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5장 13-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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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 (5-7장)
1) 행복선언: 5, 1-16
2) 율범의 완성: 5, 17-37
3) 새로운 삶의 태도: 5, 38-7,29

복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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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음식의 맛을 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타락과 멸망을 막고 더 나은 세상, 더 맛깔나는 세상을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기에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9,50) 하고 이르십니다. 또한 콜로새서의 저자는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4,6)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빛일 수 있는 이유는 먼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 새 생명을 얻은 우리의 빛은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둡고 차디찬 세상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양초처럼 자신을 불태우고 녹일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해지고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
런데 과연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빛나고 있습니까? 그 빛으로 세상 사람들을 밝게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내 앞길만, 내 가정만, 우리 교회만 비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이를 환히 비추는 ‘세상의 빛’이어야 합니다.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이가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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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누군가에게서 위로와 힘이 되는 빛을 받았던 경험, 또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던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웃에게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가 필요한지 함께 나누어 봅시다.(개인적 경험 + 내적 태도)

3.세상의 어두운 자리나 상처받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지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나는 말과 행동, 선택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사회·세상 안에서의 실천)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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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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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신앙으로 우리가 잘 다듬어지고, 성장하게 되고, 무엇인가 나아지게 되면 그때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과 빛은 먼 뒷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 자신이 소금이고, 빛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예전에 썼던 제 강론들을 찬찬히 읽어 본 적이 있는데,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습니다.
글이 참 형편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 글에 맞갖게 살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웠습니다.
또 이런 글들을 많은 사람이 읽는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강론하는 것도, 강론 원고를 기고할 자신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부족하여도, 모자라도 그냥 올리자.
내 입장에서 아무리 부끄러워도 주님께서 알아서 이 글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지를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제가 보기에 너무나 부끄럽다고 하여도 나름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오늘 복음 말씀처럼 저 자신이 소금이요, 빛이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더라도, 주님 말씀을 믿고 소금처럼, 빛처럼 노력하자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빛을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494
2월8일 [연중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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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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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Y5ULHvPU4
[성모 승천 수도회 김태호 시몬(부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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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발휘됩니다!>

피정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피로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오후, 오랜만에 좀 쉬려고 드러누웠는데, 예고도 없이 건장한 청년들이 줄줄이 들이닥쳤습니다. 먼 길 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한 분위기여서 주특기인 치즈·계란 라면을 열심히 끓여댔습니다.

라면 끓이는 데는 제 나름대로 신조가 있습니다. 국물이 한강이거나 퉁퉁 불어터진 라면은 절대로 용서가 안 됩니다. 조리 설명서에 따른 적정량의 물에 치즈 한쪽, 파 송송, 계란 탁! 불어터지기 전에 신속·정확·공정한 배분! 눈이 휘둥그래진 청년들이 후후 불어가며, 맛있다 맛있다, 하며 폭풍 흡입하는 모습에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해졌는지 모릅니다.

조리에 있어서 적절한 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소금을 주제로 한 가지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어촌에 살다 보니 새삼 소금의 위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고기를 아무리 많이 잡아 와도 시간을 조금만 지체하면 상하게 되어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신속히 손질을 해서 적정량의 소금을 뿌리고 해풍에 말리게 되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합니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구워 먹을 때는 또 어떻습니까? 잘 손질해서 살살 소금을 뿌려준 후, 숯불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익혀 먹으면 그 맛이 일품입니다.

