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3장 24_43절 밀과 가라지

모임 주위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복음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24-43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6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 종들은 밀밭에 난 가라지를 뽑아 버리겠다고 하고,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지 모르니 수확 때까지 두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종과 주인의 시각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종들은 가라지가 밀을 해칠까 걱정되어 가라지를 뽑으려 하였지요. 반면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 밀이 상할까 걱정되어 뽑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듯이 우리 사회도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가라지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 누구에게나 밀과 같은 요소가 있듯이, 가라지 같은 요소도 있지 않습니까? 가라지는 자신의 단점이나 부정적인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가라지를 예수님께서는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결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라지가 마치 가시처럼 되어 자신을 찌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면 비난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점이 있을수록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단점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숨어 있는 자신의 가라지를 찾아내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한 점을 인정함으로써 주님의 도움을 더욱 청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심어진 가라지를 모두 뽑아 주실 것입니다. 가라지를 인정하고, 치유해 나가며, 더불어 선하고 좋은 면을 발견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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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 겨자씨 비유는 하늘나라는 정말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어떤 무엇과도 비교가 안될말큼 창대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해 보고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할때 어떤 기준으로 일을 해야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 신앙생활을 하다 “밀”같은 활동이다 라고 굳게 믿었는데 “가라지”같은 결과를 만들어낸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혹시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면 이야기 해봅시다 “밀”같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내가 추구하고 있는 요소가 있다면 함께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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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654
7월19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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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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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2AB642VTMI
[전주교구 유정현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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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다림은 가장 그리스도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농사에 도움이 안 되는 ‘가라지’들을 보는 족족 솎아낼까요?”라는 질문에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와~ 무서운 분이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자녀에게 호통을 치면서 빨리 그 길에서 벗어나라고 말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아버지의 모습일 텐데, 잘못을 저지르는 그 순간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대박’으로, ‘보란 듯이’ 크게 손 좀 봐주겠다는 의도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뱁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였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정말이지 큰 뜻, 엄청난 배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다 보면 자주 느끼는 바입니다. 한 청소년의 인생을 동반해주는 데 있어 ‘기다림’ ‘인내’처럼 중요한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의 실수를 기다려준 것이 나중에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족함과 미숙함 앞에 인내하고 또 인내한 결과가 ‘큰 인물’이라는 결실을 맺습니다.

정말이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에 대고 외쳐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동안 오류에 빠져 속고 나서 나중에 진리의 진가를 깨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악의 실체를 확인한 뒤에야 참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죄의 악함을 깨달은 뒤에야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이런 연유로 교부들은 특정한 죄에 한해 ‘복된 죄(Felix culpa)라고 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때로 아닌 것에 대해서 애초부터 원천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합니다. 잘 짜인 모범 정답 틀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당신 의도대로 우리 인간 역사를 하나하나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무조건 그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판단, 가치관, 인생관, 결정을 존중해주십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도록 우리에게 모두 맡겨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나 실수 앞에서 한없이 기다려주십니다. 참 가치를 깨달을 때까지, 당신께로 돌아설 때까지 무조건 인내하십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바람이나 기대치가 의외로 높습니다. 천사 같은 교황님의 얼굴만을 기대합니다. 착한 목자의 화신과도 같은 주교님을 찾습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제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다. 교황님도 주교님도 사제들도 육을 지닌 한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정신으로는 분명히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만, 구체적인 삶 안에서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노력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관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포기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표현도 아닙니다. 기다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가장 그리스도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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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는 또한 심판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라지인지 밀인지 빨리 구분해서 가라지 같으면 밀로 돌아오라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제2차대전 때, 헤럴드 레셀이라고 하는 청년이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폭탄에 맞아서 두 팔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불구가 된 그는 참으로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하느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느님,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원망의 기도를 하는 그의 귀에 분명히 들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지 않으냐?”

레셀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에게는 아직 생명이 있고, 두 눈이 있고, 두 귀가 있고, 두 발이 있습니다. 정말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생각을 바꾼 그는 의사에게 부탁해서 의수를 만들었습니다. 또 열심히 타이프치는 것을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내온 생활을 잘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것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영화에서는 자기가 직접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이고 그는 1946년도 아카데미상 최우수 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결연히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 얻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용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잃은 것의 열매를 크게 보상해주십니다. 더 많은 가능성이 그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밀과 가라지인지 구별할 수 있느냐면 나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에 대한 나의 자세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러셀은 가라지가 아닌 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경 본문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해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구조를 보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중간에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끼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 겨자씨의 비유 – 누룩의 비유 – 밀과 가라지의 비유 설명’의 순서로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그 중간에 끼인 것이 바깥에 감싼 것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의 보충설명인 것입니다.

겨자씨는 처음엔 작고 볼품없지만, 밭에 심어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어 쉬게 합니다. 이는 ‘포용력’을 상징합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포용력을 잃어 하와를 배척합니다.
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가라지까지 끝까지 당신 밭에 두십니다. 예수님도 유다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포용력을 배운 이들의 것입니다. 나무가 새를 가리지 않듯, 하늘 나라 백성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양식을 내어줍니다. 에제키엘서를 알았던 유다인들은 그 말씀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2-23)

누룩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누룩은 밀가루 서 말에 들어가 그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누군가를 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삼구’(三仇)입니다.

