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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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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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천국을 생각하면 (반영억신부)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시련에 대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시련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절대로!”(프란치스코 교황).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살지 말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름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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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를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나자로의 입장에서
– 부자의 입장에서
– 5형제 입장에서
2.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참 많습니다.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냉담자, 성당에 새로오신 사람, 예비자 등등…이런 분들이 성당 공동체에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우리가 이런 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 나아갈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그리스도에게 걸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혹시 시련이 있었다면 이 시련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메세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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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II
죽어야만 알게 되는 나의 죄 (전삼용신부)
어머니를 잃은 도라는 캘빈이라는 의붓아버지와 미국 황야지대 한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기타를 치고 있던 도라에게 캘빈은 소리를 지르며 폭력적인 언어로 나무랍니다. 기타 줄까지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이지만 물줄기를 발견할 때까지 우물 파는 일을 함께 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둘이 우물을 파던 중 우물 바닥이 밑도 안 보이게 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캘빈과 도라는 긴 줄에 손전등을 묶어 내려 보냅니다. 잠시 뒤 손전등은 사라지고 고대 문자가 쓰인 종이와 함께 황금 덩어리가 묶여 올라옵니다. 캘빈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갑니다. 밑에 누군가 있는 것이 확실해지자 도라는 샌드위치와 영어사전을 바구니에 넣어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영어로 “이 음식을 햄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음식 값을 동봉했습니다.”라는 편지와 황금 한 바구니가 실려 있었습니다. 도라는 냉장고에서 음식들을 꺼내어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황금과 함께 “저희는 이것을 치킨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참 맛있어요. 또 없나요?”라는 편지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때 캘빈이 돌아와 황금을 끌어올리는 도라에게 소리치며 욕심 많다고 나무랍니다. 그는 손전등을 수십 개 사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손전등을 하나 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손전등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음식 값은 없습니다.”라는 편지만 올라옵니다. 캐빈은 노발대발 하며 도라에게 10분 뒤에 끌어올리라며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밑으로 내려갑니다.

10분 뒤 황금이 가득 들어 있는 캐빈의 군복만 올라옵니다. 그리고 이런 편지가 꽂혀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칠면조라 부르겠습니다.”
이것은 1990년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어메이징 스토리’의 일부입니다. 캘빈은 타인이 자신의 이익을 채워줄 사람으로만 보았고 도라는 자신이 도와줘야 할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이 둘의 캐릭터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캐릭터와 매우 닮았습니다. 부자는 누군가를 도와줄 때 항상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부자가 자신의 가족들을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장면을 해석해야합니다.
부자는 지옥에서도 착한 마음을 발휘합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부활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라자로가 부활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 안엔 믿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와 힘이 들어있기에 말씀을 읽고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마음 안에서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믿기 싫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믿으려하지 않고 또 믿지 못하는 핑계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믿는 것도 나의 결단이지만 믿지 않는 것도 나의 아집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자가 착해서 형제들을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사람이 그렇게 착할 리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형제들이 지옥에 오게 되는 것이 자신의 탓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형제들이 잘못되면 하느님 탓을 하거나 부모나 사회, 혹은 세상 탓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형제들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은 자신의 탓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지옥에 오게 된다면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또 자신들을 원망하는 형제들에 의해 괴롭힘을 받을까봐 그렇게 청하게 된 것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길거리를 지나가다 누워있는 행려자의 이름을 물어보거나 알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라자로가 그 집 앞에 오래 있었거나 혹은 지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인 것도 자신이 잘 해서 그런 것이고 타인이 가난한 것도 타인의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지옥가야 할 이유가 된 것입니다.
마치 카인이 아벨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며 동생의 죽음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7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 다 그들 탓일까요? 내가 나누지 못하는 탓은 아닐까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줄 수 있었는데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면 누구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녀가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듯 모든 사람은 나를 통해 은총도 받고 저주도 받습니다. 폼페이라는 도시의 사람들이 40세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수도관 이음세가 납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납이 얼마나 몸에 안 좋은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부자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게 된 이유는 부자의 죄가 그들에게 흘러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 존재가 이웃에게 영향을 줍니다. 세상이 온난화 되는 것도 나의 탓이고 공기가 탁해지는 것도 나의 탓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공기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는 변하려하지 않으며 남의 탓만 하다가 우리도 심판을 받고 나서야 나의 탓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다 바뀔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가족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나 이웃이 굶고 있는 것을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지 라자로는 길거리의 개들에게 자신의 종기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도 내어줄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천국으로 이끈 것입니다. 이웃의 죄는 나의 죄이고 이웃의 아픔은 나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보시며 당신의 것으로 여기셔서 인간의 죄를 당신이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로움이 당신을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에 세상의 죄는 나의 죄가 됩니다.
라자로처럼 은총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책임을 느껴야 천국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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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360
9월29일 [연중 제 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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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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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KUDFv5EXjo
[서울대교구 세례자요한(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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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성서 <듣는 소금항아리>**
[성 바오로수도회 이창항 세바스티아노 신부님]
https://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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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도 한때 난민이셨습니다!>
오늘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 그분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시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날입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난민이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철저한 이방인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이주민이나 난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쁘게 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나라에 단체로 난민이 입국한 때가 있었습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그분들로 인해 곧 나라가 파탄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다문화 다민족, 다국적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제대로 된 국제적 망신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 25, 35-36)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 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러운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 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나마 세계 청년대회에 참석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난민’, ‘이주자’에 대해 강하게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착한 목자로서 당신 자신의 품격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여러 국가 지도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교황님께서는, 부단히 난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대학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떠났던 난민이셨습니다. 난민들을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분별없고 무책임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땅과 뿌리, 가족과 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웁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난민들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난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선입니다.”
