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오늘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하신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듣습니다. 모세 법을 가르치는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일’이 기도와 단식과 자선, 십계명 준수, 성전 예식과 깨끗한 정화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나와 있는 규정을 그대로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바꾸어 “하느님의 일”, 곧 하느님 마음에 드는 유일한 길이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일이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은총이고 선물이며, 동시에 주님의 계획과 거저 내어 주시는 사랑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그에 따른 임무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이에게는 먹을 것을 주면 되고, 목마른 이에게는 마실 것을 주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군중처럼 빵을 먹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빵을 많게 하신 분을 보고 열광만 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또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물질적인 빵만을 원하는 군중에게 탁월한 계명을 전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걱정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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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집트에서 눈물에 젖은 빵을 얻어먹던 시절이 이스라엘에게 과연 행복했을까요?
갈대 바다를 무사히 건너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렇게 기뻐 환호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던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안 가서 그 감격을 잊어버리고 이집트의 빵을 그리워합니다. 이집트 땅에서 고통에 울부짖으면서 종살이하던 시절(탈출 3,7 참조)에 이스라엘이 바라던 것은 빵이 아니라 진정한 해방이었지만, 지금 당장 황량한 광야에 맞닥뜨리게 되자 갈팡질팡하면서 마치 노예 생활은 상관없고 빵이 인생의 전부인 양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빵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에게도 빵이 인생의 전부였던 모양입니다. 이스라엘처럼 그들도 빵의 기적이라는 표징이 드러내는 본디의 의미, 곧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만을 채워 주시는 빵이 아니라 생명이요 진리라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논리로 표현한다면, 경제를 발전시키고 소득을 늘려 준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쫓아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 사랑의 부족 때문에 이스라엘은 죽음의 땅 이집트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자기들을 구출해 주신 주님, 갈대 바다를 무사히 건너게 하신 다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광야를 통과할 수 있도록 그 여정에 늘 함께해 주신 하느님의 손길을 망각하고 하찮은 먹거리 걱정을 하였습니다.
영원을 향하여 지상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썩어 없어질 빵은 인간의 일차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겠지만, 세상에 생명을 주거나 인간을 온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로지 빵을 얻으려는 욕구 때문에 자유, 생명, 진리 같은 더 큰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출저: 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