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장 18-24절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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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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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의로운 사람 요셉 이야기입니다. 먼저 천사가 요셉에게 약혼자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요셉의 처지에서는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까? 이와 비슷한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기에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 결과 이 땅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신뢰한다는 것은 큰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때로 만나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마저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신 것으로 보여도 끝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잘 극복한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시각에서 고통과 행복의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눈앞의 것만 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세상을 살며 힘들어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만 있다면, 그동안 볼 수 없던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새롭게 품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그러하였지요. 오늘은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에 관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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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가브리엘 천사의 입장에서
– 요셉 입장에서
– 마리아 입장에서

2. 삶 속에서 한순간의 결정이 나의 미래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느껴지는 경험이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그 결정이 사회생활이나 신앙 안에서의 나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함께 나누어 봅시다.

3. “주어진 고통을 잘 극복한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봅니다”라는 말처럼, 나에게 찾아왔던 시련이나 좌절의 경험을 돌아보고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그 과정이 나의 시선이나 삶의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함께 나누어 봅시다.

4.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이 순간이 주님의 부름이었구나”라고 느껴지는 경험이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그 부름에 나는 어떻게 응답했는지,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면 무엇이 나를 그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혹은 그렇지 못했다면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도 솔직하게 나누어 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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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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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강조합니다. 이사야가 아하즈 임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제안합니다. 제안도 주님한테서 오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징을 청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임금의 폐쇄적인 태도 앞에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표징을 통하여 당신 사랑의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 은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복음에서는 이 약속된 표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일을 두고 무척 고민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아기 탄생을 앞두고 요셉이 감수해야 하는 엄청난 시련은 마리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주님께서 그에게 혼인과 사랑과 행복의 길을 열어 주셨음을 보여 주고자 개입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민의 실타래가 풀리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동정 잉태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태어난 그 아들, 곧 사람이 되신 말씀은 인간과 친교를 맺고 당신 현존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이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계획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444
12월21일 [대림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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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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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dnauGi1fHQ
[서울대교구 조성동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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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 좋은 데 왜 하필 나냐고요?>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요셉처럼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미 마리아와 약혼까지 하였으며, 결혼식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해괴망칙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결혼식도 치르기 전에 덜컥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약혼자로서 마리아를 향한 배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면서 연기가 풀풀 새어 나왔을 것입니다.

요셉의 머릿 속은 별의 별 생각이 다 교차했을 것입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얌전한 척 하던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지? 이 사실을 사방팔방에 확 불어버릴까? 법대로 해버릴까?’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꾹 눌러참았습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마음 먹은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입장에서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하소연도 했을 것입니다. “다 좋은 데 왜 하필 나냐고요?” 희귀한 사건으로 인해 마리아와의 단란하고 행복한 새 인생을 꿈꾸던 요셉의 소박한 희망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한 마디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단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갑작스레 다가온 마리아의 혼전 잉태가 요셉에게 엄청난 시련이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납득하기 힘든 대 사건 앞에 침묵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뜻을 찾았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인간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신비스런 신앙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로 인해 자신이 겪은 희생과 포기는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요셉 자신을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선택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점점 커져 갔을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협조를 구하시다니요? 하느님께서 나를 동반자로 불러주시다니요?

