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0장, 17-30절;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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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30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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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부유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 왔으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의 질문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는 결의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그는 자신의 약점을 마주하게 되었고 부족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지닌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꿰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일까요? 구원일까요? 물론 우리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인가요? 우리의 내면에는 하느님 나라라는 지고한 가치를 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세에서도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며,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오직 현세의 안락함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눈은 하느님 나라뿐 아니라 세상의 나라까지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친 모습이 아니라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당신을 따르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을 들은 지금 우리 얼굴이 복음의 부유한 사람처럼 울상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슬픈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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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해 봅시다.(예수님을 만나 다시 들을 수 있게된 사람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내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부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부’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보고,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 왜 천국에 가기 어려운지, 어떤 부자가 주님에게 가까이 가게 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우리가 부자 청년과 같은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4. 세상의 기쁨을 내려놓았을 때, 참된 신앙의 기쁨을 느낀 경험이 있는지 나눠보고, 세상의 기쁨만을 추구했을 때 신앙 안에서 후회했던 경험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5.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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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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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솔로몬은 주님께 칭찬받는 임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하고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한 힘은 그가 받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보다 더 귀한 제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재물에 집착한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셈법과 인간의 셈법이 다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판단은 인간의 욕심과 속임수를 드러내고 이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보여 줍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을 기만할 힘과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유한한 재물과 명예를 움켜쥔 인간의 시야는 너무나 좁고 어두워서 큰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지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나 지고한 빛에 조명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남을 돕고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사람의 시야를 넓혀 줍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월하는 세계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존귀함은 하느님 대전에서 비천하고 비참함으로 바뀝니다. 영혼의 눈멂을 일깨우는 천상의 빛이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얻은 영혼은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그분을 대체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왕홀과 재물은 허공에 사라져 없어지는 연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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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세례성사로 하느님께 축성된 모든 신자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부르심을 받았다는 현대의 교회 문헌들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성직자, 특히 수도자의 봉헌 생활의 고유한 특징은 과연 무엇인지 자문해 봅니다.
이에 관한 이론이나 학설을 논하기보다는 수도자로 살아가는 제가 그저 이해하는 바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삶 안에는 이런저런 많은 요소가 함께 있는데, 그 안에 하느님께 속해 있는 봉헌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몸과 마음과 가진 것 전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 소유가 되어야 하는 삶, 곧 ‘하느님께 축성됨’이 저의 삶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어야 수도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지혜에 비하면 재산도 건강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솔로몬이, 무엇보다 앞서 지혜를 추구하였듯이, 부르심에 응답하려고 다른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몸집이 커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낙타처럼 이것저것을 동시에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마음 안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고 다스리시도록 그분의 섭리에 내어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고백을 하며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화답송 시편처럼 우리의 날수를 헤아리면서 저마다 고유한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세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께 어떤 자리를 내어드리고 있는지,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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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 하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생활공간도 컨테이너 박스로 꾸민 한 칸의 방이 전부입니다. 그 방은 주방이고 침실이며 기도방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평일 미사참례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봉투하나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난방 기름을 절약하고, 쓰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모은 돈이라고 하시며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돈은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를 선택할 시점이 옵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이때야 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선택한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차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을 본인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잘 지켰는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하나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의 보화 때문에 하늘의 보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천상의 보물을 우리 내면의 보물로 삼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준비로 집도 장만하고 값비싼 보석을 비롯하여 혼수품을 다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였는데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영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아름다운 보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서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나에게 부족한 하나는 무엇일까? 자존심일 수 있고 체면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고 명예나 지배하는 마음, 자식에 대한 애착일수도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질투의 마음이나 눈먼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허영의 우상숭배, 교만의 우상숭배, 돈의 우산숭배에서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안락함의 문화와 일시성의 매혹”이 강한 이 시대에 부족한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 하나는 구원은 내가 충실히 덕을 쌓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입니다. 