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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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16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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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신 동물과 새들이 아담에게 걸맞은 협력자가 되기에 부족하므로, 혼자 있지 않고 함께 동반할 사람으로 하와를 만들어 주십니다. 성경은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에서 만들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하고 외칩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구절은 고대의 관습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유다인의 관습은 여자가 부모의 집을 떠나 남편의 가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남녀의 결합’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이혼장을 써 주라고 한 것이라며, 이혼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정당한 혼인의 결합은 사람이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로 인식되던 시대에 창조주께서 의도하신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을 복구시키고자 하십니다. 남녀 모두 같은 살과 뼈를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인격체임을 강조하십니다. 구약 시대에 용인되었던 일부다처제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메시아께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하느님의 근본 질서를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남자와 여자의 평등성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세는 행복한 가정의 비결입니다. 배우자의 약점을 덮어 주고 차이점을 존중하는 태도는 자녀들에게 인격적인 사랑을 배우게 하는 원천이 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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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예수님을 만나 다시 들을 수 있게된 사람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배우자나 친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나눠봅시다. 아직 신앙 안에서 함께하지 못한 친구나 배우자가 있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 친구나 배우자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3.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특성에 대해 묵상해보고 무엇이 우리를 아이들과 같은 모습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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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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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전례 말씀은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에 대하여 가르침을 줍니다. 혼인은 남녀 간의 사랑의 계약만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기본 질서로서, 하나의 제도이며 신약에 와서는 칠성사 가운데 하나의 성사입니다. 혼인 안에서 남녀는 서로를 보호하고 상대방의 약점과 한계를 보완함으로써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뒤 그에게 온갖 짐승과 새를 데려다 주셨지만, 사람은 알맞은 협력자, 적합한 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은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남녀는 서로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배우자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남녀 구별 없이 인간은 똑같은 근원에서 나온 한 혈육이요, 그에 따른 공동 운명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아껴 주어야 한다고 제2독서도 강조합니다. 이 연대 의식, 공동체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됩니다. 참으로 인간에게 알맞은 협력자, 짝은 인간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더구나 혈연관계도 아닌 부부가 평생 사랑하는 것은 자녀나 형제나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더 큰 희생을 요구하지요. 그래서 요즈음 누군가에게 정을 주면서 상처를 입기보다는 차라리 반려동물을 기르거나 화초 등을 키우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기가 결코 쉽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느님께서 다른 어떤 동물이 아니라 오직 인간 때문에 당신의 창조 사업을 후회하셨지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듯이, 우리가 “알맞은 협력자”인 배우자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배우자를 포함하여 인간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신의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의 나날과 미래는 위안이 되고 희망적일 것입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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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혼인의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따라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부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담은 하와를 만나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하고 외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를 마련해 주신 데 대한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뒤, 하느님 앞에서 하와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앞에서 한 말과 지금 이 말이 같은 사람이 한 것으로 보이나요? 아담의 이 말을 들은 하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그에게 아담은 남편이 아니라, 이른바 ‘남의 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인류의 첫 부부도 이처럼 현실적인 모습을 지녔습니다.
