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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철의 가을의 기도>

기도하고 눈을 뜨면 내 안의 모든 욕망과 거짓과 어둠이 사라지고/그 자리에 사랑과 진실과 평화가 자리잡게 하소서/그리고 언젠가는 작은 열매 몇 개라도 맺게 하소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길을 걸어갈 때/지난 날 그의 나쁜 기억은 모두 잊게 하시고/
내 마음의 집에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그를/오늘 새로운 기대와 설렘으로 만나게 하소서 이제는 가게 하소서/기다리는 사람을 향해서는 길을 걷게 하시고 나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을 향해서는 용서를 구하게 하소서/이제는 그들 곁으로 가 부끄럽게 손 내밀게 하소서   열매가 아니라 가지를/가지가 아니라 뿌리를/뿌리가 아니라 이미 떨어진 꽃과 잎을/ 
꽃과 잎이 아니라 햇살과 수분과 농부의 손길을 기억하게 하시고 / 이 모든 수고에 감사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 나를 더 낮추어 겸손하게 하시고/나를 더 멀리 보내어 쓸쓸하게 하시고/
나를 더 고독하게 하여 침묵하게 하시고/나를 더 외롭게 하여 사랑하도록 하소서

아멘!

<성경말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10)

예수와 만난 사람들(1)
(세상 사는 맛 – 세관장 자캐오)
이현주 생활성서사 2001년

삶이 이미 죽음과도 같았던 이들, 날마다 고통과 절망의 한숨을 토해 내야 했던 이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만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결국 예수가 살아가던 당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억압받고 핍박 받던 이들의 삶이 예수와 만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예수를 만나고 송두리째 인생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절박하게 그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준다.

글쓴이 이현주는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를 졸업하고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4년 조선일보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교수에게 신학과 인생을 배웠으며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15년 간 교우하였다.

많은 이들이 그를 이 시대의 멘토로, 영성가로 꼽고있으며, 글이 모이면 책을 내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있다. 모든 것에 자신을 활짝 열어둔 채 사랑을 배우며 사랑 그 자체이길 희망하며 목사, 동화 작가, 번역 문학가이며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을 쓰면서 대학과 교회 등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에 좋은 생각들을 담아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알게 뭐야><날개 달린 아저씨>등의 동화집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사람의 길, 예수의 길>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강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호랑이를 뒤집어라> 등의 저서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예수>, <민중의 복음>, <흔들리는 세대의 성인들> 외 다수가 있다.

사람들은 나를 전에는 죄인이라더니 이제는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그들의 말을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고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비평이 두려웠다면 처음부터 세리란 직업을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세리로 산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못 된다.

나도 유다 사람이다. 나의 선조들은 대대로 이 예리코에서 살아왔다. 유다 사람으로 태어나 유다 사람의 재물을 모아다가 이방인 로마에게 바치는 일을 좋아서 할 사람은 없다. 변명처럼 들리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 세리가 되어 세관을 드나들 적부터 나도 누구 못지않게 고민을 했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민족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이 노릇을 해야 하는가? 그렇게 고민하면서도 나의 삶은 나를 세관 깊숙한 곳에 던져 넣었다. 아니, 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깊은 구렁속에 떨어져 있었다.

어른들로부터 아이들까지 모두가 나를 “세리 자캐오 녀석!” 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아예 “세리 녀석” 혹은 “난장이 녀석”이 나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따돌려놓는 것과 동시에 나도 그들을 등져 버렸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의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태어났고 살아야만 했다. 내가 간사한 헤로데의 정권 아래 세리가 되어 동족의 미움을 사며 살아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의지만은 아니었다. 운명이라는 어떤 힘에 의하여 나는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 척박한 식민지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나의 삶을 살기 위하여 세리가 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내가 토색질을 일삼고 강제로 세금을 많이 거둬 로마의 내고 남은 돈을 착복한다고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있는데로 돈을 긁어 모았고 로마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내가 못할 짓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했다. 돈과 로마의 신임! 그것이 나의 생명줄이었다. 동족이란 다만 나에게 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소외감만 안겨준 피하고 싶은 괴물일 뿐이다.

나도 어릴적부터 회당에 나가 성경을 배웠다. 야곱이 에사우의 축복을 가로챌 때 그는 형에게 아우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했던가? 장인의 재산을 빼돌릴 때 그는 정정당당 했던가? 형제지간에 윤리라든가 인간 사회의 도덕이라는 것도 기득권자의 논리일 뿐, 빼앗긴 자에게는 거추장스러운 허물일 따름이다. 나는 세리인 자신을 단단하게 무장시키고, 갈수록 더 악랄한 수법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그럴수록 로마는 나를 유능한 세리로 인정하였고 나는 예리코 세관에 우두머리가 되었다. 나는 마침내 출세에 성공한 사람이 되었고 돈은 스스로 새끼를 치듯 내버려두어도 불어났고 그럴수록 내 삶의 근거는 든든하게 다져지기만 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내 로마의 배경을 등에 업고 있는 나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로마가 무너지지 않는 한, 돈이 위력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나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단단해져야 하는 나의 삶은 갈수록 더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었고 도무지 세상 살 맛이 없었다. 로마가 흔들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고 돈의 위력이 상실 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토록 확실한 사실에 근거한 나의 삶이 갈수록 흔들리고 불안한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삶을 이토록 불안하게 흔들어대고 있는 것일까?