자선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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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고인이 되신 최인호 선생님은 사회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거리에서 항의 집회를 하는 것도 방법이고, 전단지를 만들어서 돌리는 것도 방법이고, 야학을 통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최인호 선생님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인 글을 통해서 사회문제에 대해서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서울교구 주보에서 그분의 글을 보았고, 많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과 불교를 어우르며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그분의 글은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부님들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사회의 문제를 대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였습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틀을 벗어나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했던 신학생은 또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신학과 교리를 충실하게 배우고, 교회의 틀 안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했던 신학생은 사제가 되었고, 지금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문제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본인의 몫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선택도 가능한 선택일 것입니다. 제도와 틀을 벗어났어도 양심과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선택도 자비로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제도와 틀에 머물지만 위선과 가식의 삶을 살고 있다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제도와 틀은 안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열정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제도와 틀에서 안정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배움도 충분했고, 육체적인 노동에서도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제도와 틀에 머물며 안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선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수도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내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최선을 다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서 지금 위로가 필요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등불을 됫박으로 가두지 않는 것처럼 사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향기가 되어서 주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사제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며칠 전에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대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문자를 받으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무엇일까?’ 주교가 되는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더 높은 자리, 권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게 문자를 보낸 분은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은 자라고, 이런저런 봉사를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꿈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꿈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모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꿈은, 결국 내 삶이라는 에너지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들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들은 희망찬 미래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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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절제는 기쁨을 지키기 위한 것
어느 날 콘클레턴이라는 백작이 아침 일찍 부엌문 앞을 지나다가 ‘5파운드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요리사의 한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5파운드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 그녀를 살짝 엿보았더니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 걸. 10파운드라고 할걸 … ’하며 끊임없이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 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십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시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
이 물음이 지금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하게 해 줄 것입니다. 아내 때문에, 자녀 때문에, 재산 때문에, 명예 때문에 예수님을 당장은 따를 수 없다면 더 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수련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이 세상 어떤 것도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도록 세상 기쁨들을 끊을 수 있는 노력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헛된 기쁨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 즉 부자였기 때문에 ‘우울해하며’ 돌아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은 우울함만 남깁니다.
성경에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이 많든 적든 돈에 대한 욕심이 많다면 비록 행려자라도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는 신문지를 훔쳤다고 서로 피가 터지도록 싸우는 행려자들을 보고 ‘저들이 부자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은 천국을 희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좋아하면 이미 지옥을 선택한 것입니다. 욕구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참 기쁨은 세상 기쁨을 끊을 때 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 함께 갔던 한 청년이 이 성지순례를 계기로 학생 때부터 피던 담배를 끊어보겠다는 결심을 이야기했습니다. 담배를 끊으면 건강에도 좋고 돈도 절약되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과 자신이 머무는 곳의 냄새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 수 없던 것을 하게 되어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고 그 자존감 높아진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즐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승자효과는 다른 일을 하는데도 작용하여 하는 모든 일이 더 잘 되게 만듭니다.
이제 곧 사순절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보통 사순 때 내가 세상에서 즐기는 것들을 절제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런데 사순이 끝나고 나면 다시 똑같아집니다. 물론 사순절만이라도 절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더 좋은 것은 영원히 절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진정 기쁨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씩 끊어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에게 재산을 팔아버리라고 하신 것은 일시적으로 끊을 수 있는지를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끊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하고 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게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끊고 싶어도 못 끊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아직도 그것들이 기쁨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이유는 안 피우는 게 기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오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지켜온 것을 앞으로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 고비만 넘기면 더 이상 욕구가 안 생기는 단계가 반드시 옵니다. 내가 세상 기쁨을 하나 끊을 때마다 천국의 기쁨이 하나 더 채워진다는 사실을 믿읍시다. 그리고 이번 사순절에도 세상 기쁨을 하나 더 끊어봄으로써 그것 때문에 오는 집착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부활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009
10월13일[연중 제28주일(군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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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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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fBwXBQhaIo
[군종교구 정세진 요셉(홍보국장, 1군단 성요셉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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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갖게 되는 확신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인생의 지혜로구나, 하는 확신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이 먹어서도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시하지, 정작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 영혼, 정신, 마음, 영원한 생명을 개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첫 번째 독서로 봉독되는 지혜서는 얼마나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는 지 모릅니다.

