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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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해설자 + 예수님 ● 다른 한 사람 ▣ 다른 몇몇 사람 ◎ 군중
○ 마태오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27,11-54
그때에 11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총독이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2 ○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3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14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15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16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17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18 ○ 빌라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20 ○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21 총독이 그들에게 물었다.
●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 군중이 대답하였다.
◎ “바라빠요.”
22 ○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 군중이 모두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23 ○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24 ○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25 ○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26 ○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27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28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29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며 조롱하였다.
▣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30 ○ 군사들은 또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31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33 이윽고 골고타 곧 ‘해골 터’라는 곳에 이르렀다.
34 그들이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라고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맛을 보시고서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35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36 거기에 앉아 예수님을 지켰다.
37 그들은 또 그분의 머리 위에 죄명을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고 쓰여 있었다.
38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39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40 이렇게 말하였다.
▣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41 ○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42 ▣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43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44 ○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45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47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48 ○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게 하였다.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말하였다.
▣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50 ○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51 ○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53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54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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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 나오는 ‘은돈 서른 닢’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몸값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을 노예의 몸값으로 쳐서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돈을 주었던 것입니다. 수난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처지가 되셔서 죄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의 눈물입니다. 죄를 짓고 뉘우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신앙인의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바라빠 대신 예수님을 처형하라는 군중의 모습도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기쁨의 나뭇가지를 흔들며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야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른 체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등을 돌리면서 십자가의 아픔과 고독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그분을 배반하는 행렬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한없는 사랑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우리에게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성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물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은총의 눈물로 변화하여 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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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유다 입장에서
– 시몬 입장
– 빌라도 입장
2. 유다처럼 내 안에 우상과 같은 존재가 나를 지배한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말로는 “주님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내 안에 어떤 우상들이 나를 주님으로 부터 멀게 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키레네 사람 시몬은 우연치 않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나는 우연히 내게 맡겨진 하느님의 일에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 이야기 해보고 앞으로 그런 우연한 기회가 나에게 온다면 어떻게 응답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군중과 빌라도처럼 분위기에 휩쓸려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신앙적인 진리와 정의는 무엇이며 나는 신앙적인 진리와 정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5.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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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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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天子)가 공을 세운 제후들에게 베푸는 아홉 가지 특전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제후의 권위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첫째 금수레를 타는 것, 둘째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는 것, 셋째 옷깃에 옥을 달아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나게 하는 것, 넷째 거처하는 집에 붉은 칠을 하는 것, 다섯째 천자가 거처하는 궁에 신을 신고 출입하는 것, 여섯째 삼백 명의 특별 친위대를 거느리는 것, 일곱째 금도끼, 은도끼를 들어 왕의 의장을 갖추는 것, 여덟째 붉은 활 한 벌에 화살 열 대, 검은 활 열 벌에 화살 천 대를 가지고 있는 것, 마지막으로 아홉째 검은 수수로 빚은 향기로운 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구석’(九錫)이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이스라엘 군중에게 임금이셨습니다. 중국의 제후처럼 ‘구석’을 온전히 갖추시지는 못하셨지만, 금수레 대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때처럼 지금 우리도 나뭇가지를 들고 행렬을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행렬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환호하는 것입니까?
