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1장 1-45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마르타 마리아 나자로)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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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3-7.17.20-27.33ㄴ-45

그때에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3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33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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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예수님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입니다. 라자로가 병으로 고생할 때에 그 소식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더불어 라자로 남매는 특별한 인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이는 요한 복음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표징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의 의미를 미리 알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을 찾으셨을 때, 마르타는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라자로의 죽음을 확증하여 그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복음은 이 표징을 통하여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표징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음먹는 계기도 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신앙인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주는 것이며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분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 라자로의 소생입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를 향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처럼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요청하면서 질문에 답하도록 초대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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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나누기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오늘 복음은 부활을 생각하게 합니다”에서 나는 육신의 부활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살면서 어떤 경험으로 나자로와 같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꼈었던 경험이 있었는지 그걸 주님이 어떻게 그 어려움에서 나오게 해주셨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내가 어려움을 만날 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음으로 인하여 행복함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나는 어려움이 있을때 주님에게 의탁하며 지내는지 나의 힘으로 일을 풀어나아가려고 하는지 이야기 해보고 주님의 반응이 없을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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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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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시기 전에 마르타에게 물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과 가족들의 슬픔을 마주하면서 마음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며 인류의 고통과 아픔을 나누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심정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치워라.”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은총을 받기 전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돌처럼 굳어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불신을 치우고 자녀다운 신뢰를 마음에 심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의 기도와 선행은 우리 마음의 돌을 치우는 노력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차디찬 마음을 따듯하게 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시는 예수님의 외침은 인류를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르타처럼 믿음을 고백하면, 죽음의 어둠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죽음의 수렁 속에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536
3월22일 [사순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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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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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bvX8o9A4CE
[꼰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 구본용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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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라자로는 소생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 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 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 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베타니아에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라자로가 중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특별합니다. 절친이 위중하다는데,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시지 않고 늑장을 부리십니다.

머무시던 곳에 이틀간이나 더 계신 다음에야 라자로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이윽고 예수님 일행이 라자로의 집에 도착해보니, 라자로는 이미 운명했고,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고인을 매장한 후에도 일주일간 장례식이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조문객들이 오빠를 여읜 마리아와 마르타를 위로하러 와있었습니다. 성격 급한 마르타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큰 유감을 표현합니다. 그녀의 말에는 꽤 날이 서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런 간청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외치십니다. “돌을 치워라!” 죽은 라자로에게도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잠시 후에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했습니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데, 그 광경이 너무나 으스스했습니다. 다들 혼비백산해서 뒷걸음질 쳤습니다.

소생한 라자로는 염습한 그대로, 수의를 뒤집어쓴 채, 뒤뚱뒤뚱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라자로의 소생 사화는 죽음조차 지배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그분은 죽었던 사람도 일으키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썩어가는 시신을 일으켜 세우시는 재창조의 주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라자로의 무덤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에로 시선을 돌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라자로의 무덤과는 비교가 아예 안 되는 영광과 승리의 장소입니다. 라자로는 소생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우리 인간에게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총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낡은 세상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린 봄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불신과 의혹의 무덤에 누워있던 우리도 이제 그만 훌훌 털고 무덤 밖 환한 세상으로 걸어 나와야겠습니다.

오랜 방황과 깊은 상처와 수치스러운 죄의 무덤에서 일어나 화사한 봄날, 부활의 삶으로 건너와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과 함께 하는 제 인생은 언제나 따스한 봄날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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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BFXhHpo8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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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이라는 감옥에서 나와, 지금 당장 돌을 치워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인 ‘라자로의 부활’ 사건을 마주합니다. 라자로가 죽고 나흘이 지났을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똑같은 말을 내뱉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32)

