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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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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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인류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은 어쩌면 더 많은 빵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와준다는 명분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는 싸움일 뿐입니다. 테러와의 전쟁, 평화 유지를 위한 싸움도 무기를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고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옳은 전쟁과 싸움은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 이래 인간의 탐욕은 전쟁과 폭력을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역사 속의 전쟁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짓밟으며 경쟁합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고 빼앗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늘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주위를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 참조)을 행하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 예수님께서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쉬고 싶으셨습니다. 쉬시며 허기를 달래고 싶으셨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바람에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예수님께서는 쉬실 수도, 허기를 달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피곤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신의 허기를 달랠 빵이 아닌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 시선에서 예수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빵이 필요합니다. 충분하기보다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이익과 욕심에 주의를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가난하고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들과 함께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기적의 현장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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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내게 맡겨진 소명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형제/자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말씀/복음화/선행 등등)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현재 내가 속해 있는 그룹에서 필요로 하는게 무엇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신앙적으로 어떻게 쉬며 생활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나는 신앙적인 기운을 어떻게 누구로부터 얻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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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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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는 생산 능률과 효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환산하다 보면 복음의 가치들도 물질적 척도로 평가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은 물질적 평가와 보상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군중은 가난한 이가 부를 얻고, 병든 이가 치유되고, 불의한 재판의 결과가 공정하게 바뀌기를 기대하며, 복음이 세상 속에서 내는 효과를 직접 느끼고 싶어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기대감이 커질수록 복음이 지닌 내면의 가치는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복음 선포는 능률과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평화와 자유의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안에 ‘쉼’을 통해 그것을 깨닫도록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신성한 노동이 고된 노역으로 전락하고, 기쁜 봉사가 피하고 싶은 의무감으로 느껴질 때, 내가 선택한 삶이 잘못된 판단처럼 여겨지고, 희망찬 내일이 두려운 미래가 되는 불안감에 빠질 때, 우리는 잠시 외딴곳에서 쉬면서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 내가 가진 재물과 세속적 권력이 누군가의 희생이나 나의 위선과 기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으로 갈라져 적대하며 살아가는 현실은 물론, 우리가 지닌 내적 모순을 십자가를 통해 화해시키시어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합니다. 흩어진 양들을 이끌어 줄 목자가 세상의 공정과 정의를 이루어 줄 그날이 올 것임을 확신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굳은 믿음과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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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고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첫 번째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많은 경험을 하였지만 피곤하여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기쁨이 용솟음치는 살아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시려고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셨는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나시는 것을 보고 군중은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님 일행보다 앞질러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연민과 자비와 사랑의 주님!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하고 화답송에서 노래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아픈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등 소외되고 도움이 절실하며 인간적으로 홀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목자가 없어 흩어져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가엾고 측은하게 보일까요? 경제적인 이유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바라보고 찾아 나서기 때문이 아닐까요?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다고 생각되는 시련을 겪을 때, 복음의 군중처럼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몸과 마음이 눈에 보이는 안일과 즐거움만을 찾아 헤맬 때에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올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하다가 지치고, 정의롭고 좋은 일을 하다가 실망했을 때, 또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할 때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출저: 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925
7월21일[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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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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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aPvfqDprSU
[원주교구 김대중 베드로(영산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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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백명 삼백명은 아니지만, 육칠십명 아이들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여름 신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프로그램 진행하랴, 물놀이 따라다니랴, 동선 체크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주방 근무라 새벽 6시에 홀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특별한 체험입니다. 아무 탈 없이 신앙학교가 잘 진행되었으면, 하는 지향으로 초스피드로, 그러나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 끝나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침 끝나면 점심 준비, 점심 끝나면 시장, 그리고 저녁…단 한 순간도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 체력을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요즘입니다.
정말이지 다들 몸은 피곤하지만 신명나는 하루 하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거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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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LYT4TFHu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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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쉬어도 피곤할까?>
오늘 복음은 참다운 ‘쉼’이 무얼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쉬게 내버려 두고 당신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쉼을 존중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아서 만성 피로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삶의 에너지를 얻는 참다운 쉼은 무엇일까요? 오늘 제자들처럼 사명을 다 마치고 와서 그 파견한 분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힘을 얻는 과정입니다. 현실의 모든 어려움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일이 고되다고는 하지만, 일도 관계가 좋으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관계가 안 좋으면 아무리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더라도 그 자리가 지치고 고생스럽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관계를 위한 에너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쉬고 나서도 다시 사람들을 만날 힘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면 쉰 것이 아닙니다. 현실 도피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 도피와 쉼을 잘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 도피는 그것을 하고 나서 다시 일자리나 가정으로 돌아갈 힘이 생기지 않지만, 참다운 쉼은 다시 도전하고픈 용기가 생깁니다.
MBTI라는 성격유형 검사에서 ‘I’와 ‘E’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격이 ‘E’로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을 만날 때 힘을 얻고 반대로 ‘I’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힘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의 유형일 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굳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회복해야 하고 사람을 만날 때 에너지를 빼앗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에너지를 빼앗기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실 때 에너지를 회복하셨습니다.
사람은 진정 혼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내 자아로부터 괴롭힘을 당합니다. 잠을 자도 악몽을 꾸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이 자꾸 자신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도 피곤합니다. 어차피 만나려면 나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나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파견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이때 기도가 진정으로 휴식이 됩니다.
