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6장,15-20ㄴ절;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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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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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떠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 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늘 위 몇 미터까지 올라가셨을 때 승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00미터? 아니면 1,000미터인가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면 될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수치로 측정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어느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이라는 장소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눈앞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부활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부활과 승천 또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떠나심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주님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분을 믿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대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승천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에게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땅의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고, 세상의 기준으로 나의 삶에만 집중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홍보 주일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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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하느님의 입장

         – 예수님의 입장

         – 제자들의 입장

2. 우리는 나의 삶에 집중하며 살고 있는지 하늘의 것을 보고 살고 있는지 묵상해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는 어떤 거룩한 삶을 살아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증거에 대해 묵상해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에는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찾지 못하였다면 어떤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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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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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오늘 복음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셨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기에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띠고 계시지 않습니다. 제1독서처럼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찾지 않아야 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으로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선과 악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창조해 나가려는 노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끝없이 세상을 타락시켜 나가는 악의 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 생명을 경시하거나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대표적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은 우리의 사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 예수님과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생명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와 죽음의 문화에서 나오는 악취를 제대로 판별하게 해 주는 가치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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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복음을 살펴보면 승천이 주님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 에페소서의 심오한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면 승천은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경축해야 할 기념비적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만물을 주재하시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으시어 아버지와 함께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승천은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영광스러운 당신 신성을 드러내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분명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제자들의 믿음으로, 희망으로, 증언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승천은 우리에게 ‘아직 아니’라고 충고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세상에 머물러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신학적으로 지극히 미성숙한 상상을 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인 가상일 뿐입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 곧 하느님 나라가 드러날 때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 권한으로 정하셨다고 밝히신 뒤, 오히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물론 땅끝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 가야 합니다.
사도들과 같이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주님 승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끝을 의미합니다. 이제 눈으로 직접 뵈옵는 믿음과 신앙은 끝나고, 그 대신에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초월하시는 주님과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승천은 하나의 시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실망하고 의기소침하여 떠나간 것이 아니라, 크게 기뻐하며 희망을 안고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바야흐로 기쁨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것도 부활 승천하신 주님과 헤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슬픔도 번뇌도 절망도 죽음도 결코……!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855
5월12일[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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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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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rwmtrWWjLE
[마산교구 주용민 리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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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베드로•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행적과 복음 선포 여정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는 은혜로운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저자로 추정되는 루카는 사도행전 첫 장에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오르시기 전, 이런저런 당부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라진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그들 곁에 서서 외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제자들은 스승님과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나머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분께서 떠나신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잘 헤아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떠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 성령을 기다려라.

2.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천사들은 똑같은 말을 건넬 것입니다

“너희는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하늘 높이 향했던 우리의 시선을 일상의 낮은 곳을 향해 내려야겠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낮추어 꼬질꼬질해 보이고 남루해 보이는 인간 세상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흔적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인간 세상 안으로, 죄투성이의 비참한 인간들 안으로 완전히 육화하신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봐야겠습니다.

