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6장, 1-6절;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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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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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삶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다가도 다른 이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악을 물리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며 아픔을 없애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이에게 행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내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과 비교하고 자신의 아들과 비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라는 행복을 체험하지만, 결코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행복하려면 내 곁에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해야 합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가지지 못할 것에 마음을 두는 순간, 하느님의 나라는 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타인을 자신의 행복을 재는 도구로 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함께 기뻐해 줄 때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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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3절). 나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신앙적인 일들을 어떤 믿음의 시각으로 보고 경험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며, 내가 어떤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3. 나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선입견으로 신앙의 진리를 보지 못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묵상해보고 신앙의 진리를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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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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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몸 안에 가시를 안고 그 고통을 없애 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한 바오로 사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누구나 자신을 괴롭히는 약점과 남에게 보이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단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이 오히려 자만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믿었기에,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숙명처럼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숙명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제키엘 예언자를 보내시면서, 그들이 예언자를 받아들이든 말든 그들 가운데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예언자 자신은 반대받는 표적이 될지언정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에제키엘 예언자는, 어떤 처지에서든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포하는 소명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늘 곁에서 별다를 바 없이 자라던 고향 사람이 갑자기 위대한 예언자로 칭송받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일수록 현실을 비판하고 되돌아볼 것을 외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피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 약점을 들추어내고 단점을 지적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싶어도, 때로는 그들의 비판 속에서 내 완고하고 편협한 생각을 열어 줄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좋겠습니다. 겸손하게 나를 낮추면 오히려 하느님께서 나의 약함을 통해 나를 성장시켜 주시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911
7월7일[연중 제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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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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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oSl_VSmYjw
[서울대교구 정태영 멜라니오(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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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이방인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정과 신앙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고도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을 해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나름 일인다역을 하고 있고, 몸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오늘만 해도 제 삶을 돌아보니, 제가 생각해도 웃겼습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감자를 깎다가, 부랴부랴 올라가서 강의하고, 초스피드로 내려와서 매운탕 펄펄 끓이고, 또 올라와서 미사 준비하고, 촛불켜고, 입장하고…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와 비교하니 저는 포크레인 앞의 삽 한자리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살아생전 따라다니던 애칭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백개의 팔을 지닌 사나이’였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전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랴, 틈틈이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랴, 여기 저기 공동체 건설하랴, 지도자 양성하랴…

바오로 사도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인 삶, 안락한 삶, 편안한 삶과는 영영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펄펄 끓는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로 활활 타오르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무 추진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는 건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불림 받지 않았더라면 잘 나가던 검투사를 했어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말못할 평생 지병이 하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고질병을 지칭하는 ‘가시’가 과연 무엇인가, 오랜 세월 두고두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그 병명을 밝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추측만 할 수 밖에요.

어떤 학자들은 그 가시를 안질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이미 눈에 큰 충격을 입어 사흘간이나 실명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그 후유증이 상당하리라는 추측입니다.