따지고 보니 세상 만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짧은 안목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매일 겪는 시련과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번 크게 바꿔 먹고, 호흡 한번 크게 하며,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시련과 고통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철저하게 다르신 분입니다. 참으로 묘하시고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요셉처럼 너그러운 마음이요 의로운 성격입니다. 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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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Q95KcEFSVs?si=aJnVNCre-om9dc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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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찬미 예수님!
사람의 마음은 결국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살려는 마음’과 ‘남을 살리려는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우리가 영원히 머물 집을 짓습니다. 먼저 ‘내가 살려는 마음’이 어떤 집을 짓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예가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입니다. 총기 회사의 상속녀 사라 윈체스터가 지은 이 기괴한 저택은 160개의 방과 열리지 않는 문, 막다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입니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도대체 이 여인이 집 가장 깊은 곳, 겹겹의 자물쇠로 잠긴 금고 속에
무엇을 숨겨두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엄청난 보석을 예상하며 금고를 열었지만, 그 안에는 단 두 가지 물건뿐이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의 머리카락 한 줌과 남편의 부고 기사.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자기 생명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철통같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과거의 기억과 원혼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자신의 목숨’뿐이었습니다. 내 목숨, 내 가족, 내 것만을 지키려는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깃들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빼앗을까 봐 공포에 떨며 지은 집은 결국 누구도 안식할 수 없는 ‘유령의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은 위 예와는 정반대의 집을 지었습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십니다. 성막은 화려한 금은보화를 보관하는 금고가 아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깊은 지성소, 그 계약의 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적힌 십계명 돌판이었습니다. 즉, 성막은 나를 봉헌하여 내 욕심을 비우고, 그 안에 오직 ‘사랑의 뜻’만을 남기는 거룩한 집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 성막이었습니다. 약혼녀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요셉은 자신의 명예나 생명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라면 돌을 던져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파렴치한으로 매장당할 것을 각오하고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습니다. “내 생명을 버려서라도 저 여인을 살리겠다.” 이것이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요셉의 처지는 초라하고 냄새나는 ‘마굿간’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자기를 보호할 벽 하나 없는 허술한 인생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오직 ‘사람을 살리는 마음’밖에 없었기에, 그 초라한 마굿간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계약의 궤 위에 하느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내렸듯이, 요셉의 그 착한 뜻 위에 아기 예수님께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지은 윈체스터의 집은 유령의 소굴이 되었지만, 남을 살리려 지은 요셉의 마굿간은 구세주의 성막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런 성막을 지은 분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투아니아의 일본 영사 대리였던 스기하라 지우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으며, 세례명은 ‘바오로(Pavel)’였습니다. 1940년 7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유다인 수천 명이 영사관으로 몰려왔을 때, 본국에서는 비자 발급을 거부했습니다. 스기하라 바오로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본국의 명령을 따르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파라오의 길, 아니면 자신의 경력과 목숨을 걸고 타인을 살리는 이스라엘의 길.

그는 밤새 고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적 양심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정부의 명령을 어겼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약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다면, 나는 하느님을 거역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해고당할 것을 각오하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밤낮없이 비자를 써내려가 6,0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는 외교관직을 박탈당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형광등을 팔러 다니며 평생을 가난과 침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집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지은 거대한 ‘생명의 방주’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분이 계시지요. 1985년 남중국해에서 표류하던 보트 피플 96명을 구한
전재용 선장입니다. 당시 회사의 지침은 “엮이면 골치 아프니 무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선장은 나쁜 지향(무시) 대신 양심(착한 지향)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난민들을 모두 구조했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해고당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훗날 자신이 구한 생명들과 재회하며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지은 집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96명의 생명이 숨 쉬는 사랑의 성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성막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거룩한 집은 하루아침에 뚝딱 지어지지 않습니다.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1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어지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 성전도 매일의 선택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지어지는 것입니다.

체로키 인디언의 지혜처럼,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습니다. ‘나만 살려는 이기심의 늑대’와 ‘남을 살리려는 사랑의 늑대’입니다. 매일 아침, 매 순간의 선택 앞에서 내가 어느 늑대에게 먹이(지향)를 주느냐에 따라 내 집의 모양이 결정됩니다.

 내가 살려는 먹이를 주면 유령의 집이 완성될 것이고, 남을 살리려는 먹이를 주면 주님이 거처하시는 성막이 완성될 것입니다.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금고입니까, 아니면 이웃을 품는 빈방입니까?

