31)
십자가의 길을
떠나시기 바로 앞선 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셨지
정성껏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당신처럼 되어 나누어지라고
오늘만이 아니라
당신을 길이 기억하며
늘 그렇게 나누어지라고
십자가의 길을
그분 홀로 걸어가시던 날
그분의 살과 피를
기꺼이 먹고 마셨던
벗들은 그분을 버리고 떠났지
참담한 마음이야
없을 수 있을까마는
그저 제 살 길 찾아서
그분을 집어삼킨
패배와 두려움 가득한
그곳에 그분 홀로 남겨두고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를 완성하신 다음 날
그분께서는
제 살 길 찾던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다시 나누셨지
정성껏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살아난 당신을 알아보라고
그리하여
살기 위해 떠나는
패배의 길에서 발길을 돌리라고
십자가와 그 너머 부활이
아픈 만큼 찬란히 이어지는 나날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고 나누시지
그분의 살과 피를 모신
그분을 사랑하는 벗들은
그분처럼 기꺼이 나누어지고 나누어지지
십자가 너머 부활하는 믿음으로
어둠을 사르는 빛나는 희망으로
벗을 살리려 죽어가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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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망을 잃었을 때>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시다.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란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 자체인 주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고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은 영광을 기대했으나 메시아의 죽음은 절망을 가져왔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실망에 절망을 더했다. 낙심과 불안이 커지니 슬픔만 커질 뿐이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라고 선포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다. 그러나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다.
실망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그분을 붙들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그만인데 ‘함께 묵자’고 붙잡았다. 여기서 그들의 됨됨이가 드러난다.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결국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는 순간에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성 아우구스티노).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면,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의 신앙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과 순종,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탄생을 가져오셨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철저히 따르셨던 어머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을, 먼저 알아채신 분이 어머니이셨다. 그리고 능력을 지니신 아들, 예수님께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순종하시며 때를 기다렸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는 곤란한 처지에 있게 된 사정을 미리 알아채시어 그 사람과 공명하시고 주님을 통해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어머니의 전구는 이렇게 소중하다.
어머니는 철저히 아들의 삶에 동행하셨으며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아들의 시신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분이시다. 요람에서 무덤에까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다. 우리는 직접 갈 수도 있지만 효과적으로 가기 위해 어머니의 손을 빌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다. 성모님의 치마폭이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다. 성모님의 마음에는 늘 주님이 모두였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감사하며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모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 예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깨우치게 된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국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가는 것이고,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란다면 성모님을 잘 모셔야 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신다. 실망과 좌절의 늪이라 생각될 때 더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하면 믿음의 눈을 뜨게 되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 기도해야 하고 주님과 이웃 사랑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고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단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내일이 있어 행복하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쁘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에 사랑을 더하며 살 수 있길 바란다.
“주님, 저희가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바라며 기다리게 하시고, 영원한 즐거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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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기도 열심히 하시고요, 미사에도 빠지지 마세요. 그래야 주님과 함께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없어요.”
지금 삶이 너무 힘들어서 오랜만에 성당 나오셨다는 분과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렇게 답하시면 답이 없습니다. 지금 병에 걸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 병에 걸리신 분이 참 많습니다. 바로 ‘그런데 병’입니다. 계속 ‘그런데’를 외치게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이 ‘그런데 병’은 삶 안에서도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책 읽어 보세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바빠요.”
“많이 웃어야 해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요.”, “그런데 웃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병’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그런데’ 대신 ‘어떻게’를 많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며 자기의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데 병’을 앓고 있는 제자들을 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엠마오로 예순 스타디온(11km)가 넘는 씁쓸한 도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그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여자가 전한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계속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데 돌아가셨잖아요.”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의 십자가 수난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느님의 필연적인 계획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으로, 차갑게 식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병’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로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날이 저물어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최후의 만찬과 동일한 이 행위 안에서 마침내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이제 ‘그런데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날이 저물어 어둡고 위험한 밤길임에도 즉시 일어나 돌아간 것입니다. 절망 안에서 엠마오로 도망갔던 제자들이 마음을 바꿔 이제 기쁨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성경 풀이’를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결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 없었던 것”(사도 2,24 참조)이라고 완벽하게 논증합니다.