뱀은 사람 안에서 세속-육신-마귀를 크게 만들어 돈 때문에, 욕망 때문에, 교만 때문에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밀이 밭에서 영양분을 먹으며 포용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일은 바로 삼구를 죽여 복음삼덕을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 나아가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당신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러니 누룩은 우리 삼구를 죽이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밀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을 자신을 죽이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래서 겸손해지고 더욱 큰 포용력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고통을 사랑의 성장을 위한 성장통으로 삼는 것입니다.

영화 ‘양철북’(1979)에는 이미 3살 때 누구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는 오스카라는 아이가 나옵니다. 그는 이웃을 심판하기 위한 양철북을 들면서 성장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때가 가라지일 때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고 삼촌도 자신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는 양철북을 집어 던집니다.

자신도 죄인임을 알았기에 이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 안에 누군가를 쉬게 할 수 있는 밀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성장에 달려있습니다. 포용력의 성장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거부한다면 가라지입니다. 끝까지 고집부린 그 사람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한번은 훌륭한 조각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를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장통입니다.

칼 융은 “모든 정신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고통이란 포용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세속과 육신과 교만에 대한 욕구가 깎여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성장통을 즐겨 받을 줄 알아야 가라지가 아닌 밀이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 유일하게 ‘고통과 멸시’를 청했습니다. 겸손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밀은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멈추는 일 없이 성장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통에 대해 내가 선택한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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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본당에서 사목할 때, 배 과수원을 하는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평생 배나무를 가꾸어 온 형제는 제게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신부님, 과실나무는 가지치기 작업이 생명입니다. 지금 당장 열매를 잘 맺는 가지라고 해도 과감히 잘라 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더 좋은 열매를 계속해서 맛볼 수 없어요.” 그때에는 열매를 잘 맺는 가지를 왜 잘라 내야 하는지 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그 안에는 더 큰 생명을 향한 농부의 지혜가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여러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존재 안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가능성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나 누룩처럼 작고 숨겨진 존재 안에도 무한한 생명력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믿고 있는 농부는 서두르지 않고 인내하며 수확의 때를 기다립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농부’이십니다.(요한 15,1 참조)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의 밭에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우리 안에 때로 악의 가라지가 섞여 자라더라도 주님께서는 좋은 밀까지 뽑힐세라 수확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며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악한 것을 분별하고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끝까지 붙어 있기를, 그렇게 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생명의 가지’로 거듭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때로는 아픈 가지치기 작업을 거치게 하시면서도, 마침내 우리를 풍요로운 결실로 이끌어 주십니다. 생명을 정성껏 가꾸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닮아, 우리 또한 작은 존재의 가능성을 믿으며 삶에서 위대한 기적을 일구어 내는 농부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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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24-43: 하느님 나라의 비유: 밀과 가라지

1. 선과 악의 신비로운 공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묵상 된 주제다. 주님께서 좋은 씨앗을 뿌리셨지만, 원수는 밤중에 가라지를 뿌린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가 현존하는 세상에서는 언제나 선과 악이 함께 자라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은 가라지가 밭에 남겨져 있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가 드러나 불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밀로 바뀔 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도 가라지였던 자가 회개하여 밀로 변화되는 경우가 많다.”(Enarrationes in Psalmos, 25,2 요약) 즉, 우리가 쉽게 판단하고 잘라내고 싶어 하는 그 ‘가라지’조차도 하느님 앞에서는 언제든 회개와 변화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맺을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2.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
이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선과 악의 공존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이다. 지혜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지혜 12,18-19)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이 구절을 해설하며, 하느님의 참으심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적극적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즉시 벌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자비의 표징이다. 그분은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In Matthaeum homiliae, 46,1 요약)

3. 교회 안에서의 적용: 가시와 밀의 공동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자 표징이다.(교회 5항 참조) 그러나 동시에 교회 안에서도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부터 자각된 사실이었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강조한다. “교회는 지금 세상에 순교자와 배교자, 의인과 죄인,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주님의 손길에 의해 구별될 것이다.”(Epistula 69,2 요약) 이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 안의 ‘불완전함’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비와 희망의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초대한다.

4. 종말론적 희망: 해처럼 빛나는 의인
예수님의 설명은 마지막에 종말론적 약속으로 끝난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 이는 다니엘서의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다니엘 12,3) 성 아우구스티노는 여기서 교회의 궁극적 소명을 본다. “지금은 가라지와 함께 자라는 고통의 시기이지만, 끝 날에는 밀만이 남아 하느님의 나라에서 빛날 것이다. 이는 교회의 영광이며, 하느님의 은총의 완성이다.”(De civitate Dei, 20,9 의역)

5. 영성적 적용
우리 눈에는 가라지처럼 보이는 이도, 하느님 눈에는 밀로 변화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기다려주셨듯이, 나도 이웃을 기다려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선과 악은 내 마음 안에도 공존한다. 성령의 은총 안에서만 악을 선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로마 8,26 참조) 지금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날 하느님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소명을 받았다.

