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_마르코7장1_13

마음을 씻어라

190212 황창연신부 매일미사 강론 : 마음을 씻어라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0―2,4-20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 2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2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4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은 이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I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함께 정결례에 대하여 논쟁하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그 논쟁은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은 까닭으로 시작됩니다. 그 당시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은 위생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결례와 관련하여 부정한 것을 피하려는 규정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위선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율법을 공부하고, 율법의 규정들을 충실히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율법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시키면서 수많은 규정들을 만들었고, 특별히 정결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조상들의 전통”인데, 문제는 이 규정들을 모세의 율법과 동등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성전에 예물을 바치면서 그 예물을 세속적으로 쓰지 못하게 하는 ‘코르반’ 서약을 예로 드시면서, 규정에 얽매여 율법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린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 서약이 부모 공양을 회피하는 데 쓰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본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규범인데도, 바리사이들이 본디 정신은 잊어버린 채, 세부 규정에만 얽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규율을 지키는 것과 본래의 정신을 지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개여서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깨어 있는 정신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오늘의 묵상 II 

헛되이 섬겨서는 안된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적인 생명양식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전통을 고집하면서 알맹이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 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 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 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 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오늘의 묵상 III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인정받지 못한다

어느 대학에 시험은 많이 보았으나 성적을 매기지 않던 한 영어 교수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님은 첫 시험을 치룬 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볼 때 저에게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보지 마십시오. 시험은 제가 여러분에게 평가를 받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실력에 점수를 매기십시오.”

그러고는 시험지를 각자에게 나누어주고 각자가 점수를 매겼습니다. 학생들은 그 시험지를 다시 회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점수가 여러분이 저를 평가한 점수입니다. 다음번엔 저를 좀 더 잘 평가해 주시고 시험지는 여러분이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시험은 좋은 점수를 받아 선생님께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선생님을 평가하고 내가 나를 평가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시험성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 아이들의 성적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이 선생님을 믿고 인정하고 사랑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치르라고 주신 시험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관심이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그분이 변하실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을 더 믿고 감사하여 좋은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못 지키는가는 내 스스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체크하는 도구이지 하느님이나 이웃에게 인정받으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관습법으로 하느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이 있지만 그들은 부모에게 드릴 것이라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더 잘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부모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드리는 예물은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세상에서 창조자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 작은 하느님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창조자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말하기에 그것은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하느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율법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평가했어야 하는데 그것으로 하느님께 평가받으려 했고 이웃에게 평가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저 잘했죠? 이 정도면 인정받을만하죠?”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웃들에겐 “내가 너보다 하느님 마음에 더 드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느님은 제가 이 점수를 받아야만 저를 인정해주시는 군요.”라고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점수에 따라 우리를 차별하시는 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듯 자신이 하는 행위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하면 그 누군가가 그 평가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인정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미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 안에 상대를 인정 없는 분으로 여긴다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인정받으려면 결국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은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는 도구인데, 율법주의는 그것으로 내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평가받으려는 행위입니다.

퇴계 선생은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이 되라고 건물구조 자체를 공(工)자로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 전관에 ‘박약제’란 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박약제’란 말의 뜻은 ‘박’자는 박사할 때의 박(博)자이고 ‘약’자는 절약할 때의 약(約)자입니다.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입니다. 이조 5백 년 동안 유교의 예절이 너무 번거로워 백성들의 삶을 위축시켰기에, 퇴계 선생은 지나친 예절의 폐해를 살피고 후학들에게 학문에 더 에너지를 쏟으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율법은 좀 줄이고 복음에 집중합시다. 행위로 인정받으려하지 말고 이미 인정받았다는 복음을 믿읍시다. 인정받았음을 믿을수록 스스로 메기는 율법점수는 저절로 더 높아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전삼용신부-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나누어 봅시다.

2) 율법이나 규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규정에 얽매어서 주님과 멀어진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주님의 뜻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옳지 못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식구들과/친구들과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활동을 이야기 해봅시다.

5) 천당에 가려고 좋은 일을 봉사를 하고 있나요? 아니면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봉사를 하나요?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좋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는데 신앙인과 좋은일을 하고 사는 일반인과의 차이점을 이야이 해봅시다.

 

유대교는 613개의 율법(계명)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의 중심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배우고 실천해 나아갑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우리는 율법을 외면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봅시다.

“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한 가지 커다란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불경입니다. 유다인들은 감히 하느님을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너무나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바로 쳐다볼 수 없고 아래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지성소 앞에 휘장이 쳐져 있지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휘장이 찢어진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신데, 그들이 잘못 이해했기에 그 앞에 휘장을 쳐놓 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휘장을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죽으실 때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지며 갈라졌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출처 : ‘아주 특별한 순간’ 51쪽에서 52쪽 (V. 안토니오 사지 VC 지음 ㅣ 류해욱 옮김 바오로딸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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