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느냐는 질책은 이제 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가르침과 업적을 찬양하며 인간 세상 안에서 그분의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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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DmgO1MQd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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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승천이 꼭 필요한 이유: 아버지가 되시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날입니다. ‘사랑하는데 왜 떠나야만 하느냐?’는 내용의 가사도 있듯이,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함께 계시면 좋았을 텐데 왜 우리를 떠나 하늘로 가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떠나시면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사명을 교회에 주십니다. 세례는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낳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마지막 심판 때 가진 것이 없어 지옥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누더기 옷 주머니에 있었던 구슬 3개씩이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세 개는 그가 세운 수도회고, 세 개는 복음삼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탈출 34,20)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빈손으로 오면 그분께서 성령을 주신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그분 나라에 살 수 없게 됩니다. 돈 10,000원을 훔친 아이도 부모가 그것을 알았을 때 다가가기 어려운데, 부모의 살과 피를 훔쳐서 그분들을 죽게 만들고 아무런 열매도 없다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혼자 맺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 자녀를 탄생 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남편이 주는 돈이 ‘성령’과 같습니다. 성령은 남편의 살과 피입니다. 아내는 그것으로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합니다. 결혼하여도 아내가 자녀를 낳지 않고 남편이 주는 모든 돈을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것과 자기 친정 식구들 만을 위해 쓰려고 한다면 남편도 계속 돈을 주는 일이 꺼려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아이에게 돈을 직접 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마치 젖먹이에게 떡이나 고기를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에게 그 돈은 부담스러울 뿐더러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소화해서 주는 엄마의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아빠의 지나친 영향력 때문에 아이가 비뚜로 성장하는 예가 많이 나옵니다. 아이에게 엄마를 제외하고 아빠가 영향력을 많이 미치면 아이는 두 가지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부담감에 짓눌려버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받는 그런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어떤 아이는 아빠를 마치 종처럼 다룹니다. 아빠가 다 해 주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빠가 무서워 주눅 들어 삽니다. 그 이유는 돈을 벌어오는 아빠의 영향력을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가 저를 매우 사랑하셨지만,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말하는 게 더 편했습니다. 아버지가 세발자전거를 사 주셨는데 하루도 안 돼서 손잡이가 부러졌습니다. 아버지가 야단은 치지 않으셨지만, 그것을 말하기 위한 부담감은 지금도 기억납니다. 불량배에게 아버지가 사주셨던 시계를 빼앗겼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채변봉투를 재래식 화장실에 떨어뜨렸을 때도 아버지가 건져줄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먼저 어머니에게 말하는 편이 나았습니다. 어차피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 사시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에게 훈육 받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아빠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인도 영화 ‘지상의 별처럼’(2007)은 중산층 부모에게 공부를 지독히도 못 하는 문제아가 태어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 아이는 난독증을 앓고 있었지만, 부모는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난독증을 이겨낸 미술 선생님을 만나면서 아이가 치유됩니다.

이처럼 부모는 멀리 떨어져 있고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에게 맡기고 지원만 해 주는 게 아이에게 더 낫습니다. 영화 ‘블랙’도 같은 내용이고, 헬렌 켈러에게 부모님보다 그녀와 같은 처지에서 탈출했던 ‘설리번’ 선생이 더 필요했던 것도 같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어 교회에 성령만을 주시고 교회에 우리를 맡기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 따라 하기 더 쉽습니다.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며 그분의 신부가 된 우리가 어떤 열매를 맺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승천의 의미는 이제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머니인 교회에 순종 하며 양육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자녀를 낳으려면 교회 앞에서는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아버지도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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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번 성지순례 갈 때입니다. 가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사용할 체크에 미리 사인을 해 놓았습니다. 사무장님이 30장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사제관에는 보름정도 자리를 비우니 빨래를 미리 해 놓았습니다. 쓰레기도 모두 치웠습니다. 사제관 청소를 하는 날은 부주임 신부님께 문을 열어 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도 대충 정리했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도 출장을 갈 때면 비슷하게 준비했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사무실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체크에 사인하고, 서류 결재하고, 원고 교정보고, 냉장고도 정리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도, 출장도 잘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없어도 직원들이 성당과 사무실을 잘 지켜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메일이나 문자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없을 때, 오히려 더욱 열심히 자리를 지켜준 직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휴가를 가시면 가능하면 외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약속도 많이 잡지 않았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저를 믿고 휴가를 가셨기 때문입니다. 평일미사 2번과 주일미사 4번도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오시면 기뻤습니다. 업무가 줄어서가 아니라, 본당 신부님의 자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하셨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절망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고야 믿겠다는 토마 사도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이 해 주셨을 때 가슴이 떨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협조자,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고 ‘승천’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보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없을 때, 직원들이 더욱 열심히 자리를 지키고, 일을 했던 것처럼, 제가 본당 신부님이 안 계실 때, 자리를 잘 지켰던 것처럼, 제자들은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렇습니다. 직원들에게 제가 성지순례를 어디로 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출장 가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기 위해서 교회는 오늘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꽃이 아름답게 피면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갑니다. 많은 벌과 나비는 꽃이 찾아가지 않았어도 그 향기를 따라서 꽃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향기가 된다면, 우리의 발과 손이 주님을 전하는 발과 손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교회를 찾아 올 것입니다. 바다로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것은 바다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면,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선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란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옹골차게 딛고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승천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신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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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의 곁을 떠나 당신이 취하신 인성이 함께 하느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다. 이제 우리는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다. 교회는 이 성령 안에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승천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욱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바로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왕권과 권능을 가지신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즉 구원의 충만성은 이제 교회의 선교사명을 통해 완전하게 표현되고 교회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실현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선교사명”을 주신다. 이로써 교회는 선교활동을 통해 구원의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교회는 삶으로 증거가 돼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영광으로 들어가심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20절). 예수님 부활의 참된 목적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과 통치권이 드러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승리자이심을 실제로 드러내야 한다(2코린 2,14).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시어 아버지 오른편에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상에 오를 수 있는, 즉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내는 축제는 기쁨과 기다림의 축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바로 우리들의 고양(高揚)을 당신을 통해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닮음으로써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요한 16,7)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따를 수 있는 온갖 악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것이며, 마귀를 쫓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복음 선포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고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용감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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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과 독서는 각각 마르코 복음서의 마무리와 사도행전의 시작에 해당합니다. 책 전체를 요약하는 결정적 부분들을 배치하여,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복음)이 곧 교회의 시작(독서)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당부를 계속 이어 가는 것이 교회의 일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상 생활 동안 갈릴래아나 예루살렘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승천하심으로써 그 어떤 시공간에도 매이지 않고 활동하십니다. 이는 복음에서도 분명히 선언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이, 예수님 당신께서 행하시던 일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독서를 포함한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전하여 주는 동시에, 그 교회가 걸은 여정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현존하셨는지를 증언합니다.