따지고 보니 소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음식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소금의 역할,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역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에 불충실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참으로 고상하고 숭고한 소명이지만, 우리가 부여받은 소명에 불충실하거나 게으르게 될 때, 언젠가 하느님 대전으로 나아가게 될 때 참으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아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말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고민하던 중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성인(聖人)이 될 것이며, 군인은 군대에서 성인이 될 것이며, 환자는 병원에서 성인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은 자신의 공부를 통해서, 농부는 논과 밭에서, 사제는 사제로서 사목의 현장에서, 공무원은 사무실에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바치는 희생의 발걸음,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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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PU8_9qjy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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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은 스스로 라벨을 붙이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엄청난 정체성을 부여해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백화점 명품관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혹시 시장에서 파는 가방과 명품 가방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아십니까? 비가 올 때 반응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비가 쏟아질 때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면 시장표고, 가방을 품에 꼭 껴안고 내 머리가 젖는 걸 선택하면 명품이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뼈가 있습니다. 명품은 스스로 “나 비싼 거야!”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 물건을 만든 장인이 붙인 ‘라벨’과, 그것을 소유한 주인의 ‘태도’가 그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야”, “나는 좋은 엄마야”라며 스스로 라벨을 붙이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붙인 라벨은 가짜입니다. 진짜 라벨은 오직 나를 만드신 분만이 붙여주실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내가 나를 규정하려고 할 때, 인간은 길을 잃습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의 주인공 페르 귄트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유혹에 빠져 평생을 방랑합니다. 그는 부자가 되기도 하고, 예언자 행세를 하며 스스로를 ‘세계의 황제’라 칭합니다. 하지만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밭에서 양파 하나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며 이렇게 독백합니다. “이 껍질은 부자였던 나, 이 껍질은 예언자였던 나… 그런데 알맹이는 어디 있지? 아무리 벗겨도 중심이 없구나.” 하느님이 주신 본래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수많은 가면을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를 거부하고 스스로 절대적인 정체성을 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토리노의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목을 껴안고 울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살았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철학자는 가장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창조주를 잃은 피조물의 고독한 최후였습니다.

인간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누가 나를 규정해 주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1920년 인도 늑대 굴에서 발견된 두 소녀, 카말라와 아마라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들은 분명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양육을 받지 못하고 늑대 틈에서 자랐습니다. 발견 당시 그들은 네 발로 기고, 날고기를 먹으며, 밤에는 늑대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너는 사람이다”라고 규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부모가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인간다움을 세울 수 없습니다. 늑대와 대화하면 늑대가 되고, 하느님과 대화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반대로, 권위 있는 누군가가 긍정적인 라벨을 붙여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버드 심리학과 로젠탈 교수의 ‘피그말리온 효과’ 실험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무작위로 뽑은 학생들의 명단을 교사에게 주며 “이 아이들은 지능지수가 높은 영재들”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종의 ‘규정’을 지어준 것이지요. 교사는 그 권위 있는 교수의 말을 믿고 아이들을 ‘영재’로 대우했습니다. 눈빛, 말투, 기대감이 달라졌습니다. 8개월 후, 놀랍게도 그 아이들의 성적은 실제로 급상승했습니다. 권위 있는 자의 긍정적인 규정이 평범한 아이를 비범하게 만든 것입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에디슨이 받아온 편지에는 “댁의 아들은 지적 장애가 있어 가르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린 에디슨에게 편지를 이렇게 읽어주었습니다.

“아드님은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수준이 너무 낮아 아드님을 가르칠 수 없으니 어머니가 직접 가르쳐주세요.” 어머니라는 절대적 권위자가 “너는 천재”라고 규정해 주었기에, 에디슨은 평생 자신을 천재로 믿고 살았고 실제로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규정해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칭찬이 아닙니다. 로젠탈 교수나 에디슨의 어머니처럼,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창조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진짜 믿어지십니까? 솔직히 거울을 보면 소금은커녕 곰팡이 같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 선언이 믿어지려면 ‘보증’이 필요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전과자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장발장, 잊지 마시오. 나는 이 은으로 자네의 영혼을 샀소. 자네는 이제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이오.” 은촛대라는 값비싼 대가, 즉 희생을 치르고 붙여준 이 새로운 라벨이 장발장을 성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대가가 있어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화가 벤자민 웨스트의 일화도 있습니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의 화장품으로 엉망진창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보통 부모라면 혼냈겠지만, 어머니는 “어머, 이건 여동생 샐리구나!” 하며 아들에게 진한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훗날 거장이 된 벤자민 웨스트는 말했습니다. “나를 화가로 만든 것은 그때 어머니의 키스였다.”

어머니의 키스가 그를 화가로 만들었듯,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곧 그분의 ‘피(Blood)’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키스이자, 우리 영혼에 찍힌 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값을 치르고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빛이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라는 닭장에 살고 있는 독수리들입니다. 어느 농부가 독수리 알을 주워 닭장에서 부화시켰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어미 닭을 따라 모이를 쪼며 “나는 닭이다”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동물학자가 와서 그를 절벽으로 데려가 던지며 외쳤습니다. “너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다! 하늘이 너의 집이다, 날아라!”

