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루카6장20_26

하혈한 행복한 여인

190212 황창연신부 매일미사 강론 : 마음을 씻어라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2.16-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여덟 가지 행복 선언이 산 위에서 선포되는데,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에서는 네 가지 행복 선언과 네 가지 불행 선언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어 평지에서 하신 말씀으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받고 누명을 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시고,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칭찬받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을 추구합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려면 가난보다는 재물이, 슬픔보다는 기쁨이, 굶주림보다는 풍요로움이 당연히 필요해 보이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가난이나 슬픔, 굶주림 자체가 좋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가난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말씀도, 가난을 행복으로 알고 참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께만 도움을 바랄 수 있으며, 그래서 더 쉽게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열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재물을 믿고 재물에 의지하며, 부족한 것이 없기에 하느님께 쉽게 기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신 대로,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오늘의 묵상 II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0)

    미국의 방송가인 오프라 윈프리는 “당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한다면 영원히 만족스럽 게 가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쉽게 잊고 살아가 는 내용입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또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며, 가지 지 못한 것에 집중하고 살고 있다면 주어진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행 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는 욕심이 가지고 있는 것,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행복을 빼앗아 버립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 모욕당하고 중상당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관점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쏟고 있기에, 주 님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못하고 있기에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울고 주 님 때문에 모욕당하고 중상당하는 사람들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선물을 주셨고 그것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 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더욱 집중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할 때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복된 시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지훈신부-

 

오늘의 묵상 III       “행복하여라, 너희 바보들!

    누군가가 말합니다. “나는 가난해서 정말 행복해.” 그러면 다들 이렇게 반 응할 것입니다. “바보 아냐?” 그런데 가난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 누 군가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라면…,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결코 농담이 아니 라면…,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처럼 보지 않으시는 하느님’(1사무 16,7)께서는 세상의 논리와 인간의 판단을 여지없이 뒤집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 만왕의 왕이며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가장 미약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인 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평화를 주셨고’(요한 14,27),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당신의 친구로 부르셨습니다’(마태 9,13).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마태 5,39)던 그분은 급기야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35). 그러므로 이 모든 말씀을 세상의 기준에 따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렇습니다. “너희는 모두 바보가 되어라.”

    오늘 복음은 이런 가르침의 연속선 상에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쫓겨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말씀은, 행복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관념을 뒤집었을 때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현실의 그 무엇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과 일치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 입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행복에 대한 주님의 ‘바보 선언’을 묵상하면서, 우리 시대의 참된 바보,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합니다. 어제로써 세상을 떠나신 지 만 10년이 되셨는데,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질 만도 한데, 그런데 아직도 그분의 모습이 선명하고 그 따스한 미소가 몹시도 그리 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일생을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정면으로 맞섰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들과 더 가까이 있지 못함에 괴로워했던 분,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마저 내어주고 가신 그분께서는 자신을 일컬어 ‘바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누구도 그분을 바보 라 여기지 않지만,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바보라고 인식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의 ‘바보 선언’ 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되돌아보면 그분은 정녕 진정한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기준과 세상의 논 리 안에서 그분은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똑똑해지고 잘나 보이려 기를 쓰는 세태 속에서, 우리 시대의 위대하고 거룩한 영혼, 바보 추기경의 마지막 말씀을 상기합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신호철신부-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불행한 순간에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산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떤 뚜렷한 목표를 다시 설정해 갈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는 과연 고통속에서 옳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과거에 고통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사람은 양면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신앙적인 선한 마음도 있지만 약한 인간이기에 내것을 먼저 챙기고 봉사하거나 좋은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선한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5)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맞아 줄 수 있는 인프라가 있는지 그런 분위기를 늘 만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6) 세상과 신앙이 반대 되는것을 이야기 해봅시다(예 리더의 섬김, 원수를 사랑, 낯춘 마음,”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vs”눈에는 눈”).  반대가 되어도 행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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