다양한 가설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봤을 때 질병이라기보다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같은 성격, 순식간이 끓어오르는 분노, 그래서 이웃들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그런 실수를 말하는 것을 아닐까요? 그도 아니라면 나와 맞지 않는, 끊임없이 나를 곤경으로 몰고 가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약점이랄까 취약점, 감추고 싶은 상처를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바오로 사도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밝히는 것을 넘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참된 사도요 스승이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어떡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취부,부끄러운 과거를 한사코 감추려고 기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쟁력, 수상경력, 업적만을 과대 포장해서 자랑스럽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솔직하게 밝힙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지난 과오들, 자신의 약점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부끄러운 과거들조차 아낌없이 다 밝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랑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이 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할 가시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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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e1MABh4A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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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안 변한 사람이 몇 달 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어떤 판사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려다가 미수에 그친 남자를 가벼운 벌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바로 여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심판 받아 죽고 수많은 죄인이 뻔뻔하게도 의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판사들은 같은 판례를 가지고도 아침과 오후가 판단이 달랐다고 합니다. 판결이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 판사들의 기분에 좌지우지 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려 목숨까지 바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조건 계속 물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신고하려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이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이 쓰는 단어인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게 옳으냐?”라고 되묻습니다. 그건 사과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함이라는 뜻이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의미를 알고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이런 일로 겸손해지면 좋겠지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고 자신들은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교육하는 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무리 중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다,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신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니체가 받아들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듯이, 소크라테스도 죽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초인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신이 아니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독한 자요, 젊은이를 올바르지 못한 길로 빠뜨리는 사람으로 모함하여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그들이 믿는 신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진화론이 그렇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신들이 아는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받으신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들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면 내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어야 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비행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만들어보라거나 고쳐보라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부모를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로 인정받으십니다. 미국의 락 토마스라는 사람도 처음엔 루저였다가, “나는 핸섬하고 터프한 사람이다.”란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려고 하는 이들만이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런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창조자의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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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사제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사제들과의 친교입니다. 한국에서는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히려 미국에 있으면서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각자가 사는 곳에는 교구 사제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신학교에서 자주 불렀던 성가가 떠올랐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하는 것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알라스카에서 온 신부님은 비행기를 3번 갈아탔다고 합니다. 콜롬비아에서 온 신부님은 선교센터가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초대합니다. 시카고에서 온 신부님은 모금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워싱턴과 댈러스의 신부님에게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은 담낭에 생긴 담석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학생 신부님들은 언어 배우면서 힘들었지만, 이제는 지낼 만 하다고 웃습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신부님은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의 심정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뉴욕의 신문사에 있다가, 댈러스의 한인 성당에 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일 막내 신부님과 저는 31년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3박 4일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지나갔습니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면 내년에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교구사제모임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주교님과의 면담입니다. 저는 주교님과 명동 교구청에서 5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주교님은 보좌 주교님에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이 되셨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주교님은 여전히 겸손하시고, 사제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셨습니다. 주교님은 저와 면담하면서 잠깐 놀라셨습니다. 명동에 있을 때 저는 염색해서 머리카락이 검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저는 염색하지 않았고, 지금은 머리카락이 하얗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셨지만 은색의 하얀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덕담해 주었습니다. 제가 변한 것이 있다면 머리카락의 색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저는 여전히 서울대교구의 사제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한국에 돌아가도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면담을 마친 후에 교구장님은 교구의 현황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3년 후에 있을 세계 청년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청년대회가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년대회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변화 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협력 사제, 미사 도우미 사제, 공소 사목 사제, 기도 전담 사제를 임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20년 가까이 보좌 신부로 지내야 하는 신부님들이 10년 안에 본당 사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율법과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잡으러 다녔고,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전에는 로마의 시민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전에는 가말리엘 밑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에는 많은 것이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믿음과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변화된 바오로를 공동체에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편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희망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사랑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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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6: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어기기만 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계속 사랑하셨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5)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다. 그 예언자가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최고의 값진 선물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의 완고함과 거부감이 최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매우 역설적이지 않은가?

오늘 복음에서 역시 예수께서 당신 고향에서 복음 선포에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불투명하고 무장되어있지 않을 때는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이 어렵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2절). 예수께서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와 그 기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을 거부하는 반응은 왜 나타났을까? 그것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시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표징은 믿음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3절) 이는 믿음의 단절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출생상태나 성장배경 가족 상황을 모두 아는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예수로부터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일상의 평범한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다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품위를 보존한답시고 예수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 그분을 오르게 하는 것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의 길이며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기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의 표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적이 있으려면 적어도 어떤 신앙의 발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을 통해서, 권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약성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나자렛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기적은 단순한 목수에 지나지 않은 비천한 마리아의 아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특별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는 그분의 권능에 더 집착하려는 신앙에 맞서는 것이다. 특별한 징표를 추구하다가 자칫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실망하고, 더구나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거부하는 잘못도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2,9). 일상적인 평범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고통과 가난의 “징표”를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외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여, 성성의 커다란 표지가 되지 못한다고 꺼리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더 성실히 우리의 일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끌어내는 교훈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을 가지고 하느님께 우리의 신앙을 강요하면서 진정 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의 모든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모든 일은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며, 일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모든 삶의 순간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그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눈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청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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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예수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목수’ 예수님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전혀 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고정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고정 관념은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마르코 복음서가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처럼, 믿음이 없는 마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주실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 놓은 신앙의 고정 관념들을 깨 버립시다. 고해성사는 주일 미사를 빠질 때만 한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본당에서 봉사는 시간에 여유가 있거나 열심인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부족한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사는 주일에만 간다는 고정 관념이 사라질 때, 우리의 발걸음은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께 더욱 자주 향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큰일이 생기거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만 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늘 기도하는 은총이 우리 안에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이 시작됩니다.