지혜서의 보다 완전한 이름은 ‘솔로몬의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의 본문 안에는 독자가 누구인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지칭하는 독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이지만, 내용상 독자층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로 확장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 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 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지혜 7, 8-10)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 말미에서 솔로몬은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없이 맑다는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인류역사상 지혜롭기로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고백하면서 겸손되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서 오는 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지혜 9,5-6)

요즘 정계나 학계에서 국민들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든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아주 고압적이고 교만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양, 따져대고 가르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참된 지혜의 덕이 겸비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주님의 성령 안에 살아가기에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합니다.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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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UgT8CY9Z4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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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시작: 가질 수 있다는 착각>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쉬며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 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걸. 10파운드라고 할걸….”

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를 용기는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을 때 우울해질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진 것이 많으면 우울해진다고 하십니다.

황창연 신부의 ‘화가 나십니까?’ 강의 중 이런 예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20년 전에 알던 분의 시동생이라고 합니다. 이 분이 성탄절 전날 불법 유턴을 하다가 전경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안 했다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물론 전경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희 경찰 서장이 누구야?”라고 소리쳤고, 경찰 서장의 이름을 들으니 자기 친구였고, 그걸 믿고 전경의 뺨을 강하게 쳤습니다. 그래서 전경은 그 사람을 공무집행 방해로 철창에 집어넣었고, 그 사람은 철창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분을 참지 못하다가 그 자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을까요? 바로 명예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명예를 가졌을까요? 인간은 무언가 가질 능력이 있는 존재일까요? 조선시대 때 쓰이던 동전을 길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누군가는 ‘이건 내 돈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렸을 때 명절 때 받은 돈을 어머니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빼앗겼다기보다는 어머니가 맡기라고 해서 맡겼지만, 되돌려 받은 건 없습니다. 그런데 매번 그랬지만, 지금 어머니께 맡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 앞에서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 아이는 슬플 일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어서 빼앗길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욥은 자녀들과 재산,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잃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주신 것,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니 하느님을 찬미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저도 군대에 갈 때 한 자매가 밤새 편지를 써서 출근도 안 하고 기차역까지 나왔습니다. 훈련소에 가서 시간 날 때마다 그 자매에게 편지를 썼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되었습니다. 7개월 만에 휴가를 나갔는데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자대에 복귀에서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나가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겨울에 뜨거운 목욕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밖에 있었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집착을 끊기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군대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품이나 군대와 같은 곳에 머물려면 머물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로 돈을 맡깁니다. 군대에서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머물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봉헌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십일조입니다.

도미노 피자를 만든 톰 모나한(Tom Monaghan)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그에게 돈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엄청난 부를 일궜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가진 것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고 돈을 사회와 종교에 환원합니다. 그제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께 속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기쁨은 십일조의 열매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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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숨은그림찾기’라는 것을 해 보았습니다. 신문에는 옛날이야기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안에는 또 다른 물건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찾았던 그림들은 ‘주걱, 신발, 곰방대, 복주머니’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숨겨진 숨은 그림을 찾으면 보물을 찾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다른 방향에서 보는 것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지혜라는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랑, 나눔, 봉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아름답고,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석이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경쟁과 승리를 위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퇴근길에 아내를 위해서 장미꽃을 사 가는 남편, 부모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자녀들,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여보! 사랑해 우리 가족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오늘도 힘내세요!’라는 편지를 넣어 주는 아내는 각박한 세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날 높이 오르는 작은 공을 보면서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봅니다. 전태일이라는 젊은이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쏘아 올린 공이 있었습니다. 근로 기준법은 책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기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골프의 변방에 있던 대한민국이었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US 여자 오픈 우승이라는 공을 쏘아 올렸습니다. 당시 IMF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은 위로받았습니다. 많은 학생이 박세리 선수를 보면서 꿈을 키웠습니다. 박인비, 유소연, 최나연과 같은 선수가 등장했고, 대한민국의 여자 골프는 LPGA에서 많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수녀원과 사제관 신축이라는 공을 쏘아 올렸습니다. 수녀원과 사제관이 성당 밖에 있습니다. 기존의 수녀원과 사제관을 매각하면 성당 내에 수녀원과 사제관을 신축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건축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건축위원회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자고 합니다. ‘친교실 확장, 실내체육관 신축, 추모관 건립’과 함께 수녀원과 사제관을 신축하자고 하였습니다.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직 3년이 남았으니, 지혜를 모으면 숨은 그림을 찾듯이, 우리의 꿈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숨은그림찾기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저는 2000년 전에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등장했던 젊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라는 공을 높이 쏘아 올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농부는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세상 사람들이 찾는 보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명예, 권력, 성공, 건강이라는 보물을 찾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양심을 팔기도 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친구를 배신하기도 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사람’입니다. 지금 절망하고 있는 사람,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 기뻐한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밤을 새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진 것을 팔아 이런 보물을 찾는 사람, 이런 보물과 함께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공을 높이 쏘아 올리면 좋겠습니다. 나눔과 희생 그리고 겸손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보물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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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17-30: 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참으로 부자가 되려면 신앙의 선물을 통하여 부르시는 영광 안에서 추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솔로몬은 지혜를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낫게 여기고 주님께 그것을 청한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지혜 7,8.11)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지혜 7,7)

오늘 복음에서도 참된 부는 세상의 재물을 포기할 줄 알고 끊어버릴 마음을 갖는 데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복음을 보면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주제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끊어버림이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첫째 부분에서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처음과 마지막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20절), 예수께서도 감탄하시고 대견해하셨다(21절).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하였을 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이 극적인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재산 때문에 나오는 위험이다. 청년은 용기 있게 결심하고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참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런 까닭에 처음에 당신이 선하다고 하는 것(18절)을 거절하시며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유일한 선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선(善)들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은 제1계명에 의해 생기를 얻고 조명되지 않으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실질적으로 버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오는 결과이지 다른 요구가 아니다.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보다는 자기의 재산에 대한 집착이 컸으므로 하느님이신 주님을 따를 수 없었다.