성경이 전해 주는 부부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맞이한 어려움을 하느님 안에서 함께 견뎌 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느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혼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때로는 ‘남의 편’ 같고, 때로는 ‘부인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겠지만, 남편 그리고 아내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어 한 몸을 이룬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002
10월6일[연중 제2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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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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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_40nN3CJhvE
[군종교구 최혁 베드로(공군충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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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돌아보니 불과 5~60년 전의 일입니다. 가구마다 자녀를 너무 많이 낳다 보니 인구가 너무 급증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 반에 70명, 80명이 배정되어 담임 선생님이 학년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이름도 다 못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한 명 한 명, 인격적 대우가 아니라 도매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있는 시골은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온 마을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을 입구에 큰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너무 귀한 아이들이다 보니,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감사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개념있는 행동이나 예의바른 처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 사고나 판단 능력보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요란스레 예수님 앞에 등장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계속되는 복음선포 활동으로 격무와 상습 피로에 시달리고 계시는 스승님이신데, 보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셔야 할 스승님이신데, 개념도 예의도 없는 아이들이 몰려오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가까이에서 군중들의 질서 유지 담당 역할도 수행했었던 제자들이기에, 자연스레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스승님께 몹시 바쁘시니, 빨리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크게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4~15)
가톨릭교회는 예로부터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어린이의 예를 들어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의심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그런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을 하느님 나라 입국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십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입국은 불가능하다거나 요원한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자연을 향한 강한 믿음과 신뢰심, 깨끗한 마음과 단순성, 솔직함과 겸손함을 지닌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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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cz3bsa3B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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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가는 부부의 비밀: 의무가 감정을 이기게 하라>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냐고 물으시니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창세기’로 끌어올리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왜 예수님은 부부 문제를 창조할 때로 끌어올리실까요? 부부도 창조자의 의도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욕구로 살면 실패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1위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굳이 쓰기는 뭐하지만, 남편이 자신이 벌어온 돈을 낭비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아내에게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능력 없다고 무시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생각으로 서로 감정이 상하게 만듭니다. 핵심은 이러한 감정을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갖는 것입니다.
‘EBS 부모 – 아이 양육법, 달라도 너무 달라요’에 아이들 양육 태도가 너무나 다른 부부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아이들이 잘못할 때 ‘타이르자’라는 주의이고 아빠는 ‘단호하게 훈육하자’라는 주의입니다. 부부는 서로 너무 안 맞아 남자가 먼저 답답해서 TV 출연을 제안했습니다.
첫째 아이는 남자이고, 둘째 아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평생 장애로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힘겹게 병원 생활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첫째 아이가 소외되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묻는 말에 ‘아무것도 아닌 아들’이라 대답했습니다.
둘째 딸도 몸이 아프기에 나름 부모의 사랑을 더 확인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물고 할퀴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생이 자신을 물고 할퀴었다고 아빠에게 이릅니다. 아빠는 “내가 맞지?”라는 듯 아내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를 꽉 잡고 훈육합니다. 그 옆에서 엄마는 “당신이 하는 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자 아빠는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화가 더 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훈육법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감정 카드를 뽑았는데, ‘외로움, 고통’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무시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감정은 외로움과 고통이었습니다. 그 감정은 어떤 욕구로 생겼을까요? 남편은 ‘존재감(중요하게 여겨짐), 이해’를 뽑았습니다. 남편은 무언가 근저에 인정받고 이해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아빠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장애인 형이 있어서 소외당한다고 느꼈고 부모는 매일 이혼하겠다고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이 원인으로 뱃속 깊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했고 거기에서 외로움과 고통의 감정이 생겼으며 그 원인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뱀의 욕구에 지배당함으로써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감정이 생겼고 결국 그 원인을 상대에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의무는 감정을 이깁니다. 하느님이 주신 의무는 뱀의 욕구를 이기는 새로운 욕구입니다. 이 때문에 부부가 함께 십일조를 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인정하면 부부생활은 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2022년 당시 하버트 말리코트(99)와 준 네이피어(100)는 결혼생활 79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결혼을 의무로 여겼습니다. 매일 자기 전 뽀뽀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이 의무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 앞에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떤 의사도 선풍기 틀고 자면 큰일 난다고 어머니가 선풍기를 끈다고 합니다. 시원하게 자는 게 소원이랍니다. 선악과를 바치면 주님 현존 안에서 돈 때문에 서로의 탓을 하는 일은 사라집니다. 다만 상대에 대한 ‘의무’만 남습니다. 