고통을 이겨 내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희망과 한 몸처럼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 없이는 참희망이 없으며, 희망 없이는 어떤 고통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주간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영광의 희망”(콜로 1,27)이 되셨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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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1hdjj0DjOEM
[천주교 사도직회(팔로티회)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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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고통에만 너무 깊이 함몰되지 맙시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맞아 수난 복음을 읽고 또 읽습니다. 젊은 시절 저는 무기력한 사형수가 되셔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왕이면 속 시원하게 적대자들 싹 쓸어버리시며 공생활을 완수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활 기간 때 하신 사도직보다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의미 있는 사도직을 십자가 위에서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상칠언이라고 하는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곱 말씀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엄청난 사도직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상칠언 7마디를 순차적으로 나열해보니 이렇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6-27)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56)
“목마르다.”(요한 19,28)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돌아가시면서도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사도직을 실천하셨다면, 그분의 제자인 우리 역시 극심한 고통, 이해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그분처럼 사도직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반드시 예수님께서 체험하셨던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위 체험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괴롭다, 죽겠다, 할 것이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도 할 수 있는 그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언젠가 우리 모두는 더 나이가 들고, 병고가 찾아오고, 반드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입니다. 응급실도 들어가고 수술실도 들어가고, 호스피스 병동에도 들어갔다가, 임종방을 거쳐 하느님께로 건너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가상칠언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용기있는 모습을 떠올려야 합니다. 환자로 병실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힘들다, 불편하다 짜증 내지 말고 환하게 웃으면서 돌봐주시는 의료인들, 간병인들, 보호자들에게 환한 미소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그들을 위해 하루 종일 묵주를 돌려야 할 것입니다. 내 고통도 극심하지만 나보다 더 큰 고통 겪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고통을 기쁘게 견뎌내며, 내 고통을 예수님의 고통에 일치시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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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TkuBcwI8zA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당신 곁에 교만한 사람이 많다면 당신이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며 가장 거룩한 주간인 성주간의 문을 엽니다. 오늘 전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방금 전까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며 환호하던 군중의 함성이, 잠시 후 수난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서슬 퍼런 증오의 비명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이 변덕스러운 군중을 비난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장면의 본질은 군중의 변덕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택하신 ‘입성의 방식’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정복자가
아니라,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
왜 하느님이신 그분은 이토록 낮은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질병인 ‘교만’을 치료할 유일한 약이 오직 ‘겸손’뿐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믿는 병이고, 겸손은 나귀를 타고 상대의 발밑으로 내려가는 십자가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만 우리는 타인의 자아라는 더러운 겉옷을 벗길 수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단단한 바위는 정으로 때려 부수려 할수록 더 강하게 저항합니다. 타인의 교만을 꺾어보겠다고 논리로 이기려 하거나 힘으로 누르려 하면, 상대의 자아는 더 단단한 갑옷을 입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그 바위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고대 지혜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오만한 왕이 자신의 행차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왕은 병사들에게 명하여 칼과 도끼로 바위를 내리치게 했지만, 칼날만 부러질 뿐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좌절하고 있을 때 한 현자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대왕이여, 바위를 때리지 마시고 그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십시오.”
현자는 바위틈과 그 주변 흙 밑으로 끊임없이 물을 흘려보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물은 바위를 지탱하던 바닥의 흙을 야금야금 깎아내며 바위 밑으로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결국 바닥이 허물어지자, 그 거대한 바위는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굴러떨어졌습니다.
겸손은 이 물과 같습니다. 상대의 자존심 밑으로 흐르며 그 마음의 뿌리를 적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귀를 타고 상대의 발밑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상대의 완고한 교만은 쓸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 겸손의 위대함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바로 옆에서도 얼마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빈민가 학교에 부임한 레비 소프(Levi Thorpe) 교사의 실화는 더 구체적인 감동을 줍니다. 그의 반에는 ‘짐승’이라 불리는 열 살 소년 케빈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욕설을 입에 달고 살았고, 친구들을 때리는 것은 물론 선생님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징계와 체벌은 아이를 더 난폭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소프 선생은 방식을 바꿨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교실 문 앞에 서서 케빈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타나면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케빈의 풀린 신발 끈을 직접 묶어주었습니다. 아이는 처음엔 “더러운 손 대지 마!”라며 선생님의 어깨를 발로 찼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의 발치로 내려갔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도 선생님이 신발 끈을 묶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자, 케빈이 갑자기 선생님의 목을 껴안고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한 번도 누가 제 발 앞에 무릎을 꿇어준 적이 없었어요. 저 같은 놈도 사랑받을 수 있나요?” 겸손이 거울이 되어 케빈의 난폭함 속에 숨겨진 상처와 교만을 비추었을 때,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더러운 겉옷을 벗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출처: 시카고 트리뷴 교육 칼럼, 미담 재구성)
성인들의 삶은 당연히 겸손의 삶입니다. 겸손의 삶이 십자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르스의 성 요한 비안네 신부님을 시기한 한 신부가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습니다. “비안네, 당신은 신학 지식도 부족하고 교회의 수치다.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거나 분노했겠지만, 비안네 성인은 고해소의 낮은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장을 썼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당신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사실 저는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무식한 죄인입니다. 저처럼 부족한 자를 참아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저의 실체를 일깨워 주신 형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겸손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부끄럽습니다. 이 답장을 받은 신부는 전율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압도적인 겸손’이 거울이 되어,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추악한 시기와 교만을 적나라하게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부님을 찾아와 발치에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겸손 앞에서 제가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보았습니다.” 겸손이라는 거울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이 교만한 줄도 모르고 날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발밑으로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그 거울이 되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출처: 프란치스코 트로슈, 『아르스의 성자 요한 마리아 비안네』)
나의 겸손으로 타인의 교만이 죽는다면, 그렇게 나의 나귀 밑에 그들의 겉옷이 깔린다고 무엇이 좋을까요?
