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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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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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삶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다가도 다른 이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악을 물리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며 아픔을 없애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이에게 행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내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과 비교하고 자신의 아들과 비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라는 행복을 체험하지만, 결코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행복하려면 내 곁에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해야 합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가지지 못할 것에 마음을 두는 순간, 하느님의 나라는 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타인을 자신의 행복을 재는 도구로 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함께 기뻐해 줄 때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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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3절). 나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신앙적인 일들을 어떤 믿음의 시각으로 보고 경험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며, 내가 어떤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3. 나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선입견으로 신앙의 진리를 보지 못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묵상해보고 신앙의 진리를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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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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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몸 안에 가시를 안고 그 고통을 없애 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한 바오로 사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누구나 자신을 괴롭히는 약점과 남에게 보이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단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이 오히려 자만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믿었기에,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숙명처럼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숙명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제키엘 예언자를 보내시면서, 그들이 예언자를 받아들이든 말든 그들 가운데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예언자 자신은 반대받는 표적이 될지언정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에제키엘 예언자는, 어떤 처지에서든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포하는 소명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늘 곁에서 별다를 바 없이 자라던 고향 사람이 갑자기 위대한 예언자로 칭송받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일수록 현실을 비판하고 되돌아볼 것을 외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피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 약점을 들추어내고 단점을 지적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싶어도, 때로는 그들의 비판 속에서 내 완고하고 편협한 생각을 열어 줄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좋겠습니다. 겸손하게 나를 낮추면 오히려 하느님께서 나의 약함을 통해 나를 성장시켜 주시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911
7월7일[연중 제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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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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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oSl_VSmYjw
[서울대교구 정태영 멜라니오(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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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이방인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정과 신앙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고도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을 해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나름 일인다역을 하고 있고, 몸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오늘만 해도 제 삶을 돌아보니, 제가 생각해도 웃겼습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감자를 깎다가, 부랴부랴 올라가서 강의하고, 초스피드로 내려와서 매운탕 펄펄 끓이고, 또 올라와서 미사 준비하고, 촛불켜고, 입장하고…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와 비교하니 저는 포크레인 앞의 삽 한자리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살아생전 따라다니던 애칭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백개의 팔을 지닌 사나이’였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전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랴, 틈틈이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랴, 여기 저기 공동체 건설하랴, 지도자 양성하랴…
바오로 사도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인 삶, 안락한 삶, 편안한 삶과는 영영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펄펄 끓는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로 활활 타오르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무 추진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는 건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불림 받지 않았더라면 잘 나가던 검투사를 했어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말못할 평생 지병이 하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고질병을 지칭하는 ‘가시’가 과연 무엇인가, 오랜 세월 두고두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그 병명을 밝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추측만 할 수 밖에요.
어떤 학자들은 그 가시를 안질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이미 눈에 큰 충격을 입어 사흘간이나 실명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그 후유증이 상당하리라는 추측입니다.
다양한 가설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봤을 때 질병이라기보다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같은 성격, 순식간이 끓어오르는 분노, 그래서 이웃들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그런 실수를 말하는 것을 아닐까요? 그도 아니라면 나와 맞지 않는, 끊임없이 나를 곤경으로 몰고 가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약점이랄까 취약점, 감추고 싶은 상처를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바오로 사도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밝히는 것을 넘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참된 사도요 스승이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어떡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취부,부끄러운 과거를 한사코 감추려고 기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쟁력, 수상경력, 업적만을 과대 포장해서 자랑스럽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솔직하게 밝힙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지난 과오들, 자신의 약점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부끄러운 과거들조차 아낌없이 다 밝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랑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이 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할 가시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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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e1MABh4A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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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안 변한 사람이 몇 달 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어떤 판사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려다가 미수에 그친 남자를 가벼운 벌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바로 여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심판 받아 죽고 수많은 죄인이 뻔뻔하게도 의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판사들은 같은 판례를 가지고도 아침과 오후가 판단이 달랐다고 합니다. 판결이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 판사들의 기분에 좌지우지 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려 목숨까지 바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조건 계속 물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신고하려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이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이 쓰는 단어인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게 옳으냐?”라고 되묻습니다. 그건 사과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함이라는 뜻이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의미를 알고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이런 일로 겸손해지면 좋겠지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고 자신들은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교육하는 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무리 중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다,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신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니체가 받아들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듯이, 소크라테스도 죽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초인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신이 아니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독한 자요, 젊은이를 올바르지 못한 길로 빠뜨리는 사람으로 모함하여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그들이 믿는 신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진화론이 그렇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신들이 아는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받으신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들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면 내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어야 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비행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만들어보라거나 고쳐보라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부모를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로 인정받으십니다. 