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진짜 이유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내안에 있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샘물을 너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마리이에 가는 이유는 아무도 오지 않고 누구도 찾지 않는 너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이제껏 삶에 지쳐 밤새 울다 잠든 네가 내게로 오기 때문이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상처로 얼룩진 너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너의 절망에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사람축에 끼지 못한다고 원망하는 너를 하느님의 딸로 부르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너에게 기쁨에 차 말을 건네고 여기에 내가 왔다고 알리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나는 목마를 지라도 너에게는 목마름을 없애 주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진짜 이유는 십자가의 사랑이 너의 가슴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성경말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때에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다.
그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요한 4, 3-42)

예수와 만난 사람들(3)
(목마른 사람들 – 사마리아 여인)
이현주 생활성서사 2001년

삶이 이미 죽음과도 같았던 이들, 날마다 고통과 절망에 허덕이던 사람들! 예수를 만나고 송두리째 인생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절박하게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우리의 갈증을 대신해 준다. 여자로 그것도 사마리아 여자로 태어나 척박하게 삶은 연명하던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는 예수를 만난다. 사마리아 여인의 삶을 관통하는 예수와의 만남! 그 세번째 이야기를 들어본다.

세상이 나를 개로 여기면 나 또한 세상을 개로 여기면 그만이다. 처음엔 원망도 했고 멍에처럼 씌워진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보려고 발버둥도 쳐보았지만 그럴수록 더 큰 좌절과 환멸을 맛볼 따름이다. 나는 여자다!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여자다! 그것도 사마리아 여자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유다인, 그 가운데 더욱 오만한 바리사이 남자들이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를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 전능하신 하느님, 저를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더욱 감사드립니다. 아멘!”

여자는 이방인과 죄인들이 서 있는 끝줄에 초라하게 매달려 있는 존재다. 오만한 남자들의 꼬락서니란 참으로 구역질 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어미의 탯집에 누워 있던 시절을, 그 젖가슴에서 따스한 생명을 나누던 시절을, 그들은 그것들을 어디에다 처박아두고 이제는 저토록 목을 곧게 세우고 여자들을 발아래 밟고 서 있는 것일까? 모세의 계명에도 여자는 남자가 소유하는 재산 목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의 아버지이기도 한 남자는 만족할 만큼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다른 남자에게 나를 팔았다. 나는 그의 재산이 되었다. 나를 맨 처음 소유했던 남자는 마침내 나에게 싫증을 느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한테서 무슨 매력이 풍겨 나겠는가? 남자들은 싫증난 여자를 더 이상 먹여 살리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그런 나를 아무나 이 여자를 소유해도 좋다는 쪽지를 한 장을 붙여서 내보냈다. 나는 다시 다른 남자의 소유물이 되었다. 남자의 소유물이 되지 않고, 여자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곳이 세상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싫증난 남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는 여섯 번째 남자다. 앞으로 또 몇 남자를 새 주인으로 모셔야하는지 모르는 일이다. 아! 어찌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세상을 향하여, 아니 남자들을 향하여 표독스러운 증오를 내뿜고 복수에 기회를 노리며 살아가는, 이것이 어찌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눈먼 짐승처럼 꿈틀거리며 타고난 본능에 따라 살아간다고 하지만 나에게도 참된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나도 사람이었다. 이 타는 갈증을 적실 수 없어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으로 옮겨다녀 보았지만 오히려 더욱 나를 목마르게 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낮이었다. 여느때처럼 늦잠에서 깨어나 한껏 게으른 몸짓으로 물동이를 이고 조상인 야곱이 팠다는 동구밖 우물로 갔다. 그런데 우물가에 한 남자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가까이 이르러 보니 뜻밖에도 이 마을 사람이 아닌 유다인이었다. 나는 말없이 돌아서서 그를 피하려 하다가 발끝에 힘을 주며 그의 곁을 지나 우물에 다가갔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다인이었다. 그들은 우리네를 개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유다인이 사마리아인의 작은 마을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유다지방에서 갈릴래아 지방으로 갈 때에도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는 직선도로를 버리고 일부러 돌아서들 다녔다.

우리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니 우리도 그들을 그렇게 똑같이 여기고 있었다. 나는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넣고 끌어 올려 물동이에 부으려는 순간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나에게 물을 좀 주실 수 있소?.”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남자가 그것도 유다인 남자가 여자인 나에게 그토록 부드럽게 말하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남자들은 언제나 나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나의 귀에는 처음부터 남자들의 단조롭고 딱딱한 명령에만 익숙해져 있는데 그가 나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유다인 남자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어떻게 저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가 웃더니 “누구든지 목이 마른 사람은 물을 달라고 할 수 있지요.”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의 얼굴을 보니 당신이 나보다 더 목이 마르군요. 당신은 나에게 야곱의 우물물을 줄 수 있지만 나는 당신에게 끝없이 솟는 샘물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이 우물은 깊고 또 당신한테는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서 물을 길어 저에게 주시겠다는 건가요? 게다가 야곱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이 우물은 처음 마셨을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마르지 않은 우물입니다. 그런데 이 우물보다 더 좋은물이 당신한테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가 다시 “그렇소, 이 우물물은 아침에 마시면 저녁에 목이 마르지요. 마셔도 마셔도 자꾸만 목이 마를 것이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두 번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당신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샘물로 솟아날 터이니까.” 그는 진실한 말투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닥없는 늪처럼 나의 온몸을 삼켰다. 이미 나는 그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요, 그러나 먼저 할 일이 있소. 당신 남편을 이리로 데리고 오시오.” 나는 놀랐다.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 젊은 나이에 다섯 남자를 거쳐 지금은 여섯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데 그를 데리고 와야 할것인가?