사랑의 의무란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맺어주셨음을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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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저는 부모님이 모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2011년에, 어머님은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신앙 안에서 저는 부모님과 함께 하니 기쁨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군자삼락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똑똑한 제자를 만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높은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부모와 자식, 세대와 세대가 경험과 지식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가르치셨습니다. 사제의 직분 중에는 ‘가르치는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였고,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였고,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주일하교 교사의 노래 중에 ‘가르치면서 배우게 하소서’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모두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화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멀리서 신부님들이 제가 있는 신문사를 찾아왔습니다. 저를 보고 싶어서도 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한국에서 안식년 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자녀들이 뉴욕에서 공부하는 교우들도 왔습니다. 신문사는 마치 손님들이 머무는 사랑방 같았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맨해튼 구경도 가고, 뮤지컬도 보고, 가을이면 단풍 구경도 갔습니다. 지난 2월에 달라스로 왔습니다. 제가 온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오겠다는 손님도 없었습니다. 달라스의 여름이 워낙 덥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10월에는 손님이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있던 신문사의 후임 신부님이 신문 홍보를 위해 왔습니다. 모처럼 뉴욕의 이야기를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이 2주일 정도 온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달라스에서 사목했던 전임 신부님도 1달 정도 온다고 합니다. 12월에도 손님들이 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명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그러니 나에게 와서 쉬어라.” 벗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다면 제게도 기쁨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전에 명동거리를 걸을 때입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는 연인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신발에 껌이 묻었던지, 남자에게 이야기 합니다. 신발에 껌이 묻었네. 남자는 기꺼이 무릎을 꿇고서 사랑하는 여인의 신을 벗겨서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발에 신을 신겨주고,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길을 걸어갔습니다.’ 가을바람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신발에 묻은 껌을 기꺼이 떼어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들께서도 아마 그러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여동생과 함께 시골 외할머니 댁엘 갔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고, 저는 시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고추, 마늘, 깨를 보자기에 담아 주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짐들은 모두 어머니가 양손에 들고,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담배를 하나 들고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그런 것을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짐을 들지는 않으셨지만 아버님께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님을 대하셨습니다. 아버님도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부부는 무엇, 무엇 때문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짐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꼭 부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주려고 할 때, 가정은 생명이 넘쳐나는 갈릴래아 호수처럼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가 서로에게 받으려고 한다면 가정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해(死海)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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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오늘의 전례는 가정과 사랑에 대한 교리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거와 기반을 제시해주고 있다. 사랑은 가정이라는 원초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갈빗대는 셈족의 언어 감각으로 생명이란 뜻이다.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이라는 표현은 두 존재가 하나라는 뜻이다. 여기서 뼈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며, 살은 존재하는 인간을 뜻하고, 아담은 존재의 깊은 의미를 가리킨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부르리라”(창세 2,23)라는 말은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과 같은 의미이다. 남자는 이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단지 여자와 한 몸,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창세 2,24), 바로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셨고, 항상 하나가 되었으며, 갈라질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하느님의 모습, 사랑을 표현해낼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5절)라는 말은 하와를 거슬려 한 핑계에 잘 나타나 있다(창세 3,12):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이것이 여기에 이제 사용된 것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여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뜻은 충실성, 사랑, 영원한 일치이다. 창조시에 인간을 만드실 때, 남녀 모두를 당신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창세 1,27).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하나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여자와 어울려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나이신 하느님의 모습, 삼위가 하나인 모습을 닮는 것이다(6-8절). 사랑의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바로 하늘에서와같이 우리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최대의 계명으로 본래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다. 하나의 몸이고, 하나의 존재이기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갈라질 수도 없고, 갈라져서는 더욱 안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이를 거슬러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제자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해주신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11-12절). 남자 편에서 하던 여자 편에서 하던 하느님의 계획에 거슬리는 것이며, 그 새로운 혼인은 간음이 된다. 왜냐하면, 먼저 한 혼인의 의무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배반 혹은 간음이라고 규정하신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혼을 끌어들인 원흉이랄 수 있는 굳은 마음을 가진 마음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린이를 축복해 주신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은 혼인과 이혼에 대한 논쟁 뒤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는 거룩한 혼인의 결실, 두 남녀의 하나 된 사랑의 결실이면서 이혼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린 생명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신다.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보고 듣는 대로 하는 단순한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도 실천하는 데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어린이는 하느님 앞에 계속된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믿음의 관계, 또한 그 때문에 포기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단 하나의 어린이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에 가까운 형제들을 껴안으시고 축복해 주신다.