처음에는 믿지 못해 퍼덕거렸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본능과 학자의 외침을 믿고 날개를 펴자 창공으로 솟구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너는 흙수저가 아니다. 너는 실패자가 아니다. 너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알려주시는 동물학자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그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분이 붙여주신 라벨을 믿고, 닭장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소금임을 믿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빛임을 믿고 올바른 삶의 길을 알려주는 행동할 때, 그것을 믿고 매일 할 때, 우리는 진짜 빛과 소금이 됩니다.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성 대 레오 교황님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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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들은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바람이 불어서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외부의 상황에 따라서 영향을 받습니다. 나뭇잎이 가지에 붙어 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듯이, 정신을 맑게 하면, 정신을 바짝 차리면 길은 보이기 마련입니다. 젊은 부부가 연말을 맞이해서 프랑스 파리로 여행 갔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성탄 밤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그렇게 즐겁게 지내며 백화점에서 쇼핑도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정리하면서 ‘영주권 카드’를 놓고 온 걸 알았습니다. 대사관에 연락하니 시민권자가 아니면 온라인으로 신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주일 이상 더 머물러야 하고,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여러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내가 한국으로 가서 있는 동안, 남편이 미국으로 가서 아내의 영주권 카드를 한국으로 가져가서 함께 오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해진 시간에 올 수는 있지만 비용이 문제였습니다. 온라인으로 신청해서 서류를 다시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용은 들지 않지만 1주일 이상 더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집에 있는 영주권 카드를 페덱스 택배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용도 적게 들고, 원하는 시간에 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방법을 생각해 낸 부부는 남은 일정 파리에서 즐겁게 지내다가 택배로 온 영주권 카드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놀라지 않고,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15년 전입니다. 동창 신부님과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마드리드에서 차를 빌려서 여행 다녔습니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차를 반납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국제선인 줄 알고 국제선으로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제가 이야기하니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마드리드에서 갈아타는 일정이라서 국내선으로 가야 했습니다. 국제선에서 한참 기다리다가 탑승하려 하니 국내선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둘러서 국내선으로 갔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한국 가는 비행기를 놓치면 주일 미사에도 차질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비용은 더 들었지만 바로 항공권을 살 수 있었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를 믿고 기다려준 동창 신부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이 넓은 동창 신부님은 비용도 함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상황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면 방법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기만 하면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고, 죽을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나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그렇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길이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능력과 재능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혈연과 지연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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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마태 5,13-14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를 ‘복음의 실천’이라는 삶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복음 실천을 너무 거창한 일로 생각하지 않나 싶습니다. 지나치게 높은 목표는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핑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해도 안 돼.” 하고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을 조금 더 단순하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맛있는 떡의 핵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적당한 ‘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맛있는 떡은 소금 간을 잘한 떡입니다. 그렇다고 짠맛이 도드라질 정도는 아니지요. 그러나 소금을 아예 넣지 않으면 밍밍하고 맛없는 떡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능력과 여건이 되어 크고 거창하게 복음을 실천할 수 있다면 참으로 귀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내 몫을 다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신앙인의 (첫 번째) 신분증은 기쁨으로 인도하는 참행복입니다.’ 실제로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늘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신자를 보고 성당에 가고 싶다거나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이라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주머니 속에 있던 손을 꺼내어 먼저 내밀 수 있는, 딱 이 정도로 ‘신앙인의 티’를 내 보면 어떨까요?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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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1. 소금과 빛으로 부르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존재 자체를 “소금”과 “빛”으로 규정하심을 보여준다. 제자는 단순히 어떤 역할을 맡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본질적으로 맛을 내고, 길을 비추는 사람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빛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비추고, 소금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썩지 않도록 다른 것을 보존한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한다.”(Homilia in Matthaeum 15,6) 즉, 제자들의 존재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봉사적 존재라는 것이다.

2. 행실을 통한 증거
예수님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라고 하신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행실로 드러나는 신앙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빛은 너희의 행실이다.”(Sermo 53,6) 그리스도인은 말보다 삶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연결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고, 불쌍한 이들을 네 집에 들이면, 네 빛이 새벽빛처럼 솟아오를 것이다.”(이사 58,7-8)라고 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빛을 드러낸다.

3. 교회의 사명: 세상의 빛
교회가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곧 선교적 사명을 의미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보편적 성사”(교회 48)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모든 존재 이유는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데 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코린토 신자들에게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하였다.”(1코린 2,2) 고백한다. 교회의 빛은 화려한 언변이나 인간적 힘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온다. 십자가의 나약함 안에 담긴 하느님의 능력(1코린 2,4)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에 비추어야 할 가장 큰 빛이다.

