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려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루카 9,28-33)

제네시 일기
(The Genesee Diary)

헨리 나우웬
성 바오로 1989년

바쁜 일정을 내려놓고 뉴욕 주 북부에 있는 제네시 수도원에 들어가 7개월 동안 노동과 기도를 하며 지낸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낸 트라피스트 수도원 일기다. 수많은 강연과 설교, 대중의 사랑을 내려놓고, 빵을 포장하고 돌을 나르는 단순노동을 통해 하느님 뜻을 가로막았던 인간의 욕심을 선명하게 깨닫는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인간의 전형적인 체험과 회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우웬은 7개월의 수도원 생활 동안, 작업장에서 수천 개의 빵 봉지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냇가에서 돌을 주워 나르는 등 하루의 반나절을 단순노동으로 보냈다. 이런 노동보다 연구하거나, 글을 쓰거나, 강의할 때 더 흥미를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소외를 실감한다. 또 육체노동이 그간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환상을 벗겨내 준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이는 무기력함, 유한성, 연약함 따위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흥미롭고, 신나며, 정신을 쏙 빼놓을 만한 활동들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수도원 생활을 끝내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가는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변화하지 못했고, 껴안고 있었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수도원 생활 중 홀로 있는 가운데 엿보았던 하느님의 영광스러움, 어둠을 뚫고 다가왔던 하느님의 빛, 끝없이 고요한 시간에 자신을 어루만지던 하느님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늘 위로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단순한 추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새롭게 바라볼 관점을 제시하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관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인도해준다.

나는 고독과 내적자유, 마음의 평화의 중요함을 가르치고 글로 표현하면서 줄곧 내 자신의 강박관념으로 비틀거렸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 계획에서 저 계획으로 치닫게 했던가?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분의 실재를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 본 사람처럼 생각하고 이야기하게 했던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는 나의 소명을 지루한 하나의 작업으로 변조시켜버린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하느님과 함께 있기 보다는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쪽이었고 기도에 관한 글을 쓰느라 기도생활을 떠나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보다 남녀인간들의 찬사에 더 관심이 있었다. 어쩌면 하느님의 약속들로 말미암아 해방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서서히 인간들의 뭇 기대에 얽매이는 포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솟구치는 수많은 감정과 적개심을 직시하고 그 탈을 벗겨 영적 미성숙의 표지들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나는 홀로 머물면서 아무도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여전히 충실한 하느님을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나는 외로운 감정을 눈으로 전환시키고 하느님께 나의 텅 빈 마음 속으로 들어오시도록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곳에서 나는 사막을 조금씩 체험하면서 그곳이 사람들이 목말라 죽는 메마른 장소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며 충실하게 기다리는 이들에게 약속을 내리시는 광대한 빈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입김, 하느님의 생명,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어떻게 생활화하고, 가장 심원한 우리의 자아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머물기로 작정하신 거처이다. 영적 생활이란 그 공간이 하느님께서 거처하실 수 있는 장소로 존재하게 하고 그분의 영광이 스스로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출세도 하고 설교가로서 성공하고 싶어한다. 나는 성인이 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죄인의 기분을 즐기고 싶어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도 또한 많은 사람들한테 인기를 얻고 애정을 받고 싶어한다. 예수께서 아주 분명하게 하시는 점은 사람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 사람이 하느님편에 서면서 동시에 그분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 하느님을 어느 선에서만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전부가 아니면 무(無)이다.

나에게 우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느님께서 내 인생 사건들을 통하여 나를 조형하셨고 또 나로 하여금 조형하시는 당신의 손길을 감지하고 당신이 내게 해주신 위대한 일들에 대해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바치도록 부르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내 역사의 하느님께 충분히 신경 써서 귀를 기울였던가?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시고 전날 아무것도 잡지 못한 나 더러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거나 빵을 떼셨을 때 내가 그분을 과연 알아보았던가?

