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와 하느님의 심판을 깨달아라.>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17,24-29 하느님께서는 24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위로하신다. 25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26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 27 살아서 감사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28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29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선하신 스승님,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20 그가 예수님께“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I –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 하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생활공간도 컨테이너 박스로 꾸민 한 칸의 방이 전부입니다. 그 방은 주방이고 침실이며 기도방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평일 미사참례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봉투하나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난방 기름을 절약하고, 쓰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모은 돈이라고 하시며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돈은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를 선택할 시점이 옵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이때야 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선택한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차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을 본인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잘 지켰는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하나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의 보화 때문에 하늘의 보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천상의 보물을 우리 내면의 보물로 삼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준비로 집도 장만하고 값비싼 보석을 비롯하여 혼수품을 다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였는데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영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아름다운 보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서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나에게 부족한 하나는 무엇일까? 자존심일 수 있고 체면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고 명예나 지배하는 마음, 자식에 대한 애착일수도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질투의 마음이나 눈먼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허영의 우상숭배, 교만의 우상숭배, 돈의 우산숭배에서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안락함의 문화와 일시성의 매혹”이 강한 이 시대에 부족한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 하나는 구원은 내가 충실히 덕을 쌓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입니다. 자선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내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부에 대해 묵상해봅시다.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되는 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왜 재물이 가진 자들이 왜 천당에 가기 어려운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내 안에 부자청년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보고 하느님을 믿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세상 기쁨을 끊을 때 참 기쁨을 느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5.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오늘의 묵상 II
고인이 되신 최인호 선생님은 사회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거리에서 항의 집회를 하는 것도 방법이고, 전단지를 만들어서 돌리는 것도 방법이고, 야학을 통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최인호 선생님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인 글을 통해서 사회문제에 대해서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서울교구 주보에서 그분의 글을 보았고, 많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과 불교를 어우르며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그분의 글은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부님들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사회의 문제를 대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였습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틀을 벗어나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했던 신학생은 또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신학과 교리를 충실하게 배우고, 교회의 틀 안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했던 신학생은 사제가 되었고, 지금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문제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본인의 몫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선택도 가능한 선택일 것입니다. 제도와 틀을 벗어났어도 양심과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선택도 자비로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제도와 틀에 머물지만 위선과 가식의 삶을 살고 있다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제도와 틀은 안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열정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제도와 틀에서 안정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배움도 충분했고, 육체적인 노동에서도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제도와 틀에 머물며 안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선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수도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내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최선을 다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서 지금 위로가 필요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등불을 됫박으로 가두지 않는 것처럼 사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향기가 되어서 주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사제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며칠 전에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대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문자를 받으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무엇일까?’ 주교가 되는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더 높은 자리, 권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게 문자를 보낸 분은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은 자라고, 이런저런 봉사를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꿈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꿈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모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꿈은, 결국 내 삶이라는 에너지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들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들은 희망찬 미래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
오늘의 묵상 III – 절제는 기쁨을 지키기 위한 것
어느 날 콘클레턴이라는 백작이 아침 일찍 부엌문 앞을 지나다가 ‘5파운드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요리사의 한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5파운드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 그녀를 살짝 엿보았더니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 걸. 10파운드라고 할걸 … ’하며 끊임없이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 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십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시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
이 물음이 지금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하게 해 줄 것입니다. 아내 때문에, 자녀 때문에, 재산 때문에, 명예 때문에 예수님을 당장은 따를 수 없다면 더 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수련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이 세상 어떤 것도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도록 세상 기쁨들을 끊을 수 있는 노력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헛된 기쁨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 즉 부자였기 때문에 ‘우울해하며’ 돌아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은 우울함만 남깁니다.
성경에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이 많든 적든 돈에 대한 욕심이 많다면 비록 행려자라도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는 신문지를 훔쳤다고 서로 피가 터지도록 싸우는 행려자들을 보고 ‘저들이 부자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은 천국을 희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좋아하면 이미 지옥을 선택한 것입니다. 욕구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참 기쁨은 세상 기쁨을 끊을 때 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 함께 갔던 한 청년이 이 성지순례를 계기로 학생 때부터 피던 담배를 끊어보겠다는 결심을 이야기했습니다. 담배를 끊으면 건강에도 좋고 돈도 절약되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과 자신이 머무는 곳의 냄새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 수 없던 것을 하게 되어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고 그 자존감 높아진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즐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승자효과는 다른 일을 하는데도 작용하여 하는 모든 일이 더 잘 되게 만듭니다.
이제 곧 사순절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보통 사순 때 내가 세상에서 즐기는 것들을 절제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런데 사순이 끝나고 나면 다시 똑같아집니다. 물론 사순절만이라도 절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더 좋은 것은 영원히 절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진정 기쁨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씩 끊어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에게 재산을 팔아버리라고 하신 것은 일시적으로 끊을 수 있는지를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끊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하고 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게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끊고 싶어도 못 끊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아직도 그것들이 기쁨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이유는 안 피우는 게 기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오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지켜온 것을 앞으로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 고비만 넘기면 더 이상 욕구가 안 생기는 단계가 반드시 옵니다. 내가 세상 기쁨을 하나 끊을 때마다 천국의 기쁨이 하나 더 채워진다는 사실을 믿읍시다. 그리고 이번 사순절에도 세상 기쁨을 하나 더 끊어봄으로써 그것 때문에 오는 집착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부활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신부-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