4. 우리의 삶 안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에게 묻는다. 나는 내 삶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소금처럼 평범한 일상 안에서 작은 사랑을 나누고, 기쁨과 이해를 전하며, 세상을 보존하고 있는가? 빛처럼 어둠 속에서 꺼지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한 길잡이가 되고 있는가?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여라.”(In Epistulam Ioannis ad Parthos Tractatus 7,8) 사랑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삶은 이미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5. 결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맛을 지켜내는 소금이며, 세상을 밝혀주는 빛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다른 이를 위한 것이며, 사랑으로 드러나는 삶을 통해 하느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도 다짐해야 합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교회, 즉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마을처럼 세상이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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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마태오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ㄱ)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ㄱ)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음으로
불신에 스미는

세상의 소금인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품음으로
밀침을 보듬는

세상의 빛인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희망으로
절망에 스미는

세상의 소금인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기쁨으로
슬픔을 보듬는

세상의 빛인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으로
미움에 스미는

세상의 소금인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살림으로
죽임을 보듬는

세상의 빛인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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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곧 ‘소금과 빛답게’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라는 명령인데, 아직 소금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소금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소금답게 살아라.”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소금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이 ‘소금답게’, 또는 ‘소금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이고, 이 말씀도 이미 빛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빛답게 살아라.”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소금답게’ 살지 않으면, 그것은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이고, 그러면 밖에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아무 쓸모가 없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에도,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도, 또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는 일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함지 속에 감춘 등불은 빛을 내지 않는 등불인데, 그것도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고, 밖에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라는 말은, 이사야서 2장 2절-3절에서 온 말입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2-3)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종말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기도 하고, ‘피난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감추어질 수 없다.”는, “감추지 마라.”라는 명령입니다. 교회는, 또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또는 주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등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은 ‘신앙인답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기본이고, 삶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고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라.”, 즉 “신앙인으로 변화시켜라.”입니다.

3) ‘소금답게’, 또 ‘빛답게’ 사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 거창한 일도 아니고,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이미 많은 신앙인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일입니다. ‘소금과 빛’의 좋은 모범은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그런데 초대교회 공동체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안 좋은 일도 생겼습니다.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6,1)

홀대하지 않았는데도 홀대받았다고 불평한 것은 아닌 것 같고, 히브리계 과부들은 조금 더 받고, 그리스계 과부들은 상대적으로 덜 받는 차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그런 차별과 불평이 생기면, 그것은 갈등과 분열로 이어지게 됩니다. 공동체가 깨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그런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면, 그 교회는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버리고, ‘꺼진 등불’이 되어버립니다.>

4) 모든 신앙인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신앙인답게 산다면, 즉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다 하고, 하면 안 되는 일은 안 하면서 산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선거철만 되면 자기가(자기도) 신앙인이라고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많은데, 당선된 후의 모습을 보면, 전혀 신앙인답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려면, 우선 먼저 신앙인답게 잘 살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는 경우에는, 신앙인답게 사는 것을 포기한 것과 같기 때문에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는 것도 아닌데, 주일미사 참례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할 수 있는데도,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하나도 안 하는 것은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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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의 소금과 빛>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어떤 이가 “빛으로 오시는 당신은 제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둠을 비추려 빛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으로 세상에 오셨다. 빛과 소금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테살 5,4-5)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맛을 내지 못하고 비추는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 이유가 부족하다.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일까? “착한 행실”이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지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기 때문이다.

착한 행실은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이사 58,8)

둘째는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10)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생각해 보자.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소금이 쉴까”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일에도 절대로 굽히거나 변하지 아니하고 틀림없어 매우 미더움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이다. 우리가 꾸준히 착한 행실을 보이는 미더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고 … 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는 예언자의 말씀에 관심을 두면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한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희생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이다.

소금의 역할이 무엇일까? 자신을 녹여 맛갈지게 하고 부패를 막는다.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도 다르지 않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 데 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히 발휘한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다.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의 제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한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준다. 이것이 소금의 삶이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희생으로 맛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한다. 왜 그럴까?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됨이 적고, 진리가 부족하며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빛이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고,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 보인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의 빛이 비추어져야 한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우고, 까만 밤에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한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머태5,16)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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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쉬는 교우분이 말했습니다. “신부님, 처음엔 몰랐는데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참 부담스러워요. 영세 받을 땐 나도 신자가 되었구나 싶어서 기쁘고, 여기 저기서 칭찬해 주고 축하해 주니까 좋기만 했는데, 점점 현실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부담스럽기 시작해졌어요…… 교회에서 배운 대로 잘 하면 좋을 텐데 잘 못하니까, 창피하기도 하고, 점점 죄를 지은 것만 같아 슬슬 부담스러워 성당에까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성당에 나와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신부님!”

