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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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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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광야는 풀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입니다.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땅입니다. 그렇지만 광야는 박해받거나 쫓기는 이들에게 피신처가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광야는 어디입니까?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세상의 편함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어느 깊은 산속에서 홀로 자신을 성찰한다면 그곳이 광야입니다.
요나 예언자에게는 물고기 배 속이 광야였습니다.성전에서 홀로 기도한다면, 성전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수련하시던 중에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아마도 사탄은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리신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유혹했을 것입니다(마태 4,1-3 참조).
우리는 능력이나 시간이 있어야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나의 배고픔부터 해결하겠다는 유혹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잘 극복하시고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철저하게 광야를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번 사순 시기 동안 광야를 체험하며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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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지나고 보니 “사탄의 유혹이 아니였나?”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난 그 유혹에 넘어갔는지, 반대로 유혹에서 벗어났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유혹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에서 나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하지 못하였다면 어떤 노력을 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할 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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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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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의 무대는 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머무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광야를 향하여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 속에서 광야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십 년간의 유랑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광야 여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배고프고 목마르다고 투정을 부렸으며, 하느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다가도 하느님께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였던 ‘노예 집단’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들은 광야라는 그 척박한 공간에서 조금씩 성숙합니다.
광야는 그런 의미에서 성장과 성숙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노예 신분이었어도 모든 것이 보장되고 안정적인 이집트에서는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기는 아니어도 빵이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익숙하고 안정된 이집트에서 벗어났을 때,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 백성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광야는 편안함보다 불편함을, 생명보다 죽음을, 희망보다 절망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불편함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절망 가득한 신음 때문에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은 신앙의 성숙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이 피곤하고 피하고 싶은 시간이 아닌, 머물러야 하는 은총의 시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70
2월18일[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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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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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HoCn_N_Bm8
[청주교구 박창환 가밀로 신부님 집전(성모 꽃마을호스피스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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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갑시다!>
언젠가 성지 순례 때 잠시나마 광야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즉시 다가온 느낌은 황량함이요 삭막함이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머무를 곳도 쉬어갈 곳도 없는 불모지, 뱀과 전갈만이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의 땅이 광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시시각각으로 기후가 변하는 곳, 때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나 무지막지한 광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 우리의 미성숙, 거짓신앙, 값싼 신앙, 유아기적 신앙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 우리 각자의 맨얼굴과 인간적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 생각과 마음이 단순화되는 장소, 하느님께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때로는 고통의 장소, 때로는 은총의 장소인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그릇된 요소들을 정화시켜나갔습니다.
우상숭배에서 유일신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신앙에서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변모시켜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에 입국하기에 합당한 신앙공동체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원치도 않는 쓰디쓴 광야를 체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중에 하나가 ‘광야’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십니다. 또한 광야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의 어둡고 부끄러운 내면을 직시하게 하십니다. 더불어 광야 체험을 통해 우리의 뾰쪽뾰쪽 모난 부분은 다듬도록 인도하십니다.
깊은 고독과 단절 속에 걸어온 광야 체험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동시에 거듭 날 수 있었던 은혜로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본격적인 공생활의 시작 전 예수님의 40일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그분께서는 유다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장 40일 동안이나 유다 광야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단둘이 머물면서 그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절히 찾으셨습니다.
그냥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분께서는 정답을 찾으셨고, 기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내적 광야, 텅빈 공간, 마음의 여유를 마련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들어올 수 있지,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감실, 내 안의 성전 하나를 건설해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우리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히 헤아려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놓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우리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이 되신 스마트폰, SNS, 신용카드, 술, 담배, 깊이 빠져버린 취미활동… 과감히 우리 손에서 한번 내려놓고,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머물수 있는 내 안의 성전으로 자주 들어가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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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6htCQESi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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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란 지옥의 원인이 나 자신임을 확실히 아는 것>
오늘 복음은 왜 복음을 믿기 위해 회개가 필요한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유혹은 한 순간 받는 무엇이 아니라 매 순간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유혹은 매 순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것이 유혹이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유혹을 이기셨더니 세상을 구원하는 자가 되시고 결국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따르라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은 나 자신을 그것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회개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의 결단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랑에게 지옥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쓴 『닫힌 문』(No Exit)이란 연극에서 왜 타인이 지옥이 되는지 설명합니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지옥의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 죽어서 이 방으로 들어왔지만,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고 인정받으려 하고 사랑을 갈망하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공간이 됩니다. 하지만 혼자 외롭게 되는 게 더 큰 고통이라 여기기에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삽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세상이 지옥이라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지옥이 타인의 탓일까요? 타인에게 집착하는 자기 마음 탓이 아닐까요?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느님이고 나는 그 사랑에 내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러면 부활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죽음의 보상을 줄 신의 존재를 거부할 때 의미를 잃습니다.
