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복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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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사야 예언자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하고 예언하며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계시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유다인들의 불순종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퍼졌다는 역설적인 설명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교도 지역인 티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다가 어떤 가나안 부인의 절박한 소원을 듣게 됩니다. 그 어머니는 딸의 고통을 통해서 구세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외침을 주위 사람들이 무시하였으며 예수님마저 그 여인의 인내심과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이방인 여인은 구세주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며 딸의 치유를 끈질기게 간청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식탁의 빵 부스러기 같은 은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한 어머니의 커다란 믿음으로 딸이 악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보편적 자비와 사랑을 드러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믿음은 주님의 몸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경배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믿음은 마귀 들린 딸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고통과 속박이 클수록 좌절하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움을 갈구하게 됩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의 가나안 여인은 주님을 선택하였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온갖 비하와 소외감도 그녀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모든 고통을 이겨 내게 합니다. 믿음은 온갖 속박의 사슬을 끊어 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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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 활동 무대인 갈릴래아를 떠나시어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민족의 땅으로 가신 이유는 오늘 복음의 앞선 내용들을 짚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그 나라의 풍요로움을(마태 13,1-53; 14,13-21 참조)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과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기적을 통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마태 14,22-36 참조). 그리고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셨습니다(마태 15,1-20 참조).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갈릴래아에서 이민족의 땅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말을 해도 소용없고 기적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는 위선자들 앞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민족 가나안 여인이 도움을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기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외쳤던 ‘다윗의 자손’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일컫는 호칭이었습니다. 나탄 예언자가 하느님의 집을 지으려던 다윗 임금에게, 희망의 구원자가 바로 그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작에 이스라엘에게서 나왔어야 할 신앙 고백이 이민족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예수님의 칭찬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입술로만 공경하는 위선이 아닌, 강아지에 비유하며 무시하시려는 예수님께 ‘강아지처럼 주인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먹겠다.’ 하는 여인의 간절한 믿음은 그분 마음에 쏙 들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도 구원에 대한 희망과 참된 믿음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강아지가 주워 먹을 부스러기만큼의 믿음이라도,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희망의 틈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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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신앙생활을 하다 굴욕을 당하고 봉사활동을 그만두거나 갈등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지 이야기해봅시다.
3. 주님이 주신 “식탁의 빵 부스러기 같은 은총”에도 큰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많은 은총에도 주님께 불만을 표현한적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복음말씀과 묵상을 읽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려고 노력을 해야할지 서로에게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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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682
8월16일 [연중 제2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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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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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s9qGHVeNNY
[청주교구 김지석 안드레아(감곡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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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주님께 부르짖는다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은 강아지가 되어도 좋다며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며,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병에 들린 저를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겠노라며, 당신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사정사정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시며 병원 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머니를 봐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하는데…’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강아지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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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성경에서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는 것 같습니다.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사람, 직립 보행을 하는 사람, 하늘로 오르는 사람입니다.
이 구분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없는 가리옷 유다는 뱀과 같이 되었고, 아직 승천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은 믿음이 있었다가 없었다가를 반복하며, 완전한 믿음에 도달한 사람은 성모님처럼 하늘에서 삽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 안에 이 세 부류의 사람의 모습이 다 들어있습니다. 마귀 들린 딸과 함께 살 때가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겨 그리스도께 치유를 청하기 위해 나섰을 때는 믿음이 조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견뎌 기적을 얻어내었을 때는 하늘의 사람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비단 기적을 청하는 것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어보겠다고 나선 것이 소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뭣 때문에 고생하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물고기만 들고 나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명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찾아 소명을 완수하고 그 열매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분명 그 소명을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를 버리고 주님 앞에 다다랐을 때 그 십자가가 없으면 건널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편한가요?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편할까요? 어차피 우리 모두 이러나저러나 고생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소명을 찾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고생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믿음으로 사람을 나눈다면, 사람은 일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 시작만 하는 사람,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그러나 내가 시작한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좌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좌절을 선물하십니다. 일단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데도 들은 체도 안 하십니다.
그다음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며 사람을 차별하십니다.