둘째 장면은 예수께서 재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시대의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에 하시는 권고의 말씀이다.(23-27절 참조)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24절) 하신다. 두 번째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상징적인 표현을 덧붙이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이 표현은 너무 강해서 좀 부드럽게 해석하려고 하지만, “눈 속에 들보”(마태 7,3)라는 표현을 생각한다면, 청년처럼 재산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26절) 수군거린다.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는데, 장애물로 말씀하셨고, 또 그 청년이 구원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낙담한 사람처럼 떠나갔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이 어렵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이 그 은총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자 청년과 정반대되는 태도를 보인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그 보상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결실이며 그 은총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29-30절) 여기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끊어버리는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끊어버리는 행위가 그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29절) 끊어버리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가치를 소유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자신을 더욱 충만한 존재가 되게 한다. 그 보상은 보편적 사랑과 형제애를 체험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은(30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의 풍요함으로 자신이 부유해짐을 느낄 때 그것을 완성해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박해도 받게 된다고 하신다.

그 박해까지도 믿는 이에게는 영광과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박해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 믿음에 대한 보상의 한 형태라고 한다. 히브리서는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들으라고 권고한다.(참조: 히브 4,12) 하느님 나라를 위해 또 복음을 위해 집착을 끊어버리고 있는지 볼 수 있게끔 그 말씀을 통하여 철저히 자신이 드러나도록 내맡기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재물이나 세상의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오늘의 말씀에 따라, 참된 부, 참된 지혜를 차지할 수 있는 삶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 더욱 풍요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더 일치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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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아주 오래전에 본당에서 주일 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의 일이 생각납니다. 초등부 고학년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들어오라고 하시는 분이시라고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도 받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하늘 나라를 그려 보라고 하였더니 꽤 많은 아이가 열린 문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마치 제가 교리 교육에 성공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마르 10,23)라고 하십니다. 자주 눈에 띄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예수님의 선포에 들어 있는 한 측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열려 있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지만, 모든 이가 그 초대에 응답하지는 못합니다. 문이 열려 있어도, 응답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있습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 나라보다 더 앞세워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왕홀과 왕좌나 재산보다 낫게 여겼듯이,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려면 다른 모든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포기하여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우리의 집착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서 멈추게 하고, 슬퍼하며 떠나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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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0-27)

1) 24절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라는 말씀은, 27절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이라는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힘으로(권한으로) 하느님 나라에 데리고 들어가려고… 왜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 되었을까?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에 연결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3-24)

하느님께서 쫓아내셨으니, 하느님께서 다시 들어오라고 허락하셔야만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에덴동산에(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27절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사람의 힘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예수님을 통하면, 즉 예수님을 따라가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권한을, 즉 사람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5,27)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2) 21절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나를 따라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일’은 예수님을 잘 따르기 위한 준비일 뿐이고, 그 일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고 해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면서 떠나버렸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는데, 그 사람은 많은 재물을 버릴 수도 없었고,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도 없어서 슬퍼한 것입니다. <자신의 ‘딜레마’ 상황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슬퍼했습니다.>

21절의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생활과 믿음과 희망과 지향을 인정하셨다는 뜻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인정하시면서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부족한 것 하나’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 ‘부족한 것 하나’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3)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부족한 점이다.”가 일반적인 해석인데, 관점을 조금 바꿔서 다시 생각하면, 그에게 부족한 점은 바로 ‘간절함’입니다. 얻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냥 바라는 것’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좋다. 그것 하나를 얻을 수만 있다면.”이라는 ‘간절함’이 있다면, ‘버림’과 ‘비움’을 실천하는 것은 금방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 영원한 생명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얻지 못해도 좋고, 얻으면 더 좋고.”, 또는 “얻으면 좋겠지만, 얻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 같은 마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진심으로 간절하게’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기도’를 바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간절함 없이’ 그냥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 될 뿐이고, 시간낭비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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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님]