부재는 언제나 현존과 연결되고, 떠남은 새로운 시작과 연결됩니다. 누군가의 부재에 대한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현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결코 떠남이나 멀어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떠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 없이, 인간과 더 깊은 유대와 공존의 관계를 맺으려는 도약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순간순간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현존과 구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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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6-11)

1)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사도들이 직접 보았다는 증언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음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승천이라는 사건을 증언한 것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신앙을 고백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부활 후에 사십 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났고(사도 1,3), 그 예수님이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일을 ‘승천’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은(마르 16,19), 그렇게 믿는다는 믿음을 고백한 말인데,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별’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입니다. 그것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루카 24,52)>

2)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에페 4,9-10)

우리는 예수님의 ‘올라가심’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내려오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내려오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여기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은, 뜻으로는 “하느님이셨지만”입니다.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는, 뜻으로는 “종이 되시고”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땅으로(사람들 속으로) 내려오셔서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 사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높은 하늘에 계시면서 사람들에게 “여기로 올라오너라.”라고 명령하시는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서, 우리는 “사랑은 같아지는 일”, 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쪽으로 내려가 주는 일”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3)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히브 6,20)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라는 말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당신이 먼저 그곳으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요한 10,3ㄴ-4ㄱ)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앞장서 가신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앞장서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콜로 3,1) <‘위에 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입니다.>

4) 사도행전의 승천 이야기에 있는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라는 천사들의 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땅도 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땅만’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시선은 하늘을 향하지만 발은 땅을 딛고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만, 또는 승천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인류의 복음화와 구원, 그리고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 등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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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님]