참으로 품위 있고 품격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과 처신에 우리 모두 큰 박수와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큰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있는 난민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지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즉위 직후, 바티칸과 로마를 벗어난 첫 방문지 람페두사 난민 수용소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가요?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각자 얼굴과 이름, 삶의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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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XVpMShxM0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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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예상보다 먼저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 비유를 통해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고 라자로가 천국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받으며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다시 살려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보내 달라고 간청했을 때의 아브라함의 대답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바리사이들의 상징인 부자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슨 가르침을 주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라자로는 언제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을까요? 부자는 모았고, 라자로는 개들에게도 몸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을 살게 만든 첫 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를 수 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예를 보십시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학대받는 고통 속에서 보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약하면 죽는다, 오직 강한 힘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생존 지향적인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보았고, 타인은 언제든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사랑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가 정상으로 보였을까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글보다 먼저 총 쏘는 법과 권투를 가르치며 ‘관계보다는 자기 생존을 위해 타인을 이겨야 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었습니다. 헤밍웨이는 평생을 경쟁과 투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했고, 그 결과 그의 내면은 안식 없는 ‘정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파괴하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생존 지향적 삶’을 선택한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죽기까지 사랑하며, 원수까지 용서하는 ‘관계 지향적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정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사랑은 오히려 독(毒)과 같은 지식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하는 그들에게, 스스로 죽기까지 내어주는 분의 진리는 너무나도 낯설고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죽여야 하는 이들이 죽으신 분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과 같이, 자신들의 율법과 생존 방식만을 고집하며 새로운 진리를 외면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 또한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근원적 선택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저는 네 살 때 할머니의 죽음으로 저의 첫 기억을 시작합니다. 할머니의 죽음에 관해 묻는 어린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죽음은 땅속에 묻혀 계속 잠자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잠’이 두려웠습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나도 할머니처럼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불안에 떨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 누웠는데 너무나 편안한 밤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그날 친구들과 너무나 행복하게 뛰어놀았던 것입니다. 마음껏 웃고, 함께 서로를 챙겨주며 온종일 신나게 보냈던 날이었습니다. 그 행복한 기억이 저의 두려움을 잊게 해준 것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행복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관계’에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근원적 친교를 위한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적 선택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서 사제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근원적 선택이 어린 시절 부모의 영향으로 정해질 수 있지만, 이 선택이 영원히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새로운 스승들, 곧 ‘모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관계를 지향하는 지혜로운 삶’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나 예언자들이 가르친 것은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투자자 워런 버핏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자선사업에 기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홍콩의 유명 배우 주윤발 또한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소유가 아닌 나눔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현대판 ‘모세들’입니다.
이들의 삶은 우리에게 ‘생존 지향적’ 삶에서 ‘관계 지향적’ 삶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이들의 지혜를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곧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거부하는 이들이 어찌 천상의 지혜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살해했던 알레산드로 세레넬리의 이야기는 이러한 ‘관계 지향적 삶’의 깨달음이 어떻게 회개와 신앙으로 이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2살의 알레산드로는 11살 마리아 고레티를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생존을 위해 어린 생명을 빼앗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고,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마음은 증오와 죄책감, 그리고 자기 보존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감옥에서 잠든 알레산드로의 꿈에 마리아 고레티가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그에게 순결한 백합 일곱 송이를 건네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알레산드로는 마리아의 순수하고 용서하는 영혼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난생 처음 ‘용서’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주는 해방감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근원적 선택은 결국 우리의 몫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였던 존 록펠러의 삶이 바로 이 지혜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33세에 백만장자, 43세에 미국 최고의 부자,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돈 때문에 쓸데없는 보험료가 아까워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만큼, 그는 재물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의 몸을 병들게 했고, 의사는 그에게 1년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절망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 마지막 진료를 기다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가 들어왔습니다. 거기엔 이런 성경 구절이 쓰여 있었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
바로 그때, 병원비 문제로 다투는 한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들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록펠러는 조용히 비서를 불러, 아무도 모르게 그 소녀의 치료비를 전부 내주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소녀는 건강을 되찾았고, 록펠러는 멀리서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평생 처음 느껴보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돈을 모으는 삶이 아니라, 돈을 나누는 삶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그가 나누기 시작하자 온몸을 괴롭히던 병도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결국 98세까지 장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심판은 나의 예상보다 먼저 이루어졌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 ‘생존 지향적’ 혹은 ‘관계 지향적’인 근원적 선택을 하고 있으며, 이 선택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근원적 선택을 새롭게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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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6년 캐나다에서 공부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당시 저는 이냐시오 영신 수련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신학교 교학처장 신부님께서 제게 ‘설교학’을 함께 공부하면 좋겠다고 권하셨습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면 신학생들에게 설교학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학 공부도 병행했습니다. 수업에서 인상 깊었던 방식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을 팀으로 나누어, 좋은 설교나 강론의 영상을 찾아 보여주고 평가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제가 신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좋은 설교들을 찾아내어 분석했는데, 법정 스님의 설법,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까지 다양했습니다.