새 아담은 구원계획의 완성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이시며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다. 주님의 죽음은 당신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최대의 은총이다. 주님은 당신의 돌아가심을 통해 모든 이가 당신과 똑같은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견지하고 이루어 가야 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며 기쁘게 살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는 모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그리스도 안에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고, 자신을 희생하시어 모든 이를 하느님께 바치시고, 하느님께 나아가 일치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렇게 우리도 우리 사이의 일치,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항상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먼저 너와 나 사이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 우리가 속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자들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혼인의 계약으로 태어난 우리 가정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하느님 안에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으며, 더욱더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통하여 언제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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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지난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에 행정복지센터, 세무사사무소, 건강보험공단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사무 처리를 하였습니다. 인감 증명서, 가족 관계 증명서, 기본 증명서, 호적 등본, 제적 등본, ……, 입양 관계 증명서를 떼라고 하기에 “없으면 안 떼어도 되지요?”라고 말하였더니 해당 서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에 따라 아버지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정확하게 미리 서류를 준비하여서 가려고 노력하였지만 처음에는 정말 복잡하였습니다. 그때 저희 가족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별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기에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법과 규칙은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정하여 놓는지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규정이 생기겠지요. 규정을 정할 때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왜 그런 규정이 있는지를 압니다. 규정이 없어도 잘되어야 하는데 신뢰가 없고 사랑이 없어서 안 되기 때문에 규정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규정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규정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이혼장을 써 주라는 규정도 아내를 함부로 버리던 사람들 때문에 허락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가 아니라 아내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규정을 열심히 외우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규정이 없어도, 사랑으로 그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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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배우자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2-12)
1) 이 이야기에 있는 예수님 말씀들은, 모세가 정한 이혼장 규정을(신명 24,1) 폐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폐지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그 규정을 신경 쓸 이유가 없고,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죽은 규정’일 뿐입니다.>
2) 바리사이들은 “아내와 헤어져도 됩니까?” 라고 묻지 않고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의 ‘버리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아내를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라는 말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라는 뜻이고, 이 말은 바리사이들이 정답을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내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소유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자식을 버려도 됩니까?” 라고 물었다면? 어떻든 가족을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버린다면, 그것은 ‘천륜’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사실, 가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호하고 명확합니다. “버리면 안 된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소유물이 아니니까, 버릴 권한이나 권리 자체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18.21-24)
하와는 아담의 분신이고, 사실상 아담 자신입니다. 그러니 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은, 혼인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혼인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는 다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 가르침은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지만,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의 혼인도 ‘거룩한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혼인과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무너집니다.>
4)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하고 단순한데, 실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리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일방적으로 ‘버림’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혼인한 이들에게 분부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 만일 헤어졌으면 혼자 지내든가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 ―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신자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부인에게 신자 아닌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 그러한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0-13.15.)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이 결혼한 경우에,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고 하면 헤어지라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권고를 ‘바오로 특전’이라고 부르고, 실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혼은 무조건 안 된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바탕으로 해서, 일방적으로 ‘버림’을 당한 사람의 경우에는, 잘못한 일이 없으니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낸다면,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라는 말도 중요한데, 혼인성사가 신앙인들을 억압하는 족쇄로 작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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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사공균 알로이시오 신부님]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참여하는 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혼인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7~9)