내가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 26,33) 이것은 자기를 믿는 극도의 교만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말싸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무릎을 꿇고 그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의 교만 앞에서 겸손의 거울을 들이대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닭이 울었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수님의 그 눈길과 마주칩니다. 그때 베드로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단죄하는 판사의 눈이 아니라, 발을 씻어주던 그 겸손한 스승의 눈이었습니다. 그 겸손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추악하고 나약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거울 때문에 무너져 내렸고,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그 통곡의 눈물이 베드로의 교만했던 겉옷을 다 적셔 벗겨내었고, 그는 비로소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순종으로 그런 겸손한 제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겸손해질 때, 우리는 단순히 십자가를 참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자’가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이렇게 명확히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게 되신 것은 여러분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으나, 그 길은 오직 주님이 걸으신 겸손의 길뿐입니다.” (St. Augustine, Enarrationes in Psalmos, 118, 15).
또한 그는 강조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입니다. 그 건물이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기초가 겸손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Sermo 69, 2).
이번 성주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나귀를 타고 낮은 곳으로 내려갑시다. 이웃의 신발 끈을 풀고 발을 씻어줍시다. 내 자아를 꺾어 타인을 살리고, 원수를 친구로 바꾸는 이 겸손의 신비가 바로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부활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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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작년까지는 저녁 미사만 있었습니다. 구역장 회의에서 두 번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윤 신부님, 수녀님들과 의논하였고, 올해부터 미사를 두 번 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택이었습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많은 분이 함께하셨습니다. 저도 재를 이마에 받고, 하루 종일 다녔습니다. 이마에 받은 재가 마치 ‘훈장’ 같았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윤 신부님은 성경 통독 40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고 선택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택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선택의 연속입니다. 토인비는 이를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선택은 그 기준이 ‘나’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 나에게 영광이 되는 방향, 나에게 기쁨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모든 생명은 이런 흐름에 따라서 진화하였습니다.
신앙인에게 또 다른 선택이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 선택을 ‘식별(discernment)’이라고 합니다.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다.” 신앙의 길은 ‘식별’의 길과 같습니다. 노아는 남들이 먹고 노는 동안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100세가 넘어 낳은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려고 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고 요르단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그리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수산나는 치욕스럽게 사느니 죽음을 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보내셔서 수산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 성지 주일에서 우리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 선택한 사람들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식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빌라도, 헤로데, 대사제, 율법 학자는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외쳤던 군중은 태도가 돌변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고 가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습니다. 3년이나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도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 보다는 저의 이익을 위해 선택하곤 했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기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기보다는 남에게 넘기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는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식별했던 사람의 이야기도 많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성모님은 예수님 고난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넘어지셨던 예수님은 잠시 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드렸던 베로니카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슬픔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 예수님의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 죽었다 살아났던 소녀의 아버지,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았던 이방인이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고 새 삶을 찾았던 여인,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던 십자가 위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 있었는지,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함께 있었는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나 역시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함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편에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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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안동교구 김재형 베드로 신부님]
오늘 전 세계의 성당에서는 신자들이 푸른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며 행렬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순간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당시 군중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줄 새로운 임금께서 오신다고 믿으며 열광하였지만, 그 환호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깊은 근심에 잠겨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이유는 “호산나!”를 외치던 이들이 곧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칠 것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마주한다면 그분께서는 어떤 표정이실까요?