그중 제 마음에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람페두사’ 강론이었습니다. 교황님은 2013년 즉위 후 첫 사목 방문지로 지중해의 작은 섬 람페두사를 찾으셨습니다. 그곳은 전쟁과 가난을 피해 온 난민들이 머물던 수용소였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세계화된 세상 속에서 ‘무관심의 세계화’에 빠져 있습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보면서도 ‘그건 내 일이 아니야’라며 지나쳐 버립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살고 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그러나 오늘 저는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교황님의 이 호소는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처음부터 잘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눈물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끊임없이 이렇게 상기시키십니다. “너희도 한때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난민이 아니었더냐?” 그 체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해방된 백성은 이제 나그네와 과부, 고아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강한 자의 세상이 아니라, 약자가 존중받는 세상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난민의 삶을 사셨고, 십자가 위에서 철저히 버려진 이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언제나 난민과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는 우리를 다시 깨우칩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지만, 문 앞에 굶주린 라자로가 있었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당하며 아브라함에게 애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는 눈에 보이는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무관심 속에 사는 사람은 부활의 기적이 눈앞에 펼쳐져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한국 교회도 사도좌와 뜻을 같이해 이주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에게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민자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낯선 땅에 와서 도움을 받으며 살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그 기억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이민자와 난민을 환대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몰라봤지만, 하느님은 라자로의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를 이름으로 부르시고, 탐욕스러운 부자를 외면하십니다. 그 하느님의 시선을 기억하며, 우리 공동체가 환대와 연대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도 한때는 종살이하던 난민이 아니었더냐?” 이 말씀은 과거를 회상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기쁨을 누리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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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은 라자로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 나라에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 16,14)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부자의 태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웃고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들조차 사랑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부자는 왜 불타는 지옥에 갔을까요? 예수님 시대에 재산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좋은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다].”(16,25)라고 하였듯이 재산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지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디 주인의 의도대로 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과 고통이라는 악을 바라시지 않으므로 재산을 받은 사람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재산이 자기 것이니 자기를 위해서 썼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갇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즐거움만 보았기 때문에 라자로가 자기 대문 앞에, 그렇게 가까이 있었지만 보지 못하였습니다.
살아 있었을 때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 존재하였던 큰 간격은 죽어서도 유지됩니다. 그가 살아서 라자로와 관계를 맺었다면 달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기에,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께도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옥의 다른 이름은 이기심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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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루카 16,1-13)에서 이어지는 재물에 관한 가르침을 더욱더 구체적이고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재물이 잘못 사용될 때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파멸로 이어지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1. 부자와 라자로의 대조
부자는 “고운 옷과 값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다.”(루카 16,19)고 한다. 반면 라자로는 “몸은 헌데투성이에다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루카 16,20) 개들이 상처를 핥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과 질병 속에 있었다. 두 인물은 이 세상에서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부자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비유를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자가 죄를 지은 것은 단순히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집 문 앞의 가난한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치 속에서 살면서도 라자로의 상처를 보지 못했다. 바로 그 무관심이 그의 파멸이었다.”(In Lazarum Concio, Homilia II, PG 48, 992) 즉, 죄는 부 자체에 있지 않고, 가난한 이를 향한 무관심과 사랑의 부재에 있다.
2. 하느님의 정의와 삶의 재균형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렇게 답한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이 말씀은 하느님의 정의가 결국 모든 불의와 불공평을 바로잡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무시당한 이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굳이 ‘라자로’(하느님이 도우신다)라고 부르신 것도 상징적이다. 사회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느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부자가 가진 부는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라자로가 겪은 가난은 그를 해치지 못했다. 오히려 부자의 교만은 그를 파멸시켰고, 라자로의 인내는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다.”(Sermo 299)
3. 말씀을 듣는 귀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라자로를 보내 자기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답한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구원은 기적적 표징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으며,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것이므로, 교회의 끊임없는 생명과 양식이다.”(계시 21) 오늘날 우리에게는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다. 그 말씀을 듣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4.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사야 예언자는 말한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이사 58,7) 부자는 바로 이 말씀에 귀를 닫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더 이상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재물이 단순히 중립적 수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구원의 길과 파멸의 길을 가른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이들과 지구는 부당한 개발과 이기적 소비의 피해자이다. 참된 회개는 그들과의 연대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49항)
맺음말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구원은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재물은 형제를 위한 다리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을 스스로 가두는 벽이 될 수도 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는 생명을 얻고, 말씀을 외면하는 이는 자기 욕망 속에 갇혀 파멸을 맞이한다. 라자로라는 이름처럼,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하느님이 도우신다.”(El’azàr)라는 믿음 안에 있다. 이제 우리도 가진 것을 나누고,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브라함의 품, 곧 영원한 잔치로 불러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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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이지 않는 사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0)
보지 않는
사람 곁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뿐이지요
보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없는
사람일지니
보지 않는
사람은
있는 사람을 없애는
사람이요
있는 사람을
없앰으로써
사람을 있게 하신
하느님마저 잊은
사람이겠지요
지금여기에서
보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될 테지요
지금여기에서
보이지 않음으로써
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는 물론
지금여기에
계심에도 잊힌
하느님께마저도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말이지요
허나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기에
있어도 없어야 할
사람일지언정
몸소 내시고
늘 보고 계시는
하느님께는
하느님을 닮아
애써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있는
사람일 테고요
그리고
그 곁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는
사람이
지금여기에서처럼
영원히 함께 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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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실천은 내가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준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ㅍ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19-26)
1) 부자가 아브라함을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즉 이스라엘 사람이며, 하느님을 믿고 있고,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라자로를 보내시어”라는 말은, 그 부자가 라자로를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라자로가 대문 앞에 누워서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라자로의 처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에는, “제가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준 것처럼”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주었으니 한 방울의 물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21절의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라는 말은, 부자가 오며가며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것은 배고픔을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하는 아주 적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인데, 뜻으로는 부자가 던져주는 아주 적은 양의 빵 부스러기를 개들이 빼앗아먹었다는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어떤 가나안 여자’의 말이 연상됩니다(마태 15,27).>
2) 부자가 마치 개들에게 던져주듯이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준 것은 라자로를 심각하게 ‘모욕’한 일입니다. 그런 행위는 ‘사랑 실천’이 아니라 ‘죄’입니다. 아마도 부자는, “나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했다.” 라고 생각하면서 잘난 체 했을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상대방’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을 생각하면(마태 22,39), ‘사랑은 같아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먹고 남은 것을 조금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함께 먹든지, 함께 굶는 것이 사랑입니다.
