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7-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의 참본분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을 분명하게 전해 주는 것이었지요. 예언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렇지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이 많기만 합니다.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기에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가족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하지 않습니까? 가족에 대한 희생과 사랑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도 되었지요. 반면 가족에 대한 집착이 혈연, 지연이라는 폐해마저 가져왔습니다.

편협한 인간관계를 초래하기도 하였지요. 따라서 오늘 예수님 말씀은 가족 관계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인간이 되어야 참된 가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참된 인간상이 절실하기만 합니다. 이를 위해 내가 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만남을 통해 상대방이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성을 본인이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노력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아닙니까?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우리가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나만의 십자가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내 자신이, 우리 공동체가, 지어야 할 십자가(순교/희생/봉사)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아직 많이 못하고 있다면 어떤 십자가를 지으며 신앙생활을 하고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3. “가족 관계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라는 말씀”에서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지 묵상해 봅시다. 무엇이 가족 관계를 늘 우선으로 생각하게 만드는지 이야기 해보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시 하는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
———————————–
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
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후배 신학생들이 한국 식료품을 소포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묵상은 후배들에게 쓴 제 답장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대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이들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도 한국 식료품을 살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어이 소포를 보내고야 마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12시간 넘게 걸리는 이곳에 소포를 보내면 고추장 용기가 깨질 수 있다는 사실보다, 이 사람이 고추장 한 숟가락 먹지 못할까 걱정하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시험, 논문 등으로 바쁜 시기인데 귀한 시간 쪼개서 보답도 없는 소포를 보내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세상은 그대들처럼 그리 어리석지 않습니다. 받을 것 다 받고, 자기 앞가림부터 챙기고, 손익 계산에 재빨라야 살 만하다는 것을 그대들처럼 모르지 않습니다.
그대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저는 어리석은 또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였습니다.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어린 사제에게 털어놓았던 교우분들, 타지에서 고생한다며 봉투를 쥐어 주시던 선배 신부님들, 세상 좋은 것들을 마다하고 울타리 속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살겠다고 세속의 옷을 벗은 젊은 처자들 …….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렇게 어리석어 한평생 거지로 살았고, 가타리나 성녀도 긴 머리를 잘랐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도 자신의 젊은 생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죄없이 고통을 받고 돌아가시면서도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을 용서하시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달리시고야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이여, 그대들의 어리석음이 하느님께 큰 찬양이 되었으리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그대 자신들을 살릴 것이라 믿습니다. 어리석은 그대들에게 제 어리석은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함께 갑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634
6월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4WSNXg7D6M
[의정부교구 이은형 티모테오(의정부교구 총대리)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장을 위한 포기는 근본적인 선택!>
예비 신자들이나 갓 세례를 받은 형제자매들이 무심코 읽었을 때 꽤 당혹스러운 성경 구절들이 몇 군데 있는데, 오늘 봉독되는 복음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복음 구절을 읽고 묵상할 때는 ‘나보다 더’라는 표현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부모나 가족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새로운 왕국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이나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합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그 어떤 차별도 소외도 없이 공평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서의 국면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1,30)
결국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형제자매가 한 가족이 될 것이니, 지상에서부터 그런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에 앞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께 우선권을 드리며, 그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언젠가 도래할 새로운 질서의 세상에 미리 맛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모든 가치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 혈연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열두 사도가 새로운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 것처럼, 오늘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분의 가족으로 수용됩니다.
새로운 혈연관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의 영적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맛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통해 그분의 형제가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이요 은총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두 손에 다 쥘 수가 없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아름다움, 더 큰 가치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할 태도는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들에 대한 과감한 포기입니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작은 시냇물을 포기해야 합니다. 더 크고 맛있는 사과를 쥐고 싶다면 그 전에 쥐고 있는 작은 사과를 던져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포기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봉헌 생활, 수도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포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적 과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포기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며 모든 것을 다 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므로 정말 기쁜 일이며 행복한 일인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w6d1UzdmrE
++++++++++++++++++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고 하십니다. 파견된 이를 대하는 것이 곧 파견하신 분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상급의 법칙을 일러 주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고 받아들이면, 그 예언자가 받을 상을 내가 받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참 예언자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예언자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어 온 사람, 곧 파견하신 분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 예언자에게는 분명한 표가 있습니다. 참 예언자는 반드시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파견하신 분의 뜻을 전하기에, 나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나에게 순종을 청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순종하면, 반드시 성령의 능력이 따라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를 그대로 두는 자는 예언자가 아니며, 그 말을 들어도 내 믿음이 조금도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거짓 예언자입니다. 참 예언자의 말에 순종했을 때는 언제나 상이 옵니다. 이것이 예언자를 알아보는 법칙입니다.