이 문장은 ‘후회’라는 창살로 만든 감옥에 자신을 가두는 것입니다. 곧, “만일 ~했더라면(If only…)”이라는 가정법입니다. 사탄은 우리 영혼을 갉아먹을 때 사용하는 가장 날카로운 이빨로 상처를 내어 과거에 묶이게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눈앞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이 서 계신데도, 시선은 이미 지나가 버린 ‘부재의 시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서 일하고 싶어 하시는데, 인간은 자꾸 과거의 실패를 들먹이며 주님의 손을 붙잡습니다.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1861)에서, 소설 속 미스 하비샴은 결혼식 당일 아침, 신랑에게 파혼을 통보받습니다. 그 충격적인 ‘과거의 한 지점’에서 그녀의 시간은 멈춰버립니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누렇게 변색된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쪽 발에만 구두를 신은 채, 썩어가는 웨딩케이크가 놓인 식탁 주위를 맴봅니다. 집안의 모든 시계는 그녀가 파혼 통보를 받은 그 시각, 9시 20분에 멈춰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피프에게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이렇게 읊조립니다. “피프, 내 가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 깨진 마음이야. 썩어가는 마음이지!” 그녀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향한 증오라는 무덤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 세상을 향해 독설을 퍼붓습니다. “사랑은 내게 죽음이었어. 그러니 너도 사랑 같은 건 하지 마라!” 그녀에게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출처: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해럴드 블룸, 『소설의 수사학』).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시기 전, 항상 인간에게 무언가를 시키십니다. “돌을 치워라.”(요한 11,39)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명령입니다.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 문을 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돌을 우리 손으로 직접 치우기를 원하십니다. 과거의 원망을 멈추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묻고 실행할 때 기적의 서막이 오릅니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는 과거의 상처라는 무덤에 갇혔다가 ‘현재의 할 일’을 찾아 살아난 한 남자의 절박한 실화가 나옵니다. 마리온 더글러스는 1943년, 사랑하는 딸을 잃었습니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5개월 뒤에는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라는 질문과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에 갇혀 1년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증의 늪에 빠졌습니다.

그를 살린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살아남은 다섯 살배기 아들의 사소한 요청이었습니다. “아빠, 나랑 종이배 만들어서 물에 띄우고 놀아요.” 처음에 그는 아들을 밀쳐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울며 매달리자, 그는 마지못해 종이를 접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종이배를 접는 그 3시간 동안, 1년 내내 그를 괴롭히던 ‘과거의 유령’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이 작은 일에 집중할 때, 과거 내가 묻혀있던 무덤에서 나오게 되는구나!’ 그는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오늘 당장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해치우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볼 틈을 주지 않는 ‘현재의 바쁨’이 그를 죽음의 냄새가 나는 우울증에서 건져냈습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종이배라는 작은 돌을 치우라고 하셨고, 그는 순종함으로써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출처: 데일 카네기,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라자로의 병과 죽음, 그리고 무덤 속에서의 나흘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고통스러운 과거는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부활의 영광’을 위해 완벽하게 설계된 섭리였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이것을 믿고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영광을 보게 됩니다.

「과거의 비극을 뚫고 길을 낸 남자 – 다슈라트 만지(Dashrath Manjhi)의 집념」 인도 비하르주의 가난한 노동자 다슈라트 만지의 이야기는 ‘만일’이라는 후회를 어떻게 ‘현재’의 기적으로 바꾸는지 보여주는 전설적인 실화입니다. 1959년, 그의 아내 팔구니 데비가 산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마을과 병원 사이에는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었고, 70km를 우회하는 동안 아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지는 “만일 저 산만 없었더라면”, “만일 정부가 진작에 길을 냈더라면”이라며 평생을 원망하며
술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 날 새벽, 정과 망치 하나를 들고 그 거대한 산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산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이라 비웃었지만, 그는 오직 ‘지금 당장 내가 정질 한 번을 하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는 무려 22년 동안 혼자서 산을 뚫었습니다. 110m의 산을 뚫어 길을 냈을 때, 병원까지의 거리는 70km에서 1km로 단축되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과거의 무덤에서 나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기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슬픔을 핥는 대신 지금 당장 곡괭이를 드는 것, 그것이 부활의 돌을 치우는 행위입니다.(출처: 영화 ‘만지: 산을 옮긴 사람’ 2015 참조)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명령하십니다. “돌을 치워라!” 과거의 원망이라는 돌, ‘만일’이라는 불신의 돌을 치우십시오. 그리고 지금 당장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몸을 던지십시오.