기도 안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삶에서는 내 뜻을 앞세우고, 성당 안에서와 밖에서 모습이 다를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알면서도 미워하고 질투하며, 내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우리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몰랐기에 배반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분을 알면서도 때로 외면합니다.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주간은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하며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깊이 체험하는 때이며, 십자가 희생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또한 부활을 준비하는 영적 정화의 기간으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욕심을 비우며 마음을 새롭게 하여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도록 초대받는 때입니다. 이번 한 주간만큼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냅시다. 우리의 작지만 진실한 실천으로, “호산나!”의 외침이 주님 마음에 참된 기쁨으로 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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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6,14-27,66: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자유와 사랑”
1. 자유로이 선택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아버지,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26,39)라고 기도하신다. 이는 강요된 체념이 아니라, 아버지 뜻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의 응답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순종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그분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죽음은 그분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26,4)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죽기까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리 2,6-8) 예수님의 자유와 순명은 인류 구원의 길을 열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뜻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때 참된 생명과 영광에 들어간다.
2. 무죄하심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죄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무죄를 분명히 드러낸다. 빌라도의 아내는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27,19)라고 하고,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유다는 탐욕으로, 베드로는 두려움으로, 제자들은 안일함으로 스승을 떠난다.(26,14-26,56)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제자들의 배반을 두고 이렇게 주석한다. “주님은 제자들이 떠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택하셨다. 이는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당신의 은총이 더 크게 드러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Homiliae in Ioannem 82) 즉, 인간의 죄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 안의 연약함조차도 은총을 드러내는 자리가 될 수 있다.
3. 수난 이야기의 교훈
성 아우구스티노는 십자가를 가리켜 말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이자, 동시에 그분의 학교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이 사랑인지를 배운다.”(Sermo 218,3) 예수님은 자유롭게 십자가를 택하셨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따라서 수난 복음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자유와 사랑을 선택하도록 초대한다.
4. 성주간과 부활을 향한 삶
성주간은 우리를 다음과 같이 초대한다. 즉, 자유로운 의지로 매일 하느님을 선택하며, 제자들의 나약함을 거울삼아 내 삶을 성찰하고, 주님의 고통과 승리를 묵상하며, 부활의 기쁨을 세상과 나누는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주간의 의미를 요약하며 이렇게 권고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과 함께 고난을 나누어야 한다.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고는,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0,112)
5. 맺음말
성지주일은 단순히 예수님의 과거 수난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자유롭게 순명하며,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는 날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참된 해방과 부활의 생명을 준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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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마태오 21,1-11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태오 26,14-27,66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믿음의 길과 배신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순명의 길과 거역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진리의 길과 거짓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순결의 길과 음모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겸손의 길과 교만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비움의 길과 탐욕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베풂의 길과 착취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섬김의 길과 억압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인내의 길과 회피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용맹의 길과 비겁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결백의 길과 오욕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영광의 길과 수치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평화의 길과 폭력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찬미의 길과 모독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희망의 길과 절망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사랑의 길과 증오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포용의 길과 배척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존중의 길과 혐오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살림의 길과 죽임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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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 곁의 어린 나귀를 곧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어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을 곧 보내 줄 것이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자,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군중이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1,1-11)>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시간적인 순서만 보면 ‘십자가 수난’의 ‘서막’과 같은 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과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이, 즉 지명수배령이 내려진 일이 먼저 있었고(요한 11,53.57),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입성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의 의미를 생각하면,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 수난의 결과를 미리 보여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뒤에 부활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뒤에 승천과 성령강림이 있고, 언젠가는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그 재림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즉 승리자로서 개선 행진을 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마태 17,1-2), 승천 후의 예수님의 모습, 또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뒤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지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 뒤를 잘 따르자고 새롭게 다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잘 따르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노력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미 알고 있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입니다. 정답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 풀이 과정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해도, 정답을 이미 잘 알고 있다면,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신앙생활입니다.
2) 8절에 있는 ‘수많은 군중’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라,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고(요한 12,12), 대부분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카복음에는 ‘수많은 군중’이라는 말은 없고, ‘제자들의 무리’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9,37)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행렬을 구경하기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절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라는 말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입성 행렬을 함께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그 일은 실제로는 작은 규모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최고의회가 지명수배령을 내린 상황에서, 지명 수배된 인물이 그렇게 공공연하게 행렬을 하면 성전 경비병들이 바로 출동했을 텐데, 당시에 최고의회 쪽의 반응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인 빌라도 쪽의 반응도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작은 규모의 일이었고, 제자들과 신자들을 위한 일종의 시청각 교육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을 따르면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금방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예수님의 재판 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군중이 같은 군중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몇 명 정도는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주로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지만, 재판 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은 최고의회가 동원한 사람들, 또는 최고의회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었고(마태 27,20), 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변절한 사람들이 아니라 ‘구경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멀찍이 떨어져서 그 일을 구경만 한 사람들, 바로 그런 ‘구경꾼들’이 구원사업에서는 반대자들만큼이나 ‘큰 걸림돌’이 됩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 습관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 근처까지는 가겠지만, ‘안’에는 못 들어가고 ‘밖’에서 구경만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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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까지 사랑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신다. 우리도 한결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은총을 희망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게 하셨다. 그리고 군중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그들은 “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9) 하고 외쳤다.
