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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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6-9.13-17.34-3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6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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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질병에 대한 유다인들의 생각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병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고, 병의 정도가 심할수록 죄가 크다고 여겼습니다. 그럼 오늘 복음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은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이런 궁금증과 함께 복음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보게 해 주십니다. 요한 복음의 표현으로 하면 표징이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표현으로는 기적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해 주신 기적 이야기는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표징이 일어난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관심을 모읍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표징 곧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애써 부인합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가 정말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였는지 묻고 본인에게도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이 모든 일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과 함께 눈을 뜨게 된 사람과 바리사이들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이는 표징을 체험하고 자신을 낫게 하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 갑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일어난 모든 일에 완고하게 처신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에만 집착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눈먼 사람은 눈을 뜨고 예수님을 찾지만, 바리사이들은 눈먼 사람처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실상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눈이 먼 사람은 바리사이들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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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나누기
1.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나에게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한 체험이 있으신가요?
3. 오늘날 우리를 ‘앞 못보게 하는’ 하는 것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4. ‘치유’와 ‘구원’을 위해서는 와서(come) – 보고(see) – 따르는(Follow)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 어디쯤 와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5. 살아오면서 내가 지니고 있던 ‘단점’과 ‘장애’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 이였을 수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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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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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이 장면은 하느님께서 진흙을 빚어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창세 2장 참조).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이지요. 이어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자 그의 눈이 밝아집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된다는 자신들의 논리에 갇히고는 예수님을 죄인 취급해 버립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눈을 뜬 사람과 그의 부모까지 몰아붙이지요. 부모는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셨다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추방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얼버무려 버립니다.
하지만 눈을 뜬 사람은 바리사이들의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들에게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상세하게 증언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회당에서 쫓겨나지 않습니까?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다가가시고,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지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그는 모든 것을 보게 되었고, 영적인 눈마저 뜨게 된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은 진실을 은폐하려 하지만 진실은 결코 어둠 속에 묻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빛의 아들로 처신했지만, 점점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결국 하느님을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지요. 반면, 눈을 뜬 사람은 더욱 빛의 세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529
3월15일 [사순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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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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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JNwWnt1boE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조원동주교좌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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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분의 따뜻한 손길에 우리 인생이 활짝 꽃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치유과정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꽤 색다른 것이어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땅에 침을 뱉습니다. 진흙으로 갭니다. 그 지저분한 것을 눈 먼 사람의 눈에 바릅니다. 눈먼 사람이나 그 부모 입장에서 보면 꽤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냥 말씀 한마디로 간단히 고쳐주시지. 그도 아니라면 깨끗한 물이나 기름으로 눈을 닦아주면서 치유시켜 주면 좀 좋아? 그렇게 하면 모양새도 좋을 텐데, 왜 하필 침이냐구? 왜 더럽게 침을 흙에 개어서 눈에 바르느냐 말야?’
눈먼 사람 입장에서도 난감했을 것입니다. 침에 갠 진흙을 눈에 바르니, 얼마나 느낌이 답답했을까요? 눈도 따가웠을 것입니다. ‘도대체 뭘 하시려고 그러시나? 내 눈 갖고 장난치려고 그러시나?’
그렇게라도 하고 즉시 눈이 떠졌으면 아무 군소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난감하게 해놓고 그게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은 눈먼 사람의 속을 더 긁어놓았습니다.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그간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과정을 보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그분의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낫곤 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즉석에서 오그라든 손이 펴지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면 죽었던 사람이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저분하게 침으로 갠 흙을 바르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근처 아무 연못이나 찾아가서 씻으라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실로암 연못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럴경우 자존심이 상해서, ‘이게 도대체 뭐야?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뭐야?’라고 소리 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사람은 예수님의 치유과정에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능동적이고 협조적입니다. 그 결과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입습니다.