성 까밀로 드 렐리스는 젊은 시절 도박 중독자에 성격 파탄자였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입은 다리의 궤양(종기)이 평생 낫지 않아 고통받았습니다. 그는 “만일 내 다리만 멀쩡했더라면”, “만일 내가 도박만 안 했더라면”이라는 후회의 무덤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카푸친 수도회에 들어가려 했지만, 썩어가는 다리의 상처 때문에 두 번이나 쫓겨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만일”을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냄새나는 다리 상처를 하느님이 주신 현재의 십자가로 받아들였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상처를 가진 제가 지금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주님의 답은 명확했습니다. “너와 같은 처지의 병자들을 돌보아라.” 까밀로는 로마의 성 야고보 병원에서 가장 비참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환자들의 썩어가는 상처를 닦으며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과거의 치욕과 신체적 고통이라는 돌을 치웠을 때, 그의 영혼에는 샘솟는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환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오, 나의 주님, 나의 형제여!”라고 외치며 울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 본 적 없는 천상의 광채가 감돌았고, 그가 손을 얹을 때마다 환자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평생 고통을 주던 다리 상처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상처가 자신을 현재의 사랑으로 인도한 영광의 흔적임을 깨달았습니다. 후회를 버리고 ‘지금’ 순종했을 때, 그는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던 병원을 하느님 나라의 잔칫집으로 바꾸는 부활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출처: 산티 바티스타, 『성 까밀로 드 렐리스 전기』)

마리아 고레티를 살해한 알렉산드로는 나중에 젊은이들에게 절대 게으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 해야 할 일을 시간의 주인께 물으라는 뜻입니다.

저도 전날이나 아침에 반드시 오늘 할 일을 생각하고 그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야 과거의 지옥에 빠지지 않고 미래의 연옥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우는 자는 지상의 나그네일 뿐이지만, 오늘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천국의 상속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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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인 라자로의 베타니아 예전에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어”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인데 그 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던 영화 ‘국제시장’이 있습니다.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흥남 부두에서 철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화물선의 선장은 배에 있는 화물을 모두 버리고 만 사천 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남으로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배 위에서 4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배는 성탄 전날 거제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체험한 선장은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선장이 되고자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평생 수도원에서 살던 수사님은 뉴저지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습니다. 그 흥남 부두에서 살아남았던 문재인 대통령은 훗날 수도원을 찾아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살아남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과 고통의 현대사를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 사람은 그렇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서울 대교구 소속인 ‘최광희 마태오’ 주교 임명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레오 14세 교황님은 한국의 최광희 마태오 사제를 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주교 서품식을 앞두고 최광희 마태오 주교 임명자는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1년간 교회는 주교 임명자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였고, 지켜보았지만, 건강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교 임명자는 교회에 주교 임명에 대한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주교 임명자의 사의 표명을 수락하는 것은 교황님의 권한입니다. 교황님은 최광희 주교 임명자의 사의 표명을 수락하였습니다. 서울 대교구의 교구장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사목 서한을 통해서 최광희 마태오 주교 임명자의 사의 표명이 교황님으로부터 수락되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주교 임명자에서 최광희 사제로 다시 돌아온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 역시 최광희 마태오 사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사목의 현장에서 기쁘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워라! 나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돌’이 있을 것입니다. ‘체면이라는 돌, 자존심이라는 돌, 욕심이라는 돌, 미움이라는 돌, 시기라는 돌’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돌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 교우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이민의 길에서 눈물로 시작하신 분들, 병원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신 분들, 사업의 실패와 가족의 상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신 분들이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파도를 건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때마다 끝인 줄 알았지만, 끝이 아니었습니다. 또 하루가 주어졌고, 또 길이 열렸습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30년 전,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사목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송별 모임도 하고,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그 일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취소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마치 무덤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제게 약이 되었습니다. 제 교만을 깎아내리고, 제 조급함을 다듬어 주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저를 하느님께서 지켜주셨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른 길로 저를 미국에 보내셨습니다. 어느덧 8년이 넘었습니다. 그때의 취소가 없었다면 지금의 은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상처였지만, 지금은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배웠습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붙들린 사람은 결국 가장 좋은 길로 인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한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욕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살아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이라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의미와 존재의 차원입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음을 돌아보며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쁘게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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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1-45: “라자로를 살리시다.”