6. 결론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인간의 약함과 죄의 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 의지를 선포하는 말씀이다. 지금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시간이며, 이는 구원의 기회이자 하느님의 기다림의 시간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세상을 조급히 심판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비와 회개의 길 위에서 인내하며, 마지막 날 해처럼 빛날 희망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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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마태오 13,24-43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9-30)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가라지보다
밀에게
먼저

눈길을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가라지보다
밀에게
먼저

발길을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가라지보다
밀에게
먼저

손길을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가라지에 대한
불신보다

밀에 대한
믿음을
먼저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가라지에 대한
절망보다

밀에 대한
희망을
먼저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가라지에 대한
미움보다

밀에 대한
사랑을
먼저

가라지 없앰보다
밀 가꿈이니

가라지보다
밀에게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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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직립보행’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두 발로 서면서 손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사냥하고, 바느질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글을 쓰고,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직립보행은 사람의 시야도 넓혀 주었습니다. 멀리 볼 수 있었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었고,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 직립보행은 언어의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람은 말을 통해서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전하고, 역사를 기록하고, 문화를 후손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직립보행은 인간의 두뇌가 더 크게 발달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종교와 철학, 과학과 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직립보행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도 가져왔습니다. 척추에 무리가 생기면서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두 발로 온몸을 지탱해야 하기에 발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저도 많이 걷는 편입니다. 걸으면서 묵주기도도 하고, 생각도 정리하고, 건강도 돌봅니다. 그런데 최근에 ‘무지외반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초기라서 수술 없이 교정하고 있습니다. 또 직립보행은 여성의 출산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산도가 좁아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문명과 문화는 장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약함과 불편함, 고통과 한계 속에서도 서로 도우며 이루어졌습니다.

시인 정호승은 ‘꽃씨’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꽃은 어디에서 태어났어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꽃씨에서 태어났단다. 꽃씨를 잘라본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꽃이 없는데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꽃씨 안에 꽃은 분명히 있단다. 그러나 바람, 햇살, 비, 구름이 도와주어야 한단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책을 읽고, 음식을 먹으면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3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토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씨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환경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 태어난 사람, 가풍이 있는 집에 태어난 사람, 태어나면서 고아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좋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릴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결실을 보기 어렵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말할 때는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쁜 마음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 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시기와 질투의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의 삶을 살아가면 내 몸은 밀이 됩니다. 내가 원망과 분노 그리고 시기의 삶을 살아가면 내 몸은 가라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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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라지의 비유>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30)

1) ‘가라지의 비유’는, “왜 교회 안에도 악인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고, 악인이 교회 안에도 존재하는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인간 세상에’ 악과 악인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악 자체’의 기원을 설명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악’의 기원은 여전히 수수께끼(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또는 인간 세상에 ‘악’과 ‘악인’이 존재하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배반자 유다의 존재를 설명하는 비유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신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직접 뽑으시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그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는가?”라고 물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도들만’ 뽑으셨습니다. 열한 명의 사도들과 한 명의 배반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루카 22,3)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요한 13,2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는 말을,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또는 영혼에 가라지를 뿌렸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밀이었던 유다를 사탄이 가라지로 바꿔놓았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유다의 배반에 사탄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책임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유혹’만 했을 뿐이고, 유다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따라서 배반의 일차 책임은 유다 자신에게 있습니다. <유다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하라고 사탄이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 2서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이 말은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기회들을 모두 외면했습니다.

3) 실제 농사에서는 밀은 밀이고 가라지는 가라지이지만, 사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의인이 타락해서 악인이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악인이 회개해서 의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될지, 또 나 자신이 어떻게 될지, ‘지금은’ 아무도 모릅니다. 끝까지 가서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끝’은 ‘죽을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 때’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하고 교회가 큰 박해를 받을 때, 당시 신자들 가운데에는 박해자 사울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어 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서 박해자 사울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면, 그것은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살인죄를 짓는 일이 될 뿐이고, 우리 교회는 ‘위대한 사도 바오로’를 얻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4) ‘하느님의 정의’가 너무 더디게 실현되거나, 아니면 아예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의’와 ‘자비’를 함께 실현하시는 분이고, 지극히 공정하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드러나고, 모든 것이 바로잡히는 마지막 ‘그날’이 오면, 누구든지 모든 것을 알아보고, 이해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를 모든 사람이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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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유정현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우리의 식탁을 지켜주는 농민을 생각하며”>

식사는 잘하고 계십니까? 식사를 잘한다는 것은 내가 밥을 먹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밥을 먹고 나서 속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식사자리여도, 그 음식이 비싼 음식이어도, 그 음식이 맛있는 것이어도, 먹고 탈이 나면, 식사를 잘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는, 우리의 식탁에 건강을 해치는 음식들이 올라와 식사를 잘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우리 농민이 생산한 식재료로 만든 쌀밥과나물보다는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는 것들로 튀겨지고 가공된 것, 농약과 방부제가 뿌려진 다양한 식재료들로 식탁이 차려지는 것이 걱정이 됩니다.