오늘 눈먼 사람이 겪은 축복의 기적, 그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침과 진흙으로 제조하신 기적의 고약 때문일까요?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위생적인 고약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침과 진흙으로 만든 고약을 바르는 행위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재창조’, ‘말씀의 강생’, ‘인간의 자연생활에 대한 은총의 주입’과도 같은 해석. 여기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그래도 보이지 않는 눈에 진흙을 바름으로서 그 눈을 더 확실하게 막아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다른 생각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예수님 자신만을 따르라는 초청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향한 전적인 믿음, 그분께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 그분 외 부차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차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오랜 세월 눈 못 뜬 상태로 어둠 속에, 죄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생명과 희망의 창을 하나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창으로 하느님 사랑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둠뿐이던 우리 인생이었으나 빛이신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생이 활짝 꽃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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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JNwWnt1b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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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소경일까?>
교우 여러분, 사순 제4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며 “누구 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과거의 잘못에서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하느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저 기적을 일으켜 안 보이던 눈을 뜨게 하는 신기한 마술이 하느님의 일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진짜 일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곧 새로운 ‘하느님’으로 재창조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고 하는 게 듣기 거북합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새로 재창조된 태생 소경은 ‘나는 곧 나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일반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 곧 ‘에고 에이미’(I AM)으로 자신을 고백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만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의 일이 무엇입니까? 자녀에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는 생존의 보조자가 전부가 아닙니다. 부모의 가장 큰 과업은 자녀에게 “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인간답게 사회에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라는 믿음을 주어 자녀를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들어갈 때 아이는 비로소 네발로 기던 짐승의 본성을 버리고, 두 발로 걷는 법을 배우며 인간의 언어로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는 존재로 재창조하는 것, 즉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하여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렇게 재창조된 이는 눈이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육신의 눈이 안 보이는 것을 큰 비극으로 여기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짜 실명은 영혼의 시력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런 자매님을 생각해 봅니다. 남편의 외도로 평생을 배신감 속에 살다 암에 걸린 아내가 있습니다. 세상은 그녀를 불쌍하다 하고 남편을 나쁘다고 말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녀 역시 깊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남편보다 구원받기 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인다고 말하는 바리사이들처럼.
왜 남편이 미워 죽겠을까요? 그것은 아내 안에도 남편이 탐닉하는 그 ‘음란의 욕구’가 여전히 행복을 줄 것이라는 오류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도 간음이라 하셨습니다. 내 안에 그 욕구가 살아있기에, 그것을 마음껏 행하는 상대방을 보며 화가 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주인이 되고 창조주가 되며 심판관이 되려는 ‘삼구(三求)’의 욕망이 곧 고통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진짜 눈먼 상태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으면 이 욕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죄를 짓는 사람 때문에 내가 화가 나거나 암에 걸리는 일이 없습니다.
제가 외도하는 남편을 둔 어떤 자매에게 매일 성체조배 한 시간을 시켰습니다. 성체조배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과 성체가 하나가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1년 동안 성체조배를 하고 나니 밉던 남편이 ‘불쌍해’ 보이더랍니다. 눈이 뜨인 것입니다. 재창조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기가 걷지 못하고 네발로 기어 다니는 게 화가 납니까? 불쌍해 보여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새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그 욕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욕구가 더는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급한 본성이 쫓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사제인데, 사제직을 하다 예쁜 여자를 만나 옷을 벗고 그 여인과 혼인하는 신부를 보면 어떤 마음일까요? 부러울까요? 화가 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쌍해 보일 뿐입니다. 결혼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사제로 사는 기쁨이 언제나 더 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제라는 정체성을 가지면 거기서 오는 행복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들은 불쌍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유다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율법으로 남을 심판하는 삼구의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자신들은 눈이 보인다고 자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보인다.’ 하고 말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하느님이 되려는 욕망을 품고 살면서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모른 채 인간의 욕구에 갇혀 있는 것, 그 교만이 그들을 영원한 어둠 속에 가둡니다.