<재물의 소유권과 사용권>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계명을 준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부자가 그러한 계명들을 어린 시절부터 모두 잘 지켜왔다고 답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마치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 당신의 사도들을 부르시듯 그 부자를 당신의 제자가 되도록 특별히 초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그 부자는 결국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 부자에게는 하느님 아닌 재물이 자기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자비로운 초대에 응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으니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무엇도 남김없이 온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떠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고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행할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소유하는 것은 존중되어야 할 개인의 권리입니다. 교회 가르침도 개인의 재산 소유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재산의 사용권은 하느님 뜻, 곧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행사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현세적인 축복으로 내려주신 물질적인 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나누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재물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다가설 수 없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많이 소유할수록 너무나 쉽게 하느님 뜻에서 벗어나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살아가고, 결국에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마치 재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이는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의 여정에서 교회 공동체가 길을 잃지 않고 자유롭고 활기차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선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세를 늘 지녀야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삶에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재물이 결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늘 무엇인가에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에 묻혀 지내다 보면 우리 위에 맑고 시원스런 하늘이 있다는 평범한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잠시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이 가을의 넓고 드높은 하늘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지녀봅시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의 삶은 무엇을 향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예수님과 함께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 하나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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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강진 스테파노 신부님]

<가진 것>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제 겨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한 아이가 아장아장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곁에 있던 엄마가 아이에게 “손에 들고 있는 사탕을 신부님께 선물로 드려.”라고 하였습니다. 순간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저 아이에게 사탕은 가진 것 전부일 텐데.’ 그 아이는 선뜻 사탕을 내밀었습니다.

지금도 사제관의 책장 위에는 그 아이가 준 사탕이 있습니다. 그 사탕을 볼 때마다 생각하게 합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주저 없이 누군가에게 내어놓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의 우리처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예수님께 다가갔을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성실히 살아온 사람이었으며 무엇이 부족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합니까?” 그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는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만큼은 내어놓을 수 없다고 여겼던 바로 그것을 그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막상 그것은 바로 그에게 있어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전부였습니다. 가진 것을 내어놓는다면, 지금껏 쌓아온 나의 노력들이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만 맡기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예수님을,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고 싶었던 한 아이는 신학교에 갔고 마침내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이후에도 사제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압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사제가 될 수 없었고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주님을 따른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게 너무나 많다는 것을.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본기도)

그가 가진 것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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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항래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나를 따라라>

예수님과 만난 어떤 사람을 그려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그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스럽게 바라보기까지 하셨습니다. 참 행복하고 복된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복되고 행복한 그 사람은 불행해졌습니다. 울상이 되었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 이유를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을 누릴 기회를 얻었던 그 사람은 많은 재물 때문에 그 기회를 날립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복음서는 그저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할 뿐입니다.

상상해 봅니다. ‘어떤 사람’인 그가 재물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그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 있게 따랐다면 그의 면면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어떤 사람’에서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해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큰 모범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재물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나의 몫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는다면, 예수님 역시도 나를 택하지 않으십니다. 울상이 되어서 슬퍼하며 떠나갔던 그 어떤 사람. 그 많은 재물을 포기하지 못해 그리스도를 택하지 못했던 그 어떤 사람. 예수님은 그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왜 어려운가. 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나 스스로 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그리스도보다, 하느님보다 중요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하느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백배나 더 돌려받을 것이라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까지도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전부 떠나가고 없어질 것을 선택하기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그분을 향해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지나가는 것이 아닌 영원한 것.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따라라.” 지나가는 것을 택할지 영원한 것을 택할지 나의 선택과 의지를 물으십니다. 예수님께 나의 선택을 내 온 삶 으로 보여드리고 알려드릴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 되길 함께 기도하고 응원합니다.

◾ 구원을 받다(소테나이 σωθῆναι)
오늘 복음은 구원을 받는 것과 현실적 재물을 내려놓는 것을 같은 맥락에서 서술합니다. 구원받는 것은 저 세상을 향한 사변적 상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 안에서 함께 나누고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며 이웃에게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구원받는 이들의 참모습입니다.(시편 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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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친구가 많습니까? 국어사전에서 친구를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의라고 하면 친구는 정말로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위 ‘찐친’이라고 말하는 진짜 친구가 많을까요? 진짜 친구를 미국 인디언은 ‘친구란 나의 짐을 자신의 등에 진 자’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진 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고, 짐을 진 그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그 짐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랑하고 져주려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 코가 석 자’라고 자기가 진 짐이 가장 무겁고 버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 그런 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름의 무겁고 힘든 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짐만 힘들다고 외치면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나도 힘들다’면서 외면합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남의 짐에 관심갖고, 그 짐을 대신 들어주려는 사람 곁에는 역시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저렇게 힘들어도 내 짐을 져주려고 하다니, 나도 도와야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찐친이 없는 이유는 ‘나’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 이기심이 찐친을 가까이 만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하는 사람은 찐친의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찐친으로 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부자가 달려옵니다. 그리고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르지요. 달려왔다는 것은 자신감을 뜻하고,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 외에 ‘선하신’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높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구약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고, 그는 어려서부터 그 모든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왜 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칭찬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이에 그 부자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돌아갑니다.