1. 사순 여정의 절정: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사순절의 복음들은 점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드러낸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생수를 주시는 분”(요한 4장)으로, 태생 소경을 치유하시며 “세상의 빛”(요한 9장)으로, 그리고 오늘 라자로의 부활에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된다. 물과 빛은 모두 생명의 표징이며, 이 모든 상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그분은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서 계시하신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생명의 주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죽음은 의미를 잃고, 생명이 새로운 형태로 시작된다.”(1002항) 사순 시기의 여정은 단순히 고행과 슬픔의 시간이 아니라,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는 파스카 여정이다. 오늘 라자로의 부활은 이 여정의 절정이며, 부활의 약속을 미리 보여 주는 상징이다.

2. 라자로의 병: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사건
예수님께서는 친구 라자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4절) 이 말은 단순히 라자로의 병이 고쳐질 것이라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깊은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은 고통을 멀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고통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죽음을 미루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힘을 보여 주시려 지체하신 것이다.”(Homilia in Ioannem 62,1)

라자로의 부활은 단지 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기적이 아니라, 곧 다가올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예형”(prefiguration)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심으로써, 자신이 곧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주님임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더 큰 영광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생명을 향한 승리의 문이다.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믿음의 고백
오늘 복음의 정점은 예수님의 선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이 말씀은 단순히 미래의 부활을 약속하는 선언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자는 이미 지금 여기서 부활의 생명 안에 산다는 계시이다. 이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묻는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절)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마르타의 이 고백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태 16,16)과 나란히, 요한 복음 전체의 중심 고백으로 평가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마르타의 믿음은 무덤을 열었다. 믿음이 없었다면 돌은 여전히 닫혀 있었을 것이다. 믿음은 죽음을 깨우는 열쇠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49,15) 교리서는 신앙을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참여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의 생명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98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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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여! 치우시게나! 나오시게나! 걸어가 스미어 그리 되게나!>

요한 11,1-45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

그때에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벗이여! 치우시게나! 나오시게나! 걸어가 스미어 그리 되게나!>

“돌을 치워라.”(요한 11,39)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4)

벗이여! 돌을 치우시게나!

믿음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불신의 돌을
희망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절망의 돌을
사랑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미움의 돌을
함께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독선의 돌을
섬김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억압의 돌을
평화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폭력의 돌을
살림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죽임의 돌을

벗이여! 이리 나오시게나!

불신에서 믿음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절망에서 희망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미움에서 사랑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독선에서 함께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억압에서 섬김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폭력에서 평화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죽임에서 살림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벗이여! 걸어가 스미어 그리 되게나!

믿음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믿음이 되게나
희망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희망이 되게나
사랑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사랑이 되게나
함께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함께가 되게나
섬김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섬김이 되게나
평화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평화가 되게나
살림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살림이 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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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1-15)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1,43-44)

1)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5-26)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은, 요한복음 5장의 말씀들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신 일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은 부활이며 생명이신 분”,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희망하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에 대한 공포, 사별에 대한 슬픔, 죽음에서 비롯된 절망감과 허무감과 무력감 등에 짓눌려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찾는 것이 바로 ‘종교’이고, 그런 것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분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죽음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13-14)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테살 5,9-11) 신앙생활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 즉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음에도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3)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라자로가 잠들었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죽음은 ‘긴 잠’과 같은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라는 말씀은, ‘긴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일은, 즉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당신만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라는 말씀은, “죽은 라자로를 내가 살리겠다.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라자로가 죽을 때 내가 거기에 없었던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너희가 믿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기쁘다.”라는 뜻입니다.

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나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는 권한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삶’입니다.>

43절의 ‘큰 소리’라는 말은, “하느님의 권위와 권능이 있는 음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라는 말은, “하느님으로서 명령하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라자로 자신이 스스로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구원’이란, 사람을 살리려는 ‘주님의 의지’와 살고 싶어 하는 ‘사람 쪽의 의지와 능동적인 응답’이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살고 싶어서 하는 생활이고, 나를 살리려는 주님의 부르심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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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간의 눈물을 아시는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의탁하는 가운데 선한 열매를 맺길 기원한다. 우리 힘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데서 온다.’