3)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라는 아브라함의 말은,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독점’했고”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사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것도 죄이고, 혼자서 독차지하면서 나눔을 실천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나쁜 것들만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이 라자로에게 좋은 것들을 나누어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빈부 격차와 불평등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자들이 독점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심판은, 한 번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선고는 아무도 뒤집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심판결과는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각자가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있다면…… 심판결과를 바꾸고 싶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하고, 잘못하고 있는 것들을 ‘지금’ 바로잡아야 합니다.
4)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뒤의 18장에 나오는 부자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그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루카 18,23)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4-25) <어쩌면 ‘라자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지’ 같은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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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인 물은 썩는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알고, 그것을 효과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옛날 한 마을에 구두쇠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물을 길었습니다. 구두쇠 할아버지는 그것이 늘 못마땅하였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많은 돈을 들여 집 주변에 높은 담을 쌓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만 우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우물의 물맛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러운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퍼갈 때는 계속해서 맑은 물이 솟아 올라왔지만, 물이 계속해서 고여 있으니까 썩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그 좋던 물이 먹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제 때에 올바로 쓰지 않으면 그 가치를 잃고 맙니다. 재물이나 시간, 재능,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제대로 간수 하지 않으면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똥은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위해, 뿌려지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수고와 땀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신 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감사하고 기쁘게 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관리자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욕심을 경계하도록 일깨워줍니다. 무엇을 소유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소유한 것 때문에 하느님을 잃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으니,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공한 것은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지 하느님의 은총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여길 수가 있습니다. 멋진 삶에 완전히 빠져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늘 풍족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한,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 표현의 대상이 되는 이웃을 위한 시간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그는“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신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은 탐욕, 바로 돈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수녀님은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주는가가 아니라 그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많이 가졌는데도 왜 줄 것이 없습니까? 아홉을 가지면 하나를 채워 열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사실, 부자가 잊고 살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은 현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영원한 삶의 풍족함을 잊으면 이 세상의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자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다 복이 없는 사람입니까? 역시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경험으로 보면, 복을 간수하지 않으면 화가 돌아옵니다. 복 안에 화가 있습니다. 단순한 예이지만 로또 복권이나 토지보상 등으로 졸지에 부자가 된 사람의 거의 모두가 횡재하기 전보다, 더 비참한 생의 마감을 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가족의 유대관계가 깨지고 친구와 멀어지고 인생이 피폐해진 사람이 많습니다. 수고와 땀이 없는 복은 결코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이 천국으로 가는 보증수표냐? 그것도 아닙니다. 가난이 주는 비참한 고통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매달린 사람이라야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물질에만 의지하려 하면 더 탐욕스러워지고 몰염치해지며 더욱 천박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면 지금 당장은 어려울지 몰라도 복중의 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가졌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아닙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은 많이 베풀고 적게 가진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인내하고 희망을 키워가야 합니다. 지금의 처지를 불평 불만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은총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도우십니다. 따라서 믿으십시오!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자로는 모든 것을 잃은 초라한 삶을 살았습니다.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 때문에, 불행 때문에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 나라에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나 몰라라 했지만 “라자로”라는 이름, 즉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의미대로 하느님께서 그를 도왔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반드시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지금 여기서 최선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구르의 말이 나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느님이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기도가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살아서도 천국이요, 죽어서도 천국이 될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시기 빕니다. 그리고 먼 훗날의 천국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 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12,15) 너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 재물을 보물로 삼지 말고 주 하느님을 가장 귀한 보물로 삼고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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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박상우 클라오 신부님]
<시선>
“그는 자주색 옷과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19-20 참조)
그는 화려한 옷과잔칫상을 바라본다. 즐거움과 호화로움이 그의 눈을 사로잡는다. ‘날마다’ 대문을 오고가며 마주쳤을 라자로에게 그의 시선은 머물지 않는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물을 대하듯 무심하고 차가운 눈으로 지나칠 뿐이다. 그래서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라던’ 라자로의 슬픔을 알아보지 않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루카 16,23) 죽어 묻힌 뒤에야, 그의 눈은 라자로를 향한다. 날마다 외면했던 이를 이제 간절히 바라본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다. 살아생전 나와 너를 갈라놓던 차가운 시선, 나와는 상관없다던 무관심이 스스로를 지옥에 가두는 벽이 되어 가로막는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 6,22 참조)