어쩌면 열심과 냉담의 차이는, 우리 안에 주님께서 생생히 살아계시는 것과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의 차이는 ‘부담스러워 용서를 청하고 매달리며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과 ‘부담스러워 피하고 포기하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천주교 신자로서 사회에서 모범을 보이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고 더 착하고 더 많이 양보하고 남 모르게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까지 하기는커녕, 오늘 나의 현실은 그야말로 내 코가 석자요, 내 가정, 나 한 몸 추스르기조차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마태 5,13-15)

그러기에 가끔은 마음 속으로 ‘적당히 살자!’ ‘남하고 비슷해야지, 나만 그렇게 튀면 안 된다.’ 등등 자신의 부족을 합리화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당히 넘기고 피해가고 싶습니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우리가 몇 %, 어느 정도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지, 실제로 전혀 안 지키고 안 따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지금 당장 못 지킨다고 하더라도, ‘왜 자신이 못 지켰는지?’,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 지’ 잘 고민하고 되새기고 있다가, 다음에 또 기회가 왔을 때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더 부담스러운 것은 그렇게 부족하고 부당한 나를 주님께서는 주님 복음 선포 사업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내가 겪게 되는 사건과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것인지 제 때에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고, 어렴풋이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넘어간 다음, 한 참 후에 되새길 때가 돼서야 제대로 알아 듣고 후회하는 어리석고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부르시니 오히려 이는 부담이 아니라 선택이자 축복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지금 현재 거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지금 당장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지 못하여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담, 그러면서도 우리 마음 속에서 사그라들지 않고 피어 오르는 거룩함에 대한 열정 등은 결코 우리의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초대요 축복이자 선택된 이들만이 걸을 수 있는 ‘영광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6-18)

그런 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오는 부담은 오히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는데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진솔하고 겸허한 고백으로 보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사도 바오로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3-5)

우리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와 힘으로는 이룰 수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우리 소명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6.28)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내게 생기는 모든 일에 성령께서 함께하시면서 이끌어 주시고 힘이 되어주셔서 내가 기꺼이 주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게”(마태 5,16) 되기를 간구합니다.

매일 저녁 그날 하루를 주님 안에서 되새기면서 기도합니다. 오늘 내가 마주친 사람과 상황 중에 다 하지 못하고, 미처 다 채우지 못했던 모든 사람과 상황을 주님께서 몸소 채워주시기를, 그래서 우리 “사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추게”(15절) 되기를 간구합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거름을 치는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죄를 사해주시고, 주님의 영을 보내시어 저희를 주님 구원사업의 도구로 써주소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주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로, 주님의 부덕하고 불충한 죄인, 저 심흥보 베드로가 현임 직무의 짐을 은혜로이 벗고, 성사전담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민구 프란치스코 신부님은 로마 한인신학원 부원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주님과 교회 여러분의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음 주 11시 미사에 조촐하게나마 퇴임 감사미사와 이 신부님 환송미사를 봉헌하고자 합니다. 함께하시어 축하해 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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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민중 안드레아 신부님]

<우리는 빛과 소금일까?>

바다를 볼 때면 늘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기하다’입니다. 어릴 때 바닷가에 놀러 가면 친구들과 잠수해서 늘 불가사리 같은 것을 따 오는 놀이를 하고는 했는데, 어떻게 그런 예쁜 것이 바닷속에 사는지 늘 신기했습니다. 바다는 그 넓이와 깊이도 대단하지만, 그 안에 온갖 생명이 살고 있어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물이 많이 있고,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데도 썩지 않고 온갖 것들을 다 품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이 참 대단하신 분이구나’라는 것을 느끼곤 합 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바닷물이 단지 아주 적은 양의 소금과 화학물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양을 따지자면 10분의 1도 안 되는, 페트병 하나에 작은 티스푼만큼도 안 되는 소금이 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 놀라운 작용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냥 물에 소금을 조금 넣어두어도 그 물은 잘 썩지 않기 때문에 소금은 대단한 일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소금과 빛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마태 5,13 참조)