<지금 여기 함께하시는 예수님과 기쁘게>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지상에서의 모든 활동을 마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승천에 대한 설명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장소를 옮기셨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시간과 공간의 한계와 제약을 벗어난 분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넘어서는 영원한 분이시고, 공간적으로는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이들과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러한 말씀대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여하신 사명은 복음 선포였습니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무섭고 두려워 세상으로부터 피해 숨어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어 위로와 평화를 주시고 다시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세상을 피해 숨어있었던 그들이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자신들과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사명의 수행에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이처럼 예수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약속이야말로 제자들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근원적 힘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상대를 만난다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한다면 삶의 고난과 역경의 순간마저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것이고,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아무렇게나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대가 있기에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우리의 그런 상대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요 벗으로 불러주시며 우리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행복하고 우리 인생은 참으로 의미 있고 소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면 그 기쁨과 행복은 자연스럽게 이웃들에게도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면 닮는 만큼 우리의 말과 행동, 모습과 태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실천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분명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성부께로부터 파견되셨듯이 우리도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성자이신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된 이들입니다. 파견된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고 선포하는 사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에페 1,19 참조) 기억하며 계속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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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완희 스테파노 신부님]

<승천-우주를 사랑으로 채우시는 하느님의 발자국>

“갈릴레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11)

오늘 첫 독서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에게 천사가 들려준 말씀이다. 오늘날 하늘의 개념은 성경이 쓰이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늘로 날아 올라가면 끝없는 우주가 나온다. 관측이 가능한 우주의 끝에 도달하려면 빛의 속도로 수백억 년을 가더라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는 동안에 우주는 계속 확장하니까…. 그러니 하늘을 바라보는 승천 이야기는 오늘 독서 말씀으로 정리해야겠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행전 1,11 참조)

오늘 승천 이야기는 하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약속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분께서 처음 오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때도 우리를 잊지 않고 꼭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대인은 신·구약성경 속 시대와는 모든 것이 달라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시대의 인생은 그 시대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삶의 연속이다. 피조물의 역사가 수천 년이 아니라 138억 년으로, 생활과 사유의 공간은 지중해 연안을 넘어온 지구 끝으로, 중력을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태양계, 은하, 은하단, 관측이 가능한 우주, 미지의 우주로 넓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허구가 되었으므로 신앙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볼 수 없는 곳이 발견되어 더 이상 눈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들과 같다.

오히려 신앙인은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감동한다. 6천 년짜리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영겁의 하느님이 그분이시다.

1977년에 발사된 우주탐사선 보이저1호가 태양계 저편에서 카메라를 돌려 찍은 지구 사진은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린다. 그 사진을 보노라면 이 우주에서 지구란 얼마나 작은 곳인가를 깨우칠 수 있다.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으로 구현되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 지구뿐만 아니라 수천억 개의 별을 가진 수천억 개의 은하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우주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임계국면(threshold)을 만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만난다. 그 임계국면의 정점에 예수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사랑이 계신다.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사셨고, 어느 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승천은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 사이의 이정표다.

많은 사람이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산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담은 리스트다. 얼마 전에 나는 버킷리스트를 바꿨다. 2021년에 인류는 우주에 ‘제임스 웹’이라는 고성능 망원경을 띄웠다. 어느 날 그 망원경이 촬영한 화보를 보다가 입이 벌어졌다. 거기에서 6,500 광년 떨어진 독수리성운 안에 있는 ‘창조의 기둥’이라는 사진을 보면서 그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

그날 나는 버킷리스트를 바꿨다. 언젠가 꼭 그것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싶다. 안 되면 하느님께 보여달라고 조를 것이다. 이제 내 버킷리스트는 이 세상의 풍경이나 죽기 전이라는 시간에 한정하지 않을 것이다. 승천은 이렇게 그분을 통하여 우주로, 사랑으로 나를 뛰어오르게 하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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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홍태 베다 신부님]