서로 모르는 남녀가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높은 이혼율로 인해 혼인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혼인을 개인적인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사적 지위까지 올려놓은 혼인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녀의 혼인에 하느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혼인을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혼인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가정을 이루어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선물로 주셨고, 사랑하는 아들, 딸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가정 안에 함께 하시어, 모든 가정이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가정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 자리는 어떤 물리적인 공간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부부간의 다툼으로 인해 가정에 불화가 생길 때,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의 자리를 찾아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의 자리를 찾아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도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의 주도권이 바로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거룩한 가정을 인간의 힘으로 파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누구보다 남녀 간의 혼인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신랑에 비유되고, 교회는 신부로 비유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부부의 혼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부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단일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을 바치시어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는 자신의 신랑인 그리스도를 끝까지 사랑하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 하느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서로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께 순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을 대하고 교회를 사랑하여 당신을 넘겨주신 그리스도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어 교회가 화려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고 나무랄 데 없는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남편도 자기 몸과 같은 아내를 사랑하고 당신의 지체를 돌보는 그리스도처럼 아내를 돌보고 보살피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둘이 아니라 한 몸인 것처럼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라 한 몸, 한 영이 되게 하소서.”(에페 5,21 이하 ; 서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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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어떤 것을 기대하고 삽니까?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장차 커서 무엇이 되기를 기대합니까? 어떤 사람이 되기를 기대합니까? 자기 한 몸 노력해서 여러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공공사업의 봉사자들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또는 세세 대대에 길이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상가나 예술가, 문화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앉아 여러 사람을 호령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배우자가 지금 가진 것보다 앞으로 가질 수 있을 것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결혼하자고도 한답니다. 자기 부모에게 돈 얻어 와서 결혼할 사람이, 혹여 미래에 자신들이 어려워졌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과연 행복하고 평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인간의 네 가지 욕구인 신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욕구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삶의 질이 낮아지고 그 공허가 당신의 활력과 관심을 삼켜 버리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 행태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1943년 ‘인간의 동기와 성격’이라는 책에서 다섯 가지의 단계적 욕구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 욕구의, 첫 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마시고 자고 입고하는 생존 욕구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안전 욕구’로 신체적 감정적 불안으로부터 보호되고,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소속감과 애정 욕구’로 동료와 친교를 나누기 위해, 집단을 만들거나 집단에 소속되기를 바라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는 ‘존경 욕구’로 내적인 자존 자율을 성취하여, 다른 동료 구성원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단계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아실현욕구’로 자신을 계발하고 발전시켜,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아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단계라고 합니다. 2002년 폴 R. 로렌스와 니틴 노리아는 ‘욕구: 인간의 본능, 어떻게 선택을 이끄나’라는 책에서 인간의 ‘네 가지 욕구’를 발표합니다.
그 첫 번째는 ‘성취 욕구’ 즉, 사회적 지위와 같은 무형의 가치 등 희소한 것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결속 욕구’ 즉, 개인이나 집단과 유대를 맺는 것, 셋째는 ‘이해’ 즉,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주변 사물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며, 넷째는 ‘방어’ 즉, 외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근의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소중한 욕구를 ‘삶’과 ‘사랑’과 ‘배움’과 ‘유산’ 등 네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삶의 욕구는 의식주와 경제적 풍요, 건강 같은 신체적 욕구이고, 사랑의 욕구는 인간관계를 맺고 소속감을 갖으며 사랑을 주고받으려고 하는 사회적 욕구이며, 배움의 욕구는 발전하고 성장하려고 하는 정신적 욕구이고, 유산의 욕구는 의미와 목적, 개인적 적합성을 가지고 공헌하려고 하는 영적 욕구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며 갈구하고 꿈꾸는 욕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삽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배우자가 지금 이 시기에, 최우선적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와 함께 한 평생을 살면서, 무엇을 함께 이루고자 합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와 여러분의 가족과 함께, 이 사회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앞으로 10년, 20년 후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고 있으리라고 예상합니까? 지금의 배우자와 함께 있겠습니까?
그날 오늘을 되돌아보면서 배우자와 가정 그리고 이웃 친지들과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앞에서, 여러분이 오늘 선택한 결정과 하고 있는 일과 사정 때문에,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하며 반갑게 맞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회피하시겠습니까?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인생이 기쁨과 보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슬픔과 수치겠습니까?