그다음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시며 거의 멸시까지 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하며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 좋게만 끝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희 속담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말이 있습니다. 밥을 지으려다 실패하면 죽이 됩니다. 그러나 죽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일까요? 누구는 죽을 일부러 끓이기도 합니다. 죽만 파는 죽집도 있습니다. 죽도 잘 끓이면 멋진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란 말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원예연구소에서 ‘희귀한 흰색 금잔화의 씨를 보내시는 분께는 큰 사례 하겠습니다.’라는 광고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너무 커서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금잔화는 주황색이나 갈색뿐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흰색 금잔화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누구도 찾지 못했고, 그렇게 이 이야기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갔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한 봉투에 흰색 금잔화 씨가 보내졌습니다. 70대 할머니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50대에 이 광고를 보고 흰색 금잔화 만들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금잔화 씨를 뿌려 주황색과 갈색의 금잔화 중에 색이 가장 옅은 것들의 씨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뿌려 또 색이 옅은 것들의 씨만 모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20년 거치다 보니 흰색 금잔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전문 지식을 갖춘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한 보통 시골 할머니가 금잔화의 새로운 종을 만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웨이슈잉’의 『한 번이라도 끝까지 버텨본 적 있는가』라는 책에 소개된 일화입니다. 이 책의 앞표지에는 ‘승부는 폭발력이 아니라 버티는 힘에서 갈린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끝까지 버티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말합니다. “성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도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포기하기 때문이다.”
저는 요리를 못합니다. 하다못해 김치찌개도 끓이지 못합니다. 김치찌개를 생각하면 실패한 김치찌개의 모습부터 떠올리게 되니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김치찌개도 못 끓이지만 시도하고 끝까지 가면 김치찜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은 난독증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억력도 좋지 않습니다. 햄버거 가게에 알바로 취직하려고 해도 햄버거 종류를 다 외울 수 없어서 취직하지 못했습니다..다행히 카페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메뉴를 외우는 것도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몇 번을 그만두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끝까지 버텨서 지금은 원두 이름과 팥빙수 만드는 것만 배우면 커피숍을 단독으로 운영할 수 있는 모든 기술 배우기가 끝난다고 합니다.
수 없는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정신으로 가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미리 실패할 것을 생각하고, 미리 좌절할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가면 실패는 없습니다. 밥 아니면, 어쩌면 밥보다 더 맛있는 죽이 됩니다. 끝까지 가면 밥 아니면 죽이지만, 시작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겸손과 비례하는 이유는 겸손한 사람에게 그 믿음을 꺾을 두려움을 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행을 멈추었을 때는 생각하고, 생각했다면 실행하십시오. 그리고 실행했다면 반드시 끝까지 가 보십시오. 그러면 다음 것을 시작할 때 큰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적어도 죽을 끓일 수 있는 기술은 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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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마산교구 유청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을 강아지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 여인을 모욕하고 비하하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상태, 곧 현재 놓인 상황을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방인으로서 무시당하는 처지였고, 딸은 마귀가 들려 손쓸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러한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15,28)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상황을 포장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며 낫게 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크든 작든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 간청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예수님께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니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당신과 나누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우리가 성찰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처럼 나의 상태를 주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치유를 청하는, 큰 믿음을 닮아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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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5,21-28: 가나안 여인의 믿음
1. 믿음의 보편성과 하느님의 자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에서 가나안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을 전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의 이야기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인류에게 열리는 순간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미 이렇게 선포했다.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이사 56,6-7)
하느님의 구원은 어떤 민족이나 율법, 혹은 인간의 혈통에 제한되지 않는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부르신다. 하느님께 순종하며 진심으로 선을 찾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총이 결코 거절되지 않는다.”(16항)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진리를 자기 삶으로 증언한 첫 이방인 신앙인이었다. 그녀의 부르짖음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22절) 이것은 단순한 도움 요청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신앙고백이었다.
2. 침묵 속의 하느님: 믿음의 시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23절) 그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믿음을 자라나게 하는 하느님의 방식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분의 침묵은 여인의 믿음을 꺾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Sermo 77,2 의역)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침묵하신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부재의 침묵이 아니라, 더 깊은 신뢰로 우리를 부르시는 침묵이다. 가나안 여인은 이 침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5절) 하고 부르짖는다. 그 믿음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선 복음의 보편성을 상징한다.