<예수님, 하늘로 오르셨도다!>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승천대축일입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한 지 40일째 되는 날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말씀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코 16,14-19, 루카 24,51, 사도행전 1,9)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이 비로소 완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승천에 관한 기록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납니다. 예언자 에녹과 엘리야 등이 죽지도 않고 하늘로 들리어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에서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라고 고백합니다. 이 ‘하늘’이나 ‘오른편’이라는 말은 공간적인 뜻에서 ‘하늘’이나 ‘오른편’이 아니라 본래의 하느님 상태로 복귀하셨다, 혹은 하느님 아버지의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공간적인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셨다는 기록에 대해서도 굳이 날 수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르코와 루카 복음서는 부활하신 당일 날 승천하신 것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서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신 것으로 보도하는 이유는 여러 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40이라는 숫자의 신학적 의미 때문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기까지 꼬박 40일을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성경에서 40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도 공생활을 앞두고 40일을 기도, 단식하며 준비하셨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오르는 것이 이토록 엄청난 일일진대,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바로 만나고, 그분을 아빠(abba)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셨으며,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있을 곳을 미리 마련해 주셨습니다.(요한 14,2-4 참조)

이처럼 주님 승천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오르셨기에 그분의 지체인 우리도 언젠가는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음을 잘 보여줍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66항) 또한 이 구원의 희망을 다른 이들에게도 널리 알리기 위해 복음 선포의 의무도 일깨워 줍니다.(마르코 16,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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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이폰하면 떠로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입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났다가 애플이 망할 즈음 다시 복귀했습니다. 복귀 후 그가 맨 처음 시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새로운 제품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제품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개에 달하던 애플 제품을 전문가용, 일반인용, 최고 사양, 적정 사양으로 분류해서 단 4가지 상품으로 압축했습니다. 이 결정이 다 죽어가던 애플을 살렸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필요한 것이 참 많아 보입니다. 쇼핑몰에 들어가면 정말로 다양한 제품이 있고, 이 제품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유를 늘릴수록 나의 삶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불필요한 것, 아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 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나에게 꼭 필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거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우리입니다. 그 순간 갖고 싶은 욕심, 남보다 많은 것을 가져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착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서 정말로 필요한 것에 오히려 소홀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어떤 것과 대치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다른 세상 것을 제거하지 못해서 주님을 맨 뒷자리에 놓습니다. 점점 주님과 멀어지면서 자기와 아무런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의 필요를 분명히 알고 열심히 기도하며 각종 신앙생활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립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삶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표징이 따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곧 주님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 안에서 주님을 제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남길 정도로 쓸데없는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제거해야 할 것은 과감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에게 큰 선물을 표징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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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별만은 말아줘요>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고 이제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그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 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 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2)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주님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 없는 행복은 없습니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에 함께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활동을 계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외적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이는 단죄를 받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명과 죽음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생명, 믿지 않는 이에게는 단죄와 죽음이 놓여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표징이 따랐는데 믿는 이들이 대표격인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았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았습니다. 오늘날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에게서 악한 영들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냐! 하고 우리 신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도 성당을 나오기 때문에 고만하다. 성당 안 나왔으면 더했으면 더했지…’ 자기도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남을 흉보는 그 선하지 못한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를 잡고 험담하는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매번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받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르코복음 8,33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사탄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도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페소서 4,29에 보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그야말로 남 얘기 좋아해서 흉보고 비방하며 허물을 들춰냈는데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입이 싼 사람이 있어요. 뒷담화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말, 남을 기쁘게 해줄 말을 찾는다면 그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눈을 뜬 만큼, 귀가 열리면 열린 만큼 새로운 언어로 듣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인 뱀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듯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혹거리가 많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해를 입히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 다양한 여건들이 상처를 주고받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아무리 우리를 해치는 말을 들어도, 또 유혹하는 말이나 행동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유혹이나 독을 마시지 않으려고 외부 환경을 고칠 것이 아니라, 그런 독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내 안에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손으로 뱀을 쥐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역시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뱀을 집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 가슴에 품고 새기며 실천하고, 미사 안에서 영성체하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다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서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적인 병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병중에 가장 심각한 병은 영적인 병을 앓는 것입니다. 육신은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고, 육적으로는 환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것은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치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혼을 치유하는 명약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는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보약 중의 보약입니다. 이 보약은 어떤 중병도 치유합니다. 이 보약을 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노력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칭찬하며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천상에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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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마르코 16,15-20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승천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의 모든 것 하나 남김없이 쏟으신
아니 당신을 송두리째 내던지신
이 땅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가난하고 척박한 땅 갈릴래아에서
당신 마지막 모습 보여주시며
어딘가 또 다른 고통의 땅 갈릴래아에서
당신을 만나리라는 희망 주시고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의 빈자리를
우리로 하여금 가득 채우시고
미련 없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걱정 없는 환한 웃음 지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우리조차 믿을 수 없는 우리를
당신의 귀한 자리에 앉히시고
이제 또 하나의 당신이 되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살리는
복음의 기쁨을 널리 전하고
탐욕과 경쟁과 폭력을 조장하는
악의 무리를 쫓아내어
더불어 함께 사는 새 세상을 열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을 드러내라시며
우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태초에 하나였던 하늘과 땅을
우상 숭배에 젖은 불의한 사람들이
애써 처참하게 갈라놓은 하늘과 땅을
다시 하나로 곱게 아우르시려고
이 땅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오르심으로써 더 깊이 내려오시고자
떨어지심으로써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자
희미해지심으로써 더 뚜렷이 보여주시고자
우리를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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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윤리신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질문은  과연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선한 존재인가”입니다.