교부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비로소 사랑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욕망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새 창조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듯, 진짜 태양 빛을 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을 빛으로 인도합니다. 만약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면, 이미 ‘보이는 사람’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의 직무에 대해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 또한 다른 사람을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사제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입니다. 이를 위해 그분이 당신의 손으로 빚은 진흙을 우리 눈에 바르시도록 허락합시다. 우리의 비참함과 나약함이라는 진흙이, 주님의 손길 안에서 진짜 눈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실로암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이 정체성의 걸음을 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림자에 연연하지 않고, 이 위대한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는 빛의 자녀, 진정한 실로암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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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랜드마크(Land Mark)’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는 에펠탑, 중국 북경은 만리장성, 미국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립니다. 저는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랜드마크를 말하라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나라에 랜드마크가 있듯이, 세계의 미술관에도 그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는 ‘모나리자’가 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는 ‘돌아온 탕자’가 있으며, 뉴욕현대미술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작품을 통해 사순 제4주일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고흐 역시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신학교 입학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특별전도사’의 자격으로 혹독한 탄광촌으로 자원했습니다. 고흐는 깨끗한 사택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고, 자신은 탄을 캐다 다친 광부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지냈습니다. 월급은 모아 가난한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었고, 광부들과 함께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가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탄광촌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나 얼마 뒤, 그를 파견했던 교회는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고흐를 파면하였습니다. 전도사의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이 더럽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먹고 지낸다는 이유로 ‘전도사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흐는 탄광촌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화려한 교회 건물 안에만 계신 분이라면, 나는 그런 예수님은 믿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림으로 전하기로 결심합니다.
고흐의 그림 속에는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에 나오는 농부들은 초라하지만, 정직한 노동으로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식탁은 제대와는 달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장 깨끗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진실한 자리에 계십니다. 「성경책과 에밀 졸라」에서 펼쳐진 성경의 말씀은 이사야 예언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그는 멸시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고통을 아는 사람이었다.” 고흐는 말씀을 덮지 않았고,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과 고통의 현실을 나란히 두며, 말씀이 인간의 상처 속으로 내려와야 함을 고백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농부보다 태양이 더 크게 그려집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하늘에는 별이 소용돌이치듯 빛나지만,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교회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다. 고흐는 일부러 교회를 어둠 속에 남겨 둡니다. 하느님의 빛이 교회 건물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스럽고 불안한 밤하늘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고백입니다. 고흐의 삶을 노래한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노래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당신이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혼탁했다.” 고흐가 너무 약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의 빛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의 말씀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다윗은 형들 가운데서 가장 작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는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본다고 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사순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 이 말씀은 저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교회의 질서와 품위를 지키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바라보시는 마음과 고통을 충분히 보고 있는가! 사람들의 시선에 맞는 사제가 되려 하느라,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용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고흐를 파면했던 교회의 시선이 혹시 오늘의 내 안에도 남아 있지는 않은지, 장미 주일의 기쁨 속에서 조용히 저 자신을 성찰해 봅니다. 교회에 불이 꺼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미 밤하늘에 별을 켜 두셨습니다. 오늘 장미 주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둠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 세상의 눈이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어둠 속에서도 이미 빛을 켜 두신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우리들 또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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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안동교구 김재형 베드로 신부님]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를 낫게 하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에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웃 사람들, 바리사이들, 유다인들, 심지어 눈먼 이의 부모까지 예수님의 능력과 그 기적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눈먼 이가 볼 수 있게 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는데, 정작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왜 진실 앞에서 그들의 시야가 가려졌을까요? 그 까닭은 그들이 신앙인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눈에는 사랑과 연민이 깃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치유의 기적 앞에서 사랑의 눈길 대신 냉소적인 눈길을 보냈고, 누구 하나 기쁨으로 축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앞을 보게 된 이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처음으로 바라보게 된 세상은 축복이 아니라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흘러야 할 눈에서 슬픔의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다가오십니다. 보지 못하는 순간에 보게 해 주시고,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해 주시는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또한 대부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눈을 뜬 이가 될 수도 있고, 신앙인의 눈으로 보지 못한 채 편견과 왜곡의 눈길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합시다. 사랑과 연민이 깃든 신앙인의 눈으로 주님을, 가족을, 이웃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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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9,1-41: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1. 빛과 어둠의 대립
오늘의 전례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빛과 어둠의 대립을 주제로 삼는다. 요한 복음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라고 선언하며,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빛의 도래’로 묘사한다. 이 빛은 단순한 지식의 빛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진리의 빛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된 빛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인간 자신을 이해하며,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2466항)
2. 복음의 핵심: 태생 소경의 치유와 신앙의 여정
요한 복음 9장은 태생 소경의 치유 사건을 통해 단순히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이 아니라, 믿음의 눈이 열리는 여정, 즉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구원 과정을 상징한다.