옷을 길바닥에 깔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이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이다.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주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23)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조롱하며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마태 27,29)를 외쳤다. 그야말로 ‘감탄고토’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이다.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베드로의 모습은 어떤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 26,31) 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마태 26,33) 이라 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루카 22,33)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다.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였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하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진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면서도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침묵할 수 있을까? 상대를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 줄 수 있을까?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네.”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말씀을 행하는 데 있어서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쓰더라도 뱉지 않고 기꺼이 마실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한다. 성모님 삶의 여정을 보면, 나약함과 비참함, 예기치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셨고, 희망을 놓지 않으셨다. 그래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시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다.
성모님의 놀라움은 성모님의 신앙이 변함없이 살아 있었다는 데 있다. 성모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우리도 어떠한 처지, 환경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주님,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받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를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지켜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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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동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성지 주일입니다. 성지 주일 하면 먼저 본당에서 나뭇가지 축복 전이 가지들을 준비하기 위해서 애쓰시는 신자분들이 생각납니다. 우리나라는 기후 특성상 종려나무 잎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편백나무를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다른 신자분들은 어떤 가지가 이쁘고 잘 생겼나를 고르면서 축복된 가지를 가져가시지만 이 가지들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산에서 나뭇가지를 잘라 와 물에 몇 번이고 씻고 먼지와 때를 빼어 물기를 말려서 신자분들이 집에 가져갈 수 있도록 지극 정성으로 준비해 주십니다.
먼저 해마다 그런 준비를 해 주시면서 기쁨으로 그 일을 해 주시는 본당의 봉사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날은 같은 날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Passion Sunday, Palm Sunday.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 의미는 같이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군중이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며 환호했던 일을 기념합니다. 전례 안에서는 그러한 뜻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으로 환영한다는 상징적 행위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을 거행합니다. 여기에 평화와 희망, 생명,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잎(편백나무-푸른잎)을 사용합니다.
다음으로는 성금요일의 준비로,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에서 유래한 성지 주일은 성주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특히 파스카의 성삼일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신앙의 가장 거룩하고 뜻깊은 시기에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중세 때 성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담긴 신비, 즉 구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고통과 감상적인 연민을 강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측면과 죽음에 대한 승리, 부활의 의미들이 희석되기도 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의미는 단순히 성지(가지)에 있지 않고 왕권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받아들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한 구원의 은총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안에서 부각되어야 합니다.”(그리스도와의 만남 미사, 조학균 신부)
우리가 이러한 신앙의 의미들을 잊지 않을 때 우리가 축복을 청하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저희 믿음을 굳세게 하시어 오늘 이 나뭇가지로 그리스도의 승리에 환호하는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선행의 결실을 바치게 해달라”는 교회의 기도를 살게 됩니다. 또한 그러한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축복된 가지를 십자가 뒤에 같이 걸어놓을 때 성지는 승리의 표지가 됩니다. 예쁜 가지 고르지 말고 주님의 승리, 그분의 겸손함 속에서 이룬 승리를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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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슬픔과 불사의 영약 및 기쁨의 기름 사이 행렬로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주간의 문을 여는 오늘 교회가 거행하는 성지 주일 예식은 한 편으로는 성삼일의 신비를,.다른 한 편으로는 사순 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을 상기시킨다.
우선 복음 선포 방식에 있어 그러하다. 통상적으로 복음은 사제에 의해 구두로만 선포된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와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에서만 복음이 ‘그저’ 구두로 선포되는 게 아니라, 예식에 참여하는 백성의 구체적 ‘제스처’를 통해 시각적으로 선명히 재현된다.