통계청 「양곡소비량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당 쌀 소비량이 2005년 80.7kg, 2015년 62.9kg, 2025년 53.9kg으로 많이 줄었습니다. 우리의 식탁에서 주식인 쌀조차도 점점 밀려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식생활이 변하는 거야 어떻게 말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식탁에 올려진 식재료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간식으로 먹는 것조차 그 재료가 어떤곳에서 오는지, 괜찮은 건지, 아이들에게 해롭지 않은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땅에서나는 건강한 식재료로 우리의 식탁을 차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생명농업을 실천하고 있는 가톨릭농민회 농민들은 우리의 식탁을 걱정하는 농부들입니다. 가톨릭농민회는 “하느님은 농부이시다.”(요한 15,1) 말씀처럼 살아있는 것들을 기르고 보호하시고 거두시는 농부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들의 식탁을 염려하며 생명농업의 방식을 고집하며 잘 먹고 잘 살도록 생명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농 나눔터에서 나누는 것들의 포장지에 적혀 있는 생산자 농민들의 이름을 보면, 너무나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땅을 살리고 작물을살리고 인간을 살리는 저 농민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농민 주일을 보내는 우리는 농민들에게 힘들게 농사짓는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식탁을 걱정하며 땅을 만지는 그 노고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함께하는 저 농민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위대한 생명의 사도들입니다. 이 더운 여름에도 우리의 식탁을, 우리의 건강을 생각하며 농사짓는 농민들의 수고로움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숲정이 뒷면(8면)의 김수환 추기경님 말씀도 기억해 주시고, ‘우리농지킴이’, ‘쌀지킴이’ 가입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온 누리를 이롭게 하시는 주님의 뜻 앞으로 농민들과 함께 걸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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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안영배 사도 요한 신부님]

<인간의 완성을 위한 농업의 가치>

지난 5월 25일 발표된 교황 레오 14세의 첫 번째 사회회칙 「고귀한 인류」에서 교황께서는 “인공지능 (AI)은 무장해제 되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가져올 생산혁명으로 얻 게될 풍요로움을 기대하고 있지만 아직 인류는 엄청난 혁신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대량실업과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예견되고 인간 존엄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자아를 실현하고 신앙인으로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폭넓게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인공지능으로 얻게 되는 초과 이익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를 통해 얻어진 결실을 사회 곳곳으로 재분배해 가며 또 다른 성장과 풍요를 촉진하는 선순환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새로운 문명이 가져다 줄 풍요로움에만 몰입한다면 상실된 가치를 복구하기란 더욱 힘들어지거나 영구히 불가능한 사태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난 반세기 산업화를 통한 경제개발을 진행해 오면서 얻은 결실도 있지만 얻지 말아야 할 폐해도 떠안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산업화를 위해 농업은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당했습니다. 생활 물가 안정을 위해 저곡가 정책이 지속되었고, 생산 비를 건지기 위해 공장식 화학농법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수출산업을 위해 우리 농정은 경쟁과 규모화를 추진해왔지만 그 결과 우리 농촌에는 마지막 세대만이 남아 소멸을 바라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애써 농사를 지어보려 해도 해마다 격해지는 기후변화로 인해 농산물의 품위는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치솟는 물가에 생산비도 동반 상승하지만 농산물 가격은 바닥으로 내려 앉습니다. 경제개발, 성장도 필요하지만 농업의 공익적 가치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업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필수 활동입니다.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아 건강한 생활이 보장될 때 사람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기회를 보장받습니다. 그리고 농업은 토양과 물을 관리해 가며 환경을 보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일상과 최우선적 대응이 농업생산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한 농업은 현대 인류가 상실한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생명이 움트는 부드러운 흙의 촉감, 토양에 공존하는 수많은 생명체, 맑은 물 속에 담겨 진 생명력, 깨끗한 공기가 주는 상쾌함, 우리는 생명의 터전인 논밭과 산천에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신비로움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배워야 합니다.

산업화를 이룬 짧은 시기, 우리는 많은 것을 얻기도 했지만 중요한 가치들도 상실해 왔습니다. 성장과 발전만을 위해 삶의 질과 인간의 삶을 둘러싼 수 많은 가치들을 외면해 왔습니다. 인간은 결코 물질적 풍요만으로 행복해지거나 완성된 삶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품어주는 공동의 집 지구 안에서 사람들과 맺는 공동체적 관계와 자연 생태계와의 공생을 통해서 우리 삶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 인간 존엄성을 올바르게 누리기 위해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가야 합니다. 농민주일은 농민들만을 위한 날이 아닌,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 농업의 가치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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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주홍 디모테오 신부님]