인도 영화 ‘삼사라’에서 사람은 누구나 물 한 방울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마르지 않게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도를 닦는 것임을 말합니다. 결론은 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바다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에 투자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마치 사막의 펌프처럼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그 한 방울의 물을 지키려는 마음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펌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된 주유소가 있고 그곳엔 물 펌프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목이 말라 실신할 지경에 이른 나그네가 주유소의 물 펌프를 발견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엔 바가지의 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 펌프 밑에는 엄청나게 시원한 지하수가 있어요. 누구든지 이 펌프 물로 갈증을 해소하세요. 명심하세요. 펌프 앞에 놓인 바가지의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이것은 ‘마중물’. 잊지 마세요. 다음 분을 위해서 ‘마중물’을 꼭 채워 놓고 가세요!”
이 한 방울의 물을 바치는 게 에덴동산의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뱀입니다. 지옥은 이 뱀, 곧 나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에게서 탈출시키려 합니다. 모세가 오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파라오 때문에 지옥을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가 곧 지옥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모세를 믿게 됩니다. 가나안 땅, 곧 하느님 나라는 자기 안의 파라오를 배신함으로써 얻는 에너지를 갈아 넣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일이고 생명은 곧 피입니다. 돈도 피이고 음식도 피이며 명예도 피입니다. 이 피를 갈아 넣지 않으면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회개는 지혜의 빛이 요구되고 그 지혜의 빛으로 사랑의 삶을 살겠다는 착한 뜻을 만들고 착한 뜻은 그것과 반대되는 나의 뜻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뜻에서 휙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을 향하게 될 때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나를 가만히 두면 지옥에 머물게 되어 나 자신을 사랑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마르지 않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복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이 지옥의 땅이고 복음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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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1982년 서울 가톨릭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동창 중에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이 있습니다. 두 신부님 모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분입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지난 5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전임 신부님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전에 7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신부님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저와 초등학교 동창이고, 같은 본당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함께 했기에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죽마고우입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신학생들을 위한 영신수련 피정을 함께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영적으로 훌륭하십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사목의 경험이 풍부하십니다. 한분도 아니고 전임신부님 두 분이 모두 저와 동창신부님이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부족하기에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성전 신축이라는 씨를 뿌렸습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깊은 영성으로 물을 주었습니다. 저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표징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표징을 통해서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로도, 불로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곳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할 수 있는 표징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댈러스 교구로부터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할 수 있다는 공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로부터 댈러스 한인 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하라는 파견을 받았습니다. 저의 표징은 서울대교구의 파견과 댈러스 교구의 임명이라는 공문입니다. 공적인 표징은 그렇지만 제게는 또 다른 표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예수님처럼 착한목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또 다른 표징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바른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바른 양심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큰 덕목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부끄러움을 몰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던 자캐오는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식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원리와 기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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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12-15: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사순절은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더 깊이 느끼며 파스카의 빛을 향한 광야의 고달픈 길을 가는 여정이다. 이 시기는 참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광야의 시련, 하느님께 대한 체험, 마음의 정화 등이 오늘의 주제이다. 독서에서는 노아의 홍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아와 그 아들들은 홍수의 물로 씻긴 새로운 인류를 의미하며, 하느님께서는 무지개(창세 9,13)라는 평화의 징표를 통해 이 인류에게 생명과 사랑을 영원히 베풀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창세 9,14-15) 베드로 사도는 홍수가 많은 사람에게 멸망의 원인이 되었지만, 비록 소수라 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1베드 3,21) 세례의 물을 통하여 묵은 인간을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이며 우리의 파스카이다. 