3. “자녀들의 빵”과 “부스러기”: 겸손한 믿음의 힘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도전적으로 들린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 여인은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믿음의 지혜로 응답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녀는 주님을 논박하지 않고, 다만 겸손으로 이겼다. 그녀의 승리는 말의 논리가 아니라, 믿음의 겸손에 있었다.”(Homilia in Matthaeum 52,3 의역) 이 짧은 대화 속에서 ‘하늘 나라의 질서’가 뒤바뀐다. 이스라엘의 경계 안에 있던 구원이 겸손과 신앙의 태도를 통해 이방인에게로 흘러간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혈통이나 지식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겸손이다.
4.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다.”: 복음의 새로운 전환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선언하신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28절) 이 말씀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복음의 지평을 새롭게 여는 선언이다.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유다인에게서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로 확장됨을 보여 주신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로마 11,32)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차별 없이 주시되, 그 은총에 응답하는 믿음의 자유를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뜻이다.
5. 오늘을 사는 믿음의 길
가나안 여인은 하느님의 침묵을 통과한 사람, 그리고 믿음으로 하느님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우리도 그처럼, 하느님의 응답이 더딜 때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자격이나 혈통이 아니라, 겸손한 신뢰로 주님 앞에 서며, 타인을 향한 배타적 신앙이 아니라, 자비로 열린 신앙을 살아가야 한다. 일치 교령은 이렇게 가르친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 안에서 은총으로 일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을 진실히 찾고 그분의 뜻을 따르도록 감동하신다.”(3항 요약)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성령의 감동에 응답한 사람이다. 그녀의 믿음은 단순히 자기 딸을 낳게 한 믿음이 아니라, 교회의 보편성과 선교의 원리를 미리 드러낸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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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처럼 나>
마태오 15,21-28 (가나안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당신처럼 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5,21)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나에게 오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께 갑니다
내가 되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이 됩니다
나를 믿으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을 믿습니다
나를 바라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을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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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우리는 인공지능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인공지능은 이제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 가까이에 들어와 있습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자료를 정리하고, 언어를 번역하는 데도 인공지능이 사용됩니다. 어떤 조사에서는 한국인의 인공지능 사용 빈도가 절반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공지능은 우리 일상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한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젠슨 황은 인공지능을 ‘5단 케이크’로 설명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다섯 가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가장 아래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엄청난 전기가 있어야 합니다. 안정적인 전기가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프로그램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반도체’가 있습니다. 반도체는 인공지능의 머리와 같습니다. 특별히 한국이 잘 만드는 HBM 메모리 반도체는 인공지능 시대에 꼭 필요한 부품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플랫폼’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축적된 정보를 학습하고 연결합니다. 인터넷과 플랫폼이 없었다면 오늘의 인공지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데이터 센터’가 있습니다. 방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 그록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그 위에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에너지, 반도체, 플랫폼, 데이터 센터, 프로그램이 함께 있어야 인공지능은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한민국을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땅이 넓은 나라는 아닙니다. 자원이 많은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났고, 가난을 견디며 배웠고, 땀 흘려 일했습니다. 에너지를 만들고, 반도체를 만들고, 빠른 인터넷을 구축하고, 플랫폼과 데이터 산업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계의 중요한 인공지능 기업들이 대한민국을 찾아옵니다. 대한민국이 인공지능의 5단 케이크를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어느 한 나라나 한 기업만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술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을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을 더 많이 갖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공정과 정의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새로운 바벨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힘 있는 사람만 잘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이 주님의 집에서 기도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산으로 인도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나라, 어느 한 계층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은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눈으로 보면 밖에 있는 사람,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을 귀찮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거절당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러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다시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 말은 듣기에 참 힘든 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말은 비굴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깊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주님, 저는 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작은 은총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제 딸은 살 수 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여인의 딸이 나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신앙생활의 ‘5단 케이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에 에너지, 반도체, 플랫폼, 데이터 센터, 프로그램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다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믿음, 희망, 사랑, 나눔, 희생입니다. 가장 아래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신앙생활의 에너지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도 멈추고, 봉사도 지치고, 사랑도 쉽게 식어 버립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여인을 예수님께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거절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여인은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귀찮은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희망은 상황이 좋아서 생기는 낙관이 아닙니다. 희망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다음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여인이 그토록 간절했던 이유는 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사랑은 체면을 내려놓게 하고, 자존심을 내려놓게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차갑고, 사랑이 없는 희망은 자기만을 위한 바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나눔’이 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아픔을 숨기지 않고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나눔은 단순히 물질을 나누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아픔을 하느님께 내어놓는 것도 나눔이고, 누군가의 아픔을 들어 주는 것도 나눔입니다. 받은 은총을 공동체와 나누는 것도 나눔입니다.