내가 딛고 서있는 바탕이 뿌리째 흔들리는 듯한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나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나자렛 마을의 목수였고 어느날 집을 나와 광야에서 시련을 겪은 뒤 홀연히 랍비가 되어 다시 마을에 나타났는데,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자 요한의 후계자라고도 하고 오히려 요한을 능가하는 실력자라고도 했다. 그를 랍비라고 또는 예언자라고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 그는 갈릴래아 지방을 본거지로 삼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며 이 마을 저 골짜기를 다닌다고 했다. 그와 함께 다니는 동지들은 어부들과 노동자 들이며 그 중에는 전직 세리도 섞여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회당에서 가르칠 때는 그 당당함이 하늘과 같아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고, 그 권위는 여느 율법학자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나는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목수라면 이 나라에서는 귀족층은 아니지만 천민층도 아닌 따지자면 나처럼 중간쯤에 속하는 인물이 아닌가?

그는 어디에서 얻은 용기인지 모르나 누구도 넘지 못한 장벽을 우습게 여기고 이 바닥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하면 상류층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그 ‘질서 파괴자’를 만나보고 싶었고 그 사람이라면 부담없이 만나 내 불안한 인생을 함께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그의 주변엔 나처럼 세관에 몸담고 있는 사람도 어울려 다닌다고 하지 않는가?

도대체 그는 어떻게 생겨먹은 친구인가? 눈에 띄는 모든 기성 질서와 체제를 조금도 상관없다는듯 무시하고 살아가는 어쩌면 소문대로 ‘하느님의 아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한사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이건 하느님의 아들이건 예수라는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그에 관한 소문을 들을수록 커져만 갔다.

들려오는 그에 관한 소문 하나하나가 나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레위라는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할때,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한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성한 사람들한테는 의원이 필요 없소. 의원은 병든 사람한테만 필요하오. 나는 의원이며 의인들은 나와 아무 상관없소. 나는 오직 죄인들을 돌보러 온 사람이오”라고 대꾸했다는 대목에서 나의 가슴은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마구 설레었다.

더구나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로 하느님께서 인정한 사람은 세리였다라고 못 박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그와의 우정 같은 것을 느겼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 나의 마음이 생면부지인 그에게 쏠리게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구태여 설명하라면 그도 나처럼 동족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 전통으로부터 잘린 사람처럼 행동했다는데 이유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는 나자렛 자기 고향은 물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살기에 쫒기며 마침내 동족의 손에 체포되어 이방인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이 땅에서 추방당한 자였고 따돌림 당한 자였다. 그는 가는데 마다 죄인이었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위험인물이며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거짓 예언자였다. 현재 상황이 이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기득권자들에게 위태롭기 짝이 없는 자였다. 나에게는 호화로운 주택이 있고 그에게는 해가 져도 머리 둘 곳이 없었지만, 그도 나도 결국은 쫓겨난 ‘추방자’였다. 그날 예리코 마을의 돌무화과 나무 아래서 만나게 되기 전부터 나에게 그는 친구요 형제였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나는 그를 찾아 나서지 못했고 그가 있는 곳으로 내가 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로 왔다. 나는 그를 기다렸다. 그는 나의 기다림을 나에게 옴으로써 채워주었다. 그는 자기를 채운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준 사람이었다. 그는 이 땅에서 영원한 나그네였다. 그에게 밤마다 돌아가 머리를 둘 집이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흐르는 물과 같았다. 자기보다 더 낮은 곳이 있으면 시각을 다투어 그리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는 맨 아래에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단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친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예리코를 찾아오는 그의 앞에 깊은 도랑을 파 놓았다.

그가 나에게 오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지만 그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나의 초조함과 불안감은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로 둘러쌓인 채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그들은 나에게는 뚫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그들이 그를 독점하고 있었다. 이 세상 어느 놈이 그를 독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눌렀다. 내가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잊고 살아온 내 방식, 내 삶의 방식이었다. 세상이 나를 버리면 나 또한 세상을 버린면 된다.