바로 여기서 구약의 나아만 장군을 보아야 합니다.
시리아의 위대한 장군이던 그는 나병에 걸려
엘리사 예언자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심부름꾼을 통해 이렇게만 전합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2열왕 5,10 참조) 나아만은 격분합니다. “다마스쿠스의 강물이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낫지 않으냐”(2열왕 5,12 참조) 하며 발길을 돌리려 합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했습니까. 일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너무 쉬워서, 그 쉬운 말에 순종하면 부하들 앞에서 자기 영광이 깎인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장군인 자기에게는 걸맞게 대단하고 번지르르한 치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안수만 어서 해 달라던 그분들처럼, 나아만도 자기 방식의 치유만을 고집한 것입니다. 그가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한 것 자체가, 그가 하늘의 증언을 거부하고 땅에 속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나병이라는 진노는 그에게 그대로 남습니다.
그런데 그를 살린 것은 한 부하의 말이었습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더 큰일을 하라고 하였더라도 하셨을 텐데, 그저 몸을 씻고 깨끗해지라는데 못 하실 것이 무엇입니까.”(2열왕 5,13 참조) 이 부하야말로 순종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아마 어릴 적부터 알았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 하고 입을 벌려라” 할 때 입을 벌리면 밥이 들어온다는 것을. 작은 순종이 생명을 채워 준다는 것을 몸으로 익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을 시켰어도 했을 텐데 그깟 목욕이 무어 어렵냐고 권합니다. 나아만이 마침내 자존심을 꺾고 그 쉬운 말에 순종하여 요르단에 몸을 담그자,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새로 돋아 깨끗해졌습니다.(2열왕 5,14 참조) 그 작은 순종이, 자기에게 명령한 그 예언자가 참으로 하느님께 파견된 분임을 인정하는 인장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순종이 표징보다 먼저임을 배웁니다.
표징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순종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요한 복음은 이를 놀랍게 표현합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요한 3,33)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참되심에 인장을 찍은 것이다”가 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감히 창조주께 “당신은 참되십니다” 하고 도장을 찍어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한 걸음 내디딜 때, 그 순종이 곧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참되심에 찍는 인장이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독을 채운 일꾼들만이 그 물이 포도주가 된 표징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파견된 이에게는 파견하신 분의 권능이 함께 주어집니다. 나라의 특명을 받은 전권 대사가 외국에 나가면, 본국은 그 대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지원합니다. 대사의 체면이 곧 나라의 체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신다. 그분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 3,34 참조)
가장 완전하게 파견된 분, 곧 아버지의 말씀 자체가 되어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가장 완전한 예언자의 말씀마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쉬운 말을 마다했듯이, 안수만 청하던 그분들이 제 말을 마다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합니다. 그냥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죽어 가며 백억짜리 수표를 내밀며 말한다고 합시다. “사실 내가 네 아버지다. 잃어버린 너를 찾아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이것이 너를 위해 평생 모은 전 재산이다. 은행에 가서 찾아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는 시늉이라도 해 보는 것입니다. 잠깐의 창피를 무릅쓰고 은행에 그 수표를 내밀어 보는 것입니다. 찢어 버리거나 방치하면 그것은 한낱 종잇조각이 되고, 아버지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그분이 참되신지 알아보려 시도라도 한다면, 은행은 분명 돈을 내어 줄 것이고, 그제야 우리는 온전히 믿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하니, 우선 믿고 한번 실천해보는 것 외에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제가 조원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목회 위원들에게 한 가지를 시킨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날마다 읽고 한 줄씩 단체 대화방에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위원들은 거의 다 따랐습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하기 싫어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주임신부가 그것을 왜 시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묵묵히 실천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습니까. 그 책을 읽으며 나아간 사목위원들은 하나같이 마음이 일치하고, 순종하며, 맡은 임무를 훌륭히 해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사목회를 한 것보다 그 책을 읽게 된 것이 더 감사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요구가 있었고, 그 요구에 순종했더니, 표징이 따라온 것입니다.
