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_요한10장1_10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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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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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문’에 빗대어 드러내십니다. 그리스 말에 ‘문’은, 안팎을 구분하는 개념의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드나드는 ‘통교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통교하는 문은 안팎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그 자유 안에서 예수님과 신앙인은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서로를 닮아 가며, 서로를 통하여 생명을 공유합니다.
‘문’은 그래서 서로를 향한 ‘길’이 됩니다. 길을 걷다 보면 목적지에 다다르고 그 목적지에서 목자와 양들은 서로 만나 풀밭의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길을
벗어나 걷게 되면 힘들고 불편해서 목적지에 다다르기는커녕 자기 존재마저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는 무엇을 해도 안 돼!’ …….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를 탓하며 세상살이마저 내려놓을까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고민의 끝은 결국 자신 안에 갇혀 버리는 외톨이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만든 ‘길’이 아니라 통교와 소통, 그리고 서로를 살찌우는 생명으로 열린 길이어야 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려고 떼쓰듯 덤벼드는 완고한 투정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일이 예수님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한다는 것을 자기 삶의 만족이나 욕망의 충족으로 폄훼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용인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신앙은 서로의 목소리를 애써 꼼꼼히 듣는 이들의 여유 안에 풍성한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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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어야 합니다.”에서 나에게 주어진 문(오직 천당에 가기 위한 문, 마음의 평화를 위한 문, 지옥을 피하는 문…)은 어떤 문인지 묵상해 봅시다. 나는 이 문을 지나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선포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예수님을 어떻게 선포하고 지내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예수님에 대한 선포를 가로막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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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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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구원관:

우리 교회는 구원에 관하여 예전부터 이렇게 주장해왔습니다. “교회밖에 구원은 없다.”
이 말은 가톨릭교회를 믿지 않으면 어느 곳에도 구원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는 생각을 조금 달리하기 시작합니다.
개신교의 일반적인 구원관은 ‘믿는 즉시 구원받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그 순간,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며 죽으면 천국으로 그 즉시 향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구원관 역시 ‘믿으면 구원받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즉시’라는 표현은 조심하면서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이 확실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선자체이시며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완전히 내치실 것이라고 우리 인간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 곧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종교인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등)이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불교, 무교인 등)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더 확실히 표현하는 길이라고 볼 수 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사실 자기 탓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 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기 탓없이 하느님을 아직까지 명백히 인정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 한 도움을 거절치 않으신다. 사실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복 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써, 결국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비추시는 하느님께 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될 사항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이 다른 데서 오는 구원과 동급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적법하고 유일무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승자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사실과 명령은 가톨릭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한 가톨릭교회를 통하여 구원이 전해진다는 자부심은 우리가 누려도 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모든 이를 사랑하시고 어떤 식으로든 구원하고자 하시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닮아 그분을 위하여서도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어떨까 제안해봅니다. (바오로딸 성경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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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자주 쓰시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당시 유목 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비유였습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은 그의 인도를 받아 낯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마침내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문’으로 비유하신 말씀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들어설 때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들어가야 할 공간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그분의 상처로 우리의 병이 나았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시기에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면, 우리가 설령 고난을 겪더라도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는 은총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와 지도자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그분께서 열어 주시는 문으로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은 내 감각을 자극하고 장밋빛 희망으로 포장된 유혹의 손길이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라고 외친 베드로 사도의 경고가, 2천 년이 넘은 오늘에 더 절박하게 들리는 듯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하게 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소 주일인 오늘은, 스스로 거룩하게 살면서 세상에 복음의 참된 기쁨을 선포할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 교회는 거룩한 일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용기를 갖고 기쁘게 각자 받은 부르심에 따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