제2독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가졌던 현세적 해방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진정한 영적 해방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1베드 1,19 참조)
우리도 주님께 자기 삶의 고통을 없애주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내려달라는 ‘빗나간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면서 ‘그런데’만을 외치면서 함께 걷고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계속 ‘어떻게’를 말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눈이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처럼, 미사를 통해 말씀을 듣고 마음이 타오르며 영성체로 눈이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데 병’에 걸려서 엠마오로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는 나의 이웃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다.”(루카 24,15 참조)라며 자기 삶으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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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28-35)>
1)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이 한 가지 보이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당신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리라고 지시하셨고(요한 20,17), 사도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는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루카 24,47-48)
그런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해 주셨을 뿐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증언한 일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에 한 일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선 두 제자는, 메시아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는 신앙인들을 상징하는(또는, 대표하는)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일은, 모든 신앙인에게 ‘부활 신앙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나타나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메시아의 수난을 설명해 주신 것은, 사실상 부활을 설명해 주신 것이고,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면 먼저 예수님의 죽음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 구원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바로 그것을 설명해 주셨고,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설명 덕분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고, ‘큰 실망’에서 벗어났습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진리를 깨닫고 믿었다면,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기쁨을 얻었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증언’입니다. 두 제자가 명시적으로 지시받은 것이 없는데도 자신들의 깨달음과 믿음과 기쁨을 증언한 것은, 복음 선포는 원래 그렇게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무슨 지시를 따로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기쁘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 그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 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복음 선포 자체가 ‘기쁜 일’입니다.
3) 그러면 사도들에게는 왜 복음 선포를 ‘지시’하셨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도들의 ‘공적 직무’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달레나가 한 일도 사도들의 공적 직무에 연결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모르는 낯선 나그네를 초대했습니다. 그 일에서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나그네)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나그네)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하느님을, 또는 주님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사랑 실천’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위한 지름길입니다.
5)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겪게 되고, 크게 실망할 때도 있는데, 만일에 그런 때에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그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분명히 포기하지 않고 둘이 함께 기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을(마태 18,20)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말씀을 들려 주셨고, 받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빵을 떼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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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정민식 아벨 신부님]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깊은 절망과 혼란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부활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들의 마음과 눈은 여전히 슬픔에 잠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 곁으로 다가와 함께 걸으며 성경을 풀이해 주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고 타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완전히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는 바로 그 순간, 제자들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길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말씀을 통해 서서히 타오르던 마음이, 성체성사 안에서 완전히 빛을 발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명하게 만나게 됩니다. 이 순간이 바로 부활의 신비가 삶 속에서 완성되는 체험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더 이상 슬픔과 두려움의 자리, 엠마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 부활의 기쁨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매일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지만, 삶의 문제 앞에서 여전히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하시는가?’ 기도하는데도 변하지 않는 이 현실은 무엇인가?’ ‘주님이 부활하셨다면, 왜 내 삶은 이렇게 버거운가?’