1) 보지 못함과 신앙의 시작
소경은 처음부터 ‘빛’을 본 적이 없다. 이는 인간이 원죄로 인해 영적 시력을 잃은 상태를 상징한다. 그가 주님께 온 것은, 곧 믿음을 향한 첫걸음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 눈먼 사람은 인간 본성 전체를 상징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손길로만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Tractatus in Ioannem 44,1)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으로 보내신 행위는 새 창조의 행위이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처럼(창세 2,7), 예수께서는 새 인간, 곧 믿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을 만드신다. 교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시작된다. 세례로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1214항)라고 한다.
2) 실로암의 물: 세례의 상징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7절)라고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으로, 성부께서 파견하신 메시아, 곧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실로암의 물은 단순한 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을 상징하는 세례의 물이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는 말한다. “그대는 실로암에 내려가 눈을 씻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내려가는 것이다. 실로암의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생명을 주는 물이다.”(Catecheses Mystagogicae II,1) 세례를 통하여 인간은 눈을 뜨고 빛의 자녀가 된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3) 신앙의 성장: “예수”에서 “주님”으로
치유받은 사람의 신앙은 점진적으로 성숙해 간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11절) ― “예수님이라는 분이” ― 인간적 인식 →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17절) ― “예언자이십니다.” ― 예언자적 인식 → “그분이 어디서 왔는지 아느냐?”(33절) ―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입니다.” ― 신앙적 확신 → 예수님을 만난 후(38절) ― “주님, 저는 믿습니다.” ― 구원의 고백이 나온다. 이 최종 고백 “주님, 저는 믿습니다.”(38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선언이다. 그는 단순히 시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먼저 육의 눈을 열고, 그다음 영의 눈을 떴다. 진흙으로 바른 눈은 잠시 어두웠지만, 신앙의 눈은 영원히 빛났다.”(Tractatus in Ioannem 34,9)
4) 어둠 속의 자들: 영적 맹인의 심판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빛을 거부한 자들, 곧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의 표상이다. 그들은 “우리는 잘 본다.”(41절)라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39절) 이 심판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의 자기 드러남이다. 빛을 거부하는 자는 이미 자신을 어둠 속에 두는 것이다. 교리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인간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분은 빛으로 오셨지만, 빛을 거부하는 자는 스스로 심판을 받는다.”(678항)
3. 신앙은 ‘본다.’는 행위
그리스도교 신앙은 ‘믿는다.’는 것과 동시에 ‘본다.’는 행위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빛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믿음은 어떤 어둠 속의 시각이다. 그것은 아직 완전한 빛이 아니지만, 영원한 빛을 향한 시선이다.”(Summa Theologiae II-II, q.1, a.4 ad 3) 세례를 받은 신자는 단순히 눈을 뜬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존재로 세상의 빛(마태 5,14)으로 부름을 받아, 세상의 어둠에서 진리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4. 결론: 빛의 자녀로 살기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의 영적 자화상이다. 우리는 모두 태생 소경처럼 빛을 잃은 존재로 태어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눈을 떠 하느님을 보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교한다.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분을 드러내는 것이다.”(Homiliae in Ioannem 56,2) 사순절은 우리 각자가 빛과 어둠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때이다.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어둠 속에 머무를 것인가? 우리의 응답이 구원과 심판을 가른다. 그분 안에서 눈을 뜬 이만이 참된 생명과 자유를 누릴 것이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시리라.”(에페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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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볼 수 있는 눈>
요한 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볼 수 있는 눈>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요한 9,3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마음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믿음
희망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희망
사랑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랑
살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살림
사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람
하느님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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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1-5)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1)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머리글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9-10) ‘눈먼 사람’의 눈을 고쳐 주신 일에 초점을 맞추면,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증언이고,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4-6)