그때 길가에 오래 묵은 돌무화과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시절 틈만 나면 올라가 놀던 나무였다. 순간 나는 그 나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꼬마 자캐오야, 이리 올라 오렴.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보여.” 나는 벌써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고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친구의 품에 안기듯 아직도 나의 손과 발바닥에 익숙한 나무둥치를 안고 기어올라갔다. 나는 돌무화과 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아래를 내려보았다. 예수 일행은 길을 따라 천천히 나무 아래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당히 키가 큰 장대한 사나이였다. 덥수룩한 갈색 수염이 아무렇게나 아래턱을 감쌌고, 긴 머리카락은 나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비록 먼 발치였으나 그를 본 순간,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렇다! 저 사내는 아무것도 꺼리지를 않는구나! 거침이 없어!” 그의 일행이 바로 내 발밑에 있었고 나는 숨을 죽였다. 그의 눈이 나와 만나자 그는 “자캐오 형제, 내려오시오. 오늘은 당신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집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무에서 내려와 나는 그 앞에 섰다. 그의 넓은 가슴에 내 머리가 닿았다. 그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먼지와 땀으로 지저분했지만 따뜻했다.

나는 정신없이 그를 집으로 안내하였다. 이 넓은 천지간에 나에게 신세를 지겠다는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나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준 유일한 사람, 그가 바로 예수였다. 그는 나에게 “자캐오 형제, 나는 자캐오 형제도 사람임을 당신 자신과 온 마을에 알리러 왔소. 당신한테도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고 인정이 괴어 있음을 보여주려고 왔소. 이제 그것을 풀어 놓으시오. 묶여 있는 당신 자신의 사람됨을 해방시키시오. 그런 다음 내가 주는 이 자유로 형제의 가슴을 채우시오. 이제부터 형제는 자유요. 아무것도 형제를 더 이상 묶어둘 수 없소.” 나는 온 집안 사람들을 동원시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을 그에게 하였다. 그날 밤은 참으로 흥겹고 소란스러운 잔치로 깊어갔다. 음식은 남아돌았고 모두들 질탕하게 먹고 마셨다.

나는 거나한 기분으로 그에게 말하였다. “예수 형제,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오늘 밤 내가 한 가지 결심을 하겠소. 내 재산의 반을 뚝 잘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또 혹시 토색질하거나 속임수로 빼앗은 재물이 있으면 법이 정한대로 그 네 배를 갚겠소!”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예수가 입가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잘 생각했소, 오늘 자캐오 형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뜻으로 건배합시다! 우리의 새로운 동지를 위하여!” 우리는 술잔이 넘치게 부어 마셨다.

밤이 새도록 마셨지만 조금도 취하지 않았고 이윽고 새벽 하늘의 별빛이 이울기 시작할 무렵, 예수와 그의 일행은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누워 코를 골 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내 방에서 이불을 꺼내어 천연덕스럽게 잠들어 있는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참으로 편안 얼굴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태산처럼 무겁고 바람처럼 가벼운 자유!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잠든 얼굴로 나에게 속삭였다. “무엇을 그리 움켜잡고 있는가? 놓아 버려! 모두 놓아버리는 거야! 그리고 하늘이 주신 대로 살아가게! 그 순간 우리를 떠났던 것들이 모두 돌아온다네! 이게 바로 세상 사는 맛이라네!”

그날 예수 일행은 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나는 곧 그와 한 약속을 지켰다. 창고에 쌓아 두었던 재물을 팔아 나의 가난한 이웃을 샀다. 사람들이 그런 나를 두고 미쳤다고 하였다. 예수라는 미치광이한테서 광기가 옮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돈을 긁어 모은다고 비난하였고, 지금은 내가 돈을 버린다고 비웃는다. 나는 그들의 비웃음에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 내가 가진 소유가 모두 없어져 거지가 된다 하더라도, 그가 가르쳐 준 ‘삶의 맛’을 포기하고 다시 ‘돈’을 붙잡을 수는 없다.

가난하게 될수록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난다는 이 신기한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마침내 빈손이 될 때, 나는 어쩌면 그가 걸었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느 늙은 돌무화과 나무 위에서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자캐오를 생각하면 내 가슴은 터질 것만 같다. 로마로부터 무능한 세리로 낙인이 찍히고 직장을 빼앗긴 것은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거리도 되지 못한다. “세상은 실로 하느님께서 지으신 곳, 살아갈 만한 곳이다!”.

묵상 나누기

자캐오처럼 예수님이 오늘날 나를 만나러 온다고 한다면 나는 어떤 고민을 이야기하고 해결해 주길 바라는가?

이루고자하는 사회적 목표를 이루고 나서 자캐오 처럼 허탈에 빠지거나 마음이 더 불안해서 안절부절한 적은 없었는지요?

자캐오처럼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움켜쥐고 있다가 놓으면서 포기한 것으로 인해 더 소중한 것을 얻은 경험이 있는가?

일상에서 예수님을 얼굴을 보기위해 내가 자주 올라가는 돌무화과 나무는 무엇인가? 그곳에서 어떤 예수님을 만나는가?

오늘 나는 주님을 내집에 모시며 살고 있는가? 내 집에서 주님외에 무엇이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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