이집트에서 ‘종 짓’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탈출의 명분이자 시작이며 목적이‘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히브리어로 예배는 ‘아보다’, 곧 ‘종 짓’이다)’ 광야로 나가는 것이었다면(탈출 7,16; 8,23), 이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자 대사제이신 주님께서는 백성을 치유하고 해방할 십자가상의 제사를 위해 도성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어 종의 형상을 취하신다.(필리 2,7)
군마 대신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즈카 9,9)을 차치하고서라도, 제자들과 마 지막 만찬을 드실 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이후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시어 피땀을 흘리시며 밤새워 혼자 기도하신다. 자고 있던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ㄴ)라는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만찬 미사 후 성체 조배하는 관습이 생겼다. 발 씻김 예식뿐 아니라 성체 조배 역시 그대로 재현된다.
재의 수요일에서도 창세기 말씀을 통해 인간이 흙에서 왔으며 다시 먼지로 돌아갈 것(3,19)이라 선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백성의 이마에 재를 얹는다. 이렇듯 재현된 예식에 등장하는 질료 역시.성지 주일 예식과 사순 시기 시작과 정점 사이의 연관성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해 흔들었던 그 가지들을 태운 재를 재의 수요일에 사용하는 관습이 그러하다. 주님을 찬미하는 데 사용된 질료가 바로 우리 실존의 비참함 및 덧없음과 맞닿아 있다.
실존적 치유가 절실하다. ‘치유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테라페우에인(여기서 ‘테 라피’라는 말이 나온다)’의 원래 의미는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진정한 치유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와 맞닿아 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시자 진정한 치유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불사의 영약(그리스어로 ‘파르마티콘 아타나시아스’)인 성체 축성이 만찬 미사에서 기인한다.
기쁨과 치유의 기름을 성목요일 오전에 축성하는 관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로마의 황제 방문 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쳤던 문구에서 자비는 그리스어로 ‘엘레오스’이며 기름은 ‘엘라이온’으로 어근이 같다. 치유라는 주님 자비를 입기 위해 기름이 필요하다. 씻김을 통해 죄와 악으로부터 치유와 해방이 가능했다면, 불사의 영약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기쁨이 도유로서 드러나야 한다.
“당신의 하느님께서 기쁨의 기름을 당신 동료들에 앞서 당신에게 부어 주셨습니다.”(시편 45,8) 성지 주일 행렬 시 백성의 환호는 이러한 기쁨을 미리 선취하며, 이는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주님께 큰 기쁨으로 감사와 찬미 드리며, 자신의 비참함 역시 기억하는 성지 주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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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정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다시 보게, 눈을 뜨게>
사순절의 막바지에 배치된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부터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거행하는 한 주간은 교회 전례의 중심을 이루는 거룩한 주간이라고 하여 ‘성주간’이라 부릅니다.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기념하며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복음은“온 도성이 술렁”(마태 21,10)거린다고 전하며 또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마태 21,8)고 전합니다.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면이지만, 교회는 이 입성을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으로 보고 미사 중에는 긴 수난기를 봉독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시아의 환영과 메시아의 수난을 동시에 전하는 이 주일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라고 표현합니다.