예수님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마태 4,16)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고,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2)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서, ‘저 사람입니까?’는, 장애인에 대한 나쁜 편견을 드러낸 말입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쁜 편견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나쁜 편견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는 말씀은, 눈먼 상태로 태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런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섭리가) 작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려고 그 사람을 눈먼 채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낮 동안’이라는 말과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을 뜻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은, “나는 지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으로서 일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원히 빛이신 분입니다(묵시 21,23)>
3) 30절-33절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고백이고 증언인데,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4)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에서 ‘우리는 잘 본다.’라는 말은, “우리는 죄가 없다. 우리는 의인이다. 우리는 구원받는다.”라고 자만심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믿고 회개해서 완전히 깨끗해진 사람들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2,14) <회개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비를(구원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일 뿐입니다.(야고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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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맑은 눈을 지니길 희망>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바람을 들어 주신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었다. 스스로 눈이 잘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눈이 가려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육신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이다. 그가 참으로 볼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멀어야 한다.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다르소사람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췄다. 사울은 땅에 엎어졌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하셨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마침내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다. 스스로 세상을 바로 본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었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뵙기 위해 먼저 눈이 멀어야 했다.(사도 9장)
결국 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법이다. 선입견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확신하고 고집함으로써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하면, 눈은 있으나 ‘정확한 안목과 식견으로 분별’해 내지 못하였다. ‘아는 것이 병’이었다. 우리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흔히 눈을 3가지로 구별한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이다. 우리는 어느 눈을 의식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눈이다. 하느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어 악인도 선인도 살피신다.”(잠언 15,3).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시편 34,16).고 말한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루카 11,34)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눈에 들기보다는 사람의 눈에 들기에 힘을 쏟고 있다. 그래서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 것에 줄을 선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은 크신 사랑으로, 자비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고 마침내 주님을 만나야 한다. 세상의 헛된 암흑을 멀리하고 깨끗한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호소한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보내시어 눈을 뜨게 하셨다.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지만 진흙을 발라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사랑의 표현을 드러내셨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머리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행하는 가운데 빛이신 주님을 뵐 수 있길 바란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우리의 눈을 육안, 심안,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혜안이란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기를 기원하였다(에페1,18).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음에도 세상 것의 욕심으로 영의 눈을 자꾸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주님을 온전히 깨달아 눈이 뜨이고, 날마다 맑은 눈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는 지혜를 청하길 희망한다.
“주님, 은총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비추어주시어 언제나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을 생각하며,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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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혜연 사도 요한 신부님]
<깔딱요기>
장미 주일입니다. 사제가 걸치는 분홍 제의색에서 드러나듯 사순 시기 재계 속에서 잠시 희망을 품는 주일입니다. 아침과 저녁 사이 시장할 때 ‘깔딱요기’라고해서 아주 조금이나마 허기를 면하고자 먹는 것이 점심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이 바로 그 깔딱요기, 혹은 새참이 됩니다.
함께 먹다 보면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지 저만치에서 눈칫밥을 먹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된 불쌍한 이도 그중 하나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타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아직 눈뜨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들을 나무라십니다. 비록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라고 하셨지만 이는 결코 비난과 처벌이 아닙니다.