윤리란 인간이 악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악함을 전제하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변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것은 다양한 문화 안에서 이미 결론이 나있는 듯 한데 다음과 같은 격언들에서 이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 격언을 보면, Lupus pilum mutat, non mentem. 즉, “늑대는 털을 바꾸어도 마음은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영어 격언에는, A leopard can’t change its spots. 즉, “표범도 자기의 얼룩을 바꿀 수는 없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국의 속담에도 “제 버릇 개 못 준다”라는 말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윤리신학의 입장은 이와 다릅니다. 인간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나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악을 피하고 혹은 죄를 뉘우치고 다시금 선으로 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저의 행실과 생각을 돌이켜 보면  사제가 되고자 마음을 먹고 교육을 받음으로써, 그리고 사제 생활을 함으로써 조금은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무엇보다 오늘 복음의 이후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사실을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 온 지역에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과 같은 신앙으로 예수님을 맛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에게 주님의 승천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주님이 어떠한 분인지 이제야 가까스로 깨닫게 되었는데 하늘로 떠나신다는 것은 서운함과 불안감을 동반했습니다.

여전히 학식이 부족했고 설교를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으며 그들을 비난하고 질시하는 세력들은 언제든 공격해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1독서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사도들이 이제는 성령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군중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잡히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증언하게 됩니다. 한두 명도 아닌 모든 사도들이 다른 먼 나라까지 나아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이 이토록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이후, 비록 물리적으로는 주님과 멀어졌지만 또 다른 신비로운 방식으로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2독서의 바오로의 선언처럼,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이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떠나가심”은 새로운 차원에서 그들과 “더 가까이, 함께 계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승천 이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의 복음, 즉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단지 제자들에게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께 마음을 둘 때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의 주님 승천은 주님과 우리의 물리적 멀어짐을 뜻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실 것임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생전에 말씀하셨듯 기도하는 곳이라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외롭고 쓸쓸할 때 함께 하시며 실패와 좌절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분은 다가오십니다.

물론 이를 위해 우리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야만 합니다. 영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유일한 방법 밖에 없는데 바로 이것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는 유일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승천하신 예수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다시 예수님을 뵙게 될 날까지 우리를 사랑으로 보호해주시고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길 청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변화하기까지의 여정이 꽤나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이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보기 전까지, 먼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이 누구신지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그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의심과 고통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과정 안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안에 숨겨진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모든 의심과 한계를 극복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 파견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가끔 녹록치 않고 슬픔으로 가득하다면, 이러한 제자들의 여정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약속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러할 때 주님은 다시 오시고 우리의 본성은 변화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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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승천의 충만한 삶>
-사랑의 정주와 지혜의 선교-

방금 부른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중 시편 화답송 후렴의 가사와 곡이 참 흥겹고 좋습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는 기도로 흥얼흥얼 부르시면 마음도 저절로 하늘 위로 고양되는 느낌일 것입니다. 시편 노래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영약은 없습니다.