단순히 동물적 본능의 먹고 사는 삶. 인간적, 인격적 생존 단계에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통해 인류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 향상시키며 사는 삶. 한 걸음 더 나아가 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류 구원을 위한 자기 희생을 통해,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는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기반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로 합시다.
당장 눈앞에 닥친 결혼과 이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취업과 실직 등의 각박하고 긴박한 전쟁 같은 삶만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 당장 피부로 다가오는 정치적 경제적 긴장과 갈등의 현실 외에도 우리 인간 삶에는 다른 많은 요소들과 가치들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통합적이며 다각적인 삶의 부분과 순간들을 꾸며봅시다.
눈에 보이는 생활 너머에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 그것도 우리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 예수님의 힘과 이끄심으로, 인간 성취와 완성과 구원이라는 목표가, 마침내 이 땅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과 그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희망으로 살아갑시다.
믿음과 희망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희생과 봉사로, 부부와 가정과 사회와 인류와 자연을 향해 기여하며 살아갑시다. 서로를 향한 신뢰와 서로 함께 힘을 모아 일치를 이루리라는 희망과 서로의 사랑에서 피어나는 희생 봉사로 헌신합시다. 그럼으로써 주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부름을 받고 그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라, 주님의 힘으로,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부부가 됩시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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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최근 ‘혼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됐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비혼주의자도 많이 늘어났고, 혼인보다는 동거를 원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혼인은 원하지만 아이 없이 부부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혼인 후에 이혼을 선택하는 비율도 높아졌습니다. 최근 어느 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이혼율이 제일 높은 국가였습니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 세상은 급변하지만, 거센 풍랑을 만난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혼인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혼인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는 ‘단일성’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해소성’입니다.(교회법 제1056조)
‘단일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전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해소성은 하느님께서 부부로 맺어주신 남자와 여자를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혼인 서약을 한 부부는 죽음 외에 결코 갈라질 수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혼인예식을 거행하면서 공동체가 보는 앞에서 본인의 결심을 말하고, 주례사제는 신랑과 신부의 합의를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분이 교회 앞에서 밝힌 이 합의를 당신 은혜로 확고하게 하시고 두 분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합니다.”
혼인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기본 가르침을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허락해 주어도 되는지 여부를 묻는 바리사이들을 반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8-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테오스’)과 ‘사람’(‘안트로포스’)을 서로 맞대어 비교하시는데(마르 7,7-23; 8,33 참조), 이 대조를 통해 이혼이 불가능한 이유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무효화하려는 시도는 인간적 행위에 속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이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후대에 제정된) 이혼장과 관련한 율법 조항(신명 24장, 특별히 1절과 3절)을 반대하시면서 여기에 담긴 하느님의 의도와 목적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혼장과 관련하여 모세가 알려준 법적 조문은 혼인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을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 목적이 거부될 때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모세가 관련 법조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이들의 ‘완고함’, 곧 하느님의 창조적 질서를 벗어나 이혼을 하는 상황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앞에서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7절을 인용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6-7)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해 보여주신 ‘첫 번째 원리’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후대의 법적 조항보다 우선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혼인 윤리는 인간의 실패를 용인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느님의 창조에서 시작된 원형에 근거합니다. 오늘 주일 제1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창조, 특별히 여자를 창조하시면서 남자와 여자를 결합하여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창조 원리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상호 종속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협력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는 ‘돕는 이’ 또는 ‘지원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보시어, 사람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원리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도우며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여자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마주 바라볼 수 있는 “그[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지으신 여자를 보고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고 외치는데, 이 말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누구인지(정체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혼인의 고귀함을 일깨워줍니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대한 보도가 성경의 시작, 곧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 곧 혼인이 결코 인간적 선택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 없는,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거룩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협력자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은 사람과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기초 삼아 당신의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혼인의 가치가 세속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힘을 잃어가는 작금의 시대에 혼인의 거룩함과 고귀함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서 되새김질하면서 이 세상에서 창조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원리와 방법을 전파할 수 있는 증인이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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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모든 일에 있어 권태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욕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마지못해, 할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하면 삶의 권태로움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해 보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곡들을 수천 번 반복해서 연습하고 또 공연해 왔는데 지겹지 않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아이작 스턴은 연습하고 또 할수록 “이거야!”하는 인사이트를 얻는 순간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막혔던 부분이 뚫리거나, 뻔하게 지나가던 부분에서 새로움을 느끼면서 똑같은 곡을 평생 연주해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렇게 반복 속에서 깊이를 추구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25년째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지만, 매일 매일이 새롭습니다. 물론 처음 2~3년 동안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복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새로움도 더 많이 그리고 그 의미도 크게 다가옵니다.