주님과 찐친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의 찐친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남의 짐에 관심갖고, 그 짐을 대신 들어주려는 사랑의 삶 안에서 주님과 찐친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주님과 찐친이 아니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나의 욕심을 채워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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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달랜트를 잘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달랜트 중에서 재화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선하신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며 십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재물이 장애물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제대로 사용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따랐는데 이 청년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 구원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채워서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모두를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물질에 끌려다니는 삶을 포기하지 못하면 근심할 수밖에 없고 또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고 선언하셨습니다.

한국에는 ‘졸부’가 많다고 합니다. 졸지에 부자 된 사람들입니다.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가 보상을 받은 사람, 복권에 당첨되어 그야말로 횡재한 사람들이 있는데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70%이상이 실패한 삶을 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일확천금이 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화를 몰고 왔습니다. 가정파탄이 일어나고 하나같이 끝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없던 돈이 생겼으면 더 행복해야 하는데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것은 재물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과 나누지 않고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몸도 마음도 망가진 경우가 허다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으로 물질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잠시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물질에 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줍니다. 많은 사람이 ‘사람을 위해 돈이 있다고 말하지만, 돈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물질적으로 갖지 못한 것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고향에는 두 개의 큰 호수가 있는데 북쪽에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남쪽에는 사해가 있습니다. 두 호수는 요르단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계속 요르단강 쪽으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따라서 물이 항상 맑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사해는 계속 받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나누어 줄 때 새로운 축복이 밀려들어 오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해 물이 핏빛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비롭게도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주는 만큼 부유해집니다. 그러나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똥은 뿌려지면 거름이 되지만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은 쌓아 놓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먼저 많이 받고 그다음 주겠다고 생각하면 평생 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아홉을 가지고 있어도 부족하고, 열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8)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이 세상에 부자로 사는 사람에게 명령하시오. 교만해지지 말며 믿을 수 없는 부귀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이르시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셔서 즐기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1티모 6,7-10.17)라고 말합니다.

돈으로 천국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은총을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잘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르 10,21) 하신 말씀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당 ‘아나빔’ 통이 끊임없이 알맞게 채워지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잡아두는 것, 우리의 집착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명예, 취미나 활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주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부족한 한 가지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현명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부를 소유하는 자가 되지 말고 관리하는 사람이 되시고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시는 현명한 부자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현명한 부자가 받게 되는 상급입니다. 재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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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 없이 나 없으니>

마르코 10,17-30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따름과 보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너 없이 나 없으니>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너 없이
나 없으니

너를 보아야
나를 볼 수 있고

너를 보지 않으면
나마저 볼 수 없지

너 없이
나 없으니

너 없이 나 홀로
있어도 없고

너와 더불어 나
없어도 있지

너 없이
나 없으니

너 없는 나를
움켜쥠은 죽임이고

너 있도록 나를
내어줌은 살림이지

너 없이
나 없으니

내게서 너를 없애면
나는 스르르 죽고

너에게 나를 나누면
나는 비로소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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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먼저 ‘참된 지혜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진정 지혜를 원하고 있는가, 지혜를 찾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졌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지혜 7,7)