미국의 락 토마스라는 사람도 처음엔 루저였다가, “나는 핸섬하고 터프한 사람이다.”란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려고 하는 이들만이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런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창조자의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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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사제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사제들과의 친교입니다. 한국에서는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히려 미국에 있으면서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각자가 사는 곳에는 교구 사제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신학교에서 자주 불렀던 성가가 떠올랐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하는 것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알라스카에서 온 신부님은 비행기를 3번 갈아탔다고 합니다. 콜롬비아에서 온 신부님은 선교센터가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초대합니다. 시카고에서 온 신부님은 모금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워싱턴과 댈러스의 신부님에게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은 담낭에 생긴 담석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학생 신부님들은 언어 배우면서 힘들었지만, 이제는 지낼 만 하다고 웃습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신부님은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의 심정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뉴욕의 신문사에 있다가, 댈러스의 한인 성당에 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일 막내 신부님과 저는 31년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3박 4일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지나갔습니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면 내년에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교구사제모임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주교님과의 면담입니다. 저는 주교님과 명동 교구청에서 5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주교님은 보좌 주교님에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이 되셨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주교님은 여전히 겸손하시고, 사제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셨습니다. 주교님은 저와 면담하면서 잠깐 놀라셨습니다. 명동에 있을 때 저는 염색해서 머리카락이 검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저는 염색하지 않았고, 지금은 머리카락이 하얗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셨지만 은색의 하얀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덕담해 주었습니다. 제가 변한 것이 있다면 머리카락의 색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저는 여전히 서울대교구의 사제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한국에 돌아가도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면담을 마친 후에 교구장님은 교구의 현황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3년 후에 있을 세계 청년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청년대회가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년대회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변화 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협력 사제, 미사 도우미 사제, 공소 사목 사제, 기도 전담 사제를 임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20년 가까이 보좌 신부로 지내야 하는 신부님들이 10년 안에 본당 사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율법과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잡으러 다녔고,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전에는 로마의 시민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전에는 가말리엘 밑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에는 많은 것이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믿음과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변화된 바오로를 공동체에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편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희망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사랑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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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6: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어기기만 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계속 사랑하셨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5)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다. 그 예언자가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최고의 값진 선물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의 완고함과 거부감이 최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매우 역설적이지 않은가?
오늘 복음에서 역시 예수께서 당신 고향에서 복음 선포에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불투명하고 무장되어있지 않을 때는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이 어렵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2절). 예수께서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와 그 기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을 거부하는 반응은 왜 나타났을까? 그것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시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표징은 믿음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3절) 이는 믿음의 단절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출생상태나 성장배경 가족 상황을 모두 아는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예수로부터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일상의 평범한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다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품위를 보존한답시고 예수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 그분을 오르게 하는 것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의 길이며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기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의 표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적이 있으려면 적어도 어떤 신앙의 발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을 통해서, 권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약성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나자렛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기적은 단순한 목수에 지나지 않은 비천한 마리아의 아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특별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는 그분의 권능에 더 집착하려는 신앙에 맞서는 것이다. 특별한 징표를 추구하다가 자칫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실망하고, 더구나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거부하는 잘못도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2,9). 일상적인 평범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고통과 가난의 “징표”를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외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여, 성성의 커다란 표지가 되지 못한다고 꺼리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더 성실히 우리의 일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끌어내는 교훈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을 가지고 하느님께 우리의 신앙을 강요하면서 진정 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의 모든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모든 일은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며, 일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모든 삶의 순간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그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눈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청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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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예수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목수’ 예수님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전혀 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고정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고정 관념은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마르코 복음서가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처럼, 믿음이 없는 마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주실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 놓은 신앙의 고정 관념들을 깨 버립시다. 고해성사는 주일 미사를 빠질 때만 한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본당에서 봉사는 시간에 여유가 있거나 열심인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부족한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사는 주일에만 간다는 고정 관념이 사라질 때, 우리의 발걸음은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께 더욱 자주 향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큰일이 생기거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만 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늘 기도하는 은총이 우리 안에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이 시작됩니다.
믿음이 자라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스스로 정하여 놓은 신앙의 고정 관념들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신앙인이 되는 길을 선택합시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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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