특별히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 권태기를 갖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연인이든 부부든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변화 없는 관계가 지속되거나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면 이 권태기가 온다고 합니다. 반복 안에서의 깊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혼을 율법으로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결합한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혼인은 사랑의 계약이고 하느님의 축복이며 서로 일치를 이루어야 할 영원한 책임과 소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깊이입니다. 이 깊이는 혼인에서만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축복에까지 연결됩니다. 그래서 혼인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율법에 갇혀서 하느님의 계획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계획은 삶의 반복 안에서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반복이 힘들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대신 반복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의미를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복되어도 깊이가 있으면 늘 새롭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깊이를 마음 깊이 새기면서 가정 안에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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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혼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자, 아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2,23) 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제 아내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것 아니냐?”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담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착하게 만드셨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아껴줄 것이 아니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가만히 보면 쟤가 좀 맹한 데가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하고 아담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애를 사랑할 거 아니냐?”
하느님께서 창조의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남자만으로도 그리고 여자만으로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각각 나름대로 아름답고 독특한 개성이 있지만 자기 혼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반드시 상대방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났어도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남녀의 관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줘야 할 동반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는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니며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서로 나를 위한 맹한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가운데 공로를 쌓고 덕을 닦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10,7)라고 혼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의 요건을 보면 먼저 “떠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통해 오늘의 내가 되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부모에게 의지 않고 자기 짝을 만나 독립된 자기 생활을 위해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다 큰 자녀가 자기 생활도 감당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기대고, 얹혀사는 것은 불효이며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부모도 자녀를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 비관하는 어르신도 계신 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에게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서로 “떠나야 할 때 떠나고,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입니다. 새 가정을 형성함을 축복해야 합니다. 성경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줄 배우자를 “거들 짝”(창세2,18)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둘 짝을 만나는 것이 혼인입니다. 그리고 혼인 안에서 인격적 결합을 이루어“둘이 한 몸”이 되어 비로소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의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가 살아온 삶의 환경과 양식이 달랐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통계를 보면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나는 기분이 남자는 1.책임감이 앞선다(27%). 2.자랑스럽다(18.9%). 3.어른이 된 느낌(16.2%)의 순입니다. 그에 비해 여자는 1.섭섭하다(41.9%) 2.어른이 된 느낌(16.1%) 3.책임감이 앞선다(12.9%)로 조사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고려하는 사항을 보면 남자는 1.성격(27.3%) 2.외모(22.8%). 3.가정환경(21.4%) 그리고 여자는 1.사회적 지위(25.6%) 2.성격(24.2) 3.가정환경(19.3%)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 있어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지 못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일방적인 자기 요구만을 강요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서로 ‘너와 나는 이것이 틀리다’ 고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었으면 죽기까지 그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 준 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주신 혼인을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하는 데 인연은 우연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 서로의 구원을 위해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하지만 상대를 위한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통해서 나도 구원을 얻게 되고 상대방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신중해야 하며 신의와 사랑이 없는 혼인은 해서도 안 되며 하더라도 원인 무효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엮어진 이상 사랑에 사랑을 더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5,25)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듯 순종해야 합니다.”(에페5,22.33) 결국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실하여 행복한 날 이루시길 빕니다. 서로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 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하고 일상 안에서 그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62,5). 하느님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웃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한 주간 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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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랍니다>
마르코 10,2-16 (혼인과 이혼,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사람이랍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 모습으로
빚으셨으니
하느님 모습 지녀야
사람이랍니다
하느님께서
사람 곁에 사람을
놓으셨으니
사람 곁에 있어야
사람이랍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을
주셨으니
사람을 품어야
사람이랍니다
하느님께서
사람과 사람을
맺으셨으니
사람과 맺어져야
사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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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연주 27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혼인의 의미를 되새겨 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서로 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고, 우리 모두는 그분 한 분에게서 나왔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남녀의 결합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혼인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말해줍니다.