오늘은 교황 주일이며, 교회의 권위를 묵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태도는, 그분이 파견하신 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고스란히 달려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끝까지 공경했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어도 “내 어찌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겠느냐”(1사무 26,9 참조) 하며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그 인품을 따진 것이 아니라, 파견되어 세워진 분이라는 그 하나를 본 것입니다.
이제 예언자를 알아보는 법을 정리해 봅니다.
참 예언자는 반드시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를 그대로 두는 자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순종할 때 반드시 상이 따라옵니다. 순종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그러니 그 인품이 훌륭하면 더 좋겠지만, 인품을 따지기 전에 그분이 파견된 분이라는 그 한 가지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나아만처럼 자존심을 꺾고, 안수만 구하던 그 손을 내려놓고, 청해진 그 작은 일에 그냥 한번 순종해 보십시오. 그 작은 순종이 어린아이의 새살처럼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국의 사상가 장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지만 밭을 가는 데는 소용이 없다. 큰 기둥은 집을 짓는 데는 필요하지만 작은 틈을 메우는 데는 소용이 없다. 부엉이는 밤에는 작은 벌레를 잘 보지만 낮에는 큰 산도 보지 못한다.” 장자는 능력과 쓰임과 본성이 다르므로 서로를 함부로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꽃밭의 꽃들이 서로 다른 색과 향기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자리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앞에서 공동체를 이끌고, 누군가는 뒤에서 묵묵히 봉사합니다. 누군가는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누군가는 주방에서 설거지하며 공동체를 섬깁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의 덮개가 떨어졌습니다. 매일 산책하면서 사용하던 것이라 새로 사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붙이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7불짜리 순간접착제를 사서 조심스럽게 붙였습니다. 붙인 자국은 남았지만,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 바로 이런 접착제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주 갈라집니다. 오해 때문에 멀어지기도 하고, 자존심 때문에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정치와 이념 때문에 갈라지고, 세대 차이 때문에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틈을 다시 이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오해로 갈라진 사람은 이해의 접착제로 붙이면 됩니다. 미움으로 멀어진 사람은 사랑의 접착제로 붙이면 됩니다. 교만 때문에 헤어진 사람은 겸손의 접착제로 붙이면 됩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가장 잘 붙는 접착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믿음, 희망, 사랑’의 접착제입니다.
지난번 사제 모임에서는 ‘미국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미국 한인 가톨릭교회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참 인상 깊었습니다. 미국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중심에 있었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플로리다를 중심으로 스페인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동부에서는 영국에서 온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가 중심이었던 미국 사회에서 가톨릭교회는 오랫동안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 이민자, 독일 이민자,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미사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외롭고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 교회는 가족이 되었고, 쉼터가 되었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사회복지 사업과 교육 사업을 통해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미국 가톨릭교회는 더 이상 주변부의 교회가 아니라 미국 사회의 중요한 공동체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미국 한인 가톨릭교회의 역사 역시 감동적이었습니다. 1966년 샌프란시스코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시작된 한인 공동체는 이제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메이플우드, 필라델피아, 워싱턴 DC의 공동체가 50주년을 넘겼고, 올해는 타코마 성당이 50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내년이면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 사제들이 중심이 되었고, 교우들은 낯선 땅에서 눈물과 땀으로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언어도 어려웠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고, 문화적으로도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신앙으로 서로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김치를 나누고, 국을 나누고, 눈물을 나누면서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제 모임을 통해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공동체가 참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이것은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헌신 덕분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황 주일’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교황님을 존경한다고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대한 사랑도 크고, 미국 출신인 레오 14세 교황님에 대한 기대와 사랑도 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교황님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하나로 이어주는 사랑의 접착제이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우리는 교황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권력과 성공보다 사랑과 평화와 연대를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접착제가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제1독서에서 가난한 부부는 예언자 엘리사를 위해 작은 방을 내어주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그런 부부를 축복하였고, 아이를 갖게 되리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결코 자기의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작은 나눔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위로의 손길 하나, 식사 한 끼의 배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 주는 마음이 공동체를 이어주는 접착제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삶이 바로 ‘새로운 삶’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 역시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갈라진 세상을 다시 이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붙이고, 상처를 용서로 붙이고, 절망을 희망으로 붙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황님이 전 세계 교회를 이어주는 사랑의 접착제이듯이, 우리도 가정과 본당과 세상을 이어주는 믿음의 접착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누군가를 이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접착제가 되게 하소서.”