“환호소리 높은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시편 47,6)

또 오늘은 제58차 홍보주일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는 인공지능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마음의 지혜를 힘껏 발휘하라 하셨고, 복음선포 사명시필히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 부분만 나눕니다.

“우리 인류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지혜를 구합시다. 지혜는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였고, 깨끗한 마음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듭니다. 지혜는 우리가 인공지능 체계를 온전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봉사하도록 이끄는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지혜는 그대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방향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우리의 방향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사랑이신,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뿐입니다. 어제 잘 아는 친지로부터 받아본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신비의 약은 마음에 있다며, 건강 식품보다 훨씬 효능이 좋지만, 팔지도 않고 돈으로 살 수도 없는 신비의 약이랍니다.

1.웃으십시오.
웃으면 나오는 ‘엔도로핀’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줍니다.
2.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나오는 ‘세로토닌’은 우울함을 없애줍니다.
3.운동하십시오.
운동하면 나오는 ‘멜라토닌’은 불면증을 없애줍니다.
4.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나오는 ‘도파민’은 혈액순환에 좋습니다.
5.감동하십시오.
감동하면 나오는 ‘다이돌핀’은 만병통치약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새삼 웃음, 감사, 운동, 사랑, 감동 역시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자발적 의식적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또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녀의 자질을 탓하기 전에 가르침이 온전했는지를 돌아보라. 탐스러운 열매뒤에는 꽃의 만개를 기다려준 어른이 있다.”<다산>

보고 배우는 것이 가장 큽니다. 무엇보다 어른의 모범적 삶이, 우리로 하면 하느님 중심에 충실한 수행의 모범이 참으로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늘 보고 배울 삶의 모범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요 바로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제대로 키움을 얻는다면 자라지 못할 것이 없고, 키움을 얻지 못하면 소멸해버리지 않는 것이 없다.”<맹자>

모든 내외적 자원을 최대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합류시켜 영적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함을 배웁니다.

결론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바로 땅에서도 하늘향한 승천의 여정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의 원천이 되고 영적승리의 비결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하늘 향한 승천의 여정에 충실할 때 위의 5가지 신비의 약은 저절로 선물처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때 부른 찬미가 1-2절도 참 좋았습니다. 6절까지 내용도 참 풍부하고 깊어 우리의 내면을 풍부하게 합니다.

“모든이 갈망하던날 거룩히 빛나는 도다
세상의 희망인 예수 하늘에 오르시었네.
싸움에 이기신 주님 개선가 높이읊으며
승리한 거룩한 모습 성부께 나아가시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은 평생 삶의 요약이자 결론입니다. 평생을 하루하루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영적전투의 삶에 승리한 결과가 오늘의 영광스러운 하늘로의 승천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아 승천의 여정, 승천의 삶에 충실함이 지혜입니다.

하늘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늘은 전혀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절대적 관계를 상징합니다.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하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이 뜻하는 것은 예수님은 전적으로,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 꽃자리가 하느님 계신 하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넋놓고 하늘로 오르시는 당신을 보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바로 파스카 주님은 오늘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시니 바로 여기가 하늘입니다. 언젠가 나눴던 ‘민들레꽃’ 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다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우리 삶의 자리, 꽃자리가 바로 하늘입니다. 바로 승천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은 그대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들이, 제자들이, 교회의 성인성녀들이 바로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살았습니다. 내 삶의 더불어의 정주의 꽃자리는 세상의 중심이자 교회요 선교의 장이요 영적전투 치열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내 삶의 꽃자리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 선포의 장입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동시에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심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에페소서에서 소개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웅장한지요! 한 문장처럼 단숨에 읽혀지는 참 깊고 풍부한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교회 꽃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우주 역사를 총괄하시는 주님께서 겸손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의 스승이자 도반이 되시어 함께 하시는데 도대체 부족한 것이 무엇이며, 두렵고 무서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요!