소금은 좋은 것이라면서 그것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할 때에는 신앙인으로서 아무 소용이 없음을, 차라리 없는 것이 도와주는 것임을 강하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바닷물에는 소금이 3.4%가 들어 있습니다. 정말 작은 양이고 미약한 양이지만 그 소금 은 바닷물을 얼지 않게 하고, 그 속에 담긴 것들을 썩지 않게 유지해 줍니다. 우리나라에는 가톨릭 신자가 11%가 조금 넘고 있고, 전 세계 사람 중 17.8%가 우리 가톨릭 신자들입니다. 그런데에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썩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올바르게 노력해서 사는 서민은 살기 힘들다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세계는 돈에 눈 먼 자들에 의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들 주식이나 투자를 통해서 일확천금을 꿈꾸고, AI시대를 외치며 최첨단 세상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곁에 있는 소외된 이들과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 중에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같이 일조한 탓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며, 세상을 정화하고 밝게 비추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말씀에서는 짠맛을 잃으려거든 차라리 너희의 손과 발과 눈을 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신앙인으로 바르게 살지 못한다면, 끼고 있는 묵주 반지를 계속 끼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차에 모시고 있는 묵주와 고상을 그대로 두어야 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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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허인 베네딕도 신부님]

<빛과 소금으로서 삶을 맛있게 아름답게…>

소금은 음식이 제맛을 내게 하고, 부패를 막아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 산다는거…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을 맛있게 살아야 합니다. 삶을 맛있게 산다? 나눌 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랑을 실천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의미 있는 삶이고, 또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이런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게 맛있게 사는 겁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부 패를 멀리하고, 이웃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어 한다는 겁니다. 정직하면 바보 소리 듣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표양을 보여야 합 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우리를 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그럽니다. 이 세상에 빛이 없다면? 색도, 형체도,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색은 빛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빛이 있어야 형체를 분간할 수 있고… 어떤 형체를 가지고 있고, 어떤 색을 내느냐, 이게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 이걸 두고 우리는 ‘미(美), 아름다움’이라고 합 니다. 결국 빛이 색의, 형체의, 아름다움의 근원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선을, 그리고 하느님 자신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어둠은 죄와 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이제 제자들, 우리를 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고 말씀하시 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예수님께서 주신 소명은, 아주 값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힘들게 살아야 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 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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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Ὑμεῖςἐστε τὸἅλαςτῆςγῆς·)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마태오 복음이 설정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의 식을 가리킵니다. 마태오 복음은 제자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소금 이고 빛’입니다. 소금과 빛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스스로를 녹여 음식 속으로 스며들고, 빛 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며 길을 밝힙니다. 제자의 삶도 그러합니다.

소금이 소금다움을 잃고, 빛이 숨겨지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 기이한 일이지요. ‘맛을 잃다’로 번역된 ‘모란테(μωρανθῇ)’ 는 ‘어리석어지다, 무감각해지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비유의 힘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본성에서 이탈한 존재가 풍기는 어색함에 있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그 어긋남이 주는 낯섦은 곧 어리석음으로, 그리고 배척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은 무엇을 더 소유하고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받은 정체성을 배반하지 않고 살아내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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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해질녘, 부부가 하루 일을 마치고 두 손 모아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림이 생각나십니까? 밀레의 ‘만종’입니다. 밀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그림이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난에 쪼들렸던 화가였던 것입니다.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친구가 찾아와 “자네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라면서 3백 프랑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그에게 그 돈은 더할나위없이 귀했고, 무엇보다 자기 그림이 드디어 인정받았다면서 자부심과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림에 더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후, 그의 작품은 화단의 호평을 받으며 비싼 가격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그림을 팔아줬던 친구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집에 3백 프랑에 팔렸다는 자기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직접 사준 것임을 이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우정과 배려가 지금의 밀레가 있게끔 해준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커다란 변화를 불러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이 별것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자기가 받을 사랑에만 집중하고, 자기 이익에 중심을 둡니다. 이때 과연 변화가 가능할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다’라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정하신 것입니다. 소금의 기능은 첫째, 부패 방지입니다. 당시에는 냉장 시설이 없었기에 음식의 부패를 막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이처럼 죄와 타락으로 부패해 가는 세상 속에서 영적인 방부제 역할을 하라고 하십니다.