“남편은 없습니다.” 내가 잘라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소. 당신은 다섯 남자를 거쳐 지금은 여섯번째 남자와 함께 살고 있지만, 그 남자도 당신의 남편은 아니요.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지요. 당신은 참으로 목이 마른 여자로군요.” 나는 소리도 요란하게 두레박을 깊은 우물 속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발앞에 무릎을 꿇었다. ”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이것이 내가 겨우 꺼낸 말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는 길로 마음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내말을 곧이 들으려 하지않았다. “내 과거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우물가에 있어요.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메시아 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여느때 처럼 그들은 나를 비웃었다. “네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나는 가만히 있지 않고 “글쎄 그분은 달라요. 우리마을 사람도 사마리아인도 아닌 유다인이었어요. 그가 물을 달라고 했어요. 아니 물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분은 틀림없이 메시아이십니다”.
그들은 서둘러 걸어가는 내 뒤를 엉거주춤 따라왔다. 우리가 우물가에 다다르자 거기에는 열 사람쯤 되는 일행이 모여 있었고 모두 유다인이었다. 나의 두번째 남편이었던 엘아자르가 흰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우리 마을의 어른격인 인물이었고 젊은 시절을 방랑과 모험으로 보내고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 쉬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아는것도 많았다. 엘아자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 마을 계집에게 물을 청한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이 마을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한 목마른 사람이올시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에게 묻겠소. 우리는 저 산에서 주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당신네 유다인들은 꼭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야 한다니, 어찌 된 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가 말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요. 예배하는 장소가 문제가 되는 그런 시절은 이제 지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람과도 같은 분이라 어디서든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알아주시고 사랑하시지요.”

“그렇다면 선생은 예루살렘 아닌데서도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엘아자르가 뒤를 돌아보며 엄숙하게 말하였다. “이분을 마을로 모실 차비를 하라! 이분은 정녕 예언자시다!” 그리고는 그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마을에 가셔서 좋은 말씀 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무례했던 건 모두 용서하시고요.”

그와 그의 일행은 이틀 동안 우리 마을에 머물렀다. 내가 알고 있는한 그들은 우리와 함께 먹고 잔 처음이자 마지막 유다인들이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은밀히 해준 말들을 잊을 수가 없다. “어여쁜 여자여! 하느님의 딸이여! 사람들이 그대를 개처럼 여긴다고 자신까지 그대를 개처럼 여겨서는 안된다오. 사람들이 그대를 물건처럼 취급하거든 그대는 그대를 천사처럼 받들구려”

“사람은 남이 만들어 주는대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대로 정해지는 법이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봐요! 그대에게 한 방울의 자비를 바라는 목마른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오. 이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그대 곁에서 목마르시기 때문이오. 사람이 짓는 죄 가운데서도 가장 고약한 것은 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버리는 것이면서 또한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또 그는 엘아자르를 비롯하여 나를 거쳐 지나갔던 모든 남자들에게 말했다. “여자와 아이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추방해서도 안됩니다. 그들을 안아줘야 합니다. 거지들을 구박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과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여자와 아이처럼 약한 존재요 죄인이며 거지이기 때문이오.

정신차리고 내말을 들으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바야흐로 이루어졌소! 당신들은 낡은 생활을 청산하고 새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오.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시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을 가르는 장벽, 유다인과 이방인을 가르고 의인과 죄인을 가르고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모든 낡은 시대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시오. 남이 무너뜨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당신들이 먼저 무너뜨리시오.”

“우리들은 이제 야곱과 에사우의 후손으로부터 한 사람 아담의 후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화해의 역사를 이룩해야 합니다. 원수들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들이 곧 우리의 형제임을 뜨겁게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유다인이요 나자렛 사람 예수며, 이 형제들은 모두 갈릴래아 출신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여기 이 여인은 하느님의 딸입니다. 우리가 손을 잡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소!” 그러면서 그는 나의 손을 잡았다. 숯불덩이처럼 뜨거운 손이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누이여, 목이 마르오. 물 한 그릇만 주시오!” 나자렛 사람 예수와 그 일행! 그들은 바람처럼 머물다가 바람처럼 떠나갔다. 그러나 나의 가슴에는 그가 남겨 준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내가 새 사람이 되니까 세계도 따라서 ‘새 세계’가 되었다. 나는 모든 남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멸시했지만, 그 멸시의 따가운 눈총을 내 가슴의 ‘샘물’로 꺼 버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가 뒤집어쓴 여러 죄목들 가운데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을 ‘사람’ 대접한 것도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목마르다!” 하고 소리 지르며 죽어 갔다는 것이었다. 남의 목마른 가슴에는 샘물을 파 주면서도 자신은 끝내 목말라야 했던 그 마음씨 좋은 ‘사람’, 그 사랑의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었다. (요한 4,1-42)

<끝>
묵상나누기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과 마을 사람들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은 무엇인가? 그 ‘샘물’을 찾기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왜 남에게는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퍼주며 정작 자신은 ‘목말라’하며 돌아가실 밖에 없었을까?

예수님 시대의 유다 사람들 처럼 20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성, 인종, 민족, 피부색, 출신지를 가지고 차별과 편가르기를 하는 오늘날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

‘사마리아 우물가’로 오셨던 예수님이 만약 오늘날 ‘세상의 우물가’로 오신다면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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