예수님은 언제 우셨을까?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루카 19,41)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 구나.” 멸망할 도시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해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다.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제멋대로 살아서 죽음으로 가는 것을 보자니 가슴이 아프셨다.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와 마르타, 다른 문상객처럼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살아있는 생명이셨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가슴은 공명을 모른다. 마음의 울림이 없다. 깊이 공감할 줄을 모른다. 예수님은 다르시다.“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 지셨다.”(요한11,33) 예수님의 가슴은 그 슬픔에 깊이 공감하셨다.

이렇게 보면 눈물도 큰 축복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는 곳에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니 가끔은 대성통곡할 필요가 있다. 아무 곳에서 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성체 앞에서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줄 것이다. 인간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곤경에서 구해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다. 우리 삶에서 인색해진 눈물을 회복해야 한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에 가셔서“돌을 치워라”하시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11,43)하셨다 “살아나거라.”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라자로야, 나와라.”하셨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이다. 부활의 삶에 희망, 천상의 삶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 삶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으로 충만해야 한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너라!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라자로’라는 이름의 뜻은 ‘무력하다’이다. 결국 라자로라는 이름은 ‘모든 힘없는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을까마는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무력함에서 자비와 안식을 주시며 위로와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

진짜 죽는 것은 내가 스스로 무덤에 갇히는 것이다. 나를 꽁꽁 묶어놓고 있는 무덤은 선입견, 편견, 고집,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 시기, 질투, 집착, 소유, 지배, 명예욕, 교만함 등등일 수 있다. 이런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무덤에서 나와라’ 하는 초대를 받고 있다. 내 안에 지닌 병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을 원인까지 치유하시는 명의이신 주님께 드러내야 한다. 그리하면,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될 것이다. 고해성사를 통해 내적인 무덤에서 나오길 희망한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은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으로 바꾼다면 바로 그것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을 치웠다. 마르타가 말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명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나자로가 밖으로 나왔다.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였는데 그것을 풀어주라고 하셨다. 풀어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나 스스로 옭아매지도 말 것이며 남을 내 잣대로 재어 판단하고 단죄하여 무덤에 가두어 옭아매지도 말아야 하겠다.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서길 바란다.

“주님, 저희가 청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청한 것을 너그러이 베풀어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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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정일준 루도비코 신부님]

<사순, 내 마음의 돌을 치우는 시간>

“바빠요.”, “피곤해요.”, “힘들어요.”

누군가 안부를 물으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모든 일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신앙마저 ‘여유가 생기면 해야 할 숙제’처럼 여겨 자꾸만 뒤로 미룹니다. 자기 일상의 무게에 갇혀 신앙을 또 다른 무거운 짐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는 우리와 참 닮아있습니다. 라자로를 잃은 그녀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주님과 함께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슬픔이라는 무거운 돌에 갇힌 마르타의 나약함을 보여줍니다.

그런 마르타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요한 11,39). 무덤을 막고 있던 무거운 돌은 어쩌면 우리 마음속의 ‘안된다’는 의심, ‘귀찮다’는 무관심, 그리고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다’는 고집일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 우리가 이런 마음의 돌을 먼저 치우기를 바라십니다.

행복은 내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힘들고 지친 순간, 주님께 내 마음의 자리를 조금 내어드릴 때 시작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나의 영을 너희 안에 넣어 주어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겠다”(에제 37,14 참조)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더 얹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다시 숨 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우리가 억지로 해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가장 큰 ‘힘’이자 ‘선물’입니다.

존경하올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사순 시기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마음을 꽉 막고 있는 피로와 체념의 돌을 이제는 조금만 옆으로 밀어봅시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하시는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의 고단한 일상은 비로소 생명의 기쁨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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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재현 요한 신부님]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자로를 살리러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애처로움을 넘어선 모습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단순히 한 사람을 살리신 기적을 넘어,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드러내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두고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고통을 외면하신 말씀이 아니라,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강한 결의(決意)를 드러냅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려 했던 위험한 곳으로 다시 가시는 모습과,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는 토마스의 말에서 ‘죄 때문에 죽을 몸’(로마 8,10)인 인간을 살리기 위해 당신 목숨까지 내어놓으시겠다는 결사 (決死)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사건은, 장차 당신께서 죽 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는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너희 무덤을 열겠 다.”(에제 37,12)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완성됩니다. 무덤은 더 이상 끝 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성령께서는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는 말씀은 사순 시기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를 부르시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죄와 절망의 무덤에서 나와 생명의 빛으로 걸어 나오라는 부르심인 겁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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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 | 조에 (ζωή)

요한복음 11장의 중심에는 “생명”(ζωή)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살아 있는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생명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의 또 다른 말마디입니다.