믿음이 자라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스스로 정하여 놓은 신앙의 고정 관념들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신앙인이 되는 길을 선택합시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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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1)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을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반응’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권위를, 즉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이 놀란 것은, 목수 일을 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예언자처럼, 또는 랍비처럼 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이라는 것은 알아들었는데, 그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가르치셨던 것과는 다르게 가르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들이 ‘말씀’에는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에 대해서도 두 고을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본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는 반응을 보였는데(마르 1,27),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3절) 그것은,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예언자 행세를 하는가?”라는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2) 5절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라는 말은, 그래도 몇몇 병자는 예수님을 믿어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병자들 외에는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총’을 주실 기회 자체가 없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놀라셨다.’는 ‘안타까워 하셨다.’입니다. <청하는 사람만이 받게 됩니다.(마태 7,7)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즉 청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청하지 않아서 못 받게 됩니다.>

3) 예루살렘 주민들의 반응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가 메시아일 수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이 말씀은, “너희는 나를 나자렛의 목수로만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온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4) ‘믿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먼저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깨닫게 되고, 알게 됩니다. 만일에 먼저 알아야만(이해해야만)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앎’을 얻지도 못하고, 점점 더 무지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고, 믿기를 거부하는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슨 수행이나 수련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종교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깨달음의 은총을 얻는 종교입니다.(요한 8,31-32)>

5) 신앙생활은, 먼저 믿고, 그 ‘믿음’에서 시작하여 ‘참된 앎’을 향해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는 왜 하는가? 믿음이 먼저라면 공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는 ‘지식’을 쌓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깊은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믿음 없이, 또는 믿기를 거부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교리를 공부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성경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보일 것이고, 교리는 ‘뜬구름 잡는 것 같은’ 허황한 이론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서 ‘참된 앎’이 시작됩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교리들은, 인간적인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알고 싶으면 먼저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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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차호철 세례자 요한 신부님]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기적은 시작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오늘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목수인 요셉의 아들 정도로 여겼고, 자라던 모습을 봐 왔던 동네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에는 바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도 별다른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 있는 사람,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을 자꾸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좀 특출하고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면, 끌어내리고 모함하고 시기합니다. 다 끌어내리고 싶어 하고 나와 똑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술을 잘 먹는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잘 먹을 수는 없는 것이고, 내가 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모두가 운동을 잘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와 다르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선입견이고 고정관념입니다. 그가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속 좁은 생각이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옹졸한 마음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만, 저 사람은 나와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과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나 동료들, 혹은 우리 믿음 공동체의 식구들을 편견 없이 긍정적이고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아니면 고정관념,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십니까?

사람에게 생각은 중요합니다. 생각은 행동을 일으키고, 인생을 만들고 변화시켜 나갑니다. “사람이 생긴대로 논다”는 말이 있습니다. 외모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생겨서 그렇게밖에 못산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생각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는데 그중에서 버려야 할 것이 바로 선입견이고 고정관념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닫힌 생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비행기에서 뛰어 내릴 때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다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펼쳐지지 않고 닫혀지면 그렇게 됩니다.

생각은 운명의 열쇠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겸손되이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보다 더 좋은, 하느님의 생각으로 열린 삶, 남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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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노승환 요셉 신부님]

<보는 마음>

어느 날부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느꼈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1년 이상 이어지던 중 어느 성당에서, 예전에 알던 의사분을 만나게 되었다. 증상을 설명하자 그분은 그것이 ‘까봐병’이라고 알려주었다. 죽을까 봐, 잘못될까 봐…. 빙긋 웃으며 나에게 한마디했다. “신부님, 염려마세요. 안 죽어요.” 바로 그 순간, 1년 이상 나를 괴롭히던 호흡곤란이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 사건을 이렇게 해석, 아니 이렇게 믿었다. ‘하느님께서 수많은 신자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의사를 만나게 해주셔서 나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그 치유가 의사의 유능함 때문이라는 식으로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쩔 것이냐, 내가 그렇게 믿겠다는데.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런 일을 해주셨다고 내가 믿겠다는데…

회당에서 예수님께 가르침을 들은 이들도 기적이란 말을 쓴다.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이 쓴 기적의 의미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믿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진정한 의미의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 사실 그것은 기적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한 복음의 증언은 섬뜩하다. 사실상 행하신 기적이 그들에게는 기적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는 것은 ‘경악’에 가깝다.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긴 경악, 주려 해도 받지 않는 자녀들을 보고 탄식하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사실 기적은 외적 현상이기에 앞서 믿음의 시야로 보이는 그 무엇, 하느님의 은총과 내 믿음이 합쳐져 일어나는, 나에게 열리고 보이는 주님의 순간이기에 똑같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기적이라 부르는 주님의 순간을 늘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고 싶은 마음, 주님의 순간을 ‘보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솔로몬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청했듯이 매일의 일상에서 구원의 시간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에게 임하시는 순간들을 ‘보는 마음’, 그것을 청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순간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기도한다. “나의 눈을 흐리는 불신과 나의 마음을 옥죄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나는 기어이 주님의 순간을 보리라.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나는 오늘도 주님의 순간을 만끽하며 막힘없는 감사의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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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현욱 베네딕토 신부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영국의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예수님)이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 예수님이 계신 쪽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손잡이는 오직 문 안쪽에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야만 열릴 수 있는 문입니다.