마지막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희생은 신앙생활의 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을 위해 체면도 내려놓고, 자존심도 내려놓았습니다. 희생은 억지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은 사랑 때문에 기꺼이 내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자가 공동체를 위해 시간을 내어놓고, 신앙인이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큰 희생이었고, 그 희생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졌습니다.
인공지능의 5단 케이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면, 신앙생활의 5단 케이크는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영혼은 가정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세상을 살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결코 우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 받은 능력이 세상을 위한 책임이듯이, 우리가 받은 믿음도 세상을 위한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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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다. 영원한 주님의 사랑에 눈뜰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 엎드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하지 않으셨고, 다시 여인이 부르짖자,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하셨고. 또다시 청하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가나안 여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은총은 준비된 사람에게 우선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의미다. 구원의 혜택이 이방인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이 놀랍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은 이방인이라는 상황과 조건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탄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큰 믿음을 보시고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확고하게 믿으면 그만큼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된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구원은 유다인, 이방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사람으로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방인 여인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자식을 위한 한없는 사랑, 그리고 세 번의 끈기 있는 간청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결국 이루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뽑아 주셨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선민의식이 뿌리 깊게 박혔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강아지’,‘돼지’라 부르면서 교만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표현으로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며 간절한 믿음을 표현하였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특별히 선택되었다면 그에 걸맞은 믿음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고 다른 모든 민족이 배척된 것은 아니다.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보편적 구원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2).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딸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당하는 어머니를 보라. 강아지 취급받는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매달렸다. 주님께서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청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신다. 마침내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이 치유되었다.
우리는 어떤 바람이 있을 때 믿고 기도하고, 믿고 기다려야 한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비록 죄를 짓고 잘못에 떨어졌다 해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선한 지향으로 인내하면서 청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이다. 지혜의 저장소며 영혼의 힘이고 낙심의 치료제다. 슬픈 이들의 위안이며 의로운 이들의 승리고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천배 만 배 더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통 중에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바람이 큰 만큼 큰 믿음을 지켜야 한다. 믿음은 ‘설령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셨을지라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이방인 여인이 마치 예수님께서 외면하는 듯 여겼을지라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한 믿음을 지켰듯이 우리도 어두운 밤이 올수록 더 큰 신뢰를 지니고 믿음을 증언하길 바란다. 오늘은 기대하는 바와 간절한 소망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길 기도한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고, 세상에서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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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상대방이 사랑을 주지 않음에 크게 슬퍼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 친구 등의 사랑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고 울며 말합니다. 그러나 이때 자기 사랑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사랑인지, 욕망인지를 말입니다.
사랑이 욕망으로 흐를 때, 상대를 소유하려는 집착이 생겨납니다. 욕망의 본질은 자기 안의 불안을 달래는 데 있기 때문에, 그 불안을 달래줄 수 있는 상대가 늘 내 곁에 있어야 하고,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상대를 소유하려고 할 때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자기 필요만을 청하고 있다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을 경험해도 이를 인정할 수 있고, 그 인정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되면서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때 상처받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필요를 얻으려는 가짜 사랑인 욕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상대를 통제하려 하고,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려 합니다. 욕망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고, 사랑은 상대를 자유롭게 합니다. 욕망은 확인을 요구하고, 사랑은 바라보고 존중합니다. 이렇게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진짜 사랑을 보여주는 한 여인을 오늘 복음에서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이방인 지역인 이곳에서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을 알아보며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 15,22)라고 말합니다. 가나안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고, 종교적으로도 적대적인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 이방인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여인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침묵을 통해 여인의 믿음이 점차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소리치다가, 예수님께 가까이 와 엎드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 응답합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침묵이 곧 거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응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3)라고 말하면서 여인의 고통보다 자신들이 겪는 불편함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도움의 목소리가 아닌 귀찮은 소음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가까이 있던 제자였지만 그분의 자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자비를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조금 충격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성경에서 개를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 표현에 분노하거나 물러날 수 있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라면서 물러나지 않고, 더 큰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자녀들이 먹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빈약하지 않다고 믿은 것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히 자기 딸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제자들은 자주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책망받지만, 이 여인은 칭찬받습니다.