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얼핏 차갑게 들리는 이 말씀 속에는 급진적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질서, 혈연과 그에 따른 기대, 보호와 인정의 체계가 더 이상 궁극적 기준이 아니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합당함’은 개인의 완전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순발력을 가리킵니다. 그 응답은 때로 가족의 시선과 어긋나기도 하지요. 가족의 자랑이 아닌 실망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기존의 관계와 질서는 흔들립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10,38). 십자가는 기존의 관계와 질서를 깨뜨리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흔드는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 가는 느낌, 안전한 자리에 남아 있으려는 본능과 복음을 향하여 걸어가라는 부르심 사이의 갈등, 예수님께서는 그 상실감과 갈등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오히려 당당히 맞서라고 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0,39).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숨이 단순히 이어지는 것만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지키려다 잃고 내려놓았다가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목숨일 테지요. 이 말씀은 지켜야 할 목숨의 가치에 대하여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일까요?
이러한 거창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오늘 복음이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시원한 물 한 잔입니다. 누군가를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맞아들이는 작은 손길을 이야기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급진적 요구를 말하면서도 작은 친절을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물 한 잔의 배려 속에서도 열립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37-42: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 모든 인간적 관계나 애착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절대적 가치를 선포하신다. 동시에 당신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질 축복과 상급을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제자가 되는 사람의 자기 포기와 십자가, 둘째,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의 환대와 보상이다.
1. 절대가치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는 인간적 애정을 부정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랑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을 덜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안에서 더 참되게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그분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De Doctrina Christiana I,22 현대적 의역)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모든 관계의 기준이자 근원이다.
2. 십자가: 제자직의 본질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표지이며, 제자도 역시 그 사랑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너 자신의 뜻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에 따르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35,2 의역) 교리서는 이를 분명히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유일한 희생 제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제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는 것의 모범이다.”(618항 요약)
3. 예언자를 맞아들이는 환대
예수님께서는 또한 말씀하신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즉 제자를 맞아들이는 행위는 곧 그리스도를,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행위다. 작은 물 한 잔의 환대조차도 하늘에서 잃지 않고 보상된다.(42절) 이는 단순한 인간적 친절을 넘어, 신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환대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의 종들을 환대하는 이는 하느님 자신을 환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의 말씀과 은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Adversus Haereses IV,18,4 의역) 이러한 환대의 정신은 이미 구약에서 수넴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한 사건(2열왕 4,9-10)에서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심으로써 응답하셨다.
4. 세례와 제자직의 길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와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로 설명한다.(로마 6,3-4) 제자직은 단순한 추종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이미 시작된 “죽음과 생명”의 여정이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선포한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결합되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7항 요약) 따라서 제자의 길은 매일의 작은 십자가 속에서 자기 포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동시에 그 길은 부활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 삶 속에서도 늘 선택의 갈등이 있다.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욕망 사이에서 매일 십자가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사랑을 향한 길이다. 또한, 우리는 직접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더라도, 선포자들을 환대하고 도울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작은 친절의 행위조차도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기여한다.”(Evangelii Gaudium 279 의역)
6. 결론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묻는다. 나는 절대가치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는가? 나는 복음 선포자들을 환대하고 있는가? 우리의 삶이 십자가를 감수하는 제자직의 삶이 될 때, 또 작은 환대와 나눔을 통해 복음을 맞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참된 제자가 된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품으니 사람>
마태오 10,37-42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사람 품으니 사람>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사람
품으니
사람
참된 사람
품으니
참된 사람
착한 사람
품으니
착한 사람
고운 사람
품으니
고운 사람
바른 사람
품으니
바른 사람
맑은 사람
품으니
맑은 사람
밝은 사람
품으니
밝은 사람
따뜻한 사람
품으니
따뜻한 사람
의로운 사람
품으니
의로운 사람
부드러운 사람
품으니
부드러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품으니
아름다운 사람
사람
품으니
사람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드시 걸맞은 상을 받을 것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변덕스럽지 않다.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러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길 기도한다.