이 그림이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은 늘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문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결코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이 그림의 모습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고향 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참삶의 길, 참행복의 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아무리 전해준다 하더라도 또 예수님이 우리들과 아무리 함께 하시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없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해주시면서 우리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달라고 하십니다. 또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시기 위해 당신의 몸까지 내어주십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그 말씀은 허공을 떠도는 말이 될 것이고, 우리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결코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없고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내 안의 손잡이를 돌려 예수님을 맞아드리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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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기 삶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그 구분을 대부분 은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 시점을 기해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책에서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전반부는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시기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일, 관계, 삶에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후반부를 맞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누군가는 정체성에 들어갈 내용을 담아가면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바로 이 모습을 위쪽으로 떨어진다고 리처드 로어는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위쪽으로 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반부 삶의 태도와 접근 방식이 그대로 지속되면서 어떤 변화도 없을 때 그렇게 됩니다. 여기에 신체적 노화까지 오면서 점차 아래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시점은 언제였을까요? 바로 공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삶을 마치고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님 삶의 후반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반부의 삶에 충실하면서 공생활을 준비하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살면서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줄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사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삶이 아닌 위쪽으로 떨어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당신이 먼저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놀라운 말씀과 많은 기적에도 예수님의 후반기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를 사는 예수님이 아닌, 과거에 살았던 예수님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는 모습에서 믿음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만 연연하는 사람은 지금을 사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위쪽으로 떨어지는 변화도 없습니다. 세상에만 집착하고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니 계속 아래쪽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변화된 많은 성인 성녀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철저하게 변화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변화를 지향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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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집 물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보완할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믿는 이들은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력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성체조배를 통해서 나의 삶을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식인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못마땅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입견에 얽매여 사람을 잘못 판단하거나 겉모습에 집중하여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며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내 소리가 너무 크면 다른 사람의 소리뿐 아니라 하느님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지식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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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과 미움>

마태오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랑과 미움>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빛이
사랑하고

어둠이
미워하니

진리가
사랑하고

거짓이
미워하니

진리

믿음이
사랑하고

의심이
미워하니

믿음

희망이
사랑하고

허무가
미워하니

희망

사랑이
사랑하고

미움이
미워하니

사랑

정의가
사랑하고

불의가
미워하니

정의

살림이
사랑하고

죽임이
미워하니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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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사람이 됩시다”

한결같아라, 두려워하지 마라, 약점을 자랑하라,

“수도자가 누구인가?” 묻는 사람이 수도자라 합니다. 날마다 물어야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등 입니다. 치열하고도 한결같은 노력없이는 참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공부의 목적은 무지에서 벗어나 나를 아는 참사람이 되는 것이요, 정말 중요한 필생의 평생 공부는 참사람이 되는 공부 하나뿐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참사람의 탐구와 하느님 탐구는 함께 갑니다. 결국 참사람이 되는 공부는 하느님 공부요 날로 닮아가야 하는 하느님입니다.

이보다 도전적이고 흥미진진한 공부도 없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바 답은 사랑의 이중계명 하나뿐이니,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도 참사람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지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 일상의 삶에서 품격을 갖춘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다산> 이런 경지는 정말 하느님의 뜻에 일치한 대자유인의 경지이며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서 말하는 일흔 살에 이른 경지와 일치합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공자가 얼마나 치열한 공부의 여정을 살았는지 그 공부의 발자취를 보여줍니다. 하고자 하는 바를 해도 법도에,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니 정말 자유로운 참사람의 경지입니다.

“‘곧고 반듯하고 위대해서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곧 그 행하는 바를 의심치 않는 것이다.”<주역>

주역의 말씀 역시 참사람이, 참어른에 이른 경지를 보여줍니다. 다음 시인 백석의 고백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경지에 이른 참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우리 주 예수님이 우선이고 이에 앞선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 생의 전부였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이 세 분에게서 저는 참사람이 되는 길을 배웁니다.

첫째, “한결같아라!”
오늘 복음에서 무지한 고향 사람들에 대한 반응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고향 사람들은 겸손히 배우려는 자세는 전무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얻었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예수님의 배경에 대한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질투합니다. 결코 자기의 무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대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어둔 모습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바로 이 말마디가 부정적 분위기를 요약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과 편견의 완고함에 대한 주님의 깊은 좌절감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나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 밖에는 어떤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으며, 이들의 믿지 않음에 놀랍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놀란 고향사람들, 그리고 이들의 믿음 없음에 놀란 예수님이 참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빛나는 대목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좌절함이 없이 미련없이 훌훌떨치고 일어나 홀가분하게, 묵묵히, 한결같이 계속 자기 길을 가시는(to keep going) 모습이 감동입니다. 제 지론이 생각납니다.