<기다림>

세상은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것처럼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악이 존재하기에 선은 더욱 드러나게되고 그 안에서 더 강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선이 드러나기를 기다릴 수 없어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게 됩니다. 일꾼이 주인에게 조르듯이 “주님, 어찌하여 저 못된 놈들을 그냥 두십니까? 어서 악인들을 끝장내 주십시오.”라고 투덜거리기도 합니다. 마치 가라지가 양분을 다 섭취하여 정작 밀은 비실비실 말라가고 있다는 듯이,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도 호의호식하는 바람에 의인은 고난 속에서 살수 밖에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기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세상의 악의 존재로 인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심판자로서 세상의 악을 내버려두지 않으셔야 하고 심판자에 의해 세상의악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기다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해서 30년의 시간을 기다리셨고 공생활 전 광야에서 40일간을 기다리셨으며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보여주시기 까지 3년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기다림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녀를 죽이고자, 단죄하고자 달려드는 마지막 한사람이 사라질 때까지그분께서는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말씀하십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예수님의기다림 속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다림 속에 제자들의 사랑, 용서받은 여인의 사랑은 더욱 큰 결실을 맺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기다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유혹과 고통 속에서 기다림은 정말 길게만 느껴지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다림 속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 때, 힘들게만 느껴지는 기다림은 더 이상 우리에게 고통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순간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이 풍성하다.’라고 말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 성인들이 나오며 어려운 시기에 영웅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치입니다.

이처럼 악은 나쁘지만 악의 존재는 인간의 선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다림은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며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시간이 되고, 우리의 기다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설렘 가득한 시간이 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며, 우리 마음을 두근두근 콩닥콩닥 뛰게 하는 기분 좋은 기다림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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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다려 주시는 주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그 사랑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복음은 인내하시는 모습이다.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않으시고 추수 때까지 밀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신다. 곧 심판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일개미 이야기를 생각한다.

일개미는 집을 짓거나 먹이를 모으는 개미다. 여왕개미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자기 체중의 25배가 넘는 물체들을 옮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날개와 생식기능이 없다.

그런데 일개미라고 다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다. 1/3은 일개미답게 부지런히 일한다. 1/3은 누가 시켜야 일을 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빈둥빈둥 놀며, 나머지 1/3은 생긴 것만 일개미지 일할 생각이 전혀 없이 자연스럽게 논다. 그런데도 개미사회는 1/3의 부지런한 일개미 덕분에 큰 탈 없이 유지되고 있다.

어느 날 학자들이 부지런한 일개미 1/3만 따로 분리해서 독립된 집단을 만들었는데 그 집단을 관찰하니 다시 1/3은 부지런히 일하고 1/3은 마지못해 일하고 1/3은 언제나 논다는 것이다. 반대로 게으른 개미 1/3을 모아 놓았더니 그 중의 1/3은 또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가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어쩌면 사람들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공동체 1/3의 부지런한 사람들 덕에 잘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지런한 사람끼리 모아놓으면 또 일개미의 법칙이 시작된다. 어느 집단이든지 그 집단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저 관망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존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다 양심적이고 올바르고 모범적인가? 그렇지 않다.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키운다.

맘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무슨 일을 하면 재미있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 보면, 결국 일개미의 법칙이 나타난다. 내가 커지지 않는 한 불평불만의 요소는 어디에나 있다. 혹시라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마음으로 불편함이 있다면 먼저 내 마음 단속을 해야 한다.

MBTI라는 성격검사 유형이 있는데 검사의 결과물을 가지고 같은 성향끼리 모여 보면 깜짝 놀란다. 내가 싫어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모두 나의 그룹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볼 때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 흉이나 보고 험담한다.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다시 그 마음 맞는 사람 중에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인생 여정이다. 살다 보면 착한 사람에게는 무엇이 잘 안되고 악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잘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못된 사람을 왜 그냥 두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으로 비유되는 밀과 악한 사람으로 비유되는 가라지에 대해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하신다.

왜 그냥 두실까?

1).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남이 잘못했으면 즉각 벌을 내리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참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이다. 회개의 기회, 은총의 기회를 주실 때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악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기를 바란다.

2). 의인들에게는 단련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다. 금도 불에 달궈야 순금이 된다. 시련과 역경을 통해 단련되고 강해지게 된다. 악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좋은 길로 인도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하늘에 보화를 쌓게 된다. 우리에게는 선을 베풀 기회다. 공로를 쌓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얌체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감사해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를 다듬어 주고 견고하게 하는 복덩이다.

3). 악인에게도 어느 정도의 선은 다 있다.“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감화의 비결은‘사랑’이다. 우리가 설령 우리 자신을 포기할지 몰라도 주님만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부러진 갈대 같은 삶을 살지라도 우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신다. 지금 당장은 좋은 것 속에 나쁜 것들이 들어있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어김없는 구별’로 좋은 것이 곳간에, 즉 하늘에 들어간다.

“누가 여러분을 모함하고, 빈정거리고, 험담하며 사사건건 반대합니까? 그래서 미워죽겠습니까? 속상하고, 분하고, 야속합니까? 그 사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거두어 낼까요? 뽑아버릴까요?”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속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를 뒤흔드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만이 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악의 세력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은총 안에 머물기를 기도한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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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의 유명한 ‘린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린다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린다는 지적이고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학생 시절 차별과 정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린다는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쪽에 더 가능성이 높을까요?”