눈은 내면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관심어린 눈빛, 따스한 시선. 찌푸린 눈, 미움 가득한 눈빛. 혹은 아무런 관심도 담겨있지 않는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 우리는 시선을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짓는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이야기들을. 인내롭고 따스한 시선을 마주하며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금 생을 살아가게 하는 구원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반면 나와 너를 가르는 벽을 만들고 소외시키는 이야기, 차가운 무관심의 시선이 만들어내는 슬픔의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이 중 이방인들이 자주 마주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가슴에 사무치는 시선은 어떤 것일까? 타국에서 비슷한 처지로 살아가며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결국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들이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편을 가르는 눈빛들, 나아가 자신들보다 ‘하찮은’ 존재라며 수군대는 시선을 마주할 때, 깊은 슬픔을 느낀다. 가로막는 큰 벽을 보게 된다.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먼 타국에서 삶의 희망을 붙잡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마주하는 시선이 존중과 사랑이 담긴 풍경이길 바라본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살아있는 구원의 시선, 부활의 이야기가 되길 희망하며, 낯선 땅에서 오늘도 애써 살아가는 이들을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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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홍일 토마스 신부님]
<부자와 라자로의 골짜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이고 많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번 생각을 해보면 부자는 어떤 나쁜 일을 하였기에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쉼을 얻었을까요?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6)라고 말합니다. 이 큰 구렁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에서 부자는 부자의 삶을 살았고, 라자로는 그 집 문 앞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을 겁니다. 그럼, 부유한 삶을 살았던 부자에게 부족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에서 이웃을 사랑하는데 움직이지 않은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있던 무관심의 시간이 서로의 큰 구렁을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태 19,19)라는 계명의 시작은 몸을 움직여 다가감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이웃들 옆에 서 있는 행동에서 시작이 됩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향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라자로에게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 즉 각자의 삶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의 행위는 바로 다가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가가지 못하고, 상대가 다가오면 행동하려고 합니다. 아니면 내 눈에 보이는 부분만 생각하고 사랑하고, 내가 내미는 손을 잡는 사람만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웃 사랑은 다가감에 있습니다.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다가간다고 해서 처음부터 내가 무엇을 도와주고 내가 손을 내밀어주고 무엇이든 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그저 다가가서 옆에 서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을 대신해서 위로를 전해주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옆에 서서 위로의 기둥이 되어주고 존재해 주는 것이 이웃사랑의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해주는 것은 옆에 서 있어서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또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시고, 성조들의 옆에서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으로 계신 하느님이시기에 이웃사랑이 하느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존재이며, 바로 우리 옆에 서 계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와 같이 계셨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같이 그저 이웃에게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부자가 잘못한 것은 라자로를 향해 다가가지 않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무관심, 이것이 바로 부자와 라자로 사이의 그 골짜기이며, 부자 스스로가 만든 무관심의 깊이입니다. 우리도 너와 나, 나와 이웃, 그리고 서로에게 무관심으로 골짜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 라는 말로 만들어지는 무관심에서 한 번 더 바라보고, 그저 옆에 서 있을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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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걱정 없이 사는 자들, 마음 놓고 사는 자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아모 6,1 참조)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사는 삶은 대부분의 사람이 꿈꾸는 행복한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아모 6,6 참조) 곧 하느님과의 계약,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일에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사람들과 피조물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누리는 것에 관해 관심과 시선을 집중하는 데에서 하느님과의 계약과 하느님의 뜻에 더 깊은 관심과 시선을 두어야 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일러주십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는 한 편의 단편 드라마를 보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물론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느냐? 그리고 죽음 이후 어떠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너무나 다릅니다.
부자와 라자로는 너무나 다른 삶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온갖 호화로움을 누렸던 부자는 죽음 이후에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라자로는 가난하고 종기투성이의 몸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단순히 몸과 마음에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식탁에서 떨어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개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라자로는 개와 같은 처지의 비참함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으며 성가시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라자로는 죽은 다음 아브라함 곁에서 위안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저의 갈증을 식혀주게 해 주십시오”(루카 16,24 참조)라고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뒤바뀐 상황이 단순히 부자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고,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 위안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일까요? 주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싶으실까요?
부자가 부자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 선물 받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쌓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자의 관심과 시선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부자의 집 대문 앞에는 매일 종기투성이의 라자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라자로를 보지 못했습니다. 라자로는 늘 거기에 있었지만 부자의 관심과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고, 라자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라자로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하느님을 잊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부자는 부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루카 16,19)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나눔의 신비, 사랑의 신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은 부유하지 못하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나누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부유해지면 그때 가서 나누며 살겠다는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상황이 부유하다고 여길 수도, 또는 가난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자신의 상황에서 나눌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역량 안에서 나눔이 가능합니다. 물질적으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기도와 위안의 말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과 시선으로 하늘나라에서 맛볼 행복을 미리 맛보는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며’(1티모 6,14)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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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부자와 불행한 처지에 놓인 거지 라자로가 있었는데, 죽음 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으로 가고, 부자는 땅에 묻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복음의 비유는 명확해 보이면서도 담긴 뜻은 깊습니다.