‘넘어지는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한결같은 삶이, 탄력좋은 삶이 제일이다.’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곁같이 사명에 전념하라,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삶의 모범입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에 앞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파견되는 자리 역시 적대적입니다. 이를 대비해 주님의 영이 에제키엘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를 일으켜 세우며 주시는 격려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자손들에게 너를 보낸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은 그대로 회개가 절실한 우리의 부정적 무지한 면모를 보는 듯합니다. 마음 완고하기가 예수님 고향 사람들과 흡사합니다. 우리 역시 일상에서 이런 이들을 만나기도 할 것이며 주님은 에제키엘은 물론 우리에게 든든한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에 이어 반드시 나오는 말마디가 ‘내가 너와 함께 있다.’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약점을 자랑하라!”
참 용기있고 참 자유로운 영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진정 강한 자는 자기를 이긴 자입니다. 진짜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나 안에 있습니다. 내가 문제요 내가 적입니다. 자기가 받은 고통이 자만에 대한 해결책임을 발견한 바오로의 감사에 넘친 감동적 고백입니다. 불리하다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자기를 비우는 겸손의 계기로, 바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바오로 사도의 순발력의 지혜가 참 놀랍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감동적 고백도 그대로 나의 고백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 자기에 대한 궁극의 빛나는 승리를 보여줍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부끄럼없이 자랑하다니 참 대단한 내적 용기입니다. 정말 자기를 이긴 영적승리자, 자유로운 영혼의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애오라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그리스도와의 내적일치의 삶이 참으로 감동적이며, 내적 힘과 용기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자기를 이긴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멋진 참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1.한결같으십시오.
2.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약점을 자랑하십시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 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이런 참사람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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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꽃이신 하느님을 보듯>

꽃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이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언자를 보는 것도 이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 이런 식인데 이런 경우 사람을 보기보다는 ‘어떤’을 보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을 보시지 않고 사람을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비를 내려주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물은 산이 아니고 물이며,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산이 물에 비친다고 해서 물이 산이 아니고 물 안에 산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그런 뜻이기도 하지만 그야 말은 물과 산은 그 어떤 물과 산이기 이전에 그저 물이고 그저 산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밤을 좋아한다고 해서 밤나무가 있는 산인가, 아닌가의 관점에서 산을 본다면 밤나무가 없는 산은 내게 무의하고 그래서 거들떠보지도 않겠지요?

그러니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만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고 더 높은 차원입니다.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니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보는 데 실패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데 실패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하고 놀라워하면서도 지혜와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분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못마땅합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난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수준의 말을 하고 기적도 나와 마찬가지로 행하지 못해야 하는데 자기들과 달리 예수께서 하늘에서 오는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향 사람들과 달리 참 신앙인이라면 무엇에서건 하느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고, 사람에게선 더더욱 하느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꽃을 보는 눈도 훌륭합니다. 꽃이신 하느님을 보는 눈은 더 훌륭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도 꽤 훌륭합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눈은 더 훌륭합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눈은 꽤 훌륭합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더 훌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더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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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ㄴ)

<온전한 믿음으로!>

오늘 복음(마르 6,1-6)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새,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마르 6,2-3) 그러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ㄴ)

오늘 복음은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믿음, 곧 예수님의 인성 안에만 갇혀 있는 믿음,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둘 다 믿지 못하는 믿음에 대한 지적’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들이 눈으로 보아 알고 있는 것 안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전부였고, 그 편견과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떤가? 온전한 믿음인가?

주님께서는 나의 믿음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믿는 온전한 믿음인지를 확인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종종 가시(고통)를 주십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코린 12,7)

온전한 믿음이 있는 곳에서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용서와 화해의 기적, 함께 부활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기적들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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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oJ34zgSF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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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잡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주님의 말씀이
예언자를 치유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서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무수히 일어나는
판단을 멈추게됩니다.

판단하는 그만큼
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가두는 판단은
영원히 끝날 수없는
다툼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판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것은
말씀과 믿음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 역사는
실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의 전부를 걸고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의를
되찾는 길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는 성찰에 있습니다.

모든 만남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판단을 버리고
말씀을 따릅시다.

고맙고 고마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허약한 우리를 위해
낮아지시는 새로운
생명의 길로 오셨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일찍이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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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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