여기에서, 현인이 ‘기도하자’, 혹은 ‘간청을 올리자’ ‘예지’가 오고, ‘지혜의 영’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을 바라고 찾을 때, “주어졌고”와 “왔습니다.” 그러니 지혜는 “주어진 것”이며, “오신” 것입니다. 곧 ‘선사된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서>의 이 말씀은 <열왕기 상권> 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 매우 흡사합니다. 주님께서 기브온에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하고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지혜는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할 때, 곧 사랑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을 실행할 때마다’, ‘사랑을 지신을 비우고 헌신을 실천할 때마다’ ‘그분에게서 부어져 조금씩 조금씩 몸에 익혀지는 삶의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선물’로 주어진 ‘지혜’는 시편작가에 따르면, “꿀보다도 단”(시 119,103) 맛이지만, 동시에 히브리서 작가에 따르면, ‘살아있고 힘이 있는’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 안에서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작가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이는 ‘말씀’이 참됨을 가려내는 ‘지혜의 힘이요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 눈앞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13)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청년과 제자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재물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한 ‘부자인 어떤 사람’과, 이미 재물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도,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도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말씀’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라는 말씀과 제자들에게 하신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을 가리고 있던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버리고, 그들의 마음 속 생각과 속셈을 들통내버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따를 것인가?’라는 결단의 문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라는 부자청년의 질문과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마르 10,26)라는 제자들의 질문 사이에는 애초부터 서로 다른 마음의 안배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부자청년의 질문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제자들의 질문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고, ‘제자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집과 형제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이 아직 영생과 구원을 얻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인 어떤 사람’에게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라고 하시며,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부자청년은 비록 율법을 지켰다 하나, 그것은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을 냉대하고 무관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기 지킴이 아니라, 자기 버림과 자기 나눔을 통해서 ‘타인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곧 가진 것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곧 ‘가난한 이들과 깊은 연대를 맺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곧 ‘사랑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힘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비워 드려 그 지혜가 우리 살 속으로 파고들도록, 말씀의 영의 권능에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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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는 저는
제 뜻으로 가득 차 있는 부자입니다.
저를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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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나기정 다니엘 신부님]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것이다.”(마르 10,21)

복음 말씀은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다. 어떤 이에게는 ‘삶의 목적’이 되고 생명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재물이다. 그런 재물을 많이 소유한 청년이 예수님을 만났다. 스승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지만, 그는 머뭇거리다 포기한다. 무엇이 그를 돌아서게 했을까?

스승님의 말씀이었다.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오라는 말씀 때문이었다. 단지 아까워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랬더라면 애츠부터 제자가 될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청년을 머못거리게 한 것은 재물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재물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그런 재물’을 없앤 뒤에 오라고 하신다. 그는 실천할 수 없었다. 재물의 든든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재물의 힘을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재물의 힘에 굴복하기에 그렇다. 그런 이들은 재산이 넘쳐나도 부족함을 떨치지 못한다. 물질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구원은 만촉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추어진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돈이 최고다.”, “재물이 최고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힘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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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소유 때문에 담을 쌓고, 마음까지 울타리를 치고 닫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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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롭고 영원한, 자유롭고 행복한 삶>
-기도하라, 공부하라, 따라라-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시편90,14)

화답송 후렴이 진리입니다. 주님의 자애가 우리를 채울 때 참 기쁨과 행복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어지럽고 험한 세상일수록 추구할 바 지혜로운 삶, 영원한 삶, 행복한 삶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을 찾는 고귀한 인간 품위의 거룩한 삶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의 고백이 더욱 감동을 줍니다.

“세계 곳곳에 전쟁으로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가는데 무슨 잔치. 수상의 기쁨은 그냥 조용히 간직하겠다.”

말그대로 고결한 인간 품위와 예의의 반영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참으로 지혜의 샘이신, 영원한 생명이신, 참행복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항구히 사랑으로 섬길 때 비로소 지혜롭고, 영원하고, 행복한 삶입니다. 9월부터 10월 지금까지 저를 참으로 행복하게 한 짧은 자작 두 편의 시를 또 나눕니다. 참 많이 나눴지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늘 꽃같은 삶, 주님앞에 서듯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 자유로운 삶,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 저는 참으로 지혜롭고 영원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비결을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첫째, “기도하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람이라해서 다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해서 사람입니다. 하늘의 주님께 기도하라고 직립인간直立人間에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어제 새로 뽑힌 추기경들에 대한 교황님의 환영사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을 특징짓는 세 자세를 강조했는데 그대로 기도의 자세입니다.

“눈은 들어올리고, 손은 모으고, 발은 벗은”(eyes raised, hands joined, feet bare), 제가 바치는 만세칠창과 흡사한 자세입니다.

왜 기도하느냐? 기도할 때 모든 선물을 하느님으로부터 받기 때문입니다. 선물중의 참 좋은 선물이 지혜입니다. 주님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가 바로 지혜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밝힙니다. 솔로몬의 고백입니다만 정말 공감이 가고 나의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했다.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고,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못한다. 온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지혜 예찬입니다. 이런 지혜는 그대로 주님의 현존입니다. 지혜를 참으로 체험한 자의 고백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추구할 바 이런 지혜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이런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이런 지혜입니다.

둘째, “공부하라!”입니다.
주님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평생공부가 주님 공부요 구체적으로 하느님 말씀공부입니다. 어제 복음의 요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참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지혜입니다.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요 영이요 주님의 현존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이 더욱 하느님 말씀 공부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을 북돋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듯 지혜를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사랑하여 지킬수록 삶은 더욱 진실해지고 순수해지고 단순해지고 투명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정화되고 성화되며 위로와 치유도 받습니다.