먼저 복음의 비유에서 중심 인물이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가난하고 고생하는 라자로보다는 부자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중심 인물이고 라자로가 조연임에도 부자는 이름이 없고 라자로(‘하느님께 의지하는 자’라는 의미)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부자는 불행해지고, 그의 마지막 처소는 저승입니다. 이름이 없음은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그가 담장 안의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화려하게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집 대문 앞에 있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에게는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도 주지 않을 정도로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그래서 담장 안과 밖의 관계는 끊어지고 소통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담장 밖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고 난 후에는 라자로가 있는 천당과 부자가 있는 저승 사이에 그의 집 높은 담장만큼 깊고 큰 구렁이 가로놓여 부자가 천당에 갈 수도 없고, 라자로가 저승에 있는 부자에게 물 한 방울 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관계의 단절. 그것이 가장 큰 불행의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하느님의 벌이라 생각하던 관념에 대해 반박합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거지 라자로와 부자 중에 여러분은 누구와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끼니조차 걱정하는 라자로처럼 자신을 거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음 속 부자의 모습에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부자 모습을 통해 깊이 묵상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비유에서 왜 부자가 죽어서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악을 행했다든지, 나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든지 하는 내용도 나오지 않습니다. 부유함 그 자체가 선은 아니지만, 또한 악도 아닙니다. 따라서 부유함이 부자가 고통을 받는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주목할 점은 부자가 고통받는 이웃에 대했던 태도입니다. 거지 라자로를 집 대문 앞에 두었던 것은 관용이 아니라 ‘무관심한 생각’을 드러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은 애덕이 아니라 ‘무관심한 행위’를 드러냅니다. 개들이 종기를 핥는다는 것도 ‘무관심한 마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자가 이웃의 어려움에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자의 모습은 옛날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 죄임을 오늘 복음은 알려줍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 배운 이와 못 배운 이, 좌와 우 다양한 방면으로 많은 이와 깊이 관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 사람인 사제이지만, 싫은 사람은 외면하고 싶습니다. 사실 좋은 사람, 잘해주는 사람만 만난다면 편하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복음의 부자보다 더 높은 담을 쌓고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것입니다.
무관심하고 차가운 마음은 천국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주위 어려움에 관심을 갖고 보살피며 따뜻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cpbc 생활 속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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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16,31)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 나에게 혹시 어떤 불행이 닥친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고 고민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걱정 때문에 밤을 지새우고 몸과 마음이 아픈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고 나면 이런 걱정들이 대부분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피식 웃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연한 걱정,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핀잔할 때 우리는 괜한 기우라는 말을 씁니다. 기우란 말은 중국 고전인 ‘열자’의 「천서」’ 편에 나오는 기인지우 杞人之憂의 줄임말로, 기 杞나라 사람이 쓸데없는 걱정 憂을 한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그래서 걱정도 팔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저것 걱정이 많은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걱정이 많은 까닭은 대범하지 못하고 소심한 표시이고, 욕심만 많고 낙관적이지 못한 표시입니다. 신앙적으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겁니다. 이렇게 걱정이 많은 사람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왜 걱정을 하느냐, 믿음이 약한 사람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마태6,25.27.32) 물론 걱정은 인간의 현실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기에 다만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인간은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비워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모스 예언자는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왜 불행할까요? 자신을 위해서는 걱정하지 않아야 하지만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는 걱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겁니다. 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문제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저 또한 자주 왜 걱정하십니까? 하느님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이 자매님보다 자식을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믿지 못하십니까?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시며 사랑이라는 점을 왜 믿지 못하십니까?, 라고 책망 아닌 책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물으면 어머니들은 하느님을 믿습니다만, 하고 말꼬리를 내립니다. 물론 믿음이 부족하기에 걱정하는 분도 있지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걱정은 사랑의 운명입니다. 걱정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면서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듯이 보입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염원입니까? 잘못되기를 바라고 불행해지길 바라는 염원이 있습니까? 염원은 잘되길 바라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겁니다. 그러니 안 좋은 일이 생길까 걱정하지 않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부모는 믿어도 지금 당장은 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선을 감당해야 하는 자식을 생각하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염원이고 사랑의 염려입니다.