우리는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슬픔과 실망, 걱정과 불안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곤 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의 굳은 마음을 녹이시고 당신의 성체로 우리의 영혼을 일으키시며 우리 삶 속에서 같이 걷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우리 마음이 ‘다시 타오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이 타오른다면 우리는 다시 힘을 얻어 일어나 슬픔에서 기쁨으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고립에서 공동체로 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광주대교구 공동체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신앙은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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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김성훈 루카 신부님]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건을 겪습니다. 성공의 경험을 할 때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실패의 경험도하게 되죠. 사람은 큰 아픔을 겪게 되면 잠깐 멈추게 됩니다. 큰 실망을 하거나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혼자 있을 곳을 찾기도 하고,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머물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냥 예전의 무미건조한 일상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죠. 길을 헤매다가 원래 갔었던 편안한 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의 표정은 침통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보지도, 믿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다고 하셨던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길을 걷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죠. 하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은 무너져 내렸을 겁니다. 부활하신다던 예수님은 그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많은 회의감과 불안감이 가득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의 뜨거웠던 신앙의 열정은 식었기에 표정에 침통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원래의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처진 어깨를 토닥이듯 함께 길을 걸으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 받느냐?” 하고 물으시죠. 그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 중 한 사람은 멈추어 섭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며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묵으십니다. 그러면서 빵과 포도주를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그들이 다시 기억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이 빵을 떼어 나눠주시는 모습을보고, 그들이 얼마나 많은 기적들을 보았는지 기억하게되죠.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많은 이의 구원을 위해 나눠 주셨다는 것을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
그들의 기억은 되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풀이해 주신 성경 말씀도 기억하면서, 다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변방으로 밀려나고 어깨가 무거워져 있을 때도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방황할 때에도 찾아오시는 좋으시고 따뜻한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이런 분을 다시 기억하고 되새기는 가운데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예수님이 남겨주신 말씀과 그분에 대한 기억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셨던 분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분들을 기억할 때면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고, 회복하죠. 제자들은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됩니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등의 일곱 제자는 어부로 돌아갔지만, 그들을 처음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을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지쳐 쓰러질 때에도 이렇게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부활 3주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새로운 부활의 기쁨이 이어지기를 기원해 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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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박종수 요한 세례자 신부님]
<말씀이 절망 속에 파고들어 절망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님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절망을 품에 안고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절망은 희망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 줄기 희망, 어둠 속에서도 나를 비추는 한 줄기 빛, 고통 속에서 나를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손길! 절망 속에 있으면 이 모든 것들이 내 옆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보지 못합니다. 절망이 내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절망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타 올랐습니다. 말씀이 절망 속에 있는 제자들의 마음에 파고들자, 그들의 마음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절망 속에 파고들어 절망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절망을 통해 가리어졌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뜬 눈으로 식탁에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시는 분이 주님 임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 빠져들 때에도 우리의 절망을 이겨내게 해주는 힘이 말씀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게 해주고, 말씀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말씀은 내가 고통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며 손을 내밀어 주고 계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의 절망을 이겨내게 해주는 그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 모시고, 늘 말씀을 품에 담아 말씀의 힘이 우리 삶 안에 은총으로 충만히 머물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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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꼭 붙드시고, 참으로 감동적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고”(사도 2,24), 예수님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8)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8)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시 16,11 참조)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약 30년이 지난 후,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주셨습니다.”(1베드 1,21)
복음은 예수님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5-16) 혹 우리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눈이 가리어’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알아보려고 해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믿었던 일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앎과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곧 ‘그분이 죽었다’는 앎에서 벗어나고, 그분께 걸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린 일에서 벗어나고, 다시 알아듣고 새로이 믿어야 할 때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이렇게 말합니다. “21세기의 문맹자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잊고, 다시 배우지(learn, unlearn, and relearn)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이미 ‘배운 것’, 이미 ‘아는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우쳐주십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그들은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되었으나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는 못한 채 말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참조)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깊은 사랑이 그들의 어둠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이는 마치 ‘말씀의 전례’로 마음이 타오르고, ‘성찬의 전례’로 말씀이신 분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떼어내다’는 단어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으스러뜨리고 부수심으로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신비, 곧 부활의 신비를 보는 눈은 이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활도 우리의 생명을 으스러뜨리고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우리가 부서지고 으스러뜨려질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나 ~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꼭 붙드시고, 참으로 감동적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깊고 깊은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손을 빠져나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서 당신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고, 마음의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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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