<첫 번째 원칙>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마르 10,6)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과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느님의 고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따라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또한, 남자나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서로에게 내어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서로 보완해서 한 몸을 이루어 가야 할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닌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임을 드러내줍니다.
<두 번째 원칙>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는 것입니다.
이는 혼인이 단지 서로를 위한 인간적인 “약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성사로서의 서약”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혹은 서로가 결혼합의를 취소하면 그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인간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뗄레야 뗄 수 없는 결속력을 지닌, 아무리 당사자들이 그 합의를 취소하더라도 결코 풀어지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서약’임을 말해줍니다. 곧 상호신뢰의 인격 관계로 묶어진 평생운명 공동체로의 ‘서약’입니다.
그래서 <혼배성사>에서 혼인서약을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 ~~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이하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는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두 사람의 서약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수도자들의 서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와 서약임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은 상대를 아내로 혹은 남편으로 맞이하여 평생토록 한 몸을 이루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니 결혼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드러내줍니다. 곧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와 의무를 함께 지는 시작이요,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아주며 사랑과 존경으로 함께 나아가는 영적동반자요 협력자로서의 ‘서약’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은 사랑과 존경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의 자녀인 아기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아기는 자녀만이 아닙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아기이기도 합니다. 남편이라는 철부지 아기와 아내라는 힘없는 어린아이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서로의 무력함과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자녀인 아기를 사랑하기보다도 남편이나 아내 혹은 공동체의 동료라는 아기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를 우러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서로를 존경함이야말로 진정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결혼서약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루어 나가는 부부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전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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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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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주님과 일치의 여정>
“주님 중심, 주님 닮기, 서로간 거리”
교회는 하느님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식구, 한가족입니다. ‘1인 가구’라 해도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외로울 수 없음은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에 속해 있기에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에 속해 이렇게 주님의 한가족임을 확인하는 미사전례에 참석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 축복의 하느님,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고백이 정말 ‘하느님 다우심’을 잘 드러냅니다.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
우리는 허무의 존재, 무지의 존재도 아닌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10월3일 결혼 50주년을 맞이한 어느 노부부중 부인이 쓴 글 제목도 반가웠습니다. “반세기 누려온 가난한 행복”, 이 노부부는 무조건 구원이요 성인이라 저는 감히 고백합니다.
‘부부는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다’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이제 꽤 살고 보니 정말 함께 평생 살아가는 부부들을 보면 참 신기하고 반갑고 기쁘고 고맙고 존경스럽습니다. 얼마전 두가지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오랜만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된 자매가 얼마나 기뻐하는 지, 순간 깨달은 진리입니다.
“아, 서로가 구원했구나! 서로 감사해야 하겠구나!”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혼인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혼인할 수 없고, 자식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습니다. 부부 둘이 함께 해야 혼인도 할 수 있고 자식도 가질 수 있음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사이좋게 살다가 직장 문제로 3개월 “혼자” 떨어져 살다가 다시 합류하여 “함께” 살게 된 분에게 그 차이를 물었습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와 둘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니! 정말 소스라치게 깨달은 진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를 보세요. 하느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반려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에 앞서 사람인 아담은 하느님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게 하셨으나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반려견이 반려식물이 좋다 해도 사람 아닌 것들은 결코 나의 반쪽인 협력자가, 반려자가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