이미 앞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라고 하신 말씀이 본심입니다. 식탁에 앉은 이들에게 “천천히 먹어라, 고루 먹어라, 늦게 온 너는 손 씻고 와라.”하고 챙기는 분이십니다. 심판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에게 베풀어진 치유의 기적도 그리고 이를 알게 된 이들도 모두 식탁으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육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눈과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눈 모두를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모두가 바른 눈으로 바른길을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마음입니다.
복음의 눈먼 이는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청하지 못했습니다. 몰랐기 때문입니다.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이가 우물을 판다고 했지만, 모르는데 어떻게 팔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 고통을 아시고 흙을 파내어 눈에 덮어 주십니다. 마치 창세기의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우리를 만드셨듯이 우리를, 그 눈먼 이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미리 준비하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장미 주일에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깔딱요기’인 것입니다.
은혜로운 사순 시기 동안에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언제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한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먼저 오시는 주님을 알고 그분께 기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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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우직한 안젤로 신부님]
<누가 진짜 눈먼 사람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고통과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은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십니다. 그 사람은 씻고 돌아와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이 기적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치료 행위도 일로 규정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기적보다 율법 위반을 문제 삼습니다. 눈먼 사람이 보게 된 사실 보다 규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반면 눈을 뜬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은 예언자 이십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새롭게 눈을 뜬 사람이 주님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짜 눈먼 사람일까요?
이 복음은 단순히 눈을 고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사람의 마음과 믿음의 눈이 열리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눈먼 사람은 보게 되었고, 스스로 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규정에 얽매인 바리사이들처럼 영적으로 눈먼 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때로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눈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나는 저 사람에 대해서 다 알아’라고 규정해 놓고 내가 처음 봤던 그 모습으로 단정지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고 있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 세상과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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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상혁 노르베르토 신부님]
<거짓말… 잘하시나요?>
매스컴을 통해 작년부터 1년 넘게 참으로 많은 사람의 거짓말을 듣고,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내 왔습니다. 누가 보아도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예” 할 것은 “아니오” 하고, “아니오” 라고 대답해야 할 때는 “예”라고 대답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며, ‘과연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소위 엘리트 그룹이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양심이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일상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그럴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궁금해집니다. 왜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그래서 AI에게 물어봅니다. “인간은 왜 거짓을 말하는 거야?” AI가 이렇게 대답하네요.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나쁜 의도’ 때문만은 아닙니다. 심리학과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거짓말은 다양한 상황과 목적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행동입니다. 주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보호, 사회적 적응, 이익 추구, 타인 배려, 자기 이미지 포장>
자세히 읽어보니 인공지능 따위가 인간의 복잡한 심리에 대해 이렇게 잘 요약해 준다는 게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주요 이유가 대부분 그리 좋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것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두어 가지 정도는 긍정적이라 위안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서 눈먼 이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일화를 통해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되고, 있는 그대로 보탬도 숨김도 없이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려 4쪽이나 되는 분량 안에서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지만, 핵심은 간단합니다. 바리사이들이 교묘한 말재주로 현혹하여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사실 그대로를 말함으로써 진실의 힘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고백합니다. 저는 제 인간적 실수나 잘못을 숨기고 비난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내면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싶지만, 진실이 아닌 것은 분명하기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라고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사순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때에 주님께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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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눈이 침침하고 사물이 흐르게 보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는 분의 권유로 눈 검사를 받았고, 검사 결과 백내장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이내 백내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잘 보이지 않아 안경을 쓰고 살아왔기에 눈의 소중함을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소경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고, 그런 상태로 태어났기에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었으며 단지 그러려니 하면서 자신의 보지 못함을 받아들이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도 없었고 주님께 다가가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먼저 눈먼 이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9,2)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당대의 모든 사람에게는 헤어나지 못한 그릇된 고정 관념, 곧 죄의 인과응보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지금 겪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은 바로 본인 혹은 가족들의 죄의 결과인 벌이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태중 소경과 그의 부모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중 소경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영적인 측면에서 ‘눈뜬장님’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삼아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9,3)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을 