제 어머니는 저를 따라서 영세 후 제가 걸어가는 수도 생활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늘 걱정스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제가 된 이후 교구 사제 부모님들과 만나시고, 함께 어울리시면서 걱정 아닌 걱정이 더 늘어나셨습니다. 사제가 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제가 된 이후 환속하신 신부님들의 부모님들을 만나시면서 혹여 저 또한 수도원을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와 걱정으로 당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저에 대한 걱정으로 맘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처럼 때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힘듦을 보면서 걱정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걱정은 사랑의 격한 표현이고, 처절한 기도라고 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는 것은, 내 배만 부르면 다른 사람이 굶주리건 말건, 병들건 말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닌 누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요, 자기 아닌 누구에 대한 아무런 염원도 없고 그래서 염려도 없는 것이요, 사랑 없음은 물론 미움조차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에 오늘 제1 독서 아모스에선, “걱정없이 사는 사람이 불행하다.”하고 말합니다. 걱정과 염려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불행한 겁니다. 걱정과 염려가 없어 편안한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온갖 걱정과 염려가 불안하게 하여도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겁니다. 오늘 복음의 라자로와 부자는 이런 행불행의 극명한 예입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시작은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누군가를 바라볼 때, 즉 나의 모든 방향이 그곳에 향해 있을 때 그 누구든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보지 않는 무관심으론 누군가를 품을 순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았다.”(16,22)라는 표현을 단지 일차원적인 상선벌악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어떤 면에서 죽음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이 비유를 통해서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는 게 참된 인생인가를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자의 때늦은 후회는 바로 삶을 살면서 시선이 주변보다 자신에 집중하다 보니 무관심과 무감각 곧 삶의 고뇌하는 주체보다 제3자적인 방관자의 시선과 삶의 태도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사실 부富란 그 자체가 선이 아니듯, 역시 악도 아니기에 부 자체가 그 부자의 불행의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아모스가 질책한 것처럼 그 부자는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살았던 사람이었으며,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사람”(6,1.6)이었기 때문에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왔으며, 그 흥청거림이 끝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에게는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대표되는 구경꾼적인 삶의 태도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라자로라는 거지가 자기 집 대문 앞에 있었던 것도 그의 관용 때문이 아니라, 거지의 존재 자체를 신경이나 관심조차 두지 않은 극단적인 무관심과 무감각에서 나온 행동이요, 또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도 애덕의 산물이 아니라 남은 음식에 대한 무관심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개들이 종기를 핥는다는 표현도 결국은 부자의 무감각을 드러내고, 어쩌면 이러한 삶이 물질적 부를 가능하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이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부자의 무관심이 그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부자의 모습은 옛날의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이야 어떤 처지에 살아가고 있든 자신만 잘 살고 마음 편하면 된다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의외로 많은 사람이 부자와 같은 삶의 태도를 당연시 받아들이고 있음이며 이런 의식이 점차적으로 사회 전반에 팽배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준다고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현상에서 때론 주위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사랑이라는 회개의 삶이 바로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들어 알고 있지 않나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갇혀 있을 때 찾아오지 않았다.”(마태25,42) 라고 추궁하실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무관심과 무감각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라자로를 바라봅시다. 무관심으로 닫혀 있는 시선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품을 수 있는 사랑을, 주변의 라자로와 같이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주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시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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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지난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 말씀전례의 주제도 재물의 사용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가진 자들의 흥청거림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곧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위한 싸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곧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의로움과 ~사랑”을 추구하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기”를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로,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사실 이 비유의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소유한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타인을 위해 쓰는 데는 인색했습니다.
마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가진 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며,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계적인 거부 석유 왕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열 배는 어렵다” 그렇습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이제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보십시오.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는 복된 사람’, 장운철 마르티노 수사님의 첫서원 미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강론 전에 저는 마르티노 수사님께 ‘무엇을 청하는지’를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그리고 마르티노 수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더욱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주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동행’이 아니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 동료들’과 ‘기도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동시에 이 길은 ‘자비를 베풀면서 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받아먹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베풀어야 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한편이 무너지면, 수도생활은 활기를 잃고 맙니다. 오늘 복음인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자비를 입었건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구원의 길에서 멀어진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수도승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끊임없이 기도에 사로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유기 서원’을 하는 마르티노 수사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수도승이 되길 기원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수사님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저희가 함께 그 길을 갈 것입니다. 그래서 수사님께서는 오늘, ‘하느님의 자비’와 ‘받은 자비를 베풀면서 하느님과 길을 함께 갈 것을 공동체 안에서 청원’하였습니다. 이제 수사님께서는 이미 받은 이 ‘자비’로 늘 기쁨과 평화 속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마르티노 수사님!
복된 서원생활 되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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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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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한 삶>
-“회개하라, 배워라, 섬겨라, 나누라”-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의로운 이를 사랑하시네.”(시편146,8)
총체적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나라안팎 모두에 해당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참으로 회개가 절박한 시대입니다. 위기의 본질은 자기를 잊고, 잃고 산다는 것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나의 온전한 삶을 위한 회개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야 하는 작금의 세상이요 파스카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레오 교황의 단편적인 말씀도 회개를 촉구합니다.
“단순한 사람들의 믿음이 교회를 인도한다.”
평범한 이들의 진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실현되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잘 살아라, 그러면 좋은 세월이 될 것이다. 우리가 세월이다”(Live well and the times will be good. We are times).
교황이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마디도 잘 살아야 하는 회개의 절박성을 일깨웁니다. 옛 현자도 회개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길을 확인하면 걷는 자세가 곧아진다.”<다산>
“행했는데 얻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원인을 살펴라.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자기에게 돌아온다.”<맹자>
자신이 회개를 통해 바르게 되면 곧 하느님이, 이웃이 좋은 도움이 되어 줍니다. 공자의 말씀처럼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톨릭교회 양대 신문의 2025.9.28. 오늘 1면 톱기사와 논설도 정부 당국의 회개가 절실함을 보여줍니다.