마르타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마르타의 믿음은 당시 유다 사회가 공유하던 종말론적 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현재로 옮겨 놓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무덤에 나흘째 누워 있던 라자로였습니다. 당시 유다 전승에 따르면 죽은 지 사흘이 지나면 생명에의 모든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여겨졌습니다. 나흘째 시간은 인간이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십니다. 더 이상 기다릴 미래는 없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우리를 살리십니다. 더 이상 기다릴 주님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부활과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오늘 우리의 믿음 안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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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이재상 보나벤투라 신부님]

<가난한 기적, 자유로운 선택>

기적은 이해할 수 없기에 기적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힘든’ 사건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우리는 그 사태를 기적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믿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기적을 또다시 만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친구 라자로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죽음을 이기고 무덤을 걸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믿음에 확신을 줄 강력한 기적을 내 앞에서 보여주실 수는 없을까?’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거니와 근대 이후의 교육을 받은 우리들은 이러한 기적이 내 앞에서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의심할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근대 교육은 우리에게 과학적인 사고와 논리적 사고를 강요합니다. 고대인이었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기적을 의심하였는데,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믿음을 얻기보다는 더한 의심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더욱 클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예수님의 기적은 가난하고 겸손한 사태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셨으나 사람들의 마음에 확신을 일으키지는 못하셨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어떠 한 확신도 우리에게 강요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기적은 반만 포용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확신에 차 예수님을 따르는 이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그 기적을 보고 율법(안식일)조차 지키지 않는 사이비 예언자라 낙인찍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예수님의 기적조차, 늘 오해하고 의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겸손하고 가난한 봉사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할 뿐,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는 주님의 거룩한 부활조차 의심하는 인간들의 믿음의 자유 속에 아무런 감흥 없이 던져질 수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사태라는 냉정한 현실의 예고입니다.