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끝까지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기에,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가 바로 진짜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욕망이 아닌 사랑. 그 사랑은 어떤 상황이든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을 때 완성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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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나안 여자의 믿음>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1) 성경에서 ‘개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마태 7,6) 우상 숭배자들을 뜻할 때 사용하는 ‘개’는 원래는 떠돌아다니는 ‘들개’를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강아지’로 바꾸셨습니다. ‘강아지’는 여기서는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입니다. 아마도 가나안 여자에 대한 배려로 좀 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상 숭배자’ 라는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상 숭배’ 라는 말에는 미신과 마술 같은 것을 믿는 것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그런 일들은 ‘참 신앙’의 반대쪽에 있는 ‘헛된 일들’이고,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그런 일에 관한 이야기들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고을에는 전부터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술을 부려 사마리아의 백성을 놀라게 하면서 자기가 큰 인물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리하여 아이에서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힘‵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그가 오랫동안 마술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기 때문이다(.”사도 8,9-11)
“우리가 기도처로 갈 때에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사도 16,16) “신자가 된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자기들이 해 온 행실을 숨김없이 고백하였다. 또 마술을 부리던 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기 책들을 모아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그 책들을 값으로 따져 보니 은돈 오만 냥 어치나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은 더욱 힘차게 자라고 힘을 떨쳤다.”(사도 19,18-20) 이런 이야기들은 우상 숭배, 미신, 마술 같은 일들이 당시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2) 예수님을 찾아온 어떤 가나안 여자는,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우상을 숭배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믿지는 않고 우상을 숭배한 사람입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점, 또 예수님의 말씀들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는 점 등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그 여자는 자기 딸이 중병에 걸리자, 처음에는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빌었을 것이고, 아무런 효과가 없자 다른 신전에 있는 우상들을 찾아다니면서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고장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왔는데, 아직은 그에게는 하느님도 예수님도 여러 우상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 여자가 도움을 간청하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여자가 여러 우상들 가운데 하나에게 소원을 비는 것과 같은 심정과 태도로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여자의 ‘간절함’입니다. 그 간절함이 여자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은, 우선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상 숭배와 미신이 헛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을 것이고, 하느님만 믿는 ‘참 신앙’으로 인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 믿겠다는 다짐과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청하는 간절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말씀은, 여자의 변화와 결심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자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 믿기로 결심함으로써 청했던 은총도 얻었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도 얻었습니다. 그가 청했던 은총은 딸을 고치는 것이고, 청하지 않았지만 받게 된 은총은 그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인데, 사실 그게 더 큰 은총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도 많은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특히 위험한 것은 미신을 과학으로 포장하는 일과 과학 자체가 미신으로 변질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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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일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침묵과 거절>
침묵은 대화 파트너 없는 독백, 자기 밖의 소리에 대한 경청, 무상무념의 상태 등 다양한 양상을 가진다. 침묵으로 양극단의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적막이 감돌아 불편함을 일으키는 침묵, 잠잠한 고요함 속에 친밀감을 형성하는 침묵이 있다. 굴욕과 수치로 인한 유구무언의 침묵과 달리, 언어를 대체하는 침묵은 인공지능(AI)이 할 수 없는 ‘대화와 소통의 도구’다.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시간을 벌게’ 하는 침묵은 이해와 포용의 씨앗이 뿌리내리는 시간을 확보한다.
반대 의사를 개진하는 침묵과 대조하여, 언어를 대체하는 침묵은 역설적으로 전적인 긍정을 시사한다. 열정적 호응과 같이, 냉소적 침묵은 ‘적극적 후원을 보장하는 동의’일 수 있다. 성과 도출을 위한 관여와 개입보다 실무자의 안정적 배경으로 작용하는 침묵은 훌륭한 리더십의 유형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잠언 11,12)
여자의 출신에 관한 언급에 인색한 복음서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포괄하는 지명인 “가나안”(마태 15,22) 출신의 부인과 관련한 사건을 보도한다. 구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3,8)으로 소개된 가나안은 모세가 주도한 이집트 탈출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 약속의 실현 장소지만, 원주민들에게 이스라엘 역사의 흥망이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점령지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과 가나안 원주민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그런데 역사와 문화가 조성하는 대립과 혐오의 요인이 존재하더라도 ‘부모의 자녀 사랑’은 민족과 시공을 초월하는 현안 중 하나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에게 순차적으로 두 가지 태도를 보이신다. 첫 번째는 침묵으로 일관한 무대응이다.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두 번째는 배타주의에 입각한 거절이다. ‘가나안 원주민을 강아지로 빗댄 발언’(마태 15,26 참조)은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이스라엘의 강한 민족주의에 대한 통찰을 요청한다. 이를 수긍하며 “그렇습니다.”(마태 15,27)라고 응답한 가나안 부인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라자로가 먹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루카 16,21)과 같은 부스러기조차 귀한 빵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을 고백하였다.