사라 윈체스터의 두려움을 버리고, 요셉의 마굿간을 선택하십시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그 착한 뜻 안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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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신문을 펼치면 다양한 소식이 실려 있지만, 그 안에는 결국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오기 전 5년 동안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에서 근무하며 가장 깊이 느낀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소식이란 결국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갈등과 화해, 성공과 좌절이 얽혀 있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4개의 초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거쳐 온 네 개의 터널이자 네 개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대림 제4주일을 지내면서 저는 대림 시기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4개의 터널을 지나온 것 같습니다.

대림 제1주라는 터널에서는 ‘깨어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지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정거장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영원한 것들을 추구하게 됩니다. 대림 제2주라는 터널에서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깎아져서 평평하게 되리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교만과 욕망의 산을 깎아서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둠과 절망 그리고 고통과 걱정은 희망과 사랑 그리고 나눔과 봉사로 메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대림 제3주라는 터널에서는 ‘자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랐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픈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외로운 이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그 주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람의 뜻, 세상의 뜻, 욕망과 성공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림의 진정한 의미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던 성모님처럼 우리들 또한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욕망과 욕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제단에 대림초 4개가 모두 켜졌습니다. 대림초 4개는 몇 가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음을 의미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뜻하며 이는 시간을 다스리는 분의 탄생을 기다렸음을 의미합니다. 동, 서, 남, 북을 뜻하며 이는 공간을 다스리는 분의 탄생을 기다렸음을 의미합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 해를 보내며 많은 모임이 있는 때입니다. 후회와 아쉬움도 있는 때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나의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다가올 성탄을 생각하면서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좀 더 기쁜 마음으로,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주님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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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성탄이 가까워지는 이 시기의 독서는 하느님께서 구세주의 오심을 얼마나 꼼꼼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시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구약 시대부터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된 구세주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나이가 많은 부부에게서 태어난 세례자 요한과, 고유한 역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직접 준비됩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의 표징을 선포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가난과 겸손과 단순함으로 당신을 믿는 작은 이들에게 주신 표징입니다. 이들은 특정한 민족이나 특권 계층이 아닌 믿음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모든 민족들”(로마 1,5)을 위한 메시아로 오십니다.

그런데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의 주도권에만 달려 있고 인간은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에는 바로 그 구원 계획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요셉 성인이 있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하느님의 계획을 알립니다. 요셉은 순종과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식별을 통하여 하느님 아드님의 지상 아버지로서 자신의 사명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요셉도 마리아처럼 대림의 길을 걸으며 거룩한 자기 아들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요셉을 통하여, 일상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계획에 협력하는 순종을, 또한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자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믿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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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오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

1. 하느님의 징조와 인간의 믿음: 이사야의 표징
이사야 예언자는 불신과 정치적 계산에 빠진 아하즈 왕에게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요청한다.(이사 7,11–14) 왕은 겉으로는 경건을 이유로 들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정치적 판단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징조를 거절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이사 7,14)는 징조를 주신다.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약속은 인간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지 않는다.”(Adversus Haereses III, 20,2) 하였다. 이 예언은 단순한 정치적 평화를 넘어,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오실 것을 예시한다. 그분의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계책이 아니라, 은총의 방식, 즉 순수한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이 징조가 완성되는 때가 바로 마태오 복음에서 마리아의 동정 잉태로 드러난다.

2. 동정녀 마리아: 믿음의 표징, 순명의 모범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한 것이다.”(22절) 마태오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동정녀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완성되었다고 선포한다. 마리아의 믿음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수용한 순명의 믿음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는 믿음으로 잉태하셨다. 그녀의 자궁보다 먼저 마음이 그리스도를 품었다.”(De sancta virginitate, 3) 교리서(490–493항)는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전적으로 응답한 이”로 설명한다. 그녀의 “Fiat”(“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은 인류의 구원 역사를 여는 자유로운 동의의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예’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신다.”(교회 56항)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완전한 수용을 통해, 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녀 안에서 신앙과 순종, 은총과 자유의 신비가 완전하게 결합된다.