이렇게 의심하는 인간들에게 가난한 사태가 기적이건 만,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그분 연민의 마음, 그러한 그분의 마음이 움직이셨을 때,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요한 11,33) 지신 예수님의 마음이 이미 그분 마음에 예정되어 있던 가난하고 겸손한 봉사인 기적을 보다 더 빨리 재촉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기적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발생 한 예수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봉사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라자로를, 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감히 이 초대를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친구여, 나는 그대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대의 믿음을 기다립니다. 친구여, 이리 나오 십시오. 그대의 두 발로, 그대의 순수한 선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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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인 라자로의 베타니아 집은 예수님에게는 무척이나 사람 냄새가 나는 곳으로, 어느 때 방문하더라도 환대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편안한 장소이었을 것입니다. 때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편안히 환대해 주는 가족과 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가족들과 친밀하고 친근한 관계를 맺어왔고 서로 스스럼없는 사이였다고 느낍니다. 기쁨은 물론 슬픔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정과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를 지속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이였기에 오빠 라자로가 중병을 앓게 되자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이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11,3)라고 소식을 전해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님께서 머물던 곳에서 이틀을 더 보내시며, 다만 “라자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라자로의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1.4)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메시지의 또 다른 울림입니다. (요9,3 참조) 더욱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11)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라자로가 그냥 잠을 잔다고 오해하여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11,12)라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라자로는 죽었다, 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슬픈 마음을 헤아리셔서 그리고 사랑하는 벗인 라자로의 중병의 소식을 듣자마자 베타니아로 달려가시지 않았을까요. 경험적으로 한恨은 한으로 치유할 수 있듯이, 죽음은 죽음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어설픈 상태는 상태를 더 악화할 수 있기에 밑바닥까지 내려갈 때만이 그 상처로부터 바닥을 치고 오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온전히 죽을 때만이 참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 가족을 사랑하시지 않았기에 지체하고 머뭇거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으로 사랑했기에 그 자매들의 슬픔과 아픔을 알면서도, 라자로가 죽음의 문턱을 온전히 넘어서야 만이, 라자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 수 있고 이 일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슬픔으로 조급하거나 성급하게 처신하지 않고, 주님의 때 곧 영광의 때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을 알면서도 차마 하느님 구원의 때를 앞당기지 못하고 기다려야 하는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답답한 마음으로 이틀 뒤에야 베타니아에 도착하신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타와 마리아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순간은 바로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11,21.32)라는 안타깝고 아쉬운 심정의 표현입니다. 어찌 그 말의 의미를 주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런 마르타를 위로하며 그리고 당신이 이제부터 하려는 의도를 넌지시 드러내시며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라고 말씀하시지만, 마르타는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5~26)라고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라자로의 죽음과 그를 다시 살리심을 통해서 주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모든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던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예수님의 참 위로와 구원의 기쁜 선포입니다. 그러기에 현재도 베타니아의 마르타의 집(=작은 경당)에는 이 말씀이 새겨져 있고 그 집을 방문한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물었던 것처럼 너는 이것을 믿느냐?, 고 묻고 있습니다. 〔저희 고난회 베타니아 공동체에서 라자로의 집은 멀지 않아서 자구 방문했던 경당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마리아와 그곳에 와 있던 사람들의 우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을 보시고 그렇게 울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무덤을 열어 나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37,12)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실현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슬픔과 애통한 마음으로 북받치신 상태에서 라자로의 무덤에 다가가시어 무덤을 가로막은 “돌을 치워라.”(11,39)하고 말씀하신 다음, 큰 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11,43)고 외치십니다. ‘라자로’는 본래 ‘무력하다’, 는 의미이며 이로써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무력한 존재라는 속뜻을 내포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단지 라자로만을 무덤에서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 너무도 나약하고 힘없는 모든 인간 존재를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와 그의 여동생들을 누구보다 사랑했음에도, 선뜻 베타니아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체하신 것입니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끌어내어 생명으로 다시 불러내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에서 풀려 난 “라자로를 감싸고 있던 수건을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11,44)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덤은 분명 삶의 마지막 자리이며 어두운 절망의 장소이지만, 이 삶의 마지막 자리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시작의 자리이며, 어둠의 절망 가운데 빛을 향한 희망이 시작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제 죽음으로 썩어 문드러진 냄새가 진동한 죽은 육신이 영으로 다시 살아날 때 향기로 가득 찰 것입니다. 혹여 우리에게서 죽음의 썩는 냄새가 난다면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을 치웠듯이 마음을 가로막는 돌을 치워 성령께서 활동할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을 비우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며, 인류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거룩한 신비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나이다.』 (감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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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

오늘 말씀전례는 성지주일을 앞두고, 마치 부활을 연주하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시고, 복음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당신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음을, 복음 환호송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찬미하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부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사순시기가 생명으로 가는 길, 곧 부활로 가는 길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쓰라림보다는 감미로움이 서광처럼 비쳐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사랑이 또한 걸어갑니다. 이 길을 걷는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아나톨 프랑스)이요, 참된 생명에로의 이동이요, 사랑에로의 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봄바람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동굴에 갇혀있는 이를 불러내는 봄 햇살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저앉아 웅크리고 죽어 있는 이를 빛으로 불러내는 봄비 같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장엄하게 예고된 그 ‘생명’입니다. 곧 빛이신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생명이시요 빛이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참 생명에로 이동입니다. 그 길은 ‘앎’에서 ‘믿음’에로의 이동입니다.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임에 대한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서 마르타는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마르타는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라고, ‘안다’고만 고백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 8,2)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을 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아는 것’을 넘어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때라야 그 믿는 이에게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은 믿음 안에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얻을 수 있는 풍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여전히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마르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었지만, ‘부활이요 생명’임에 대해서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 하고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시어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이는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앎’에서 ‘믿음’으로의 이동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선사하시며, 불신과 어둠의 묻혀있는 저희의 무덤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생명의 빛에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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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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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친한 신부들과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이 식당에서 어느 신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뭐 먹을지를 다른 신부가 묻습니다. 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아무거나 시켜 줘”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뒤에 음식이 나왔는데 정말 ‘아무거나’가 나왔습니다. 메뉴판에 ‘아무거나’라는 메뉴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신부는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문했지만, 저만 이상한 ‘아무거나’를 먹게 되었습니다.