1) 린다는 은행원이다.
2) 린다는 은행원이며, 페미니스트 운동가이다.

어떤 것이 확률적으로 더 높은 답이 될까요? 당연히 1번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확률이 낮은 2번을 선택합니다. 이는 이야기의 그럴듯함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타당성의 착각을 매일 하는 우리이기도 합니다.

‘내가 산 주식이 곧바로 오를 거야.’, ‘도박해서 지금까지 잃었으니 이번 판은 꼭 딸 거야.’, ‘이 사람은 착하니까 나를 이해할 거야.’ 등등의 말은 어떠합니까? 그럴듯한 판단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논리적이지 않고, 계속 착각에 빠지는 부족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은 어떠하실까요? 그렇지 않음을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이웃에게 원한을 갚기 위해 상대방의 밭에 잡초씨를 뿌리는 악의적인 보복 범죄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법에도 이를 처벌하는 규정도 있었습니다. 특히 가라지는 자라는 동안에는 밀과 겉모습이 거의 똑같아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삭이 패고 열매를 맺을 때야 비로소 구분되지만, 이미 뿌리가 밀과 엉켜 있어 뽑아내기 어려웠습니다.

종들은 당장 가라지를 뽑아내어 밭을 깨끗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아직 연약한 밀(의인)의 뿌리까지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단 한 명의 죄인을 처단하는 것보다, 단 한 명의 의인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오늘의 가라지가 회개하여 내일의 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을 ‘가라지’라 낙인찍고 공동체에서 배제하려 합니다. 타인을 심판하기보다 자기 안의 가라지인 죄악을 바라보고 뉘우치는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불의와 악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마지막 수확 때는 반드시 옵니다. 이날을 위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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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유대 경건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으로 드러난 비전은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자체)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바로 유대 경건자들과 근본적인 차이와 차별이 드러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하느님의 다스림과 나라’에 관한 것임은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비유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이 두 가지를 깊이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악에 관해 어떤 처신을 해왔고,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반면교사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 점은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선의 좌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제자들과 구별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한 선행의 실패가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서 꿋꿋이 자신이 해야 할 바, 곧 하늘나라의 선포를 실천해 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리지 비유>에서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단호히 선으로 악을 대처하는 대신 자신을 악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를 견책하신 듯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선 곧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가치인 밀밭에, 악과 배격해야 할 악의 가치인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 그 실체, 곧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13,28)라고 악의 실체를 인지하고 직시하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뜻과도 상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게 진솔한 세상(=교회/가정/개인)의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행동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 역시 이런 현실 앞에서 당황스럽고 혼란을 겪을 수도 있으며 즉각, 가라지(=악)을 보고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13,28)라고 대응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에 잠시라도 직시하고 직면하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단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졸속한 해결책에 “아니다. 가만두어라.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13,29~30)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농사법은 세상의 농사법과 다름을 보여줍니다. 이런 성급함은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더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 곧 신앙의 시선에서 신중히 바라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악을 우리 가운데 두고 견디어 내자는,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처신이 엄청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방안처럼 들릴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은 이런 방안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셨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어떤 누구도 시초에는 선과 악을, 밀과 가라지를 분명하게 알아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목 현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목자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입견에 따라서 성령 운동이나 다른 신심 운동, 혹은 어떤 봉사활동이나 모임 등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가리지(=악)를 뽑으려다 밀(=선)까지 말살하지 않고는 악을 세상(=교회, 공동체, 가정이나 개인)에서 멀리 몰아낼 능력이 애당초 인간에게는 부족하고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밀과 가라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보면 밀까지 뽑아 버릴 수가 있으며,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밀과 가라지 뿌리가 서로 얽히게 되어 있어서 가라지를 뽑아내려다 밀까지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었고, 이를 아시는 예수님은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30)라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확실히 초대 그리스도교인은 악(=개인, 그룹이나 부류)을 자신들과 구분하고 구별 지으려고 했고 함께 더불어 공존하고 공생하기보다 배격하고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자신들의 약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종교의 엘리트 의식 곧 선민의식에서 자신들은 거룩하고 교회 밖에 사람들은 죄스럽다고 단정하고 확신했기에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는 사고 의식에 감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태도는 무엇보다 먼저, 일단 타인에게 악의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내 탓보다’ 늘 ‘네 탓’으로 돌려 면피하려고 합니다. 그 책임을 돌리기 시작하면 우리네 삶의 태도는 좀 더 신중하게 자기 일이나 하겠다, 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악의 실체를 인식하면서도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꿋꿋이 선을 실행하는 길’ 밖에 달리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 하나만이 악에 대처하는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다 보면, 끊임없는 악순환만이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율법이 인간의 구원을 제약하는 곳이 어디든지 율법을 반박하였고, 오로지 하느님의 선으로만 하늘나라를 현실화하려고 묵묵히, 꿋꿋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보다 현실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갑시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3,30.39.43)