3. 요셉: 침묵 속의 믿음과 구원 계획의 협력자
요셉은 하느님의 신비를 침묵 안에서 받아들인 의로운 사람이다. 그는 율법의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20절) 그에게 말씀하심을 듣고 순명한다. 그의 순명은 단순히 마리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법적 계보를 완성하는 역할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요셉은 믿음으로 마리아와 함께 섭리의 도구가 되었다. 그의 침묵은 말씀을 품은 신앙의 표지였다.”(Homiliae in Matthaeum IV,3) 요셉의 신앙은 청취의 신앙이다. 말보다 깊은 순종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적 경청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또 하나의 증인이다.

4. “예수”와 “임마누엘”: 구원의 이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예호슈아(יְהוֹשֻׁעַ)에서 유래하며,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뜻을 지닌다. 그러나 마태오는 이 구원이 단지 외적 위험에서 해방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의 해방임을 강조한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안에서 새롭게 하신다는 뜻이다.”(Commentarium in Matthaeum II,10) 가르친다. 예수는 단순히 하느님을 대리하는 이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임마누엘)이시다.

하느님은 더 이상 멀리서 약속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살아있는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는 사람으로, 하느님의 친교를 인류 안에 확립하신다.”(교회 8항) 이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표징은 더 이상 예언의 말이 아니라, 살이 되심의 사실로 완성된다. 살이 되심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재와 구원 연대성의 근거이다.

5. 교의신학적 결론: 살이 되심의 신비와 인간의 응답
교리서는 “살이 되심은 하느님 구원 계획의 중심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현존하는 방식”(456–460항)이라고 밝힌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수 있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De Incarnatione Verbi Dei, 54,3)라고 한다. 하느님이신 말씀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의 친교에 참여하도록 높여졌다는 그리스도론적·인간학적 정점이다. 교리서 460항은 이 구절을 직접인용 하며, “성자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셨다.” 명시한다. 대림의 목적은 바로 이 성화(divinization)의 여정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대림 제4주일의 복음은, 이 성육신의 신비가 하느님의 주권적 은총과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와 요셉은 모두 이 신비의 내적 참여자들이며, 그들의 순명은 교회의 믿음의 모형으로서, 오늘 우리도 그 응답 안에 초대받는다.

묵상과 실천
나의 일상 안에서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느님의 계획은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분의 신비에 침묵으로 순명할 수 있는가? 마리아와 요셉처럼, 나의 ‘작은 순명’이 하느님의 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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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임마누엘>

마태오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임마누엘>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하느님께서
우리가 되시어
우리에게 오시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께 가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임마누엘

우리가
서로가 되어
서로에게 오고가니

우리가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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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신 분”, 즉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선포입니다.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신앙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향해서 직접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요한 20,28) 요한 사도의 고백과 토마스 사도의 고백은 요한복음의 처음과 끝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선포이며 증언입니다.

2) 마태오복음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 일만 기록되어 있고, 마리아가 천사를 만난 이야기가 없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난 일만 기록되어 있고, 요셉이 천사를 만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마태오는 ‘메시아 강생’을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했고, 루카는 마리아의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두 이야기 모두,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 즉 ‘성령으로 인한 동정 잉태’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신비스러움’이 조금 더 부각되어 있고, 루카복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조금 더 부각되어 있습니다.>

3)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요셉은 “하느님께서는 왜, 일을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하실까?”라고 질문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일, 이해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 먼저 믿으면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일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왜 나를?”이라고 물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일이든지 안 좋은 일이든지 간에, “왜 나인가?”라고 물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운이 좋아서’, 또는 ‘운이 나빠서’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운’ 같은 것은 없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 또 ‘하느님의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하느님의 선택’을 설명하는데(로마 9,20-21), 하느님께서 아무런 원칙도 없이 당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일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선택하신 일은, ‘마리아와 요셉만’ 선택하신 일입니다. 즉 다른 사람은 할 수 없고 오직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시려고 두 사람을 선택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요셉도 마리아처럼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신앙인’이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4) 살다 보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가 있고,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겪을 때도 있고, 억울할 때도 있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게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사랑이었구나!”라고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로마 8,28).