어느 도시에 공부하는 스님과 술 파는 여인이 나란히 이웃에 살았다. 스님은 열심히 공부했고, 여인은 열심히 술을 팔았다. 여러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스님은 지옥에 떨어졌고, 여인은 천상 극락에 들어갔다. 마음속으로 부러워했던 것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스님은 열심히 공부하고 예불을 하면서도 ‘아! 부럽다. 맛있는 술에다가 어여쁜 여자, 춤추고 노래하고 얼마나 신날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여인은 ‘아 부럽다. 부러워! 새벽마다 예불드리고 꽃을 바치며 경전을 읽고.. 얼마나 행복할까?’ 하며 늘 거룩함을 갈망했다.
성경에 보면, 다윗에게 기름 붓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엘 상16장) 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한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때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받을 것이다.”(1코린 4,3).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하시며 말씀하셨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르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우리는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항상 주님을 향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 어중간, 양다리 걸치기는 없어야 한다. 주 하느님 앞에서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출가는 세속의 집을 떠나 구도의 길을 걷는 것이고, 가출은 집이 싫어서 그냥 나와 방황하는 것이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출가한 사람이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제시하고 걸으신 길을 함께 살아간다. 출가란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을 길에 나와 있으나 집을 떠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집을 떠났으나 길에 있지 않다. 누가 하늘의 상을 받겠는가? 술 파는 여인인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집착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것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예수님을 참으로 먼저 사랑하는 것이, 부모, 자녀, 형제를 사랑하는 길이다. 예수님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은 새로운 양식으로 자기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힌다. 자기 소신, 주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구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나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그것이 승리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비워야 한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게 된다. 완전한 헌신, 순종이 신적인 사랑의 힘으로 충만한 새로운 마음을 되돌려 받게 된다. 사랑의 진가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안다. 사랑에는 생각지도 못한 보답이 온다. 지금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하며 사랑하는 그 자체가 상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지만, 그저 허울뿐인 그리스도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길,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을 향하여 있고 그분이 원하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해야 한다. 그 길이 생명과 구원의 길이다.
“주님,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재미있는 치료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거절 치료라는 것인데, 100일 동안 매일 최소한 한 번씩은 거절당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거절당할 부탁을 해서 거절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10만 원만 빌려 달라고 묻기.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를 리필 해달라고 요청하기.
방송국에 가서 자기가 직접 날씨 예보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
도넛을 올림픽 오륜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기.
어떻습니까?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고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거절이 생각보다 덜 고통스럽고, 때로는 즐겁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거절에 크게 아파하기보다 오히려 웃어넘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거절당하기 위해 말했는데, 이를 거절하지 않고 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거절에 큰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이의 거절에 굳이 상처받을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뜻밖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결국 사람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에게는 실망도 하게 되고, 아픔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 그 자체에 머물면 이를 극복해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사랑 그 자체인 하느님께 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가족을 미워하거나 인륜을 저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가족의 기대와 혈연적 이기심과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타협하지 않고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자기의 이익과 안전만을 움켜쥐려고 아등바등하는 삶은 결국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기 시간, 에너지, 나아가 생명까지 내어놓는 이타적인 삶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다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은 우선순위를 주님께 아직 두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37-42)
1) 이 말씀은, ‘구원의 자격’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37절의 부모와 자녀에 관한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가족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것들과 그것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애착심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서 루카복음 9장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예수님께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작별 인사를 핑계로 주님을 따르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다시 풀이하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은, “저는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입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우선 먼저 가족들에게 돌아가겠습니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엘리사 예언자를 제자로 삼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1열왕 19,19ㄷ-21)
엘리사는 사실상 ‘따름’을 먼저 실행한 다음에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겨릿소를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어서 사람들을 먹였다는 말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버렸다.”라는 뜻입니다.