둘째, 맛을 내는 기능입니다. 소금 없는 음식이 과연 맛있을까요? 이처럼 무미건조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복음의 기쁨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은 정화와 계약입니다. 구약에서 소금은 제물을 정화하는 데 사용했고, 변하지 않는 약속을 상징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이어지는 빛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빛의 본질은 드러남과 다른 사람을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등경 위의 등불처럼 우리의 신앙이 나만을 위한 위안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이웃을 비추기 위한 봉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로써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는 것‘(이사 58,8)입니다.

나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주변 사람들에게 살맛을 줄까요? 아니면 상처를 줄까요? 살맛을 주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진정한 변화가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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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마태오 5,13)

소금이 제 맛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땅히 되거나 해야 할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처지에 따라 주님의 음성을 들지 못하고,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신앙인이 제 맛을 잃으면, 사랑과 진리와 정의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고, 현실을 쫒으며 진리를 저버리게 됩니다. 주님께 맛을 들이기보다 현실의 달콤함에 젖어 살기에, 하늘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입니다.

정치인이 제 맛을 잃으면, 국민의 봉사자가 되지 못하고 당리당략이나 사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봉사하기보다 권력을 휘두르기에 올바른 정치권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입니다.

경제인이 제 맛을 잃으면, 이윤을 사회로 환원하는 기업 윤리를 실천하기보다, 폭리를 취하며 쌓으며 기업의 몸집만 불리는데 급급합니다. 나눔도 없이 쌓기만 하는 기업은 올바른 자본주의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입니다.

제각기 아름다운 맛을 지닌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소임을 하면서 그 맛을 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요리하시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이 세상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우리의 맛은 주님께서 맡겨주신 소임을 통하여 우러납니다. 아직도 충분히 짠 소금으로서 세상에서 진한 맛과 향을 내지 못하는 나는 아직도 주님의 입맛에는 많이 싱거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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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산에서 당신의 참행복 선언에 귀 기울이던 군중을, 예수님은 직접 너희라고 친근하게 부르시며, 당신 때문에 세상 사람들한테 모욕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전과 달리 소금은 값싸고 흔한 것이지만,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재료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물도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소금이 없으면 쓸모없어져 버려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처럼 느끼지만, 인간의 생명과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고, 빛이 있어야 살 수 있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밝히고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을 따뜻이 녹이는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5,13. 14) 우리는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너무나 잘 알려진 표현이지만, 성서에 등장하는 오직 한 사람, 롯의 아내는 모르면서 그런 말 하지도 말라, 고 신신당부할 것입니다. 롯의 아내인 그녀는 천사의 다짐을 듣고도 호기심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되돌아본 순간 진짜 100% 소금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서는 그녀에게 진짜 소금이 되어서 좋겠습니다, 고 부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소금만 놓고 본다면 그만큼 쓸모없고, 다루기 힘들고, 식용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소금 그 자체로만 본다면, 좋은 것 혹 유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파 굶어 죽더라도 소금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갈증으로 목이 타더라도 소금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상황은 더 악화될 뿐입니다. 이렇게 소금 그 자체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소금은 땅을 불모지로 만듭니다. 소금은 생명을 앗아갑니다.

오늘의 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지적하신 대로, 소금은 다른 것과 섞였을 때만이 비로소 유익하게 쓰입니다. 우리는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섞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과 섞여야만 합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고 생각하거나 말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작 인간사의 요리 냄비에 던져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인간사의 냄비에 홀로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그런 인간사의 냄비, 세상 속에 더불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냄비,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만 하고 섞여야만 합니다. 이들은 소금처럼 다른 음식 재료와 함께 섞어지며, 실제로 녹아 없어져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럼으로써 가장 훌륭한 맛, 입에 꼭 들어맞는 맛을 내어야 합니다. 이처럼 소금은 다른 것과 섞이고 녹아 없어질 때 자신이 가진 고유한 짠맛으로 음식의 부패나 변질을 막고, 음식에 맛을 내듯이 우리 또한 냄비 곧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소금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역할 곧 제맛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냄비나 용기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때 소금이 소금다워지듯이, 세상의 소금인 우리 역시도 언제나 세상 속, 세상이란 용기 속에서만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제자들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제자들인 우리가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듣고도,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한테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복음의 맛을 전해 주지 못하는 제자들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혼란과 박해를 조금만 받아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 안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참된 존재 이유와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아 그 위에 삶의 토대를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소금이 됩니다. 세상에 비전을 주고, 변화된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언젠가 어느 수녀님이 제게 보낸 메일에서, 신부님은 아직도 소금의 짠맛을 잃지 않았습니까?, 라고 했던 질문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이 질문이 늘 저 다운 삶을, 제 존재 이유를 환기해 주는 화두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땅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맛을 내는 사람, 맛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예수께서는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처럼 자신은 죽어가면서 세상 안으로 스며 들어갈 때, 제자들은 비로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자기네가 세상의 빛이라고 외쳐 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됫박으로 등불을 덮어버리거나 아예 불빛을 가로막고 있음에도 자신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사실 빛이 소중하지만, 빛만으로는 역시 쓸모없습니다. 빛만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빛만으로 여러분은 사물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빛만으로는 잘못을 캐내기 위해 고문당하는 이의 눈앞에 일부러 들이대는 전기 불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빛만으로는 해롭습니다. 빛은 그 자체보다 다른 사물을,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보게 할 때 유용합니다. 빛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상응할 때, 우리를 통해서 유익하게 쓰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는 사물을 실재, 어둠이나 상처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필요한 조치가 어떤 것인지 비추어야 하며, 이 세상을 진리와 정의로 밝게 비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요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활초를 통해서 빛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시오!”