통해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시어” (루4,18) 여기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함께 계시며 일하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먼 이의 치유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9,6)라고 명하심으로 완결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일반적인 치유 방법이었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행동하신 것이지만, 이 모든 일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하심이고 행하심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신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당신 또한 눈먼 이를 치유하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분’으로 소개하는데 파견되신 분이 눈먼 이에게 ‘실로암’(=‘파견된 이’라는 뜻)에 가서 물로 씻음으로 앞을 보게 되었다는 의미는 바로 당신이 이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9,5)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로써 지금껏 눈이 멀어 마치 잠자는 상태에 있었던 그를 깨어나게 하고 죽음과 같은 어둠에서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에5,14참조)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태중 소경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에5,8)라고 역설하시면서 스스로 보고 왔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제대로 보고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빛인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환기시키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5,8)라고 분발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태중 소경의 눈뜬 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 진흙을 만지는 행위는 안식일 법을 어긴 행위였었기에 바리사이들에겐 충격이었고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9,16참조)라는 의문을 가진 채 진상을 조사한답시고 눈뜬 이와 그의 부모를 불러 추궁하고 예수님에 관한 생각을 바꾸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눈뜬 이는 예수님을 “예언자이며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9,17.33)하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이처럼 때론 자기 안에 갇혀 살아왔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늘 자기식대로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죄하고 심판하듯이 그 눈뜬 이를 질책하고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정작 치유가 필요한 부류는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이었던 것입니다.
눈 뜬 이는 비록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했지만,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자, 그에게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9,35)라고 묻자, 그는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9,36)라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9,37)고 말씀하시자, 이내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9,38)하고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로써 그가 단지 육안肉眼만을 뜨게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 영안靈眼까지 뜨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도 단지 육적인 눈뜸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주님으로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의 눈뜸을 통해서 ‘빛의 자녀로 온전히 새롭게 거듭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중 소경의 치유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9,39)라는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이란 바로 치유 받은 태중 소경이며,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부류는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9,40)라고 항변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라고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9,40~41)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미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육적으로 볼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릇되게, 왜곡되게 봄으로써 늘 빛이 아닌 어둠 가운데 있기에 여기 우리 가운데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당신과 당신이 하신 일을 알아볼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눈 뜬 이를 보게 하는 것과 모든 치유는 단지 치유만이 아니라 치유를 통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질병-악-죄로 고통받고 있는 당신 자녀들에 대한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여기 함께 계심을 그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심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의 신비를 통하여, 어둠 속에서 살던 인류에게 신앙의 빛을 주시고, 옛 죄의 종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재생의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나이다. 아멘』 (감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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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찬미예수님
유학시절 가장 부담스러운 과목은 열 명 남짓의 학생들만 듣는 세미나 과목들이었습니다. 소수의 인원이 함께 발표와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꽤나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각 나라의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억양과 발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스페인어권 학생들은 시옷 발음을 너무 흘리고 미국인들의 경우 발음을 엄청 굴리다 말문이 막히면 영어를 쏟아냅니다. 베트남 혹은 중국인 학생들은 이태리어를 발음하는데도 성조가 강해 알아듣기 어려웠고 이태리 학생들은 그냥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물론 저의 발음 역시 그들이 듣기엔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듭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상을 쓰며 서로의 발음을 알아들으려 애썼던 순간들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세미나 중에는 특별히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관련된 세미나가 기억납니다. 담당 교수님은 캐나다 출신의 할아버지 신부님이었고 그리고 깐깐하고 매섭기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베네딕토 16세와 관련된 논문을 쓰고 있었으므로 이 수업을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야 했습니다. 세미나의 과제는 교수님이 정한 교황님의 저서들 중에 각자 한 권씩을 골라 발표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기지를 발휘했는데, 교수님이 정해주신 책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는 <나자렛 예수>라는 책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태리어를 이제 어느 정도 한다고 해도 외국말로 읽는 것보다 한국말로 번역된 책으로 빨리 맥을 잡고 발표 준비에 매진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고르자 교수님이 저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얇은 책도 많은데 그 어려운 책을 정말 할 수 있겠어?”라고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번역이 되어 있으므로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오히려 체계적일 것이라 말씀드렸고 교수님도 이를 받아들이셨지만 그래도 의심어린 눈빛은 여전했습니다. 솔직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발표 날이 다가왔고 저는 제가 준비한 대로 착실히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토론을 시작하는데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한국말로 이 책을 정리해서 발표했다면 너처럼 할 수 없었을 거야. 네가 이 책을 골랐을 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어. 진심으로 나의 잘못을 사과해.”