2) 38절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갈 때 힘든 일을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을 만나더라도 구원받는 것을 포기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39절의 목숨에 관한 말씀은, “현세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만을 희망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그 생명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
40절-41절의 말씀은, 사도들의 권위와 권한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파견하신 분의 뜻에 어긋나는 말이나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복음을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도들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42절의 ‘물 한 잔’에 관한 말씀은,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10ㄴ-11)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빈손’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10,9-10ㄱ)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먹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서, 마음 착한 사람이 예수님의 사도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와 같고, 그 음식은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과 같습니다. 그렇게 사도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그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상을 해 주신다는 것이 42절의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0,16)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또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나의 믿음이 옳다. 나의 삶이 옳다.”라는 확신과 신념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지켜 주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
[군종교구 박혁진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는 이웃 사랑의 삶>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자 교황 주일입니다. 그 직책에 맞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려지겠지만 교황님 자신도 짓누르는 중압감과 책임감 때문에 늘 고뇌와 시련 중에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지혜와 영육간의 건강을 주시도록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마태 10,4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의 참 본분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을 분명하게 전해 주는 것이었지요.
예언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 자선과 선행을 베푸는 삶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그러한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옆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수넴 여인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엘리사 예언자를 친절하게 대접하고 맞이한 이 여인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 아기를 갖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선행의 결과로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진 것이지요.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과 착한 행동 하나 하나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 다 기억하시고 알아주시어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위안 삼아 기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한 선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한 선행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 죄악의 삶에서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부활의 삶이요, 주님 안에서 함께하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삶, 그리하여 서로가 깊은 친교와 사귐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깨달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그 길을 통해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맛보고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
[의정부교구 김경모 야고보 신부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자들은 애써 못들은 척, 안 들은 척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잊을만하면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시곤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 당신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 하셨을까요?
겉으로 나타나는 십자가는 분명 고통이요 아픔이요 괴로움입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조차도 죽음이 다가오자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을까요? “아버지, 이 쓴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 기도를 하실 때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셨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쓴잔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류의 죄사함, 우리들의 구원은 과연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당신이 져야 하는 당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지고 가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었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병원 수녀님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바로 병원에 와 달라고 하는 전화였습니다. 바로 가방을 챙겨 병원에 갔더니 한 환자가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누워있었습니다. 몰골은 까맣게 변했고 배는 복수가 차서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태중에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어려서 몹시 어렵게 살았고 천신만고 끝에 가정을 가져 행복한 생활을 살려던 그때 갑자기 병원에 오게 되었는 데 간암 말기라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분은 외쳤습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정직하게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가? 나는 하느님이 원망스럽다.”
그는 하느님의 성사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끝까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병자성사도 기도도 마다하고 자신의 현실도 부정하였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사제관에 막 도착하였는데, 그분의 선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지는 크고 작은 자기 십자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십자가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소중하게 인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를 내팽개치고 하고픈대로 자기 멋대로 대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는 무겁고 무섭고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치워달라고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은 처음에는 당신의 십자가를 없애 달라 기도하셨지만 곧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십자가의 힘으로 구원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 역시 우리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그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고 주님의 집에 갈 수 있게 하는 보증수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세운 뒤 겪어야 하는 피땀, 수고, 고통 등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밑거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지워진 우리들의 십자가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
[인천교구 오영환 아브라함 신부님]
<세심한 배려와 정성>
어린 시절, 저녁 식사 후 거실에 가족이 모여 앉아 TV를 보면 어머니께서는 사과를 깎아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두터운 과육 부분은 접시에 놓아 가족들이 먹게 하고 당신께서는 귀퉁이를 살살 베어서 잡수셨습니다.
자꾸 귀퉁이만 드시던 어머니께 접시에 놓은 것을 잡수시라고 말씀드리면, ‘응, 알았어.’라고 얼버무리셨지요. 물론 과육 부분을 잡수시긴 했지만, 귀퉁이 부분을 더 많이 드셨습니다.