여러분의 가정이나 공동체의 밭에도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 않나요.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가라지를 인식하고 인지할 때, 어떻게 처신하고 대처하며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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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선과 악의 기로에서>

1971년, 사회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심리학 실험을 하게 됩니다. 실험은 감옥에 있는 이들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25명의 중산층 남자 대학생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무작위로 교도관과 수감자 역할로 나누었습니다. 실험 1일차, 교도관 역할을 맡은 이들은 수감자 역할을 하기로 한 참가자들의 집에 찾아가 실제로 체포하는 과정을 똑같이 진행하였습니다. 수감자들은 그렇게 대학교 지하실에 미리 준비된 교도소에 끌려갔고 실제 죄수들처럼 알몸 검사, 분말 소독을 행한 뒤 발목엔 쇠사슬을 달았습니다.

실험 조교들은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에게 그들이 우월해서가 아닌, 단지 우연에 의해 교도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실제와 비슷한 근무복과 선글라스를 지급하고 임무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임무는 첫째, 교도소 내 질서를 유지할 것. 둘째, 수감자들이 탈옥하지 못하도록 감시할 것. 셋째, 수감자들이 진짜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은 심리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실험이 시작된 첫 날부터 수감자들과 교도관들의 말투나 감정이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도관들은 폭력적으로 변했고 수감자들은 수동적으로 변했습니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위해 17가지의 교도소 규칙을 만들었고 수감자들이 저항하자 소화기를 뿌려 진압했으며 침대를 모두 빼앗았습니다. 2일차, 3일차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가족면회가 있는 날,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에게 간식을 주면서 가족들에게 실험에 대해 좋은 말만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수감자들은 적극적인 저항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수감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고통을 호소하던 수감자 중 한 명은 분명 자신이 원하면 실험을 그만둘 수 있었음에도 나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4일차, 가톨릭 신부와의 면담에서는 2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자신을 이름이 아닌 수감자 번호로 소개했으며 교도소에서 나가기 위해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간청했습니다. 단 4일 만에, 완전한 수감자의 심리 상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5일차에는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에게 교묘한 방법으로 성적학대를 포함한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단 5일 만에 수감자들은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무력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결국, 2주로 예정 되어있던 이 실험은 불과 5일 만에 황급히 마무리 됩니다. 이 실험은 환경과 직책이라는 조건 안에서 평범한 인간도 얼마든지 악에 빠질 수 있으며, 그 악은 너무나도 교묘해 이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한 대표적인 심리학 실험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를 숙고해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 5일 만에,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이토록 사람이 악해지거나 수동적이 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교도관 역할이었다면 어떠한 행동을 했을까? 나 역시 비인간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을까? 자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밀농사를 위해 밭에 좋은 씨만 뿌린 집주인에게 종이 찾아갑니다. 그리고, 좋은 씨앗만 뿌렸음에도 불구하고 가라지가 자라고 있음을 보고합니다.

이에 주인은 가라지를 거두어 내겠다는 종을 만류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워낙 생김새가 비슷해 가라지를 골라내려다 밀까지 함께 뽑을지 모르므로 수확 때까지 그냥 놓아두라는 것입니다. 복음적 해석에 따르면, 이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고 밭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좋은 씨는 선한 이들이며 가라지들은 악한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선인과 악인들이 교묘하게 섞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교묘함. 이것은 바로 악이 가지고 있는 가장 주요한 특징입니다. 악은 언제나 교묘하게 우리의 마음에 침투해 우리의 행동을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일을 하고자 했는데 갑자기 짜증 섞인 마음이 들고, 기꺼이 남을 위해 봉사했는데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드는 등 악은 보이지 않게 우리의 마음을 잠식하곤 합니다.

나아가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일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악의 교묘함에 빠져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겠습니다. “현재 나는 어떠한 상태인가? 선인인가 악인인가?”

물론 부족한 인간이므로 완전무결하게 선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나는 선과 악 중에 과연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지요. 아마 이러한 질문에 아주 당당하게 “나는 선하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아마도 중간쯤이 아닐까요…” 라고 생각하실 듯 합니다. 그러나 현재 선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행인 것은 오늘 복음의 비유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지금 당장이 아닌 수확 때, 즉 우리의 죽음 이후, 하느님 대전에 서는 날로 미뤄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마음을 다 잡아 하느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되돌려야 합니다. 교묘한 악의 유혹들에서 벗어나 확고한 신앙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며 마음의 절대적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현재의 나의 마음은 밀인지 가라지인지 헤아려 보고 교묘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풍성한 열매로 주님의 품에 안길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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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힘을 키우는 두 가지 방법>

오늘 복음은 세상에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 악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사랑이신데 어떻게 세상에 악이 생겨났는지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들이 잠자는 사이에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가라지 같은 사람들을 만드신 것이나 공동체 안으로 들여보내신 것은 아니라는 말씀인데 그 원수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말씀치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전체를 가지고 볼 때 누가 원수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알 수 없으며 내가 원수일 수도 내가 가라지일 수도 있기에 권한과 자격이 있는 사람인 양 내가 가라지를 뽑아내려 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연중 16주 가르침 중의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뽑아내려 들지 말고 오히려 잘 참아주고 인내하라는 것이고, 이것을 오늘 첫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심으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지혜서 12장의 이 말씀은 11장의 말씀과 연장선상에서 보면 좋을 것입니다. 11장에서 지혜서는 하느님의 능력/전능하심과 창조의 관계를 이미 얘기하며 전능하시기에 모두에게 자비로우시다고,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를 싫어하실 리 없고 자비하시다고 합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사랑하듯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무리 못나고 잘못해도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 없고 자비롭고,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지요.