EBS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제5화에서 보령의 한 초등학교 여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너무 벅찹니다. 아이들에게 고함만 지르게 되고 아이들은 선생님을 마녀나 마귀라고 부릅니다. 지친 선생님은 이제 학교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작팀은 가르침은 먼저 관계라고 말해줍니다. 관계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지 교육합니다.
가장 일찍 나와 아이들에게 하이 파이브를 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아이들을 일일이 안아줍니다. 친절하게 바뀐 선생님을 보며 아이들도 선생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학교 가는 게 즐겁습니다. 이제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이것이 참다운 쉼입니다. 쉼의 목적은 파견에 있습니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유방암이 온몸에 전이된 상태의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줬고 차차 암세포가 사라져 완치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그러합니다. 암세포는 몸이 허물어진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몸의 설계도와 같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으로 우리 DNA가 회복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다시 아이들을 가르칠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기도와 쉼은 아예 처음부터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나를 파견하는 말씀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고 제자들과 사람들이 당신을 찾자 바로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라고 하셨습니다.
새벽이 아버지를 만나 힘을 얻고 다시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받으시는 일이 그분에게는 기도였고 휴식이었습니다. 기도가 휴식이 되면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것처럼 먼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파견받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이만이 온전히 파견하시는 분 안에서 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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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2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입니다. 어느덧 22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이기고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올랐습니다. 기세를 몰아 한국은 이탈리아를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2:1로 이기고 8강으로 올랐습니다. 감독인, 히딩크는 ‘I am still hungry!’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 끝에 4강으로 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가 되었고, 붉은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힘차게 외쳤던 구호와 박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짝짝 짜자작”으로 이어지는 박수였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던 구호가 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도, 동네의 담벼락에도 ‘국민소득 1,000불과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1980년대에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했는데 빨리빨리의 대한민국은 4년 앞당긴 1977년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3,475달러입니다. 수출은 1,118억 달러입니다. 소득은 33배가 넘게 증가했고, 수출은 11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입니다. 구호는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구호가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교회는 창립 2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 준비의 하나로 ‘사목회의’를 개최했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10년마다 신자 수가 100만 명씩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에 100만 명이던 신자는 2020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늘어났습니다. 본당은 넘쳐나는 신자로 분가해야 했습니다. 서울과 광주에만 있던 신학교도 늘어나는 신학생을 다 받지 못해서 늘어났습니다. 수원, 인천, 대전, 부산, 대구에 새롭게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한국교회가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내세운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구호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이 땅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빛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1989년에 한국교회는 44차 ‘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성체대회는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행사입니다. 변방에 있던 한국교회는 성체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당당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괌’에서 온 순례단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브라질의 주교님이고, 세계적인 해방 신학자인 ‘돔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聖者)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44차 세계 성체대회의 구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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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오늘의 전례는 지난주의 선교 사명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목자와 양 떼라는 상징적 표현들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당시의 왕들과 지도자들이 목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부당하다고 비난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주심으로써 돌보아 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한다.(예레 23,3-4 참조) 그리고 마지막 날 이상적인 왕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덕과 정의를 펼쳐 보이시리라고 예고한다. 그분은 정통 왕손,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복음에서는 사도들이 선교활동의 결과를 예수께 보고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하신다.(31절) 군중들이 많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군중들은 이미 알고 앞질러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3-34절)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은 양 떼가 흩어지는 것을 보살필 뿐 아니라, 양 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의 빵으로서 양육시키고자 애쓰시는 그런 목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목자이시다. 왜냐하면 첫째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힘보다는 사랑과 헌신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이시다.(요한 10,11-12 참조)
두 번째는 양 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함께 느껴 그들과 하나가 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빵의 기적을 통하여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마르 6,37 이하 참조) 이 빵의 기적에서 사도들의 태도는 바로 교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강해지도록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 떼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종으로 느낄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마태 20,25-28 참조)
세 번째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홀로 있는 것과 휴식의 필요성을 실천하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이루실 수 있었고 또 필요한 빛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침묵과 기도를 위한 휴식을 필요로 하셨다.(마르 6,45-47 참조)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봉사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할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한다. 즉 기도와 묵상이 없는 봉사활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켜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고 한다.(에페 2,14-16 참조)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로 대립하는 두 민족으로부터 “하나”(에페 2,14), “새 인간”(에페 2,15), “한 몸”(에페 2,16)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목자들은 먼저 자신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또한 그들이 맡은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두가 다 같이 서로 노력하는 여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을 제외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신자들은 사랑으로 충실히 목자의 소리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들과 한데 어우러져 그들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가 비록 여럿이지만,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하느님 안에, 주님의 이름 안에 진정한 하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을 올바로 알아듣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징이 되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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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죄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악의 지배를 받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그들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에게서 빗나간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온 삶을 다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가르침은 십자가였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기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는 어떤 구분도 차별도 예외가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가르쳐 주신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제1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어도, 여러분이 잠시 믿음을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비는 여전히 여러분에게 모두 유효합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는 부족한 저와, 교회의 모든 사제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사제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비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선포하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내가 입을 열면 말씀이 주어져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간구해 주십시오.”(에페 6,19)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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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