“정부, 낙태 합법화 강행…교회 강경 대응 예고, 교회의 우려 좌시해선 안 돼”
“낙태를 국정과제로? 생명경시 ‘도 넘었다.’ ‘손쉬운 낙태’가 국정과제라니?”
모두 일사불란하게 낙태합법화의 부당함을 강조하는, 정부 당국의 구체적 회개의 실천을 요구하는 교회의 입장입니다. 오늘은 제111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레오 교황의 담화문도 전세계적으로 이주민과 난민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작금의 시대에 시의적절하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전쟁과 불의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 조차, 이주민과 난민은 희망의 전령으로 서 있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강인함은 신앙에 대한 영웅적 증거입니다. 신앙은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것 너머를 보고 이들에게 현대의 다양한 이주 경로에서 죽음을 이기는 힘을 줍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교회가 궁극적 본향을 향하여 영원한 여정을 떠나며 희망으로 지탱되는 자신의 순례적 차원을 상기하게 해 줍니다. 교회가 ‘안주하고픈’ 유혹에 굴복할 때마다, ‘순례하는 도성’, 곧 천상 본향을 향하여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 되기를 멈출 때 마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안주에서 벗어나 회개의 여정에 오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웅덩이에 고인 물같은 안주가 아니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 순례 여정에 오르는 것이 참된 회개의 표지입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의 삶이지만 안으로는 하느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일 때 그대로 참된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참으로 탐욕과 쾌락의 무지에 눈먼 어리석은 부자들! 회개가 절실합니다. 위로 하늘의 하느님께, 좌우사방 이웃에 완전히 차단된 고립단절의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세의 지옥입니다. 아모스 예언자의 경고는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 불의한 부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부자의 심판이 그대로 실현됩니다. 천망회회 소일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그 누구도 엉성해 보이는 하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의 심판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두 사람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어떤 부자는 영혼이 없는, 생각이 없는 AI 인간처럼, 투명인간처럼 보입니다. 모든 관계가 차단된 고립단절의 삶입니다. 육적 욕망의 충족이 전부가 된 삶입니다. 이름도 없어 존재감없는 무명의 어떤 부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반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고,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합니다. 너무나 적나라한 대조입니다. 부자의 무관심의 죄가 참으로 큽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짐승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은 까맣게 잊고 오직 땅에 보물을 쌓으며 육적 본능만 충족시킨 삶이었습니다.
특기할 것은 부자는 무명이지만 가난한 이는 <라자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이름뜻입니다. 혼자서는 절대 구원이 없습니다. 더불어의 구원이요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바로 어떤 부자는 라자로가 자기를 구원에로 부르는 시험이자, 회개의 촉구였음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사필귀정, 인과응보, 마침내 사후 이들의 운명은 극적으로 바뀝니다. 어떤 부자의 호소가 참 절박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서로 건너갈 수가 없다.”
단절의 큰 구렁은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계속됐음을 봅니다. 살아 있을 때부터 회개와 함께 나눔으로 큰 구렁을 메꿨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분열과 단절, 혐오와 증오로 인해 건널수 없는 크고 작은 구렁은 곳곳에 얼마나 많은지요! 이어지는 부자의 호소가 절박합니다. 부자는 누군가 다섯 형제에게 가서 회개할 것을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지만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만으로 회개는 충분하다 하며 거절합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살았을 때 회개이지 죽으면 회개도 없습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오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의 궁극적 목표도 우리 모두의 회개에 있습니다. 부자는 물론이고 모든 신자들의 구원에 필수적인 회개의 의무입니다. 회개는 배움의 공부로 또 섬김과 나눔의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는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 제자에게 주는 가르침의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이런 수행의 노력과 더불어 섬김과 나눔의 삶입니다. 독점이 대죄입니다.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은 당신의 것 모두를 우리에게 주셨고, 주시고,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배움, 섬김, 나눔의 실천으로 표현되는 주님 사랑이야 말로 진정 참된 회개의 표지입니다.
이 모두를 제때에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1티모ㅍ6,15-16)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하느님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주님은 이방인을 지켜 주시고,고아와 과부를 길러 주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시편 146,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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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44)
<가난한 이들의 친구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16,19-31)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날마다 잘 먹고 마시면서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와 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랬던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함께 죽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그런데 인생이 역전됩니다. 부자는 그곳에서 큰 고통을 겪고, 가난한 이는 아브라함 곁에서 평화를 누립니다.
부자의 잘못은 가진 것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를 바라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가난한 거지 라자로를 외면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의 큰 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로 넘쳐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1티모 6,12)
믿는 이들의 마지막 종착역은 여기가 아닙니다. 죽음 저 너머에서의 삶,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바로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분리되어서는 안되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라자로와 같은 가난한 이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그들 중에서 특히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기억합니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신명 5,15)
우리도 한 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었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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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가장 큰 죄는
‘무관심’입니다.
우리의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편에 서 있고,
또 다른 이름의
폭력입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라자로를
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부자의 비극은
죽음 이후에야
깨달았다는 데
있습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의
우선순위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누어야 할
마음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무관심은
미움보다
더 깊은 죄이며,
습관화되면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가장 심각한
영적 병입니다.
한 사람의
소중한 이름을
기억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계신
하느님 또한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잊힌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거룩한 주일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라자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고
맞이하는
사랑의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은 바로
무관심을 넘어,
사랑으로
깨어나는
주님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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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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