어쩌면 나는 너무도 빠르게, 들뜬 채로, 흥분에 싸여 지낸 나머지 내 코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창조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 위해서 거창한 여행이 필요하지 않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서 반드시 위대한 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용히 기다리면서 하느님이 지진과 폭풍우 또는 번갯불 속에 계시지 않고, 산들바람 속에 계시면서 우리의 등을 어루만져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최고로 힘주어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최대한 단단하게 깍지낄 수는 있지만 하느님은 당신이 말씀하시고 싶을 때에만 말씀을 하신다. 이 점을 깨달을 때 누르고 밀고 당기는 우리의 행위는 지극히 우습게 된다. 우리는 때로 두 눈을 꼭 감고 세상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애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하느님께 얼마간의 공간을 마련해드리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더라도 주도권은 여전히 오시는 하느님께 있다. 우리에게는 희망의 토대가 되는 하느님이 사랑을 언약하신 약속이 있다. 따라서 우리 삶은 당연히 기대를 갖고 기다리는 삶이지만, 그 기다림은 인내와 미소가 담긴 기다림 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분이 오실 때 우리는 진실로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게 된다.

하느님은 당연히 추구해야 하지만 결코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발견하실 수 있을 따름이다. 그분은 인간 심성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진리는 인간이 수용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거기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머쥘’ 수 없는 우리 인간 수용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 있다. 우리는 하느님도, 역사 속에 그분의 현존도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특정한 어떤 사건이나 상황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을 희롱하고 진리를 왜곡시키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삶 속의 온갖 난해하고 설명불가한 일들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충실하게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어떠한 인간 개념 또는 예언에도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보다 월등하게 크시며 완전히 당신이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 당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면서’ 동시에 ‘의로우실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항상 고심한다. 이 두 가지가 최고의 수준으로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이 ‘하느님의 신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을 덜 의로우시게 만드는 일은 없다. 그분의 정의는 그분을 덜 자비롭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에 ‘정의’가 결여되지 않거나, 또는 ‘정의’에 ‘자비’가 결여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하면 고심을 해야만 한다.

내 마음이 팽창되면서 내가 혼란과 분열을 느낄 때, 보다 무한히 많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관심이 내 창조주요 구세주이며 성화자인신 그분께 쏠릴 때 나는 고통스러우면서 동시에 기쁨에 찬 모든 인생살이와 창조계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알게 된다. 그럴 때 나는 왜 내가 그토록 괴로워하고 근심에 짓눌렸으며, 왜 그토록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불안해했고, 왜 그토록 서두르고 초조했는지 의아하게 여겨진다. 이 모든 아픔들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그릇된 아픔’들 때문이다.

‘참된 아픔’은 지상의 고통 일체를 당신과의 성스러운 친교로 이끄시는 하느님 안에서 내가 발견하는 ‘그 아픔’이다. 하느님의 현존체험은 아픔을 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아픔은 사람이 결코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아주 심원한 아픔이다. 바로 이 아픔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진정으로 상대방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그의 중심부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도해주는 내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을 내 존재 깊숙이 끌어들여 내 영혼으로 그들의 고통과 갈등과 부르짖음을 느낄 때 나는 내 자신을 떠나 내가 곧 그들이 되고 그리하여 ‘연민’을 품게 된다. ‘연민’은 내 동료 인간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할 때 나의 영혼은 팽창하여 모두를 끌어안고 싶고 하느님의 현존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진다.

이러한 체험의 와중에서 나는 연민이 내 자신의 것이 아니고 나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는다. 나는 세상을 끌어안을 수는 없지만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 하느님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되셨을 때,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당신의 내밀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느님이 허락하셨을 때, 우리는 그분의 무한하신 연민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된다.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나’를 잃고 ‘상대방’이 되며, 그런 ‘나’를 찾아내는 것은 온 인류를 자비로이 포옹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뿐이다.