김치찌개를 먹고 싶은데 된장찌개를 시킨다면 원하는 김치찌개를 먹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원하는 음식이 나옵니다. 이처럼 우리 삶도 똑같지 않을까요? 말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한다면 과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까요? “절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용서의 은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이 곧 하느님께 전달하는 주문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주문해야 할까요?

당연히 자기에게 이로운 것, 진심으로 필요한 것을 주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문 전에 다른 주문을 먼저 하곤 합니다. ‘이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왜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거야?’, ‘왜 저 사람들은 문제투성이야?’ 등의 다른 주문은 안 됩니다. 제대로 주문해야 합니다. ‘아무거나’를 말하면 정말 ‘아무거나’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대로 주님께 주문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에,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했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인간적인 무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즉각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타가 마중 나옵니다. 그녀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는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라고 대답하면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부활은 먼 훗날의 사건입니다. 이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라고 하시면서, 먼 미래에 일어날 현상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마르타가 이야기하지요.(요한 11,39 참조) 당시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사흘 동안 시신 곁을 맴돌다가 냄새가 나는 나흘째가 되면 영영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마르타의 말은 곧 인간적 희망이 단 1%도 남지 않은 완전한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돌을 치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말씀에 죽음이 굴복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안에도 무덤이 있습니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관계, 그 관계 안에서 오래 굳어 버린 상처, 희망이 사라졌다는 기억, 신앙이 식어버린 자리…. 그래서 주님께 제대로 주문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포기하고 절망할 뿐입니다. 혹시 마르타의 말처럼 “주님,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부족하고 나약한 믿음으로 주저하면서 갇혀 있는 우리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리 나와라”라고 외치십니다. 내 안에 있는 무덤을 열고 나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잘못 반성에서만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얼른 나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 주님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님께 주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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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ㅛ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1,43,44)

내면의 어두운 동굴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가두어 둡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거나 거부하거나 방해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어두운 마음속에 꽁꽁 묶어 둡니다.

내면의 어둠 속에 다른 사람들을 묶어 두는 것은, 우리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아파 그 고통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그림자 속에 묶어 둡니다.

어두움 속에 두려움을 묶어두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보지 않고 사람들에게 받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이 두려워 직면하기보다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이라도, 그 감정은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특히 기쁨과 두려움과 슬픔, 분노, 상실감과 수치심과 같은 감정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줍니다. 자신의 감정을 거부하면 우리는 자신을 거부하게 됩니다.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묶고 통제합니다.

우리 안에 묶어 둔 사람들을 ‘풀어주기’ 위해서 우리는 두려움의 정체를 보아야 합니다. 두려움을 회피하기보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직면하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듯이 두려움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록 아픈 감정일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수용하는 만큼 우리는 어두운 마음에 묶어 둔 사람들을 ‘풀어주어 걸어가게’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됩니다. 죽음의 사슬에서 우리를 풀어주신 주님처럼, 사순 시기는 우리 내면의 어둠 속에 묶어 둔 사람들을 ‘풀어주어 가게 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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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특별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여기서 ‘영광’은
단순한 기적의
장면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
그리고 생명의
드러남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을 맡기는
실천입니다.

믿음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해결이 아니라
동반입니다.

어떤 믿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현실도 다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듯 삶의 의미는
조바심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성숙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는 존재이지만,
관계와 믿음,
그리고 부름을 통해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는 존재입니다.

라자로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우리 안의 무기력, 절망,
상처로 굳어진 부분을
상징합니다.

상처받고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이지만,
공감과 관계,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존재입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묶일 수 있고,
풀려날 때 비로소
온전히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무덤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희망이 사라진 듯하고,
이미 끝나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순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늦었다고 여겨지는
자리까지 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성된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도움과 은총이 필요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끝이라 여긴 자리에서
당신은 시작을
쓰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모든 끝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으시며
언제나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영광은
다시 살아나게 하는
생명의 참된 빛입니다.

이미 늦어버렸고
너무 늦어버린
때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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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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