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천국을 생각하면 (반영억신부)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시련에 대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시련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절대로!”(프란치스코 교황).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살지 말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름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를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나자로의 입장에서

    – 부자의 입장에서

    – 5형제 입장에서

2.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참 많습니다.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냉담자, 성당에 새로오신 사람, 예비자 등등…이런 분들이 성당 공동체에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우리가 이런 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 나아갈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그리스도에게 걸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혹시 시련이 있었다면 이 시련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메세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

오늘의 묵상 II
죽어야만 알게 되는 나의 죄 (전삼용신부)

어머니를 잃은 도라는 캘빈이라는 의붓아버지와 미국 황야지대 한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기타를 치고 있던 도라에게 캘빈은 소리를 지르며 폭력적인 언어로 나무랍니다. 기타 줄까지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이지만 물줄기를 발견할 때까지 우물 파는 일을 함께 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둘이 우물을 파던 중 우물 바닥이 밑도 안 보이게 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캘빈과 도라는 긴 줄에 손전등을 묶어 내려 보냅니다. 잠시 뒤 손전등은 사라지고 고대 문자가 쓰인 종이와 함께 황금 덩어리가 묶여 올라옵니다. 캘빈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갑니다. 밑에 누군가 있는 것이 확실해지자 도라는 샌드위치와 영어사전을 바구니에 넣어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영어로 “이 음식을 햄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음식 값을 동봉했습니다.”라는 편지와 황금 한 바구니가 실려 있었습니다. 도라는 냉장고에서 음식들을 꺼내어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황금과 함께 “저희는 이것을 치킨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참 맛있어요. 또 없나요?”라는 편지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때 캘빈이 돌아와 황금을 끌어올리는 도라에게 소리치며 욕심 많다고 나무랍니다. 그는 손전등을 수십 개 사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손전등을 하나 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손전등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음식 값은 없습니다.”라는 편지만 올라옵니다. 캐빈은 노발대발 하며 도라에게 10분 뒤에 끌어올리라며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밑으로 내려갑니다.

10분 뒤 황금이 가득 들어 있는 캐빈의 군복만 올라옵니다. 그리고 이런 편지가 꽂혀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칠면조라 부르겠습니다.”

이것은 1990년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어메이징 스토리’의 일부입니다. 캘빈은 타인이 자신의 이익을 채워줄 사람으로만 보았고 도라는 자신이 도와줘야 할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이 둘의 캐릭터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캐릭터와 매우 닮았습니다. 부자는 누군가를 도와줄 때 항상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부자가 자신의 가족들을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장면을 해석해야합니다.

부자는 지옥에서도 착한 마음을 발휘합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부활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라자로가 부활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 안엔 믿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와 힘이 들어있기에 말씀을 읽고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마음 안에서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믿기 싫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믿으려하지 않고 또 믿지 못하는 핑계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믿는 것도 나의 결단이지만 믿지 않는 것도 나의 아집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자가 착해서 형제들을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사람이 그렇게 착할 리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형제들이 지옥에 오게 되는 것이 자신의 탓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형제들이 잘못되면 하느님 탓을 하거나 부모나 사회, 혹은 세상 탓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형제들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은 자신의 탓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지옥에 오게 된다면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또 자신들을 원망하는 형제들에 의해 괴롭힘을 받을까봐 그렇게 청하게 된 것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길거리를 지나가다 누워있는 행려자의 이름을 물어보거나 알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라자로가 그 집 앞에 오래 있었거나 혹은 지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인 것도 자신이 잘 해서 그런 것이고 타인이 가난한 것도 타인의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지옥가야 할 이유가 된 것입니다.

마치 카인이 아벨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며 동생의 죽음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7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 다 그들 탓일까요? 내가 나누지 못하는 탓은 아닐까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줄 수 있었는데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면 누구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녀가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듯 모든 사람은 나를 통해 은총도 받고 저주도 받습니다. 폼페이라는 도시의 사람들이 40세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수도관 이음세가 납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납이 얼마나 몸에 안 좋은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부자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게 된 이유는 부자의 죄가 그들에게 흘러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 존재가 이웃에게 영향을 줍니다. 세상이 온난화 되는 것도 나의 탓이고 공기가 탁해지는 것도 나의 탓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공기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는 변하려하지 않으며 남의 탓만 하다가 우리도 심판을 받고 나서야 나의 탓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다 바뀔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가족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나 이웃이 굶고 있는 것을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지 라자로는 길거리의 개들에게 자신의 종기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도 내어줄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천국으로 이끈 것입니다. 이웃의 죄는 나의 죄이고 이웃의 아픔은 나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보시며 당신의 것으로 여기셔서 인간의 죄를 당신이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로움이 당신을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에 세상의 죄는 나의 죄가 됩니다.

라자로처럼 은총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책임을 느껴야 천국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