우리는 소금이 되어야 하지만, 섞이지 않는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하지만, 비추지 않는 빛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행동한다면, 그때 우리는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될 터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저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 삶의 성공 여부가 예수님과의 내밀한 일치 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 15,5)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써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실천하는 착한 행실로써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런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찬양받게 됩니다. 착한 행실은 인간적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착한 행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착한 행실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뜻, 그분이 원하시는 것에 완전히 열려 있어야 하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58장 7절과 10절 그리고 화답송인 시편 112편은 우리한테 하느님 뜻에 따라 일상을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자인 하느님을 닮아가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줍니다. 그들은 언제, 얼마만큼의 수확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눈물로 뿌린 씨앗을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희망으로 사방에 씨앗을 뿌립니다. 이 의인들한테서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 자비의 빛이 흘러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하느님의 의로움과 자비를 드러내는 착한 행실을 통해, 그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서 어두운 세상 안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기록된 성경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강조한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무상으로 베풀어진 사랑의 선포이며,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포이고, 그 나약하고 무기력한 행위로부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1코 2,4참조) 세상에 증거해야 할 가장 큰 빛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자신들의 삶으로써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 산 위에 있는 마을과 같이, 온 집안의 식구들을 비추는 등경 위에 놓여있는 등불과 같이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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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착한 행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나오리라.”(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입니까?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 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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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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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초대에 응할 것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오늘 이 말씀은 참으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선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도 그렇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과 오늘 마태오복음을 연결하여 보면 세상의 빛이신 당신을 따라 세상의 빛이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제 관건은 우리가 그 초대에 응할 것이냐 그것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느냐 그것을 보겠는데 사실 우리는 빛이 아니고 그러니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빛이 아니고 빛이신 주님 안에 있을 때만 또는 빛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실 때만 빛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어둡다면 왜 어두운지 그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안 계신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내가 세상의 빛이 못 되는 이유도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은 데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관건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 초대에 응할 것이냐?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까? 거부하거나 사양하겠습니까? 거부하거나 사양한다면 왜 거부하고 왜 사양합니까?

거북하니까 거부합니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거북하지요.

내가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밝힌다고 하는데 실은 나의 어둠이 오히려 세상에 드러나기가 십상이지요.

근자에 많이 봤듯이 그냥 보통 사람으로 있었으면 드러나지 않을 것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오르려 하면 백일하에 다 드러나 망신당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다 드러나고 이목이 쏠리는 것이기에 거북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엄청난 초대에 응하려면 그만큼 큰 사랑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큰 사랑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내 좋을 대로 하는 작은 사랑을 합니다. 좋을 대로 하다가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어둠 속에 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아(小我)를 깨고 진아(眞我)를 찾아 나서야 하고,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벗어나 생명의 빛을 향하여 과감히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이고 이것이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큰 사랑입니다.

그다음에야 하느님 사랑 까닭에 그리고 이웃 사랑 까닭에 세상의 빛이 됩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세상의 빛이 되려다 내 어둠이 드러나 망신당하기도 하고, 나의 사랑과 선행이 하느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보다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거룩히 빛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나려는 위험도 있지만 내 욕심보다 사랑을 더 크게 함으로써 오직 사랑 까닭에 세상의 빛이 되는 겁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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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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