몇 년이 지나면 우리는 죽게 된다. 만약 이것이 우리 삶에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이해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그릇된 생각이다. 우리는 ‘죽으며’ 그리고 우리는 ‘죽지 않는다’. 이것이 올바른 이해인 것이다. 이것은 내 가장 깊숙한 자아 속에서 울려 퍼지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다. 이 소리는 떠나셨지만 여전히 남아 계시고, 주셨지만 여전히 살아 계시며, 이미 오셨지만 앞으로 오실 나자렛 사람의 말씀을 내게 인식시켜 준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두터워지면서 기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계속 확대되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 위력을 진실로 감지했으며 고통받는 친구들을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하느님의 현존 속으로 들이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체험으로 깨달았다. 지속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악전 고투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성공과 실패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사랑받고 있음을 체험함으로써, 나는 내 자신 및 하느님과 훨씬 깊이 있게 접촉할 수 있었다.

하느님은 인생이라는 바퀴의 ‘중심축’이시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보다 가까워질 수록 서로 간에도 가깝게 된다. 공동체의 토대는 일차적으로 서로에 대한 생각과 느낌과 감정들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공동 추구’ 그것이다. 우리가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보다 온전하게 함께 하게 된다. 이
곳 수도원에 머물면서 지극히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함께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갖고 있는 매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아버지신 하느님을 향한 공통된 끌림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성인들을 책 속에서 대했고, 그들이 진실로 나의 영적 가족의 일원으로서 항상 곁에 존재하며 내게 제안과 생각과 충고, 위로와 용기와 힘을 제공해 준다고 생각된다. 갈등을 겪을 때 도움을 주는 본보기들이 전혀 없으면, 사람은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고정시키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성인들이 없으면 우리는 감화능력이 부족한 사람들한테로 쉽게 기울고, 한동안 자극적으로 보이지만 지속적인 지주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길로 금방 빨려 들고 말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의 작은 모습이 빛을 통해 우리네 삶과 우리의 세계라는 벽에, 거대하고 희망 어린 그림자로 투영되고 있다. 우리는 이분들이 발산하시는 위용과 영광의 최초 윤곽을 이미 보고 있는 셈이다. 인간적인 사건들 가운데서 가장 인간적인 것을 목격하면서 내 존재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위용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세 분의 온유하신 모습에 감동을 느끼는 나에게, 내 세계에 발현한 엄청나게 거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금방 압도해 온다.

어둠 속에 비친 빛나는 광선이 없으면 보이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고, 이 세 분 곁을 그냥 지나치고 계속 어둠 속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었다. 아무쪼록 이 빛을 내 마음 속에 보존하여, 우리 세계라는 벽에 비치는 약속에 찬 그림자를 보고 또 가리킬 수 있는 힘이 내게 부여되기를 기원한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슨 이유로 그곳에 간 것일까? 그것은 이제는 내가 고독 생활 속에서 목격했던 하느님의 인자로우심에 대한 희미한 형상과 내 어둠 속에 비춰진 밝은 광선, 나의 침묵 속에서 말을 건네던 온유한 음성, 가장 고요한 시간에 나를 스치던 부드러운 실바람들을 되새기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추억은 과거의 풍성한 체험들을 일깨워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현재 사건들에 대한 참신한 안목을 부단히 제공해주고, 또 다가올 세월을 위한 결정들을 인도해 준다. 계속해서 충돌되는 내 생각들 속에서, 이 추억들은 항상 그 자리에 남아 거짓된 꿈들을 내몰아내고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줄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다볼산 광채 속에 묻혀 계시던 주님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잠에 취해 몽롱했지만 그 추억은 후에 시련을 겪을 때마다 희망의 샘이 되어 주었다.
내 인생에는 한 차례 다볼산밖에 없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체험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힘은 골짜기에서, 게쎄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인생의 긴 어두운 밤에서 나를 지켜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지금은 내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어느 날인가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끊임없이 되새기기에는 제네시 수도원에서 7개월이 실로 충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끝>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찾아 함께 나누어 봅시다!

상대방에서 끊임없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고, 의미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현대인에게 어떻게 이런 것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사랑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분주함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각자의 ‘제네시 수도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만의 제네시 수도원’은 어디 일까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