요셉은 바로 그 깨달음에서 가장 앞서 있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믿음’은 나중의 ‘깨달음’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믿지 않으면 나중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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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다. 준비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사랑은 여전하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이다. 사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된다. 성경을 보면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임마누엘”(אמנוּאל)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다.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된다.

“예수”(ihsouς)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7,14). 라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로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물론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한 순종도 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된다.

아브람은 일가친척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낯선 땅으로 떠날 것을 요청 받아 떠났다. 그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탈출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한 모세의 여정을 보면, 인간적인 정의감에 불탔던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행동을 기다리시고 행실에 따라 구원을 이루신다. 우리는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세상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아주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매 순간 신앙으로 처신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해야 한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한다. “구원의 축제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 성탄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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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백수현 알로이시오 신부님]

<꿈 … 그리고>

언젠가 성당에 오신 교우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저 어제 꿈에서 신부님을 만났어요. 오늘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거 같아요.” “그래요? 저도 좋은 일이 있길 바랍니다. 그런데 혹시, 나쁜 일이 있다고 제 탓은 하지 마세요. 하하하!”

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오늘 요셉은 자신과 약혼한 마리 아가 같이 살기 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를 만나고 천사의 명령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아니, 도대체 꿈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꿈에 만난 천사의 명령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약혼했던 여인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요셉이 받았을 충격이나 배신감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도 그는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 남모르게 파혼을 결정합니다. 요셉이 얼마나 의롭고 마음 씀씀이가 선한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꿈에 만난 천사로 인해 다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요셉은 도대체 어떤 꿈을 꾸었길래 이렇게 생각을 바꾼 걸까요? 흔히 말하듯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의 그 생생함과 강렬함이 있었던 걸까요? 그렇더라도, 도대체 요셉의 꿈에는 무엇이 더 있었던 걸까요?

분명한 건 하느님께서는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 뜻 안에서 바라보고 결정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결단은 그냥 단순한 결단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이 자리했을 겁니다. 파혼하겠다는 마음을 돌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은 그렇게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자리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셉의 믿음과 비범 함을 묵상하면서 코 앞에 닥친 성탄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요즘처럼 추워지는 날, 보일러가 들어오는 따뜻한 방에서 자던 사람이 그 예전 추운 골방을 찾아가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더 편하고 좋은 따뜻한 방을 찾겠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반대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셔서 이제 그 길을 따라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이제 성탄을 준비해야 합니다. 내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맞추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성령의 힘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님 생각을 하고, 주님 꿈을 꾸고, 주님 만날 생각을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자, 우리 교우 여러분! 만날 준비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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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인규 세례자 요한 신부님]

<믿고 순종하는 이를 구원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이번 주는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제4주일은 다윗 가문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가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며 또한 구세주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드러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아하즈왕과 요셉에 관한 사건들을 들려주면서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위태로운 시기에 세상의 권력과 힘에 의지하고, 오로지 믿음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결과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먼저 남유다의 아하즈왕의 경우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자신의 나라를 침략할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보내셔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지켜 주실 것이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라고까지 말씀하시며 주님께 대한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손수 함께하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표징까지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신앙으로 가득 차있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법만을 찾고 있던 아하즈는 오늘 독서에서 처럼 하느님의 표징마저 거부하였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주도하시고 움직이시는 분은 세상의 피조물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아하즈는 도무지 믿지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당시 강대국이었던 아시리아에 의존하면서 나중에는 엄청난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해버립니다.

이에 반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다윗 가문의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지만, 꿈에서 주님 천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믿음으로 순명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복음에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굳건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인 요셉은 율법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의 본질인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임신한 마리아에게도 자비를 베풀려고 합니다.(마태 1,19) 그리고 결국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랐던 요셉은 마리아를 통해 임마누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의 위기와 절망 속에서 세상의 방식과 인간적인 것에만 매달리던 아하즈는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나라를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지만, 끝까지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순종했던 요셉은 영원한 해방과 생명 자체이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품에 안게 됩니다.