‘예수님의 침묵’은 가나안 부인의 간곡함을 촉진했고, ‘예수님의 거절’은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일깨웠다. 곧 예수님의 침묵과 거절은 역설적으로 구마 기적의 토대가 된 ‘가나안 부인의 큰 믿음’(마태 15,28 참조)을 확립하게 했다.
‘말씀을 통하여 창조’(창세 1,3 참조)하신 하느님은 구원과 심판에 대해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히브 1,1 참조)하셨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느님의 침묵은 말씀하는(구원하는) 하느님의 부재(不在)로 여겨진다. “당신께서 제 앞에서 침묵하시어 제가 구렁으로 내려가는 이들처럼 되지 않게 하소서.”(시편 28,1)
그러나 “이방인들의 사도”(로마 11,13)로 자칭한 바오로가 설교한 바와 같이 ‘침묵으로도 말씀하는 하느님’, ‘부정으로도 강하게 긍정하는 하느님’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사 56,7)을 마련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로마 11,32) 구원 계획을 실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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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의 침묵>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병자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달려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아무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과 동시에, 구원이 하느님에 의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는 구원이 모든 이에게 열려있음을 말씀하십니다.
“~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고, ~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6-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불순종한 유대인들을 통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내려지고, 마침내는 모든 백성에게 미치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로마 11,30-32)
복음은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오늘은 가나안 여인에게 보이신 예수님의 침묵과 거부에 대해서 주목해 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15,22) 가나안 여인은 큰 소리로 계속 간청하였습니다.(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15,23) 침묵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요,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했습니다. 곧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또 여인은 오직 믿음으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여인은 마귀 들린 딸보다도, 그러한 딸을 슬하에 둔 어머니의 아픔이 하도 크기에, 딸과 한 마음이 되어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것도 끈질기게 계속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니,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하고, 그분께서는 자신의 사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시며, 박절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애원했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15,26)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의 겸손과 인내, 믿음과 확신은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마태 15,27)
여기에서 우리는 가나안 여인의 겸손을 봅니다. 여인은 자신을 ‘강아지’로 인정하는 자신이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비록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최소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는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의 은혜가 아닌, 오로지 당신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인의 그 겸손과 인내, 그 믿음과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인의 딸은 나았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 속에서도 항상 그분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풍랑 속에서 침묵으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던 예수님께서는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시고 제자들의 믿음을 키우셨고,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 앞에서 침묵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시던 예수님께서는 끝내 여인을 구하시고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치셨고, 마침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말없이 골고다로 끌려가, 끝내 침묵으로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침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외침을 듣습니다.
주님,
주님의 침묵이 결코 단순한 거절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침묵 앞에 좌절하지도 반항하지 말게 하소서.
오히려 더 큰 믿음과 인내로 간구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당신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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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은 삼킬 것 같은 풍랑 속에서 말없이 주무시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말없이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침묵 속에서 제 믿음과 겸손을 양육하소서.
당신의 침묵 앞에서 견고해지게 하소서.
거부당함 속에서도 새로워지게 하소서.