셋째, “따라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가 참으로 우리에게는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 좋은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는데 여전히 영원한 생명에 목말라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참으로 적절한 극단적 처방을 내리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아마도 이 시험을 통과할 부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부자는 역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났다 합니다.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니라 많은 재물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무거운 삶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거처럼 어렵다’ 탄식하듯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물었고 주님은 부자에게도 구원의 은총이 가능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계명을 지켜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과 지닌 것을 나누고 섬기며 주님을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부자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관대해져 나눔과 섬김으로 주님을 따를 때 구원입니다. 사실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고 사랑이 많아 나누기를 좋아하는 부자들도 있기 마련이며 이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두를 버리고 따른 이에게 축복을 말씀하십니다만 모두가 그렇게 불림받은 것은 아닙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정도만큼 사랑과 지혜로 나눔과 섬김의 삶을 묵묵히 실천하면서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우리 삶은 안주의 삶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여정의 삶입니다. 나눔과 섬김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생각없이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욕심을 버리고 사랑으로 나누고 섬기면서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니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나눔, 섬김, 따름, 비움”의 삶은 얼마나 멋진 삶인지요! 이런 삶이야 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요, 이미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 내적 부요의 삶, 영원한 삶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지혜롭게, 자유롭게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버리고, 나누고, 섬기고, 비우고, 주님을 따르면서,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중 일치하는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자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라, 공부하라, 따라라”는 주님의 당부를 힘껏, 한결같이 지키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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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혜란 행복과 불행한 관한 지식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있었다.”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중 28주일은 지혜로운 사람이 주제인데 지혜란 행복과 불행에 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행불행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먼저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자신을 불행케 하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불행케 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돈과 재물을 예로 들고, 어리석은 사람의 대표로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부자를 예로 듭니다.

부자는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웃을 위해 자기 것을 나눠주지는 못합니다.

사람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사랑보다 소유에 더 집착합니다. 사람과 사랑보다 재물과 소유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의 한 원인일 뿐이고, 가장 크고 결정적인 불행의 원인은 아닙니다.

재물 때문에 사람과 사랑을 놓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한 것 곧 하느님과 영원을 놓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물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람을 잃고 사랑을 잃는 것도 큰 어리석음이고 큰 불행이지만 사람보다 하느님을 잃고, 그래서 자기의 영원을 잃는 것보다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부자의 행동을 한번 봅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왔고 무릎을 꿇었으며 질문을 합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해 그렇게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달려와 무릎까지 꿇으며 알고 싶어 했던 비결을 주님께서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자기 소유를 다 포기하라는 것이었고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추측하건대 자기 소유를 자식에게 주라고 했으면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이 아닌 남에게 나눠주라고 했으니 포기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주님 추종(Sequela Christi)’의 실패입니다.

이 주님 추종은 이 세상에서 자기 포기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겁니다.

부자는 두 가지 다 ‘이 세상의 자기 포기’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를 다 실패한 것입니다. 그는 재물을 포기하지 못한 것뿐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생각한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히 소유하면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나의 건강 하나도 잃지 않고, 지금의 나의 재산 하나도 잃지 않고, 지금의 부모 형제 자녀 하나도 잃지 않고 진시황처럼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삼척동자도 아는 이것을 부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도 이런 부자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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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마르10,21ㄴ)

<정말로 원하는가?>

오늘 복음(마르10,17-30)은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에 대한 말씀과 ‘따름과 보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0,17) 예수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해 지켜야 할 이웃 사랑의 계명들을 열거해 주시자,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러한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10,20)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0,21)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이 모습을 보면 그는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보다는 재물을 더 원했고, 더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나는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가?’
‘나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가?’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며,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비워져야 하고, 이 비움을 위해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지혜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지혜의 영을 청합시다!
지혜의 영인 성령을 청합시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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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 27)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해야 할 것을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까지 차오른
욕심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욕심은 무겁고
욕심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욕심으로는
구원의 복음을
결코 담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찢는
우리의
욕심입니다.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주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욕심이 더 이상
우리의 삶까지
조정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욕심은
사람을
버리지만

구원은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욕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느님께서는
바늘귀로
빠져나가듯이
점점
작아지십니다.

욕심의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마음을 짓밟는
욕심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재물의 집착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구원의
여정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또한 군인 주일을
통하여 이 땅을
지키는 국군
장병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관심과 나눔의
따뜻한
주일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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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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