이런 우주적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몸인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시어 끊임없는 깨달음과 더불어 치유, 그리고 영적승리의 삶과 더불어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니 참으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존엄한 인간 품위의 승천의 삶을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새삼 승천의 여정중에 이런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와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주심으로 승천의 여정중 사랑의 정주와 지혜의 선교의 삶에 충실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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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희망은 하늘에 사랑은 땅에>

계신교 신자가 죽으면 소천召天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승천은 하느님 부르심보다는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심을 더 강조하는 표현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따라붙는 말이 ‘죽음을 이기고’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죽음을 이기고’ 하늘로 오르는 것이 아니면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신 것은 땅에 있는 우리와의 이별 이상의 의미가 없고, 더 심하게 폄하하면 우리를 땅에 버려두고 당신만 오르신 것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죽음을 이기고 하늘로 오르시고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다면 이 또한 우리는 여전히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한 인생이기에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당신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며 그것은 아버지의 집에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하셨지요.

문제는 이것을 우리가 믿느냐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희망하느냐 그것입니다.

우선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인데한 마디로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위해서라면 한국 사람인 우리가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고 부처를 믿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복을 얘기하면서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구원을 다 말씀하셨지요.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기에 행복하다고 하실 때는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약속하시고,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웃게 될 것이라고 하실 때는 죽고 난 뒤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의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었지요.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이것을 믿을 수 없다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 없습니다.

다음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 삶이 전부이고 죽고 난 뒤의 저 세상은 꿈도 꾸지 않는다면 주님도 주님의 믿기 어려운 부활 신앙도 굳이 믿을 필요도 없겠지요.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구원은 이 세상 구원이 아님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면서 주님 따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지닌 부와 자기 가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천년만년 사는 것이 그가 생각한 영원한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가위 때 읽는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곳간을 늘리면서 이 세상에서 평생 살고자 했지만 하느님은 그날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이 세상을 초월하고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오늘 본기도와 감사송과 두 번째 독서는 천국의 희망을 노래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주님께서 으뜸이며 선구자로 앞서 가심은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러한 것이지만 우리의 사랑은 세상에로 향해야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천사는 하늘만 쳐다보지 말라고 하고 복음의 주님께선 승천하시며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하늘에 두되 사랑은 땅에 두라는 얘기이고, 마음은 하늘로 향하지만 몸은 세상을 부지런히 다니라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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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홍보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 16,15-20ㄴ)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고 승천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 1,20)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모든 여정을 마치시고 하늘로 오르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주님승천은 믿는 이들의 희망이며 기쁨’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홍보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때, 곧 죽음의 때와 승천의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중요한 유언’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처럼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성령을 받고, 모두 하나가 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 삶에 충실할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 곁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인 ‘복음 선포’는 지금 여기에서 ‘복음이신 예수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과 행동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먼저 복음이 되는 것, 곧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죽음(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선포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홍보해야 할 ‘홍보의 본질’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선포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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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A6pXFs1uJ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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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 19)

우리를 위한
십자가가
바로
하늘입니다.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하늘이며
있는 그대로의
땅입니다.

하늘은
십자가를 향하고
십자가는 하늘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따스하게
품어낼줄
압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하늘을
이야기
하십니다.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우리 마음의
탄식을 끝까지
들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손 놓고
우는 우리를
손잡아
끌어올려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늘이 내린
기회이며
하늘이 내린
복음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 승천은
욕심의 굴레에
자신을 가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참된
하늘이며
행복의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가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하늘의 행복을
만납니다.

하늘은 감추지
않고 하늘을
오르려 하는
우리들에게
복음으로
열려있습니다.

집착이 아닌
승천입니다.

비우고 맡기고
버려야 하늘에
오를 수 있습니다.

주님 승천으로
우리 또한
하늘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의 여정에는
받아들임의
하늘이 있고
실천하시는
승천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사랑을
들어 높이시어
하늘의 사람이
되게하시는
주님 승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느 한순간도
잊을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하느님의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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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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