우리도 곧 다가올 거룩한 성탄을 준비하면서 하느님보다는 세상의 방식과 인간적인 계산만을 믿고 있는 우리 모습을 돌이켜 보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희망을 걸고 성모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참된 그리스도 신자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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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00 축하합니다. 00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000의 00 축하합니다.” 소중한 누군가의 생일이나 축일이 되면 촛불을 켜고, 사랑과 축복의 마음 담아 함께 노래하곤 합니다. 생일이나 축일뿐 아니라 혼인, 기일 등의 소중한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려고 새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기도 하고, 휴대전화에 입력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누군가 또는 어떤 날을 기다린다는 것이 선물로 다가옵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함께할 기쁨에 설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다림의 선물 중에서 부활과 더불어 가장 귀한 선물을 꼽는다면,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탄이 아닐지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올해에도 오시고, 또 심판의 때에 오실 것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와 성탄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성탄쯤에 찾아주실 수많은 분과도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명동대성당은 10월 초부터 준비를 시작하였답니다. 대성당 입구 쪽 마당에는 빈 구유가 자리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명의 봉사자께서는 대성당을 향해 올라오는 계단과 대성당을 둘러싼 나무들 그리고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념하는 성화도 아름답게 꾸미셨습니다. 차가운 날씨에도 기쁘고 행복하게 준비하시는 봉사자들을 뵈면서, ‘이분들은 이런 봉사의 실천으로 아기 예수님께 드릴 구유 예물을 준비하고 계시는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구유 예물을 준비하고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라는,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기도를 떠올리며 그동안 얼마나 충실히 준비하며 살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느님만이 전부인 삶을 내가 살고, 또 교우들께서 그렇게 살아가실 수 있도록 사목자의 역할을 성실히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기쁨과 즐거움, 만족함의 순간뿐 아니라, 슬픔과 어려움, 힘듦의 순간도 있습니다. 슬프고, 어렵고, 힘든 그 순간에 하느님께 은총과 평화를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순간을 이겨낼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기쁘고, 즐겁고, 만족스러운 순간에는 더욱더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좋은 순간에는 자기가 잘나서 또는 자기가 잘해서 이룬 듯 착각하며 하느님을 곧잘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기쁘고,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이 나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각자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다윗 왕실,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이사 7,14)라고 전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로마 1,6-7 참조)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믿고 고백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부족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사랑의 삶을 살아갑시다! 곧 오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향기로운 구유 예물을 마련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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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흔히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인생은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평탄하게 곧장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좌절과 실패가 있는 부침의 여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바로 이러한 좌절과 실패 앞에서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삶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실패와 좌절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 이것이 신앙의 생활화라고 봅니다. 특별히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와 신약의 바오로 사도는 어떤 누구보다도 숱한 실패와 좌절,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이 없다는 믿음을 삶으로 증거하신 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마태 1,20~24)는 천사가 요셉에게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했던 예언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고 전해 줍니다. 요셉에게 했던 천사의 말씀이 무슨 의미를 띄고 있는지,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 임금에게 선포하는 임마누엘 예언으로 잠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포위된 상황이었습니다.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합동해서 남왕국 유다의 아하즈 왕을 공격하며, 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자신들의 뜻에 맞는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우려 했지요. 적군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 상태를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었다.”(7,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택하신 도성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전했지만, 아하즈는 그 말씀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었는데 말입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 그러나 아하즈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한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표징이 바로 임마누엘의 탄생 예고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임마누엘의 이름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약속을 요약해 줍니다. 적군이 시시각각 진격해 와도, 아니 설령 예루살렘이 어느 날 멸망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해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 는 사실을 믿을 때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이 선포하는 기쁜 소식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난 17일 들었던 복음(1,1~17)엔 아브라함에서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족보는 지금까지 이어온 틀에 따라 ‘요셉은 예수를 낳았다.’라고 하지 않고, 그 흐름을 벗어나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1,16)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탄생이 인간적인 경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신했다는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혈연으로 말하면 요셉은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붙임으로써 법적으로는 온전한 아버지의 자격을 지니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고, 이로써 인간의 삶 속에 엮어져 들어오십니다. 하느님은 인간 역사 한 가운데 사람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드러나십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요셉에게 약혼자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함께 전해 줍니다. 그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이 이름은 ‘주님은 구원이시다.’를 뜻합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가 이어서 말하듯이,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1,21)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 것이 구원 상태라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에 매여 있는 이스라엘을 그 죄에서 풀어놓으심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시려고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함께 하시려는 것입니다.