사순절은 세례를 통해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충실성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함을 재확인하고 노력하는 시기이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사탄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 동시에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따름으로써 내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광야에서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12-13절)와 첫 번째 복음의 선포 이야기(14-15절)이다. 이 둘을 연결하면 사순절의 총체적인 의미가 나올 수 있다. 다른 복음에서와같이 마르코 복음에도 예수님의 유혹이 나오지만, 다른 복음과는 달리 간결하게 표현하면서 풍부하고도 효과적인 면이 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유혹은 예수께서 광야에 있는 사십일 동안 계속된 것같이 보인다. 이것은 그 유혹이 극복하기가 힘들고 피곤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악의 세력과의 격렬한 싸움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에 걸쳐 악의 세력과 싸우시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사탄을 거슬러 하는 싸움은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께서 당하신 유혹이 어떤 것인지는 전해주고 있진 않다. 그 유혹은 십자가를 통해야 하는 어렵고도 험난한 메시아사상과는 반대로 쉽고 승리감에 넘치는 메시아 상으로 바꾸려는 술책이다. 이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후에 사탄이라고 크게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3) 하신 것과 같다. 이 유혹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될 것이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당신 자신을 맡김으로써 극복하실 것이다. 이러한 유혹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올 유혹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곯아떨어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 사순시기에도 우리에게 하실 것이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
오늘 복음에서 광야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광야는 무한한 고독의 상징처럼 다가오지만, 광야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이루게 하는 곳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모든 자신감을 털어버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신의 무능력, 나약성, 무력감을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되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십일 동안 광야에 머무시는 동안에 하느님과 더욱더 깊은 만남을 체험하신다. 광야에서 예수께서는 사탄의 정면 공격을 물리칠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더욱더 강한 현존도 체험하신다. 이 광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보내신 분이 바로 성령이심을 마르코 복음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12절) 이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셨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상으로 거룩한 숫자이며 광야의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이 사십일이라는 기간의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존재가 무엇임을 깊이 깨달을 때야 하느님께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가졌던 그 자세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느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새롭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침묵의 공간을 즉 광야를 만드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 속에서 왜곡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쳐 이기심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하고 평화를 주시며 인간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다. 천사들의 시중(13절)은 바로 이 승리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변화도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광야 체험을 하신 후에 제일 먼저 선포하시는 내용이 사탄과의 싸움을 통해 당신 안에 실현하신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사순절이 요구하는 회개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탄을 몰아내고 하느님을 우리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길고도 험한 광야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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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순 제1주일에 이 유혹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아마도 사순 시기에 새롭게 마음을 잡고 회개의 삶을 살아 보려는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탄의 유혹을 잘 이겨 내도록 도우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우리를 죄악에 떨어뜨리려는 사탄의 유혹은 평생 계속될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유혹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은 유혹을 받는 것과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유혹을 느끼는 것은 우리 탓이 아니기에, 거기에 동조하지만 않는다면 어떠한 책임도 없습니다. 오히려 유혹을 뿌리치고 이겨 낸다면 더욱 풍성한 은총을 받고 좀 더 성숙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유혹을 이겨 내는 몇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유혹을 받을 때, 곧바로 하느님께 의탁하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떠올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큰 힘을 줍니다. 기도에 지치지 않는다면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그 유혹을 영성 지도 신부나 동반자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 밖으로 언급된 유혹은 이미 절반은 정복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유혹이 계속 괴롭힌다면, 마지막 남은 방법은 저항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끝까지 끈기 있게 저항한다면, 사실 사탄은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사탄은 유혹할 뿐이지 실제로 동조하거나 죄를 짓는 것은 ‘나’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지향과 결심을 가지고 사순 시기를 시작한 우리에게 많은 유혹이 덮쳐 올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은총과 성인이 가르쳐 주신 방법들로 슬기롭게 이겨 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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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