공관(共觀) 복음은 의도적으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예리코의 눈먼 사람 ’(마태 20,29-34; 마르 10,46-52; 루카 18,35-43) 이야기를 배치하면서, 이 눈먼 사람의 입을 통하여 성주간에 일어날 일을 “다시 볼 수 있게”(마르 10,51; 루카 10,41) 혹은 “눈을 뜨게”(마태 20,33) 해 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성주간에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이 주님이 죽어서 슬펐다가, 다시 부활해서 기쁜 ‘조울증’의 증상으로 드러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최후의 계시’가 무엇인지 성찰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존이 중심이 되어 전쟁마저 불사하는 오늘, 사랑 때문에 죄인들의 발을 씻기며 자신의 몸을 내어 주는 것이나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고통받는 사랑’이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성주간을 지내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특별한 은총으로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이 은총은 성주간의 전례를 거행하는 것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이의 발을 씻으며, 그분과 함께 자신을 내어주는 삶, 곧 자발적인 ‘고통받는 사랑’으로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수난과 영광의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그분과 함께 들어갑시다. 이곳에서 그분이 겪은 마지막 유혹과 갈등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신앙’을 간직하는 거룩한 성주간이 되길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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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이 1866년에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소설을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현대인의 성격 분열로 인한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룬 소설이지요. 런던에 사는 지킬 박사는 학식과 인품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어느 날 먹으면 도덕심이 없는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하이드)으로 변신하는 약을 발명합니다. 선과 악의 두 성질이 한 인간에게 공존하는 것이 불행의 근원이라 생각한 박사는 그 한쪽만을 빼낸 것입니다. 그런데 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거듭되는 동안 약을 쓰지 않아도 하이드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고, 마침내 영원히 지킬 박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현대인의 성격 분열과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오늘날 지킬과 하이드는 이중인격을 나타내는 관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수난과 성지 주일이라는 이중적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늘 주일 전례의 독서와 수난사에는 예수님과 사람들의 상충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는 우리를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 이끌어 주는 긴 이야기입니다. 수난사화에는 예수님의 태도와 각 인간 군상의 응답이 아주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여러 작은 그림들이 모여 큰 그림을 완성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특히 유다,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 예수님과 빌라도, 예수님과 군중들, 예수님과 군인들, 예수님과 조롱하는 사람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야기가 진전되어 갈수록 비하와 모욕이 심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롱하는 자들에게서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그와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은 철저한 침묵으로 그 중심에 홀로 서 계십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혼란스럽고 소란한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 나온 여러 부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류는 군중들이며 그들의 상반된 반응이 충격적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의 군중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열열한 모습이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군중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 흥분하였겠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행하시리라 기대하였고 설렘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표징에 호기심을 지니고 기웃거리는 군중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흥분한 군중들의 기대와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군중들과의 상반된 태도는 이미 고향 마을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었다고 봅니다. 그토록 열렬히 환영하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다구니를 쏟아냅니다. 하이드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군중의 모습입니다. 불과 닷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은 이젠 완전히 악의 집단으로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열광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는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변덕맞음과 배은망덕이라니.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도 군중들의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감추기 위해 호기심 많고 변덕스러운 군중들을 도구로 삼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야심을 이루려 했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군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군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음흉한 정치인들과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왔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한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하느님 앞에 인격적인 만남과 그 만남에 따른 체험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신앙은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하고, 내일은 주님을 배신했던 군중들, 확신 없는 신앙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껍데기를 덮어쓴 채 몰려다니는 군중 속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인격적으로 서 있지 않고, 변덕스러운 군중 속에 머무르는 한 2000년 전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이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공모자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여전히 저 군중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가 큰 만큼 극단적으로 그분의 용서와 사랑은 훨씬 넓고 길고 깊고 높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 겸허하게 나아간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반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군중이 아닌 나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고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었던 백인대장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 찾아야 할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27,54)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예수님이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에서 건져 주실 분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에서 깨어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죽음의 여의사’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이렇게 일깨웁니다.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합니다.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지 말라.’ 오늘 가장 값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군중들처럼 마치 죽지 않을 사람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까지 묵묵히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신비가 항상 우리 마음 한 가운데!”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을 때 비로소 그분의 부활에 초대받고 동참할 것입니다.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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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에게는 그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 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 주일입니다. 제1독서의 ‘야훼의 종의 셋째 노래’는 수난 주일의 특성을 드러내는 반면, 제2독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성지 주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들고 성당에 들어와, 동시에 예수님의 수난사를 듣습니다.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됩니다. 한편으로는 “호산나”를 환호하는 기쁨이 차오르고, 또 한편으로는 수난과 죽음으로 치닫는 비탄이 흐릅니다. 환영의 행렬은 곧바로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손을 흔들던 환호의 성지가지는 등을 내리치는 채찍으로 바뀝니다.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은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 등 위에 타셨던 분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그분은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에 따른 우리 주님의 수난기’입니다. 이 ‘수난사’는 “다윗의 자손 호산나”라고 외치는 군중의 환호로부터 시작되어, 바로 그 군중들이 외치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배신과 욕설로 마무리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님을 더욱더 처참하게 만듭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하룻밤 사이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가리옷 유다는 은전 서른 냥에 스승을 팔아넘겨버리고, 다른 제자들이 스승이 붙잡힐 때는 옷마저 벗어 던져버리며 달아나 버립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노리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리고 대제관은 서로 결탁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고, 예수님을 심문하고 박해하며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군중과 모든 적대세력들로부터 위협당하고, 내적으로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절대극명의 위기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