포위된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던, 그래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 떨던 아하즈의 처지와 죄에 얽매여 구원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던 이스라엘의 처지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아니, 우리는 하느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분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그들이 하느님 안에 살고 있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벽을 쌓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멀리 계시지 않은데도, 인간은 하느님을 멀게 느끼고 멀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믿지 못한 그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그들이 보고 믿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취하시고 내려오셔서 함께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즈에게 대한 하느님 약속의 표징은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7,14) 는 약속입니다. 그 아기가 바로 하느님께서는 어떤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아하즈와 함께 계시다, 는 표징이었고, 유다의 미래를 위한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기는,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이시며, 당신 스스로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내심으로써 인간이 당신 안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 줄 것입니다. 이 아기를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우리는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진정한 메시지이며, 성탄의 의미입니다. 신앙은 믿어지지 않는 일을 맹목적으로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분의 시선에서 그분의 눈으로 인간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시선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만을 보고 놀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예수님 외에도 이적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엾이 여기시며, 측은히 여기신 사실에 주목하고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근본이 하느님이고 그분은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역시도 우리 주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겨서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도록 당신 삶을 통해 그렇게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성탄은 그런 생명의 탄생을, 사랑과 자비로 사람들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판 6,13)라는 기드온의 절규와 의문은 단지 분명 기드온만의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임하소서 임마누엘이여, 라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아직 이 세상은 완성에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은 바로 이런 세상 안에서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장일순 님의 「좁쌀 한 알」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친구가 똥통에 빠지면 우리는 바깥에 서서 욕을 하거나 비난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대개 다 그렇게 하며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같이 똥통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여기는 냄새가 나니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면 친구도 알아듣습니다. 바깥에 서서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옵니다.』하느님은 저 하늘 높은 데서 우리더러 빨리 올라오라고 소리치지 않으시고 똥물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십니다. 그런 다음 이곳은 냄새가 나니 같이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며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려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계십니다. 이 하느님이 바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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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구원의 협조자>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가까이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채비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준비만으로는 부족한 일입니다. 준비를 넘어서, 이제는 우리의 결정적인 ‘협조’를 필요로 할 때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탄생이 우리의 협조를 통해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기 예수의 탄생도 요셉과 마리아의 응답과 협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이를 잘 보여주는데, 먼저 제1독서에서는 임마누엘의 탄생이 예고되고, 곧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고 예고됩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고된 이 일이 이루어진 다음, 그 은총으로 이루어진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곧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로마 1,1-7)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협조’를 통해 이루어짐을 밝혀줍니다. 이를 먼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이 소식에 요셉은 무척 당혹했을 것입니다. 약혼자의 임신 사실에 온갖 의혹과 치욕스런 배신감으로 분노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서운함과 불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궁색하고 구차한 변명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약혼녀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사실을 드러내어 재판을 걸게 되면 그녀를 죽음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그냥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마리아를 집 안에 받아들이는 일도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참으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서 벌어진 일을 밝혀줍니다.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참으로 기이하고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연계의 모든 법칙을 뛰어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이 터무니없는 일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그렇지만 그는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일이 ‘거룩한 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믿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 안에 자신을 가두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지혜로 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은총의 법을 따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아직 뜨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약혼녀 마리아의 성령 잉태 사실뿐만 아니라, 요셉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사명’을 부여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21) 이처럼 주님의 천사는 그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곧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비록 아기는 자신의 자식이 아니지만, 그를 보살필 아버지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마침내 요셉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 뜻에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참으로 그는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결국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누리에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우리의 협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협조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셉 성인과 함께 ‘구원의 협조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활동과 거룩한 분의 힘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의심하기보다 신비를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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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오로지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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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본당의 유소년, 청소년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누구보다 책의 유익함을 잘 알고 있고, 또 실제로 도움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책 읽으라는 말을 공부하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 읽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하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봅니다. 책 읽는 것은 재미없다고 단언합니다.