더 큰 소망을 품고 끝없이 간구하게 하소서.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놀라운 사랑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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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전 젊은 신부로 열렬히 활동할 때도 그렇지만, 이젠 나이든 신부가 되었음에도 성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눈이 좀 더 열리면서 성서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고 깨닫긴 합니다. 구약에선 아브라함에게 향한 하느님의 요구,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는 요구처럼 그리고 신약에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윤리적 당위가 아닌 종교적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윤리를 뛰어넘은 믿음의 역설, 아리러니(反語)를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이 그렇지 않나요. 늘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따뜻하시며 사람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접촉하며 생명의 말씀으로 치유하시던 예수님의 입에서 어찌 이토록 인종 차별적 뉘앙스(?)가 풍기는 냉정한 거절의 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마귀 들린 딸의 힘겨움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자책하고 한탄하며 살아온 가나안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를 못 들으시지는 않으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제자들은 그 여인의 성가심에 시달리다 귀찮아서 예수님께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고작!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비수가 되어 그 여인의 마음을 후벼 팠을까 싶어 몹시 불편하고 힘듭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우울한 일요일」에선 이 음악을 듣고 많은 사람이 자살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무시 받는 일이며, 무시 받고 살기보단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의 싸움을 볼 때 정말 무섭게 싸우는 경우를 봅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그 밑바닥에는 바로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자존심에 상처받았기 때문입니다. “야, 이년아 내가 비록 지금은 돈 없어서 시장에 나와 콩나물을 팔고 있지만, 아니 니년까지 나를 무시해!”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큰 모욕이며 치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야,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고 핏대를 올리지만, 그 자존심마저 버리면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우리는 자존심을 중요시합니다. 그 누군가가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릴 때 우리는 참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토록 그 여인의 가장 깊은 자존심을 건드리시고 아프게 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외견상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몰인정하게 그 여인을 대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흔한 표현으로 위로는 못 해줄망정, 개망신은 주지 말아야지요. 액면 그대로 보자면, 그 가나안 여인이 속된 말로 자기 팔자 고쳐 달라고 매달린 것도 아니고, 분에 넘치는 부귀영화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니며, 단지 자기 딸 곧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쳐 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바람을 간청했을 뿐입니다. 만일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낫지 못할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면, 어느 어머니인들 그 여인처럼 도움을 줄 사람에게 미친 듯이 매달리고 애원하며 하소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어머니의 작은 바람이며 몸부림이라고 봅니다. 그런 여인에게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이지 자비로운 예수님답지 않게 느껴지며 거리감마저 느낍니다.
그런데 어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우리가 주님의 속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몇 수 뒤까지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 여인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현세적이며 신체적인 치료로 끝나지 않고, 그 이상의 더 높고 깊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상의 잔치에까지 그녀와 그 여인의 딸을 이끌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의 마음에 천상적인 믿음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음을 아시고 딸의 육체적인 건강 회복은 물론 그 여인에게 천상적인 생명을 얻고 또 얻도록 이끄시기 위한 반전의 교육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반전의 교육 방법이란 당신의 외면적인 거절을 통해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에 내재 되어 있는 천상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치료해 주었다면 그녀가 받은 천상과 영원한 생명을 향한 불씨에 불을 댕길 수가 없었기에 가장 극단적인 무시와 멸시를 통해 자존심에 상처를 줌으로써 그 어둠을 뚫고, 그 바닥을 치고 솟구쳐 생명과 축복의 잔치로 그녀를 이끌기 위한 도전이자 초대였던 것입니다. 이는 단지 그 여인만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것을 듣고 보고 있는 모든 사람, 특히 자기 동포인 이스라엘인에게 던지는 경종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사람들에게 현세적이고 땅의 일에서 벗어나 참으로 인간이 찾아야 하고, 이루어야 하는 천상적인 하늘 일, 그리고 지상적 잔치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상적 잔치에 참여하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니어그램을 만든 구르지예프에 관한 책, 「인간이라는 기계」에서 구르지예프 또한 제자들에게 지나치게 혹독하고 엄격했더군요. 구르지예프는 잠들어 있지만 자신이 깨어 있다고 착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무시하고 엄청난 행위를 시켰더군요. 물론 당신의 깊은 의도를 모르는 채 그 여인이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그 자리를 떠나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기에(=낮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고, 그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억누르면서도 자식의 병을 고쳐야겠다는 반동으로 더 높고 더 깊은 믿음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고대한 예수님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애걸한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무시하고 저를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으며, 단지 제가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닌 아주 작은 것으로도 족하고 족하오니 제발 제 자식 병만 고쳐 주십시오. (15,25와 27참조) 드디어 극단적인 교육 방법을 선택한 예수님의 의도가 그녀의 겸손 어린 고백으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고 그 여인이 대견스럽고 참으로 사랑스러웠으리라 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28)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으로 기적을 베풀고 관심을 쏟았던 유다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는데, 뜻밖에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에게서 그토록 크고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얼마나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우셨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녀의 딸을 치료하신 것만이 아니라 그녀의 무시와 멸시당해 찢기고 부수어진 그녀의 영혼을 치유해 주시고 하느님 딸로 거듭나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