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20장19_23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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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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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계속해서 일깨우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하여 닫힌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용서’의 삶으로 우리 신앙인을 초대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서로의 다름에 적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사도들 위로 내려오실 때, 사도들의 말씀을 저마다 자기 고장 말로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사도 2장 참조). 하나이되 서로의 다름이 존중받는 곳을 성령께서는 즐겨 함께하십니다. 단절과 반목의 자리, 굳이 다름을 같음으로 여겨야만 하는 곳에서 성령께서는 탄식하시며 아파하십니다. 성령을 받아 누리는 이들은 서로의 다름은 다름으로 놓아둔 채, 서로의 고유성을 감상하고 그 고유성을 찬미하는 데 열심입니다. 세상에 사는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존중받고 찬미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일이 성령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성령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늘 새로운 다름을 향한 설레는 탐험의 여정입니다. 세상의 다양한 삶을 느끼고 체험하며 다채로운 세상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는 일입니다.
오월의 마지막 날, 누군가에게는 잔인할 만큼 아름다운 날,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온 세상을 껴안는 벅찬 감동의 시간을 기념하고 축하해야 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 삶에 함께해 주셔서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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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순절이 되었을 때, 거센 바람처럼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불꽃처럼 우리를 타오르게 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제자들에게 보내 주신 성령께서는,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세우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제도와 율법에 기초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두려움에 갇혀 있던 제자들을 세상으로 뛰쳐나가게 하시고, 교회에 필요한 은총을 베푸시어 교회가 세상 안에서 활짝 꽃피게 하십니다. 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언어의 은사를 주시고, 어떤 박해나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증인이 되어 그들이 보고 전해 들은 것을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으로부터 생명력을 받아 오늘도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성령의 생명력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평화입니다. 싸우지 않고 전쟁을 치르지 않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과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세상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모든 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화해와 일치의 평화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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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어떻게 하면 주님의 영이 당신 안에서 그리고 당신을 통해 더욱 일하실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사랑은 모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묵상에서도 “성령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늘 새로운 다름을 향한 설레는 탐험의 여정”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탐험을 하였는지 성공한 탐험과 성공하지 못한 나만의 탐험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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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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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불꽃 모양의 혀들이 사도들에게 내려앉자,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다른 언어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몰려든 이들이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까? 성령께서는 이처럼 첫 번째 선물로 다른 언어를 알아듣게 하는 은총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같은 말을 하는데도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지혜와 지식의 말씀, 믿음, 병을 고치는 은사와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예언,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그리고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 등이지요(1코린 12,8-11 참조).
이어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다른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공동선’을 위함이라고 제2독서를 통해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공동 이익을 위해 어떤 일에 헌신해야 합니까? 서로가 하는 말을 알아듣게 해 주신 것이 성령께서 주신 첫 번째 선물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있는지, 상대방에게 내 의사를 올바로 표현하는지, 이 점을 돌아다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늘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 수 있도록, 나의 몸이 진정한 성령의 궁전이 되도록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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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대자연은 더욱 신비스럽습니다. 봄이 되면 겨우내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나무 끝에 새 잎과 꽃봉오리가 싹터 나오지만, 죽은 가지에는 새로운 생명이 싹틀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생물에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의 생명력이 되고 영혼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 계셔야 하는데 천주 성령께서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이천여 년 전 오늘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수도원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와 아홉 가지 열매 뽑기를 합니다. 수십 년째 해마다 뽑기를 하고 있는데, 제가 꼭 뽑고 싶은 열매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아서 그때마다 조금은 섭섭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제가 이미 그 열매를 지니고 있어서 더 내려 주시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령의 열매가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풍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설령 성령께서 그 열매를 저에게 주시지 않으시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주신다면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은 서로 다른 언어들을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서로 다름을 통해서 모두가 소통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벨탑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꺾으려 하셨을 때에도 그 방법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치의 성령이 함께하시는가 아닌가 여부에 따라 이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놓기도 하고 또 갈라놓기도 합니다.
같은 성령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들을 모두가 공동선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면, 또한 나에게 더 주신 선물을 그 선물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다면 그 ‘다름’은 마치 이가 꼭 맞는 톱니바퀴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줄 것입니다. 오늘도 또 뽑기를 하겠지요. 제가 갖고 싶은 그 열매를, 다른 사람들이라도 많이 받기를 바라면서 뽑기에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출처: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