이때 철딱서니 없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사과의 귀퉁이만 좋아하시는구나! 어머니는 귀퉁이만 드셔도 돼!’라고 말이지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러한 착각이 얼마나 난센스인지 아실 겁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서로 합당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한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무에 대해 짚어주시는 듯하니 받아들이기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합당한 사랑’에 대해 다른 각도로 성찰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합당한 사랑을 드리는 것은 무엇일까, 무조건적인 희생을 드리는 것이 전부일까? 삶의 여러 가지 즐거움을 꺾어버리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면 충분할까?
여기서 잠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지요? 대개 우리는 주님께 양보를 요청합니다. 이러이러해서 이러한 연유로 못 한다라고 말이죠. 또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니 이러한 것쯤은 눈감아주실 거라는 태도가 주를 이룰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에 천 걸음을 가자는 요구에 그대로 응하시듯 수많은 것을 양보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성 어린 봉헌을 한다면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정성이 깃든 봉헌처럼 미사에 갈 때 시간을 내는 것부터 단정한 옷차림 같은 외적인 준비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당을 향하는 내면의 준비까지. 이처럼 예수님께 드리는 것에 우리가 최선의 정성을 다하면 얼마나 바람직할까요!
한데 우리는 어느새 예수님께는 양보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 못해 예수님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하는 합당한 사랑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무엇을 콕 짚는 것보다 우선 그 바탕을 논하는 게 더 유익하겠습니다.
그것은 제 어머니도 우리가 흔히 먹는 두터운 과육 부분을 잡수실 줄 아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권해드리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가 세심한 정성을 드리면 즐겨 받으실 줄 아는 분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면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이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어버이이시고 온 누리의 임금이십니다.
우리가 이 모든 점을 아우를 수 있다면, 자연스레 합당한 사랑을 드릴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주어진 것에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을 해드리기에 하느님도 우리도 무한한 기쁨 속에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파견 받은 이가 지녀야 할 각오와 태도>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한 해의 중간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마음을 새겨야 할 때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에는 꺼지지 않는 그리움을 품고, 그리움의 길을 가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말입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라는 박노해 님의 시가 떠올려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받아들임’(환대)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숙소를 제공하고 대접한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를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뒤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들에게는 ‘상’이 베풀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이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파견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 안에는 아버지께서 계셔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파견한 제자들은 당신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당신의 제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규칙 53,1)
“인사로서 오고 가는 모든 손님들에게 온갖 겸손을 드러낼 것이니, 머리를 숙이거나 온몸을 땅에 엎드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흠숭 받으시고 영접 받으시게 할 것이다.”(규칙 53,6-7)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맞아들임에 있어 각별한 주의를 세심히 기울일 것이니,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접되시기 때문이다.”(규칙 53,15)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 ‘파견 받은 이가 지녀야 할 각오와 태도’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파견 설교’의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것은 ‘파견하신 분에 대한 오롯한 사랑’과 ‘십자가를 지고 따름’과 ‘목숨을 내놓는 헌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렇습니다. 파견하신 분을 향한 ‘사랑’과 ‘따름’과 ‘헌신’을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져야 할 것’이 있고, ‘바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다른 것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고’, ‘목숨을 바쳐 헌신’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파견 받은 자로서 ‘합당한 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잃으면 ‘얻는 자’가 될 것입니다.
‘비움’에는 ‘향하여 하는 사랑’이 담겨야 하고, ‘십자가를 짐’에는 ‘향하여 따르는 추종’이 담겨야 하고, ‘헌신’에는 ‘그분 때문에 바치는 지향’이 요청됩니다. 그러니 ‘떠남’도, ‘십자가를 짐’도, ‘헌신’도, 오롯이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기꺼이 자신이 훼손되고 손해 보는 것을 감수하고, 노고와 수고를 감수하고, 상실을 감하는 일이지만, ‘더 귀한 것을 얻음’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그 무엇보다 당신을 앞세워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데 노고와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하시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저의 가난하고 비천한 헌신이 오롯이 당신께 바치는 제물과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오늘의 말 · 샘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