고슴도치도 사람도 자식에게 이러할 진데 전능하신 하느님은 당신 뜻대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기에, 당신 뜻대로 만드신 다음 보시고 좋다고 하신 분이시기에, 창조하신 우리를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없애버리고 싶어 하지도 않으시지요.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자비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그런데 지혜서는 우리도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고, 주님도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데 하느님만큼 힘없고 전능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처럼 자비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만큼 자비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만큼은 아니어도 자비로워야 하고, 사랑과 용서와 인내의 힘을 키워야 하고 그렇게 하여 자비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힘을 키우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체력을 음식 섭취와 훈련으로 키우듯 사랑의 힘도 음식 섭취와 훈련으로 키웁니다.

음식 섭취는 기도이고 훈련은 반복되는 자비 실천입니다.

기도는 원하는 것을 취득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랑을 섭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떠올리면 즉시 청원기도 곧 달라는 기도를 떠올리고 원하는 걸 얻는 기도를 생각하지만 사랑의 힘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해도 사랑의 힘이 생기거나 증진하지 않으면 잘못 기도하는 거지요.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 사랑을 섭취하고 주님의 원수 사랑의 모범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원수나 가라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인내하고 사랑하고 용서할 힘을 내게 주십사고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를 이렇게 반복함과 동시에 자비의 실천도 반복해야 합니다. 씨름을 잘하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하지 먹은 다음 연습을 실전처럼 해야 하듯이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다음 실제로 원수나 가라지라고 생각되는 이들과 사랑의 씨름을 거듭거듭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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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마태 13,24-43)은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단락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가라지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와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입니다.

연중 제16주일인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묵상글은 ‘마산교구보에 실린 저의 농민주일 강론’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

‘우리농은 흙 사랑, 땅 사랑, 물 사랑, 생명운동입니다.’

오늘은 서른한 번째 맞이하는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주일은 흙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물을 살리는 생명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그런 농민들을 기억하고, 그런 농민들이 흘린 땀과 수고에 함께 동참하자는 데에 그 깊은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생명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모든 농민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립시다!

2015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생태계의 주보 성인이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언급하시면서 죽어가는 지구,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자는 회칙인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하셨습니다. 이 회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살게 하자’는 호소를 담고 있으며, 인간의 ‘생태적 회계’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무농약이나 저농약, 그리고 유기농과 같은 생명농법으로 흙과 땅과 물을 살리는 일에 애쓰고 있는 농민들, 특히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은 정말 땀을 많이 흘립니다. 많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좋은 먹거리를 주기 위해서 계속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풀과의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레와 같은 피조물을 죽이기 위해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손수 벌레를 잡아내는 수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농민들의 수고와 땀은, ‘생명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보전 행위’입니다.

생명농법으로 농사짓는 농민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점점 더 고령화되어 가고 있어서 더 힘이 듭니다. 힘들어 하고 있는 농민들에게 힘을 실어줍시다! 그래서 생명농민들이 많아지게 합시다! 그렇게 하려면 그들이 하느님의 절대적 도움을 받아 만들어 낸 생명물품들이나, 그들의 1차 생산품들을 가지고 다시 만들어 낸 생명가공품들을 우리들이 잘 소비시켜 주어야 합니다. 가톨릭우리농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곳입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생명물품들을 잘 홍보하고 소비시키고 유동시키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사고팔고하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장사행위로 비추어지지만, 우리농은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농의 본질은 장사가 아니라 운동입니다. 그래서 “우리농은 흙 사랑, 땅 사랑, 물 사랑 생명운동입니다.” 흙이 죽고 땅이 죽고 물이 죽으면 우리도 죽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농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마태 13,24-43)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는데, 그 소재는 농부들의 친구인 땅과 씨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13,24)

점점 더 빠르게 변하는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왔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자연재해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적 회개’입니다. 생각과 말이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회개’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꿉시다! 그래서 흙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물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합시다! ‘회개는 말이나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나의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꾸고 지구를 살리는 일에 큰 밑거름이 됩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이 땅에 있는 많은 생명농민들을 기억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그들의 수고와 땀에 몸과 마음으로 함께 합시다! 그들이 만들어 낸 생명물품들을 잘 애용합시다! 그래서 나도 살아나고, 너도 살아나고, 지구도 살아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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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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