사실 우리 뇌는 ‘노력-성공-보상’이라는 사이클에 마쳐져 있습니다. 문제는 공부, 독서 등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너무 늦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은 어떤가요? 3초 안에 시작할 수 있고, 10초 안에 ‘레벨 업’이 되고, 30초 안에 보상받습니다. 이렇게 너무 쉽게 도파민이 팍팍 나오니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지 부족’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보상은 느리지만 그럴수록 크고 오래 가는 것이 있습니다. 공부, 독서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게임 등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만족’이라는 보상은 어느 순간 허탈감과 좌절감을 동반할 뿐이지만, 공부, 독서 등은 크고 오래 가는 만족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곧바로 얻는 보상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크고 오래가는 보상을 찾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앎과 노력도 많고 오래 가야 엄청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순간의 만족을 추구하면 당연히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의로운 사람 요셉이 등장합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라면, 결혼 전에 임신 아내인 마리아를 부정하다고 고발해서 율법의 정의를 세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사랑에서의 의로움을 선택해서, 그냥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는 커다란 결단이고, 하느님의 일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천사를 보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자기의 계획인 파혼을 즉시 철회하고, 하느님의 뜻인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바로 즉각적인 순종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으로 인한 의로움은 이렇게 하느님의 개입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판단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지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순간적인 만족을 가져올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 만족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크고 오래가는 보상인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씩 늘어난 대림초의 불이 이제 4개가 되었습니다. 이제 가장 밝은 빛을 냅니다. 이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러 오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거의 다 오셨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회개와 보속을 뛰어넘어 이제 기쁨과 설렘으로 주님을 맞이할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과연 모든 준비를 다 마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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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내 마음의 구유를 청소하자!>

오늘 복음(마태1,18-24)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초 4개가 모두 켜졌습니다.
주님의 성탄이 임박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주님 성탄에 앞서 도구로 선택되어진 이들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과 그리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꿈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

다가오는 주님의 성탄이 기다려집니까?

주님의 성탄이 기다려지고 설레이고 기쁨인 이유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기 때문’이고, ‘가장 낮은 곳에 태어나시기 때문이고, 죽으러 오시는 성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이 설레이고 기다려집니다.

대림초 4개가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구유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주님의 성탄이 임박했다는 의미’이고, ‘또 다른 구유인 내 마음의 구유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의 구유는 잘 준비되었는지요?
준비가 미흡해 실망스럽지는 않은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남은 기간 매일매일 내 마음의 창고를 청소하고 또 청소하면 됩니다. 죄를 씻어내는 청소를 통해 내 마음의 구유를 잘 준비하면 됩니다. 내 마음의 구유가 깨끗해진 상태에서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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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21)

어떻게
태어났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입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우리의 계산과
교만을 내려놓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이름이며
우리의 구원입니다.

대림 제4주일은
마음을 정돈하여
구원이 드러날
자리를 만드는
시간입니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질서와
다시 조화를
이루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실존과
분리되지 않은 채
탄생, 성장, 고통,
죽음을 통과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은
관계 안에서
다시 살아가게
하는 구원의
힘입니다.

우리 삶 전체로
만나는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일이 아니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선물입니다.

받은 은총을
아는 사람은
판단보다 감사로,
요구보다 봉사로
살아갑니다.

우리를
죄와 단절에서
되돌려 놓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의 길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찾아오는
구원의
기쁨입니다.

우리를
붙잡아주시는
구원자의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깊은
예수님의 길입니다.

그 길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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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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