이 말씀을 들으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넘어갈 법도 한데 학생에게 자신의 불찰을 사과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겸손하고 멋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교수님은 학교에서 만날 때마다 저를 잘 챙겨주셨고 다른 교수님들께 제 이름을 알리시며 언제나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박사학위 수여식 때도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나오셔서 끝까지 함께해 주시고 축하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불찰을 인정하고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이것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설사 인정할만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체면을 구기기 싫고 무엇보다 자신에 비해 지위가 낮은 사람은 우스워 보이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 교수님은 진정한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그 모습은 좋은 교육이 되어 아직도 저의 기억안에 영롱하게 남아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 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이 소경의 과거를 상상해 봅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상실감, 죄를 지었으므로 눈이 멀게 되었다고 여기는 당시의 문화에서 생겨나는 열등감, 촉각과 청각, 미각 모두가 선명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이유로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몸. 당연히 눈만 뜰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평생에 걸쳐 해왔을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어두운 밤이었던 나날들, 그런데 예수님이 다가와 사랑이 가득한 손을 그의 눈가에 얹으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마침내 그에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새벽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를 전혀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초라해 보이는 작은 고을 출신의 청년 예수에게 권위와 힘이 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자신들의 권위가 다소 약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음을 트집잡으며 오히려 예수님을 죄인이라 부르고 눈 뜬 소경을 내쫒아 버립니다. 그야말로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눈을 뜬 소경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기적을 증언합니다. 그는 은총을 직접 받았고 그것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지위가 높은 바리사이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증언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교만과 의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눈먼 자로 남아있을 것이며 겸손과 사랑이 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뜬 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얼마나 명확한 시력으로 예수님을 느끼고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여러 가지 유혹들과 나약함 속에서 시야가 흐려지기도 하고 아예 눈이 감겨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눈을 치켜뜨며 오늘 소경의 고백처럼 예전에 예수님을 느꼈을 때의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사순 제 4주일입니다. 이는 전례상 ‘기쁜 주일’이므로 사제는 무거운 사순의 분위기와 사뭇 달리 분홍색 제의를 입습니다. 그동안의 힘겨운 회개와 고행을 잠시나마 쉬면서, 부활의 내일을 바라보는 환희의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눈에 손을 얹어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그에 기뻐하는 마음으로 보다 편안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해주신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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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있고, 보아도 보여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고집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눈이 빛나는 다윗이 선별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제2독서는 ‘빛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리라.”(에페 5,8-14)
그리고 복음은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태생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탓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요한 9,3)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소경인 그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해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눈을 뜨게 되는가? 어떻게 그에게 빛이 생기게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침을 묻힌 진흙을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한 9,7)하고 하셨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도 못했지만,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던 것입니다. 그의 살이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도유된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 그의 가슴 속에 당신의 빛을 부어주시어, 그가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주님을 계시하는 장소로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떠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학자’라 불리는 보나벤뚜라는 인간에게는 3중의 눈이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과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의 눈으로써 영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관조의 눈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인간 밖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지성의 눈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관조의 눈으로써 인간 위의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분명 우리는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완고하여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어둠을 보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어둠이 보인다면, 얼른 그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과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깊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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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